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호법운동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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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次 護法運動
First Constitutional Protection Movement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부원지쟁과 헌정상각회의 분열
3.3. 군정부의 조직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호법운동은 크게 위안스카이가 독재를 본격화한 1913년부터 쑨원이 대원수부를 수립하는 1923년까지 10년 동안의 쑨원과 혁명당의 임시 약법 체제 회복 운동을 뜻한다.

그중에서 1차 호법운동은 쑨원이 광저우에 도착한 1917년 7월 17일부터 광저우를 떠나는 1918년 5월 21일까지, 1917년 7월 장훈복벽 이후 돤치루이가 부정해버린 임시 약법 체제를 사수하고자 하는 쑨원을 비롯한 혁명당원과 이를 세력확대에 이용하려 했던 남방 실력자들의 투쟁을 말한다. 남방군벌들이 쑨원의 기대를 저버리고 북양군벌과 야합하면서 실망한 쑨원이 군정부를 탈퇴하면서 종결되었다.

2. 배경[편집]


"약법과 국회는 공화국의 명맥이다. 명맥이 존재하지 않는데, 몸이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식자라면, 위안스카이가 약법을 파괴하고 국회를 해산했을 때, 벌써 황제를 칭하는 날이 있을 것을 알았을 터인데, 그 징조를 밝히고 큰 소리로 반대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나는 이때 무한한 비감함을 품고. 이에 혁명 두 글자를 동포에게 바쳐 근본해결을 하고자 했다. 마음은 곧으나 어진 우리 동포들은 위안스카이가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양심의 주장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여 조국에 모든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 주안회를 발기하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왔는지, 전국의 호걸들이 문득 깨달아, 들고 일어나 약법을 파괴하고 국회를 해산한 위안스카이의 죄를 물었다. 죄수의 우두머리가 주살되면, 약법은 회복되고, 약법이 회복되면 민국은 소생한다."

1916년 4월 27일 쑨원의 담화.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1916년 6월 6일 죽자 북양군벌 내부에서는 그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군벌들 간에 알력이 발생했다. 6월 7일 국무총리 돤치루이는 신약법에 의거하여 대총통령으로 부총통인 리위안훙을 대행으로 삼았다. 6월 7일에 리위안훙은 대리총통에 취임했고 여기까진 모두가 납득하였다. 하지만 남방의 군무원[1]은 1912년 임시약법과 1913년 10월 4일에 발표된 대총통선거법에 따라 리위안훙이 선출된 것으로 보았고 베이징의 북양정부는 1914년 12월 29일 위안스카이가 수정한 신약법의 수정대총통선거법에 따라 리위안훙이 대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신구약법 싸움이 발생하고 구 약법을 따르라는 호법운동이 벌어졌는데 이 호법운동에는 쑨원이 있었다. 상하이에서 국회의원과 혁명당원들이 모여 위안스카이의 신약법은 위안스카이 개인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였고 쑨원은 리위안훙에게 구약법을 회복하고 국회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탕지야오, 천춘쉬안 등이 민국 원년의 약법을 회복하고 구 국회를 다시 소집하고 제제 추진파들을 징계하고 군사대책회의를 소집하라는 4가지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만약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군무원을 폐지하고 서남 각 성의 독립을 취소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6월 29일 국무원을 소집하여 구약법의 회복과 신약법 폐지를 결정하고 국회를 8월 1일에 다시 소집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제제 추진파들을 징계하겠다며 그 명단을 발표했다. 이에 위안스카이에 반대하는데 앞장선 탕지야오를 비롯한 서남군벌들은 이를 납득하고 7월 14일 군무원 취소를 알렸다. 8월 1일 임시약법에 따라 국회가 소집되었고 임시약법 체제가 다시 열렸다. 탕화룡과 진국상이 각각 중의원 의장과 부의장에 임명되었고 왕가양과 왕정팅이 참의원 의장과 부의장에 임명되었고 리위안훙은 국회에서 대총통 취임 선서를 하였다. 국회는 부총통으로 직예군벌의 수장 펑궈장을 선출했는데 펑궈장은 베이징으로 가면 기반인 강소성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난징의 강소도독부에서 부총통에 취임했다. 이로써 중국의 민주주의는 일견 회복된 듯도 싶었는데... 실상은 안휘군벌의 수장인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안휘군벌의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곧 민주주의에 위기가 오게 된다.

3. 전개[편집]



3.1. 부원지쟁과 헌정상각회의 분열[편집]


돤치루이는 안휘군벌의 세력 확장을 위해 대리총통 리위안훙과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이 때문에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여기에 돤치루이가 연합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요구를 구실로 대독절교안과 대독선전안을 강요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구 국민당과 일부 진보당으로 구성된 헌정상각회는 각성자치, 중립주의 고수, 양원제 채택 등을 주장했고 량치차오의 연구계와 량스이의 교통계는 참전과 중앙집권제를 주장했다. 영미의 로비와 돤치루이의 압력으로 국회는 대독절교안까지는 받아들였지만 대독선전안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돤치루이가 깡패들을 풀어 국회의원들을 폭행하며 위협하자 분노한 국회의원들은 국회를 정회하고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이에 돤치루이는 독군단을 동원하여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했지만 리위안훙은 도리어 돤치루이를 경질하는 것으로 답하면서 부원지쟁은 폭발하였다. 한편 헌정상각회는 온건파인 객려파, 급진파인 병진구락부, 진보당 강경파 출신의 도원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객려파는 곡종수, 장요증 등의 관련 인물들이 돤치루이 내각에 포함되어 있어 돤치루이에 대한 온건한 노선을 견지하며 세계대전 참전도 찬성했으나 도원파와 병진구락부는 강경히 반대했다.

결국 도원파와 병진구락부가 합쳐져 민우사를 조직하고 객려파는 곡종수, 장요증 등 세계대전 강경 참전파들이 정학회를 구성하여 갈라져 나왔고 이어 또 다른 온건 참전파들이 익우사를 조직했다. 장쥐, 우징롄은 객려파의 존속을 주장하며 객려파에 잔류했다. 이후 익우사에서 왕정팅, 저보성이 다시 정여구락부를 구성했으나 호법국회 수립 후 다시 익우사에 통합했다.

3.2. 장훈복벽[편집]


돤치루이가 각 성의 독립을 선동하고 아예 신정부와 의회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돤치루이를 막을 힘이 없던 리위안훙은 5월 31일 안휘독군 장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사태를 해결하려 했는데... 복벽을 노리고 있던 장쉰이 난데없이 선통제의 복위와 청나라의 복고를 단행해버리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리위안훙과 돤치루이가 일시 합작하여 돤치루이가 국무총리 겸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을 토벌함에 따라 복벽은 12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자세한 것은 장훈복벽 문서 참조.

3.3. 군정부의 조직[편집]


1917년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에 입성한 후 교통계, 연구계와 함께 7월 17일 신내각을 조각하자 연합국 공사회의의 결의에 따라 프랑스 공사가 돤치루이에게 조속히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해줄 것을 요청하며 이에 응한다면 연합국이 중국을 원조하겠다고 제의했다. 돤치루이는 이를 즉각 수락했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이 해산해버린 구 국회에 대해서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법은 필요치 않다. 국회는 필요치 않다. 옛총통도 필요치 않다."라며 안하무인으로 무시하여 쑨원 등의 큰 반발을 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2]을 구실로 임시참정원을 소집하여 새로 국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국무원은 구국회 회복이나 재선거, 개조 등이 불가능하다며 7월 24일 임시 참의원 소집과 신국회 조직에 대한 각성의 의견을 묻는 통전을 7월 24일 발표했다.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약법이 근본대법이므로 약법에 근거하여 약법 상의 참정원을 소집한다. 약법 상의 참정원직권에 의거하여 제헌을 해결하고 국회조직을 수정하는 각 문제는 모두 법을 지켜서 하는 것이며, 정치적으로 공평타당하고 법률적으로도 모순이 없는 것이다.

이에 서남은 반대했지만 북방의 각 성은 모두 돤치루이의 주장에 찬성했다. 돤치루이는 여세를 몰아 독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여기에 돤치루이는 일본과 교섭, 매국적인 니시하라 차관과 산동밀약을 맺었고 총 8건에 걸쳐 1억 4500만 엔의 차관을 들여왔다.

그의 독단적 행동에 펑궈장을 비롯한 직계 군벌들은 불만을 품었다. 펑궈장은 강소독군에 리춘을, 강서독군에 진광원을 임명하여 자신의 사람을 심었고 돤치루이도 지지 않고 호남독군에 푸량쭤, 사천사판사 겸 장강상류경비총사령관에 우광신을 임명하여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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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쑨원

군벌들이 민주주의 회복에는 관심없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자 쑨원은 랴오중카이, 허샹닝, 주집신, 장병린 등을 이끌고 상하이에서 군함을 타고 7월 17일 광저우로 이동, 광동독군 천빙쿤과 광동성장 주경란의 환영을 받았다. 그날 밤의 환영대회에서 쑨원은 공화국이 수립된지 6년이 지나도록 국민들이 공화의 회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는 집정자들이 공화의 얼굴을 하고 전제 행위를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각계에 호법을 호소했다.

쑨원이 광저우에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장훈복벽 직전, 광동독군 천빙쿤과 광서독군 탄하오밍이 1917년 6월 20일 양광이 잠시 자주하겠다고 통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호법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쑨원의 활동의 기반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여기에 양광을 지배하는 계계군벌 루룽팅과 운남을 지배하는 전계군벌 탕지야오 등 서남군벌들은 북양정부와 대립하여 서남에서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쑨원의 명망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 한편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을 견제하기 위해 쑨원을 지원하였다. 쑨원은 7월 19일 전국 국회의원들에게 광둥에 모여 비상회의를 열 것을 호소하자 7월 21일 해군 총사령 정벽광이 돤치루이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제1함대 사령 임보택과 휘하 함대를 이끌고 남하했는데 8월 5일에 쑨원에게 합류한 함대가 순양함 3척, 포함 6척, 보조함 4척이었다. 당소의, 왕징웨이 등도 쑨원에 합류했다. 해군이 쑨원의 편에 섰다는 걸 알자 국회의원들도 쑨원에 동조하여 13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이 광저우로 남하했다.

8월 18일 쑨원은 황포공원에 국회의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개최하고 국회의원들의 건의에 따라 8월 19일, 8월 25일에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국회비상회의를 소집하여 군정부를 조직하고 임시 약법이 회복되기 전까지 군정부를 중앙정부로 삼자고 통전했다. 이 결의에 따라 1917년 8월 25일과 31일에 광저우의 광동성의회에서 비상국회을 개회하여 중화민국 군정부 조직대강 13조를 통과시키고 임시약법 회복을 위해 행동하기로 결의했다. 9월 1일 84표를 얻어 쑨원이 육해군 대원수로 당선되었고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9월 2일 루룽팅과 탕지야오가 원수가 되었고 내각이 조직됨으로 베이징의 북양정부와 광저우의 호법정부가 대립하는 남북대립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쑨원은 황포공원의 수인례에서 육해군 대원수의 인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전력을 다하여 간흉을 제거하고 약법을 회복하며, 민국 원년에 다하지 못한 대업을 완성함으로써 지난 수년간에 공을 이루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고자 한다. 나는 모든 책임이 내 한몸에 있음을 알고 있다. 이 결심을 바꾸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9월 10일 쑨원은 각부 총장을 임명하여 군정부 인선을 완료하였다. 외교총장에 오정방, 교통총장에 후한민, 육군총장에 장개유, 해군총장에 정벽광, 재정총장에 탕사오이, 내무총장에 손홍이를 임명했으며 대원수 명의로 비서장에 장병림, 참군장 겸 육군총장 서리에 쉬충즈, 참모총장에 리례쥔, 해군총사령관에 임보택, 위술사령관에 방성도, 친위군사령관에 이복림, 1군 사령관에 천중밍을 임명했다.

3.4. 호법전쟁[편집]


1917년 9월 18일, 호남육군 1사단 2여단장 임수매와 영릉 진수사 유건번이 돤치루이에게 반기를 들고 약법존중을 선포, 호법정부에 가담했다. 이에 9월 29일 돤치루이는 대원수 쑨원과 비상국회의장 우징롄 체포를 선언하고 호법정부를 토벌할 것을 지시하면서 남방과 북방 사이의 호법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방에서는 내전에 반대하는 직계와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환계의 갈등 끝에 돤치루이가 국무총리에서 사직했고 남방에서도 정치적 음모로 인해 쑨원이 퇴출되면서 호법전쟁은 1918년 11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결과[편집]


결국 남방군벌들의 괄시 끝에 1918년 5월 21일 쑨원이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가게 되면서 1차 호법운동은 끝났다. 1920년 11월 28일, 광동의 정권을 차지한 천중밍의 초청으로 쑨원은 다시 군정부를 조직하여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지만 천중밍과의 갈등 끝에 1922년 축출당하면서 2차 호법운동 역시 실패로 끝나고 결국 1923년 대원수부를 조직하여 북벌을 꿈꾸게 된다.

5. 참고문헌[편집]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民國 元年을 전후로 한 '約法'과 孫文의 護法運動,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63권 63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臨時約法’體制下의 段祺瑞軍閥政權, 박준수, 동양사학연구 53권, 동양사학회.

6. 관련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13 07:53:17에 나무위키 1차 호법운동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포한 각 성이 광둥에 모여 위안스카이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조직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호국전쟁 문서 참조.[2] 장훈복벽으로 중화민국은 이미 무너졌고 돤치루이의 중화민국은 새 중화민국이니 옛 국회를 굳이 소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