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차 서하 약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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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차 서하 약탈전
一 - 六次西河掠奪戰
1st-6th Plunder over Xihe

시기
기원전 394년 ~ 기원전 389년
장소
위나라 서하군(西河郡)
(오늘날의 산시성(섬서성)(陕西省) 웨이난시(渭南市) 화인(현급)시(华阴市) 이북, 옌안시(延安市) 이남, 황하(黃河) 이서, 뤄허(洛河, 과거의 낙수洛水) 이동 지역.)
원인
중원 최강국이던 위를 경계한 조선(朝鮮)의 흉노를 통한 간접적 견제 시도
교전국
흉노匈奴
위魏
지휘관
지휘관 미상
우대장†[1]
오기
공숙좌
병력
~기원전 393년
흉노군 1만여 명

~기원전 389년
흉노군 2만 7천여 명
위군 여 명
피해
연도별 상세내용 참조
연도별 상세내용 참조
결과
오기의 실각, 흉노 우대장의 전사, 위의 장성 착공
영향
위의 서진 일시 중지, 영수 전투에 영향

1. 개요
2. 배경
2.1. 조선의 사정
2.2. 흉노의 사정
2.3. 위나라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기원전 394년, 1차 약탈전
3.2. 기원전 393년, 2차 약탈전
3.3. 기원전 392년, 3차 약탈전
3.4. 기원전 391년, 4차 약탈전
3.5. 기원전 390년, 5차 약탈전
3.6. 기원전 389년, 6차 약탈전
4. 결말
5. 전후처리



1. 개요[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조선(朝鮮)의 사주를 받은 흉노가 6년 간 매해 위(魏)의 서하군(西河郡)에 약탈을 시도하였다. 흉노 측이 큰 소득을 거둔 해도, 위 측에서 선방한 해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방어자인 위 측이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상당한 손해를 본 상황에서의 피로스의 승리였으며, 흑막 조선은 그 사이 영수 전투를 통해 원하던 바를 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2. 배경[편집]




2.1. 조선의 사정[편집]



기원전 394년. 삼진회맹에 조선후 기식이 참석할 당시 그녀의 예상보다 빠른 귀국 탓에 밀담을 시도했다 허탕을 쳤던 조나라의 상방 공중련이 작년부터 준비하여 곧바로 밀사로써 조선에 당도한다. 공중련은 본론에 앞서 삼진관계의 균열을 알렸다.[2]
조선 또한 위나라라는 조나라와 공통의 적을 두고 있으니 동맹을 청한다는 속뜻을 읽은 기식은 일단 비공식적으로는 관계를 끊지 않은 중산국의 향방 및 참여할 경우의 이득에 대하여 질문하였고, 각각 후방에 적국을 둘 순 없고 조는 중산과 동맹이 불가하니 쳐 없애야 한다[3]와 애초에 영유권이 불안정해 계륵이었던 대와 영수에 기거하던 악씨 일족이라는 답을 얻었다.[4]
범용한 자라면, 아니 비범한 자라도 여기서 더 요구를 할 수 있을 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조선 세후 기식은 협상의 여지를 놓치지 않고 감수하는 위험에 걸맞게 고와 무원을 추가로 요구하였다. 무원이 조나라에 귀부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인데다 중산령, 그 이상을 병탄하면서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많다는 공중련의 판단 하에 이는 받아들여졌다.[5]

2.2. 흉노의 사정[편집]



일련의 사건과 당사자의 지위 및 위상 등으로 오기를 불안하게 여겨 배제를 획책하는 인물이 그것도 위나라에 있음을 공중련에게 듣게 된 조선은 이를 기회로 여기고[6] 위나라의 전력 소모를 통한 견제를 획책하게 된다.[7]
이에 따라 조선은 중산국에 몰래 물자를 지원하고, 위나라 서하군을 유목민을 사주해 견제하여 오기의 명망과 신뢰도 실추까지 노리게 되는데 그 유목민으로써 선택된 것이 흉노였다.
소식이 빨랐든 눈치가 좋았든 흉노는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사주 비용의 4배와 동호를 흉노의 세력권에서 눈에도 안 보일 정도로 멀리 이주시켜달라는 상당한 요구조건을 제시하는데, 이미 이 시점에서 많은 공을 들인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8]

2.3. 위나라의 사정[편집]



일전에 상방 전문의 임명 당시 오기는 왜 자신이 상방이 아니냐고 전문에 다짜고짜 따진 이력이 있었다.[9] 이후 그는 위의 동부에서 서하로 옮겨져 서하군을 담당하게 되면서 현지 병사들의 충성에 가까운 인망을 얻게 되는데, 이는 위무후와 공숙좌의 의심을 사게 되는 단초가 되면서 공숙좌가 필요하다면 오기를 처형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한다.[10]
물론 오기 쪽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오해 내지는 의심이 쌓여가던 중이었고, 당시 서하를 계속 깔짝이던 진나라 군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지라 다른 쪽에는 신경이 꺼져있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북쪽에서 오는 위협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매우 기나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위나라의 그 누구도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3. 전투의 전개[편집]



3.1. 기원전 394년, 1차 약탈전[편집]



한 해에 한 번만 약탈을 할 생각이었던 선우는 그래도 사주받은 게 있으니 전사 1만 가량으로 들이쳐 서하를 들쑤셨다.
상기한 이유로 유목민의 급습에 대해서는 완전히 신경을 끄고 있었던 서하군 사령부였기에 선우는 간단하게 일대를 들쑤시다 못해 위나라에서 최강의 병사들인 서하군을 2천명이나 참살하였다.
일단 선수를 빼앗긴 오기였지만 피해의 확산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움직이고 알아챈 이상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시행하며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대비하였다.
비록 오기를 의심하고 있던 위무후였으나, 이번 사태의 경우 여태껏 잠잠했던 유목민들이 갑자기 행동을 개시한 점이 참작되었다. 다만 공숙좌는 오기의 기량을 근거로 의심을 지우지 않았고 이를 모함하였지만 군문의 경험이 풍부하였던 위무후는 도리어 한번 병력 운용을 해 볼 것을 제안하면서까지 반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3.2. 기원전 393년, 2차 약탈전[편집]



작년의 사태에 대비하여 오기는 일단 걸리면 끝장낼 각오로 흉노에 대한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고, 반대로 흉노 측은 언제나처럼 사주받은 일을 하며 겸사겸사 얻을 부수익에 대한 기대로 부푼 채 크게 다르지 않게 행동하였다.
그 결과 군대로써의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데이면서 도망친 흉노였지만, 오기의 입장에서도 흉노의 속도가 예측한 것보다 빨라 생각보다 죽이지 못하였다는 점에 분개하였다.
흉노의 선우는 예상보다도 철저한 대처에 의한 나름 큰 피해로 인하여 당황했지만, 자존심 문제까지 대두되면서 일단 다음 해에도 침공을 결정하였다.[11]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이 해의 성과에 대해서 흉노는 조선에 거짓 보고를 하는데, 그 결과는 다음 해에 돌아오게 된다.
위무후는 이번 성과에 만족하면서 의심을 약간 풀었고, 공숙좌는 승전을 깎아내릴 수가 없어 달리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3.3. 기원전 392년, 3차 약탈전[편집]



들어오는 정보를 토대로 흉노가 작년에 거짓 보고를 했음을 확인한 조선, 특히 담당자였던 대사마대장군 고거는 격분하여 이를 흉노에게 따졌다.
선우는 잘못을 사신에게 뒤집어 씌울 심산이었지만[12] 그 사신은 선우와 흉노를 대표했음을 지적당하며 이를 바탕으로 침공 빈도수와 각각의 병력 규모의 증강을 요구받았다.
정황 상 어지간히 받아먹었는데다 이 문제가 예하 부족들에게 흘러들어갔을 때의 위신 실추와 파생되는 여파를 감당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선우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하의 대비 태세는 작년과 동일했으나, 선우 또한 반강제적으로 3배 가량으로 증강된 침공군의 물량 탓인지 별다른 대책 없이 작년처럼 움직였다가 똑같은 꼴을 겪고, 두번째에서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서하군을 철저히 피하고 민가만을 노리고 빠지는 식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오기 입장에서 흉노의 약탈이 이러한 양상으로 변하면서 서하군의 피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서하 민간인과 군과 민간을 가리지 않는 물자를 잃고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으면서, 동시에 흉노에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한 점 때문에 분노하며 1만 9천여의 증원을 중앙에 요청한다.[13]
위무후는 자신이 보기에 터무니없이 많은 병력을 요구한 오기에게 열받아서 역모까지 의심하며 호출할 생각이었으나 공숙좌가 보기에 그건 아니었다[14]는 의견에 역모 혐의는 호출하여 확인하는 것으로 보류하였다.
이에 오기는 깨끗이 승복하여 안읍에서 위무후를 알현하여 북방 유목민의 위협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위무후는 납득하였으나 내부 사정 문제로 1천 2백의 증원만을 허용하였다.[15]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과 위나라의 내부 사정 문제를 모두 파악한 오기는 다시 서하로 떠나기 전 공숙좌에게 빚을 하나 졌다는 말을 남겼다.[16]

3.4. 기원전 391년, 4차 약탈전[편집]



그렇게 흉노는 이번 해의 첫 침공에는 변경된 방침으로 인한 수확을 그것도 대대적으로 거두었지만, 두번째에는 지금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예상 퇴로마다 포진해 있는 서하군 때문에 일단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고 이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흉노의 존재 자체는 여전히 이에 대비해야 할 대상이 되어 원래 기획했었던 진나라로의 진공 자체가 무기한으로 보류되었다.
이런 문제를 납득한 것과는 별개로 화가 났던 위무후는 이번에는 오기에게 책임을 물어 녹봉, 계급, 봉지 일부 등을 몰수했고, 이를 오기의 요청으로 공을 세울 때에 되돌리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공숙좌는 이에 만족했는데, 이 조치를 결정한 지분이 절반에 달할 정도로 이번에는 신경을 쓴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본인 입장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긴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위무후와 오기는 성격 상의 결함 때문에 서로 맞부딪히기 쉬웠고, 이는 능력은 몰라도 태도 때문에라도 이번에는 위무후에게 의심이 꽤 스미는 결과가 되었다.

3.5. 기원전 390년, 5차 약탈전[편집]



계약 사항을 가급적 준수할 필요가 강제로 생겨버린 흉노였지만 작년 말쯤의 서하의 방비 태세 때문에 매우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어 이전까지의 성과에 비하면 보잘것 없어도 체면치례는 확실히 되는 정도의 성과를 거두고 물러났지만, 이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기민해진 서하군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위나라의 강역을 확실히 벗어나서야 쉴 수 있었다.
사정이 악화되어가는 건 서하 쪽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말해서 이렇게 해서 유목민에게 입는 피해를 줄일 수는 있어도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 모두를 앞으로도 계속 전시태세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문제를 봉쇄하기 위하여 오기는 추가적인 병력이나 방비에 사용할 재정의 지원을 다시금 중앙에 요청하였고, 이는 다시금 위무후의 호출로 이어졌다.
공숙좌는 사안이 사안인지라 의견을 낼 수 없었지만 위무후에게 신중할 것을 청했고, 근본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위무후는 명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에 오기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또다시 순순히 응하였다.
오기의 필사적인 설명과 해명을 들은 위무후는 전적으로 오기 책임이긴 하지만 본인의 책임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오기를 파직시킨 뒤 서하군수를 공숙좌로 교체한다. 공숙좌는 이로써 오기의 위험성이 소멸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족하였다.[17]
한편, 이대로 가면 본 이득보다 비전투소실이 더 늘어난다는 결론이 나온 흉노는 두 번째 침공을 단념하였다.

3.6. 기원전 389년, 6차 약탈전[편집]



막 서하군수로 부임한 공숙좌는 본인이 우려했던 대로 오기의 위광이자 그림자부터 어떻게든 걷어내야 할 상황임을 파악하고 초전에 전공을 세워 이를 통해 길들일 마음을 먹었다.
이미 매우 열정적으로 오기에게 사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철저한 인수인계를 계획했던 그녀는 계획대로 부임한 지 첫 전투만에 거짓말 같이 흉노군을 유인하여 수공까지 동원하여 척살하고 그 와중에 우대장까지 베어버리는 성과를 거둔다.
이 한 방으로 공숙좌는 본인이 원했던 서하군 장악을 순식간에 달성하였으며, 생각보다는 얕았지만[18] 어쨌건 오른팔을 잃은 흉노 선우의 활동에는 완벽하게 차질이 발생하였다.
이후 공숙좌는 문제의 원천 봉쇄를 위하여 서하에 장성을 쌓을 것을 위무후에게 요청하였고, 나라의 사정을 감안해 이에 대한 지원 대신 해당 방면의 재정에 대한 전권을 받게 된다. 이로써 6여년에 걸친 흉노의 서하 약탈은 막을 내렸다.

4. 결말[편집]



사실상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기의 실각을 비롯한 위나라의 국력소진[19]을 유발하고자 했던 조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까지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공숙좌가 오기를 거의 온전히 이어받은 인물로 다시 태어나면서 원래 목적을 이룬 것의 빛이 바란 것이었고, 공숙좌는 위무후의 인척에다가 못해도 반쯤은 오기의 다음 세대 인물이었기에 기획했던 입장에서는 알게 모르게 혹을 떼고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목표했던 소기의 성과 중 상당수는 후일 영수 전투에서 벌충하게 되지만, 어쨌건 당시로써는 조선은 공숙좌라는 새로운 위험인물을 맞이한 셈이 되었다.
위나라는 영문도 모른 채 북방의 위협을 맞이했으나 6년여에 걸쳐 이에 대응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당시 최중요 전선이었던 서하에 대한 장성의 필요성을 인지했고, 동시에 서하군 지휘부의 예상 이상으로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달성하며 내부적으로 공족의 권위가 상승하였다. 무엇보다도 작중 당시 위나라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여튼 오기도 살아있고, 공숙좌가 오기 못지않은 인물로 떠오르면서 추후 위나라의 미래 또한 반석에 오른 격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서하 방면의 활동에 제약이 생겼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고, 중산을 조와 함께 멸국시키면서 얻은 결론으로 대신에 제나라를 손봐줄 생각을 굳힌 위무후는 자신이 제나라를 향해 친정하려던 순간, 동시에 조-조선이 구 중산령을 치는 대사태[20]를 맞게 되었다.

5. 전후처리[편집]


위나라, 조선, 조 등은 이 사건이 종료된 지 얼마 안 가서 영수 전투의 당사자들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이 사건으로부터의 전후 처리가 사실상 그 뒤로 미루어지는 결과로 돌아오면서 별다른 조치나 계획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흉노 또한 우대장까지 전사하는 피해를 입으면서 인적 자원에는 명백한 타격이 있었으나, 나름 계약을 완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는지 후일 영수 전투의 결과로 누번이 조선령을 약탈하게 되자 이들을 "관리" 하는 일을 맏는 대가로 관시를 2배로 약속받아 장기적인 무역 수입을 보장받았기에 내부 안정에 그 만큼의 추진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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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흉노 내 서열 7위[2] 대충 위무후가 오르면서 이전 대와 다르게 삼진을 아랫나라 대하듯 여긴다는 내용. 한나라 또한 이 부분에 있어 정나라로 인해 발생한 월경지 연결문제까지 겹쳐 어느 정도 조와 공모를 한 상황이며, 이 때문에 삼진회맹 당시 한후는 아무 생각이 없는 척 하며 본심을 숨기고 있었다.[3] 딱히 오랑캐라서라기에는 이민족이 중원계로 포함된 여러 사례 때문에 생각이 비교적 열려있었다.[4] 이미 삼진회맹 때 위무후는 악양을 소개하면서 기식의 반응만으로 그 피붙이가 조선에 있음을 눈치 깠고, 이는 곧바로 조선이 악자를 기용하는 데 있어 족쇄로 돌아옴을 의미했다. 위와 척을 지면 악자의 일가친척들이 위험하다는 뜻이었고, 때문에 악자를 중용하는 문제 때문에라도 이들은 조선에게 절실했다.[5] 기식은 오기가 서하에 부임했다는 점을 통해 공식적인 답이 아닌 그 경우 동쪽이 빈다는 추론이라는 우회적인 뉘앙스의 발언을 이용해 공중련이 제안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으로 인지하도록 하였다.[6] 원 역사적으로는 오기와 위무후가 이로 인해 결국 충돌하여 오기가 초나라로 튈 정도였고, 여기서도 막 의심이 서로 쌓여가던 상황이었다. 다만 공중련은 부족한 정보 속에서 최대한 추론한 것을 알려준 셈이라 이 시점에서 아직은 그렇게까지 관계 악화가 진전되지 않았다.[7] 추가로 조선상 예가 부족한 정보에 대한 이의제기를 통하여 예비책과 확실한 정보에 의거한 내분 조장이라는 결론을 내게 된다[8] 당시 나름 어수선했던 흉노의 내부 사정을 고려하긴 했지만 선우는 일단은 사실상의 태업을 할 심산이었다. [9] 군사분야는 모르겠는데 너 정치 나보다 잘할 수 있느냐는 뉘앙스의 반박에 곧바로 무례를 사과하긴 했지만 말이다. [10] 내심 오기만은 못해도 일구어 놓은 것들을 유지할 자신감이 컸던 것도 있었다.[11] 이때 흉노의 전사들(이라고 해도 그냥 선우 직할령의 성인 남성) 모두 6만 6천명 가량이었지만, 애초에 수익을 얻으러 가는 것이 목적인 만큼 총력을 다하기 보단 우선 침공 규모를 유지하기로 생각을 굳혔다.[12] 그 죄를 물어 목까지 베었다[13] 주둔지를 바꾸면 정착의 진척도에 차질을 줄 수도 있었고 성을 쌓자니 예산이 문제였다.[14] 막말로 역모를 생각하고 있으면 거기 있던 6만여를 가지고 수도도 가까우니 들이치면 되었었고 그 오기가 역모를 생각한다면 사전에 조짐조차 줄 리 없다는 논리였다. 설령 불러서 죽이더라도 최소한 차후 진상이 밝혀질 때 명예 회복의 여지는 남겨두려던 의도도 있었지만.[15] 원래는 2000가량 까지였지만 여력을 모두 쓸 수도 없긴 하였다.[16] 이때 곤란한 점이 있다면 뭐든 말해달라는 언질을 주는데...[17] 그리고 부임의 사전작업으로써 오기를 전의 언질을 빌미로 5개월에 걸쳐 따라다니며 그가 쌓은 모든 것들을 전수받았다.[18] 다른 어떠한 변수가 될 특이사항이 있는 게 아닌 일반적인 우대장이었다는 뜻이다.[19] 메타적으로는 가능하다면 아예 원역사적 상황[20] 당시 중산령은 서문표가 주둔중이라지만 태자 위앵이 영지로 받아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