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상하이 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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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배경: 훙챠오 공항 사건
3. 전투의 시작
4. 우쑹 전투(오송 전투)
6. 항저우 만 상륙작전
7.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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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상하이 사변 전황도


1. 소개[편집]


1937년 8월 13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총 3개월에 걸쳐 진행된 중일 양국의 전투. 쌍방 합쳐 백만명 가량의 대병력이 투입된 전투이며(그중 80만 이상이 중국군이긴 했지만) 만주사변 정도의 국지전으로 여겨졌던 중일전쟁이 양국의 운명을 건 대전쟁으로 확대된 계기이다. 물론 상하이를 일본군이 침공하지 않았어도 중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기에 만주사변이나 러허사변처럼 지리멸렬하게 끝나진 않았겠지만.


2. 배경: 훙챠오 공항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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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국민혁명군의 기관총 진지

1937년 7월까지만 해도 교전이 벌어진 곳은 베이핑과 톈진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 지방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이미 일본군은 화중과 화남에 전장을 확대하기 위해 상하이, 칭다오 진공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 3만, 중국 전체에 9만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일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당연히 중국 내부 일본인들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국군이 한커우의 일본군 조계지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고노에 내각은 중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8월 19일까지 철수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그런데 1937년 8월 9일 저녁,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 소속 오오야마 중위가 부하 한명을 대동하고 중국군의 경비를 살피겠다는 구실로 중국군 비행장인 훙챠오 공항에 무단으로 진입하려 했다. 오오야마 중위는 중국군 경비병의 제지를 무시하고 권총을 발사하며 난동을 부리다가 부하와 함께 사살되었는데 이를 오오야마 사건, 또는 훙챠오 공항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라 부른다. 일본군은 이것이 상하이 정전협정 위반이라면서 사건의 공동조사와 중국군 보안대 철수를 요구했다. 하지만 상하이 경비사령관 장즈중에게 상하이의 일본군이 1만명으로 증강되었고 일본군 제3함대도 증강되었으며 사세보의 2함대도 상하이로 오는 중이란 잘못된 보고를 받고 경악한 장제스는 일본군의 요구를 조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상하이는 장제스의 정치적 거점임과 더불어 난징 정부의 중핵으로 장제스가 지난 10년간 투자를 한 중국 금융, 자본, 산업의 중심지로 잃어서 안되는 요충지였다. 또한 상하이를 잃으면 수도인 난징도 위험해질 것이고 실제로 이후에 그렇게 되었다. 장제스는 즉각 상하이의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병력을 증원했다. 장제스의 일련의 조치들은 상하이 공동 조계 20킬로미터 이내를 비무장 지대로 정한 정전협정을 위반한 것이었으나 이미 일본이 정전협정을 깬 판에 장제스가 그것을 지킬 리는 만무했다.


3. 전투의 시작[편집]


일본이 상하이에 2개 사단을 증파했단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자신의 독일식 정예 87사단과 88사단, 2개 포병 연대 등을 상하이에 배치하여 수비군을 5만명으로 증강하고 방어선을 꾸렸다. 일본군의 우회상륙에 대비해 위산과 우쑹에도 병력을 배치했다. 긴장한 상하이 조계지 대표들은 8월 10일에 중일 양측에 평화를 호소했지만 상하이 시장 대리 우톄청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은 중국군에게 방어시설을 철거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중국은 일본의 요구를 묵살했다. 8월 13일 오전, 일본 해군 육전대 1개 분대가 도발을 감행했고 같은날 오후 2시부터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하여 자베이를 비롯한 상하이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5천명이고 중국군은 5만명으로 수적으로 중국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장제스는 이런 수적 우세와 전 군사고문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건설한 젝트 라인을 믿고 일본군의 증원군이 오기 전에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군을 섬멸하려 했다. 새로운 고문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젝트 라인이 너무 구식인데다가 미완성이라 일본군에게 역포위당할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상하이에서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반격하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장제스는 상하이 주둔군을 9집단군으로 개편하고 장즈중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는 기갑부대, 해공군을 총동원하고 어선과 상선을 자침시켜 양쯔강 입구를 봉쇄하여 일본 해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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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14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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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8월 14일자 중국 상하이 시가지

8월 14일 오전 7시, 미국인 고문 클레어 셔놀트의 지휘를 받는 중국 공군이 일본 해군 육상 기지와 물자 직접장, 일본군 3함대 함선들을 폭격했지만 악천후와 기술 미숙으로 큰 효과는 보지 못했고 중국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다. 해안가의 포대와 중국 해군 군함들도 포격을 가했지만 성과는 신통찮았다. 어쨌거나 중국의 반격에 놀란 일본도 공격을 준비했다. 타이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출격하여 난징, 항저우, 광더, 난창, 우한을 폭격했다. 거기에 일본 해군 항공모함 3척이 도착하여 가세함으로 많은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공군도 반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타이완까지 날아가 폭격을 가행했다. 8월 15일에 중국군의 독일식 정예사단들이 반격에 돌입했다. 거기에 3개 사단이 증원되어 7만명의 중국군은 바쯔차오를 점령한 일본군을 축출하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8월 18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단이 격화되는 전투 양상을 우려하여 전투 중지를 요청했지만 중일 양국이 거부했다. 중국은 만약 조계지에 일본군 고사포가 설치되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대표단에게 경고했다.

같은 날 장즈중이 직접 반격에 나서 일본군을 좁은 구역에 몰아넣었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화력 부족으로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으로 화력면에서 매우 우세했다. 덕분에 전세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장시성 주석 슝스후이는 난징을 시찰하고 병력 부족과 화력 열세로 공세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신임 군정부장 천청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상하이에서 적의 전력을 양분하여 맞서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 또한 화북으로 가야 할 주력부대들을 상하이로 보냈다. 일본이 일찍이 파견한 상하이 파견군 2개 사단과 일본 해군 함정들도 잇달아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상하이엔 무려 쌍방을 합쳐 1백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집결하게 되었다. 한편 8월 21일 중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3백명의 군사 고문단을 받아들였다. 또한 1억 달러의 차관과 1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들도 지원받았다.


4. 우쑹 전투(오송 전투)[편집]


8월 23일 우쑹 해안가에 일본군 2개 사단을 태운 일본군 함대가 나타났다. 일본군 3사단은 우쑹만에 11사단은 촨사전에 상륙했다. 하지만 그곳은 장제스가 1935년부터 군사고문 팔켄하우젠의 권고에 따라 콘크리트 벙커와 기관총 진지로 이루어진 매우 촘촘한 방어선을 꾸려놓은 곳이었다. 거기에 지뢰밭, 철조망까지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해변에 내린 일본군 3사단 병사들은 중국군의 집중 사격에 다진 고기가 되어 삽시간에 학살당했다. 탄약은 금방 떨어졌고 일본군은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격퇴당했다. 3주가 지난 후 우쑹 해안가에 제일 먼저 상륙한 3사단은 96프로가 전투불능에 빠지는 등 지리멸렬 했고 경악한 3사단장 후지타 스스무 중장이 후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후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일본군 특성을 고려해보면 그만큼 중국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8월 31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겨우 우쑹 포대를 점령했지만 불과 3킬로미터 전진했다.

11사단 역시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6일 동안 겨우 5킬로 전진한 그들은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절망적인 자살 돌격이 이어져 한달 만에야 겨우 상하이 남쪽의 뤄뎬전까지 전진했지만 거기에도 강력한 중국군 방어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9월 28일이 되어서야 뤄뎬전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의 피해도 50%에 달했지만 이들은 질서정연하게 상하이로 퇴각하는 규율을 보여주었다. 3사단과 11사단은 1주일만에 도합 4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 1만명을 잃으면서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 이런 분전을 참관한 팔켄하우젠은 적을 섬멸하기는 어려워도 적을 저지할 순 있을 것이라 평가했다.테란 사기네요. 벙커 + 탱크 + 마인 안 뚫리는 것 좀 보세요!

이렇게 성공적인 방어전을 기획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면서 최고무공훈장인 푸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은 인물로, 이후 1927년까지 드레스덴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즉 이론가임과 동시에 경험이 부족한 군대를 그럭저럭 싸울 줄 아는 군대로 바꿔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공적 덕분에 장제스는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회 생일때 친전을 보내 팔켄하우젠을 중국의 친구라고 일컬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진짜 제대로 된 고문관이었던 셈이다.

각설하고 3만의 일본군은 상하이의 중국군은 지금껏 자신들이 만주, 화북, 산동 등지에서 상대했던 허약한 중국군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중국군의 전투력에 놀란 마쓰이 이와네 장군은 본국에 증원요청을 보냈다. 1937년 9월 7일 3개 사단이 추가 파병되었다. 타이완에서 시게후지 지대 1개 연대가 차출되었고 9사단, 13사단, 101사단, 야전중포병 5여단도 증파되었다. 이중 13사단과 101사단은 예비군들과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로 경험이 부족했고 무기도 빈약했다. 이들은 9월말 뤄뎬전에 배치되었다. 마쓰이 대장은 이들을 인솔하여 중국군 방어선의 중핵인 다창전을 공격했다. 다창전만 점령하면 상하이에서 포위된 해군 육전대를 구출할 수 있음은 물론 쑤저우강까지 남하해 중국군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뤄뎬전에서 다창전 사이에도 역시나 매우 견고한 중국군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우쑹과 뤄뎬전을 점령하면서 치러야 했던 혈투를 또 치러야 했다. 중국군은 기관총과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운용하면서 일본군에 출혈을 강요했고 잘 짜여진 방어선을 통해 일본군에게 일부 구간을 뺏겨도 순식간에 그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방어선이 뚫려도 중국군은 신속한 후퇴를 통한 전선의 재정비가 가능했기에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진 일본군이 화력면에서 우세하여 일본군은 느리지만 전진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이 10만명으로 늘자 장제스는 전병력을 상하이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화중, 화남의 모든 군대들이 상하이로 기차를 타고 달려왔다. 10월 말에 7개 집단군 85개 사단, 80만 대군이 집결했다. 장제스가 정성껏 가꾸어 온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군 전체의 4할에 가까운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엄청난 부대들을 무계획적으로 상하이에 투입했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병사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 몰려서 연락, 보급, 지휘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전투 효율이 떨어졌다. 일본군 전함의 함포 사격 한방에 일개 대대가 전멸하는 일도 발생했다. 10월 20일까지 중국군은 13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공군도 일본군의 항공모함 카가가 도착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보잘것없었던 해군은 양쯔강 하류에 일본 해군이 진입하는 것만 겨우 저지하고 있었다. 결국 9월 20일 양쯔강 입구의 장인에서 중국 해군은 일본 항공대의 공격으로 사실상 전멸했고 극소수의 함선만이 살아 난징과 우한으로 퇴각했다.

일본군 3개 사단이 더 증강되면서 중국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0월 8일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다창전의 견고한 방어막이 뚫리지 않자 일본군은 중포 120문을 집결해 엄청난 포화를 끼얹었고 다시 4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했다. 그래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그동안 재미를 많이 본 무기인 독가스를 뿌렸다. 10월 25일 일본군은 다창전을 함락했고 중국군은 쑤저우 강 남쪽으로 퇴각했다. 다창전이 함락되었단 소식에 상하이의 육전대도 반격에 나섰다. 결국 장제스는 주력 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10월 26일 전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들의 철수를 위해 88사단 소속 4백명의 결사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들은 4일이나 일본군을 저지한 후 11월 1일 영국 조계지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5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일본군 장갑차 수대를 격파하고 2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했다. 이들은 조계지의 중재로 후일 일본군에 투항했고 200여명이 중일전쟁 종전까지 생존했고 이들의 일화는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어쨌거나 상하이 북정거장과 자베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6일 바쯔차오를 점령함으로 상하이를 거의 손에 넣었고 전 중국군은 상하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10월 31일 일본군은 쑤저우 강을 도하해 중국군을 쳤지만 수십만의 중국군을 쉽게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중국군 역시 예의 지나친 밀집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5. 장인 전투[편집]


양쯔강 하류 장인에서는 일본 해군의 병력이 양쯔강을 통해 난징으로 가는 것을 막기위한 중화민국 해군의 양쯔강 봉쇄와 공방전이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장인 전투 문서 참조.


6. 항저우 만 상륙작전[편집]


한편 일본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10월 20일 또 병력 지원을 승인했다. 화북의 6사단, 본토의 18사단, 114사단, 야전 중포병 6연대, 독립 산포병 2연대, 예비 보병 2개 연대 8만명이 모여 10군을 편성했다. 2.26사건으로 예편했던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이 복귀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한편 일본군은 상하이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으며 방어선이 미약한 항저우를 치기로 결정했다. 화북 전선의 16사단이 차출되어 바이마오커우에 상륙했다. 중국군을 모조리 포위섬멸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일본군은 상하이에 상륙한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중지나방면군을 편성했고 사령관으로 마쓰이 대장을 임명했다.

1937년 11월 5일 새벽, 일본군 10군이 진산웨이에 상륙했다. 그들은 일본군 백만 항저우 만 상륙이란 애드벌룬까지 크게 띄우고 전차를 앞세워 진격했다. 장제스는 경악했다. 일찍이 바이충시가 상하이를 포기하고 젝트 라인으로 철수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 바가 있으나 장제스는 일본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일본군이 상하이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중국군은 항저우만의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11월 8일 67군의 군장 우커런 중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남쪽에서 일본군 10군이 북상하고 북쪽에서 상하이 파견군이 몰려오자 중국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산시성도 무너지면서 화북 전선도 파탄 지경에 몰렸다. 장제스는 11월 8일 전군 퇴각 명령을 내리고 푸산-쑤저우-자싱을 잇는 우푸 방어선을 설정했다. 하지만 수십만명이 밀집된 중국군은 제대로 된 철수계획도 없이 걸어서 탈출해야 했는데 일본군 항공기들이 폭격을 가하고 일본군이 접근한단 소식에 사실상 와해되어버렸다. 당연히 일본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1월 10일 상하이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 일본군이 시가지 전지역을 장악했다. 11월 13일 16사단이 바이마오커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이 버린 엄청난 숫자의 장비를 노획했다. 중국 해군의 주요 함정들도 침몰하거나 노획당했다. 공군도 50%의 전력을 잃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려 신속한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주력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7. 결과[편집]


군벌군 위주였던 화북 전선과 다르게 그동안 장제스가 애지중지 하며 육성한 독일식 훈련을 받은 중앙군의 진가가 발휘되던 전투였다. [1] 하지만 장제스의 독단적인 지시와 [2] 무능력 했던 국민당군 장교들의 뻘짓으로 그 엘리트 사단이 3개월 만에 상하이 에서 반 정도가 날아가버린다. 젝트라인이 있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 할 줄을 몰라 수도 난징이 상하이 함락 이후 짧은 시간 내 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된다. [3]

하지만 일본군은 애초에 1개월에 저항을 분쇄하고 5개월에 중국 정부의 항복을 받는다! 라고 공언 한 뒤 전쟁에 뛰어들었다 개고생을 하며 3개월 만에 상하이를 겨우 함락 시켰다. 국민당군의 전투력도 예상 이상으로 강했고 젝트라인이 거미줄 처럼 이어져서 한 요새 뚫을 때 마다 적의 전력은 비교적 쉽게 퇴각해서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뤘다. 또 전투는 이겨도 패한 국민당군이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쳐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고 이에 도쿄의 대본영은 이쯤에서 적당히 끝내자 라 지시했지만[4] 피해도 크고 계속해서 중국군이 괴롭혀 당시 중지나 방면군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증오가 어마어마 하게 컸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더욱 커졌고 이는 역사 상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학살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기관총이 뚜따따따 소리를 냈다면 중국군 기관총은 펑펑펑펑 소리를 냈다고 한다. 독일식 사단인 87, 88사단은 훈련도와 개인 무장으로 따지면 일본군 보다 나았다.[2] 쑨원 사후에 국민당 내부에 있던 분열과 북벌전쟁을 치루며 군벌들과 싸우고 그 후에 반장전쟁과 공산당 탄압, 시안 사건을 거치며 장제스는 누구도 믿지않고 자신 스스로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3] 상하이-난징은 평야지대고 또 양쯔강 바로 옆에 있어 난징은 군사적으로 몹시 취약했다.[4] 이게 웃긴게 일본 육군 사령부 에선 피해가 예상 밖으로 심각하니 확전을 자제하려 했지만 전선의 분위기는 다 죽여 없애자 였고 그러다 보니 급히 진격하는 경우가 많아 일본 정계에서 볼 땐 일본군이 승승장구 하는 것 처럼 보여서 더 공격적으로 지시했다. 오죽하면 정계와 군부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 란 얘기가 나왔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