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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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37대[2] 내지 제38대[3] 미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72년 11월 7일 ~ 11월 8일까지 실시된 선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가 압도적인 선거인단 수를 확보해 당선되었다. 닉슨은 워싱턴 D.C.와 메사추세츠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에서 모두 이겼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결과의 선거가 12년 뒤에 재현되었으며[4] 미네소타주에서 공화당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대선이다.
2. 배경[편집]
68혁명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은 적극적으로 사회 안정 정책을 추진한다. 닉슨 대통령은 히피족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낙인찍으며 "히피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69년 로널드 레이건의 지시 하에 UC 버클리에서 농성하던 학생 시위대가 주방위군에 쓸려나갔고], 1970년에는 캄보디아 폭격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4명이 사망하는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해 1970년 동맹휴학 사태를 일으켰으나 정작 여론은 닉슨의 편이었다. 68혁명의 혼란에 질린 기성 세대가 오히려 대학생들의 항의에 대한 반발 심리로 닉슨을 지지해,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대학생들의 잘못이라는 의견이 여론조사에서 58%를 차지한 것이다. 1969년 5월 15일 레이건이 인민공원을 쓸어버렸을 때는 더해서, 레이건에게 보내진 103개의 전보 중 33대 1로 레이건의 편을 드는 사람이 많았을 지경이었다.[5] 여론에 힘을 입은 닉슨 대통령은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여겨지던 마약을 단속하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비록 현재로서는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이 대실패로 끝난 것으로 평가받지만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닉슨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인 다수였다.
대학생과 청년들은 닉슨의 권위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처사에 분노해 민주당과 반베트남 전쟁 시위로 결집했다. 1971년, 3개의 상이군인 훈장을 비롯해 수많은 무공 훈장을 탄 베트남 전쟁의 참전 용사 존 케리가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주재 하에 이루어진 언론 인터뷰에서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비판하며 "미국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려는 목적만으로 청년의 목숨을 내다 버리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켄트 주립대 발포 사건으로 주춤해져있던 학생 운동권은 다시 불타올랐고 대학가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닉슨 사퇴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닉슨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민주당을 지지했으나, 민주당에서는 68혁명 이후 반전 시위대 지지 여부를 두고 당이 갈라져있었으며,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닉슨이 항상 인기가 높았던 것은 아니다. 1970년 1월에는 인플레이션이 6.1%로 최근 10년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경제 성장 역시 분명하게 둔화되고 있었다. 에드먼드 머스키는 "1920년대 공화당은 번영에서 실업으로 향하기까지 8년이 걸렸는데 이제는 1년 만에 하고 있다"며 행정부를 비판했고 폴 새뮤얼슨은 "닉슨 씨가 베트남에서 패배했다고 하고 손실을 줄인다면 시장이 50포인트 뛸 것이다"며 비꼬기까지 했다.[6] 상원에서 클레멘트 해인스워스와 G. 해럴드 카스웰 인준이 부결되기까지 하며 1971년의 닉슨은 꽤 취약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경제가 아서 번즈 인준[8][9] 으로 회복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와 애그뉴의 폭발적인 수사법, 상술했던 청년 운동의 성장 등으로 인해 닉슨의 인기는 1971년의 저점에서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듯, 1972년 대선은 68혁명 이후 미국의 안정을 원하는 기성 세력과 변화를 원하는 청년 세력의 대결 구도 속에서 치러지게 된다. 한편, 닉슨 대통령에 의해 서명된 법으로 1972년 대선부터 선거 연령이 21세에서 18세로 하향되어 많은 청소년/대학생 신규 투표자가 생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3. 정당별 상황[편집]
3.1. 공화당[편집]
197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달리 공화당은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는 여론으로 단결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반대하던 공화당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닉슨 대통령의 좌익에서는 록펠러 공화당 중에서도 급진적 반전파를 대변했던 피트 매클로스키(Pete McCloskey)가 출마했고, 우익에서는 닉슨의 방중과 베트남 정책, 임금 및 물가 통제에 분노한 급진적 보수주의자 존 M. 애시브룩(John M. Ashbrook)이 출마했다. 매클로스키는 뉴햄프셔에서 반짝 19.8%를 찍었으나 거기까지.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경선 도전을 해서 성공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68혁명 시위대를 지지한 존 린지(John Lindsay) 뉴욕 시장은 아예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해버리기까지 했다. 결국 닉슨은 별다른 저항 없이 1972년 8월 23일 마이애미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1,347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10]
리처드 닉슨은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을 다시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싶지 않아했다. 애그뉴와는 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그뉴는 "닉슨의 닉슨"이라고 불리며 "유인원", "겁쟁이", "나봅" 등 공격적인 언사를 쏟아내며 독립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래서 닉슨은 애그뉴 대신 자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존 코널리 재무장관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존 코널리는 당시 민주당원이었고 애그뉴의 전반적인 인기, 특히 공화당 내 강경파에서의 인기로 인해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자 전당대회를 앞두고 다시 애그뉴를 지명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애그뉴 역시 3표의 기권 및 반대를 제외하면 거의 만장일치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된다. [11]
3.2. 민주당[편집]
3.2.1. 분열과 난맥상[편집]
이 당시 후보들을 정리하자면 좌익에는 존 린지 뉴욕시장[16] ,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셜리 치좀 하원의원[17] ,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 밴스 하트케 상원의원[18] , 프레드 해리스 상원의원[19] , 팻시 밍크 하원의원[20] 이 있었고 중도에는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헨리 "스쿱" 잭슨 상원의원[21] 이 있었고 우익에는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 윌버 밀스 하원의원[22] , 샘 요티 LA 시장[23] 등이 있었다. 물론 프론트러너라고 할 만한 인물은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 그리고 경선에 대해 말을 아끼던 테드 케네디 정도였으나 하도 참가자가 많았기에 경선은 혼란 그 자체였다.
3.2.2. 에드먼드 머스키의 우세와 몰락[편집]
초기 우세를 잡은 것은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험프리의 부통령 후보였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이었다. 머스키가 출마한다면, 비록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닉슨에 근소하게 뒤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1월 24일 열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에드 머스키가 비록 후보 중에는 35.5%로 1등을 했으나 조지 맥거번같은 무명 상원의원이 22.6%를 기록하는 이변이 일어나 머스키의 우위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Endorsement Ed"라는 별명까지 붙여질 정도의 프론트러너라기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압도적인 재선을 원하고 있던 닉슨은 상대 후보에 대한 도감청, 언론 공작, 선거 캠프 분열 유도 등의 수작으로 머스키를 침몰시켰다. 머스키가 프랑스계 미국인 유권자들을 폄훼했다는 소문을 퍼트리는가 하면 부인이 담배를 피우고 문란한 사생활을 즐긴다며 영부인감이 아니라고 건드리는 비열한 공작도 서슴치 않았다.[24] 에드먼드 머스키는 격분해 네거티브에 반박하는 성명을 냈다. 이때 성명이 눈이 내리는 날 야외에서 진행되었는데, 눈이 얼굴에 닿아 녹아내린 것을 두고 닉슨 측 텔레비전 언론들은 "머스키가 감정적으로 대응해 울음을 터트렸다!"라고 거짓 보도를 했다. 유권자들은 이 말을 믿고 머스키를 대통령이 되기에 너무 감정적이고 조급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또 악재가 겹치고 마는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가 다가오는 와중 유권자들이 야밤중에도 걸려오는 "Harlem for Muskie Committee"의 전화에 격노하게 된 것이다.[25] 그렇게 다가온 3월 7일의 결과는 끔찍했다. 머스키가 이기긴 했으나, 당초의 예상이었던 65%와 다르게 단 46%의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머스키의 압도적인 선두주자 자리는 무너지고 말았다.[26]
3.2.3. 조지 맥거번의 부상[편집]
이 뉴햄프셔 대참사로 이득을 본 것은 조지 맥거번 팀이었다. 닉슨은 맥거번이 이기기 쉬운 만만한 호구라고 보고는 사보타지를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맥거번의 지지가 오르게 된 것이다.
그 이후의 플로리다 프라이머리는 개판 그 자체였다. 여기서도 닉슨의 공작원들이 머스키 지지자로 위장해 스쿱 잭슨이 고등학생 때 사생아를 낳았고 험프리는 음주운전하다 체포됐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린 것이다. 물론 머스키한테 공작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뉴햄프셔 대참사로 무너진 지지율이 있음에도 여전히 머스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닉슨의 공작원들은 플로리다의 보수성을 이용해 머스키가 버싱을 지지한다는 말을 널리 퍼트렸고, 민주당 거물들에게 머스키 팀인 것으로 위장해 "살찐 고양이"가 아닌 소액기부를 원한다는 편지까지 보낸 것이다. 1등은 말할 것 없이 남부파의 수장 조지 월리스가 42%를 차지한 것으로 끝났지만 머스키는 비참한 8.9%(...)를 얻으며 4등 자리를 얻게 되었다. [28] 일리노이 프라이머리도 있었으나 대의원들이 성별 규칙 안지켜서 싹다 쫓겨나버린 바람에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4월이 되서는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에 더해 조지 맥거번까지 선두주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 프라이머리가 열린 주는 위스콘신이었는데, 맥거번은 이 순간을 위해 온 힘을 다해왔다. 중서부의 강철 벨트 주로서 이 곳은 험프리와 맥거번이 자연스럽게 우위를 점할 만한 주였다. 이 주를 이기는 것이 맥거번 팀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폭격 이슈가 프라이머리 직전에 떠오르며 위스콘신에서 맥거번이 승리하게 되었다. 휴버트 험프리에게 있어 이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휴버트 험프리는 당 내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고 AFL-CIO의 완전한 지지를 받는 등 대규모 선거운동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자금 문제에서 가장 여유로운 인물이었다.[29] 게다가 위스콘신은 휴버트 험프리를 "세번째 상원의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사랑하던 주였다. 이런 주에서마저 풀뿌리 조직의 지지로 맥거번이 승리한 것이다. 심지어 월리스에게 밀린 3등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충격을 배로 만들었을 뿐이다. [30]
맥거번의 기세는 매사추세츠에서도 대승을 거뒀다. 어찌 보면 생전 로버트 F. 케네디의 열성적인 지지자이자 직접적인 후계자가 승리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매사추세츠에서 2등을 기록한 머스키는 맥거번과의 30% 격차에 좌절해 경선을 그만두게 되었다. 남은 민주당 존슨파의 희망 휴버트 험프리에게 위안이 된 사실은 펜실베이니아에서의 승리였다. 조지 미니를 비롯한 AFL-CIO 등 노조 지도부는 험프리 하에 결집해있었다. 위스콘신은 온 힘을 쏟아부어 어찌 이겨낼 수 있었으나 펜실베이니아에선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경선은 험프리의 기득권 대 맥거번의 새정치, 그리고 월리스의 소수파로 정리되는 듯 했다.
3.2.4. 조지 월리스의 총격과 맥거번의 후보자 지명[편집]
그러나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 월리스가 아서 브레머에게 총격당한 것이다. 경선이 하루 남은 날에 일어난 암살미수는 경선을 뒤흔들어놓는 데 성공했다. 매릴랜드에서 월리스는 편안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미시간의 결과였다. 미시간 주에서는 얼마 전에 내려진 버싱 판결로 인하여 인종적 분노가 고조된 상태였다. 거기에다 월리스의 총격으로 인한 동정표까지 더해져 표 과반수를 얻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월리스는 소수파였고 승리할 수는 없었다.
이제 프론트러너 험프리와 맥거번이 시선을 돌린 곳은 캘리포니아였다. 험프리는 캘리포니아를 이기지 못하면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압도적인 프론트러너가 돤 맥거번은 험프리보다 돈을 4배나 부어대며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험프리 대 맥거번 토론회에서 맥거번이 자신의 1000달러 기본소득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역전의 기회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프라이머리 날이 다가왔다. 다 끝났다. 맥거번은 5% 차로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271명의 대의원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경선도 싹쓸이하며 압도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경선 결과, 총 득표수에서는 험프리가 불과 0.5%p차이로 맥거번을 제쳤으나, 대의원 수에서는 맥거번이 크게 앞섰다. 앞서 언급한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에 의해 통과된 슈퍼 대의원 제도에서 맥거번이 큰 수혜를 입은 까닭이었다. 험프리는 노동조합의 표심을 앞세운 "전격전"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여성이나 대학생, 청년 등 지역 풀뿌리 조직의 지지를 얻어내는 "진지전"에는 실패했고, 이것이 험프리의 실패를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반면 조지 맥거번은 소액 후원자들의 막강한 지지를 바탕으로 대의원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31]
3.2.5. 중앙당의 조지 맥거번 소외[편집]
문제는 이 제도 자체를 조지 맥거번이 이끄는 특별위원회가 도입해 셀프 수혜 의혹이 일어난데다(...) 맥거번의 정책이 상당히 좌파적이었기 때문에 휴버트 험프리가 경선에 불복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휴버트 험프리 진영은 캘리포니아 지역의 승자독식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민주당 전당대회 투표에서 맥거번의 지명을 막고자 했다. 캘리포니아에 배당된 대의원이 없다면 맥거번이 대의원 과반 득표에 실패하는데, 결선 투표에서 월리스, 잭슨, 머스키 등의 표를 흡수해 험프리가 과반 득표를 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서였다. 하지만 이 구상은 험프리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너무 비겁하다는 욕을 들었고[32] 위원회는 이미 맥거번파가 장악했기에 어림도 없어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지 맥거번은 당 내의 숟한 반발을 이겨내고, 1972년 7월 13일 마이애미에서 치러진 민주당의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57%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민주당 당권파는 끝내 맥거번을 지지하지 않았다. 휴버트 험프리와 남부 민주당의 떠오르는 기수였던 지미 카터는 맥거번 지지를 거부했으며,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는 아예 "닉슨을 위한 민주당원" 운동을 주도한다. 물론 린든 B. 존슨[33] , 조지 월리스[34] 등 조지 맥거번을 지지한 소수의 인물도 있었으나, 이미 민주당 지지 노조인 AFL-CIO가 역대 처음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를 거부하는 등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상태였다.
한편, 부통령 후보로 선출된 토머스 이글턴(Thomas Eagleton)[35] 은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원의원이었으며, 민주당 내 우파에 속해 조지 맥거번의 부통령 후보자 리스트의 거의 끝에 있는 인물이었다. 본래 조지 맥거번은 자신의 친구이자 같은 파벌에 속했으며 인기도 좋은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꼽으려 했다. 하지만 테드 케네디는 상술한 "차파퀴딕 스캔들"로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이를 거부한다. 맥거번은 당의 통합을 위하여 상대 파벌의 수장인 휴버트 험프리에게 부통령 후보가 되어달라고 했지만 험프리는 매몰차게 거절했으며, 그의 정치적 후계자인 월터 먼데일도 유력 부통령 후보군이었으나 지명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거의 모든 부통령 후보군이 지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토머스 이글턴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도, 맥거번과 성향이 비슷하지도 않았음에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72년 전당대회는 1968년과 마찬가지로 아수라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하는 노동조합원들과 지지자들의 난동으로 인하여 경찰이 출동해야했으며 전당대회장은 폭력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부통령 후보 지명 과정에서는 맥거번에 대한 항의 투표로 온갖 기상천외한 후보자들이 나왔고 투표지에 이름을 올린 후보자만 50명 가까이 되었다. 심지어 누군가 마오쩌둥을 적어서 낼 정도로(...) 상황은 엉망이었다.[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