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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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내 변천사
3. 개최지 경쟁 및 관련 이슈
4. 국내외적 여러 시련 및 정국 혼란
5. 당대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반등
6. 유치지 선정 및 과정


1. 개요[편집]


1988 서울 올림픽의 유치 과정이다.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 투표 과정
국가
도시
1차투표
결과
대한민국
서울
52
유치 선정
일본
나고야
27
탈락

2. 국내 변천사[편집]


1979년 4월, 서울특별시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당시 세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관람하러 왔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일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겸 사격연맹회장, 김택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정상천 서울특별시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올림픽 개최를 직접 논의한다.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으로 대통령경호실장에서 물러나면서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났던 박종규는 이후 사격연맹 회장으로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를 유치해서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이 대회는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대의 후진국으로 변변한 경기장조차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스포츠대회이자 이벤트로 상당히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1] 박종규는 이 공로로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으면서 바로 이듬해인 1979년 2월에는 대한체육회장으로 취임해서 국내스포츠계의 수장이 된다. 그리고 곧바로 올림픽 유치를 기획한다.

박종규는 국가 스포츠 기반 활동의 저변 경쟁력 강화와 더불어 성장이라는 목표의 일환으로 박정희를 설득,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유치관련 구상안을 직접 전담하면서 준비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 1979년 6월 직접 푸에르토리코 ANOC 총회에 참석해 직접적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타진, 같은 해 9월 1일, 정상천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올림픽 유치를 천명했다.

게다가 스포츠계와 별도로 이미 유신정권 핵심부에선 장기적인 올림픽 유치 구상이 있었다. 당시 수도권 인구과밀로 고민하던 정부는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서 실제 수도이전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원철 제2경제 수석 비서관이 수백명의 전문가 그룹을 동원해서 충남 장기지구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일명 백지계획을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백지계획에 이미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 및 선수촌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정치적 혼란속에서 올림픽 유치계획은 표류하게 된다. 국민들의 관심은 전부 개헌과 민주화 일정에 쏠렸고, 갑작스레 정권을 인계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올림픽 유치 포기"를 선언한다. 게다가 5월달에는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던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에게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기까지 한다. 이렇게 올림픽 유치 계획은 백지화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올림픽 계획은 다시 부활한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무자비한 유혈학살로 짓밟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민심수습책에 골몰하는데, 당시 막후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을 연결하는 밀사 역할을 하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이 극비리에 내한해서 전두환을 만난 자리에서 1964 도쿄 올림픽1970 오사카 엑스포를 예로 들면서 한국도 '이런 거대이벤트를 유치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보라'고 조언한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최규하 정부의 유치포기 결정을 뒤집고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다.

곧바로 정권 차원의 준비가 진행되어 1980년 11월 30일에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내고 12월 2일에 접수를 완료시켰으며, 1981년 1월 6일 KOC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편성했다.

하지만 개최 도시가 될 서울특별시가 당시 가치로 2조 원에 육박하는 예산 부담을 이유로 하여 올림픽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는데, 이는 결국 1980년 1차 올림픽 실사단 조사에서 중앙정부 및 올림픽 위원회와 서로간 최악의 불협화음을 내버린다. 또한 남덕우 국무총리가 '올림픽 망국론'을 제기하면서 반발하자 '우린 총리부터가 유치에 반대하고 있으니 상대가 되겠는가?"라는 여론이 대두되었다.[2] 또한 대부분의 경제관료와 전문가, 기업인들도 하나 같이 막대한 비용부담을 이유로 올림픽 개최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남북대립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공산권이 서울 유치에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현실은 명백했으며,[3] 게다가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반민주적이고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5.17 내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이라는 페널티가 존재했기 때문에[4] 유치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들과 우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신군부[5]는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올림픽 유치에 총력을 기울인다.[6]

무조건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심한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2인자였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뛰어들면서 정부와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본격적인 유치전에 뛰어든다.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 결심을 국내에 보여주기 위한 단순 얼굴마담이었기에, 실질적인 유치는 정주영과 전 대한체육회장 박종규의 공이 크다. 그 외에 유학성 안기부장도 음지에서 로비를 벌이며 적극적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를 전적으로 혼자만의 공로로 내세우고 그동안 고생해온 정주영을 무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정주영이 정계에 진출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노태우보다 공헌한 바가 큰 인물이면서 정주영 회장 못지않게 올림픽 개최의 필요성과 초석의 역할을 해오던 박종규는 신군부 정치세력에 의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정치생명이 끝났고, 1985년에 올림픽을 3년 앞두고 숨졌다.[7]

3. 개최지 경쟁 및 관련 이슈[편집]


앞선 국내 변천사 문단에서 언급되었지만 한국은 당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적 스포츠 대회 개최라는 경험이 아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먼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1996년 혹은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받는다. 또한 당시 아시안 게임 개최를 위한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평양시라 한국 입장에서는 올림픽만큼이나 아시안 게임에서도 유치지를 추진하는데에도 더욱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기도 했었다. 또한 이라크바그다드도 경쟁지로 참여한다.[8][9]

그리고 한국은 1988년 올림픽 관련 개최신청 초기에 이미 일본을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빅딜을 제안해야 할 정도로 올림픽 관련하여 전망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특히나 한국의 해당 제안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지지하고 대신 한국은 1988년 올림픽에서 일본을 지지하겠다라는 권유였다.[10]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한다.

여기에 일본의 보수우익 정치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줄곧 물밑에서 한일관계를 조율하던 기업인 세지마 류조가 당시 맹렬하게 올림픽 유치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일본 나고야 대신 오히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지지하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올림픽 유치운동을 이끌고 있던 모토야마 마사오 나고야시 시장이 일본사회당일본 공산당의 지지를 받던 혁신계 인사라서 자민당이자 골수 우익인 세지마가 서울특별시를 밀었다는 해석도 있다.[11][12]

그리고 당시의 일본 관계자들중에는 자국이 당연히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고 자만하며 건성스러운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이 때문에 뒷날 일본의 일부 세력은 "당시 올림픽에 관련된 사람들이 너무나 무능하고 무관심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상황은 나고야의 시민들과 일부 시민단체를 통해 올림픽 유치와 경기장 건설 등으로 인한 재정부담과 환경 문제 등의 논란으로 지속적으로 올림픽 반대의 여론이 팽배하면서 대대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도 정치적으로 나고야 올림픽 개최에 대한 심리적 피로와 외국 뉴스를 통한 각종 견제에 따른 심한 압박을 논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소극적이거나 아예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참고1, 참고2

결국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는 이후 20년 이상을 부단히 노력한 끝에 등록박람회2005 아이치 엑스포 유치와, 이후 대륙별 권위 국제대회라 할 수 있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까지도 개최를 성공시키면서 과거의 한을 어느 정도 푸는데 성공한다.

4. 국내외적 여러 시련 및 정국 혼란[편집]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남한의 수도 서울에서 개최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13]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며 대회 명칭을 평양-서울 올림픽으로 해야 한다는 무리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14], 남측에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가 60만 명에 달한다고 방해 선전을 하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헐벗고 굶주리며 거리에서 사람들이 미제가 먹다 버린 것까지 주워 먹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곳"이라는 거짓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북한도 올림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상황인지라 "헐벗고 굶주려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나라에서 올림픽?" 이라 의문을 들 수 있어서 이런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자 북한은 대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해당 대회를 무리하게 개최하여 바로 직후 떠안은 상황과 후폭풍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북한은 아주 과격한 행보를 보이게 된다. 특히 1986년에 열리는 서울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고자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사주하였고, 공항 청사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테러로 5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15] 또한 북한은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는데. 앞에 나온 사례 정도는 사실 그냥 단순 애교 수준이었고, 그간 북한의 공작 활동들 중에서도 'KAL기 폭파 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사실 그 이전이었던 1983년에 직접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고자 시도했던 현재 미얀마인 과거 버마에서 발생했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와 같은 가장 유명했던 사건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10 민주 항쟁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LA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만약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시에 올림픽 장소변경을 고려했을 정도로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뻔했다.

이처럼 당시 한국의 심각했던 국내외적 상황은 IOC에서도 1988년은 어렵고 1996년으로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는데 당시 노태우가 IOC로 가서 문제없다는 연설을 하고[16] 이후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또한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인 1987년에 발생한 6.10 민주 항쟁에서는 당시 명동성당에 민주화 시위대가 정부의 공권력을 피해 주둔해 있었는데 또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이러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그 유명한 "내 뒤에는 신부, 수녀, 학생들이 있다. 군대가 들어오고 싶다면 가장 먼저 나를 밟고, 그 다음으로 신부들을 밟고, 그 다음으로는 수녀들을 밟은 후에야 학생들을 만나라."라는 강경한 저항을 하며 직접 맞선다. 이처럼 만약 정부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서울 올림픽은 3번 연속으로 반쪽 올림픽이 될 뻔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 올림픽은 전두환의 최대 역작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대회 행사인데 만약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기가 불러온 복을 자기가 걷어차 버리는 상황이 될 뻔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중장은 정부의 군대 출동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보안사령관 고명승 중장에게 밝히는데, 이처럼 군인 세력마저도 폭력 사태가 일어나 자국에서 처음 치뤄질 올림픽을 무위로 그르치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는 결국 특전사의 무력진압사태를 사전에 봉쇄하고 큰 사건과 사고 없이 이후 6.29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로서 작용했다.

5. 당대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반등[편집]


1976 몬트리올 올림픽남아공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 26개국이 보이콧하였다.[17] 그 다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서 자본주의 진영의 서방권이 대거 불참하였다. 그리고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공산주의 진영의 동구권 대부분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렇듯 국가간의 갈등으로 올림픽이 연달아 파행되는 와중에 다음번 개최지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서울로 정해지자, 이번에도 공산권의 불참으로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일단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지만, 애당초 이 당시의 중국은 소련과 대립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전체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 및 이를 토대로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기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소련과 관계가 돈독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등의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다른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올림픽의 경우는 아시아만 국한된 대회가 아닌 그 이상의 국가와 의미를 포괄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중국의 참가만으로는 공산권 전체의 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소련의 대표적인 위성국가였던 동독이 참가를 확언하면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사실 동독 내에서 과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것을 두고 논란이 거셌던 것을 그저 무마하려는 목적으로[18] 소련과의 협의도 없이 발표된 상태였다는 것. 이에 결국 공산권의 참가 여부에 대한 최종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대표격이었던 소련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도 소련이 보이콧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소련과 연관이 깊은 다른 공산 국가들 모두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198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취임했던 김운용이 그것도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19] 당시 소련의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그에게 올림픽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듯 비록 본래 이념이 첨예하게 반대되는 적성 국가였지만 소련 자국의 언어까지 배워가며 설득에 나선 김운용의 모습은 도리어 소련 위원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때마침 당시 소련은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침내 1988년 초에는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이에 여러 공산 국가들도 올림픽 참여 의사에 동참할 것을 밝히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 만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된다.

허나 소련을 포함한 여러 유럽의 동구권 공산권 국가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올림픽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우리 정부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이라는 엄청난 제시를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 않았다.[21] 또한 2018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김영남이 이를 주도하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와 반대로 북한은 같은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에게 그저 냉담한 반응만을 전달받았다고 전해진다.#[22][23]


6. 유치지 선정 및 과정[편집]



파일:1988 서울 올림픽 유치 엠블럼.svg

파일:1988 나고야 올림픽 유치 엠블럼.svg
유치전 당시 서울의 대회 엠블럼
유치전 당시 나고야의 대회 엠블럼[24]
이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여러 이유에 따른 올림픽에 관한 부정적인 회의론과 각종 문제가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 그 중 1972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검은 9월단의 테러로 인해 그 다음번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보안경호 비용이 무려 40배 이상 폭증했다.

거기에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라는 엄청난 여파까지 겹치면서 해당 올림픽은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였고, 캐나다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올림픽을 유치했던 도시였던 몬트리올[25]은 결국 올림픽 이후 파산에 이른다. 이 때문에 1988년 올림픽 유치를 계획하던 호주시드니[26], 알제리알제, 그리스아테네가 이러한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의 참담한 후폭풍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모든 계획을 전면적으로 철회한다. 이로 인해 일본나고야시와 대한민국 서울. 딱 이렇게 아시아의 두 도시만이 올림픽 유치 경쟁 후보지로 남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되자 IOC는 올림픽 회의론의 확산 그리고 경쟁 유치지가 없는 상황에서 단번에 올림픽 단독 개최지로 확정이 이루어질 경우 일어나게 될 논란을 우려한다. 이는 즉 유치지 선정 과정에서 영 모양새가 좋지 못한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유치 희망 도시들이 계획안을 제출하면 IOC에서 심사해서 최소 기준에 미달하는 도시들을 걸러내고 후보군을 3~4개 정도로 압축한 다음에, IOC 위원들의 비공개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서는 처음부터 후보가 서울특별시나고야시 겨우 두 도시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또한 당시 서울의 계획안은 낙제 수준이었다.

아무튼 대책 없이 불리함 속에서 무작정 유치전에 나선 서울과 달리[27] 나고야는 이미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해왔었기 때문에, 서울로서는 승산이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오죽했으면 유치 도시가 어디인가보다는 나고야가 몇 표까지 얻느냐에 관심이 집중될 정도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달랑 3표 나올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3표의 정체는 한국, 미국, 중화 타이베이라고 추측되었는데, 한국이야 설명이 필요 없고, 미국은 서방 진영의 대표격으로 자신들 턱밑까지 쫒아온 당시 일본의 급성장과 독식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대만의 경우는 수교국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28] 대한민국이 외교상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당연히 서울을 절대적으로 밀 것으로 예측했었다.

한국은 당시 남미, 중동,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일부 선진국도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올림픽 개최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1964년에 하계올림픽과 1972년에 동계올림픽을 이미 치른 일본이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연달아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세 번씩이나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일본에 대해 불만과 형평성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주영 당시 현대 회장 특유의 뚝심 있고 저돌적인 행보가 압권이었는데, 유치위원들이 서독바덴바덴에 도착한 와중에 런던으로 날아가서 영국의 IOC 위원들과 식사를 했을 때의 일화이다. 당시 식사 도중 영국의 IOC 위원 한 명이 정주영 회장에게 "체육계에서 얼마나 일했는가"를 묻자, 이에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처음 일하는 것"이라는 대답에, 그 위원은 오히려 이에 "초보자를 내보냈다"고 말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와중에 정주영 회장이 대뜸 "일본은 이미 올림픽과 같은 엄청난 세계적인 행사들을 개최한 이후부터 엄청난 경제 대국으로서 발돋움하고 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유치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을 더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29]라고 직언하자 이에 돌연 관심을 가지고 정주영 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영국의 기간사업들의 상당수가 일본과 서로 경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는 영국 측에서도 귀가 솔깃한 발언이었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선진국들은 엄청난 성장 속도를 이룩하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을 뛰어넘는 "제2의 경제 대국이자 최고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이제부터라도 견제해야 된다." 라는 위기의식과 경쟁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로도 일컫어진다.

서울시가 유치지 선정 과정 초기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통해 극복하여 나고야의 백중세 혹은 절대 우세 분위기는 갑자기 개최지 결정 당일에 상황이 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일본 측 프레젠테이션 연사는 일본어만 할 뿐 영어는 못했고, 반대로 한국 측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박종규 IOC 위원 겸 대한체육회장은 군 시절 미국 유학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 특히 컨벤션과 프레젠테이션에서 한국이 잇따라 우세를 점하면서 상황을 호전시켰다. 그리고 아울러 양자 대결 구도에서 처음 개최하는 쪽에게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먹혔다. 물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절묘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당시 소련 출신 국제체조연맹 회장 겸 IOC 위원이었던 티토프가 일본과 공조하여, "당신들은 일본에서 빌린 차관 60억 달러도 갚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서울 올림픽 유치단 일원이던 당시 무역협회장 유창순 회장이 "우리나라와 일본이 장사하는데 우리가 200억 달러 정도 적자이다, 그래서 그걸 고쳐보겠다고 60억 달러를 빌려 간 것이며, 우리나라는 매년 수백억 달러를 수출하는 나라이다.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질문하지 마시오!"라고 반박하며 티토프를 묵살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때의 한국은 인구수 때문에 소련보다는 경제적인 규모에서는 밀렸지만. 인당 GDP와 실질적 삶의 질을 따졌을 때는 결코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상황 아니 그 이상의 자본주의 국가로 부상하면서 점점 윤택한 삶을 이어나갔기에 이러한 소련의 지적은 그저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그 결과 1981년 9월 30일 서독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30]에서 일본나고야시를 52 대 27로 꺾고 결국 최종 개최지로 결정되었다.[31] 특히 득표수에서 무려 52 대 27이라는 상당히 놀라운 결과가 나왔는데 당시 자유주의 세력이었던 대한민국의 서울을 결코 지지하지 않을 세력이었던 공산권 국가들이 IOC 위원의 약 2할을 차지하는 상황과 북한의 여러 방해 공작 속에서도 이루어낸 쾌거였다.

또한 일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로는 일본이 올림픽 유치 준비를 앞두고서 쿠웨이트의 IOC 진출을 반대하는 바람에 이에 쿠웨이트가 한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면서 유대감이 강한 나머지 제 3세계의 중동 국가들의 모든 표가 단숨에 한국으로 몰리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 원인 중 하나는 유럽 지역, 특히 동구권과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표심 공략을 위해 당시 스포츠 용품업계의 절대 강자였던 아디다스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디다스는 유럽 스포츠계 인사들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가졌고, 수십년간 올림픽에 참가한 제3세계 가난한 나라들에게 스포츠 용품을 무상 제공해가며 마음을 얻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오른 일본에는 세계적 스포츠 브랜드인 미즈노아식스가 있었지만, 한국에는 오직 국내에서나 유명했던 프로스펙스 정도가 있었다.[32] 그래서 아디다스에겐 일본보다 한국을 밀어줄 동기가 충분했고, 대한민국 올림픽 유치단에서 정부의 특사격이던 박종규아디다스의 회장으로서 국제 스포츠계의 권력자인 [33] 홀스트 다슬러[34]와 여러차례 협상을 해서 스포츠 마케팅 관련 이권을 보장해주고 그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많은 IOC 위원들이 한국을 지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홀스트 다슬러는 한국이 미주 지역 TV 중계 협상권과 올림픽 후원기업 선정권을 자신에게 보장해 주면 44표 정도를 얻어주겠다고 제안했고 박종규는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올림픽을 서울이 개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서로간 이해관계를 통한 협약을 통해 이후 Win-Win의 결과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디다스의 입장에서는 만일 일본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휘장사업 등에서 일본업체가 독차지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은 한국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는 것을 희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아디다스의 서로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올림픽에 노력을 다했던 것이고 특히 아디다스 입장에서는 당시 한국에 독자적인 스포츠 브랜드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하였고 시장을 새롭게 개척해야 되는 블루 오션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를 만약에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결국 성공하게 될 시에 큰 의미로는 한국에 아디다스가 사업권을 따내면서 이러한 자신의 브랜드를 새롭게 런칭하면서 한국 시장에 진출이 가능해지는 교두보가 열린다는 뜻이거나, 혹은 적어도 경쟁하는 일본업체의 승승장구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한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고 이후에는 올림픽으로 인한 한국 시장의 브랜드 진입로 확보와 여러 방면의 상업적인 파트너쉽을 펼칠 수 있는 중요한 국가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이와 똑같은 이유로 2022 FIFA 월드컵 개최지 선정 때도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카타르를 지지하였다. 카타르는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제외하면 이런 대형 이벤트를 개최한 경험도 적고, 관련 자국 기업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만일 대회를 유치한다면 경기장, 교통, 통신 인프라 건설과 방송 중계 및 IT 관련 사업, 스포츠용품 사업 등을 유럽 업체가 수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당시 경쟁국이었던 한국, 일본, 미국이 대회를 유치했다면 거의 대부분 자국 업체들이 사업을 도맡아 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홀스트 다슬러가 1982년 설립한 스포츠마케팅 기업 ISL은 이후 2001년까지 올림픽과 월드컵의 방송중계권과 각종 스포츠 이권을 독점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남겼고, 또한 모기업인 아디다스도 전세계 스포츠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2001년 FIFA와 아디다스의 유착와 부정부패가 폭로되면서 ISL은 결국 파산한다. 하지만 그 이후 타 브랜드의 반등에도 국제스포츠계에서 아디다스의 영향력은 여전히 굳건한 상황이다. 당장 IOC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도 아디다스 출신이다.

참고로 대만은 전망과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안된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노골적으로 일본 나고야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실제로도 서울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서울이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이후 일부러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는 서울의 종로 등의 뒷골목과 서울의 달동네들을 대만 방송사가 취재하며, 이런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운 거리의 도시라는 식으로 한국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방송을 올림픽 특집으로 꾸며서 당시 대만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에게 항의를 받았다.

그리고 여담으로 당시 대만은 한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1970년대에 컬러 TV가 보급되었고 1980년대 들어서면 자가용 자동차가 대중화될 정도로 1인당 국민소득 수준에 있어서 한국을 훨씬 앞서고 있었던 상황인데다가 전통적으로 과거부터 한국은 조공국으로 여기던 중화사상까지 겹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을 깔보는 경향이 만연해있었는데, 그렇게 얕잡아보던 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해버린데다가. 중국의 부상 이후 대만의 국제적 고립이 불붙은 상황 속에서 배가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1992년 들어 한국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으니 이러한 고립상태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한국이 대만과 단교한 게 결코 이것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이미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 유치와는 관계없이 북방정책을 수립하고 소련,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본다면 대만과의 단교를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2개월 후인 1981년 11월 26일,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최까지 확정되어, 2년 간격으로 아시안 게임올림픽을 연속으로 치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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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대회 개최를 위해서 국제규격의 사격장을 서울 태릉에 서둘러 짓는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문화재보호 구역에 대회경기장을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당시 분위기엔 그냥 서울에서 한적하고 땅값 싼 동네였을 뿐. 결국 태릉국제사격장은 2000년대 들어서 문화재청의 요구로 철거된다.[2] 정주영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간했던, 자전적 홍보 책자에서 회고한 말이다.[3] 예비군, 주민등록증의 탄생의 기점이 된 김신조 사건이라 불린 1968년 1.21 사태,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등.[4] 중국은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천안문 사태였다. 물론 이후에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에는 성공하지만 말이다.[5] 10.26 사태 이후 갑작스레 정권을 장악하게 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국정운영에 대한 아무런 청사진이 없었다. 때문에 정권 초기에는 일단 자신들과 인맥이 닿는 전문가들을 국내외에서 최대한 끌어모아서 그들의 조언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6] 서울 올림픽 30주년 다큐 88/18에서 당시 5공 정권의 실세였던 허화평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놓고 뭐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 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라고 회고했다.[7] 노태우는 그동안 올림픽을 개최 성공과 의의에 자신이 철저하게 관여했다고 생각했다.[8]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그저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고, 이라크는 당시 중동 관련 이슈로 인한 페널티로 인해 타국의 압박을 받았기에 결국 이후 두 국가는 아시안 게임 유치를 중도에 포기한다.[9] 이 당시의 이라크의 바그다드는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을 치르기 이전으로 아직 지금과 같은 폭탄 터지는 소리만 요란한 세기말의 폐허가 아닌 정상적인 도시였다.[10] 대한민국은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 태국에게 개최권을 넘겨준 전례가 있다. 그 때문에 아시안게임 유치전에 참여했다가 또 상황이 어렵다고 중간에 빠지기는 힘들었기에 일본에 올림픽 ↔ 아시안게임 맞교환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11] 당시 일본 정치권에선 나고야가 올림픽을 유치하면 사회당이 그 여세를 몰아 일본 자민당의 55년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민당은 이후 정권을 지켜내는데 성공하였고 올림픽 유치 실패 이후에도 모토야마 마사오는 시정은 괜찮게 처리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1981년 시장선거에서 혁신계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도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후임자도 12년간 시장직에 계속해서 재임했다. 반면 당시 아이치현 지사였던 나시야 요시아키도 나고야 올림픽 계획구상을 이끌던 인물이었는데, 나고야 올림픽 개최실패 이후로 모든 책임을 지고 1983년 지사 선거에서 불출마했고, 서울 올림픽이 끝난 뒤에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12]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올림픽을 준비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저 나고야시라는 시 차원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다는 설을 방증할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을 전혀 모르던 당시 정주영은 "일본도 내각이 일치단결하여 나고야에 유치하고자 한다"라고 간주하고 있었다.[13] 북한의 서울올림픽 개최 비방[14]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88올림픽의 남북 분산개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대회 참가 명분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를 북한에 제안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나 당시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4년 9월에 방한하여 한국의 고위인사와 자리를 통해 만나는데 이때 남한이 일부 종목의 남북 분산 개최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대답하면서 "한국은 '안 된다'고만 이야기하지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LA 올림픽 보이콧 이후 서울 대회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단 한 가지 장애물이 북한"이라며 "그래서 한 가지 핑계를 찾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2∼3개 종목 개최를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에 갈 구실이 되는 것이다." 라고 덧붙여서 설명했다.참고#[15]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 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가기에 이른다.[16] 노태우는 이후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걸 자랑하듯이 홍보 만화에서 큼직하게 다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교적으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태우가 비장하게 가서 연설하길 "1988 올림픽이 서울에서 못 열리면 잠실종합경기장을 IOC 위원들 무덤으로 쓰겠다"고 연설했다.[17] 당시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떄문에 국제스포츠계에선 이미 퇴출된 상태였다. 그런데 몬트리올 올림픽을 얼마 앞두고 뉴질랜드 럭비팀이 뜬금없이 남아공에 가서 친선경기를 하면서 문제가 터졌다. 격분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뉴질랜드에 대한 제제를 요구했지만, IOC는 냉담하게 무시했고 결국 아프리카 26개국이 올림픽을 전면보이콧하게 된다.[18] 동독뿐만 아니라 여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스포츠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토대로 국력도 과시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한편으로는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면 사실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자 및 선수들 또한 그 무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데 대한 스포츠계의 실망은 엄청났고, 동독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19] 이때 김운용 위원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기존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을 정도로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또한 러시아어는 세계에서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20]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이 된다 쳐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적성 집단(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으므로 '적'이라고 보지도 않았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으로 인식되는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고 또한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 물론 북한은 엄연한 IOC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참가했다면 인공기와 북한 국가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는 정치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도 북한을 적성 국가로 간주해 수교 자체를 하지 않은 영국의 경기장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긴 했다.[21] 그리고 대한민국 실효지배 영역인 남한 지역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애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12년 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반도기를 이용하여 동시에 입장하였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도 북한이 참가했으며 동시 입장 또한 성사되었다.[22] 당시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물밑 대결은 치열했지만, 공개적으로 1987년 중거리 미사일 감축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는 둥 유례없이 분위기가 훈훈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념논쟁을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을 공산권 국가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소련이 1988년에 들어서야 참가 선언을 선언했던 것도 나름 동맹국인 북한을 배려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력 과시에 집착하던 소련과 동구권 입장에선 LA에 이어서 2회 연속으로 불참한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즉 LA와 서울의 개최 순서가 뒤바뀌었다면 반쪽 대회는 LA가 아닌 서울 대회였을 수도 있었다. 물론 LA는 제1세계로 대변되는 명백한 서방 진영과 자본주의 국가의 수장이자 소련의 최대 적국인 미국이고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한국은 당시 기준으로 1세계에 속한 아시아 개도국 중 하나에 불과한 위상이기에 소련의 참가 여부가 국제 사회에서 큰 파급력을 가져올 수밖에 없음은 감안해야 한다.[23] 이후 북한은 올림픽에 참가한 소련과 중국을 향해 배신자라 욕하면서 '우리 식대로 살자'란 운동을 펼치기에 이른다.[24] 맨 위의 ともそう平和と友情の火는 '밝히자 평화와 우정의 불'이라는 뜻이다. 灯(とも)そう는 灯す의 청유형.[25] 한 국가의 거점 도시가 아닌 그냥 잘나가는 도시 수준이었다.[26] 자그마치 호주 건국 200주년이라 명분이 아주 컸었다.[27] 사실 우리나라가 1979년에 갑자기 무작정 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올림픽 유치에 대한 논의는 계속 있었고 올림픽 주경기장 등 주요 시설도 당시엔 꼭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건 아니었지만 올림픽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사실이며 이미 1977년 착공에 들어간 상태였다. 개최지 선정 당시 이미 주요 스포츠시설과 부속 편의시설 등을 차근차근 준비해 놓았던 우리나라에 비해 오히려 일본이 계획만 세워놓고 개최 확정 후에나 준비하려는 면이 있어 그런 부분도 나고야가 밀린 면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대책없이 무작정 유치전에 뛰어든 것은 오히려 2002년 FIFA 월드컵 대회였다. 그때 일본은 나고야 올림픽 유치 패배를 거울삼아 이미 장기적인 안목으로 FIFA 월드컵대회 유치를 준비하고 있었다.[28] 당시 중공의 부상으로 수교국을 대거 상실한 대만에게 가장 존재감이 큰 국가는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미국, 영국, 서독, 일본 등 주요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대만이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대한민국이었던 것. 오죽하면 대만 외교관이 외교부장으로 영전하는 마지막 관문이 주한대사였을 정도였다.[29] 물론 정주영 회장의 예상은 빗나가서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불경기의 수렁에 빠진다.[30] 참고로 이 총회는 올림픽 의회를 겸하고 있는 총회였다. 올림픽 의회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 올림픽 의회 문서 참조.[31] 그리고 그 유명한 쎄울!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음. 참고로 총회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상세한 득표수를 발표할 때는 프랑스어-영어순이었다.[32] 지금이야 세계적 브랜드에 속하는 FILA가 있긴 하지만, 휠라는 본래 이탈리아 회사였고 훗날에 한국에 인수되어 한국 회사로 바뀐 것이었다. 즉 이때의 휠라는 엄연하게 유럽 브랜드에 속했었다.[33] 참고로 당시에는 나이키의 사세가 아디다스에 비해 미약했다.[34] 아디다스 창립자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