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서울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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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제10회 아시안 게임
1986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
X Asian Games Seoul 1986

파일:attachment/51424002512.jpg
파일:poster_920538_z.jpg
대회기간
1986년 9월 20일 ~ 10월 5일
개최국
대한민국
참가국
27개국
참가 인원
4,839명
경기 종목
27개 종목 - 296개 세부 종목
개회 선언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
선수 선서
김호철, 김진호
성화 점화
장재근, 박미선
개·폐회식장
서울올림픽주경기장

1. 개요
2. 엠블럼
3. 없었던 마스코트
4. 유치 과정
5. 경기장
8. 경기 결과
9. 메달 순위
10. 대한민국 메달 현황
10.1. 메달 현황
10.1.1. 금메달
10.1.2. 은메달
10.1.3. 동메달
11. 중계방송 관련
11.1. 한국측 중계진
11.1.1. KBS
11.1.2. MBC
12. 이모저모
13. 역대 조직위원장



1. 개요[편집]


1986년 서울특별시 등 수도권 등지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 아시안 게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였던지라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적 기대가 컸다. 본 대회는 2년 뒤 개최가 예정된 1988 서울 올림픽을 대비한 최종 리허설 성격이 강한 대회였기에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특별시 또한 성공적인 개최에 필사적으로 사활을 거는 등, 여타 하계 아시안게임에 비해 그 무게감이 훨씬 컸다.[1]

아시안 게임 주경기장 또한 2년 후 올림픽이 열릴 장소를 그대로 썼으나, 선수촌의 경우에는 잠실종합운동장 건너편과 올림픽공원 동쪽에 각각 아시안 게임 선수촌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래서 아시안 게임 때 잠실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은 그냥 도보로 이동하면 그만이었지만 올림픽 때는 선수/기자들을 위한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2. 엠블럼[편집]


태극 무늬의 반쪽 3개를 포개어 놓은 우측 상단에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로고가 자리잡고 있다.


3. 없었던 마스코트[편집]


파일:hodori_86_asian_games.jpg
공식적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따로 마스코트를 지정하여 사용하는 일이 없이[2] 대신 19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홍보용으로 사용한다.[3] 또한 사실상 올림픽 리허설의 성격으로 치러진 대회였기 때문에 따로 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를 만들어봤자 비용만 지출되는 상황과 도리어 2년 후에 개최하게 될 가장 큰 규모의 하계 대회인 서울 올림픽 홍보에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으로 판단하여 그냥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올림픽 마스코트가 등장해야할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회식에서는 따로 아시안게임 관련 마스코트 없이 간접적으로 호돌이의 홍보와 묘사가 이루어지고 마지막 폐회식에서는 급기야 다음 베이징 대회 마스코트와 함께 등장했다.[4] 말 그대로 올림픽 리허설 대회라는 평가답게 아시안게임 홍보는 버리고 올림픽 홍보에만 집중한 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회를 앞두고 아시아경기대회에 관련된 기념품은 찾기 힘들다고 언급하면서 그저 아직 기간이 2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후에 개최될 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에 관련된 상품밖에 없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여담으로 기업 후원사 선정에서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통합해서 받았기 때문에 후원기업들도 호돌이를 광고에 사용하면서 본 대회 및 88서울올림픽을 동시에 내걸곤 했다. 이런 상황이니 설령 아시안게임 마스코트가 따로 있었다 하더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올림픽에 보다 무게를 두고 홍보했을 것이기 당연했기 때문에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는 호돌이에 밀려 별로 사용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ag1986ms.gif
또한 이처럼 본 대회의 마스코트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리그베다/나무위키 이전 버전이나 혹은 외국 사이트, 여러 검색엔진 등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라는 설명이 붙은 채로 떠돌아다니던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자료 사진이었다.

허나 이것은 본 대회가 개최되기 바로 전년도에 개최되었던 1985년 태국에서 열렸던 제13회 방콕 "동남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였던 샴고양이. 태국어로 Wichien-maat(วิเชียรมาศ)라고 부른다. #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공신력이 제일 높은 OCA 공식 홈페이지가 느닷없이 서울 아시안 게임 마스코트로 해당 사진을 올려버리는 오류를 범한 탓에 이러한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유포되었다.


4. 유치 과정[편집]


사실 서울 아시안 게임 개최는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70년에 개최될뻔 했었다. 하지만 1968년 1월 21일의 1.21 사태를 비롯한 북한의 대남 도발사태로 인해 남북간의 긴장 상태가 거셌던데다, 아시안 게임의 직접적인 개최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서울특별시는 정부 시책에 맞춰 각종 건설사업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 여건 또한 열악했었다.[5] 이런 상황에서 동시에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될 경우 서울시의 재정이 바닥날 수 있었고, 또한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이전이었던 당시의 상황[6]을 고려하면 이는 곧 대한민국 재정에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아시안 게임의 유치권을 태국방콕에게 위임하면서 사실상 개최권을 반납한다.[7]

그러다가 1977년 국민소득 1천 불과 수출 100억 불을 돌파하면서 신흥 개발 도상국으로서 발돋움하면서 엄청난 산업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다시 한번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여 개최해보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1979년에 마침내 공식적으로 유치에 도전하는 것으로 확정된다. 그것도 2년 후 열리게 될 하계 올림픽과 함께 말이다.

스포츠계에서 역사상 한 국가가 아시안 게임 유치와 올림픽 유치에 동시에 도전하는 일은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에 들어서도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과거 서울시에서는 대한민국이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를 개최해본 경험이 없었던지라 '아시안게임을 통해 개최 능력을 보여준 뒤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겠다'는 명분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두 군데에 동시에 출사표를 냈다. 다만 이는 말 그대로 표면적인 주장이었을뿐, 실제 관계자들은 개최 가능성이 높지 않은 올림픽보다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보였던 아시안 게임 유치에 사활을 걸 작정이었다.[8]

그렇게 1986년 아시안 게임 유치에 나선 서울의 경쟁 상대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하나였고[9] 여긴 얼마 전부터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개최가 거의 유력해보였다.[10] 그런데 유치 확정 발표가 되지 않은 상태가 이어지다가 1980년 10월 말에 갑자기 뜬금없이 개최 신청서를 접수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북한평양이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아시안 게임을 바로 자기들 바로 밑에서 개최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여겼던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이었고 이후 수많은 공작 활동으로 대회 운영까지 방해했다.

그러나 서울이 1970년 대회 개최 포기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국가 차원의 높은 경제력과 실행력을 바탕으로 올림픽 개최까지 염두에 두면서 야심차게 경기장을 만드는 등의 여러 진전된 모습을 보인데다, 바그다드와 평양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전쟁 중이거나 그저 이념 대결에만 몰두하는 일그러진 민낯 일색이었기 때문에 표 대결로 갈 경우 서울이 유력했다. 그리고 1981년 9월 30일에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 때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됨에 따라 대세가 완전히 기울고, 바그다드와 평양이 모두 유치를 포기하면서, 올림픽 개최 확정 2개월 후인 1981년 11월 26일, 서울의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를 최종 확정한다.[11] 1982년에 서울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SAGOC)가 발족되었으며, 이듬해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로 통합되었다.

5. 경기장[편집]



당연한 얘기지만 2년 후 1988 서울 올림픽과 종목별 경기장이 거의 대부분 같다. 다만 유도, 태권도는 서울올림픽 때에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6. 개회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개회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폐회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폐회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경기 결과[편집]


대한민국은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를 획득하여 금메달 94개, 은메달 82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한 중국에게 한 끗 차이로 밀렸다.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아시안 게임에서 종합 우승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14] 그래도 금메달 수가 아닌, 전체 메달 수에서는 대한민국이 아시아 1위를 차지하게 되면서(대한민국 224개, 중국 222개) 엄청난 성과를 보인 아시안 게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크게 작용했다. 아시안게임은 올림픽에 비해 개최국이 경기종목을 선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권한이 더 많다. 특히 양궁 같은 경우, 이미 당시 세계대회가 그랜드피타 방식[15]으로 경기를 했었는데,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과거의 방식이었던 더블라운드 방식[16]을 채택했었다.[17]

대한민국복싱 12체급을 전부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18][19] 도리어 태권도는 8체급 중 하나를 놓쳤다.

유도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채택되었으며, 이때 일본 유도가 대한민국에 초전박살이 났다. 금메달 8개(7체급+무제한급, 남자부만 실시) 중 대한민국이 6개(+은 1, 동 1), 일본이 2개를 가져갔다.

체조는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 금메달 2개[20]를 획득한 이후 일본과 중국에 밀려 금메달이 없다가 권순성의 활약으로 12년만에 금메달을 수확한다. 또한 남자 단체전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누르고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종합 메달 순위에서도 2위를 차지[21]했다.

유치경쟁에서 밀려서 감정이 상한 북한에 동조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라오스, 몽골, 남예멘, 시리아가 대회를 보이콧하였다.[22] 이처럼 시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회주의 관련 불참국들은 2년 전 올림픽에도 불참한 반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불참국들은 2년 후 열린 1988 서울 올림픽에 모두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참가국 수가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직후 대회인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보다 적었다. 그냥 중국 빼고 공산권 몽땅 불참이라고 보면 된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쓴 잣대를 갖다댄다면 서울 아시안 게임도 충분히 반쪽 대회라 할 수 있었다. 다만 당시에도 공산권의 집단불참은 거의 언급 없었다. 하지만 중국 하나 덕에 이들의 부재감이 사라진다.[23]

하지만 북한은 보이콧만으로도 모자라 이 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아랍계 테러범에게 사주를 내려 1986년 9월 14일,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바람에 5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또한 그러고도 모자라 서울 올림픽마저도 보이콧한 상태에서 약 1년 뒤인 1987년 11월 29일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미얀마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 그러나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남한과 군사적, 정치적 충돌을 계속하면서도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개회식에 남북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등 아이러니한 행보를 보인다.

9. 메달 순위[편집]


1986 서울 아시안게임 메달 집계
최종 집계
순위
국가
메달
합계



1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94
82
46
222
2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93
55
76
224
3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58
76
77
211
4
[[이란|
이란
display: none; display: 이란"
행정구
]]

6
6
10
22
5
[[인도|
인도
display: none; display: 인도"
행정구
]]

5
9
23
37
6
[[필리핀|
필리핀
display: none; display: 필리핀"
행정구
]]

4
5
9
18
7
[[태국|
태국
display: none; display: 태국"
행정구
]]

3
10
13
26
8
[[파키스탄|
파키스탄
display: none; display: 파키스탄"
행정구
]]

2
3
4
9
9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display: none; display: 인도네시아"
행정구
]]

1
5
14
20
10
[[영국령 홍콩|
]] 영국령 홍콩
1
1
3
5
11
[[카타르|
카타르
display: none; display: 카타르"
행정구
]]

1
0
3
4
12
[[바레인|
바레인
display: none; display: 바레인"
행정구
]]

1
0
1
2
13
[[레바논|
레바논
display: none; display: 레바논"
행정구
]]

1
0
1
2
14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display: none; display: 말레이시아"
행정구
]]

0
5
5
10
15
[[이라크|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png
]] 이라크
0
5
2
7
16
[[요르단|
요르단
display: none; display: 요르단"
행정구
]]

0
3
1
4
17
[[쿠웨이트|
쿠웨이트
display: none; display: 쿠웨이트"
행정구
]]

0
1
8
9
18
[[싱가포르|
싱가포르
display: none; display: 싱가포르"
행정구
]]

0
1
4
5
19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0
1
0
1
20

0
0
8
8
21

0
0
1
1

0
0
1
1

중국이 메달갯수에선 개최국인 대한민국한테 2개 차이로 밀렸지만 금메달에서 1개 차이로 앞서면서 1위를 기록했다. 5위인 인도의 5개의 금메달 중에 4개가 당시 인도의 여자 육상선수였던 P.T. 우샤가 딴것이다.

10. 대한민국 메달 현황[편집]



10.1. 메달 현황[편집]


종목



합계
양궁
9
9
7
25
육상
7
5
19
31
배드민턴
3
2
3
8
복싱
12
0
0
12
볼링
2
0
2
4
사이클
2
2
5
9
승마
3
1
2
6
축구
1
0
0
1
펜싱
4
3
2
9
골프
1
1
0
2
체조
3
4
6
13
핸드볼
1
0
0
1
하키
2
0
0
2
유도
6
1
1
8
조정
0
4
4
8
요트
2
1
0
3
사격
7
8
8
23
수영
2
0
5
7
태권도
7
0
0
7
테니스
4
4
2
10
탁구
3
2
5
10
배구
0
1
1
2
역도
3
1
2
6
레슬링
9
2
5
16
수구
0
1
0
1
다이빙
0
0
1
1
농구
0
2
0
2
합계
93
55
76
224


10.1.1. 금메달[편집]


메달
종목
세부종목
이름

골프
남자단체
곽유현 김기섭 김성호 김종필

레슬링
100kg급(G)
김기정

레슬링
48kg급(G)
김영구

레슬링
62kg급(F)
이정근

레슬링
68kg급(F)
김수환

레슬링
68kg급(G)
이삼성

레슬링
74kg급(F)
한명우

레슬링
74kg급(G)
김영남

레슬링
82kg급(G)
오효철

레슬링
82kg급(F)
김상규

배드민턴
남자단체
김문수 김종수 김창국 박성배 박주봉 성한국 이득춘 최병학

배드민턴
남자복식
김문수 박주봉

배드민턴
혼합복식
박주봉 정명희

복싱
라이트급
권현규

복싱
라이트마들급
이해정

복싱
라이트웰터급
김기택

복싱
라이트플라이급
오광수

복싱
라이트헤비급
민병용

복싱
미들급
신준섭

복싱
밴텀급
문성길

복싱
슈퍼헤비급
백현만

복싱
웰터급
김동길

복싱
페더급
박형옥

복싱
플라이급
김광선

복싱
헤비급
김유현

볼링
남자마스터즈
변용환

볼링
여자마스터즈
이지연

사격
공기소총개인
박정아

사격
공기소총단체
강혜자 박정아 이홍기

사격
소구경3자세단체
남홍우 이은철 장재관

사격
속사권총단체
박종길 양충렬 임장수

사격
자유소총복사개인
차영철

사격
자유소총복사단체
곽정훈 윤덕하 차영철

사격
트랩개인
변경수

사이클
남자개인도로
신대철

사이클
여자개인도로
김경숙

수영
여자배영100M
최윤희

수영
여자배영200M
최윤희

승마
마장마술개인
서정균

승마
마장마술단체
서인교 서정균 신창무

승마
종합마술개인
최명진

양궁
남자30M
양창훈

양궁
남자50M
양창훈

양궁
남자70M
양창훈

양궁
남자단체
구자청 박경상 양창훈 전인수

양궁
여자30M
김진호

양궁
여자50M
박정아

양궁
여자60M
김진호

양궁
여자개인종합
박정아

양궁
여자단체
김미자 김진호 박정아 이선희

역도
+110KG급
이민우[24]

역도
100KG급
황우원

역도
90KG급
전병국

요트
레이저급
박길철

요트
옵티미스트
박종우

유도
60KG급
김재엽

유도
65KG급
이경근

유도
71KG급
안병근

유도
78KG급
조형수

유도
86KG급
박경호

유도
95KG급
하형주

육상
남자200M
장재근

육상
남자5,000M
김종윤

육상
남자800M
김복주

육상
남자멀리뛰기
김종일

육상
여자1,500M
임춘애

육상
여자3,000M
임춘애

육상
여자800M
임춘애

체조
남자평행봉
권순성

체조
여자2단평행봉
서연희

체조
여자평균대
서선앵

축구
남자대표팀
강득수 김삼수 김용세 김주성 김평석 노수진 박경훈 박창선 변병주 유병옥 이문영 이태호 정용환 정중수 조광래 조민국 조병득 조영종 최순호 허정무

탁구
남자개인
유남규

탁구
남자단체
김완 박지현 박창익 안재형 유남규

탁구
여자단체
김영미 양영자 이선 현정화

태권도
라이트급
박봉권

태권도
미들급
이계행

태권도
웰터급
문종국

태권도
페더급
한재구

태권도
플라이급
김영식

태권도
핀급
이종선

태권도
헤비급
김승우

테니스
남자단식
유진선

테니스
남자단체
김봉수 노갑택 송동욱 유진선

테니스
남자복식
김봉수 유진선

테니스
혼합복식
유진선 이정순

펜싱
남자에빼개인
이일희

펜싱
남자에빼단체
김봉만 윤남진 이상기 이일희 최정석

펜싱
남자플러레개인
고낙춘

펜싱
남자플러레단체
고낙춘 김승표 이영록 조재봉 홍영승

하키
남자대표팀
권순필 김만회 김영준 김종갑 남궁옥 모지영 송석찬 신석균 안종래 유승진 정계석 정부진 지재관 한종열 한진수 허상영

하키
여자대표팀
김미선 김미자 김순덕 김영숙 박순자 서광미 서효선 임계숙 정상현 정은경 조기향 진원심 최영자 최춘옥 한옥경 황금숙

핸드볼
남자대표팀
강재원 고창석 김재환 박광수 박도헌 박영대 배상기 신영석 윤태일 이상효 이종경 임규하 임진석 최태섭 홍성웅 황요나


10.1.2. 은메달[편집]


메달
종목
세부종목
이름

골프
남자개인
김기섭

농구
남자대표팀
고명화 김성욱 김유택 김현준 박인규 이문규 이민현 이원우 이충희 임정명 한기범 허재

농구
여자대표팀
김영희 김은숙 김화순 문경자 서경화 성정아 우은경 이금진 이미자 이형숙 조문주 최경희

레슬링
57KG급(F)
공용일

레슬링
62KG급(G)
안대현

배구
남자대표팀
강두태 김호철 남상선 노진수 문용관 양진웅 유중탁 이종경 이채언 장윤창 최천식 한장석

배드민턴
여자복식
김연자 유상희

배드민턴
혼합복식
이득춘 정소영

사격
공기소총개인
민영삼

사격
공기소총개인
이은철

사격
공기소총단체
김종길 민영삼 박희대 이원석 이은철 임태호

사격
소구경3자세개인
남홍우

사격
속사권총개인
박종길

사격
스텐다드소총3자세단체
이은철 장재관 차영철

사격
여자공기소총개인
이홍기

사격
트랩단체
박철승 변경수 엄태진

사이클
1KM독주
엄영섭

사이클
4KM단체
도은철 안우혁 이기한 조건행

수구
남자대표팀
김기춘 김재연 김정열 김진태 문공엽 박상원 송승호 이정석 이태창 이택원 최강진 최기철 최선용

승마
마장마술단체
박소운 최명진 최영태 한태현

양궁
남자30M
구자청

양궁
남자70M
구자청

양궁
남자90M
구자청

양궁
남자개인종합
양창훈

양궁
여자30M
박정아

양궁
여자50M
김미자

양궁
여자60M
박정아

양궁
여자70M
김진호

양궁
여자개인종합
김진호

역도
110KG급
강병식

요트
엔터프라이즈급
김승석 안철웅

육상
남자1,500M
유태경

육상
남자10,000M
김종윤

육상
남자800M
유태경

육상
남자세단뛰기
박영준

육상
남자투창
김재상

조정
남자유타포어
김웅학 선우상 이봉수 이성윤 이해달

조정
여자무타페어
공정배 김혜경

조정
여자싱글스컬
한혜준

조정
여자유타포어
강민흥 국인숙 남상란 이병인 정명옥

체조
남자단체
권순성 박종훈 윤창선 이정식 주영삼 한충식

체조
남자링
권순성

체조
남자평행봉
박종훈

체조
여자단체
서선앵 서연희 석수광 심재영 전혜령 한경임

탁구
남자복식
김완 유남규

테니스
남자단식
김봉수

테니스
여자단식
이정순

테니스
여자단체
김수옥 김일순 박양자 이정순

테니스
여자복식
김일순 이정순

펜싱
남자사브르개인
조재봉

펜싱
남자사브르단체
김상욱 이병남 이욱재 정훈 조종형

펜싱
여자플러레단체
박순애 신성자 오승순 전순영 탁정임


10.1.3. 동메달[편집]


메달
종목
세부종목
이름

레슬링
130KG급(G)
김대관

레슬링
52KG급(F)
손갑도

레슬링
52KG급(G)
이진희

레슬링
57KG급(G)
김승민

레슬링
90KG급(G)
엄진한

배구
여자대표팀
곽선옥 김경희 김정순 선미숙 유애자 이명희 이영선 이운임 이은경 임혜숙 제숙자 지경희

배드민턴
남자단식
박성배 성한국

배드민턴
여자단체
강행숙 김연자 김호자 유상희 이명희 정명희 유상희 정소영 황혜영

볼링
남자5인조
백흥기 변용환 서범석 유청희 조광명 허정출

볼링
여자5인조
김희숙 선연숙 양애숙 이상진 이지연 최명지

사격
공기권총개인
방현주

사격
공기권총단체
김양자 김혜영 방현주

사격
센타파이어권총단체
양충렬 임태호

사격
소구경스텐다드3자세단체
구순복 김영미 이흥기

사격
속사권총개인
임장수

사격
스키트개인
임동기

사격
스텐다드권총단체
양충렬 임태호

사격
자유권총단체
민영삼 서인택 이원석

사이클
남자개인도로
오윤환

사이클
남자도로단체
김광필 김철석 이진옥 장윤호

사이클
남자스프린트
엄영섭

사이클
여자개인도로
손약선

사이클
여자스프린트
전미숙

수영
개인혼영200M
최윤희

수영
남자스프링다이빙
이선기

수영
여자접영200M
이은희

수영
여자평영200M
박성원

수영
여자혼계영400M
김진숙 박성원 이홍미 최윤희

승마
남자마장마술
신창무

승마
남자장애물단체
김성중 김승환 마재웅 문은진

양궁
남자30M
전인수

양궁
남자70M
전인수

양궁
남자90M
전인수

양궁
남자개인종합
구자청

양궁
여자30M
김미자

양궁
여자70M
박정아

양궁
여자개인종합
김미자

역도
60KG급
이명수

역도
67.5KG급
김기웅

유도
+95KG급
김익수

육상
남자10종경기
박영준

육상
남자110M허들
김진태

육상
남자400M계주
김종윤 성낙군 심덕섭 장재근

육상
남자마라톤
유재정

육상
남자봉고도
이재복

육상
남자투창
박종삼

육상
여자1,500M
김월자

육상
여자200M
박미선

육상
여자400M계주
박미선 안신영 윤미경 이영숙

육상
여자7종경기
지정미

육상
여자높이뛰기
김희선

육상
여자투원반
이상역

육상
여자투창
장선희

조정
남자무타페어
유성준 이상규

조정
남자싱글스컬
고동희

조정
남자에이트
김규환 박성국 박성덕 박성래 이정과 이홍근 임종순 정부영 정연길

조정
남자유타페어
신승호 정인교 현성인

체조
남자도마
박종훈

체조
남자마루
박종훈

체조
남자안마
주영삼

체조
여자도마
석수광

체조
여자마루
심재영

체조
여자평균대
한경임

탁구
남자단식
김완

탁구
남자복식
박창익 안재형

탁구
여자단식
양영자

탁구
여자복식
양영자 현정화

탁구
혼합복식
김완 양영자 유남규 현정화

테니스
여자단식
김수옥

테니스
여자복식
김양자 신순호

펜싱
남자사브르개인
김상욱

펜싱
남자에빼개인
김봉만

11. 중계방송 관련[편집]


KBSMBC 양사가 방송단을 꾸려 중계를 진행하였다. 인기종목인 축구와 세부종목이 많은 육상, 수영 종목에서는 양사에서 각각 중계를 제작했고, 나머지 종목에서는 전담 방송사를 나눠 중계를 제작했다.

11.1. 한국측 중계진[편집]



11.1.1. KBS[편집]


  • 캐스터: 서기원, 김윤한, 김재영, 이규항, 이정부, 이세진, 우제근, 유수호, 원종관, 원창묵, 임건재, 박기만, 박병학, 소병규, 윤성원, 조춘제, 임문택, 최평웅, 허주, 홍승택, 김상준, 김영소, 강성희, 김미회
  • 해설: 박병주(축구), 장경환(축구), 양재성(육상), 조오련(수영), 오관영(배구), 김동명(권투), 김영준(레슬링), 이학래(유도), 허록(역도), 신갑호(체조), 김진수(체조), 황춘성(태권도), 강인섭(핸드볼), 신현주(하키), 김춘성(승마), 서윤복(마라톤)

11.1.2. MBC[편집]


  • 캐스터: 송재익, 임주완, 고창근, 송인득, 최창섭, 김충식, 양진수, 유협, 김형주
  • 해설: 이우현(축구), 김종철(육상), 김창환(육상), 정규택(수영), 한창도(농구), 박도천(탁구), 김계환(테니스), 김봉섭(배드민턴), 송완식(사이클), 지삼업(조정), 이상철(마라톤)


12. 이모저모[편집]



  • 폐막식 끝나자 마자 바로 ㅡ 그러니까 다음 날도 아니고 그날 저녁도 아니고 폐막식 끝나고 바로다 ㅡ 전두환 대통령의 지도력 때문에 우승했다는 특별방송을 방영하는 바람에 바로 TV 끄고 수신료 안 내고 싶어졌던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도 TV 시청료를 일부러 안내는 가정이 급속히 늘었을 때였다. 이때는 이미 전두환에 대한 국민감정이 극도로 나빠졌을 때인데 아시안 게임의 좋은 성적으로 고조되었던 기분이 저 방송들 때문에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바로 TV 부숴버리고 싶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당시에도 한국 국민들은 스포츠와 정치를 연관시키는 건 좋아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에 한껏 고양된 감정이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원수에 대한 선전으로 이어져서 역효과만 난 방송이었다. TV를 보던 보수지향적 60~70대 노인들에게서도 "김일성이랑 뭐가 다르냐"는 쌍욕이 튀어나왔다는 증언들이 많다.[25]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1985년에 시인 김용택<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마도 발음이 약하거나 어느 정도 사투리 말씨가 흘러들어간 어느 서민을 화자로 하였기 때문에, 실감나는 구어체를 위해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어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비슷한 사례로 전두환 당시에 나왔던 어린이용 동화책이라든가 학교 부교재 같은 걸 보면 이게 주어만 김일성으로 바꾸면 북한 책 아닌가 싶어질 정도의 물건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2년 동아일보사에서 간행된 "오빠 새와 인삼" 같은 어린이용 소설책이다.


  • 전두환제5공화국 정권은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양대 행사로서 정권의 부족한 정당성을 땜질하고, 위세를 과시하며 국민들을 스포츠에만 눈에 돌리게 하는데 했다. 이때부터 내세운 슬로건이 "86・88".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문서 참조.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아시안게임 출전 사상 3번째이자 20세기 마지막 우승이었다.[26][27]

  • 한편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단에게 총 2억 5천만원의 포상금을 쐈다.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액수였기에 화제가 되었다.[28]

  • 이 때를 계기로 철도 수송의 후진성이 다시 드러났다. 1980년대는 여객철도 차량의 노후화에 1970년대초 지어져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물동량이 시작된 경부고속도로를 필두로 한 도로교통의 급성장으로 철도 교통이 쇠락해갔던 것이 이 대회 유치를 계기로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전국 교통망이 철도·도로·항공까지 잘 짜여져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구불구불한 재래식 철도 아니면 4차선/2차선(!) 고속도로 뿐이었는데, 해외 여행객을 맞이하려면 한국이 내세울 "개발된" 관광자원이라고는 설악산, 경주, 부산 해운대뿐이었던 것이다.(심지어 제주도조차 그다지 개발되지 않았던 시대다.) 이러다보니 서울에서 새마을호를 태워서 경주나 부산에 내려보내도 편도 5시간 가량은 우습게 소요되었고, 구 관광호 객차를 쓴 직각 새마을호 객차도 이미 도입 15~16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더 심각해서 고속버스의 경우 1960년대말 도입된 "냄새나는 2층버스"가 별명인 구 그레이하운드 같은 게 아직도 굴러다니고 있었다.[29]
    이런 후진성을 혁신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철도에 대대적인 개혁이 가해진다. 우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새마을호 PP 동차나 무궁화호 NDC 동차 등이 이 시기에 속속 개발되었고, 새마을 PP는 당시 한국의 역량으로 때려부을 수 있는 가장 최고급의 사양이 들어갔다. 나중에 평가가 안 좋아지긴 했지만, 대만의 당영중공업(탕엥) 제작의 에어콘이 설치된 신형 무궁화 차량도 이 당시 도입되었다. 다만 탕엥제 차량은 몇 년 굴려보고 나니 평가가 썩 좋진 않았기에 한국의 3대 철도차량 회사(대우, 현대, 한진)가 이후 무궁화 객차를 마구 찍어내게 되고 이 기조는 2000년대초 해태중공업(이후 SLS)까지 이어진다.
    나아가 1987년 12월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공식적으로 경부고속철도의 건설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게 된다. 이는 사업이 순연되어 김영삼 정부 초기에 고속철도 차량 도입으로 나라가 시끌시끌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자세한 내막은 KTX 문서 참조.
    즉 실제로 2010년대 기준으로 현재 볼 수 있는 여객 철도의 골격이 이 때를 전후해서 형성되었다. 그 이전의 것은 2004년을 기점으로 KTX의 개통으로 급속도로 쇠퇴해 갔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이후 탄생한 새마을호 PP 객차[30]가 32년을 달리고 2018년에, 무궁화호 NDC는 24년을 달리고 2010년에 퇴역하였다.

  • 이 시기 정부는 대한민국이 군사정권 치하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서울시와 수도권 내 군용 차량들의 운행을 최소화하는 등 모진 애를 썼다. 심지어 방위병들에게도 사복을 입히고 근무를 시켰다는 증언이 있다. 이 '군대 물 빼기' 기조는 의외로 민주화 후에도 오래도록 이어져서, 일례로 2000년 서울 ASEM 정상회의 당시에도 지하철 역 특별경호를 서던 특전사 대원들은 마치 민방위복처럼 생긴 베이지색 단복 재킷을 입고, 지하철역 순찰 도는 공익근무요원(=민간자원)처럼 위장하고 근무했다.[31]

  • 가수 조용필1985년에 이 대회를 앞두고 낸 앨범에 "아시아의 불꽃"이라는 곡이 들어가 있다. 이 대회 전에 조용필이 발표한 곡은 맞지만 아시안 게임에 맞춰 만든 곡은 아니며 일본에서 열린 1회 PAX MUSICA 공연에 맞춰 만들어 이 공연에서 연주한 곡이다. PAX MUSICA가 음악을 통한 아시아권 젊은이들의 평화 추구를 테마로 하기에 가사 역시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하며, 아시안 게임 전후로 열심히 틀어준 덕분에 이걸 아시안 게임을 기념하여 만든 곡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두 행사의 차이때문에 실제 가사를 들어보면 미묘하게 스포츠 행사용 테마송으로 보기에는 뭔가 맞지 않는 내용이 들어 있다.

  • 태권도가 최초로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남자부만 8체급으로 실시하였고 7체급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 요르단은 자국의 모든 메달(은 3, 동 1)을 태권도에서 땄다. 은 3개는 모두 결승에서 한국 선수에게 패한 것이며, 동메달은 8강에서 한국 선수를 이긴 후 4강에서 진 것이다. 당시의 태권도는 패자부활전 없이 권투처럼 준결승 탈락자 2명이 공동 3위였다.

  • 대만은 당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정식 수교한 상태였지만 정작 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73년 11월 16일 AGF 총회에서 38:13 으로 중국 가입 및 대만 축출안이 가결됨에 따라 아시안게임 출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인데[32] 운명의 장난인지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중이던 1986년 9월 25일 OCA 총회에서 대만의 복귀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대만의 아시안게임 복귀는 바로 다음 대회였는데 하필 다음 개최국이 베이징이었다.[33]

  • 이때 조직된 자원봉사자회는 그대로 1988년까지 이어져 계속 활동했다. 다만 1986년 아시안 게임 때는 자원봉사자들의 외국인에 대한 과잉친절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당시 1986 아시안게임은 국가 규모로 여는 최초의 대형 스포츠 대회였기 때문에, 시대 분위기상 자원봉사자들이 사명감과 긍지에 불타올라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을 좌석 앞까지 일일이 들어주기도 하고, 알아듣지도 못 하는 영어에 무조건 예스를 연발한다거나, 심지어 외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짐까지 들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34], 정작 내국인에 대한 친절은 이것보다 못하여 "비굴한 친절"이라며 조직위 내에서도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점은 서울 올림픽에 가서야 다소 개선된다.

  • 개최일 전날이 추석 연휴 기간 마지막날[35]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편성된 추석 특집 프로그램 중에서는 아시안게임 참가선수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1986년, 1989년, 1996년에 나온 TV광고 영상 중에서 1분 29초 ~ 6분 23초 사이의 영상을 보면 서울아시안게임 특집프로그램 예고, 아시안 게임 중계프로그램 예고, 아시안 게임 기간 중에 방송되는 특집 예능 프로그램 예고와 추석 특집 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이 나온다. 이 중에서 추석 특집 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을 보면 '아시아경기 대회 참가 선수와 함께'라는 내용이 나온다.

  • 2018년 공개한 1987년분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의 일부 고위층 인사가 선수로 위장, 참가해 우리측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기사

  • 비인기 종목의 관중 동원을 위해, 주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입장권을 나눠주고, 응원할 국가의 노래도 학교에서 가르쳤다. 해당 국가의 선수들은 뜬금없이 한국인 학생들이 자신들의 국가나 인기곡을 불러줘서 감동했었다. 당시 잠실 주변 중·고등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은, 응원할 국가의 노래 한 곡씩 외웠던 기억이 있다.

  • 1986년 아시안 게임 체조종목의 권순성[36]과 수영종목의 최윤희 선수[37]는 체육기자연맹이 선정한 1986년 올해 최우수 남녀 선수로 각각 선정되었다.

  • 당시 중국과 베트남을 비롯한 공산권 아시아 국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대회다. 북한의 프로파간다로 서울은 판자촌에서 거지들이 득실대는 거리이며 대한민국은 최빈국이라고 생각하던 공산권 아시아 국가들이 아시안 게임으로 중계되는 서울의 모습을 보며 자국의 어떤 도시들에서도 보지 못한 화려한 건물들에 자신들이 선택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실제로 서울 아시안 게임을 기점으로 중국이나 베트남은 자국 내에서 소수파였던 경제 개발을 위한 일부 항구 개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인다.[38]

13. 역대 조직위원장[편집]


  • 서울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SAGOC) 위원장

  •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 위원장[39]



[1] 제10회 1986년 서울 하계 아시안게임 이후 바로 제24회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으로 이어지는데, 여태까진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을 연달아서 그것도 같은 도시에서 개최하는 일이 없었으나 연달아서 개최하게 되며 전무후무한 사례로 남아있다.[2]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백서에도 휘장만 올라와 있을 뿐 마스코트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휘장사업 부문에서 88올림픽에서 사용할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사용했다는 것은 나온다.[3] 특히 호돌이는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 메달을 목에 걸고 있어서 이 부분은 바꿔 쓰지 않았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냥 썼다. 사실 아시안 게임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승인 하에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주관하는 올림픽의 지역 버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륜 메달을 썼다고 크게 이상할 건 없다.[4] 해당 폐회식 영상에서도 호돌이를 88년 서울 올림픽의 대표 마스코트로 소개되었을 뿐이었으며 이를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라고 언급하지는 않았다.[5] 1960년대 후반에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세운상가 건설이나 강변북로 건설, 여의도 개발 사업, 고가도로지하도 건설, 시민아파트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이중 상당수가 단기적으로 수익을 기대해볼 만한 사업이 아니었다. 특히 서울지하철 건설은 정말로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줘서 양택식 시장 초기에는 서울시 시 금고가 비어서 공무원들 월급이 밀리기 직전까지 갔다. 이걸 메꾼 게 바로 여의도 개발 시 공유수면 매립 및 여의도 아파트 분양이었다.[6]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대통령이 시.도 지사를 임명하였다.[7] 물론 여담으로 70년대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데탕트' 즉 '탈냉전'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언급이 차츰 늘어가는 국면을 보였지만 말이다. 물론 후에 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KAL기 격추 사건과 같은 사태를 통해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다시 악화된다.[8] 참고로 이 때 유치전 당시 한국 측에서 일본에 "86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 유치전을 일본이 지원해달라, 그러면 한국이 제3세계+서방 표를 모아 1988 나고야 올림픽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후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나고야가 서울에게 유치전 투표에서 지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 올림픽 개최라는 훨씬 나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되었다.[9]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1980년 4월에 서울로 확정났어야 했다. 왜냐하면 신청 마감일인 4월까지 유치 의사를 밝힌게 서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10] 이라크측은 전쟁을 일찍 끝낼 것이니 바그다드 개최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전쟁은 1988년까지 이어졌다.[11] 그리고 북한은 수용 인원이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의 2배가 조금 안 되는 수준으로 크게 지은 능라도 경기장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썩히기는 아까웠는지 1989년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으나, 결과적으로 돈만 허공에 날려버리고 실속은 전혀 없었던 대회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이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임수경 방북 사건을 일으켜 북한이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사실상 북한 인민들에게 알려버렸고, 그와 동시에 고난의 행군의 시작에 결정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12] 현재는 철거되어 두산아파트가 들어섰다. #[13] 현재는 철거되어 DDP가 들어섰다.[14] 승부가 마지막 날 밤에야 결정된 터라 그 날 밤에는 경기를 중계해주면서 금메달 숫자를 자막으로 띄워주기도 했다. 우리나라로서는 허재가 중국과의 농구 결승전 도중 발목부상을 당해 5분밖에 뛰지 못해 금메달을 내준 것 등, 당일 중국과 금메달을 겨뤘던 경기들이 아쉬울 따름.[15] 요즘의 올림픽 양궁을 생각하면 된다.[16] 육상이나 수영처럼 거리에 따라 세부종목을 많이 두는 방식. 당연히 금메달 수도 훨씬 많아서 김진호 선수가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세계 선수권 대회대한민국전국체육대회도 세부종목을 두고 경기를 한다.[17] 다른 나라도 자국에서 개최하는 아시안 게임에 자국에 유리한 경기종목을 많이 집어넣곤 한다. 중국이라면 우슈와 바둑, 일본이라면 가라테가 대표적이다.[18]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7체급 우승한 엄청난 복싱 강대국이었는데(금 못 딴 5명도 은이나 동을 땄다.) 이러한 본래의 실력에 개최국 버프까지 받은 셈. 다만 편파판정 논란이 발생할 정도로 말이 많았다.[19] 이 때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김광선, 문성길, 신준섭, 백현만 등 올드 복싱팬이라면 모두 알만한 이름이다.[20] 남자 링 김국환, 평행봉 이영택[21] 중국 (금12, 은8, 동5), 한국 (금3, 은4, 동6), 일본 (은1, 동4). 당시 세부 종목은 14개(리듬체조는 실시하지 않고 기계체조만 실시)였는데, 여자 이단평행봉에서 한중 공동 1위가 나와서 금메달 총합이 15개였다.[22] 당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도 지배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경우에는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유주의 진영이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동시에 소련군아프가니스탄의 영토를 점령 중으로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철수할 때까지 사실상 소련이 지배했었다. 또 몽골/남예멘/베트남/라오스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으며(베트남, 라오스는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이다.), 시리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랍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당이 지배하는 나라.[23] 사실 이 당시 중국은 소련과 반목하는 사실상의 독자적인 노선을 지향했던 공산 국가였던데다 1980년대 들어서는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수습하며 국가를 개혁개방 노선으로 튼 상태였다. 이 당시의 중국 행보를 구 공산권 동유럽 '철의 장막'에 빗대 "중국이 드디어 '죽(竹)의 장막'을 헤치고 나온다"라고 일컬었다. 이 덕분에 장 미셸 자르는 서구권 문화예술계의 대표로 서방권-공산권 교류의 상징으로서 1981년 베이징 공연을 추진하게 되고, 레이건 이후 미·소 냉전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속에서도 중국은 계속 제3자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 개혁개방 기조는 천안문 항쟁이란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후진타오 집권기가 끝날 때까지 근 30년 간 유지된다.
게다가 한국과는 1983년 5월의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잘 해결되면서 관계가 그리 나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차기 대회 개최를 천명한 마당에 서울 대회에 불참하게 되면 모양새가 매우 안 좋았던데다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올림픽 개최까지도 노리고 있었고 또한 대만과의 역사적 마찰을 통해서 80년대 후반까지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비로소 인정받기 되었기에 두말하지 않고 서울에서 개최된 두 대회 모두 참가했다.
[24] 개회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 기수를 맡았다.[25] 이 당시 60~70이면 남성의 경우 젊어서 성인이 된 후 6.25 전쟁에 징집된 연령대였다. 여성들 또한 당연히 전쟁통에 목숨줄 구해가며 애들 키우고 먹여살리느라 엄청난 고난을 겪었던 세대다.[26] 이후 우승은 28년이 지나서 또 다른 홈 개최였던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이뤄졌다. 앞선 우승 2회가 모두 공동우승(당시에는 아시안게임 축구에서 승부차기를 실시하지 않아서 그렇다. 순위결정전에서 무승부가 나면 지금처럼 승부차기로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순위 처리했다.)였던 반면 처음으로 단독우승에 성공한 것이다.[27] 성인대표팀으로도 토너먼트로 치러지는 대회에서 아시아를 마지막으로 제패한 대회이기도 하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부터는 올림픽 축구 처럼 23세 이하로 연령을 제한하여 개최하게 된다.[28] 이때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아파트 1채를 사려면 1,5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일반 기업에서 과장급 직장인의 평균 연봉이 600만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보통 축구 대표팀의 엔트리 인원이 25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인당 1,000만원 정도의 포상금이 돌아간 셈이 된다.[29] 악취의 이유는 미국식으로 도입되어 있던 차내 화장실이 전혀 관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30] 다만, PP 동력차는 노후화를 이유로 2013년 1월 5일 자로 운행을 종료하였다.[31] 물론 공익 복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녹색이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경찰도 아니고 방범대원도 아니고, 공익도 아니고, 저 사람들 뭐지? 보이스카우트에서 지원나왔나?"라고 생각했었다고.[32] 희한하게도 대만과 정식 수교 상태였던 대한민국조차 반대가 아닌 기권을 택했다.[33] 사실 중국은 대만의 복귀가 확정되자마자 자국에서 열리는 1990년 아시안게임에 대만을 적극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뭐 대만의 출전 명칭인 Chinese Taipei를 중국어로 표기할 때 中國臺北(중국 타이베이)이라고 표기하라는 압박을 하는 등 뒷끝이 작렬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냥 中華臺北(중화 타이베이)로 합의해주면서 최소한의 양보는 했는데, 사실 이는 중국이 아시안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1993년 IOC 총회에서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노렸기 때문이다. 이 때 확정된 대만 표기는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다. 물론 1997년 이후 중국에 반환된 홍콩은 얄짤없이 그냥 '中國香港'이라고 표기된다.[34] 중동에서는 남의 짐을 들어주면 하인 취급을 할 수도 있다.[35] 참고로 이 해부터 추석 다음날(음력 8월 16일)이 공휴일이 되었다. 전날까지 공휴일로 확대된 것은 1989년부터.[36] 금메달 1개, 동메달 2개.[37] 금메달 2개, 동메달 2개.[38] 이는 2년 후의 올림픽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이 서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벌어진 동구권의 민주혁명에 시발점이 되었다.[39] 본 대회 및 1988 서울올림픽 개최/주관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