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방콕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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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방콕 아시안 게임
제6회 아시안 게임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VI Asian Games Bangkok 1970

파일:attachment/51024002478.jpg
대회기간
1970년 12월 9일 ~ 12월 20일
개최국
태국 / 방콕
참가국
18개국
참가인원
2,400명
경기종목
13개 종목 - 135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
라마 9세
태국 국왕
성화점화
쁘리다 출라몬돌[1]
개·폐회식장
수파찰라사이 경기장

1. 개요
2. 유치과정
3. 메달 순위
4. 이모저모



1. 개요[편집]


1970년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6회 하계 아시안 게임이면서 2번 연속으로 개최된 유례가 없는 대회이다.


2. 유치과정[편집]


원래 이 대회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개회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실론(현재의 스리랑카)도 유치 신청에 나섰지만 철회했다. 그런데 북한군사 도발 위협 및 경제개발 우선의 이유로 재정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한국 측이 유치권을 반납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김현옥 서울시장 기간 적극적인 서울 개발로 고가도로 건설, 시민아파트 건축, 세운상가 건설, 밤섬 폭파를 통한 여의도 확장, 한강 방조제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을 벌였는데 이의 반대 급부로 재정이 아슬아슬했고 지하철 건설하기에 삽을 뜨기 힘든 상황에 아시안 게임까지 유치했다가 서울시가 파산할 정도라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2] 결정적으로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이 발생하면서 북한의 테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대테러 비용으로 상당한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짜로 개최했다가 중앙정부 재정에도 상당한 부담이 될 상황이었다.[3] 이는 선견지명 있는 조치였는데,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테러 참사가 발생했고 이후 올림픽 대테러 예산이 급증하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개최했던 몬트리올이 파산하여 특별세 등을 통해 30년만에 빚을 메운 사례가 발생했다.

그래서 한국 측은 유치권을 반납해버렸고 결국 이전 대회를 개최했던 태국 방콕억지로 떠안게 되었다. 원치도 않는데 한국의 유치권 반납으로 인해 억지로 한 도시가 아시안 게임을 두 번 개최를 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 물론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10개 국에서 개최비용을 보전해 주기는 했지만 너무 모자라서 태국에서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 대회의 유치 포기로 벌금 20만 불을 지불하게 된다.[4]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당시 한국과 태국의 경제적인 격차가 크지 않았고 태국이 이때부터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며, 당시에는 태국도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을 하던 시절인지라 아주 어려웠던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진짜로 경제상황이 어려웠을 때 치렀던 아시안 게임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이다. 이후 이 같은 일은 1978 방콕 아시안 게임의 개최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대한민국은 1986년에서야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된다. 이후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였다.


3. 메달 순위[편집]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메달 집계
최종 집계
순위
국가
메달
합계



1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 일본
74
47
23
144
2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 대한민국
18
13
23
54
3
[[태국|

파일:태국 국기.svg
]] 태국
9
17
13
39
4
[[이란|

파일:팔라비 왕조 국기.svg
]] 이란
9
7
7
23
5
[[인도|

파일:인도 국기.svg
]] 인도
6
9
10
25
6
[[이스라엘|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 이스라엘
6
6
5
17
7
[[말레이시아|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 말레이시아
5
1
7
13
8
[[미얀마|

파일:버마 연방 국기.svg
]] 버마
3
2
7
12
9
[[인도네시아|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 인도네시아
2
5
13
20
10
[[스리랑카|

파일:스리랑카 국기.svg
]] 실론
2
2
0
4
11
[[필리핀|

파일:필리핀 국기.svg
]] 필리핀
1
9
12
22
12
[[대만|

파일:대만 국기.svg
]] 중화민국
1
5
12
18
13
[[파키스탄|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 파키스탄
1
2
7
10
14
[[싱가포르|

파일:싱가포르 국기.svg
]] 싱가포르
0
6
9
15
15
[[크메르 공화국|

파일:크메르 공화국 국기.svg
]] 크메르 공화국
0
2
3
5
16
[[베트남 공화국|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 남베트남
0
0
2
2


4. 이모저모[편집]


  • 중화민국(대만)청천백일만지홍기를 걸고 중화민국 국가를 부를 수 있었던 마지막 아시안 게임이다. 이후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부터는 중국이 참가하게 되어 대만은 퇴출당한다. 지못미.
  • 요트가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에 채택되었다.
  • 중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 또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금메달 18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23개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 이 대회로 인해 조오련이 수영 스타로 떠올랐다. 조오련은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우승해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으로 올라섰다.
  • 유치 과정의 문제 때문에 태국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단이 들어올 때부터, 경기를 할 때마다 계속 야유를 해댔다. 선수들이야 아무 죄가 없었지만 국적이 국적이다보니 욕을 먹는 건 피할 수 없었다.
  • 한국인들 특히 서울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원래 우리 땅에서 개최할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하는 입장이 많았다. 그리고 16년 후인 1986년에 가서야 이러한 아쉬움이 해소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태국 방콕도 개최하지 못한 올림픽까지 개최하면서 역전되었다.
  • 축구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기록했다. 아시안게임 축구 문서에서 알 수있듯 원래는 성인대표팀 대회였다. 다만 서유럽이나 남미리그 선수들은 차출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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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태국의 사이클 선수. 2010년 3월 28일 향년 6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2]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최 과정에서 나왔던 잡음들이 1960년대 후반에 벌써 터졌다는 얘기이다.[3] 당시의 남북관계, 북한의 도발사, 이런 것을 보면 오히려 김신조 사건이 일종의 반면교사였다. 만일 이런 사건 없어서 예정대로 아시안게임을 개최했다면 북한의 테러가 일어날 확률은 거의 99%였다. 당장 김신조 사건 이외에도 60년대 말만 보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굵직한 대남 도발사건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4] 지금이야 큰 금액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당대의 달러 가치와 소득 수준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물론 개최 비용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