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재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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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1990년중에 치러진 재보궐선거다. 2000년 2월 이전까지는 재보궐선거의 일정이 정례화 되지 않아 지역마다 선거일이 모두 달랐다.[1]
2. 4월 3일[편집]
민주자유당이 3당 합당 이후 치른 첫 선거이지만, 텃밭인 대구에서도 겨우 과반을 넘기고 농촌인 충북 진천·음성에서 꼬마민주당[2] 에게 의석을 내주는 등 참패한 선거이다.
2.1. 지역별 선거 결과[편집]
2.1.1. 대구직할시 서구 갑[편집]
이 선거는 2021년 4·7 재보궐선거 만큼이나 전국적으로 이목을 끈 재보궐선거였다.
현역 국회의원이던 정호용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의 요구에 따라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부탁에 의하여 사퇴하고, 이 과정에서 노태우에게 보궐선거 공천을 약속받는다.[3]
그러나 민주자유당은 정호용이 아닌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공천하고, 정호용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무소속 출마엔 부인의 권유가 있었다고.
선거전은 팽팽한 접전으로 흘러갔으며, 당시 민주자유당은 3당 합당 이후 치러지는 첫 선거라 현역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에게 동책을 맡도록 하고 안기부 등을 통하여 정호용을 미행까지 하며 압박했으며##,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정호용의 부인이 자살 기도까지 하자# 결국 정호용은 후보등록까지 마감했음에도 끝내 사퇴하고 만다.
그렇지만 정호용의 사퇴 이후 정호용의 지지층이 모두 문희갑 후보에게 간 것은 아니었다. 무소속[4] 백승홍 후보는 당초 정호용과 문희갑 후보의 경쟁으로 인한 어부지리 효과를 노리다 정호용의 사퇴에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호용 지지층을 흡수하려고 시도했고#, 결국 선거 결과 문희갑 후보는 텃밭인 대구에서 출마하였음에도[5] 51.5%의 득표율로 겨우 과반을 넘겼으며 당시 백승홍 후보는 42.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비록 낙선했지만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이강철이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44.1%의 득표율을 기록하기 이전까지 대구에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여담으로 정호용의 사퇴로 인하여 남은 선거자금이 후일 문희갑의 대구광역시장 임기 말에 발생한 비자금 파동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2.1.2. 충청북도 진천군·음성군[편집]
무소속 허탁 후보가 농촌지역에 여당의 텃밭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었다. 이후 허탁 의원은 그 해 6월에 창당한 민주당에 합류한다.
3. 11월 9일[편집]
- 당선자
-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 이수인(평화민주당)
3.1. 지역별 선거 결과[편집]
3.1.1. 전라남도 함평군·영광군[편집]
이수인 후보가 외지(경상북도)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총재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지역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외지인을 공천한 데에는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라는 당총재 DJ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당 안팎에서 반발이 상당했다고 한다. 이는 김대중 자서전에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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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서 위키백과나 나무위키 문서에 기재되지 않은 2000년 이전 재보선 결과도 상당하다. 지역별로 날짜가 전부 달라 목록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이전의 지역별 재보선 결과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중앙선관위 자료를 참고하길 바람. # [2] 당시에는 정식 창당 이전이었으므로 무소속으로 출마.[3] 이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당시에는 속칭 맹형규법으로 불리는 법안이 시행되기 이전이라 본인이 재보궐선거의 원인을 제공해도 본인이 재출마하는 것이 가능했다.[4] 이후 민주당에 합류.[5] 다만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서구는 젊은 층들의 비중이 높았고 야권 지지층도 적지 않았던 곳이다. 13대 총선에서는 정호용이 과반으로 승리하였지만 12대 총선에서는 중구·서구 선거구에서 신한민주당의 유성환 후보가 1위로 당선되는데 크게 기여한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