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헝가리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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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혁명
1956-os forradalom
Венгерское восстание 1956 года[1]
Ungarischer Volksaufstand
Powstanie węgierskie 1956
Hungarian Revolution of 195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z%C3%A9tl%C5%91tt_harckocsi_a_M%C3%B3ricz_Zsigmond_k%C3%B6rt%C3%A9ren.jpg
반소 시민군이 파괴한 소련군의 T-34-85 전차.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의 모리츠 지그몬드 광장(Móricz Zsigmond körtér)에서 촬영.
기간
1956년 10월 23일 ~ 11월 10일
원인
헝가리 노동당일당 독재 및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
장소
헝가리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소련|

소련
display: none; display: 소련"
행정구
]]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카다르 정부

'''
반소 시민군
너지 임레 정부'''
지원국 및 지지 의사 표명


지휘관
파일:소련 국기.svg 니키타 흐루쇼프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게뢰 에르뇌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카다르 야노시
파일:헝가리 반소 시민군기.svg 너지 임레
병력
31,550명
전차 1,130대


결과
헝가리 민주화 실패.
영향

피해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772명 전사
1,540명 부상
'''
'''
2,500~3,000여 명 전사
229명 사형
13,000여 명 부상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기타



1. 개요[편집]


1956년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헝가리 사회노동당에 저항하여 일어난 헝가리 인민 공화국민주화 운동.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냉전 시기 동구권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다. 소련은 체포된 시민군 229명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약 20만 명이 해외로 떠나 난민이 되었다.




2. 배경[편집]


1946년 소련에 의해 헝가리는 공산화되었고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 1892~1971)가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폭압적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라코시는 자신을 스탈린의 수제자로 자칭하면서 당 내 반대파들을 티토주의자로 몰아 대규모 숙청을 벌였으며 최소 7000여 명에 이르는 당원들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라코시는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숙청과 산업 시설 국유화 및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헝가리는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하고 공산권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 라코시는 힘을 잃게 되었다. 라코시의 과격한 스탈린주의 정책은 헝가리의 경제 위기를 가중시켜 민심을 이반시켰고 소련 정부는 동유럽 각국에 독재와 경제의 통제를 완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라코시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서 호된 질책을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상직을 개혁주의자이자 전직 NKVD 요원 출신으로 소련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던 개혁주의자 너지 임레에게 넘겨주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권위가 더 낮은 직함인 제1서기로 물러서게 된다.

이는 당연히 시민들의 반발과 눈치를 봐서 잠시 물러나서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꼭두각시를 내세운 것이었지만 너지 임레는 꼭두각시로 남아주지 않았다. 너지는 개혁정책을 펼치며 헝가리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하지만 투철한 스탈린주의자인 라코시는 꼭두각시로 내세우려던 놈이 버젓이 정치를 하고 있으니 좋게 볼 수 없었고 이를 자본주의를 복고하려는 것으로 여겨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결국 1955년 4월에 이르러 너지를 공격하여 수상에서 해임시켰다. 하지만 너지가 소련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출당, 총살을 비롯한 중징계는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공산화 초기부터 라코시의 정책과 숙청 작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헝가리인들은 이러한 라코시의 움직임에 분노하기 시작했으며 헝가리 내의 긴장감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56년이 되자 헝가리를 위시한 공산권과 서방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압력에 의해 라코시는 7월 '형식적으로' 사임했지만 얼마 안 가서 복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해빙 분위기에 고무된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페퇴피(Petőfi)[2] 서클이라는 포럼을 만들어 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3. 전개[편집]



1986년 혁명 30주년을 기념하여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Cry Hungary: A Revolution Remembered'. 10년 후인 1996년 40주년을 기념하여 후속편이 제작되었는데 민주화 이후 체제 전환 과정에 있던 헝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le_in_flag_-_Budapest_1956.jpg
국기 가운데에 난 구멍은 시민군이 저항의 의미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가운데에 구멍이 난 헝가리 국기는 이후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해마다 헝가리에서는 10월 23일이 되면 이 국기를 혁명 기념 공식 행사에서 게양한다. 이렇게 국기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잘라내는 행위는 33년 후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당 독재 정권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재현되었다.

1956년 10월 6일에 1949년 라코시 정권에 의해 처형된 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러이크 라슬로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의 표본격인 인물이었다. 비슷한 인물을 들자면 니콜라이 예조프가 있는데 러이크는 내무부 장관으로 있었으며 비밀경찰을 만들고 우익과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여론조작용 재판을 주도한 뒤 외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는데 라코시 정권은 러이크가 세를 얻자 그를 권력에 대한 위험으로 보고 1949년에 티토주의자, 서방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였다.

1956년 10월 23일 오후 부다페스트에서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스탈린 동상이 철거되었고 시민들은 스탈린 동상의 머리를 깨부수어 거리에 끌고 다녔다. 같은 날 밤 8시 경 라코시파 중의 하나인 제1서기장 게뢰 에르뇌(Gerő Ernő)[3]는 시위대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고 1시간 반이 지난 후 시위대는 위와 같은 내용의 방송이 나간 라디오 부다페스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게뢰는 해도 해도 안 되니 시위대들은 파시스트라는 선동도 해 봤지만 애초에 너지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던지라 파시스트 시위대가 공산주의자를 복귀시키라는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말이 되어 씨알도 안 먹혔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총에 맞았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마침내 보안군(ÁVH)에 의해 최루가스와 기관총을 동반한 유혈 진압이 이뤄지면서 첫 사망자가 발생하자 본격적 혁명이 시작되었고 다음 날 라디오 방송국이 점거되었다. 10월 24일 헝가리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하면서 시민군과 소련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편입하면서 봉기는 격화되었다. 10월 25일에 들어서면서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여러 주요 도시로 번졌고 다음 날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면서 라코시, 게뢰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소련으로 도망가고 소련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너지 임레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너지 임레를 수상으로 옹립해 온건파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신정부는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일당제 폐지, 비밀경찰 폐지 등 매우 화끈한 개혁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소련 측은 당혹스러워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련 측은 너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실수한 것 정도로 여겨 그를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매일같이 헝가리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너지는 소련 대사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대표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소련군의 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 측은 이미 헝가리 상황은 통제불능이라는 이유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소련군의 강경한 진압에 분노한 헝가리인들도 계속 무장투쟁을 이어나가면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결국 소련 정부에 환멸을 느낀 너지 임레는 헝가리의 중립 선포,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군을 요구하면서 서방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너지가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여긴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11월 4일 이반 코네프 휘하의 대규모의 소련군을 헝가리에 투입시켰다. 이미 그 전인 11월 3일에는 혁명 정부의 신임 국방장관 멀레테르 팔(Maléter Pál)이 휘하 사절들과 함께 부다페스트 근교의 퇴쾰(Tököl)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 4일 오전 3시에 부다페스트 방면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었으며 뒤이어 이들은 부다페스트를 조각내어 버리고 모든 교두보를 장악했다. 소련군 전차와 대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성이 부다페스트 전역을 뒤덮었다. 이날 오전 5시 20분에는 너지가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유 헝가리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헝가리와 전 세계에 알렸다.

헝가리 전역에서 헝가리군이 소련군에 무장해제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에 의하면 9일까지 헝가리군 12개 사단과 2개 기갑연대, 헝가리 공군 전체가 무장해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은 종종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헝가리군은 대부분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혁명 진압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하며 탈영했으며 소수는 시민군 사이로 스며들어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다페스트의 시민군은 몰로토프 칵테일 등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1월 11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약 2주 간에 걸친 혁명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되었다. 약 3,000여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으며 부상자는 1만 3천에서 2만여명에 달했으며 민간인 희생자는 1569명이었다. 사망자 중 53%는 노동자였고 사상자의 절반 이상이 30살 미만이었다. 격렬한 저항에 소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699명이 전사하고 1,450명이 부상, 51명이 실종되었다.[4]

너지 임레는 이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대사관을 잠시 나오던 중 소련에 의해 체포되어 너지의 개혁정책에 큰 혐오감을 느끼던 스탈린주의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지배하던 루마니아로 압송되었고 1958년 6월 16일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전(前) 헝가리 외무장관 예센스키 게저(Jeszenszky Géza)에 의하면 너지처럼 혁명 이후에 처형된 헝가리인의 숫자는 350명이 넘었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공산 정권이 붕괴되던 1989년 정식으로 복권되어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31년만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려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운집했고 이는 혁명 발발 이후 33년만에야 이루어진 헝가리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라코시 마차시도 '개혁을 거부하여 혁명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소련에게 버림받았다. 그나마 소련의 말을 잘 들었던 탓에 처벌은 면했으나 소련으로 강제 망명을 당해야 했고 소련 관할이던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감시 속에 살다가 1971년 2월 5일에 79번째 생일을 한 달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000년대 와서야 시신이 헝가리로 이장되었다.


4. 기타[편집]



  • 너지는 유엔을 통해서 전 세계에 개입해 줄 것을 호소했고 서방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소련을 크게 비난했지만 이미 냉전 체제가 굳어진 상태에서 중립국 오스트리아나 당시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가로막고 있는 헝가리에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당시 서방의 이목은 제2차 중동전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련이 헝가리에서 이런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데는 서방의 묵인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상황은 12년 후 프라하의 봄에서도 반복되었다.

  • 헝가리에서는 당시 소련군에 잡혀 처형당한 토트 일로너(Tóth Ilona)라는 여성 의사를 헝가리의 잔 다르크라고 부른다고 한다. #

  • 만스펠드 페테르(Mansfeld Péter)라는 학생은 17세의 나이로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투옥되었고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18세 생일에 사형을 당했다.

  • 당시 북한 유학생들도 헝가리 혁명을 도와줬다고 한다.#, ##, #

  • 당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혁명 실패 후 고국을 떠나야 했다.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을 꼽자면 인텔 사장을 역임했던 앤드류 그로브와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인 크리슈토프 아고터(Kristóf Ágota), 유명 피아니스트 조르주 치프라, 작곡가 리게티 죄르지 그리고 푸슈카시 페렌츠[5]를 비롯한 매직 마자르의 선수들 등이 있다. 이 당시 헝가리의 분위기는 훗날 프라하의 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만큼 절망스러웠다고 한다.


  • 너지 임레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낸 철학자 루카치 죄르지는 유고 대사관에서 끌려나와 소련군에 의해 너지와 함께 잠깐 루마니아로 끌려갔다가 다음해 본국으로 송환되어 연금되었다. 루카치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하는 것을 반대하여 먼저 사임했기에 너지 정권의 동조자가 아니라고 취급되었다.[6] 그는 비공식적으로 출당되었으나 1967년 복당되었으며 1971년 사망했다. 그는 복권 다음 해 벌어진 프라하의 봄에 대해서 지지했으나, 당 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있었던 철학자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방식으로 의견 표명을 피했다.[7][8]

  •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폴란드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는 그 스스로도 스탈린주의의 희생자였던 데다[9] 1956년 포즈난 시위로 스탈린주의파를 몰아내고 집권했기는 했지만 일단 WTO 탈퇴나 일당제 폐지, 소련군의 즉각 철수라는 구호를 내걸지는 않아서 소련에 의해 비토당하는 일 없이 이후로도 10여년을 잘 집권했다. 그러나 후에 차츰 독재적이면서도 무능한 지도자로 전락하게 되었고, 인민들의 지지도가 확 떨어져서 결국 1970년 크리스마스의 항쟁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 8명이 헝가리의 자유화를 돕자고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군'을 조직해 헝가리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의용군"이라는 개념이 현대에는 낯선 단어지만 2차대전 전후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 의용병처럼 타국의 지식인들이나 운동가들이 특정한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의용병으로 참전하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듯 하다. 학도의용병이라고는 했지만 당시 대학생은 지식인의 일종이었으니...

당시만 해도 헝가리가 한국의 명백한 적성국가인 만큼 당연히 정부의 제지로 실패했다. 당시 한국에서 여권은 사회 고위층만 가지고 있었고 해외로 출입국하는 것 자체가 매우 통제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공산국가로 민주화 운동을 위해 총 들고 싸우러 가는 행위가 이승만 정부의 눈에는 그다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억측도 있었으나 사실 독재 운운 이전에 정상적인 국가면 국민이 남의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겠다고 설치면 못 가게 막는 게 정상이다. 민주화가 이뤄진 현재만 해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는 쿠르드족 민병대에 가담했던 한국인이 강제로 한국에 끌려와 여권 압수 조치를 당했을 정도. 거기에 서방 국가들도 쉬쉬하던 판에 아직 6.25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한국에서 괜히 소련을 자극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고. 당시 이 의용군 멤버였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유재건 변호사는 훗날 헝가리가 민주화되자 헝가리 정부로부터 각기 '십자대훈장'과 '십자중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 시인 김춘수는 혁명 소식을 듣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로 추모했다. 당시 혁명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15세의 소녀병 셀레시 에리커(Szeles Erika)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 한때 매카시즘적 반공시로 평가절하당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깊게 연구되는 시로 평가가 높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던 헝가리 혁명 60년 기념 특별사진전에서는 그녀의 사진 옆에 김춘수가 당시에 쓴 시를 같이 전시했다.

  • 한 예술가가 이를 사진예술로 승화시킨 바 있다. # 낫과 망치의 유무로 대조되는 세월이 느껴진다.

  • 혁명 60주년인 2016년에 헝가리의 한 보드게임 회사가 혁명을 기리는 게임을 만들었다. 제목은 '분노의 날들 : 부다페스트 1956'(Days of ire : budapest 1956).# 당시 혁명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 장소들을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 혁명 당시 불렀던 'Avanti ragazzi di Buda(일어나라 부다)'라는 노래는 세리에 ASS 라치오가 응원가로 사용하고 있다. K리그에서도 FC 서울포항 스틸러스가 원곡에서 음을 살짝 바꿔서 만들어서 쓰고 있다.

  •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헝가리 혁명을 트로츠키주의적 입장에 의거한 반스탈린 봉기(노동자 정치혁명)로 본다. 당시 시위대는 스탈린의 동상을 파괴하고 침을 뱉기도 했지만, 레닌주의 저작들도 모아서 불태우기도 했다. 이렇듯 헝가리 혁명은 분명히 반소,반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1957년 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는 헝가리 혁명의 중심은 헝가리 노동자들의 정치혁명이었고, 반공적 요소는 언론에 의해 과대평가되었다고 발표했다. #

  • 서방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있었으며 많은 좌파들이 공산주의에 실망해 노선을 변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국 공산당원(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들은 탱크를 보내 진압하라며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했고 이때 이들을 비하하는 탱키(Tankie)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오늘날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퇴행적 좌파들을 비판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시민들을 탱크로 깔아뭉개는 것에 공개적 찬성을 표했던 영국 공산당은 프라하의 봄 당시에는 이를 비난하는 등 어느 정도 교훈을 얻었으나 이 패악질을 주도했던 스탈린주의 꼴통 그룹들은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것도 옳다고 주접을 떠는 등 끝까지 똥오줌 못 가리는 추태를 보였다. 반면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헝가리 혁명의 유혈 진압에 크게 비판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알베르 카뮈장폴 사르트르가 있다. 헝가리 혁명과 더불어 일어난 스탈린 격하 운동은 서유럽 공산주의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고 이는 결국 유럽공산주의가 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적으로는 스탈린주의와 프랑크푸르트학파 모두에 반대하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 혁명 당시 시위대가 망명 목적으로 T-54A를 끌고 영국 대사관으로 왔는데 이 사건으로 T-54A를 입수한 영국군 관계자가 이 전차가 당대의 서방 전차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스펙의 열세를 타개하기 위해 로열 오드넌스 L7 105mm 전차용 강선포가 개발되었고 당시 영국군의 최신 주력전차였던 센추리온 전차 Mk. 5가 각각 전면 상부장갑이 120mm으로 강화된 Mk. 5/1, 주포가 20파운더에서 L7A1으로 변경된 Mk. 5/2로 개량되었고 두 개량점이 합쳐진 Mk. 6이 등장했다.

  •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헝가리 영화 중엔 이 시절을 다루는 영화들이 많다. 고타르 페테르의 Time Stand Still라던가 카롤리 마크의 '러브' 와 동유럽 영화 최초로 레즈비언 로맨스를 다뤄 화제가 된 '또 다른 길'이 대표적. 2006년 헝가리 영화 영광의 아이들(Szabadsag, szerelem)도 본 혁명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감독은 고더 크리스티너(Goda Krisztina)이며 주연 배우는 도보 커터(Dobó Kata), 페뇌 이반(Fenyő Iván), 차니 샨도르(Csányi Sándor), 게스테시 카로이(Gesztesi Károly)다.

[1]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러시아(당시 소련)의 입장에서는 반란(восстание)으로 표현한다.[2] 19세기 헝가리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페퇴피 샨도르(Petőfi Sándor, 1823~1849).[3] 참고로 이 양반은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 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학살하고 다녀서 "바르셀로나의 백정"이란 별명을 얻었다.[4] 전사자 722명, 부상자 1,251명이라는 설도 있다.[5] 다만 푸슈카시는 직접 혁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스페인에 머무르던 중 혁명 소식을 듣고 스페인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6] 루카치는 너지와 그의 정권에 대해 애초부터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개혁 경향"이 있다며 비판적이었고 무엇보다 너지가 재집권 이후의 계획, 즉 "프로그램"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민중운동에 휘둘렸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민중운동을 그나마 사회주의적 틀 안에서 유지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각에 참여했다.[7] 루카치는 이에 대해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인 토마시 마사리크1918년 헝가리 혁명에 대항해 헝가리에 무력 개입했던 역사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고 술회했다. 민주화된 체코슬로바키아가 다시 헝가리의 인민공화국을 공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쁜 민주주의라는 견해였던 것.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하지 않았는데, 루카치는 말년인 1971년 3월에서 5월 중 회고록 격인 인터뷰에서 제자 이슈트반 외르시(1931~2005, 헝가리 혁명에 참여하여 1960년 석방)가 이 대목을 지적하며 결국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위한 핑계가 아니었냐는 주장에 대해서도 체코는 상황이 달랐다고 부정했다. (출처: 삶으로서의 사유 : 루카치의 자전적 기록들-루카치 다시 읽기 02, 249쪽)[8] 다만 이에 대해서는 루카치가 1971년 죽을 때까지 '문화판 러이크 라슬로'로서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여 "노회한"(외르시의 표현) 입장을 취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러이크 라슬로는 헝가리의 전 내부무·외무부 장관으로, 골수 스탈린주의자였음에도 1949년에 '티토주의자'라는 핑계로 라코시에게 숙청되었다. 이후 헝가리 혁명 기간에 복권되었다.[9] 이 양반은 숙청당했지만 재판 중에 스탈린이 사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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