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강, 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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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조별 라운드 이후 4강 토너먼트를 정리하는 페이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4강 준결승전에 진출한 팀은 개최국 우루과이, 라이벌 아르헨티나, 유럽의 유일한 생존팀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복병 또는 도깨비팀이라 칭할 수 있는 미국이었다.
대진은 아르헨티나와 미국, 그리고 우루과이와 유고슬라비아로 결정되었다.
겨울비[2] 가 내려 질척해진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의 처음 양상은 비등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전반 19분, 미국의 센터 하프였던 라파엘 트레이시가 다리 부상으로 인해 피치 밖으로 나간 사이 루이스 몬티가 선제골을 집어넣어 버렸다. 트레이시는 다리 골절로 인해 시합을 더 이상 뛸 수 없었고, 여러 악재가 겹쳤지만 미국은 전반전을 잘 마쳤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악몽의 시작이었다. 스코펠리에게 후반 11분에 골을 허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골키퍼인 지미 더글러스마저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3] 그 이외에도 미국의 주포 버트 파테노드마저 배에 부상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부상이 계속되다보니 미국은 아르헨티나에게 이후 4골을 허용하며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짐 브라운이 1골을 보태 영패를 면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
여담으로 미국 하프백 앤드류 올드가 후반 24분께 부상을 당했다.[4] 그런데 올드를 치료하러 갔던 팀 닥터(또는 코치)가 실수로 피치에 클로로포름을 떨어뜨렸다가 그 증기를 자기가 흡입하는(...) 바람에 치료는커녕 오히려 팀 닥터가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올드는 치료받지 못하고 잠시 머무르다가 알아서 다시 경기를 뛰었다. 또 다른 설로는 트레이너의 손에 묻은 클로로포름이 올드의 눈에 조금 튀는 바람에 치료는커녕 잠시 눈 한 쪽이 안 보이는 채로 뛰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경기의 처음 분위기는 유고슬라비아가 가져갔다. 4분만에 부야디노비치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9분에 부야디노비치가 다시 한 골을 넣었지만 브라질 출신의 주심 아우메이다[6] 가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취소 사유는 오프사이드. 유고슬라비아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어? 뭐야! 아~ 씨X 거의 다 들어간 건데 미치겠다!! 게다가 우루과이에서 안셀모와 이리아르테가 기록한 3번째, 4번째 골마저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골이 들어가자 경기를 치를 의욕이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우루과이는 유고슬라비아를 6대 1로 처참하게 뭉개버렸고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우루과의 인사이드-레프트 페드로 세아는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4강전 경기는 종료되었고, 아무리 초대 월드컵이라지만 국가대항전에서는 어지간해서 나오기 힘든 6대 1이라는 스코어가 4강전에서 나란히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7] 사실 이 대회 당시에 타 대륙에서 온 팀은 비행기 대신 배를 이용해서 남미에 도착했고, 게다가 배 안에 있는 시간이 보름이 넘어 장난이 아닌 멀미에 시달린 데다가, 그에 따른 체력 안배 및 시차 적응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 상태에서 조별리그를 간신히 통과한 팀이 미국과 유고슬라비아이고, 이들은 각각 사실상 홈그라운드인 아르헨티나와 개최국인 우루과이를 상대해야했다. 전력의 한계가 올 것도 자명한데, 완전히 각개격파되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초대 월드컵에서는 3위 결정전이 없었다.[8] 그래서 3, 4위에 대한 논란이 생기지 않을 것도 같은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1930년 월드컵의 3위는 미국이라 인정한다. 이는 피파 기술 위원회에서 1986년 월드컵까지의 성적을 종합해 놓은 자료에서도 미국 3위, 유고슬라비아를 4위로 기록했었고, 현재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미국이 유고슬라비아를 근소하게 앞서기 때문이다.[9]
불확실한 출처이기는 하지만 1984년의 FIFA 게시판에는 비공식적으로 3, 4위전을 치렀고 유고슬라비아가 3대1로 이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날짜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 외에도 하이데르 자와드(Hyder Jawad)라는 사람이 2009년에 쓴 책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측에서 우루과이와의 경기에 불만을 품고 예정되어 있던 3, 4위전을 걷어차버렸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후신인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나온다. 미국과 유고슬라비아 모두 각각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게 나란히 6대 1이란 스코어로 완패하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우루과이가 우승했으므로 우승팀에게 패배한 유고슬라비아를 3위로 인정하는게 맞다는 것. 그래서 세르비아 당국에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게 위해 뒤늦게나마 2010년에 자체적으로 동메달을 만들어서 당시 뛰었던 선수단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세르비아에서만 나온 거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대표적인 축구 라이벌이다. 1902년에 첫 시합을 한 이후로 2011년까지 붙은 횟수만 해도 피파 공식기록으로 180회나 되고 심지어 같은 날에 2번 시합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같은 날 2번 시합의 경우는 아침 8시에 기상해서 아침 9시에 아침밥을 먹은 후 아침 10시에 그라운드에 나와서 낮 12시까지 1경기를 뛴 후 점심밥을 먹고 나서 오후 2시에 그라운드에 다시 나타나서 오후 4시까지 2경기를 뛴 꼴이다.[11] 이 결승전이 두 팀의 102번째 만남이었다.무슨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도 아니고.. 30년도 안돼서 100번을 넘게 싸우나
센테나리오 경기장에 9만 3천명이 들어왔는데 아르헨티나에서만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원정 응원을 왔고 경기 시작 시간이 오후 2시인데 정오도 안 되어서 경기장이 만원이 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와 가까운 이웃나라라서 가능했던 일. 그리고 축구 열기가 광적인 남미의 대표적 라이벌전답게 무기도 참 많이 발견되어서[12] 주심으로 내정된 랑제뉘는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심판 못 보겠다고 떼를 썼다.[13]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몬테비데오 항 인근에 랑제뉘를 위한 보트까지 정박시켜놓았다.
심판을 겨우 달래 놓았더니 이번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서로 자기네 공을 써야 한다고 싸우고 있었다.[14] 결국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후반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쓰는 것으로 싸움을 일단락지었다.
이런 소동들 때문에 예정보다 경기 시간이 한 시간 반 늦어져 15시 30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라이벌전답게 격렬한 경기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우루과이의 파블로 도라도가 전반 12분에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도 만만치가 않아서 페우셀레와 '신데렐라' 스타빌레가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여 전반은 2대1로 아르헨티나가 리드한 채 끝났다. 여기에서 우루과이의 주장 호세 나사치는 스타빌레의 역전골이 오프사이드였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씹혔다.
이 경기에서 누구보다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몬티였다. 2년 전이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와 재경기까지 치렀다가 결국 패배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플레이를 펼쳤다. 우루과이 팬들도 그걸 예상했었을까? 몬티는 우루과이 팬들에게 경기 전날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무대였다. 세아, 이리아르테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외팔이 공격수 엑토르 카스트로가 장식했다. 후반 44분, 승부에 쐐기를 박는 헤딩골을 넣은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제작된 우승컵-쥘리메 컵을 처음으로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올림픽에 이어 월드컵까지 제패하면서 세계 최강의 축구팀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다시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1. 개요[편집]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의 조별 라운드 이후 4강 토너먼트를 정리하는 페이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4강 준결승전에 진출한 팀은 개최국 우루과이, 라이벌 아르헨티나, 유럽의 유일한 생존팀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복병 또는 도깨비팀이라 칭할 수 있는 미국이었다.
대진은 아르헨티나와 미국, 그리고 우루과이와 유고슬라비아로 결정되었다.
2. 준결승(4강, 2라운드)[편집]
2.1. 1경기 아르헨티나 6 vs 1 미국[편집]
겨울비[2] 가 내려 질척해진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의 처음 양상은 비등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전반 19분, 미국의 센터 하프였던 라파엘 트레이시가 다리 부상으로 인해 피치 밖으로 나간 사이 루이스 몬티가 선제골을 집어넣어 버렸다. 트레이시는 다리 골절로 인해 시합을 더 이상 뛸 수 없었고, 여러 악재가 겹쳤지만 미국은 전반전을 잘 마쳤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악몽의 시작이었다. 스코펠리에게 후반 11분에 골을 허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골키퍼인 지미 더글러스마저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3] 그 이외에도 미국의 주포 버트 파테노드마저 배에 부상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부상이 계속되다보니 미국은 아르헨티나에게 이후 4골을 허용하며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짐 브라운이 1골을 보태 영패를 면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
여담으로 미국 하프백 앤드류 올드가 후반 24분께 부상을 당했다.[4] 그런데 올드를 치료하러 갔던 팀 닥터(또는 코치)가 실수로 피치에 클로로포름을 떨어뜨렸다가 그 증기를 자기가 흡입하는(...) 바람에 치료는커녕 오히려 팀 닥터가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올드는 치료받지 못하고 잠시 머무르다가 알아서 다시 경기를 뛰었다. 또 다른 설로는 트레이너의 손에 묻은 클로로포름이 올드의 눈에 조금 튀는 바람에 치료는커녕 잠시 눈 한 쪽이 안 보이는 채로 뛰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2. 2경기 유고슬라비아 1 vs 6 우루과이[편집]
경기의 처음 분위기는 유고슬라비아가 가져갔다. 4분만에 부야디노비치가 선제골을 넣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9분에 부야디노비치가 다시 한 골을 넣었지만 브라질 출신의 주심 아우메이다[6] 가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취소 사유는 오프사이드. 유고슬라비아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4강전 경기는 종료되었고, 아무리 초대 월드컵이라지만 국가대항전에서는 어지간해서 나오기 힘든 6대 1이라는 스코어가 4강전에서 나란히 나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7] 사실 이 대회 당시에 타 대륙에서 온 팀은 비행기 대신 배를 이용해서 남미에 도착했고, 게다가 배 안에 있는 시간이 보름이 넘어 장난이 아닌 멀미에 시달린 데다가, 그에 따른 체력 안배 및 시차 적응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 상태에서 조별리그를 간신히 통과한 팀이 미국과 유고슬라비아이고, 이들은 각각 사실상 홈그라운드인 아르헨티나와 개최국인 우루과이를 상대해야했다. 전력의 한계가 올 것도 자명한데, 완전히 각개격파되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2.3. 3, 4위에 대한 논란[편집]
초대 월드컵에서는 3위 결정전이 없었다.[8] 그래서 3, 4위에 대한 논란이 생기지 않을 것도 같은데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1930년 월드컵의 3위는 미국이라 인정한다. 이는 피파 기술 위원회에서 1986년 월드컵까지의 성적을 종합해 놓은 자료에서도 미국 3위, 유고슬라비아를 4위로 기록했었고, 현재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미국이 유고슬라비아를 근소하게 앞서기 때문이다.[9]
불확실한 출처이기는 하지만 1984년의 FIFA 게시판에는 비공식적으로 3, 4위전을 치렀고 유고슬라비아가 3대1로 이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날짜가 맞지 않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 외에도 하이데르 자와드(Hyder Jawad)라는 사람이 2009년에 쓴 책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측에서 우루과이와의 경기에 불만을 품고 예정되어 있던 3, 4위전을 걷어차버렸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후신인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나온다. 미국과 유고슬라비아 모두 각각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게 나란히 6대 1이란 스코어로 완패하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우루과이가 우승했으므로 우승팀에게 패배한 유고슬라비아를 3위로 인정하는게 맞다는 것. 그래서 세르비아 당국에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게 위해 뒤늦게나마 2010년에 자체적으로 동메달을 만들어서 당시 뛰었던 선수단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세르비아에서만 나온 거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3. 결승전(3라운드)[편집]
3.1. 아르헨티나 2 vs 4 우루과이[편집]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대표적인 축구 라이벌이다. 1902년에 첫 시합을 한 이후로 2011년까지 붙은 횟수만 해도 피파 공식기록으로 180회나 되고 심지어 같은 날에 2번 시합을 한 적도 있을 정도다. 같은 날 2번 시합의 경우는 아침 8시에 기상해서 아침 9시에 아침밥을 먹은 후 아침 10시에 그라운드에 나와서 낮 12시까지 1경기를 뛴 후 점심밥을 먹고 나서 오후 2시에 그라운드에 다시 나타나서 오후 4시까지 2경기를 뛴 꼴이다.[11] 이 결승전이 두 팀의 102번째 만남이었다.
센테나리오 경기장에 9만 3천명이 들어왔는데 아르헨티나에서만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원정 응원을 왔고 경기 시작 시간이 오후 2시인데 정오도 안 되어서 경기장이 만원이 되었다.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와 가까운 이웃나라라서 가능했던 일. 그리고 축구 열기가 광적인 남미의 대표적 라이벌전답게 무기도 참 많이 발견되어서[12] 주심으로 내정된 랑제뉘는 안전이 확보되지 않으면 심판 못 보겠다고 떼를 썼다.[13]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몬테비데오 항 인근에 랑제뉘를 위한 보트까지 정박시켜놓았다.
심판을 겨우 달래 놓았더니 이번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서로 자기네 공을 써야 한다고 싸우고 있었다.[14] 결국 전반에는 아르헨티나, 후반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쓰는 것으로 싸움을 일단락지었다.
이런 소동들 때문에 예정보다 경기 시간이 한 시간 반 늦어져 15시 30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라이벌전답게 격렬한 경기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우루과이의 파블로 도라도가 전반 12분에 선제골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도 만만치가 않아서 페우셀레와 '신데렐라' 스타빌레가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여 전반은 2대1로 아르헨티나가 리드한 채 끝났다. 여기에서 우루과이의 주장 호세 나사치는 스타빌레의 역전골이 오프사이드였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씹혔다.
이 경기에서 누구보다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선수는 아르헨티나의 루이스 몬티였다. 2년 전이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와 재경기까지 치렀다가 결국 패배한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플레이를 펼쳤다. 우루과이 팬들도 그걸 예상했었을까? 몬티는 우루과이 팬들에게 경기 전날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후반전은 우루과이의 무대였다. 세아, 이리아르테의 연속골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외팔이 공격수 엑토르 카스트로가 장식했다. 후반 44분, 승부에 쐐기를 박는 헤딩골을 넣은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제작된 우승컵-쥘리메 컵을 처음으로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올림픽에 이어 월드컵까지 제패하면서 세계 최강의 축구팀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다시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1] 후반에 부상으로 교체되었다.[2] 남반구는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다. 7월이면 우리는 여름이지만 브라질, 호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남반구의 나라들은 겨울이다. 이전 본선경기에서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경기에는 눈까지 왔다.[3] 전에는 어깨로 서술이 되어 있었지만 가디언지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 등에서 무릎 부상으로 서술하여 수정하였다.[4] 기록에 의하면 올드는 이 부상으로 치아 4개를 잃었다고 한다.[5] 혼자서 3골이나 넣었다.[6] 혹시 기억하는가?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경기에서 경기를 6분 일찍 끝냈던 그 심판이다[7] 그나마 차이점이라고 해봐야 미국은 여섯 골을 먹고 나중에 한 골을 만회한 반면, 유고슬라비아는 먼저 한 골을 넣고 그 뒤에 여섯 골을 먹었다는 정도이다.[8] 3, 4위전이 처음 생긴 대회는 다음 대회인 1934 이탈리아 월드컵이다.[9] 골득실을 비교해보면 미국은 본선 1라운드 13개국 조별리그에서 6득점에 무실점으로 +6, 유고슬라비아는 6득점에 1실점으로 +5이다[10] 월드컵 최초 결승전 주심이다. 대회 4강전 1경기, 조별리그 1조 1경기, 3조 1경기 주심이었다.[11]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기록인지 예를 들어본다면 지금까지 한 한일전의 횟수가 2011년까지 67회다. 그러니까 얘들은 한일전 비슷한 짓을 3배 가까이 한 거다. 물론 얘들 쪽이 시간 측면에서 2배 정도 길기는 하지만..[12] 관중들이 입장하기에 앞서서 몸수색을 실시했는데 권총이 수십 자루가 발견되었다.[13] 이것은 어린애같은 투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몸부림이다.[14] 공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해프닝이다[15] 특히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우루과이가 사용한 공식 유니폼의 디자인은 영락없는 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유니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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