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 파리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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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파리 올림픽
제8회 올림픽 경기대회
Jeux de la VIIIe olympiade
Jeux olympiques d'été de 1924
1924 파리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VIII Olympiad Paris 1924

파일:1924 파리 올림픽 로고.svg
[1]
파일:1924-olympic-games-poster.jpg
대회기간
1924년 5월 4일 ~ 7월 27일
개최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리
참가국
44개국
참가선수
3,089명[2]
경기종목
17개 종목, 126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
가스통 두메르그
프랑스 대통령
선수 선서
조르주 앙드르
개·폐회식장
스타드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1. 개요
2. 메달 집계
3. 특징



1. 개요[편집]


1924년 5월 4일부터 7월 27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8회 하계올림픽. 이것으로 파리는 최초로 두번의 올림픽을 연 도시가 되었다. 한 세기 뒤 2024 파리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다.

2회 대회의 오명을 씻고 근대 올림픽 창설 30주년과 쿠베르탱의 명예로은 은퇴를 기리기 위해 의욕적으로 준비한 파리 대회는 사상 최대의 5대륙 44개국 2,956명이 참여 전 종목에서 미국의 독주가 여전한 가운데 제반 경기규정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대회다.


2. 메달 집계[편집]


1924 파리 올림픽 메달 집계
최종 집계
순위
국가
메달
합계



1
[[미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 미국
45
27
27
99
2
[[핀란드|

파일:핀란드 국기.svg
]] 핀란드
14
13
10
37
3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프랑스
13
15
10
38
4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 영국
9
13
12
34
5
[[이탈리아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 이탈리아
8
3
5
16
6
[[스위스|

파일:스위스 국기.svg
]] 스위스
7
8
10
25
7
[[노르웨이|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 노르웨이
5
2
3
10
8
[[스웨덴|

파일:스웨덴 국기.svg
]] 스웨덴
4
13
12
29
9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 네덜란드
4
1
5
10
10
[[벨기에|

파일:벨기에 국기.svg
]] 벨기에
3
7
3
13
11
[[호주|

파일:호주 국기.svg
]] 호주 자치령
3
1
2
6
12
[[덴마크|

파일:덴마크 국기.svg
]] 덴마크
2
5
2
9
13
[[헝가리 왕국(1920~1946)|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 헝가리
2
3
4
9
14
[[유고슬라비아 왕국|

파일:유고슬라비아 왕국 국기.svg
]] 유고슬라비아
2
0
0
2
15
[[체코슬로바키아|

파일:체코 국기.svg
]] 체코슬로바키아
1
4
5
10
16
[[아르헨티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 아르헨티나
1
3
2
6
17
[[에스토니아|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 에스토니아
1
1
4
6
18
[[남아프리카 연방|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 남아프리카 연방
1
1
1
3
19
[[우루과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 우루과이
1
0
0
1
20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 오스트리아
0
3
1
4
[[캐나다 자치령|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 캐나다 자치령
0
3
1
4
22
[[폴란드 제2공화국|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 폴란드
0
1
1
2
23
[[아이티|

파일:아이티 국기(1859-1964).svg
]] 아이티
0
0
1
1
[[일본 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 일본
0
0
1
1
[[뉴질랜드|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 뉴질랜드 자치령
0
0
1
1
[[포르투갈 제1공화국|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 포르투갈
0
0
1
1
[[루마니아 왕국|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 루마니아
0
0
1
1


3. 특징[편집]


올림픽 역사에서 뚜렷한 변화를 보여준 대회다.

북유럽 국가들이 끈질기게 주장했으나 '고대 올림픽에는 동계 스포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던 동계 올림픽이 '올림픽 동계 대회'라는 이름으로 승인을 얻은 것이다. 이 대회에서부터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이 분리되었다.

빙상 경기를 중심으로 여성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하지만 여성 참가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선수단에 여성의 참가를 끝내 반대했다.

또한 30년 동안 헌신해온 쿠베르탱이 은퇴하게 되었다. 1925년 프라하 총회에서 쿠베르탱은 그토록 수호하고자 했던 '아마추어리즘'의 세부 조항을 완성한 후 벨기에의 앙리 드바이예라투르 백작(Henri, Count de Baillet-Latour, 1876~1942)에게 위원장직을 넘겨 주었다.

올림픽 엠블렘이 처음으로 도입된 올림픽이다. 이전까지는 글자만 붙여졌으나 전용 로고가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록 판자로 지은 조잡한 건물이었지만, 올림픽 이상의 실현을 위한 각국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선수촌이 사상 최초로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었다. 1925년에 제정된 올림픽 헌장의 기초가 된 각종 원칙과 규정들이 출전 선수와 임원에게 배포되었으며 프랑스의 교육자 디통 신부에 의해 최초로 올림픽 표어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가 이때 나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이 초대받지 못한 올림픽으로,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때가 되어서야 겨우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사실 독일도 초대를 받았지만 프랑스가 완강히 거부하여 선수단이 프랑스에 입국하지 못했으며 1937 파리 엑스포에서도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방문을 거부했었다.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인 에릭 리델은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참가한 이유가 스포츠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주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대신 400m 경기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이것이 나중에 영화 불의 전차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 부분은 2017년 7월 3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추가된 종목은 없지만, 시범종목으로 카누라든가 스쿼시, 배구 등의 종목들이 추가되었다. 최초로 라디오 중계가 도입된 올림픽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 대표팀 럭비 선수들이 프랑스 럭비 선수들과 시합에서 승리했는데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던진 지팡이를 미국 선수가 맞았다. 프랑스 측이 때린 것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집단으로 패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미국팀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빠져나왔고 럭비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는 사건도 있었다.

핀란드의 육상 슈퍼스타 파보 누르미는 5일만에 금메달 4개를 따내며 독보적인 우위를 달렸다. 특히 그는 주종목도 아닌 1,500m 중거리에 우승하자 마자 휴게실에서 한시간을 쉰 뒤, 다시 5,000m결승에 나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결국 누르미는 이 대회에서 총 5개의 금메달을 휩쓸어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5,000m를 포함해 누르미와 겨룬 세개의 종목에서 모조리 패배해 은메달에 머문 빌레 리톨라는 누르미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능히 역사적인 주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리톨라는 이 대회에서 예선과 결승 모두 39km를 달렸다. 그나마 그는 10,000m에서 세계신기록, 3,000m 장애물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각각 기록해서 2개의 금메달을 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3] 하늘은 누르미를 낳고 리톨라를 낳았다.

나중에 1932년 할리우드 MGM이 만든 영화 <타잔>의 주인공으로 돈방석에 올라 앉게되는 조니 와이즈뮬러는 이대회에 출전해 올림픽 3연패를 노린 스웨덴의 듀크 카하나모크를 물리치고 59F의 기록으로 100m 자유형을 석권하고 400m와 800m 계영까지 휩쓸어 수영 사상 최초의 3관왕에 오른다. 파리 대회는 와이즈뮬러의 선풍과 최초로 만들어진 50m 풀과 다이빙대로 말미암아 수영이 올림픽 기본 종목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1908년 4회 런던대회 부터 채택된 축구에서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유럽 이외의 국가가 우승 했다. 주인공은 최초로 참가한 남미의 우루과이이며 월등한 기량으로 우승 해 장차 세계축구가 유럽과 남미의 2대 산맥으로 펼쳐져 갈 것임을 예고했다. 우루과이의 우승은 또한 6년 뒤의 첫 월드컵 우승의 한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우루과이의 메달은 이게 전부였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흑인 금메달리스트가 나왔는데, 멀리뛰기에서 우승한 미국의 윌리엄 드하트 휴바드가 그 주인공이다.

이 대회의 주 경기장은 스타드 이브-뒤-마누아르(Stade Yves-du-Manoir)였다. 현재 파리 생제르맹 FC의 홈구장인 파르크 데 프랭스(Parc des Prince)는 주경기장이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키고 1923년에 공화국을 선포한 튀르키예가 최초로 이 대회부터 튀르키예 국가대표팀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폴란드, 아일랜드, 우루과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도 처음 참가했으며, 중화민국/북양정부도 개막식에는 참석했으나 네 명의 선수(모두 테니스)가 정작 경기에는 불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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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OC가 인정한 최초의 올림픽 엠블럼이다.[2] 남자: 2,954명, 여자: 135명[3] 당시 리톨라가 따낸 10,000m 금메달은 누르미가 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상한 것이었다. 다음 대회인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두 선수가 대결했을 때는 누르미가 금메달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