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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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사건의 발단
2.2. 사건의 과정
2.3. 체포된 인물 및 인사
3. 영향
4. 미디어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341-1.jpg
연행되는 105인 사건 관계자출처
105인 사건(105人事件(ひゃくごにんじけん)은 1911년 조선총독부한민족 해방 운동 탄압 목적으로 신민회의 안명근의 독립 자금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대거 체포한 사건이다. 별칭으로 '안명근 사건' 또는 '안악사건' 이라고도 한다.

1910년 독립운동가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자금을 내주지 않던 부호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질책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명근은 밀고당하여 일본제국 경찰에 붙잡혔다. 마침 황해도 지역의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예의주시하던 조선 총독부는 이 사건을 당시 총독으로 새롭게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 사건으로 확대 및 날조하여 관련자 160여명을 잡아들였다.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안악사건'이라고 한다.

일제는 고문과 거짓 자백 강요 등을 통하여 데라우치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신민회 회원과 평안도 주재(駐在) 개신교 신자들을 지목하여 애초 600명을 검거했으나 증거 불충분인 이들을 제외하고 128명을 기소한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가 총 105명이라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2. 상세[편집]



2.1. 사건의 발단[편집]


일각에 의하면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아카시(明石)[1]를 찾아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제보를 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뮈텔 주교가 써 왔다는 일기장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상황적으로 기재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명근 야고보는 사촌 형인 안중근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당시 사촌 형과도 친했다는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에게 총독을 암살하겠다는 의사를 알린 것이 발단이었으며 이를 듣게 된 빌렘 신부가 상급자인 뮈텔 주교를 찾아가 그에게 직접 보고하여 결국 뮈텔이 총독부를 찾아가 그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던 것이다.[2]

당시 종현 성당(명동성당)은 일본인들이 명동성당의 일부 부지를 침범함으로 인해 진고개(충무로 2가)로 넘어가는 통로가 막혀 있었고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다. 1906년부터1910년까지 4년 동안의 재판에서 모두 패소해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기에 명동성당의 뮈텔 주교는 니콜라 빌렘 신부로부터 온 비밀 편지를 아카시 장군에게 전달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명동성당의 부지 문제를 협의하고 즉각 해결하였다.

2.2. 사건의 과정[편집]


애초에 일제는 신민회 간부 및 회원을 포함해 평안도 주재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총 600명을 검거했으며 이들로부터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악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 중 대표적인 주범 128명을 기소했다.


2.3. 체포된 인물 및 인사[편집]


이 사건에서 체포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민회 간부인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외에도 백범 김구 등도 포함되었다. 암살 사건 조사를 핑계로 대거 체포한 인사들은 대부분 개신교인이었는데 기소된 105인 사건 때 드러난 경찰 기록에 따르면 기소자 123명 가운데 장로교인이 96명, 감리교인이 6명, 천도교인이 2명, 천주교인이 2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이승훈용산역에서 기차를 타던 중에 검문 중이던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의 지원 하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같은 출신인 김규식만주에 인삼 장사를 한다는 사유로 몽골로 피신했다가 이후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승훈,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김구, 김규식, 이승만은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윤치호는 이후 일제의 압박으로 결국 친일파로 변신하여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게 되었지만 1945년 해방되자 친일파로 지목받았고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드러누웠다가 그대로 병사했다.[3] 백범의 동지였던 김홍량은 가석방 후 1920년대 중반부터 적극적인 친일파로 변절했다.


3. 영향[편집]


105인 사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꾸며진 일제의 자작극으로도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신민회가 공식 해산되고 105명이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되어 고생을 치러야만 했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공식적으로는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큰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 결과 체포된 105명 중 99명이 무죄 석방되었고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에게 징역 5년 ~ 6년이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그나마 대부분은 형 만기 이전에 석방되었다. 사건 자체가 자작극이라서 일제로서도 막 나가기 곤란했고 변호인들도 이러한 약점을 노려서 집요하게 무죄를 주장했기 때문이다.[4] 물론 사건 과정에서 고문 등으로 인한 인사들의 고통은 결코 적지 않았겠지만.

야구를 전파한 것으로 유명한 필립 질레트영국 에딘버러 국제 기독교 선교 협의회에 "이 사건은 일제가 날조한 사건입니다."라고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일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1913년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YMCA 지도자 강습회에 참석한 후 조선으로 돌아오려던 그를 조선총독부가 방해해 두 번 다시 한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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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한 달동안 집필하여 출간한 《한국교회핍박》의 초판본 사진.

이승만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105인 사건은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증거"라고 조선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승전국인 일본식민지 따윈 안중에도 없던 미국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 외에도 그는 미국의 각지를 돌며 "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데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하며 미국이 기독교 국가임을 활용해 일본의 기독교 탄압을 알려 여론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105인 사건에 대한 "한국교회핍박"이라는 책도 썼다.

그러나 영국령이었던 홍콩의 언론에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홍콩 그리스도인들은[5] 일제를 비판했다. 결국 영국 본토에까지 알려져 언론을 타고 일제는 체면을 구겼다. 그리고 같은 영연방캐나다호주 등에도 사건이 보도되었다.


4. 미디어[편집]


사건의 중요성 때문에 웬만한 어린이용 역사 만화 등에서 사실적으로 코렁탕 고문 장면들이 묘사되는 사건이다.

유인촌이 주연한 KBS 드라마 역사는 흐른다에서는 원작대로 주인공 이규직이 여기 연루된 걸로 모사했다.

김상중이 주연한 KBS 백범 김구 드라마나 김진태가 주연한 백범일지에서도 상당히 잔인한 고문 장면이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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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한 일본군 헌병대 사령관 겸 조선총독부 경무 총감[2] 여기에 대해 니콜라 빌렘 신부가 고해성사를 누설한 것이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는 1차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TV 드라마의 고증오류'다. 물론 고해성사 누설이 아닐 뿐이지 윤리적 논쟁은 따르겠으나 최소한 고해성사 누설이라는 건 루머다. 자세한 건 니콜라 빌렘 문서 참고.[3] 워낙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부터 권총 자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유족들의 말에 의하면 평소에도 지병이 있었다고 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에서는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암살 의혹도 제기하기는 한다.[4] 당시 피고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은 일본과 조선에서 변호 능력으로 유명한 변호사들이었다.[5] 홍콩은 기독교인이 많으며 성공회의 동아시아 위원회가 있는 곳이다. 중국인 최초 목사인 량파를 기념하는 량파 기념 교회도 홍콩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