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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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Fussball-Weltmeisterschaft 1954 Schweiz
Championnat du Monde de Football 1954
Campionato mondiale di calcio 1954
Campiunadis mundials da ballape 1954
1954 FIFA World Cup Switzerland™

파일: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로고.svg
파일:1954 FIFA World Cup Switzerland Poster.png
대회 기간
1954년 6월 16일 ~ 1954년 7월 4일
개최국
[[스위스|

스위스
display: none; display: 스위스"
행정구
]]

공인구
스위스 월드 챔피언
(Swiss World Champion)
본선 진출팀
16개팀
대회 결과
우승
서독
(1번째 우승)
파일:Germany DFB 1954~1962.png
준우승
헝가리
파일:Hungary MLSZ 1954.png
3위
오스트리아
파일:Austria ÖFB 1954.png
4위
우루과이
파일:Uruguay AUF 1954 v2.png
수상
득점왕
[[헝가리|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산도르 코츠시스
이전·이후 대회
1950년
브라질

1954년
스위스

1958년
스웨덴

1. 개요
2. 지역예선
3. 경기장
4. 본선 진출팀[16개팀]
5. 대회 진행
5.1. 조별 리그[16강]
5.2. 결선 토너먼트
5.3. 우승
6. 최종 순위
7. 수상
8. 기록실
9. 대한민국 대표팀의 시련 어린 도전
9.1. 유효 슈팅이 100개 이상?
10. 기타



1. 개요[편집]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5번째 FIFA 월드컵.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후 16년 만에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이다. 개최지 결정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결정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FIFA 창설 50주년을 맞이하는 대회이니 FIFA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에서 개최하자는 거였지만, 사실은 유럽 대륙 대부분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유럽 국가 중에 그나마 대회를 개최할 여력이 있는 나라는 2차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 뿐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것이다.[1]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16개국이 본선에 진출했으며, 대신 기권팀이 3개국이나 되었던 지난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기권팀이 전무하여 진정한 의미의 16개국 본선 체제가 완성되었다. 또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월드컵 대회 진행의 기본적인 틀인 조별리그+토너먼트의 1930월드컵 방식을 오랜만에 도입으로 도입한 1954월드컵이었고 1970월드컵까지 이 방식을 사용했었다.[2] 최초로 TV 중계가 이루어진 월드컵이기도 하다.

한편 이 대회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서독동독, 일본의 출전금지가 해제되었다.

조별리그부터 토너먼트까지 아주 이상한 대진 방식을 취했던 대회였다. 조별리그에서는 같은 조에 있더라도 서로 맞붙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토너먼트도 조 1위끼리, 조 2위끼리만 붙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이러한 기형적인 조별리그와 토너먼트 방식은 이 대회에서만 한 번 쓰이고 이후 폐지된다.

26경기에서 총 140골이 쏟아져 나와 경기당 5.38골을 기록한 다득점 대회로 기록되었다. 월드컵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7:5 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공격축구가 찬란히 만개했던 대회. 특히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한국을 9:0으로 이겼고 5경기에서 27득점을 기록하는 흠좀무스러운 공격력을 과시했다.[3][4]

또한 스위스는 이 대회에서 무려 10실점을 헌납하면서 개최국 최다 실점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60년간 이어져 오다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서 개최국 브라질이 독일에게 1:7로 참패하는 등 한 대회에서 14실점을 허용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시아 대륙 역사상 두 번째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대회이자, 독립한 주권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기념비적인 대회였다.[5][6][7]


2. 지역예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지역예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경기장[편집]


월드컵이 열린 구장이 있는 도시와 구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총 6개의 도시와 구장에서 열렸다.

  • 베른 - 슈타디온 방크도르프[8] (Stadion Wankdorf) (64,600명) - 결승전 개최
  • 제네바 - 스타드 드 샤르밀 (Stade de Charmilles) (35,997명) - 개막전 개최
  • 바젤 - 장크트 야코프 슈타디온[9] (St. Jakob Stadion) (54,800명)
  • 로잔 - 스타드 올림피크 드 라 퐁테즈 (Stade Olympique de la Pontaise) (50,300명)
  • 루가노 - 스타디오 디 코르나레도 (Stadio di Cornaredo) (35,800명)
  • 취리히 - 하르트투름 슈타디온 (Hardturm Stadion) (34,800명)


4. 본선 진출팀[16개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참가팀 정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대회 진행[편집]



5.1. 조별 리그[16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조별리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조별리그 결과
순위
1조
2조
3조
4조
1위
브라질
헝가리
우루과이
잉글랜드
2위
유고슬라비아
서독
오스트리아
스위스
3위
프랑스
터키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4위
멕시코
대한민국
스코틀랜드
벨기에


5.2. 결선 토너먼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결선 토너먼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결선 토너먼트 결과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A
8강 1경기
브라질 2:4 헝가리
E
4강 1경기
헝가리 4:2 우루과이
G
결승
헝가리 2:3 서독
B
8강 2경기
우루과이 4:2 잉글랜드
-
C
8강 3경기
유고슬라비아 0:2 서독
F
4강 2경기
서독 6:1 오스트리아
D
8강 4경기
오스트리아 7:5 스위스
H
3·4위전
우루과이 1:3 오스트리아


5.3. 우승[편집]


1954 FIFA 월드컵 우승
파일:Germany DFB 1954~1962.png
서독
첫 번째 우승



6. 최종 순위[편집]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파일:트위터 금메달 이모지.svg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서독
5
4
0
1
18
12
+6
8
우승
파일:트위터 은메달 이모지.svg
[[헝가리|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헝가리
5
4
0
1
27
10
+17
8
준우승
파일:트위터 동메달 이모지.svg
[[오스트리아|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오스트리아
5
4
0
1
17
12
+5
8
3위
4
[[우루과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우루과이
5
3
0
2
16
9
+7
6
4위
5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브라질
3
1
1
1
8
5
+3
3
8강
6
[[잉글랜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잉글랜드
3
1
1
1
8
8
0
3
8강
7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유고슬라비아
3
1
1
1
2
3
-1
3
8강
8
[[스위스|
파일:스위스 국기.svg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스위스
3
1
0
2
7
10
-3
2
8강
9
[[튀르키예|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튀르키예
]][[틀:국기|
]][[틀:국기|
]]
터키
2
1
0
1
8
4
+4
2
조별 리그
10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2
1
0
1
5
3
+2
2
조별 리그
11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2
1
0
1
3
3
0
1
조별 리그
12
[[벨기에|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벨기에
2
0
1
1
5
8
-3
1
조별 리그
13
멕시코
2
0
0
2
2
8
-6
0
조별 리그
14
체코슬로바키아
2
0
0
2
0
7
-7
0
조별 리그
15
스코틀랜드
2
0
0
2
0
8
-8
0
조별 리그
16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조별 리그


7. 수상[편집]




8. 기록실[편집]


  • 최초 득점 - 밀루티노비치(유고슬라비아), vs 프랑스(6월 16일, 조별 리그), 전반 15분
  • 퇴장 - 없음
  • 최초 페널티킥 - 레몽 코파(프랑스), vs 멕시코(6월 19일, 조별 리그), 후반 43분
  • 최초 멀티골 - 핑가(브라질), vs 멕시코(6월 16일, 조별리그), 전반 34분, 전반 43분
  • 해트트릭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vs 대한민국(6월 17일, 조별 리그)
    • 카를로스 보르게스(우루과이), vs 스코틀랜드(6월 19일, 조별 리그)
    • 에리히 프롭스트(오스트리아), vs 체코슬로바키아(6월 19일, 조별 리그)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vs 서독(6월 20일, 조별리그)[10]
    • 브루한 사흐린(터키), vs 대한민국(6월 20일, 조별리그)
    • 막스 모를락(서독), vs 터키(6월 23일, 8강 진출팀 결정 플레이오프)
    • 시오도르 바그너(오스트리아), vs 스위스 (6월 26일, 8강전)
    • 요세프 휘거(스위스), vs 오스트리아 (6월 26일, 8강전)
  • 최다 득점 경기 - 오스트리아 7 vs 5 스위스 (6월 26일, 8강전)
  • 최다 득점차 경기 - 헝가리 9 vs 0 대한민국 (6월 17일, 조별 리그)
  • 최초 역전승 - 서독 4 vs 1 터키(6월 17일, 조별 리그)
  • 자책골
    • 지미 디킨슨(잉글랜드), vs 벨기에(6월 17일, 조별 리그)
    • 라울 카르데나스(멕시코), vs 프랑스(6월 19일, 조별 리그)
    • 이반 호바트(유고슬라비아), vs 서독(6월 27일, 8강전)
    • 루이스 크루즈(우루과이), vs 오스트리아(7월 3일, 3·4위전)
  • 무득점팀 -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대한민국
  • 최고령 선수 - 스탠리 매튜스(잉글랜드), 39세
  • 최연소 선수 - 코슈쿤 타슈(터키), 19세
  • 득점왕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11골


9. 대한민국 대표팀의 시련 어린 도전[편집]


일본을 이기고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1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주권 국가로서는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라는 영예를 안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했으나, 1차전에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를 상대로 무려 9골을 내주며 0:9로 참패하고 만다.

하지만, 경기의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알아보면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0:9로 경기를 끝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당시 헝가리의 전력은 절대로 월드컵 본선 진출조차 요원한 현재의 평범한 유럽 중위권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헝가리 대표팀에는 당대 최고의 공격수 페렌츠 푸스카스를 필두로 산도르 코츠시스, 히데그쿠티 난도르, 졸탄 치보르, 요세프 보직 등 세계 정상급의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이른바 "매직 마자르" 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의,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국가대표팀을 꼽으라면 두손가락에 들어갈 정도의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 전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축구 종주국이자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 조차도 대회 직전의 평가전에서 헝가리에게 1:7로 완패했고[12], 팀의 핵심멤버인 페렌츠 푸스카스가 부상으로 결장했음에도 8강전에서는 또 다른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브라질을, 4강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인 우루과이를 상대로 각각 4골씩 때려박으며 결승까지 올랐다. 즉 이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전력은 가히 세계 최강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애초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력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으며 비교 자체를 불허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정전 협정에 조인한 지 11개월밖에 안 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도 급급한 상황이라 스포츠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할 리도 없었고, 되려 일본과의 최종예선에서는 원래 대한민국에서 한 경기, 일본에서 한 경기씩 치르게 되어 있는 걸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인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는 바람에 홈 경기마저 치르지 못하게 되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버리기도 했다.[13] 이러한 악재를 극복하고 기어이 일본을 꺾고서 본선에 올랐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것이다.[14]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 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세 닳고 말았다.[15] 뿐만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일단 미군수송기를 얻어타고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도쿄 국제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일본 도쿄-태국 방콕-인도 콜카타-파키스탄 카라치-이탈리아 로마-스위스 취리히로 이어지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방불케 하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16][17] 그나마도 티켓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며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티켓을 양보한 덕에 1진이 먼저 출발해서 경기 날짜만 간신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18]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표팀은 다른 팀들이 전부 다 개막 한 달 전부터 모여서 현지 적응 훈련하고 뭐하고 할 때는 물론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경기 이틀 전 22시였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에 도착해서 숙소를 쉽게 찾아갈 리도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가고 나서도 경기 하루 전날까지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 바느질을 한다거나 축구화 손질을 한다거나 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컨디션 관리는 고사하고 온갖 고생만 잔뜩 한 끝에, 거의 유니폼만 갈아입는 수준으로 결전의 준비를 마치고 바로 세계 최강 헝가리를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전반 초반 20여 분까지는 헝가리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으며, 결정적 득점 찬스까지 맞았을 정도로 헝가리를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초반에 다소 고전한 헝가리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있었을 정도. 그러나 헝가리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점차 체력의 한계로 경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골문을 괴롭혔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 골키퍼는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수 차례나 선방해내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 선수들이 어찌나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는지, 홍덕영 골키퍼는 훗날 "슈팅 수를 30개 이후로는 아예 세 보지도 못했고[19], 특히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위잉 소리가 날 정도였으며,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20] 게다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고의로 밖으로 차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을 밖으로 차낸 경우 다시 가져올 때까지 경기를 진행하지 않았던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맹활약에 감명받은 관중들 중 일부는 경기가 끝난 뒤 그에게 사인 요청까지 했을 정도였다.

당시 해외 언론은 경기 전만 해도 헝가리의 20:0 대승 또는 그 이상을 예상한 곳도 많았다. 심지어 당시 기록 영상만 봐도 외국 기자들이 경기 도중 대놓고 드러누워 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고.'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되려 이들은 경기 종료 후 "겨우 9:0으로 이겼어?"라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21][22] 실제로 당시를 회고한 축구 원로들은 후반전에 다리가 풀리고 쥐가 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90분을 뛰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 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조차 없어서 쥐가 나거나 탈진해서 쓰러진 4명이 나간 뒤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그 때문에 당시 승장이자 헝가리 대표팀을 지휘한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 또한 대한민국 선수들의 이런 눈물겨운 투혼을 보고 "대한민국 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렇듯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헝가리 대표팀의 경기를 관전하러 왔던 전세계의 축구 팬들에게 대한민국은 그저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 출전한 들러리로 평가받던 초반의 시선을 떨쳐내고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월드컵 본선까지 올라온 위대한 불굴의 팀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유럽 방송국의 해설자들 또한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서 이들에게 응원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된 유럽의 축구팬들은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점퍼, 청바지, 소시지, 통조림, 현금, 손목시계 등 각자 갖고 있는 물건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돌아갔다. 이런 유럽인들의 대인배적인 사랑 앞에 당시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들이 거둔 성적과 상관없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한 난민 대표팀 선수들에게 전세계가 표한 것과 같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헝가리전에서의 대패로 분위기도 가라앉은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대한민국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23] 이후 2차전 터키와의 경기를 치렀으나 역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이 경기마저 결국 0:7로 대패하고 말았다. 터키전을 끝으로 대회 일정을 모두 마친 대한민국 선수단은 귀국하는 과정에서도 해프닝을 겪었는데, 바로 월드컵 경기 수익의 일정액을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대한민국 선수단이 묵었던 호텔로 '경기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까지 온 과정도 매우 험난했기에 귀국이라도 서두르기 위해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24]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용식 감독[25]은 조 추첨 결과만 보고도 이미 대한민국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며 간곡하게 호소했고 선수들 역시 이러한 호소에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는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나도 컸고, 대진운도 너무 없었으며, 열악한 조건 탓에 스위스에 너무 늦게 도착해 경기를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끝내 그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악전고투를 겪은 대한민국이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돌아가자 유럽 강호들에게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실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이런 수준 낮은 국가들이 월드컵에 나와 대회의 격을 떨어뜨려서야 되겠느냐?"라는 비판 의견이 크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월드컵의 창시자인 쥘 리메 FIFA 회장은 "월드컵은 강자만의 대회가 아니다. 대한민국 같은 약체라도 그 대륙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만큼, 나올 값어치는 있다. 또한 지금은 대한민국이 무너졌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라며 대한민국을 변호했다고 전해진다.[26]

9.1. 유효 슈팅이 100개 이상?[편집]


다만 여기서 헝가리의 유효 슈팅이 100여개에 달했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돌고 있는데, 최근에 밝혀진 축구 인플레이 시간은 60분에 불과하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하면 그냥 슈팅도 아니고 유효 슈팅을 36초마다 1개 이상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럴 경우 아무리 경이적인 체력과 선방 능력을 가진 골키퍼라도 두 자리 수 실점을 안 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즉, 현실성 없는 헛소문에 불과하다.

실제 사례를 꺼내자면,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 차 경기가 149:0인데, 이는 선수들이 쉬지 않고 자책골을 만들어서 세운 기록이다. 즉, 선수들이 경쟁조차 안 하는 상태에서 자책골까지 퍼부을 정도로 작정해야 100개 이상의 유효 슛이 나올 수 있다.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경기들로 비교하자면, 1948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 0:12 패배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네덜란드전 0:5 패배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인 스웨덴전에서의 전체 슈팅 수는 48개에 불과했으며, 유효 슈팅 수로 본다면 그 이하로 판단해야 한다. 네덜란드전에서도 한국이 맞이한 전체 슈팅 수는 27개, 그 중 유효 슈팅 수는 17개에 불과했다.[27]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SBS의 유튜브 스포츠 채널인 스포츠머그가 영상에 고스란히 보도한 적까지 있다.

10. 기타 [편집]


이 월드컵 본선에서는 진출한 모든 16개팀들이 최소 1패 이상을 기록하였다.

  • 1조[28]
    • 브라질은 8강전에서 헝가리에 2:4로 패배했다.
    • 유고슬라비아는 8강전에서 서독에 0:2로 패배했다.
    • 프랑스는 조별리그에서 유고슬라비아에 0:1로 패배했다.
    • 멕시코는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 0:5로 참패를 당하고 프랑스에 2:3으로 패배했다.

  • 2조[30]
    • 헝가리는 결승전에서 서독에 2:3으로 패배했다.
    •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3:8로 패배했다.[29]
    • 터키는 조별리그에서 서독에 1:4로 패배하였으며, 8강 진출을 가리기 위해 서독과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서독에 2:7로 또 패배했다.
    •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로 패배하고 터키에 0:7로 대패를 당했다.

  • 3조[31]
    • 우루과이는 준결승에서 헝가리에 2:4로 패배했다.
    •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에서 서독에 1:6으로 패배했다.
    • 체코슬로바키아는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에 0:2로 패배하고 오스트리아에 0:5로 참패를 당했다.
    • 스코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오스트리아에 0:1로 패배하고 우루과이에 0:7로 대패를 당했다.

  • 4조[32]
    • 잉글랜드는 8강전에서 우루과이에 2:4로 패배했다.
    • 스위스는 조별리그에서 잉글랜드에 0:2로 패배하고 8강전에서 오스트리아에게 5:7로 패배했다.
    •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서 스위스에 1:2로 패배하였으며, 8강 진출을 가리기 위해 스위스와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스위스에 1:4로 또 패배했다.
    • 벨기에는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에 1:4로 패배했다.

파일:1954p.jpg
대회 포스터 중에 태극기가 완전히 가려진 것도 있다. 당시 낮았던 한국의 국가 인지도를 느끼게 해 준다.[33]

7골 이상 나온 경기들이 꽤 많았다. 점수만 보면 야구라고 해도 믿겠다 할 정도인 경기들도 꽤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역대 최다 골 대회가 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대 스위스의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1경기 최다 득점 경기 기록이다.
  • 헝가리 9 : 0 대한민국 (9골)
  • 터키 7 : 0 대한민국 (7골)
  • 헝가리 8 : 3 서독 (11골)
  • 서독 7 : 2 터키 (9골)
  • 우루과이 7 : 0 스코틀랜드 (7골)
  • 잉글랜드 4 : 4 벨기에 (8골)
  • 오스트리아 7 : 5 스위스 (12골)
  • 서독 6 : 1 오스트리아 (7골)

2022년 1월 13일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등장했는데, 방송에서는 홍덕영 전 선수를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며, 홍덕영 전 선수가 1996년 대한민국의 월드컵 유치를 위해 스위스에 머물던 중 푸스카스를 보고 월드컵 준비 과정을 회상하는 부분부터 소개되었다. 1954년 당시, 선수들이 거의 30대이다보니 70여년이 지난 지금은 다들 고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직접적인 인터뷰를 하는 대신 과거 인터뷰 영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대체되었으며, 당시 출전 선수인 홍덕영 전 선수와 한창화 전 선수의 아들인 홍기빈[34], 한정수[35]의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16개팀] A B [16강] A B [1] 게다가 2차 대전의 여파는 다음 대회까지 이어져서, 이 다음 대회 역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에서 개최되었다.[2] 그 후 1974월드컵1978월드컵은 16개국 본선 16강 조별리그 다음 8강도 조별리그로 진행한 다음 8강 조 1위만 결승 진출하고 8강 조 2위는 3,4위전으로 진출하였고, 1982월드컵에서는 24개국 본선 24강 조별리그 다음 12강도 조별리그로 진행한 다음 4강 토너먼트로 진행하였으며 각 대회마다 이런 식으로 또 다시 대회 방식이 바뀌었었다.[3] 헝가리의 이 승리 기록은 이후 1974년 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를 상대로 거둔 9:0 승리, 1982년 대회에서 헝가리가 엘살바도르를 상대로 10:1로 승리한 경기들과 함께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점수 차 승리 기록이다.[4]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을 9:0으로 이긴 헝가리는 20:0으로 이길 거라 예상했는데 고작 9골 밖에 못넣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5] 독립을 한 '주권국가'로 한정짓지 않을 경우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국가다.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1938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으며,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이 기권하자 무혈입성으로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15강전에서 헝가리에게 0:6으로 대패하고 바로 탈락했다.(15강전인 이유는 대회 직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서 사라져서 15강이 되었다.)[6]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에 인도가 진출했으면 이 기록을 가져갈 뻔했다. 아시아 예선에서 다른 팀들이 모두 기권하면서 본선에 올랐고, 조 추첨까지 이뤄져서 스웨덴, 이탈리아, 파라과이와 함께 3조에 편성이 되었으나, 인도는 1952헬싱키올림픽을 준비하겠다고 기권하였고, 피파는 인도에게 1954스위스월드컵 지역예선까지 출전 금지를 시켰다.[7]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국가는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16개국 본선)에 진출한 북한이다. 당시 북한은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승리하고 8강에 진출했는데 이 기록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대한민국이 4위를 달성하기 이전까지 아시아 국가의 월드컵 최고 성적이었다. 현재까지도 원정 월드컵에서 8강(8위)을 기록해 본 아시아 국가는 북한이 유일하다.[8] 현재는 슈타디온 방크도르프(2005~)가 위치해 있으며 스타드 드 스위스라고도 불렸다. 동명의 경기장이지만 소유자가 다르다.[9] 현재는 장크트 야코프 파르크가 위치해 있다.[10] 해트트릭을 넘어 4골을 기록했다.[11] 이 당시의 아시아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축구팀이나 대회가 있기는 커녕 축구라는 스포츠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열악한 시점이었는데, FIFA는 이러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과의 경쟁 없이 아시아 국가들끼리만 예선을 치르게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타 대륙에 비해 수월하게 일본만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이 16강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 0:9, 터키에 0:7로 참패하고 탈락하자 FIFA가 아시아들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에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하고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는 아시아 국가들이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등 타 대륙들과 경쟁을 치러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12] 이 패배는 현재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다골 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13] 결국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예선을 치르지 못하게 되자 일단 대외적으로는 대한민국의 날씨 문제를 이유로 3월에 일본에서 두 경기 모두 치르는 것처럼 처리했다. 그런데 도쿄 경기장 역시 연일 비와 눈이 섞여 내려 진흙탕 같은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다.[14] 다행히 대한민국 대표팀이 일본을 꺾고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서 돌아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열렬한 환영 행사를 치러 주었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하며 뻐팅기자 당시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유형 감독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며 "만약 우리가 일본에게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각서까지 쓸 정도로 강하게 어필해 어찌어찌 어웨이 경기라도 치를 수 있었다.[15] 이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본 외신 기자 중 한 명이 "당신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조롱이나 다름 없는 질문을 했다. 이때 헝가리전에서 전설적인 선방쇼를 선보인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나라라서 물자를 절약하는 것을 애국하는 일로 여겨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재치있게 받아넘겼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16] 노선이 저렇게 괴랄한 이유는 간단하다. 1950년대에는 기술 부족으로 민항기들의 항속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적성국이었던 중국소련의 영공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유럽을 가려면 동남아시아 방향으로 크게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카라치진나 국제공항은 당시 아시아-유럽 항로의 거점으로 각광받았으나, 냉전이 종료되어 구공산권의 영공이 활짝 열리고 파키스탄의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17] 비슷한 고생담이 1948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던 대한민국 선수단에게도 있다. 다만 이때는 타 종목 선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일찍 출발한 편이었다.[18] 2진은 뒤늦게 구한 에어 프랑스의 항공편을 통해 스위스에 도착했다.[19] 이 증언이 와전되어 헝가리전 유효 슈팅 100개설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경기에서 100개의 슈팅이 나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어림잡아 30개 이상에서 40개 이하나 중간 정도로 보인다.[20] 홍덕영은 이러한 맹활약과 축구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에 헌액되었다. 이후 한일 월드컵 유치위원단으로 활동하던 도중 수십 년 만에 푸스카스와 재회했다.[21] 1998년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0:5로 대패했을 당시, 대한민국의 골키퍼였던 김병지만은 외신의 찬사를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 경기 역시 김병지의 선방이 없었다면 5골보다 더 큰 점수차가 나올 여지가 충분했던 경기였던 까닭이다. 하물며 이때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상황이 199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하던 시절이었다.[22] 심지어 이 당시는 발전되지 않은 축구 전술의 특성상, 미드필더와 수비수에 비해 공격수가 상당히 많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지금보다 다득점이 굉장히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월드컵 초창기의 기록을 보면 골이 많이 터진 경기가 많았으며 친선 A매치 기록을 보면 수준 차이가 나는 경기에서 지금으로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골이 많이 나왔다.[23] 헝가리전에서 뛰었던 1진 선수들이 체력 고갈로 기진맥진한 탓도 있지만, "우리가 이런 세계적인 대회에 출전해 볼 기회는 더는 없을 테니 차라리 대표팀 전원에게 한 번쯤 경기에 뛸 수 있는 기회가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2진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이 다시금 월드컵 무대를 밟기까지는 장장 32년이 걸렸다.[24] 이 배당금은 결국 스위스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는데, 이후 바로 다음 월드컵에서 대한축구협회 직원이 월드컵 예선 참가 신청서를 분실해 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월드컵 예선에도 못 나가게 되어 FIFA에 납부해야 했던 벌금을 바로 이 스위스에 남아 있던 배당금으로 충당했다.[25] 김용식 또한 당시 선수로 활약한 골키퍼 홍덕영과 함께 대한축구협회 명예의 전당 최초의 7인에 헌액되었다.[26] 실제로 시간이 흐르며 점차 유럽, 남미 위주의 축구판에도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데 결국 카타르 월드컵 32강 조별리그에서 이변이 여러 차례 발생한 끝에 16강에 아시아 팀이 셋, 아프리카 팀이 둘이나 올라갔고, 비록 아시아 팀은 16강에서 전멸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가 16강에서 스페인을, 8강에서 포르투갈을 잇달아 물리치고 준결승(4강)에 진출해 아프리카 팀이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게다가 이 월드컵 우승팀은 아르헨티나였으며, 딱 한 번만 빼고 다 이겼는데 그 아르헨티나를 이긴 팀은 바로 아시아 팀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였다. 또, 그로부터 8년 전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여 승승장구하다가 직전 월드컵에서 아시아 팀(대한민국)에게 져서 월드컵 도전 역사상 최초로 1라운드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22위)했던 독일또다시 아시아 팀(일본)에게 져서 2연속으로 1라운드 3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17위)하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독일은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당시 8강 조별리그에서 탈락(6등)했던 적이 있기는 했다.[27] 참고로 네덜란드전도 상대 유효 슈팅 수를 과장한 날조가 마찬가지로 돌고 있다. 또한 조별리그 3경기 동안 허용한 56개의 전체 슈팅이 유효 슈팅으로 와전되어 보도된 적도 있다.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전문성을 가져야 할 언론들까지도 기록 부풀리기를 하고 있으니 웃어 넘길 상황이 아니다.[28] A조[29] 결승전에서 3:2로 승리하며 조별리그에서의 패배를 복수했다.[30] B조[31] C조[32] D조[33] 잘 보면 멕시코도 국장이 가려져서 이탈리아가 되어 버렸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는 그 지역 깃발이 아닌 연합왕국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 잭이 2번씩 나왔다.[34] 정치경제학자이며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35] 우리가 아는 그 배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