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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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투표 아이콘(흰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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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2017년 5월 9일
20대
2022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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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21대
2020년 4월 15일
22대
2024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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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동시지방선거
7회
2018년 6월 13일
8회
2022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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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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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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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병행하지 않고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에 의해 별도로 시행한 보궐선거이므로 편의상 보궐선거로 분류함.
**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예측조사 발표 영상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무소속
5석
4석
4석
2석
33.33%
26.66%
26.66%
13.33%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무소속
84석
69석
24석
53석
36.52%
30.00%
10.43%
23.04%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의회의원 선거 결과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무소속
390석
335석
94석
151석
40.20%
34.53%
9.69%
15.56%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의회의원 선거
무소속
4,541석[1]
100.00%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민주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무소속


파일:1회지선광역의원.png

광역의회 선거 결과

1. 개요[편집]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대한민국전국동시지방선거며 투표율은 68.4%를 기록했다. 원래 지방자치단체장 및 지방의회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었으나, 국회의원 선거와 격년마다 교차해서 치르기 위해 첫 선거에 한해서는 임기를 3년으로 하여 1996년 총선 2년 후인 1998년에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르기로 하고, 이때부터는 임기를 4년으로 하기로 했다. #[2][3][4]


2. 상세[편집]


국내 첫 동시지방선거다. 4년 전 1991년 지방선거는 1960년 이후 31년 만에 부활했지만,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한 날이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았다.[5] 더군다나 1990년대 부활 이전의 지방선거도 같은 해에 여러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모든 선거 단위를 동시에 치르진 않았다.

광역자치단체장은 15개 특별시·광역시·에서 뽑았다. 1997년 7월 15일 광역시로 승격된 울산은 광역시가 되면 새로 시장을 뽑는 법에 따라 선거를 해야 했지만, 다음 지방선거가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제1회 선거에서 뽑은 심완구 경상남도 울산시장(기초자치단체장)이 광역시 설치법 부칙에 따라 초대 울산광역시장이 되고 재선거는 없었다.[6][7]

3. 개표 결과[편집]


광역자치단체장 개표 결과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무소속|
무소속
]]

5
4
4
2
부산
인천
경기
경북
경남
서울
광주
전북
전남
대전
강원
충북
충남
대구
제주
문정수
최기선
이인제
이의근
김혁규
조순
송언종
유종근
허경만
홍선기
최각규
주병덕
심대평
문희갑
신구범

무소속 당선인들의 복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6
5
4
부산
대구
인천
경기
경북
경남
서울
광주
전북
전남
제주
대전
강원
충북
충남
문정수
문희갑
최기선
이인제
이의근
김혁규
조순
송언종
유종근
허경만
신구범
홍선기
최각규
주병덕
심대평

선거 결과는 민주자유당의 참패, 민주당의 선전, 자유민주연합의 돌풍으로 요약된다.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는 민주자유당 5, 민주당 4, 자유민주연합 4, 무소속 2로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가장 많이 승리하긴 했지만 여야로 따지자면 5:10의 완패. 뿐만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장에서도 민주자유당 69, 민주당 84를 기록했으며 광역의원 또한 민주자유당 284, 민주당 353으로 열세였는데 민주자유당이 원내 과반수 정당임을 고려하면 완패 수준을 넘어 참패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취임 이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8]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취임 2년 반만에 맞은 예상을 뛰어넘는 치명적인 중간 평가로 한동안 정권이 휘청거리게 된다.

광역자치단체장을 놓고 보면 민주자유당은 경기도, 인천광역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9], 경상북도에서 이겼고, 민주당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광주광역시에다가 서울특별시를 손에 넣었으며, 자유민주연합은 충청남도, 충청북도, 대전광역시, 그리고 강원도에서 승리했다. 나머지 지역인 대구광역시제주도는 무소속이 승리.

철저한 지역 분할 구도가 완성됐다. 영남-민주자유당, 충청-자유민주연합, 호남-민주당. 1990년 3당 합당 이전의 정치 구도로 되돌아간 셈이다.

특히 서울특별시의 결과가 엄청난 화젯거리였다.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까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40%대에 달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여유있게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선거 막판에 민주당 조순에게 역전을 허용하며 2위에 그쳤고 국무총리 출신의 민주자유당 정원식3위로 낙선하면서 망신살이 뻗친 것.[10] 서울특별시 전체는 물론, 민주자유당의 텃밭으로 거듭나는 중이었던 강남3구에서조차 조순 후보가 앞섰는데, 정계 복귀 전이었던 김대중 전 총재가 암묵적으로 밀었던 후보로서 저명한 경제학자 출신인데다 중도 성향을 갖고 있기에 상당한 확장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시 인기있던 대만 드라마인 판관 포청천에서 따온 포청천 시장이라는 콘셉트로 홍보 전략을 세운 것도 승리의 큰 요인. 게다가 민주자유당 타격에 나선 자유민주연합까지 무공천을 선언하며 조순을 직접 지지하는 바람에 기존 민주당 지지층 및 호남 출신들의 표는 물론, 충청 표와 중도 보수 표까지 끌어모을 수 있었다. 또한 박찬종 후보가 막판에 민주공화당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거짓말 논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젊은층 표의 상당수가 조순으로 쏠리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민주자유당에서도 1991년 당시 (정권의 표현에 의하면) 좌익 용공 대학생들에게 한국외대에서 밀가루 테러를 당한 당사자[11]라며 보수 표 결집에 나섰으나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부터 아예 3등이었다. (…) 그런 결과 서울특별시 전역에서 조순 후보가 고르게 높은 표를 얻었으며 부재자투표에서는 박찬종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섰다.[12]

애초에 김대중의 절대 우세 지역인 호남 지역과 김종필의 본거지였던 충청남도이야 그렇다 쳐도 전통적으로 여당 성향인 충청북도와 강원도의 패배, 무엇보다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고작 20.67% 득표로 3위에 그친 것은 너무 처참한 결과였다.[13]

파일:election95 seoul.jpg

게다가 서울특별시 구청장은 서초구강남구 두 곳만 민주자유당이 차지했을 뿐 나머지 23곳을 민주당이 장악했으며, 서울특별시의회는 아예 122:11로 민주당이 싹쓸어버렸다. 서울특별시가 민주당 지지세가 만만치 않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14] 격차가 너무 컸기에 사실상 김영삼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보수 계열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압도적으로 참패한 선거 중 하나.[15] 그리고 이 결과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재현됨을 넘어 신기록을 썼다.[16]

민주자유당의 수모는 다른 지역에서도 이어졌는데, 나름대로 텃밭인 대구광역시장조차 구 여권 출신 무소속들에게 밀려나며 4위로 밀려나면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의 자유민주연합 "녹색 바람"을 예고하였다. 이는 PK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TK를 홀대한다는 정서와 함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일어나 민심 이반이 벌어진 탓으로 보이며, 실제로 경상북도에서도 민주자유당은 무소속 후보에게 고작 3.61%차로 신승했다. 이른바 TK지역에서 反민자 非민주 정서가 현실화된 것이다.[17] 이 선거 후 2일 뒤 누구도 알지 못한 대형참사가 일어난다.

충청북도에서도 민주당(이용희, 24.50% 득표)에 밀려 3위(23.29%), 강원도에선 아예 최각규(65.82% 득표)의 인물론에 밀려 1:1 대결[18]에서 더블 스코어의 패배(이상룡 차관, 34.17% 득표)를 당했다. 대구광역시와 대전광역시도 결과가 나빴다. 대구광역시에서는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36.79%로 당선되고 자유민주연합의 이의익 후보가 22.14%를 득표해 선전할 때, 무소속 후보에게 밀려 조해녕 전 대구시장이 고작 16.87%만을 득표했다(4위). 대전광역시의 염홍철 전 대전시장 역시 고작 20.93%를 득표하면서 트리플 스코어(자유민주연합 63.76%) 패배. 광주광역시에서는 1:1 대결에서 아예 10.28%라는 참담한 득표를 건졌다.

반대로 민주당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유력하던 서울특별시장 자리를 조순 후보가 대역전극 끝에 확보하고,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는 민주자유당을 앞서며 당세를 크게 넓혔다. 특히 광역자치단체장 배출에 실패한 인천광역시와 경기도에서도 광역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선전해 1당이 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대전광역시와 경상북도, 강원도에서도 기초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키기까지 했다.(대전에서는 유성구청장 송석찬, 강원도에서 속초시장 동문성, 경북에서는 포항시장 박기환) 그러나 당 내부적으로 보면 묘한게 경기도지사 자리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이기택 전 대표의 입지가 위축되고, 정작 정계 밖에서 활동하던 김대중 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의 입지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지만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정계에 복귀는 하지 않았지만 선거유세엔 참여한 김대중 전 이사장은 서울특별시장으로는 조순, 경기도지사에는 이종찬을 밀었다. 그러나 이기택은 자신이 당대표라며 장경우를 밀었고, 이러한 경기도지사 후보 선출 과정에서 폭력 사태와 후보 매수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과는 민주자유당 이인제의 당선.[19] 하지만 이후로도 당내 갈등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런 갈등은 김대중의 정계 복귀 선언에 대한 찬반 논란까지 부르며 결국 김대중이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음 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계는 2개의 정당이 따로 놀게 되었다. 결과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문서로.

한편 이 선거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광역시장 후보에 출마하여 2위로 낙선하기도 했다. 노무현 후보는 선거전 초반 지역주의 타파와 인물론을 기치로 내세워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했으나, 정작 정계 밖에 있던 김대중 전 아태재단 이사장이 지역 등권론[20]을 들고 나오자 부산광역시 보수표[21]가 결집하는 바람에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제대로 팀킬한 셈인데 이에 열받은 노무현 후보 캠프측에선 이런 지역 등권론을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도 했다.[22][23] 전라북도에서는 거꾸로 민주자유당 강현욱 후보가 지역 등권론에 발목을 잡히며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민주당 유종근 후보에게 참패했다.[24]

경상북도, 경상남도, 대구광역시에서는 기초자치단체장 가운데 무소속 당선인이 제일 많았다. 특히 포항시에서 민주당 박기환 후보가 32.37%의 득표로 민주자유당 최수환 후보(24.42% 득표)을 수월하게 꺾고 당선되는 등의 파란이 빚어졌다.[25] 안동시, 상주시, 군위군, 칠곡군 등에서는 아예 민주자유당 후보가 나오지 못해 무소속 리그가 벌어졌으며, 구미시김관용 후보조차도 자유민주연합과의 대결에서 35.1%대 33.9%의 신승을 해야했다. 경상남도에서도 창원시, 마산시 등에서 무소속 시장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남해군에서는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불과 37세의 나이로 당선되면서 민선 최연소 단체장의 기록을 세웠다.[26]

3.1. 광역자치단체장[편집]



3.1.1. 서울특별시장[편집]


{+1 [[파일:구 서울특별시 휘장(백색).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정원식(鄭元植)
1,001,446
3위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20.67%
낙선
2
조순(趙淳)
2,051,441
1위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42.35%
당선
3
박홍래(朴弘來)
25,054
5위

파일:한국친민당.png

0.51%
낙선
4
고순복(高順福)
10,488
7위

0.21%
낙선
5
김명호(金明豪)
9,992
8위

0.20%
낙선
6
김옥선(金鈺仙)
17,728
6위

0.36%
낙선
7
박찬종(朴燦鍾)
1,623,356
2위

33.51%
낙선
8
정기용(鄭基用)
6,156
9위

0.12%
낙선
9
황산성(黃山城)
97,709
4위

2.01%
낙선

선거인 수
7,438,025
투표율
66.18%
투표 수
4,922,210
무효표 수
78,840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정원식
조순
박찬종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1,001,446
(20.67%)

2,051,441
(42.35%)

1,623,356
(33.51%)

+428,085
(△8.84)

66.18%
종로구
21.87%
45.09%
29.47%
△15.62
66.45%
중구
23.47%
44.11%
29.05%
△15.06
67.16%
용산구
23.01%
41.18%
32.32%
△8.86
65.80%
성동구
20.36%
44.01%
31.97%
△12.04
66.04%
광진구
19.23%
43.04%
34.41%
△8.63
66.05%
동대문구
20.68%
41.84%
33.90%
△7.94
66.30%
중랑구
19.41%
40.56%
36.11%
△4.45
65.33%
성북구
20.64%
43.60%
31.97%
△11.63
66.06%
강북구
18.71%
45.20%
31.35%
△13.85
64.39%
도봉구
19.11%
42.16%
35.34%
△6.82
66.21%
노원구
19.62%
41.12%
35.59%
△5.53
67.51%
은평구
19.69%
43.27%
33.48%
△9.79
65.49%
서대문구
20.89%
44.64%
30.88%
△13.76
66.73%
마포구
21.11%
42.83%
32.60%
△10.23
66.23%
양천구
20.37%
41.80%
34.52%
△7.28
67.35%
강서구
22.11%
39.64%
34.69%
△4.95
66.57%
구로구
18.78%
41.60%
35.48%
△6.12
65.98%
영등포구
20.60%
41.89%
34.31%
△7.58
65.96%
동작구
21.31%
43.72%
32.08%
△11.64
66.23%
관악구
18.15%
48.30%
30.32%
17.98
66.79%
서초구
23.96%
38.46%
35.35%
△3.11
66.26%
강남구
25.27%
38.65%
33.29%
△5.36
65.70%
송파구
21.27%
41.84%
33.83%
△8.01
66.09%
강동구
20.33%
39.79%
36.47%
△3.32
66.44%


3.1.2. 부산광역시장[편집]


{+1 [[파일:부산직할시 휘장.svg}}} 부산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문정수(文正秀)
885,433
1위

51.40%
당선
2
노무현(盧武鉉)
647,297
2위

37.58%
낙선
3
김현옥(金玄玉)
169,653
3위

9.84%
낙선
4
배상한(裵相漢)
20,008
4위

1.16%
낙선

선거인 수
2,658,224
투표율
66.22%
투표 수
1,760,404
무효표 수
38,014

부산광역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만큼 민주자유당 지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는데,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이 높은 인지도를 기반으로 한때 민주자유당 후보 문정수와 박빙 승부를 벌였다. 이후 김대중지역등권론과 보수 표심 결집으로 격차가 벌어지기는 했으나, 37.58%의 득표율라는 의미 있는 득표율을 거두며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1960년대 불도저 시장으로 이름을 날린 김현옥 전 시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9.84%의 득표율을 올렸다.[27]

3.1.3. 대구광역시장[편집]


{+1 [[파일:대구광역시 휘장(일제강점기~1996)_White.svg}}} 대구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조해녕(曺海寧)
175,749
4위

16.87%
낙선
2
이의익(李義翊)
230,668
2위

22.14%
낙선
3
문희갑(文熹甲)
383,272
1위

36.79%
당선
4
안유호(安有鎬)
29,617
5위

2.84%
낙선
5
이해봉(李海鳳)
222,409
3위

21.35%
낙선

선거인 수
1,663,614
투표율
63.97%
투표 수
1,064,253
무효표 수
22,538

당시 여당인 보수 정당 후보가 4위로, 그것도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대구광역시에서 낙선한 유일한 사례이다. 문희갑도 물론 보수 성향 쪽 인물이긴 하지만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에 따른 김영삼의 대구광역시 홀대론으로 인해 반 민자당와 반 YS 구도가 형성되며 무소속 문희갑 후보에게 몰표가 나온 것.

3.1.4. 인천광역시장[편집]


{+1 [[파일:인천광역시 휘장(?-1996)_white.svg}}} 인천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최기선(崔箕善)
383,965
1위

40.81%
당선
2
신용석(愼鏞碩)
298,544
2위

31.73%
낙선
3
강우혁(康祐赫)
258,175
3위

27.44%
낙선

선거인 수
1,551,925
투표율
62.02%
투표 수
962,552
무효표 수
21,868

민자당 후보로 출마한 최기선 후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비서 출신으로 1993년~1994년에 관선 인천직할시장을 역임한 바 있었다. 94년 9월 인천 북구청 세금비리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것이 약점이었지만 민주당 신용석 후보와 9%p 격차를 기록하며 초대 민선 인천시장에 당선되었다.

3.1.5. 광주광역시장[편집]


{+1 [[파일:광주광역시 휘장(1987~2000).svg}}} 광주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동환(金東桓)
53,817
2위

10.28%
낙선
2
송언종(宋彦鍾)
469,570
1위

89.71%
당선

선거인 수
822,880
투표율
64.82%
투표 수
533,393
무효표 수
10,006

[광주광역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김동환
송언종
[[광주광역시|

전체
]]
53,817
(10.28%)

469,570
(89.71%)

533,393
(64.82%)

표차 +415,753
◁ 79.43%p
[[동구(광주광역시)|

동구
]]
8,222
(12.04%)

60,015
(87.95%)

69,337[1]
(64.88%)
표차 +51,793
◁ 75.91%p
[[서구(광주광역시)|

서구
]]
10,198
(10.75%)
84,647
(89.24%)

96,265
(64.74%)
표차 +74,449
◁ 78.49%p
[[남구(광주광역시)|

남구
]]
10,446
(9.84%)
95,686
(90.15%)

108,589
(64.81%)
표차 +85,240
80.31%p[2]
[[북구(광주광역시)|

북구
]]
17,126
(9.23%)
164,986
(89.00%)

185,360[3]
(63.83%)[4]
표차 +147,860[5]
◁ 79.77%p
[[광산구|

광산구
]]
7,825
(10.85%)
64,236
(89.14%)

73,842
(67.45%)[6]
표차 +56,411
◁ 78.29%p


민주당 송언종 후보는 90%에 육박하는 89.71%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그리고 민주당 송언종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역대 광주광역시장 최다 득표율(89.71%)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민주자유당 김동환 후보는 선거 반액선인 10.28%을 기록하며 참패했다.

3.1.6. 대전광역시장[편집]


{+1 [[파일:대전직할시 휘장 (1972-1995).svg}}} 대전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염홍철(廉弘喆)
112,607
2위

20.93%
낙선
2
변평섭(邊平燮)
58,346
3위

10.84%
낙선
3
홍선기(洪善基)
342,959
1위

63.76%
당선
4
이대형(李大衡)
23,953
4위

4.45%
낙선

선거인 수
819,604
투표율
66.93%
투표 수
548,529
무효표 수
10,664

3.1.7. 경기도지사[편집]


파일:경기도 휘장(1995-2005)_White.svg 경기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인제(李仁濟)
1,264,914
1위

40.56%
당선
2
장경우(張慶宇)
923,069
2위

29.60%
낙선
3
김문원(金文元)
316,637
4위

10.15%
낙선
4
임사빈(任仕彬)
613,624
3위

19.67%
낙선

선거인 수
5,043,054
투표율
63.23%
투표 수
3,188,871
무효표 수
70,627

[경기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이인제
장경우
김문원
임사빈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1,264,914
(40.56%)

923,069
(29.60%)

316,637
(10.15%)

613,624
(19.67%)

341,845
(△10.96)

3,188,871
(63.23%)

수원시 장안구
35.22%
26.16%
12.30%
26.29%
△8.93
60.66%
수원시 권선구
35.03%
27.90%
10.48%
26.57%
△7.13
60.46%
수원시 팔달구
37.55%
25.79%
9.92%
26.72%
△10.83
61.14%
성남시 수정구
36.19%
38.67%
9.08%
16.04%
▼2.48
61.21%
성남시 중원구
37.24%
38.72%
8.06%
15.97%
▼1.48
59.96%
성남시 분당구
45.94%
30.90%
8.66%
14.48%
△15.04
63.85%
의정부시
32.89%
24.46%
22.71%
19.92%
△8.43
61.17%
안양시 만안구
47.14%
31.49%
7.85%
13.50%
△15.65
60.38%
안양시 동안구
46.61%
32.12%
8.16%
13.09%
△14.49
62.12%
부천시 원미구
38.98%
37.22%
11.47%
12.30%
△1.76
58.00%
부천시 소사구
40.51%
35.55%
12.06%
11.87%
△4.96
57.80%
부천시 오정구
40.05%
37.70%
10.05%
12.19%
△2.35
56.70%
광명시
41.69%
35.75%
11.69%
10.85%
△5.94
59.64%
평택시
36.56%
25.13%
9.91%
28.40%
△8.16
68.98%
동두천시
34.03%
21.84%
14.11%
30.00%
△9.90
71.71%
양주군
23.75%
17.73%
16.85%
41.65%
▼17.90
69.43%
안산시
40.90%
36.08%
9.97%
13.03%
△4.82
57.46%
과천시
47.99%
28.32%
7.97%
15.70%
△19.67
66.46%
의왕시
45.26%
31.34%
8.52%
14.86%
△13.92
64.28%
군포시
43.85%
32.17%
8.78%
15.19%
△11.68
63.21%
시흥시
42.72%
34.53%
10.08%
12.66%
△8.19
64.21%
구리시
38.32%
27.06%
10.72%
23.88%
△11.26
60.48%
남양주시
41.81%
24.91%
10.42%
22.84%
△16.90
64.03%
여주군
40.56%
28.19%
7.13%
24.10%
△12.37
70.80%
오산시
41.58%
22.84%
9.36%
26.20%
△15.38
70.42%
화성군
40.29%
24.76%
9.03%
25.89%
△14.40
70.87%
파주군
48.19%
21.40%
7.92%
22.46%
△25.73
66.39%
고양시
42.70%
31.44%
8.97%
16.88%
△11.26
59.76%
하남시
43.67%
29.85%
7.80%
18.66%
△13.82
65.53%
광주군
37.98%
28.78%
8.08%
25.14%
△9.20
69.33%
포천군
45.22%
16.44%
9.68%
28.63%
△16.59
74.42%
연천군
44.43%
19.64%
11.32%
24.59%
△19.84
75.81%
양평군
42.64%
20.70%
9.34%
27.30%
△15.34
74.91%
가평군
42.03%
20.63%
7.37%
29.95%
△12.08
76.60%
이천군
40.89%
23.06%
7.78%
28.25%
△12.63
67.93%
용인군
38.80%
27.10%
11.80%
22.28%
△11.70
65.96%
안성군
40.31%
26.50%
7.67%
25.50%
△13.81
73.98%
김포군
45.46%
23.28%
6.51%
24.74%
△20.72
70.94%


당시 서울특별시에서는 김영삼 정부에 대한 심판 여론이 강하게 일며 민주자유당 정원식 후보가 3위로 낙선한 반면, 경기도에서는 최연소 노동부장관을 지냈던 이인제의 이름값과 함께 당시만 해도 농촌 지역이 다수였던 경기도의 보수세[28]에 힘입어 여당이 승리했다. 여기에 이인제 본인의 중도개혁적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수원, 안양[29], 부천, 광명 등 주요 도시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는 자유민주연합 김문원 후보,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관선 도지사 출신 무소속 임사빈 후보의 독자 출마로 보수세가 분열되었음에도[30] 불구하고 10%가 넘는 넉넉한 차이로 낙승을 거두었다. 이런 결과에는 이인제 후보의 인물론도 작용했지만,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 벌어진 내홍도 큰 원인이었다.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을 놓고 김대중 전 아태재단 이사장과 이기택 전 총재의 의견이 엇갈리며[31] 경선 과정에서 파행이 일었고, 그 후유증으로 민주당 지지층이 결집하지 못하고 사분 오열되었기 때문. 또한 장경우 후보가 원래 민정당 출신이었다가 YS 계열과 갈등을 겪으면서 민주당으로 넘어온 인물이라 민주당 지지층의 호응을 온전히 이끌어내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32]

3.1.8. 강원도지사[편집]


{+1 [[파일:강원도기(1962-1997).svg}}} 강원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상룡(李相龍)
260,004
2위

34.17%
낙선
2
최각규(崔珏圭)
500,894
1위

65.82%
당선

선거인 수
1,048,490
투표율
74.77%
투표 수
783,999
무효표 수
23,101

[강원도지사 시군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강원도지사 시군별 개표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이상룡
최각규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260,004
(34.17%)

500,894
(65.82%)

-240,890
(▼31.65)

783,999
(74.77%)

춘천시
66.98%
33.01%
△33.97
70.99%
원주시
21.32%
78.68%
▼57.36
72.08%
강릉시
13.70%
86.30%
▼72.60
74.04%
동해시
17.46%
82.53%
▼65.07
74.82%
태백시
29.64%
70.35%
▼40.71
75.89%
속초시
41.40%
58.59%
▼17.19
73.11%
삼척시
21.43%
78.56%
▼57.13
78.98%
홍천군
61.89%
38.10%
△23.79
75.32%
횡성군
32.92%
67.07%
▼34.15
75.87%
영월군
34.54%
65.45%
▼30.91
74.89%
평창군
24.60%
75.39%
▼50.79
76.73%
정선군
35.17%
64.82%
▼29.65
75.94%
철원군
33.47%
66.52%
▼33.05
77.49%
화천군
49.71%
50.28%
▼0.57
78.25%
양구군
56.72%
43.27%
△13.45
80.72%
인제군
40.40%
59.59%
▼19.19
80.33%
고성군
35.54%
64.45%
▼28.91
78.97%
양양군
25.79%
74.20%
▼48.41
82.80%


당초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었던 이봉모가 등록을 포기하면서 민주자유당과 자유민주연합의 1:1 구도로 선거가 진행되었고, 영서(춘천시) 출신 이상룡 후보와 영동(강릉시) 출신 최각규 후보의 대결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당초 접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상룡 후보가 춘천시, 홍천군, 양구군에서만 승리하고, 나머지 지역을 최각규 후보가 석권하면서 최각규 후보가 더블 스코어 차이로 압승을 거뒀다.

3.1.9. 충청북도지사[편집]


{+1 [[파일:충청북도 구 휘장(1980s).svg}}} 충청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덕영(金德永)
159,911
3위

23.29%
낙선
2
이용희(李龍熙)
168,209
2위

24.50%
낙선
3
주병덕(朱炳德)
250,105
1위

36.43%
당선
4
양성연(梁成淵)
25,603
6위

3.72%
낙선
5
윤석조(尹錫祚)
27,880
5위

4.06%
낙선
6
조남성(趙南星)
54,748
4위

7.97%
낙선

선거인 수
972,170
투표율
72.67%
투표 수
706,480
무효표 수
20,024

[충청북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북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김덕영
이용희
주병덕
조남성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159,911
(23.29%)

168,209
(24.50%)

250,105
(36.43%)

54,748
(7.97%)

-81,896
(▼11.93)

72.67%
청주시 상당구
16.76%
20.36%
49.84%
5.94%
▼29.48
67.95%
청주시 흥덕구
17.73%
21.17%
47.39%
6.32%
▼26.22
65.31%
충주시
36.11%
19.83%
29.80%
7.40%
△6.31
72.32%
제천시
32.91%
19.10%
23.01%
16.58%
△9.90
72.45%
단양군
21.74%
16.40%
18.36%
35.52%
▼13.78
77.71%
청원군
21.34%
22.89%
45.13%
5.19%
▼22.24
75.06%
영동군
26.34%
37.58%
20.57%
4.71%
▼11.24
78.14%
보은군
19.69%
46.21%
20.57%
6.34%
△25.64
80.01%
옥천군
15.19%
56.68%
20.57%
5.15%
△36.11
80.26%
괴산군
24.48%
21.93%
40.93%
5.09%
▼16.45
78.73%
음성군
19.68%
19.08%
48.08%
5.15%
▼28.40
78.41%
진천군
18.99%
27.33%
41.58%
4.19%
▼14.25
78.44%


민주자유당과 자유민주연합은 각각 관선 충청북도지사 출신 후보를 내세웠고, 상대적으로 당세가 약한 민주당은 남부 3군의 터줏대감이었던 이용희 전 의원을 공천했다. 충청북도는 상대적으로 김종필자유민주연합 총재의 영향력이 약하고 보수 성향이 강한 만큼 민주자유당과 자유민주연합의 2파전에 민주당의 인물론이 도전하는 양상이었는데, 이곳 역시 문민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자유민주연합 주병덕 후보가 낙승하였고, 이용희 후보가 김덕영 후보를 근소하게 제치고 2위를 기록하면서 작은 이변을 연출했다.

지역별로는 주병덕 후보가 충청북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청주권(청주시, 청원군)과 본인의 지역 기반인 중부 3군(진천군, 음성군, 괴산군)에서 큰 격차로 승리했고, 이용희 후보는 자신의 기반인 남부 3군(보은군, 옥천군, 영동군)에서 승리했다. 반면 김덕영 후보는 강세 지역으로 분류되던 충주시와 제천시에서 근소하게 승리하는 것에 그쳤고, 단양군에서는 이 지역 출신인 무소속 조남성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3.1.10. 충청남도지사[편집]


{+1 [[파일:충청남도 휘장(~1998)_White.png}}} 충청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박중배(朴重培)
174,117
2위

19.18%
낙선
2
조중연(趙重衍)
117,300
3위

12.92%
낙선
3
심대평(沈大平)
616,006
1위

67.88%
당선

선거인 수
1,270,138
투표율
73.77%
투표 수
937,009
무효표 수
29,586

3.1.11. 전라북도지사[편집]


{+1 [[파일:전라북도 구 휘장(1969–1997).png}}} 전라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강현욱(姜賢旭)
319,452
2위

32.84%
낙선
2
유종근(柳鍾根)
653,295
1위

67.15%
당선

선거인 수
1,360,350
투표율
73.65%
투표 수
1,001,959
무효표 수
29,212

민주당 유종근 후보가 모든 시군에서 승리를 거두며 더블 스코어 차이로 압승을 거두었지만, 민주자유당 강현욱 후보도 30%대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특히 군산시에서는 무려 49%를 득표했고, 특히 군산시 갑(군산시 동 지역)에서는 승리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군산시 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3.1.12. 전라남도지사[편집]


{+1 [[파일:전라남도 휘장(~2000)_white.png}}} 전라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전석홍(全錫洪)
277,386
2위

26.49%
낙선
2
허경만(許京萬)
769,538
1위

73.50%
당선
3
최문작(崔汶作)
사퇴


선거인 수
1,504,598
투표율
76.06%
투표 수
1,144,447
무효표 수
97,523

낙선한 민주자유당 전석홍 후보도 26.49%로 호남 지역 치고는 상당한 득표로 제법 선전했다.[33] 특히 고향인 영암군에서는 17,938표를 얻으며 55.67%의 득표율을 올리며 1위를 했다.

3.1.13. 경상북도지사[편집]


{+1 [[파일:옛 경상북도 도기.svg}}} 경상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의근(李義根)
541,535
1위

37.94%
당선
2
박준홍(朴俊弘)
395,496
3위

27.71%
낙선
3
이판석(李判石)
489,999
2위

34.33%
낙선

선거인 수
1,926,274
투표율
76.75%
투표 수
1,478,373
무효표 수
51,343

[경상북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북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정당



격차
투표율
후보
이의근
박준홍
이판석
(1위/2위)
(선거인/표수)
득표수
(득표율)

541,535
(37.94%)

395,496
(27.71%)

489,999
(34.33%)

+51,536
(△3.61)

76.75%
포항시 북구
39.80%
25.66%
34.53%
△5.27
73.57%
포항시 남구
37.09%
27.57%
35.32%
△1.77
72.76%
경주시
38.41%
28.06%
33.51%
△4.90
74.59%
김천시
35.31%
37.11%
27.56%
▼1.80
77.75%
안동시
37.84%
15.77%
46.38%
▼8.54
78.06%
구미시
26.50%
45.13%
28.37%
△16.76
71.25%
영주시
33.55%
14.41%
52.02%
▼18.47
79.36%
영천시
39.41%
22.65%
37.92%
△1.49
77.16%
상주시
38.72%
31.75%
29.51%
△6.97
80.72%
문경시
35.77%
33.98%
30.24%
△1.79
79.55%
고령군
30.59%
39.91%
29.49%
▼9.32
80.00%
군위군
40.61%
26.17%
33.21%
△7.40
83.66%
의성군
41.18%
25.15%
33.66%
△7.52
81.40%
영덕군
46.85%
25.15%
27.99%
△18.86
81.30%
청송군
41.41%
21.75%
36.83%
△4.58
85.81%
봉화군
40.86%
18.46%
40.66%
△0.20
79.56%
영양군
35.83%
24.11%
40.04%
▼4.21
82.66%
울릉군
53.96%
13.38%
32.64%
△21.32
87.79%
경산시
36.06%
28.42%
35.50%
△0.56
72.21%
청도군
71.10%
15.19%
13.69%
△55.91
81.25%
칠곡군
30.97%
36.32%
32.69%
▼3.63
76.00%
성주군
38.82%
32.73%
28.44%
△6.09
82.72%
예천군
41.11%
21.18%
37.69%
△3.42
80.31%
울진군
49.20%
19.23%
31.56%
△17.64
79.02%


처음으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처음부터 접전이 나왔고, 이 선거가 현재까지 치러진 경상북도지사 선거 중 유일한 접전이다. 이유는 그 당시 TK지역에서는 민주자유당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3.1.14. 경상남도지사[편집]


{+1 [[파일:경상남도 도기(1974-1999).svg}}} 경상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혁규(金爀珪)
1,177,397
1위

63.84%
당선
2
김용균(金容鈞)
666,756
2위

36.15%
낙선

선거인 수
2,621,029
투표율
73.05%
투표 수
1,914,773
무효표 수
70,620

3.1.15. 제주도지사[편집]


파일:제주도기(1966-2009).svg 제주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우근민(禹瑾敏)
89,000
2위

32.53%
낙선
2
강보성(姜普性)
66,406
3위

24.27%
낙선
3
신구범(愼久範)
111,205
1위

40.64%
당선
4
신두완(申斗完)
6,961
4위

2.54%
낙선

선거인 수
348,191
투표율
80.47%
투표 수
280,197
무효표 수
6,625

3.2. 정당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득표율[편집]


정당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득표율
정당
득표수
당선인
득표율

6,876,733
5명
33.31%

6,223,015
4명
30.14%

3,933,873
2명
19.05%

3,577,696
4명
17.33%

25,054
-
0.12%

10,488
-
0.05%
선거인 수
31,048,566
투표율
68.37%
투표 수
21,227,449
무효표 수
580,591

3.3. 기초자치단체장[편집]




3.4. 광역의원[편집]


제4대 서울특별시의회
(총 재적 147석)



130석
17석

제2대 부산광역시의회
(총 재적 61석)




54석
2석
5석

제2대 대구광역시의회
(총 재적 41석)





10석
8석
1석
22석

제2대 인천광역시의회
(총 재적 35석)




19석
15석
1석

제2대 광주광역시의회
(총 재적 26석)



25석
1석

제2대 대전광역시의회
(총 재적 26석)



25석
1석

제4대 경기도의회
(총 재적 136석)




63석
59석
14석

제4대 강원도의회
(총 재적 58석)





31석
8석
1석
18석

제5대 충청북도의회
(총 재적 40석)





14석
11석
5석
10석

제5대 충청남도의회
(총 재적 61석)





53석
5석
2석
1석

제5대 전라북도의회
(총 재적 58석)




53석
2석
3석

제5대 전라남도의회
(총 재적 75석)




66석
4석
5석

제5대 경상북도의회
(총 재적 92석)





56석
3석
2석
31석

제5대 경상남도의회
(총 재적 94석)




58석
3석
33석

제5대 제주도의회
(총 재적 20석)




9석
3석
8석

4. 선거 이후[편집]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정계 재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당장 15대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 크게 4가지로 압축되는데, '1)충청-경북 지역 출신 민자당 의원들의 동요 및 자민련과의 연대 가능성, 2)민주당 내 이기택-김대중의 불안한 동거, 3)김대중-김종필 양김의 내각제 연대 가능성, 4)정치권내 세대 교체론'이다.

치명타를 입은 YS 정권와신상담(선거일 이틀 후에 서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진다.)에 나서 그 해 여름 8.15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잔재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데 이어 겨울에는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고 대형 비리와 쿠데타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면서 국민적 지지도를 회복[34]하는데 성공했으며 당의 전반적인 쇄신을 위하여 예전 5, 6공 색을 지우기 위해 노태우와 함께 만든 민주자유당의 이름을 YS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인 '신한국'을 본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고치기에 이른다.[35] 그로 인해 신한국당은 다음해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로 갈라진 야권 분열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대구의 참패 속에서도 나머지 영남지역과 강원, 제주, 특히 수도권의 승리로 1당 유지에 성공하는 등, 레임덕은 없다라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결국 1996년 크리스마스 노동법 날치기, 한보사태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됨과 동시에 이인제의 경선 불복, 1997년 외환 위기라는 여러 최악의 사태를 겪으며 정권을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 선거로 인해 3당 합당으로 소멸된 것 같았던 지역 구도는 완벽하게 부활했으며, 김대중은 정계 복귀와 대선 승리로 가는 큰 길을 열게 된다.

당선된 기초단체장 중 현재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 중인 인물로는 오규석 부산 기장군수 (전 기장군수), 이시종 충북 충주시장 (전 충청북도지사), 엄태항 경북 봉화군수 (전 봉화군수), 김두관 경남 남해군수 (현 경남 양산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 등이 있다.

5. 선거 예측조사의 등장[편집]





MBC에서 국내 최초로 선거 예측조사 결과[36]를 개표 시작 전에 발표하였다. SBS에서도 선거 전날에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오후 6시에 발표했으며 실제 결과 중 당선인은 정확하게 맞췄고,[37] 득표율은 조금 틀렸다. 이런 사전예측조사는 그 이전까지 선거결과를 알려면 밤을 꼬박 지새며 보내야한다는 점 때문에 개표 방송을 시청할때마다 불편함을 겪던 시민들에게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다. 다만 이전까지 출구조사를 시행한 전례가 전혀 없었기에[38] 선거법 위반 논란이 생기기도 했으나, 결과가 정확하게 나온데다가 이미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일본에서 투표자들을 상대로 예측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바로 합법화되었다. 하지만 다음해 총선부턴…본격적인 총선 사전 예측조사 실패의 저주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1]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회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2] 그래서 이따금씩 개헌과 함께 단골로 논의되는 사안이 대선, 지선, 총선의 통합인데, 이러한 주장은 지선을 처음부터 일부러 총선과 격년으로 교차시킨 것에서 이유에 비춰보면 당위성이 떨어진다. 이유는 2년 간격의 지선과 총선이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짙어 그 자체로 강력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재보궐선거를 보면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큰 선거에 묻어가는 선거는 같은 정당을 찍는 줄투표 현상이 심하다. 그래서 총선과 지선을 통합하면 줄투표 현상이 더 심해지고, 양당 체제와 동서 지역갈등도 보수 vs 민주계로 더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4년간 중앙(국회)와 지방이 같은 속도로 가면 특정 정당이나 정부에서 민심의 대이반이 일어날 대형사고가 터져도 중앙과 지방에 같은 정당의 사람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어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지만, 2년 간격으로 교차시키면 사고가 터지고 곧 있을 선거에서 민주적 심판이 가능해진다. 줄투표 현상을 막고 민주적 정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선거 두 번 세 번 하는 혈세 낭비라고 매도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3] 미국이 대선과 총선 지선을 동시에 하면서도, 하원의원 임기를 2년, 상원의원 임기를 6년으로 하여 중간선거를 강제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4] 다만, 대통령 임기가 5년인 것 때문에 2로 끝나는 해마다(대선-총선, 혹은 대선-지선) 줄투표가 발생하는 것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문제이다. 특히 2032년에는 22대 대선 6주 후에 24대 총선이 열릴 예정이다.[5] 본래 제13대 대통령 선거 공약과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총선 참패로 후유증을 앓은 민주정의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제2당의 지위를 누리던 평화민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선거 공약과 함께 무산되었다.[6] 참고로 산하에 있는 기초자치단체(중구, 남구, 동구, 북구, 울주군)의 장은 부구청장이나 부군수가 대행으로 맡았다. 이외에도 지방의원의 경우 광역의원은 경상남도의회의원 중 종전의 울산시를 지역구로 하는 의원들이 그대로 맡았으며, 기초의원은 종전의 울산시의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 해당되는 곳의 기초의원을 맡았다. 김두겸 울산광역시장도 민선 1기 경상남도 울산시의원을 지내다가 울산광역시 남구의원으로 신분이 전환됐던 적이 있다.[7] 2012년에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는 차기 지방선거인 2014년 지방선거까지 약 2년 정도 남아서 201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치러 유한식 초대 시장(세종시 출범 이전까지 충청남도 연기군수로 재직하였으나 세종시장 출마를 위해 사퇴하였다.)에 한해 임기가 2년이 되었다. 그러나 통상적인 재보궐선거가 당선 익일에 바로 임기를 시작하여 당선인 신분을 거치지 않는 것과 달리 세종시는 완전히 신설되는 신규 광역자치단체라서, 초대 시장의 임기가 2012년 7월 1일부터 시작되어 재보궐선거 당선자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당선인 신분을 거치는 등 일반적인 재보궐선거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8] 임기 초인 1993년에는 지지율이 80%를 상회했고, 1994년 상반기까지도 지지율이 50%대에 달했다.[9] 울산광역시의 경우 이 때는 경상남도의 기초자치단체였다.[10] 이 때의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진짜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박찬종은 5선 의원에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고, 정원식은 선출직 경험은 없었지만 교육부장관과 국무총리를 했었으며 조순은 초선 의원과 경제부총리를 지냈었다. 셋 다 쟁쟁하지만 특히나 박찬종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거물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보다 경력이 적은 조순에게 패한 것.[11] 자세한 사건 내용은 정원식 문서로.[12] 아무래도 젊은 층(부재자투표 상당수가 군인, 경찰 등이었으니)의 표심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부산시장에 출마한 노무현 역시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았으나 지역 표심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어쨌든 박찬종은 예전부터 활동하던 기성 정치인이었지만 여당 내에서의 정풍 운동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 양김 단일화 촉구 등을 벌였고 정치인 치고는 무균질 정치인 콘셉트로 남양유업 우유 브랜드인 '다우'의 광고도 찍으며 신선한 이미지로 주목을 받아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13] 일반 시민 자원봉사자가 아이디어를 냈다는 서울 포청천이라는 별명과 당시 정계 복귀를 노리던 김대중 전 총재의 적극적인 지원 유세도 조순 후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14]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4대 대통령 선거 모두 서울특별시에서는 김대중이 이겼다.[15] 반대로 보수 계열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대승을 거둔 선거라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17대 대통령 선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021년 재보궐선거가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서울특별시는 기본적으로 민주당계 우세 지역이긴 했다. 당장 2010년대 이후 전국 단위 선거에서 보수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우세를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정확히 따져보자면 2010년부터 4차례의 지방선거(2010, 2014, 2018, 2022), 3차례의 대통령 선거(2012, 2017, 2022), 3차례의 국회의원 선거(2012, 2016, 2020) 중 보수 정당이 서울특별시에서 이긴 사례는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오세훈의 신승과 2021년 재보궐선거 오세훈의 압승,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윤석열의 신승,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오세훈의 압승 딱 4번뿐이었다.[16] 서울특별시 구청장 24:1 그나마도 더불어민주당서초구청장 후보로 이정근이 아닌 구의원 출신을 냈다면 이겼을 거라는 얘기가 나왔다. 왜냐면 그 선거에서 서초구 소속 시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이 싹 털어갔기 때문이다.[17] 물론 3당 합당 이후 민주계의 대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정계와의 권력 투쟁 끝에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잡으면서 반 YS 정서가 퍼진 것이라는게 정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때도 역대 TK의 보수 정당 득표율 중 가장 적은 득표율을 얻었다.[18] 민주당 이봉모 후보가 후보 등록 직전 사퇴했다. 이 후보의 사퇴는 일시적으로 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간 야권 연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인천광역시, 경기도 등 수도권에서 야권 연대론으로 양 야당간 힘싸움이 두드려졌다. 그러나 결국엔 두 지역 모두 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각자 후보를 냈고 그 결과는 자연스럽게 민주자유당의 당선.[19] 여담으로 이 이인제가 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의 제1공신(…)이 되니 역시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20] 모든 지역이 동등한 권리를 나눠갖고 각자의 권리를 바탕으로 수평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 요체인 발언이었으나, 사실상 속내는 영남에 맞서 호남+충청 연대를 하자는 것 아니냐며 꺼져가던 지역 주의를 다시 활활 피웠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듯 민주자유당에서 막 쫓겨나듯 탈당한 김종필은 충청도가 핫바지냐는 일명 충청도 핫바지론(…)을 들고 나오며 지역 감정을 부채질했다.[21] 구체적으로 따진다면 50대와 60대에서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밀렸고 30대와 40대층에서도 밀리면서 낙선했다. 그나마 20대층에서는 노무현이 크게 앞서기는 했지만 아무리 청년 유권자층이 많았다해도 역부족이었다.[22] 심지어 이부영, 김정길의 선거 유세장 발언 중엔 DJ와 JP는 권력욕에 눈이 멀었으며 정계에서 퇴진시켜야 한다는 극딜 수준의 발언도 있었다. 그만큼 김대중의 지역 등권론이 불러온 후폭풍이 여러 의미로 대단했던 셈. 결국 이 둘은 선거 후 김대중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민주당에 남았고, 이부영은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의 유일한 민주당 당선인(강동구 갑)이 되었다.[23] 이후 김대중에 대한 반감 등으로 이부영, 제정구 등은 조순 전 서울시장과 함께 1997년 한나라당 창당에 합류하게 된다. 다만 노무현, 김정길 등은 한나라당에 가지 않고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24]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남에서 민주자유당 득표율은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아주 낮진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에서는 20%~30%의 여당 고정표가 꼬박꼬박 나왔고, 전라북도에선 지역구에 따라서 당선권에 상당히 근접하기도 했다. 특히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전라북도에서 2명의 당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영남, 부울경에서 선전하는 모습을 당시의 민주자유당이 각각 호남, 전라북도에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강현욱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간판을 내걸고 군산시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호남 유일의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었던 강현욱은 1999년 말 탈당해 이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였으며, 호남의 보수 성향 인사들 대부분이 새정치국민회의로 떠나버렸다. 여기에 당의 호남에 대한 전략적 무관심마저 겹치면서 한나라당 시기에는 두 자리수 득표율을 올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전락했다.[25] 3년 뒤 치러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였던 신정 후보가 한나라당 전광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뒤에는 4를 거치면서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권의 기초자치단체장이 안나오다가 마침내 20년 뒤인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가 자유한국당 이양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다.[26] 김두관은 이후 경상남도지사, 양산시 을 국회의원까지 지내게 된다.[27] 김현옥은 서울시장 이전에 부산시장 경력이 있다.[28] 상단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알겠지만 화성시, 용인시 등 현재 경기도의 주요 대도시가 아직 시로 승격되지도 않은 상태였고, 1기 신도시들도 막 입주가 끝나가던 시기였던 만큼 서울특별시와의 민심 동조화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1기 신도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분당구, 일산, 평촌 모두 보수 정당이 우세했다.[29] 당시 안양은 이인제의 지역 기반이었다.[30] 특히 보수세가 강했던 경기도 북부 및 외곽 농촌 지역에서 두 후보가 많은 표를 잠식했다. 지역 자체의 보수세도 있었지만 김문원(의정부시), 임사빈(양주시) 후보의 연고지도 북부였기 때문.[31] 김대중 전 이사장을 비롯한 동교동계가 이종찬을 지원한 반면, 민주당 장경우 후보는 이기택 전 총재를 등에 업고 선출되었다.[32] 결국 이 경기도지사 선거가 큰 영향을 미친 끝에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창당하게 된다.[33] 이 기록은 27년 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전직 3선 국회의원 출신인 국민의힘 이정현 후보가 무려 18.81%라는 득표를 얻어 선거비용 보존마지노선인 15%를 훌쩍 넘겼다. 특히 지역구였던 순천시와 고향인 곡성군에서는 각각 31.98%, 40.97%를 얻었다.[34] 갤럽 직무 수행 긍정 평가 기준, 3년차 2분기 28%에서 4년차 1, 2분기 42%.[35] 하지만 2년 뒤, IMF 사태가 터지고 김영삼 본인이 사실상 팽당하며 이번에는 당명이 한나라당으로 또 바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명을 고친 사람이 바로 민주당 후보로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던 조순. 민주당 소속이었다가 이회창이 있는 신한국당과 합당했다.[36] 엄밀하게 말하면 출구조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처럼 투표장에서 투표하고 나온 사람들을 직접 조사한 게 아니라 전화로 투표 여부를 확인한 뒤 그 결과를 물어보는 방식이었기 때문.[37] SBS 여론조사의 경우, 충북지사 당선인이 바뀌었다.[38] 사실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4대 대통령 선거한국갤럽에서 투표자 조사를 시행했으나 선거법 위반사항이라 발표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1987년 13대 대선때는 발표를 하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해외 언론을 통해서였고 국내 언론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 1992년 14대 대선때는 MBC를 통해 발표가 되기는 했으나 이미 개표가 중반일때 발표된거라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측조사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