1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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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태조대에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방석과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일으킨 반란. 왕세자 이방석과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방번 등이 숙청되었다. 그로부터 2달여 뒤 태조는 차남 이방과에게 양위했다.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1398) 8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 태조실록에 기록된 공식 사건 개요이다. 물론 진실은... 이하 내용 참조.
2. 여타 명칭[편집]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定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4]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세자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5]
3. 사건의 성격[편집]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의붓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숙부 이방원을 지지했다.[6]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뿐이다.[7]
얄궂은 점은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 때 이방원이 손수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피신시켰는데, 불과 10년 후 이복동생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게 됐다는 점이다. 계모인 신덕왕후가 1396년 병으로 먼저 죽지 않았다면 이 때 같이 살해될 수도 있었다.
4. 발생 원인[편집]
4.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편집]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이미 50대 후반이었고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생각해야 될 나이였다. 애초에 태조의 나이도 나이였지만 장남인 이방우부터 시작해 한씨 아래의 아이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던 만큼, 누가 후계자가 되어도 이상할 건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이방우의 나이를 고려하면 장남이 나오고 38세가 되어서야 후계자 선정을 시작한 꼴.
사가의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한씨 소생 이방우가 세자가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는 공양왕 시기부터 활동이 크게 줄어든다. 진안대군파에서 1631년 이지란의 후손들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청해백집을 인용하고 정조가 공인한 고려 왕조에 충절을 보이다가 폭음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지만, 고려사와 실록 같은 정사에선 전혀 그런 흔적이 없고 조선 개국후에도 태조의 맏이로서 움직였다. 실제론 당대 평판이 매우 나빴던 지윤의 딸과 결혼하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여 조선 건국에 저항한 고려의 보수파 핵심과 인척 관계로 엮인 그의 배경[13] , 신돈의 후손이 된 창왕의 입조를 요청하는 대명 사신단의 부사로 활동한 경력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아내와 사위 문제, 설상가상으로 이방우의 서자 이덕근의 아내, 즉 이방우의 며느리는 이방번의 장인이기도 한 정양군 왕우의 딸이다. 설사 한씨가 살아서 왕비가 되었어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아무튼 이방우는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대신 이복근은 1차 왕자의 난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넷째 숙부인 이방원과 이숙번, 하륜 등 이방원의 부하들을 지지했다.[14]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었다.
그리고 세자는 가장 막내인 이방석으로 결정된다.
4.1.1. 왜 방석인가?[편집]
조선 왕조에서 처음 맞이한 왕비에서 나온 아들이 방석인데, 이는 고려 시대 얻은 부인으로부터 얻은 아들은 조선 왕조에서 적합성을 두고 논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조선왕조실록에 그런 내용이 없는 것을 보면 그런 논란 자체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보다는, 신덕왕후의 영향력이 태조에게 미쳤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4.1.1.1. 문제 없는 계승이다[편집]
- 장남 방우.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이성계가 죽이는 공양왕의 형제 정양군 왕우의 딸을 며느리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건 야사에 불과하며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고 맏이로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하면서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16]
- 3남 방의.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 최씨로 최영과 인척관계에 있다.
- 4남 방간.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다.
- 신덕왕후 소생 7남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사위로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한 '향처' 한씨는 건국 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내려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왕비로 대우받지는 못했다. 건국 이전에 죽은 그녀의 권위가 새 왕조의 유일한,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삼년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왕조의 초대 왕비로서 그 권위가 공인되어 있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과 왕비 사이에서 난 적자가 세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적장자'라고 할 수 있는 신덕왕후의 맏아들 이방번은 왜 세자가 되지 못했는가? 방번은 장인이 정양군 왕우라서 세자가 될 수 없었다. 이 인물은 태조가 죽인 공양왕의 형이자 신료들이 수시로 제거를 노리던 옛 고려 왕족이었다. 그러면 이방번을 이혼시키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단지 이방석을 세자로 삼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리 간단히 이혼시키기는 어려웠던 것이, 정양군 왕우는 태조가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유력 왕씨 130여 명을 제거하는 가운데서도 중앙에 남겨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밀접하게 이어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8]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방석 뿐이었다.
창업 군주가 왕조 국가에서 얼마나 특별한 위상을 가지는지 생각해 보자. 신덕왕후 강씨는 자연인 이성계의 후처일지언정 조선왕조의 첫 왕비였다. 이 무게감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 때문에 태종 이방원은 치세 내내 조선왕조의 첫 왕비 신덕왕후와 첫 대비 정안왕후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한편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이방석을 제거한 이방원은 이 때문에 정종이 된 친형 이방과와 형수 정안왕후의 양자가 되는 무리수를 감내해야 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는 즉위 명분을 이전의 적장자 계승에서 택현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치로 후궁 출신인 성비 원씨를 모친, 즉, 이성계의 부인으로 대우하며 극진히 모심으로서 조선의 첫 대비라는 정안왕후의 위상을 무너뜨렸다. 신덕왕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종은 자신의 친모인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증해 신덕왕후를 대체할 권위의 매개체로 삼았다. 신덕왕후의 권위와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도성 안에 그녀의 능을 조성한 태조의 뜻을 알아채고[19] 신덕왕후의 묘와 석물을 들어내 버리고, 제사마저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치르다가 태조 사후에는 아예 제대로 된 제사조차 지내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도 신덕왕후를 폄하하는 발언을 누차 함으로서 그녀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렸다. [20]
정말로 처음부터 자격 없는 어린아이를 억지로 세자에 앉힌 것이 명분도 없고 납득하기 힘든 일로 받아들여졌다면 애초부터 형과 형수의 아들로 즉위할 필요가 없었다. 유교에서 택현(擇賢)[21][22] 은 요순 이래 적장자 계승보다 한 수 위의 강력한 명분이다. 또한 여말선초는 아직 적장자 계승이 사회 윤리로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다.[23][24]
한편 '택현'이라는 정성적인 기준이 왕위 계승의 명분이면 매번 왕실에 분란이 일어날텐데 그건 말이 되는가? 이를 증명하듯 조선왕조를 통틀어 적장자 출신 왕은 단 7명 뿐이다. 그리고 한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사실이지만 세자의 교육과정은 다른 왕자들의 그것에 비해 매우 혹독하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예를 생각해보자. 이 모든 것이 적장자든 택현이든 어느 잣대로 보나 정통성을 위협당하지 않을 왕자로 육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인 것이다. 개국 초기부터 왕좌를 둘러싼 골육상쟁을 겪은 조선 왕실은 교육을 정비하고 점진적으로 세자 이외의 왕자의 정치 참여에 제한을 걸어갔다.
정리하면 통설처럼 이방원이 개국 공신이며 고려 과거에 합격할만큼 명석한 두뇌를 지녔으며 부친의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는 탁월한 정치적 식견 등 타 왕자들을 압도하는 제왕적 자질이 있었다면 택현으로 즉위하면 그만이지, 구차하고 번거롭게 형과 형수의 양자로 입적했다가 점진적으로 그 형 부부의 권위를 깎아내린 다음 다시 태조의 아들로 돌아가고 수년에 걸쳐 지난한 정치적 공작을 벌이며 즉위를 위한 명분을 다질 이유가 없다. 바꿔 말하면 이방원은 왕위를 잇기엔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으며 위의 나열된 것이 사실이더라도 세간에 회자되는 제왕적 자질이 다른 왕자들을 압도하기엔 모자란 것이라 후대를 거쳐 윤색되어 고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여기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특정 공신들이 태조의 신임 아래 실권을 독점하던 태조 대의 미성숙한 관료제, 이에 대한 타 공신 세력의 불만, 어머니가 개국 전에 사망해 붕 떠 버린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만 등이 용광로처럼 한데 섞여 제1차 왕자의 난이라는 참사가 발생한 것인데 이것을 후대 왕통 계승자들의 편의에 맞게 설명하려다 보니 나이 든 태조가 합리적 이유 없이 어린 신덕왕후를 총애하고 신덕왕후는 이를 기화로 위화도 회군 때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방원을 배신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였고 여기에 신권주의자 정도전이 거들어 자격 없는 어린 왕자를 세자에 올렸다는 인식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방원과 이방석, 이성계라는 이름을 다 지우고 보면 왕과 왕비의 아들이 왕세자가 된 일반적인 계승일 뿐이다.
물론 신의왕후 한씨 소생도 적자인 것은 맞다. 그러나 상술했듯 자연인 이성계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구분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대부가에도 한씨 소생들 같은 처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부일처제가 원칙이던 고려 말기에 경처, 향처로 구분되는 불법 중혼이 성행해서 둘다 적자녀로 인정해 주되 재산상속 같은 사안에선 불만이 나오고 시비가 생겼다. 자연인 이성계의 적장자라고 한다면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 자녀들에게 우선권이 있을지도 모르나 조선왕조 창업군주 이성계의 후계자라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디까지나 첫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에게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1차 왕자의 난은 초대 왕비가 죽은 후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4.1.1.2. 무리수이다[편집]
반론하자면 오히려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야말로 무리수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장성한 형들을 놔두고 막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것 자체가 애시당초 말도 안 되는 소리다.[25] 일단 위에서 택현이 장자보다 우선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틀린 소리다. 택현은 어디까지나 적장자가 없거나 드물게 왕위에 오르기에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적용되는 방법이다.[26] 그리고 여기서 이미 태조와 태종의 차이가 드러난다. 태조의 이방석 세자 책봉은 누가 봐도 종법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그걸 왕의 권위로 무리하게 통과시켰지만 결국 사대부들은 이런 상황을 그리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태종은 스스로 형의 양자가 되는 무리수를 동원해서라도[27] 차선책으로 사용하는 선택지이고 근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28][29][30] 인정받는 기본적인 상속법은 당연히 유교의 예법에 따라 적장자가 우선해서 계승하는 것(종법제)이다.
종법제에 따르면 계승은 어디까지나 적장자가 우선시된다. 그래서 왕-적장자-적장손로 이어진다. 그래서 종법제의 원칙상으로는 이성계-이방우-이방우의 적장자(이복근)로 이어져야 했다.[31] 그나마 개국 초니까 택현이라는 말이 나올 수라도 있었던 거지 기본적으로는 종법제가 절대적으로 중요시된다. 사실 이것도 어리지만 정통성을 가진 적장자 vs 경험많고 능력있는 서자의 구도에서나 나오는 말이지 이때처럼 똑같이 적자에 경험많고 능력있는 제1부인 출신인 형들 vs 나이어린 후처 출신인 동생 구도도 아니었다.
택현이라 해도 입적 등을 통해 종법상의 위치를 확보한 뒤에 승계하는 것이 정석이다. 조선 왕조 27명의 군주를 통틀어 택현이라는 명분으로 장자가 있음에도 중자(衆子)가 어떠한 종법상의 조치도 없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등극한 사례는 딱 한 번, 세종의 경우 뿐이었다.[32][33] 당장 장자가 사망해 발생한 차자승계 상황(효종)에서도 이 적장자 승계 위배로 인한 정통성 문제는 재위 내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사망 후에도 온 조정을 뒤흔들다 못해 갈아엎을 지경이었다.[34][35]
마지막으로 요순의 선양으로 택현에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지만 연왕 쾌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에서는 그게 먹히지 않아서 택현이 적장자보다 우선이라는 것은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36][37][38]
청나라처럼 장자상속을 따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 나라가 안정되면 장자가 승계을 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유교, 성리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방석 옹호론자들은 적장자 세습의 원칙이 이전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다가 무인정사를 계기로 강화된 것처럼 호도하지만 한반도에서 적장자 세습이 정착된지는 조선 건국 당시에도 이미 수백년에 이르고 있었다.[44] 유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지구상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정주민 치고 장자상속을 외면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고,[45] 장자상속을 거부한 경우 예외없이 지리한 계승권 분쟁 등으로 왕권이 추락하고 국가시스템이 엉망이 되는 길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일본만 해도 인세이라는 비정상적인 제도로 인해 장자승계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그 결과로 막부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유교이념은 고사하고 약육강식의 시대였던 후삼국시대에도 후처 소생을 후계자로 지명하려다 유폐당한 견훤 같은 사례가 있었다. 이렇게 적장자 승계의 원칙이 깨져버리면 표면적으로야 더 훌륭한 자질을 가진 왕재를 옹립할 수 있다지만 실제로는 해당 계승권자를 둘러싼 외척이나 친위세력 간 파워게임으로 치닫는 것이 세상 이치고, 당연히 나라는 훌륭한 막장 테크를 타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도 이러한데, 정치 이념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더욱 골치아파진다. 유교, 특히 성리학에 있어 종법제는 단순히 상속제도가 아니라 왕실/대종-사대부/소종의 관계를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상속문제로 인한 골육상쟁의 위험을 제거해 안정을 구가하는 정치이념의 중심축이다. 즉 종법제가 흔들린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조선왕조 스스로 일으킨 역성혁명이 재발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럽이야 기독교 세계에서 제멋대로 찬탈을 해봤자 교황이 승인 안해주면 끝장이고, 교황이 아니더라도 워낙 많은 국가들의 왕실, 혹은 국내 제후들과 귀족집단이 얽히고 섥혀서 찬탈을 해도 제대로 왕 노릇 하기가 쉽지 않지만[46][47][48] 동아시아, 특히 중앙집권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국제관계래봐야 상국인 명 한 곳에서 승인 받으면 그만이고, 중앙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면 지방에서 이를 뒤집는것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모든 것을 조선 스스로가 역성혁명 과정에서 제대로 확인한 마당에, 국초부터 후계 문제로 성리학 정치이념과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49]
위에서 세자의 빡빡한 교육 커리큘럼을 들어서 능력이 정통성보다 우선시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인과관계를 완전히 혼동한 것이다. 오히려 능력은 교육과 훈련으로 어느정도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지만 정통성은 그럴 수가 없으니 차라리 정통성을 중시한 승계의 원칙을 세워두고 유아기부터 빡빡하게 굴리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50] 원칙을 깨버렸으니 능력이라도 내세워야 하는 것이지, 능력이 출중하다고 원칙을 깰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깰 수 있는 건 다른 계승권자의 능력이 아니라 적장자 본인의 중대한 결함이다.[51] 그리고 태조고 누구고 간에 초유의 말자상속[52] 을 강행하면서 이방번이야 성격이 난폭하다고 둘러대기라도 했지 그 외 이방석의 형들이 세자가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해명이 없었다. 이자춘의 적장자 이원계는 서장자로 만들고 태조의 적장자 이방우는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포장해 본인의 의지라는 명분으로 승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시킨 것과 비교하면[53]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위의 문제없다는 주장의 핵심은 이방석이 왕비의 아들이니 당연하다는 논리인데 사실 그 이전에 왜 신덕왕후만이 왕비로 인정받는가부터 논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대체 한씨의 위치는 어떻게 되냐는 문제도 있으며 이와 연관하여 한씨 소생 자식들은 서자인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씨는 향처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정처고 그 아들들도 엄연한 적자로 적서차별이 심했던 고려에서 음서와 과거급제로 멀쩡히 관직생활을 했다. 즉, 두번째 아내한테는 왕비 칭호를 줬으면서 가장 권위가 커야 할 첫번째 아내한테는 비록 사망했다고는 하나[54] 절비라는 칭호만 주고 퉁친 것 자체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종법제에 따른 태조의 적장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현 왕비의 장자라고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법 따위는 없다.[55][56]
사실 논의할 것도 없이 위에 다 나온다. 태조의 권위로 뭉개버렸다는 게 바로 답이다. 이는 거병의 시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옹호론에서는 1차 왕자의 난이 신덕왕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신덕왕후의 3년상이 다 끝나고 나서야 난이 터졌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태조의 와병과 그로 인한 경복궁 및 도성의 통제력 약화였다. 그 3년 내내 세자 이방석의 지위가 불안했던 조짐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다들 태조의 권위 앞에 그저 바짝 엎드렸을 뿐이다.[57]
문제는 이게 동아시아 유교식 전통인 종법제와는 완전히 어긋났다는 것이다. 결국 신덕왕후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왕과 왕비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태조에 대한 신덕왕후의 영향력 때문인 것이고 그 때문에 원래는 추증되었어야 했던 한씨를 절비라는 칭호만으로 퉁쳤던 것이다. 즉, 태조가 신덕왕후를 총애, 내지는 곡산 강씨 가문에 대한 정치적 부채의 정산 과정에서 생긴 일이고 유교 도덕과 명분에 대해 잘 몰랐거나 알아도 자기 권위로 충분히 뭉갤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58]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대에 편찬되었음을 감안한다 해도 이방석의 책봉에는 택현이란 명분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도 않았고[59]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본인의 행적부터가 택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리고 이방석의 책봉과 이에 대한 반발은 따로따로 봐야 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틀린 말이다. 사실 세상 일 중 따로 돌아가는 법따윈 없고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신덕왕후의 아들이 왕세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상 태조와 신덕왕후 두 사람의 머릿속에만 그렇게 돌아간 것이고 거기에 정도전 등이 업어간 거지 그 외의 조선 팔도의 모든 사람들은[60]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사상 초유의 막내 책봉으로 그 위의 형들 모두의 입지가 불안해졌으니 이들과 혼맥 학맥 등으로 엮인 다른 사대부들, 동북면에서부터 개경까지 함께 동고동락해온 여타 종친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뻔한 일이다. 이방석에게 힘을 몰아줘야 하니 큰 왕자들을 대놓고 찬밥 대우하게 되었고 무리한 중앙집권화의 와중에 비정상적인 신덕왕후계 우대와 대외강경책이 봇물을 이루었는데 당연히 큰 왕자들 본인이 아니더라도 종친이든 사대부든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 두 문제의 연계성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냥 태조와 신덕왕후의 정치력이 그정도에 불과함을 입증할 뿐이다.
그 증거가 바로 무인년에도, 태종의 세자책봉과 즉위에도 유의미한 반발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61] 당장 세조가 즉위했을 때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견적이 나온다. 태종이 조사의의 난까지 해결되자 1차 왕자의 난으로 귀양 보낸 사람들까지도 슬슬 재기용해 폭넓은 인재풀을 향유했던 반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 생육신,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62] 이 차례로 발생했고 척신들의 발호를 제대로 통제할수가 없었다.[63]
또, 태종이 정종의 양자가 된 것은 이방석과는 상관없는 얘기다. 태종이 이방석을 죽이고 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시점에서 이미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이방석은 후궁의 아들로 격하되어 있었다. 이방원의 '세자' 책봉에 관해 이런저런 가설이 제기되지만 이 중에서 이방석의 살해와 연관이 있다고 할만한 것은 이방석 살해로 태상왕인 이성계의 진노를 사서 세제 책봉에 걸림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64] 정당한 왕세자 이방석의 살해로 정통성에 금이 갔다는 것이 아니다. 왕자의 난으로 인한 태종의 정통성 문제보다야 오히려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삼는 쪽이 훨씬 무리수였고, 태종과 방석의 정통성은 따지고 보면 별 차이도 없었다.(둘 다 적자이고 장자는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오히려 순위만 보면 손윗형인 태종 쪽이 더 우위였고, 위에서 주장한 택현이라는 논리를 들먹여봤자 고려 과거 급제자에 개창의 최고 공신인 이방원에게 유리하면 유리하지 불리할 요소는 (정몽주 살해건 정도를 제외하면)[65] 전혀 없었다. 이방원의 정통성이 문제면 애초에 유교 이념으로 풀무장한 사대부들 - 조준, 정도전을 포함해서 - 이 왜 처음에 나이와 공로를 나란히 세자의 자격으로 거론했겠는가? 난을 일으켰다고 해도 이는 정통성 문제로 번질 일은 없었고, 애초에 난의 명분도 '종친살해모해죄' 즉, 선공을 당해 이를 반격했다는 것이지 아버지를 공격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66] 차라리 이방원에게 적장자 자격을 부여해 자신의 서자들을 둘러싼 어떠한 후계 시비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정종의 정치적 노림수 혹은 거래라면 모를까[67] 이방석의 정통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태종 스스로가 종법에 들어맞는 적장자 세습의 틀을 갖춤으로써 쿠데타의 정당성을 사대부들에게 각인시키고 동시에 정종의 서자들과 형들인 방의, 방간보다 낮은 서열도 극복하려는 이유가 가장 컸을 테지만.
이방원이 난을 일으킨 것은 신덕왕후가 죽고 태조가 병환 때문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라는 말도 결국 변명에 불과하다. 당연히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고 이미 그 신덕왕후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당시 60을 넘었고 70을 바라보던 노인인 태조가 언제까지 방석을 비호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은 결국 부모가 죽으면 방석은 다섯 형들의 압박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이걸 과연 정도전, 남은 등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태조의 수명은 아직 10년은 남았다는거고 그럼 세자 이방석은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계승할만한 나이는 되는데 그 시간동안 나이 먹는건 형인 이방원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이 때의 이방원이 골골대는 나이라면 모를까 41세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왕이 되지 못하리란 나이는 아니다. 오히려 10년이란 시간동안 정치싸움을 해야 하는 이방원은 더 노회한 정치인이 되어있을 텐데 그걸 20대 중반의 새파란 방석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게다가 정도전(67세), 남은(55세)은 나이가 많다. 특히 정도전은 저 나이면 이미 죽고 없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인데 태조도 없고 정도전도 없는 이방석은 이방원에게 간단하게 처리된다.
비슷한 사례로 베트남의 딘 왕조가 있는데 딘 왕조를 연 딘보린은 말년에 막내인 딘항랑을 태자로 삼았다. 문제는 막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딘항랑 외에도 아들들이 더 있었고 그 중에서 장남 딘리엔은 아버지가 왕조를 열기 전부터 공헌을 해왔기에[68] 큰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딘리엔이 딘항랑을 죽여버렸다. 게다가 몇달 뒤 딘보린과 딘리엔이 동시에 살해당하는 바람에 딘 왕조는 망하고 전 레 왕조가 들어섰다.
4.1.2. 말자상속?[편집]
일각에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 즉, 여진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특히 이성계의 전주 이씨 집안은 대대로 이런 경향이 강했는데, 이안사 이래 쌍성 전주 이씨 가문은 이자흥 이전까지 계속해서 적장자나 차남이 아닌 4남 이하의 아들이 쌍성의 천호직을 이어왔다는 점[69] 은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70]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냥 어름어름 비슷해보인다 정도가 아니라, '"과연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유목민의 말자상속 원리에 부합하는가?"'라는 점이다. 말자상속의 핵심은 장자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먼 땅을 개척하고, 말자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본가를 물려준다는 데 있다. 다만 이것이 정말 문자 그대로 무조건 애송이 막내한테 가장 지위와 재산을 모두 물려준다는 의미였던 것은 아니다. 말자상속 제도가 이상적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면, 형제들은 각각 나이 순서대로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면 아버지의 재산(가축떼) 일부를 물려받아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게 된다. (단위 면적당 인구 및 가축 부양력이 낮은 목초지의 특성상 같은 지역에 너무 많은 인구와 가축이 몰려있을 경우 이는 재산의 감소와 세력의 쇠퇴를 불러오게 된다. 따라서 인구/가축밀도가 높아지기 전에 새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유목민의 재산 기반인 가축이 불어날 수 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형들이 모두 독립하고 마지막으로 막내가 장성하여 일가를 이룰 시기가 되면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스스로 일가를 이끌기에는 힘에 겨운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막내는 굳이 독립할 필요가 없이, 아버지 곁을 지키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남은 재산과 본가를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막내가 이렇게 본가를 물려받는다고 해서 물려받는 재산의 지분이 조금이나마 더 클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 각 아들들이 독립할 때마다 재산을 얼마씩이나 나눠받을 것인가는 가장인 아버지의 마음과 또 그 시점에서 일족의 처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유목민의 재산 개념은 정주 농경민의 재산 개념에 비해 훨씬 탄력적이고 유동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농경민의 재산 기반인 농토는 한번 나눠주면 스스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유목민의 재산 기반인 가축은 목초지만 있으면 스스로 번식해서 수가 계속 불어나는 반면 한파나 가뭄, 약탈등으로 인해 확 줄어들수도 있다. 막내가 본가를 상속받는다는 명분으로 알짜를 물려받을수도 있고, 형들에게 떼줄만큼 떼주고 남은 쭉정이만 물려받을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복불복이고, 또 자기 일가를 꾸릴 만큼 물려받기만 했으면 그 이후로는 각자 알아서 잘 꾸려나가면 될 일이지 누가 좀 더 받고 덜 받았느냐를 비교할 의미조차 별로 없는 것. 결국 유목민의 말자상속제란 흔히 '장자상속제'라고 하면 연상하는 장자 단독 상속제, 또는 장자 우선 상속제에서 장자를 말자로 바꿔놓은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균분 상속제이고, 다만 본가(종가)의 명분을 물려받는 것이 막내, 형들의 일가는 그 본가에서 갈라져 나간 분가가 되는 것일 뿐이다.
심지어 유목민 사회에서는 종가의 권위조차 그렇게 실질적이지는 않다. 유목민의 씨족이란 결국 혈연을 통해 퍼져나간 집단이므로 씨족의 모임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본가가 상석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우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씨족을 구성하는 다른 일족들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해당 씨족에서 씨족 전체를 지휘할 칸이라도 선출할 경우, 이 칸은 본가 출신이든 분가 출신이든 해당 씨족의 귀족 혈통을 가진 인물이면 씨족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아 추대될 수 있는 것이지 꼭 본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점을 찾아보자면 만약 비슷한 입지를 가진 경쟁자가 있을 경우 본가 출신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쪽이 약간의 유리함을 가지는 정도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이정도라면 왕실의 권위는 커녕 정주민으로 치면 시골 양반집 종가 정도의 권위에 비해도 별로 대단할것이 없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막내가 이어받는 본가의 유리한 점을 찾아보자면 형들이 독립할 때마다 새로운 영역(목초지)를 찾아 사방으로 퍼져나가 영역을 개척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본가를 물려받은 막내의 영역은 그 씨족이 차지한 영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된다. 즉, 유목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인 혈연동맹으로 맺어진 씨족들의 영역으로 둘러싸인 상대적으로 안전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혈연동맹 씨족들을 배신하지 않는 한 확장할 공간을 찾을 수 없는, 확장과 약탈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입지라는 의미가 된다. 이 역시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지 일방적인 장점은 될 수 없는 것. 결국 유목민 특유의 말자상속제는 분권적이고 분산적인 유목민의 사회상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를 농경정주민 사회인 조선에서, 그것도 철저한 중앙집권을 지향하던 조선 국왕의 계승 원칙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유목민 상속제도가 왕권의 상속에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인 칭기즈 칸과 그 아들들의 사례를 비교대상으로 삼아볼수도 있다. 일단 몽골 제국의 경우, 유라시아 유목민 중에서도 제일 깡촌이던 몽골 고원에서 기원한 특성상 제국 성립의 초기인 2대 계승 무렵까지도 유목민 전통의 영향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주치가 킵차크 칸국의 영토를 물려받은 것은 <장자가 아버지의 본거지에서 가장 먼 땅을 물려받는> 몽골족(및 유목민)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칭기즈 칸의 적자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했다는 툴루이는 각각 일군을 이끌고 다른 전선의 사령관을 맡은 형들(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와는 달리 아버지의 막하에서 아버지의 곁을 지키다가 아버지 사후 일족의 기원인 몽골 초원을 상속받았으며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가 정식으로 2대 대칸에 선출되기까지 2년간 대칸의 직위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즉, 툴루이가 말자 상속을 받은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이 사례를 통해 유목민의 말자 상속권이 가지는 한계 역시 알 수 있다. 정식 대칸이 선출되기까지의 기간동안 임시 대칸의 역할이 툴루이에게 맞겨진 것은 그가 일족의 발상지와 본가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 툴루이는 애송이이기는 커녕 이미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용맹을 떨친 30대 중반의 당당한 성인이었음에도) '본가를 물려받는 것'과 '일족 전체의 수장으로 추대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유목 일족에서 본가의 위상이나 권위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막내가 이어받은 본가가 일족의 수장이 된다'는 수준이 아니라 '쿠릴타이를 열어 칸을 뽑기 전까지는 명시적인 수장이 없으니, 그동안은 본가가 자리를 주재한다'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툴루이에게도 나름 대칸의 위에 도전할만한 세력은 있었지만 아버지(징기스 칸)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정한 형(오고타이)에게 굳이 맞서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순히 따른 것이라는 분석 역시 있지만 이 역시 달리 보면 막내에게 본가를 물려주는 말자상속 전통을 지킬만큼 유목민 전통에 충실했던 칭기즈 칸(사실 평생 유목민으로 지낸 그는 다른 전통은 잘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역시 '본가의 계승자'와 '일족의 수장'을 분리해서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라 할 만한 것.
게다가 몽골 제국의 초기에 이런 유목민식 계승이 가능했던 것조차도 징기스칸 당시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아직 유목민의 문화에만 익숙했던 몽골족의 사회상 때문이었다. 일단 툴루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모살설이 제기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어떻게 분할상속하건 다 고만고만하게 나뉘어 살게 되는' 유목민 시절과는 달리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제국의 황실이 된 이후에는 누가 우선 상속권을 가지고 대칸의 자리를 물려받느냐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 시작한 것. 게다가 팽창할대로 팽창한 몽골 제국이 더이상 확장할 영역이 없어지면서 각 아들들에게 저마다의 영토를 분봉해주는 것도 불가능해지게 되고, 이에 따라 황실 내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원나라는 결국 98년의 짧은 역사를 거쳐 멸망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 점에서는 이성계 관련 문서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이성계와 칭기즈 칸이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볼 여지도 있다. 두 사람은 자기 인생 대부분의 기간을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이나 동북면 이씨 일족의 수장으로 지냈고, 그 행동원칙에 익숙했다.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를 마치 '일족의 차기 수장을 지명하듯' 가볍게 지명했던 것. 하지만 후계자 지명 시점에서 두 사람은 단순한 일족의 수장이 아닌 황제(카간)나 왕이었고, 왕권의 계승은 일족 수장의 계승에 비해 훨씬 심각하고 엄중, 가혹하기까지 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나마 몽골 제국은 유목민 전통도 강하게 남아있었고, 폭발적인 영토 확장 덕분에 제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자들에게도 나름 영토를 분봉해줄 수 있었다. (대신 몽골 제국의 후신인 원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중에서도 중앙집권도가 눈에 띄게 낮았다.) 하지만 농경 정주민 국가에 영토 한 뼘 넓히기 쉽지 않은 고려-조선에서 왕자들 중 하나를 차기 국왕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후 대대로 왕은 그 가계에서만 나오고, 다른 왕자들의 후손들은 운이 좋아야 그 신하에 머무르며 운이 나쁘면 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후로 숙청의 칼날을 맞이할 수도 있는 처지가 된다는 의미였던 것. 이 점에서 볼 때 이방석을 후계자로 지명할 당시 이성계가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울 수 있는 것인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은 분명 일리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당시 갓 10대에 접어든 이방석을 지명하는 것은 유목민의 상속제도에 비춰 봐도 크게 무리수였다. 성리학을 근본 이념으로 삼는 중앙집권국가 조선에서, 그것도 왕실에서 큰아들에게 무슨 밑천을 마련해 줘서 독립시키겠는가? 혹은 이방석이 무슨 근거로 택현을 내세우겠는가? 이성계 이전의 사정을 보면 이행리의 경우 형들이 이미 원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했고, 이춘은 동복형 이송이 고려 숭록대부였던 것을 봐서 쌍성을 떠나 고려에 출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원계 또한 이자춘의 귀부 이전에 이미 고려에서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과거에 연이어 급제하는 등 일찌감치 쌍성을 떠나 있었다. 즉, 큰아들은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시키고 집안에 남은 아들들 중에서 서열이 높은 쪽에게 쌍성 천호직을 물려주는 것이 이성계 집안의 말자상속방식이었는데, 사실 이성계가 고려 귀부 이후 동북면, 즉 옛 쌍성 전역을 개인 영지 수준으로 다스리게 되어서 그렇지 과연 쌍성 총관도 아니고 천호직이 원이나 고려 중앙조정의 벼슬보다 값나가는 자리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71] 결정적으로 유목민족도 장남에게 떼어줄 거 없으면 집안을 줬다.
애초에 전주 이씨 가문 자체가 쌍성 시절 내내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여진이나 몽골족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익조 이행리는 아예 고려계라는 이유로 여진족 천호들에게 다굴당해 쫓겨났을 정도고, 이후로도 고려에게 귀부하는 그 순간까지 전주 이씨 가문의 기반은 고려계 주민집단이었으며, 줄기차게 고려계 집안끼리 통혼해왔다.[72] 큰아들을 출사시킬 수 있을 때는 어떻게든 벼슬살이를 시키려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이자춘의 형 이자흥처럼 원 조정으로부터 직접 적장자 인증을 받아 집안을 이었으며 이자흥 사후 이자춘이 어린 조카 이천계를 제치고 천호 벼슬을 꿀꺽(...)하자 이자춘 사후 이천계가 적장자임을 이유로 이성계를 죽이고 가주 지위를 돌려받으려 하기도 했다.[73]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은 설령 있다 해도 척결 1순위였다. 이성계가 개경으로 나온 이후에는 고려 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구도가 확실하게 정착되어서 장남 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 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 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 있었다.[74]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 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 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몽골유목민의 말자상속제를 여염집도 아니고 다름 아닌 세자 책봉에 적용한다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그보다는 이성계 집안의 내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이행리는 두만강변 여진족 천호들에게 밀려난 뒤 안변의 최씨집안에게 후원을 받아 천호 자리를 되찾고 최씨 여식을 계실로 들여 정실의 자식들을 제치고 최씨의 아들인 이춘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 본인부터가 출중한 능력을 기반으로 먼저 고려에서 벼슬살이하던 이복형 이원계를 제치고 사실상 전주이씨 가문의 당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75] 큰아버지 이자흥이 계모와 싸워가며 천호 자리를 물려받은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이자흥 사후 자기 아버지가 자기 사촌형을 제끼고 자리를 물려받았다. 즉 적장자 계승이 원칙적으로는 맞기야 하지만 확실한 뒷배가 그 원칙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며, 특히나 이행리가 최씨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개경 정착과 성공에 강력한 힘을 보태준 현 중전 강씨의 요구는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대신들이 단순히 적장자 원칙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이 있는 왕자까지도 후보로 언급하고 있으니, 더더욱 굳이 장자는 아니어도 된다는 발상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문제는 조선이 유목제국이나 봉건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77] 게다가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배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능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성계 집안이 여진족이나 몽골족 같은 이민족과 다름이 없다 해도 문제가 된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기존의 중화문명권 국가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며 이성계까 이 고려를 정복하고 세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성계의 정치적 파트너들은 유학자였다. 유학자들 입장에선 당연히 멀쩡한 장자를 놔두고 막내를 왕으로 세운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4.2. 간과한 것[편집]
일단 방석을 세자로 정한 건 태조가 직접 나서서 결정한 일이니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 ① 세자의 친모가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 ② 형제 중에서 하필 막내가 세자가 되었다.
게다가 특히 이복형 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이방과와 이방원의 경우에는 태조 사후 곧바로 이방석 일파에게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이방과는 이성계 휘하에서 불패의 최정예 사병인 동북면 가별초 부대를 오랫동안 통솔해왔고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한 학맥과 세족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대했으니 그 존재들만으로도 공도 없고 정치력도 없는 막내의 왕위엔 차고 넘치도록 위협이 되고도 남는다. 애초에 그래서 세자책봉 논의때 그 둘이 거론되었던 것인데... 게다가 이방간도 나중에 2차 왕자의 난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능력과는 별개로 야심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방석 세자 책봉은 7명의 형들 중에 그당시 생존해있던 5명 중에서 최소한 4명(방과, 방간, 방원, 방번)은 죽여버리겠다고 선전포고한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방우는 실의에 빠져서 술병으로 죽었고,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며, 애초에 이방의는 야심이 없었다. 게다가 이후 양녕대군이나 조의제문, 이인좌의 난 등의 사례를 보면 이방석이 천만다행으로 제대로 승계한다 한들 이 말자승계는 후대에 가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폭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78] 이따위로 승계율을 개판내놓고 나면 당장 이방석의 후계선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 ③ 게다가 그 세자가 왕으로서 자질이 없었다.
방석의 어린 나이가 그나마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그나마 어린 나이부터 유교적 제왕학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태조는 본인이 무장 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안 그래도 신왕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 즉위하기를 바랐을 테니 어린 방석에게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가 컸을 것이다.[81] 더하여 든든한 빽들도 있으니 조금씩 정치적 경력을 쌓아주면 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일단 태조 본인이 세자책봉 당시 이미 환갑으로 인생의 말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82] 게다가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방석은 세자로서 딱히 정무 경험을 착착 쌓아올린 흔적도 보이지 않고,[83][84] 오히려 장군들과 궁밖에 나가 남의 집 가축을 쏴죽이거나, 궁 안에 창기를 들이거나, 공부를 싫어하고 놀아제끼려 해서 태조가 친히 놀려고 해도 못하게 하라고 엄명하는 등 여러 모로 말썽을 일으켰다.[85] 이방석이 죽을 때는 만 16세로 오늘날에 대면 고1 정도의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당대 사회 수준을 생각하면 태조와 정도전 일파가 집중관리해준 세자로서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인다.[86] 그게 아니라면 세종 때에 했던 것처럼 세자와 대군들 사이의 예법을 확실하게 정한다거나 하는 사전작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조차도 없었다. 문종대에는 형에게 벌벌 기던 수양대군도, 정통성이 확실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계유정난을 벌인 것을 생각하면 나이도 어리고 정통성도 형들에게 밀리는 이방석을 세자에 올리고 그 세자가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명분도 능력도 없이 태조의 총애 하나로 세자책봉을 한것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다.
다만 이 논점을 근거로 들때 주의해야 할 것은 이방석이 이렇게 자질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듯이 묘사된 이 태조실록은, 태종의 시대에 태종의 중신인 하륜 등이 편찬을 담당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명분 중 하나가 "세자에게는 암군의 조짐이 보였다."는 것이기에, 역사왜곡이 가미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라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료를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를 감안해도 민간에서조차 이방석에 대해 우호적인 기록이나 전승은 보이지 않고, 무인정사 당시에도 세자가 궁내 갑사들을 장악하여 대응에 나섰다거나 하는 기본적인 자질을 보여준 흔적도 찾기 어렵다.[87] 오죽하면 외사촌형과 누이가 대놓고 이방원 편에 붙었겠는가? 당초에 핵심은 이방석이 무능한가가 아니라 이방석이 유능한가다. 저렇게 논란이 될만한 계승을 그나마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건 실력이므로 이방석이 평범한 수준이라도 평범 정도로는 합리화가 불가능하다.
- ④ 따라서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특히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왕이 설령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다고 쳐도 적장자상속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종법을 깡그리 무시하는 - 그것도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이 말이다. - 이런 후계지명을 마냥 지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아예 조선 건국의 정당성까지 훼손될 위험이 있었다.[91] 여기에 조강지처인 절비 한씨에 대한 예우 문제나 세자의 외가 문제까지 겹치니 결과적으로 당대의 그 어느 누가 보든 간에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그저 젊은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당의 야합이며 이성계의 오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방석의 책봉이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이라도 제시했으면 무인정사에 대한 소장파 신진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방석 친위세력의 핵심이었던 정도전의 준복권[92] 역시 먼 훗날에야 실현되었을 것이며, 새로 집권한 이방원은 인재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93] 하지만 현실은 태조가 직접 칼 빼들고 나선 것 이외에 딱히 이방석의 살해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제낀 패륜을 저지른 것 치고는 너무나 수월하게 정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무인정사 당시 이래저래 반대파로 엮여서 하옥되거나 처벌된 이들도 나중에 은근슬쩍 중앙에 복귀해 벼슬살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94] 귀양갔던 순녕군 이지 같은 경우는 복귀해서 영의정까지 해먹고 졸기도 써줬다. 심지어 이방원은 수많은 공신들을 이래저래 숙청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이후 세종 시기 관학파의 전성시대에 토대를 닦아주었다.
- ⑤ 적이 너무 많다.
이처럼 적이 많을 때의 기본 전략은 모름지기 "적의 적은 나의 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례로 막내가 즉위한 순치제 사례를 보면,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이 서로 극한 대립으로 치닫다가 결국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가장 만만한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고 권력을 적당히 갈라먹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100] 순치제 모델이 홍타이지의 급서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성립된 것이긴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요소는 상호 견제의 결과 권력의 분점에 대한 합의에 있다. 즉 방석의 친위세력은 납득하기 어려운 세자책봉에 대하여 어떻게든 반대급부를 제공함으로서 불만을 누그러뜨리거나, 반대세력의 두 축인 큰 왕자들과 권문세족 출신 공신들을 분열시키든가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권력의 분점은 고사하고 반대세력 탄압에 열을 올리며 어그로만 만땅을 끌면서 큰 왕자들과 공신들의 일대 야합을 오히려 촉진시켜버렸다. 특히 조준, 김사형 같은 대신들은 반정 당시까지만 해도 과연 붙어줄지 말지 미지수 그 자체였지만 정작 일이 터지자 별 다른 밀당조차 없이 너무나 수월하게 반정 진영에 합류해버렸다.
명분은 없고 적은 많으니 방석의 친위세력은 무리수를 남발했다. 초장부터 명확한 설명도 없이 세자빈 유씨를 폐출시켜버리더니[101] 정말 간통이라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집안관리 제대로 못한 방석의 허물이 되며, 정치적 의도에 의한 공작이라면 추진세력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회의, 실망, 자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되었건 방석의 입지와 권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모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방석을 주시하는 상황에서 어쨌거나 세자빈을 폐출시키려 했다면 보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처리해야 했다. 제후국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이라는 신박한 삽질을 시도하는가 하면, 급기야 세자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어야 할 신덕왕후가 급사하자 도성 내, 그것도 왕궁 코앞에 묘를 쓰는 초유의 편법이 터졌다.[102] 목숨걸고 명 사신행에 자원해 외교분쟁을 잘 봉합하고 돌아온 권근에 대해 무리한 탄핵을 시도했다가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는가 하면, 이미 자신들이 반대를 넘어 아예 항명에 이은 정변까지 일으켜버린 바 있는 요동 정벌을 재추진하고 이를 빌미로 사병혁파를 강압적으로 실행에 옮겼지만 정작 인력풀의 부족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종친들을 대거 진도(진법) 훈련에 동원하면서 오히려 거병의 기회를 조성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무리수는 결국 신덕왕후의 조카인 상장군 신극례마저 이숙번과 그의 수하들을 유숙시켜가며 무인정사에 참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즉 방석을 가장 지지해줘야 할 그의 외가 쪽 친척들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민심이 돌아섰는지 알 만한 일이다.[103]
이렇게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군을 만들어주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복형인 이방번에게 차츰 권한이 몰리게 되었다. 아래에서 보듯 좌군절제사가 되어 매형 이제와 함께 삼군부를 맡는가 하면 사병혁파 때에도 이방번만은 사병의 유지를 허락받았다. 문제는 이방번에게 힘을 실어주면 해결되는지와, 이방번은 확실히 방석의 편인지의 여부였다. 우선 이방번이 방석보다 형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1살 많을 뿐이다. 즉 삼군부 좌군절제사가 된 태조2년에 그는 고작 13살. 매형 이제가 정몽주 암살모의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이가 좀 있긴 했지만[104] 이래가지고서야 권위고 뭐고 이방원을 위시한 신의왕후 소생들, 종친들 입장에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복과 이복을 떠나서 동생에게 지위를 뺏긴 형이라는 입장은 이방번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방원 역시 이복동생들 다 죽여놓고 났더니 다시 동복형과 칼을 맞대지 않았는가? 다시 언급하겠지만 실록에 따르면 이방번은 나름 세자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이방원이 난을 일으킨 것을 알고도 딱히 세자 편을 들지도 않고 그냥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어차피 태종 정권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방석과 도매금으로 살해한 방번을 굳이 억울한 방관자로 만들어 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록의 신빙성은 절대 낮지 않다. 어쩌면 태조가 기껏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을 이러저리 쳐내가며 방석의 승계를 준비해놨더니 막판에 가서 이방번의 난이라는 초대형 통수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3. 예방책?[편집]
태조도 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한 게 아니라서 나름대로는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를 책봉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적장자가 된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105]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성계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106]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107]
더불어 왕자들을 지방 절제사로 전임시키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보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 일당은 환관 김사행을 사주하여 왕자들을 아예 제후처럼 분봉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태조가 답을 안해주고 오히려 정안군에게 하도 말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고 한다.[108] 사실 고려식 외왕내제도 아니고 대명 사대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주제에, 또 성리학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책을 시도한 것은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아예 중앙에서 벗어난 왕자들이 지방군을 이끌고 도성을 공격한다면 이 또한 죽쒀서 개주는 꼴이다.[109] 왕자들의 지방행이 좌절된 정도전은 이후 요동정벌과 이를 구실로 한 사병혁파 정책을 추진한다. #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세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이방원의 경우 신덕왕후에 대한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은 분명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몽주나 하륜이 중앙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정치가 뭔지 몸으로 체득할 때 정도전은 지방에 유배되어 그런 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다. 힘을 가진 1인자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과 직접 똥물에 몸담그는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 부분에서 사형 정몽주나 경쟁자 조준, 하륜보다 서툴렀다.[110][111] 그래서 건국 이전에는 2인자 자리를 홀로 차지하지 못하고 조준과 나눠야 했고, 조준의 전제개혁 때 전혀 끼어들지 못해 존재감이 낮아졌다 교우관계(이숭인, 권근)를 단절하며 척불정책을 강행해야 했다. 그의 정책들은 건국 초기 필요한 것이었지만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 데다, 반대파의 반발을 지나치게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그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4.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편집]
이렇게 세자 문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112]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다녀왔다.[113]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성공적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 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의 지지만 잃어버렸다.[114]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과 종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그의 사병 혁파 시도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계 본인이 사병을 가지고 왕이 된 만큼 이를 모두 혁파하려면 사병의 준동을 진압할 수 있는 훌륭한 관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라곤 본래 함흥의 이성계 일가에게 충성하던 직속 가별초들이었다. 이들이 함흥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정도전이나 이방번에게 복종하여 다른 전주 이씨 문중 인사들을 가차없이 적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또한 함흥 출신 왕자들과 문중의 종친이 보유하는 사병들 또한 본래 가별초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지휘 아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사병보다도 더 특정 가문에 대한 사병화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들이 극구 반대하는 관군으로의 강제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사병 몰수 대상 리스트에 있는 이지란이 가별초의 실질적 2인자, 이방과가 가별초의 차기 수장이었는데, 아무리 1인자의 위세를 빌린다 한들 낙하산 문신 정도전과 큰마님을 밀어낸 후실의 막내아들이 가별초에 발휘할 수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정 사병 혁파를 하려면 이성계 본인이 앞서서 사병을 빼앗고 자식들이 말 안들으면 줘패서라도 뺏어야 되는데 이성계가 이러지 않았다는것도 문제.[115]
물론 사병혁파는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당시 실행자가 당시 독단적인 정책으로 정계의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고다니던 정도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당연하게도 공신은 물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왕실 종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 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이 기어이 나라를 뺏고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수작을 부린다며 이를 갈았다.[116]
게다가 사병혁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요동 정벌도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조선 건국세력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뒤엎은 시발점이 위화도 회군이었기 때문. 이미 두 번의 요동 정벌이 모두 별 소득 없이 끝난 마당에, 조건은 오히려 더욱 불리해진 상황에서[117] 추진되는 요동 정벌은 그다지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요동 정벌에 명분이 없으니 이를 명분삼아 추진되는 사병혁파도 자연히 명분을 잃었다. 특히 태조조차도 요동 정벌을 크게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도전만이 이리저리 날뛴다는 것이 어떤 그림으로 보여졌을지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심지어 친정도전, 친이방석파로 분류되는 남은, 이제, 이방번, 유만수, 이무, 이지, 정신의조차 태조 7년 8월 진도강습 태만 처벌대상자 명단에 들어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정작 이방석의 친위세력들이 요동정벌에 열성적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118][119]
여기에 형평성이나 제대로 맞췄으면 모를까, 방석의 동복형 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유지하도록 해주면서 대놓고 사병혁파의 목적이 방석 반대파에 대한 견제에 있음을 인증해버렸다. 자연히 요동 정벌의 진짜 목적에도 의심을 가질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120]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종친모해죄라는 발상이 거저 나온 것은 아니며, 의외로 당대 사람들에게도 그럭저럭 말이 되는 논리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5.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편집]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알 수 없다.[121]
일단 거사 당시부터 이방원에게 합류한 지휘관급 인원은 지안산군사 이숙번, 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 이거이, 전 충청도 도절제사 조영무, 상장군 신극례 등이었다. 지안산군사 이숙번은 안산군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며[122][123] , 왕자들을 진법 훈련에 투입해가며 열을 올리던 시기인지라 상장군 신극례나 각 왕자 및 종친들이 훈련시키던 각 진의 병력만 족히 네자릿수는 동원이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실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시위패를 폐한 지 1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군으로 편입된 각 집안의 가병들이 옛 주인들에게 달려와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방원 일파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인 하륜같은 경우는 그의 졸기에 나온 기록을 참고하면 7월 19일에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내려가 있다가 거사를 전후하여 단기로 서울에 올라와 이방원 지지선언을 하고 후속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이는데[124] , 다만 그가 8월 2일에 태조로부터 직접 교서와 부월을 받은 기록이 있는데다 충청도 병사와 경기좌도 병사로 구성된 3700명이 도성 보수에 참여했다는 7월 27일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선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지만 담당한 도의 병사들이 참여한 도성 보수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혹은 충청도에 가지 않은 채 한양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고, 어쩌면 도성 보수를 위해 온 충청도 병사 또한 그의 지휘 아래 반군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125] 또한 박은의 졸기에 따르면 당시 지춘주사였던 그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가 태종에 의해 춘주로 돌아가지 않고 사헌중승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선, 무인정사 관련 기록에는 언급되진 않았지만 하륜이나 이숙번 만이 아니라 지방에 있던 이방원의 또 다른 지지자들도 반군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당시로부터 시간이 좀 지난 뒤의 기록이기에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세종 20년 9월 25일에 헌릉 비문 속의 무인정사 관련 기록을 수정하는 것과 관련해서 무인정사 당시 이방원의 진무였던 전흥[126] 이 한 진술에 묘한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 때 전흥이 무인정사가 벌어진 날에 이방원이 본인과 더불어 도성 내 야간 순찰을 맡은 감순청에서 감순을 맡았고, 알려진 대로 명이 내려와 이방원이 다른 종친, 부마들과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도 본인은 이방원의 명으로 감순청에 남아있었으며, 그 사이 이방원이 다시 나옴으로써 무인정사가 진행되었고 그 뒤 궁에서 나온 흥안군 이제가 그의 저택에서 살해되자 이방원의 명으로 본인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경순공주를 안심시키는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당시 도승지였던 김돈이 그가 말한 것이 상세하지 않다는 점. 그가 이방원을 따랐다고는 해도 신분이 미천했다는 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하며, 유배 중인 이숙번에게서 당시 이야기를 들을 것을 제안했고, 이후 이숙번이 상경하여 당시의 일을 진술하게 되는 것으로 결론[127] 이 나긴 하지만, 만약 전흥의 말이 진실이라면[128] 무인정사가 일어난 날 밤의 도성 안은 당시 감순청에 있던 이방원 측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으로, 친군위 등이 수비하는 궁궐을 제외하곤 이방원 측이 도성 안에서 상당히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정보 통제도 가능해져 정도전 측이 이방원 측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일단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 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이화, 이천우 등 많은 종친들이 참여했다. 이천우는 특히 정도전이 살해된 이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입궁하려다가 정안군 측에서 일을 벌인 것을 알고 바로 합류해 왜 자신한테는 미리 말 안 해줬냐며 불평하기도 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었으며 왕씨 제거 때 태조가 끝까지 보호한 정양군 왕우의 아들 왕조와 왕관도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에 이은 신권 2인자 조준은 점쟁이를 불러 누가 이길지 점을 쳐보고 반란군이 이긴단 점괘가 나오자 또 다른 재상인 김사형과 더불어 왕도 세자도 아닌 정안군 이방원에게 끓어 엎드렸다.[129][130] 다만 조준과 김사형이 갑옷을 입은 반인들과 함께 왔다는 기록도 상술된 기록과 더불어 태조실록의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 남아있는지라 조준이 처음부터 무조건 저자세로 움직였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나섰으나 이미 상황이 끝났음을 파악하고 김사형과 더불어 이방원 측에 동조했을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특히 이방번은 당시 유일하게 사병 보유가 허가되어 이방원이 거병 초반에 찾아가 합류할지를 물었는데, 이방원에게 합류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성계나 이방석에게 이방원의 거병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다. 이방석이 제거되면 자신에게 세자 자리가 오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국 이방번은 이방원에게 아무 답 없이 그냥 집안에 들어가 드러누웠고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한 것이 이방원은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을 때 신덕왕후와 두 이복동생이 고려 조정에 의해 인질이 되거나 보복 살해를 당하지 못하게 구해줬는데, 신덕왕후와는 척을 지고, 두 이복동생은 자기가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정몽주를 죽인 직후에도 이방원이 신덕왕후에게 왜 자신의 편을 안 들어 주냐며 하소연할 정도로 서로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보면 참 씁쓸한 일이다.[131][132]
태조의 사촌동생인 순녕군 이지는 난이 터진 당일 신덕왕후의 오빠인 강계권, 보성군 오몽을, 지중추원사 정신의, 대장군 강택, 정도전의 아들 정진 등과 함께 순군옥에 갇혔다가 귀양살이를 한다. 친형 이방번조차 이방석을 돕지 않은 마당에 이 사건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이방석 편으로 기록된 왕족일 것이다. 사실 그는 도조 이춘이 후처 조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완자불화(李完者不花)의 아들로, 완자불화가 이자춘과 천호직 승계를 놓고 원 조정까지 개입하는 개싸움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이자춘의 후손들로서는 꽤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졸기를 보면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자 이성계가 잠저로 불러 키우다시피 했다 하니 그야말로 태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곁에서 함께 머리가 굵어지며 커 온 이지란이나 이화가 어쨌거나 이방석 편을 들지 않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 이후 태종이 즉위한 뒤 그를 불러서 다시 요직을 맡기니 영의정에 영돈녕부사까지 승진하다 천수를 누리고 죽는데, 졸기에서는 무인년에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귀양갔다고 대충 넘어가버린다. 그리고 67세에 57세 과부와 재혼을 하는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재혼 상대인 낙안 김씨는 심덕부와 함께 신도궁궐조성도감판사로서 한양 천도를 총괄한 김주의 딸이었고 개국공신 조준의 조카며느리로 나름 명문가의 자손인 데다 전남편 소생의 자식도 있었다. 당연히 전남편의 자식들은 이지를 넘어뜨리는 등 극렬하게 재혼에 반대했지만 결혼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혼 생활은 행복했던 듯 하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다[133] . 영안군 방과는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134]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 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135]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이성계의 지휘 아래 황산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오랜 세월 동북면에서 이성계 일가에 충성을 바쳤던 가별초들이라면 태조가 직접 내린 공격명령이나 태조가 시해될 정황이 없는데 자기들이 도련님으로 모셨던 동북면 출신 왕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대항할 의지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동북면 출신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도 전심전력으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적대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면 피해가 심할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오히려 가별초들은 동북면 도련님들이 내세우는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구호에 누구보다도 쉽게 동조가 가능할 세력이었다. 그들은 도련님들과 함께해온 동료였기 때문. 실제로 이방원은 즉위한 후 이 때의 일을 가리켜 "무인년에 입직하는 갑사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서얼을 도울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궁궐수비군의 투항으로 일이 쉬웠음을 시사하고 있다.[136]
그렇게 보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을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사전모략을 했거나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해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가 모두 투항한 후, 궁궐 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도 전세가 꺾였다는 걸 알고 투항, 모두 무장해제 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위에서 보듯 반군 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 가며 일을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된 후, 이방원이 도평의사사를 소집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을 중심으로 상황 정리 뒤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단번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2차 왕자의 난도 불만분자의 돌출행동에 가깝고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137]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상왕이 되어 실권이 없어졌고 새로 왕이 된 정종도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138] 반면 이방원은 실권을 쥐고 세자가 되어서[139][140]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있을 법한 반대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왕위 등극 후 가장 큰 위협인 조사의의 난조차 초기 진압에 성공했다.[141]
반면에 태조는 쿠데타 한 번에 너무나 쉽게 무력화 되고 말았다. 여러 면에서 판박이인 견훤의 경우 견신검은 쿠데타 후에도 쉽게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신검의 쿠데타는 견훤에 충성하는 이들을 숙청은커녕 군대를 맡겨서 전쟁터에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 고려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후백제의 중신들은 견훤을 보고는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다. 후백제의 우군을 이끌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아예 전투가 시작되면 깃발을 바꿔 달기로 약조까지 한 상황이었다.[142] 하지만 왕자의 난은 쿠데타 과정에서 중신들과 왕실 친인척의 지지를 받았고, 당일에 이복동생인 세자를 폐세자한 후 살해하는건 물론이고 이성계의 손발이 될 측근을 모조리 참살해버리고 빈자리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궁궐에 고립된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봤고, 결국 몇년을 벼르고 별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야 그나마 칼을 뽑아볼 수 있었다. 건국 왕이라는 권위가 있음에도 최측근만 정리되자 중앙에 고립된 건 막내의 세자 책봉과 연이은 큰 왕자들의 토사구팽이라는 무리수와, 그로 인한 이들과 혼맥, 인맥으로 연계된 주류 사대부들의 지지를 엄청나게 잃었다는 방증이다.
6. 여타 기록 왜곡[편집]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이숙번이 거느린 장사 2명과 기병이 10명, 보졸이 9명에 여러 군의 종자와 노복 10여 명이 동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언뜻 봐선 수십명으로 나라를 엎었다는 곡필 같지만, 이들은 일단 정안군과 왕자들을 경호하기 위해 궁문 바로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정도. 어차피 같은 기록에서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병력이 쭉 늘어서 있었다고 함께 밝히고 있으며, 원경왕후 민씨가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거병을 도왔던 사실도 몇 차례에 걸쳐 언급된다. 이방원이 마냥 많은 병력을 처음부터 거느렸다고만 보기도 어려운 것이, 공식적으로 사병이 몰수된 마당에 여전히 대대급 이상의 사병을 몰래 육성하고 있었다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이를 감지하지 못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정도전이 맥없이 선공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쿠데타측은 최초에 저 수십명 수준의 경호 인력과 이숙번의 안산군 병력 외에 직접적으로 손에 쥔 병력은 없었고, 거사 직후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 몰수되어 재편된지 얼마 안되는 사병 출신의 중앙군과 포섭된 친위군을 주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43] 다만 상술되었듯 해당 사건이 일어난 태조 7년에 충청도 병사와 경기좌도 병사가 도성 보수를 위해 올라와있던 상황이었고, 하륜 또한 해당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8월 2일에 태조로부터 친히 교서와 부월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지라 그 수를 파악하기 더욱 애매한 상황이다.[144] 오히려 만약 태조 병환 조작설이 사실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 왕을 구금하고 그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것은 말이 된다. 반대로 수백명이면 은밀히 왕을 구금하기도 애매하고 정면승부하기엔 정규군에 비할 정도가 안되므로 수백명으로 쿠데타에 성공한것이 더 가능성이 낮아서 문제[145]
그런데 당시 경복궁 숙위병 사령관은 이방석이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저항을 못했다. 숙위병의 수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든지, 아니면 숙위병들마저도 칼을 거꾸로 잡았든지, 그도 아니면 숙위병이 대처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방원 측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동원해 급습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또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문서를 참조할 것.
6.1. 왕자 살해 음모는 실존했는가?[편집]
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왕자들을 태조의 병을 핑계로 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역관광시킨 것으로 서술했으며 이것이 이른바 종친모해죄의 직접적인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심지어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무인년에 태상왕이 아프시자 정도전 일당이 적자들을 쳐 없애려" 했다는 기사들이 몇 번씩 나온다.
이후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이나 이를 기반으로 한 용의 눈물, 후의 정도전 등에서 모두 이를 따랐지만[146][147] 실제 그랬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정도전이 당대의 알아주는 권신이라지만 명색이 다른 종친도 아니고 태조의 친아들들을 죽이는 일을 태조의 윤허도 없이, 그것도 궁 안에서 저지른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특히 왕자들과 이리저리 얽힌 구파 공신세력들의 반발을 진압하자면 사실상 친위쿠데타 수준의 후속행동이 필요한데 정작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파는 실로 맥없이 여기저기서 쿠데타군에게 각개격파당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지휘 혹은 묵인해줘야 할 태조는 기록을 보면 병으로 누워있다가 급작스러운 반란 소식 앞에 극도로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며, 이방석 또한 아무 대응을 못했다.
당시 궁 안에서 태조를 간호하던 것은 세자의 매형인 흥안군 이제와 태조의 서제인 의안군 이화인데, 이화는 칼 들고 싸우겠다는 이제에게 집안일일 뿐이니 가만 있으라고 구슬릴 정도로 확고한 정안군파였다. 위의 여러 정황들을 보면 경복궁 친위병들 역시 상당수가 이방원 측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상황에서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면 당장 정보가 새어나갔을 것이다. 왕자들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일을 모의하면서 정작 궁 안에 정안군파를 남겨두고 내부단속부터 실패한다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정도의 일을 실행하려 했으면 이미 한차례 궁 내부에서 친이방원계들에 대한 대숙군이 벌어졌어야 정상이고, 그랬다면 하륜은 태조실록에서 또 정도전이 태상왕이 아프시자 궁인과 갑사들을 장악하려 들면서 어쩌고 하는 식으로 신나게 손을 놀렸을 것이다. 게다가 정작 정안군과 함께 또 다른 최유력 적장자였던 영안군 이방과는 궁밖의 소격전에서 태조의 건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지 입궁하지 않았다. 남은의 경우는 일단 몸을 피했다가 "정도전이야 어그로 만땅이라 죽었지만 난 괜찮겠지" 하면서 정안군을 찾아갔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무려 살해모의까지 해놓고서 미움받을 짓을 안 했다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력으로 가능할 일일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하륜의 졸기에 꽤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해당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전략)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148]
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149]
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후략)
즉 이방원이 "쟤들이 자꾸 우릴 죽이려고 하는데 어쩌지?"라 묻자 하륜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하륜은 1398년 8월 초에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갔으니 이는 적어도 무인정사가 일어나기 1달 전에는 있었던 대화다. 이를 보자면 이 사태를 이방원 측의 잘 준비된 선공과 계획된 누명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궁에 갔다가 돌아온 이방원이 자신이 죽을 뻔했다며 병력을 모으려고 해서 무전기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고서야 한두시간만에 갑자기 여기저기에 흩어진 수천의 병력이 뚝딱 - 그것도 사병이 혁파된 마당에 - 모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 측이 아주 결백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하륜의 합류시기가 미묘한데, 만약 이방원의 거병이 잘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면 하륜은 졸기에 나온 것처럼 혼자 상경하여 후속병력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드라마)에서처럼 충청도의 대군을 이끌고 당일 밤부터 주력을 맡아야 했을 것이다. 정작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는 하륜은 행적은 고사하고 아예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며 거병 4일이 지난 9월 1일에서야 정당문학으로 임명되면서 재등장한다.[150] 또한 갑자기 병력이 준비되는 것도 숙위군이 이미 포섭되어 있다면 어려울 일은 없다. 미리 계획을 입수하고 한성 상주 인원에게 준비시켜두면 그만이니까.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서는 정도전 일당이 송현방 남은의 첩 집을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이화, 이무 등이 계획을 알려주며, 박포가 정도전 진영을 정탐했다고 서술하는 등 어떻게 이방원이 계획을 알 수 있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적고 있다.[151] 이무는 특히 당시 정도전의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훈련 소홀 문제에 대한 실드를 못 받고 파직당했기 때문에 신발 거꾸로 신을 동인도 충분했다
영안군 이방과가 입궁하지 않은 사실도 어찌보면 결정적인 증거까지는 아니다. 이방과는 분명히 차적장자의 명분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이방석 측에서 포섭 내지 타협하기에 그나마 편한 상대였다. 특히 효심이 깊은 이방과로서는 아무리 동복형제들과의 우애가 깊다 해도 막내의 안정적인 즉위를 위해 아버지가 살해를 지시 혹은 묵인했다는데 적어도 직접적으로 반발할 가능성은 적었고, 설령 반발한다 해도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 모를까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정치적 리더십을 보일 가능성도 낮았다.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자산조차 하필 이방과 이전에 이성계에게 충성하는 동북면 가별초이기 때문에 충분한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그런 그를 살려둔다면 정도전이나 태조의 입장에서는 왕자들의 살해에 적어도 몰살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신의왕후 소생 vs 신덕왕후 소생의 구도로 낙인찍히는 상황은 면할 수 있고, 나아가 이방과의 묵인이라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즉 어디까지나 이방원을 비롯한 '일부' 왕자들의 불온한 소행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으며 그 증거로 품행이 방정한 영안군은 아무 일 없다고 잡아 뗄 수 있는 것이다.
종합해 볼 때 거병일의 결정 타이밍은 한성의 병력은 동원이 가능하지만 충주의 충청감영에는 빨라야 8월 하순 중반쯤에야 연락이 되는 시점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군의 중추가 될 수 있는 하륜과 충청감영의 합류를 포기하고 일단 일을 벌일 정도로 이방원 측이 상황을 급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152] 문제는 왕자살해음모를 긍정하자면 정도전은 왕의 윤허도 없이 왕자들을 죽이려 하면서, 피아 구분도 못하고, 보안유지도 실패했으며, 심지어 현장 지휘조차 손을 놓은, 그야말로 작전의 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따르면 이게 정도전 혼자 준비한 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무, 이근, 장지화, 이직, 이제 등 송현방 멤버들이 함께 준비했다고 하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황당한 일이다.
이를 고려하면 실제로 살해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 정도전 측의 별 의미 없는 움직임을 가지고 이방원 측에서 심각하게 오해해서 다소 급작스럽게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서 봤듯이 정도전에게 억하심정이 있을만한 내부배신자도 존재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방원 측이 이미 거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놨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러자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다는, 혹은 살해할 것이라는 예측 자체는 이미 세간에 파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막내의 세자책봉이라는 초유의 명분제로 승계시도는 큰왕자들의 존재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능력, 세력, 야심의 3박자를 모두 갖춘 이방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위에서 이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을 부렸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같은 기록에서는 이방원이 이방번에게 그가 멀쩡할 리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구슬렸다는 대목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생각보다 기록 짜깁기가 많은 사료[153] 라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가 중요한데 조선 전기 승정원일기가 임진왜란때 몽땅 불타버려서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가 요원하다. 사실 승정원일기라고 조작 없이 멀쩡했을지도 의문이지만.
7. 태조의 병환[편집]
7.1. 태조 병환 조작설[편집]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는 태조가 당시 와병 중이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왕자의 난 전후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의 병환에 대한 기록은 총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154]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아파서 누웠다는 사람이 3일 만에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모순된 기록이 보이고, 태조가 아팠다면 아내 신덕왕후 때처럼 거처를 옮긴다든가 대사령이나 불공처럼 회복을 기원하는 행동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1차 왕자의 난 직전 태조의 회복을 위한 행동은 오로지 영안군 이방과가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는 언제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62세의 나이였고, 요동 정벌을 앞두고 있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런데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즉각 입궐해 상황을 살피면서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지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태연하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하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이나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조는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했다.
7.2. 반론[편집]
실록을 보면 예전의 씩씩했던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프긴 했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겉보기에 건강해도 어느 날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게 노인들 건강이다. 아무리 실록에 윤색이 되었다 해도 앞뒤의 기록과 교차해보면 어느정도의 신뢰성은 검증할 수 있는데 이 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태조는 2년 전인 1396년에 그토록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신부전증으로 급사하는 충격적인 비극을 겪었다. 배우자의 사망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사안으로[155][156] , 특히나 그 사망이 급작스럽거나 비참하다면 젊은 사람도 하루만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애처가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사망한 사례는 군주들 중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건한 군주였던 청태종이나 순치제도 배우자(정확히는 총애하던 후궁)가 죽자 고작 1년만에 각각 뇌출혈과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이미 환갑을 넘긴 태조라면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자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어줘야 할 신덕왕후의 죽음으로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후계구도를 공고화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는데 위에서 보듯이 신덕왕후의 친척들조차도 이방석의 승계에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으며, 정도전이 추진하는 요동정벌과 사병혁파 정책 덕에 조정 내의 분열과 대립이 개국 이래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으니 차기 권력구도와 관련된 정치적 안배 문제로 스트레스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슬픔으로 몸을 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세우려고 직접 수도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묫자리를 찾는 등 꽤나 무리를 했다.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난이 일어난 그 날만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1398년 내내 꾸준히 등장한다.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태조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신하가 되어서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몸이 안 좋긴 한데 며칠 푹 쉬고 약 잘 먹으면 완쾌될 정도라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술 마신 다음날의 숙취나 무리하게 움직인 다음날의 몸살같이, 꼭 중병이 아니라도 젊은 사람조차 걸렸을 때 무력화 되어서 자리보전해야 하는 병은 있다. 태조 역시 처방 잘 받고 하루이틀 푹 쉬면 나을 잔병이 걸리지 말란 법은 없다.[157] 애초에 또 60대라 그런 잔병을 앓는 게 오히려 정상일 나이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말선초의 60대는 당시의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감안하면 21세기의 60대와 동일선상에 놓는 것 자체가 곤란한 연령대다.
당시는 음력 8월 말로 양력으로는 10월 초[158] 에 해당하는 환절기였기 때문에 국사나 군무 등으로 조금 무리했다면 심한 감기몸살이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다. 게다가 이 해 하반기에는 계속해서 폭우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져 법석(법회)을 열게 하는 등 날씨도 영 좋지 않았다. 어디 거동이라도 잘못 했다면 꼼짝없이 몸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실제로 7~8월 태조의 행적을 보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데, 7월 27일 폭풍이 불고 우박이 내리던 날 태조가 흥천사에 거둥하고[159] 바로 이틀 뒤인 29일에 5월 이후 3개월만에[160] 병이 났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후 8월 3일과 6일 잇달아 병이 난 직후 8월 9일 흥천사에 거둥했고, 13일에 세자 이방석이 길복[161] 을 입고 정릉을 지키던 이서와 강인부를 표창한 다음날 14일에 다시 태조의 병환 기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보면 7월까지 중국 사신 접대 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162] 7월 말 궂은 날씨에 무리해서 외출을 한 태조가 감기몸살, 혹은 인플루엔자 등 환절기 질병에 걸렸고, 완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국사와 신덕왕후의 3년상 마무리 등으로 무리하다가 증세가 도지기를 8월 내내 반복했다고 추측해도 크게 무리는 없으며, 이렇게 병세를 질질 끌고 있는 상황이니 이방원 측에서 궁내 지휘관들을 포섭하고 날짜를 잡을 틈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감기몸살 정도면 다행이지 인플루엔자는 정말이지 꼼짝없이 드러눕는 것 외에 방법이 없고, 그 외에 위염이나 장염 등등 좀 괜찮다 싶어서 무리하면 바로 재발해서 드러눕게 만드는 병은 한둘이 아니다.
이를 보면 태조의 병은 정릉 원찰인 흥천사 거둥에서부터 시작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태조가 이방석을 책봉한 가장 강력한 근거가 신덕왕후였고, 나이도 어리고 큰왕자들에게 능력과 세력 면에서도 밀리는 이방석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태조가 택한 방법도 정릉을 왕궁 코앞에 조성해 죽은 신덕왕후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태조에게 있어서 신덕왕후의 3년상 관련 행사들은 자신의 몸이 상하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챙겨야 하는 최우선 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태조의 몸이 병들자 난이 터졌고 그 주력으로 지목되는 것이 정릉 숙위를 위해 상경한 것으로 추측되는 안산군 병력이니, 결국 이방석의 승계를 위해 택한 행보가 정작 이방석을 죽인 아이러니한 결과였다. 태조의 병은 9월 초에 수정포도를 구해 먹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 측에게 실무를 떠넘기고 양위까지 하면서 분노와는 별개로 그동안 격무에 시달렸던 몸이 자연스레 회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도전 측이 태조의 병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에는 오히려 이제는 정말 이방석이 즉위할 판이라, 뭐라도 하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시그널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163] 사실 7월 말부터 내내 태조의 병이 도지고 낫고를 반복한 상황이라 매번 경복궁에서 숙위했다간 정도전부터가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 측이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이미 사병이 혁파되어 중앙군으로 편입되었고, 왕자 및 종친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그 결과가 미흡하다 하여 그 휘하 사람들에게 태형을 내린 것이 약 2~3주 전이었다. 즉 이미 삼군부의 군령이 왕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상황이었으며 세자의 동복형인 이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들려놓았으니 나름대로는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태조가 앓아누워있긴 하지만 역전의 용장인 박위가 궁내에 있었고 삼군부 절제사를 지냈던 흥안군 이제가 입궐해 숙위중이었으며, 자신이 열심히 키워놓은 만16세의 세자가 궁궐 친위병 정도는 충분히 지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혁파해서 모아놓은 중앙군과 이방번이 아무 도움이 안 될줄은 몰랐을 것이다.
흔히 정도전 일당이 송현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록에서는 '노복들은 잠들어 있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奴僕皆睡, 道傳、誾等, 張燈會坐言笑)고만 기록되어 있다. 술을 마신다면 노복들이 계속 심부름을 해야 하니 주인들을 두고 먼저 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쳐들어왔다면? 아들이고 뭐고 거기서 끝났다. 반란군이 세력을 쉽게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가별초 시절의 기억이 생생한 중앙군이 '큰 도련님'들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별초들이 자신들의 '대장님'이 멀쩡히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 도련님이고 나발이고 호통도 필요없이 팔짱 끼고 서 있기만 했어도 그냥 끝이다.[164]
흥안군 이제는 직접 시위병력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다고 했지만 함께 있던 이화의 만류와 태조의 부동의로 실패했다. 태조의 기력이 충분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이제가 반격을 시도해봤을 것이고 실록 혹은 연려실기술같은 야사에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은 음모론자들이 막연히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인정사 이전까지는 세자책봉의 책임이 정도전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있었음을 밝히는 등 생각보다 윤색이 적은 기록이다.[165] 더군다나 멀쩡한 태조를 힘들여 구금할바에야 차라리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정도전을 몰래 암살해버리는 게 훨씬 견적이 나올 일이다.
위에서 의문점으로 제시한 조사의의 난은 오히려 무인정사 당시 태조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좋은 반례가 된다. 이미 무인정사로부터 4년이 지났고 아예 이방원이 왕위까지 확실히 차지해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성계는 자신과 가별초들의 근거지였던 함길도에서 순식간에 1만의 병력을 모아 내전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권위가 남아 있었다. 하물며 현역 군주인 그가 난을 감지하여 반군 앞에 상방검을 들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반역죄로 삼족을 멸할 일이다. 의심하는 쪽에서는 태조가 그렇게 아팠다면 어떻게 여기저기를 그렇게 쏘다니며 함흥까지 올라가버릴 수 있었겠냐며 의문을 제기하는데, 반대로 멀쩡한 상태의 태조를 강제로 구금해 난을 성공시킨 것이라면 오히려 그대로 궁 안에 유폐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태조가 거동을 할 수 없다고 열심히 둘러대도 모자를 일이다.[166] 태종이 이성계의 무기력함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신을 접대하고 흥천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고 평주(평산)니 낙산사니 신도(한성)니 오만 곳을 쏘다니도록 놔뒀을 리가 없다.[167]
명분 면에서도 무인정사는 다른 반정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데, 직접적으로 왕을 폐위시켜버린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아예 왕을 폭군으로 지목해버렸지만 무인정사 지도부는 창업군주이며 친아버지인 태조를 상대로 폭군의 ㅍ자도 꺼내지 못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임금 옆의 간신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계유정난과 비슷하겠지만, 그 계유정난 때에도 수양대군은 어리디 어린 단종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는 데 무려 2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반대파를 전멸시키고 조정을 다 장악하고도 어린 왕을 상대로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력이 충분한 창업군주 친아버지가 멀쩡한 몸으로 반란군 앞에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무리 사대부와 종친들이 이방원을 지지하며 몰려왔다고 해도 가별초를 이끌고 당당히 나타난 이성계의 면전이라면 이방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한줌 부자의 정에 의지해 폐서인을 목표로 하는 것 뿐이었다.[168] 특히 조준 같은 주요 관료들이 한 번 머뭇거린 것을 제외하고 생각보다 순순히 따른 것을 보면 이들도 태조의 병환으로 경복궁이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태조가 병환중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바로 거병시기다. 전술했듯이 이 사건은 사병이 혁파된지 약 10여일이 지난 시점에서 터졌는데, 상식적으로 거병을 시도한다면 사병을 손에 들고 있는 상황이 사병이 몰수된 상황보다 훨씬 쉬울 노릇이다. 거병과 거의 동시에 경복궁을 장악할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한 이방원이 사병의 유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기다릴 조건이라면 오로지 태조의 병환과 그로 인한 경복궁의 일시적 혼란 외에 다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병이 이미 몰수된 이방원에게 궁궐수비군이 내응할 이유 역시 태조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찾을 수가 없다. 각종 야사나 음모론이라면 환장을 하는 대한민국 방송작가들이 유독 무인정사만큼은 태조의 와병 상황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외에 도저히 개연성 있는 전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가벼운 병치레 탓에 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태조가 신속하게 밀어붙인 위화도 회군과 비슷하게 1차 왕자의 난도 신속하게 펼쳐졌다.
여담으로 과거 이 항목은 드라마 정도전이 종영된 이후 기레기들에 의해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고 무단 도용되었다.기사 1, 기사 2 지금은 항목에 수정이 좀 가해진 상태.
8. 만약 조선과 명의 결혼동맹이 성사되었다면?[편집]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성계와 주원장이 서로 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인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양국간에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더니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이성계에게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는데 니가 열받게 굴어서 없던일로 하겠다”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파투가 났다고 한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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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정황상 주원장은 "결혼 정도면 요동가지고 지랄 안 하기 충분한 대가겠지"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결혼까지 시켜줄 정도면 요동 정도는 지참금으로 챙겨먹을 수 있겠지" 하고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 그리고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파투나자마자 조선에서는 거의 곧바로인 1397년 6월부터는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돼서 조준이 반대하니까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디스한다거나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1397년 9월에 심씨를 공식적으로 세자 이방석의 현빈으로 삼으면서 관련 논의들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이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정난의 변과 얽혀 조선의 행보가 전혀 달라졌을 거란 if도 있는데 일단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사망하기에 저 때 저 국혼만 성사됐으면 주원장이 죽자마자 8월에 터지는 정난의 변과, 마찬가지로 8월에 터지는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너무너무 재밌어 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이 되면 원래 막내였고 나발이고 세자 이방석의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질 테니 함부로 비비기도 힘들고, 공식적으로 명나라랑 척지고 요동정벌 하자는 것도 아니니 그거 핑계로 쿠데타도 무리니 1차 왕자의 난은 아무래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169] 대신 그렇게까지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아무래도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안 들수가 없어진다. 주원장도 말년에 번왕들 따로노는거 눈치 못챈것도 아니니 저 시점에 조선이랑 결혼동맹 했다 치면 당연히 건문제랑 가까운 혈연으로 맺었을 질테고 그렇다면 장인의 나라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에 조선이 개입을 할 수 밖에 없어질테니 말이다. 즉, 주원장이 쿠빌라이 처럼[170] 자신의 딸(황녀)을 조선에 직접 시집보낼 경우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나라의 원병 요청 요구는 역으로 거부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는 뜻이다.
각도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남은(南誾)·박위(朴葳)·진을서(陳乙瑞) 등 8명의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왜구가 물러가매, 남은은 경상도에서, 박위는 양광도 에서, 진을서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명부(名簿)를 만들게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에는 안렴사로 하여금 군사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 ·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만 8백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만 5백여 명이었다.
-- 각도에서 군사를 점고하여 군적을 올리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6일 경오 3번째기사 (1393년)
이 경우 이성계 시절 부터 준비된 조선의 20만 병력들은 연왕측의 후방 공격을 위해 동원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선과 명의 국혼이 정상적으로 성사되었을 때를 가정한 경우이지만 말이다.
그 이후에 잘만 스노우볼이 굴러갔다라고 가정한다면 연왕(燕王)의 뒤통수를 공격한 대가로 조선측이 전후 요동이나 만주를 건문제의 명나라로부터 선물로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주 망상도 아닌게 북경이 아닌 남경 조정의 입장에서는 조선 덕분에 연왕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거기다 북방 최정예군인 연왕군 15만이 날아가버리고 내전으로 재정지출까지 늘어나버리면 그나마 가까운 요동도사를 연으로 이동시키고 혈연으로 이어진 조선에게 요동을 떠넘기는 것도 생각 못할 대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나비효과로 인하여 다른 방식으로 요동과 만주를 확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역으로 연왕이 건문제와 조선 양측을 모두 격파하였다고 가정한다면[171] 빡친 영락제에게 조선이 아예 멸망당하고 명나라령 조선성이 되는 그런 결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172]
9. 사극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1차 왕자의 난/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