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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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반기를 모두 우승해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B]: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최일 연기, 고척 스카이돔 중립경기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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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KBO 한국시리즈
KBO 리그 출범

1982년
OB 베어스

1983년
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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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OB 베어스
MVP
김유동

자 2사에 주자는 없습니다. 2번 타자 배대웅 나왔습니다. 쳤습니다!

투수 넘겼습니다. 유지훤 잡았습니다. 러닝스로~ 아웃!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OB 베어스가 꿈의 구연이라고 일컬어지는 코리안 시리즈, 코리안 시리즈 6차전도 승리를 장식을 해서 4승 1무승부 1패로 승리를 안았습니다!

MBC 임주완 캐스터의 우승 콜


1. 개요
2. 일정표
3. 시리즈 전 분위기
4. 엔트리[1]
5. 경기결과
5.1. 1차전
5.2. 2차전
5.3. 3차전
5.4. 4차전
5.5. 5차전
5.6. 6차전
6. 후일담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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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2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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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19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2일까지 열린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경기 결과는 4승 1무 1패로 전기리그 우승팀인 OB 베어스가 후기리그 우승팀인 삼성 라이온즈를 누르고 승리하며 프로야구 초대 우승팀의 영광을 안았다.

박철순의 부상 투혼, 김유동의 극적인 홈런, 그리고 이선희의 눈물로 대변되는 시리즈이자 프로야구의 첫 한국시리즈가 명승부로 장식되면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시리즈다. 그리고 콩성의 역사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 일정표[편집]




3. 시리즈 전 분위기[편집]


당초 예상을 뒤엎고 원년 전기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확보한 OB 베어스는 전기리그 동안 다소 무리했던 에이스 박철순을 적당히 던지게 하면서도 의외로 후기리그에서도 상당히 잘 나가면서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막판 거세게 추격한 삼성 라이온즈에게 쫓기면서 후기리그 우승의 향방은 알 수 없게 된 상황.

아래는 유명 야구기자였던 고 이종남 기자의 저서 사람 좋으면 꼴찌에 실린 내용이다.

OB는 후기 우승을 확정짓기 위해 9월 29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 와의 시즌 최종전에 박철순을 선발로 올렸다. OB가 이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후기리그 우승과 동시에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전, 후기 통합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영호를 선발투수로 맞세운 삼성의 저력도 만만치는 않았고, 여기에 내심 프로 첫 해부터 최대의 하이라이트인 한국시리즈가 무산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서 껄끄럽게 생각하던 KBO의 난데없는 개입으로 이날 경기는 연장 12회 접전 끝에 삼성의 2:1 승리로 끝났다. 1:1로 맞서던 이날 경기에서 9회말이 종료된 시간은 밤 10시 30분. 규정상 연장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이대로 후기리그 우승팀은 10월 2일 삼성과 MBC와의 시즌 최종전 결과로 결정될 상황이었지만, 당시 경기 감독관으로 현장에 있던 이호헌 KBO 사무차장이 "밤 10시 30분 이후 연장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은 서울에만 국한되는 로컬 룰" 이라는 말도 안되는 유권해석을 내세우며 탈법적(?)으로 연장에 돌입했고 결국 4시간 8분의 대 접전 끝에 삼성이 12회말 함학수가 3루 쪽으로 끝내기 내야안타를 뽑아내며 승리를 낚은 것이다.[2]


하지만 이는 이종남 기자의 착각이라 보는 것이 맞다. 참고기사1참고기사2 1983년의 기사로 기사 중간 작년(1982년)에는 서울시에서 10시 이후 경기 진행에 제한을 걸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KBO 규정상 15이닝 시간제한 없는 연장이라 할지라도 운동장 사업소의 협조가 없다면 진행할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실제로 당시 서울시의 경기장 운영원칙은 고약한걸로 소문이 나 잔디보호를 명목으로 경기시작 전까지 경기장에서 훈련도 하지 못하게 했고 청룡과 후에 올라온 OB는 인근 학교 운동장에서 훈련하곤 했다. 또한 주최측 농간이란 의견은 한번도 나온 적이 없다가 이종남기자가 처음 제기한 것으로 같은 시기 다른 기자에 의해 유사한 주장이 나온 기록은 하나도 없다.

어쨌든 이날 승리로 최소 후기 공동 우승을 확보한 삼성은 10월 2일 열린 MBC 청룡과의 대구 홈경기도 3:1로 가져오며 자력으로 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특별할 일도 없었겠지만, 9월 29일 경기에 나선 박철순이 8회말 무사 1루 상황에서 오대석의 보내기 번트 타구를 처리하다 허리를 다친 것이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3] 다 잡았던 후기리그 우승을 날린데다가 에이스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OB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고, 반대로 15승 투수만 세 명(이선희, 황규봉, 권영호)을 보유하며 당대 최강의 마운드를 자랑하던 삼성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었다.


4. 엔트리[4][편집]



4.1. OB 베어스[편집]


OB 베어스 198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감독
1명
김영덕
코치
2명
김성근, 이광환
투수
7명
강철원, 계형철, 김현홍, 박상열, 박철순, 선우대영, 황태환
포수
4명
정종현, 김경문, 조범현, 김진홍
내야수
7명
구천서, 신경식, 김광수, 유지훤, 박종호,[5] 양세종, 이근식[6]
외야수
7명
윤동균, 김유동, 이홍범, 정혁진, 김우열, 구재서,[7] 이근식[8]


4.2. 삼성 라이온즈[편집]


삼성 라이온즈 198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감독
1명
서영무
코치
2명
임신근, 우용득
투수
7명
이선희, 권영호, 황규봉, 성낙수, 박영진, 송진호
포수
4명
이만수, 손상득, 박정환, 손상대
내야수
6명
함학수, 배대웅, 김한근, 서정환, 오대석, 천보성
외야수
6명
장태수, 허규옥, 정현발, 정구왕, 박찬, 김휘욱


5. 경기결과[편집]



5.1. 1차전[편집]


한국시리즈 1차전 10.05(화) 18:30,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R
H
E
B
삼성
권영호
0
0
0
0
0
2
0
0
1
0
0
0
0
0
0
3
OB
강철원
2
0
0
0
1
0
0
0
0
0
0
0
0
0
0
3
중계방송사: 파일:KBS 2TV 로고(1980-1984).svg | 캐스터: 이장우 | 해설: 하일성

삼성이 권영호를 1차전 선발로 내세운 건 충분히 이해가 갈 만 했지만, 박철순의 허리부상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던 야구팬들로선 OB가 그 해 정규시즌 5승에 그친 언더핸드 스로 투수 강철원[9]을 마운드에 올린 것은 도저히 납득이 불가능한 사실이었다. 당연히 선발의 무게감으로는 15승을 거둔 권영호가 앞섰지만 공도 둥글고 배트도 둥근 법, 예상을 깨고 먼저 앞서간 것은 OB였다. 1회 신경식김유동의 적시타로 먼저 2점을 선취했고, 5회에는 김우열의 적시타로 3:0으로 초반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반대로 삼성 타선은 경기 중반까지 강철원의 주무기인 지저분한 구질과 정교한 로케이션에 헛방망이만 돌리며 5회까지 무안타의 빈공에 허덕였다.

그러나 삼성은 6회 함학수의 2점 홈런에 힘입어 3:2로 추격하더니, 9회초 2사 2루 상황에서 배대웅이 동점 2루타를 터뜨리며 기어이 동점을 만들었다. 9회까지 강철원을 끌고 가던 OB는 연장전에서 선우대영을 구원투수로 내세웠고, 삼성도 황규봉과 이선희를 모두 투입시키면서 15회를 꽉 채웠다. 강철원이 9이닝 3실점으로 예상 밖의 호투를 보였고 공격 자체도 12안타를 터뜨린 OB가 3안타에 그친 삼성보다 활발했지만 모두 산발로 그치는 바람에 점수와는 연을 맺지 못하며 결국 이날 승부는 3:3 무승부로 끝났다.

승패는 갈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패자는 OB였다. 다 잡았던 경기를 아깝게 날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패배감은 2차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이 경기는 또한 KBO 리그 공식경기 첫 무승부이기도 하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는 무승부 제도가 있었지만, 정규시즌 240경기 중 무승부로 끝난 경기는 없었다. 정규시즌 최초의 무승부 경기는 1983년 4월 3일 삼성 라이온즈해태 타이거즈광주 개막전으로 5:5로 맞선 상황에서 우천으로 인해 9회 강우콜드 무승부가 선언되었다.1983년 4월 4일자 동아일보 8면


5.2. 2차전[편집]


한국시리즈 2차전 10.06(수) 18:3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계형철
0
0
0
0
0
0
0
0
0
0
삼성
이선희
0
6
0
2
0
0
0
1
-
9
중계방송사: 파일:MBC 로고(1981-1985).svg

OB는 선발 투수로 계형철, 삼성은 이선희를 내세웠다.

승부는 초반에 쉽게 갈렸다. 2회말 삼성은 만루 찬스에서 김한근의 2타점 적시타를 신호로 타순이 한바퀴 돌며 대거 6점을 뽑으면서 일찌감치 승기를 가져왔다. 여기에 OB는 선발 계형철이 일찌감치 삼성 타선에 KO패 당하고 1회말 유지훤의 더블플레이가 인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심리적인 동요를 포함, 수비진의 잦은 실수가 겹치면서 자멸했다. 게다가 공격마저도 꼬일대로 꼬이며 이날 OB는 총 세 개의 병살타를 날렸고, 그 중에 구천서가 두 개를 치며 패배의 단초를 단단히 제공했다(...) 삼성은 이선희와 성낙수의 이어던지기로 OB의 타선을 단 5안타로 틀어 막으면서 가볍게 승리했다.

OB는 이날 경기에서도 진 것도 진 것이지만 한술 더떠 2차전에서 패한 후 다음 날이 이동일이라는 것을 빌미로 이광환 코치를 비롯해 김우열, 윤동균, 김유동, 계형철, 유지훤, 이홍범, 황태환 등의 고참급 선수들이 대구의 숙소 부근에서 술자리를 갖고 실컷 마신 후 숙소인 수성관광호텔 지하 나이트클럽 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취객들(그것도 하필 대구에서 알아주는 주먹들)과 그만 시비가 붙으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시리즈 전적 1무 1패로 몰린 상황에서 이광환 코치가 김영덕 감독에게 정규시즌 중 하던 대로 선수들의 분위기를 살려 보겠다며 제안했고 "알았어, 마음대로 해 보라"는 김감독의 묵인 하에 구단 사무국장이던 이민우를 물주로 하여 고참들을 데리고 술판을 벌였는데 2차 장소인 나이트클럽에서 유지훤이 술김에 주먹들에게 시비를 건 것이 사단을 부른 것이었다... 그나마 언론인 출신이던 OB 박용민 단장[10]이 이리저리 뛰면서 이 사태가 매스컴을 타지 않도록 무마시킨 덕분에 선수들이 시리즈 도중 쇠고랑을 차는 신세는 면했지만 그렇잖아도 흉흉하던 팀 분위기가 더욱 최악으로 치달았다.[11]

같은 날 광주에서는 정규시즌 중 우천으로 연기되었던 롯데 자이언츠해태 타이거즈의 경기가 더블헤더로 열렸다. 1차전은 3:2, 2차전은 9:1로 모두 해태가 가져갔고 롯데와 해태는 원년 후기리그에서 18승 22패로 공동 4위를 기록하며 뒤늦게 그 해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5.3. 3차전[편집]


한국시리즈 3차전 10.08(금) 18:30, 동대문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권영호
0
0
0
1
0
0
0
2
0
3
OB
선우대영
0
0
1
0
2
1
1
0
-
5
중계방송사: 파일:KBS 2TV 로고(1980-1984).svg | 캐스터: 이세진 | 해설: 하일성

3차전부터는 중립 구장인 동대문야구장 에서 개최되었다.

그렇잖아도 안 좋은 선수단 사기가 패싸움 사태로 인해 아예 바닥을 파고 들어가며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OB는 이젠 시리즈 제패는 글렀고 최소 1승이라도 챙겨서 개망신은 피해보자는 각오로 3차전을 맞이했다. OB의 선발은 좌완 선우대영, 삼성은 같은 좌완인 권영호를 등판시켰다.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OB였다. 정규시즌 주로 3, 4번을 맡다가 시리즈 들어 1번타자로 전진 배치된 팀의 리더 윤동균이 3회말 중월 2루타를 치며 출루했고 김광수가 범타에 그쳤지만 3번타자 김우열이 좌전 적시타로 윤동균을 홈으로 불러들이며 선취점을 뽑았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삼성도 4회초 함학수의 1타점 우전 적시타로 다시 동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OB는 5회말 시리즈 내내 무안타의 슬럼프에 시달리던 유지훤이 처음으로 중견수 앞 안타를 뽑아냈고, 이어 윤동균의 좌월 2루타로 만든 무사 2, 3루의 찬스에서 김광수의 내야 땅볼 때 3루 주자 유지훤이 홈에서 횡사했지만 3번 김우열의 땅볼을 삼성의 유격수 오대석이 더듬는 사이에 윤동균이 홈을 밟으며 재역전에 성공했다. 후속타자인 4번 신경식은 외야 플라이에 그쳤지만 김유동이 좌전 적시타를 치면서 스코어는 3:1.

그리고 6회초 삼성이 1사 1, 3루의 절호의 찬스를 잡자 OB는 부상으로 등판이 불가능해 보였던, 그리고 사실 등판해서는 안됐던 박철순을 마운드에 올렸다.[12] 우레와 같은 관중들의 환호 속에 박철순은 벼락같은 견제구로 1루 주자 정현발을 잡아낸 후 천보성을 외야 뜬공으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마감했다. 위기 뒤에 찬스라는 듯 OB는 6, 7회말에 윤동균과 구천서가 득점권 상황을 놓치지 않고 각각 1타점 적시타를 날리며 5:1로 달아났고, 8회 박철순이 이만수에게 우익선상 3루타, 함학수에게 희생플라이, 정현발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지만 더 이상의 실점 없이 5:3 승리를 이끌며 시리즈를 1승 1무 1패 동률로 맞췄다.


5.4. 4차전[편집]


한국시리즈 4차전 10.09(토) 18:30, 동대문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강철원
0
0
0
1
1
0
5
0
0
7
삼성
이선희
0
0
2
2
0
0
2
0
0
6
중계방송사: 파일:MBC 로고(1981-1985).svg | 캐스터: 김용 | 해설: 허구연

OB는 1차전에서 예상 밖의 역투를 보인 강철원이 선발로 나왔지만, 구질이 노출되었는지 1차전과 다른 양상으로 삼성은 초반 강철원을 흠씬 두들기면서 3회말 장태수가 2점 홈런을 쳤고, 4회에도 다시 2점을 뽑으면서 4회초 김우열이 솔로홈런, 5회초 정종현이 솔로홈런을 치며 만회한 OB를 2:4로 앞서 나갔다. 그리고 6회부터 이선희 대신에 황규봉을 올리면서 승부를 결정지으려 했지만, 7회초에 사건이 터졌다. 흔히들 럭키 세븐이라고 하지만 그건 OB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고, 삼성에게는 악몽같은 7회였다.

7회초 OB의 선두타자는 6번 구천서. 하위 타선으로 내려가던 상황이라 황규봉은 가볍게 이닝을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구천서는 뜻밖에 좌중간 2루타를 뽑으며 찬스를 만들었다. 포수 정종현 대신 대타로 나온 작은 이근식은 내야플라이에 그쳤지만 이홍범이 볼넷을 골랐고 유지훤은 빗맞은 2루 땅볼로 주자들을 한 루씩 진루시키며 2사 2, 3루. 다음 타자는 시리즈 들어 최고의 타격감을 자랑하던 윤동균이었고, 황규봉은 그를 고의사구로 거르며 OB는 2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여기서 김광수의 대타로 투입된 정혁진이 황규봉의 2구째를 잡아당겨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날렸고[13] 주자 두 명이 홈을 밟으며 4:4 동점. 이어지는 2사 2, 3루 찬스에서 김우열이 포수와 투수 사이로 솟아오르는 평범한 내야 뜬공을 날리며 스리아웃 공수교대... 가 될 상황 이었으나, 콜 플레이 미숙으로 그만 황규봉과 이만수가 충돌하면서 타구는 그라운드에 뚝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고 그 사이에 3루에 있던 윤동균이 홈을 밟으며 5:4로 전세를 뒤집었다.[14] 그리고 시리즈 들어 공이 수박만하게 보이던 5번 김유동까지 김이 샌 황규봉을 상대로 2타점 중전 적시타를 터뜨리면서 2사 후에 5점을 뽑는 빅 이닝을 만들며 순식간에 점수는 7:4로 벌어졌다.

반격에 나선 삼성도 7회말 무사 1, 2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한 박철순을 상대로 2점을 뽑으며 7:6까지 바짝 따라 붙었지만, 결국 박철순은 김한근을 삼진으로 잡고 위기에서 벗어난 뒤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 막으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로서 OB는 시리즈 전적을 2승 1무 1패로 뒤집을 수 있었다.


5.5. 5차전[편집]


한국시리즈 5차전 10.10(일) 14:00, 동대문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삼성
권영호
0
0
0
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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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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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OB
선우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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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계방송사: 파일:KBS 1TV 로고(1980-1984).svg

삼성의 선발 권영호는 초반 난조를 보이면서 1회 신경식에게 1타점 우월 2루타, 김유동에게 좌월 2점 홈런을 맞으며 먼저 3점을 내줬고 3회말에는 김우열에게 좌월 솔로포를 허용하며 스코어는 4:0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삼성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고, OB의 선발 선우대영을 상대로 5회초 오대석의 2점 홈런으로 추격을 개시하더니, 급기야 7회초에는 선우대영을 상대로 대타 박찬의 2점 홈런이 터지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삼성은 7회초에 바뀐 투수 황태환을 2사 만루까지 몰고 가면서 승부를 뒤집을 찬스를 잡았지만, 손상득이 외야 플라이로 물러나면서 땅을 쳐야 했다.

이후 8회초~9회초에 삼성과 OB에게 연달아 찾아온 득점권 기회가 전부 불발되면서 1차전에 이어 또 다시 연장전 돌입의 기미가 보였지만, 승리의 여신은 OB의 손을 들어 주었다. 9회말 선두 타자로 나온 이홍범이선희를 상대로 중견수 앞 안타를 쳤고, 그 타구를 중견수 정구왕이 제대로 포구하지 못하는 실책을 틈타 2루까지 진출한 후 김경문이 희생번트로 이홍범을 3루로 밀어넣으며 1사 3루의 찬스를 잡았다. 그리고 후속 타자 유지훤이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끝내기 안타[15]를 치면서 5:4 승리를 거두었고, OB는 시리즈 전적 3승 1무 1패로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겨 놓게 되었다. 무엇보다 OB는 박철순을 쉬게 하고도 선우대영과 황태환 두 명 만으로 투수 전력을 아끼면서 승리를 따낸 것이 큰 소득이었다.


5.6. 6차전[편집]


한국시리즈 6차전 10.12(화) 18:30, 동대문야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OB
박철순
0
1
1
0
1
0
0
0
5
8
삼성
이선희
2
0
1
0
0
0
0
0
0
3
중계방송사: 파일:MBC 로고(1981-1985).svg | 캐스터: 임주완 | 해설: 허구연

하루를 쉬고 맞붙은 6차전. 벼랑 끝에 몰린 삼성은 난조를 보인 15승 투수 3인방 중 가장 믿을 수 있던 이선희를 다시 올렸다. 이틀 전 5차전에서 선발 권영호의 구원 투수로 5이닝을 던졌지만, 3차전 이후 OB 타선에 계속 털린 황규봉이나 권영호에 비하면 그나마 이선희의 컨디션이 가장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OB는 3, 4차전 연속으로 세이브를 올리고 이틀을 쉰 박철순을 마운드에 올리느냐, 아니면 하루 더 휴식을 주고 7차전에 승부를 거느냐 고민 끝에 김영덕 감독이 박철순에게 직접 "오늘 (6차전에)나갈래 하루 더 쉴래?"라고 물었는데 박철순은 망설임 없이 "마운드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던지겠습니다. 지금 이게 어떤 기회인데 여기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라고 강한 의지를 내세웠다.

결국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김영덕 감독은 박철순을 6차전 선발로 올리는 초 강수를 단행했고, 허리 상태가 최악에 달해 있던 박철순은 경기 시작 전 야구장 부근 주차장에 세워둔 에 들러 친분이 있던 의사의 도움으로 이른바 대포주사라고 불리던 데포메드롤[16] 주사를 맞고 간신히 등판할 수 있었다.[17]

양 팀 선발의 초반 컨디션 난조를 틈타 삼성과 OB는 점수를 냈다. 삼성이 1회말 이만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타점 2루타로 선취점을 뽑자, OB는 2회초 김유동의 솔로홈런과 3회초 김우열의 중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다. 다시 3회 삼성이 이만수의 좌전 적시타로 2:3 재역전 했지만, OB는 5회초 2사 후 김유동의 1타점 중전 적시타로 다시 동점을 만들었다. 이처럼 이만수와 김유동이 서로 타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동점을 이루었으며, 이후 경기는 더 이상의 득점 없이 8회말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운명의 9회초. 8번 김경문이 3루 앞 기습번트 안타로 출루한 OB는 9번 유지훤이 희생번트를 시도했으나 3루수 파울플라이로 잡히며 1사 1루가 되었지만, 윤동균의 중전 안타와 김광수의 몸에 맞는 공으로 풀 베이스의 찬스를 잡았다. 위기에 몰린 이선희는 3번 김우열을 유격수 플라이로 잡으면서 큰 산을 넘기는가 싶었지만, 4번 신경식을 상대로 그만 볼넷을 내주며 4:3 역전을 허용했다. 이대로 끝났다면 한국 프로야구의 초대 우승팀이 밀어내기 볼넷으로 결정 되었을 상황이었지만, 곧이어 이 볼넷을 팬들의 뇌리에서 금새 사라지게 만든 명장면이 펼쳐졌다.

임주완: 쳤습니다! 네~ 높이 솟구칩니다! 자, 왼쪽 담장을 넘기느냐, 왼쪽 담장을 넘기느냐!

허구연: (아주 쿨하게) 네, 이거 넘어가쓰요갔어요.

임주완: 홈런~입니다! 홈런~!

허구연: 아~ 이것은 뭐 완전히 쎼기쐐기를 박는 홈런이네요.

임주완: 만루~홈런~! 그랜드 슬램! 만루홈런 김유동!

김유동의 만루홈런 당시 MBC 중계진의 멘트


다음 타석에 들어온 5번 김유동이 전 타석의 볼넷을 의식한 이선희의 한복판 초구를 놓치지 않고 끌어당겨 좌측 외야석 중단에 떨어지는 만루홈런을 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유동이 역전 만루홈런을 쳤다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의 인상적인 쐐기 홈런이었다. 이 홈런 한 방으로 승부는 순식간에 8:3으로 벌어졌고, 그리고 이선희는 덕아웃 근처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쏟았다 9회까지 역투한 박철순이 3실점 완투승으로 경기를 끝내면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초대 우승은 OB 베어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6차전까지 25타수 10안타(0.400) 3홈런 11타점[18]을 기록한 김유동은 초대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부상으로 승용차까지 받는 경사를 누렸다. 흔히 가을야구에선 미친놈이 승부를 좌우한다고들 하는데, 김유동이야말로 KBO의 원조 미친놈 이었던 것이다.


6. 후일담[편집]


  • 2차전 종료 후 술자리에서의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광환 코치는 사직서를 품은 채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재밌는 사실은 2차전 이후 서울로 올라와 강남역 뉴욕제과 뒷편의 호프집에서 이광환을 포함하여 사고를 친 멤버들 끼리 또 술잔을 기울이며[19] "우리 때문에 이 코치님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다.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정신 차려서 내일부터는 꼭 이기자" 면서 3차전의 승리를 다짐했었는데,[20] 그 뒤로 계속 승리를 이어가자 그 때 술을 마셨던 주점에서 경기 후 그 멤버끼리 뭉쳐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이 일종의 징크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OB는 거짓말 같이 내리 4연승을 거두었고, 이광환은 우승이 확정되자마자 바로 사직서를 찢어버렸다. 또한 사고를 쳤던 선수들은 6차전 종료 후 그라운드에서 우승을 자축하면서 자신들을 자르려 했던 박용민 단장에게 집중적으로 맥주를 퍼부었다고...
  • 사실 프로 초창기 대다수의 선수들이 밤 새워 죽어라 퍼마신 뒤 다음 날 경기에 술냄새 풀풀 풍기며 출장하는 일은 비일비재 했고,[21] 그것이 나름대로의 자기관리 방법 중 하나였다. 더구나 프로 원년 구단 중 OB만 유일하게 메리트 시스템을 실시하여 선수들 주머니는 항상 넉넉했고[22] 그러다 보니 경기 후 항상 가는 곳은 술집. 한술 더 떠 윤동균, 김우열 등 술 좋아하는 팀 내 고참급 선수들이 "코치님 요새 방망이가 잘 안맞는데 오늘 한잔 하시죠?" 라며 이광환 코치[23]에게 뽐뿌질을 넣으면 이 코치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거의 매일 선수들 술자리에 동반하며 쉴드를 쳐주었다. 더군다나 OB 베어스의 모기업은 주류제조 업체인 동양맥주였기 때문에 음주에 대해 제법 관대한 편이기는 했다. 그래서 당시 OB만큼 술꾼들이 뛰기 좋은 구단은 없었다 봐도 좋을 듯.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김유동은 외상 술값이 많이 깔린 것이 화근이 되어 구단과 마찰을 빚었고, 이듬해인 1983년 시즌 도중 선수단 무단 이탈에 따른 무기한 출장정지 조치를 받은 끝에 팀에서 방출당하고 말았다.

  • 넉제비라는 별명답게 넉살과 입담이 좋았던 김유동은 시리즈 MVP로 뽑힌 후 인터뷰에서 "경기 전 낮잠을 자다 꿈을 꿨는데 친구 네 명과 같이 상가집에서 절을 두 번 하는 꿈이었다. 오늘 만루홈런의 예고편 이었나 보다" 라고 털어놓았다.[24]

  • OB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타구는 유격수 땅볼이었다. 2사 후 배대웅박철순의 초구를 휘두른 것이 마운드 앞에서 크게 튀기며 박철순의 키를 넘겼고, 유격수 유지훤이 타구를 날렵한 대시로 잡아서 아웃시킨 후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선수들과 포옹하며 환호하던 것이 프로야구 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인데, 사실 이 때 박철순은 그렇지 않아도 세 번이나 진통제를 맞으며 무리하던 허리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배대웅의 바운드를 처리하려 점프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허리에 막심한 충격이 간 것이다. 박철순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때 충격은 설령 허리가 멀쩡했더라도 크게 다쳤을 정도였다고... 이후 박철순은 척추 헤르니아 진단을 받고 길고 긴 어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 사실 두 팀 모두 프로라기보다는 아마추어 결승전에 가까운 투수 운용을 보여줬다. 이 때의 후유증으로 인해 박철순을 비롯해 삼성도 이선희와 황규봉이 선수 경력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특히 박철순과 이선희는 이 때 이후로 두 번 다시 두 자리수 승수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래도 황규봉은 1984년과 1985년 2시즌 연속 두 자리수 승수를 거두며 재기에 성공, 나름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이선희의 비극에 가려져서 그렇지, 1, 3, 5차전 선발로 나온 권영호 또한 그해 15승을 거둔 거물투수 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진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권영호는 당시 삼성 에이스 3인방 중 덜 혹사당한 편 이었고,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삼성의 구원투수로 맹활약하였다.

  • 프로출범 직전 잘해야 3~4위권 전력으로 예상되던 OB의 전기리그 우승이 말 그대로 이변이었다면, 국가대표 출신 선수 최다 보유라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삼성의 후기 우승은 당연하다는 평가였다. 더구나 OB는 박철순이 허리 고장으로 등판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결국 나왔지만 일찌감치 승리감에 도취된 삼성의 일부 선수들은 시리즈 도중 임에도 음주가무에 포커판을 즐기다가 결국 그냥 술만 퍼마신(...) OB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33년 뒤의 예고편?


  •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서 '비행접시처럼 날아간 김유동 만루홈런'이란 헤드라인이 실렸는데,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린 날 새벽에 전국적으로 UFO 목격 소동이 벌어져서 뉴스와 신문 등에 제법 크게 이슈가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이틀이 지난 10월 14일, 전기리그 중 개최되지 못한 MBC 청룡과의 원정 잔여 1경기를 동대문야구장 에서 치루어야 했다. 경기 내내 무득점으로 일관하던 삼성이 8회초에 1득점으로 앞서 갔지만, 9회말에 MBC가 최정기대타 끝내기 투런 홈런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말하자면 슈퍼 한국시리즈의 원조격 경기 되겠다(...).

  • 한국시리즈 이후 삼성 측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마이너리그 혼성팀을 초청해 초대팀인 삼성 라이온즈와 우승팀 OB 베어스, 그리고 한국 올스타팀 등과 잠실에서 친선 경기를 가졌다. 이때 행크 애런도 내한했다.


7. 우승반지[편집]


파일:1982한국시리즈.png

1982년 당시에는 우승반지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때 우승한 사람들은 우승반지를 받지 못했는데, 두산 베어스가 한국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기념하며 2011년에 1982년 우승반지를 제작했다. 우승 당시 코칭스탭이거나 선수였다면 현재 소속 팀을 막론하고 모두 수여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2011년 기준 SK 와이번스, KIA 타이거즈,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있던 김성근, 조범현, 김경문[25]에게도 반지가 수여되었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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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볼드체는 당시 주장이었던 선수.[2] 당시 시즌 종료까지 2경기를 남긴 후기리그 2위 삼성은 1위 OB에 0.5게임 차로 뒤져 있었다. 이날 삼성이 OB와의 경기를 무승부로 끝냈다면 삼성은 MBC 청룡과의 최종전을 반드시 이기고 다시 OB와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치뤄야 하는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KBO로서는 어차피 한국시리즈가 무산될 지언정 이날 경기에서 어떻게든 끝장을 보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주최측의 농간(?)을 벌인 셈이다.[3] 더군다나 박철순은 당장 강판해서 병원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이날 무려 12회까지 완투하며 허리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4] 볼드체는 당시 주장이었던 선수.[5] LG - 현대 - 삼성에서 뛰었던 박종호와는 다른 사람이다. 지금의 고3 나이인 19세(1964년생)에 프로에 데뷔했으며, 82년 5경기만 뛰고 은퇴했다. 특이하게도 은퇴 후 음대에 진학하여 음악가로 전업했고 현재는 대전시립교향악단에서 더블베이스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6] 일명 큰 이근식. 당초 주전 1루수로 낙점받았지만 급 부상한 신경식에게 밀려 백업으로 전락했고 1982년 시즌 타율 0.185라는 미미한 성적만 남긴 채 은퇴했다.[7] 구천서쌍둥이 동생.[8] 일명 작은 이근식. 큰 이근식과는 달리 1986년 까지 현역에서 활동했다.[9] 시즌 5승 투수라 해도, 당시 강철원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전기리그를 날리고 후기리그 중반에 복귀하여 8경기 등판에 5승 무패, 평균자책 2.18로 제법 활약을 보였다. 그 해 후반기 박철순에게 어느 정도 휴식을 주고도 OB가 승승장구 한 것에는 강철원의 역할도 무시 못할 정도였으니, 그가 박철순의 대역으로 1차전 선발을 맡을 만한 이유는 있었던 것이다.[10] 박단장은 언론통폐합 때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흡수 통합된 합동통신 기자 출신이다.도쿄 특파원 재직 시절 일본프로야구를 접하면서 네모토 리쿠오 등 일본 야구인과도 친분을 쌓았고, 덕분에 원년 6개구단 프런트 중 누구보다도 프로야구의 생리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덧붙이자면 박용민은 이름 때문에 박용곤 회장의 가족 또는 친척으로 오해받았지만 실제로 혈연 관계는 전혀 없는 생판 남이었으며, 단지 박회장의 큰 신임을 받던 부하 직원이었다.[11] 사건을 수습한 후 박단장은 속으로 '네 이놈들 시리즈만 끝나봐라 전부 모가지' 라고 이를 갈았지만 다행히(?) OB가 극적으로 우승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12] 사실 김영덕 감독은 박철순을 출전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시리즈 전적 1무 1패로 밀리고 있던 팀을 보다 못한 박철순이 나가겠다고 하자 "야 이 미친 녀석아, 지랄하지 말고 그냥 쉬어!" 라며 욕설까지 퍼부으면서 말렸지만 "죽어도 마운드에서 죽겠다" 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김 감독은 눈물을 머금고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이후 심각한 허리 부상으로 박철순의 선수 커리어가 망가진 것에 대해 김영덕과 박철순은 "내가 관리를 잘못하여 철순이가 다쳤다" "아니다. 아버지(김영덕) 말도 안듣고 멋대로 나간 내 잘못이다" 라며 자신을 탓하고 서로를 감싸주었다.[13] 타구가 우중간 깊숙한 곳에 떨어졌고 게다가 2사 상황이라 타격과 동시에 주자들이 일찌감치 스타트를 끊었음에도 타구 속도가 너무 빨라서 1루주자 윤동균이 3루에서 멈춰야 할 정도였다. 당시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고 이종남 기자는 "딱~(배트에 공 맞는 소리) 쿵~(펜스에 맞는 소리) 하는 간격이 불과 2초 남짓이었다" 라고 그렇게 빠른 타구는 평생 본 적이 없다며 저서인 이중노출에서 회고한 바 있다.[14] 이때 기록은 규칙상 실책이 아닌 충돌안타였지만 OB로선 그게 안타든 실책이든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역전 했으니까...[15] KBO 리그 사상 첫 포스트시즌 끝내기 기록이다. 덧붙이자면 사고뭉치 중 유일하게 시리즈 내내 이렇다 할 활약이 없던 이홍범은 이날 9회말 선두타자 출루에 끝내기 득점까지 올리면서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16] 스테로이드 계열의 진통제. 효과는 강력하지만 부상 부위 주변의 근육 약화나 연골, 뼈가 손상되는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갖고 있다. KBO에서는 2008년 도핑 테스트가 도입되면서 금지약물로 지정 되었다. 단 경기력 향상이나 근육 강화와는 관계가 없고 진통 효과가 뛰어난 약품이므로, 부상치료 목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투약한다는 전제로 전문의의 처방을 받아서 KBO 반도핑 위원회에 치료목적 사용면책(TUE)를 신청하여 심사 후 통과되면 사용 가능하다고 한다. 근거 기사[17]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3, 4차전 때도 이 주사를 맞고 마운드에 올랐다고 한다.[18] 그 중 6차전에서만 무려 2홈런 6타점을 쓸어담았다.[19] 이 술자리는 대구에서의 사고 당시 물주로 나섰다가 된통 혼쭐이 난 이민우 구단 사무국장에게 또 부탁할 상황이 못 되었고, 대신 구경백 주무가 술값을 염출했다고 한다.[20] 이 때 윤동균이 주먹을 들어보이며 "여기서 안타 못치는 녀석들은 나한테 혼쭐날줄 알라"며 한마디 거들었고, 당시 시리즈에서 무안타로 헤메던 유지훤이홍범은 이 한마디에 뜨끔했다고 한다. 결국 이 두 명도 나중에 나름 한몫 해내기는 했다.[21]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원년 시즌은 지금처럼 월요일을 이동일로 하고 일주일 내내 3연전으로 경기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우천 등 변수가 아니면 2연전을 뛴 후 하루나 이틀 정도 휴식일을 가지는 시스템인지라 경기 후 부담없이 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다음 날 경기가 있다고 해서 음주를 피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고 봐도 좋다(...).[22] 경기 후 사무국장이 덕아웃으로 현금을 꽉 채운 007 가방을 들고와서 바로 수훈 선수들에게 공헌도에 따라 5만~50만원 정도의 포상금을 줬다고 한다. 참고로 1982년 기준으로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20만원 남짓이었고, 당시 통계에 따르면 한달 10만원 이하로 버는 가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 금액이면 절대로 적은 돈은 아니었다. 당시 저연봉 선수들이 몇 경기 공을 세우면 그 포상금이 한 달치 급여를 웃도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기혼 선수들에게는 아내는 모르는 짭짤한 용돈벌이 수단이기도 했다.[23] 말이 코치지 실상 이광환은 윤동균, 김우열보다 한 살 연상일 뿐이라 사석에선 친구나 다름없는 형동생 관계였다.[24] 절 두 번은 김유동이 6차전에서 날린 홈런 두 방, 친구 네 명은 만루홈런의 예지몽이었다는 해설을 덧붙였다.[25] 1982년 당시 김성근은 코치로, 조범현과 김경문은 포수로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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