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서하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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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서하대전
二次西河大戰
The Second Great War of Xi Xia

시기
기원전 318년
장소
진나라령 서하
원인
위 국군의 왕권 회복을 위한 도박 시도
교전국
위魏
조선朝鮮
진秦
지휘관
하동 태수 경리
상경 소진[1]

정서장군 곽전
부장 악의
서하군 사령관 임비
영질
서장 사마착
병력
위나라 하동군 5만 5천
조선 정서장군부 4만 5천

총합 10만
진나라 내사지군 1만 3천
진 서하지원군 1만 7천 이상[2]
진나라 서하군 4만 5천

총합 약 7만 5천 이상
피해[3]
사실상 전무[4]
진군 약 2만여명
결과
진군 대패,
영향
진나라 변법 시도 최종적으로 좌절 및 귀족 파벌 재대두
위나라의 서하 획득 및 왕권 복원
1. 개요
2. 배경
2.1. 위의 사정
2.2. 조선의 사정
2.3. 진의 사정
3. 전투의 전개
3.1. 위조연합군의 결성
3.2. 석문산 추격전
3.3. 그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
3.4. 일기토
4. 결말
5. 전후처리
5.1. 그들의 것을 되돌려주다
5.2. 카이두의 진노
5.3. 전후협상
5.3.1. 위제협상
5.3.2. 진제협상
5.3.3. 조진협상
5.4. 위래, 국군의 위상을 되찾다.
5.5. 악의, 중앙의 눈에 들다.
5.6. 배려이자 배신
5.7. 기린아, 사지에 내몰려 지다



1. 개요[편집]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위래 치하의 위나라가 중흥을 위해 서하를 공략하려 하면서 여기에 조선이 조력을 하며 진나라가 위-조 연합의 공격을 받게 된 사건이다. 이 대전의 패전은 진나라에게 전대로부터 시작된 왕권 강화 작업이 거의 원점으로 후퇴하는 여파를 불러왔다.




2. 배경[편집]





2.1. 위의 사정[편집]



2차 위나라 내전 이후 급사해버린 위앵의 뒤를 이어 왕위를 쥔 자는 태자 위신의 자식인 위래였다. 원래라면 위래의 어머니인 위신이 물려받아야 했을 자리이거늘 반대하는 자에게 역정을 내면서까지 한나라에 실력행사를 하려던 준비 끝에 무리한 탓인지 반역을 저질렀던 삼촌의 환영을 본 채 죽어버린 것이다.
이어서 할머니마저도 죽기 직전의 잠시간에 위래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들려준 뒤 떠나보낸 위왕 위래에게 놓인 상황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위래의 어머니 위신이 죽기 전 상방으로 임명한 공손연은 굉장히 영악한 권신이었다.
그리고 공손연에게 맞서 줄 만한 신하들은 위신의 노여움을 사 실각도 모자라 투옥된 상태[5]인데다, 위사의 난 당시 전란을 겪은 하남 지역과는 달리 공손연의 기반 되는 하동은 난이나 그 여파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위래 또한 어느 정도 장성했지만 정무의 경험 이전에 위신이 공손연에게 보장한 권한의 크기에 짓눌려 원치 않는 섭정 상황만 겨우 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위래에게 절실했던 것은 일전의 내전과 왕족들의 불미스러운 죽음으로 내려가버린 왕가의 권위를 상승시킬 길과 본인만의 사람이었을 때, 마침 어전에 유세객이 찾아오니 그 이름이 소진이라 하는 자였다.
그녀와의 대담을 통해 이 자를 중용할 생각을 굳힌 위래는 자신이 가졌던 많은 것을 걸고 그를 상경에 올린 뒤 경리를 복직시키고, 이에 더하여 도박을 해 볼 때가 되었다는 소진의 간언에 따라 군을 일으켜 서하를 향하여 진격한다.



2.2. 조선의 사정[편집]



한편 이미 진나라를 상대하는 동맹으로써 맺어져 있던 조선은 이럴 때를 위해서 정서장군부가 이미 설치되었던데다 요동 이서의 본령 지역의 소집 속도에서 향상을 이루었다.
일전의 위나라 내전 때의 동원여파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상시 갈무리해오던 숙련도에 타격을 받아가면서까지 조만간 있을 약속 이행을 대비하고 있었던 조선은 그 때가 왔다는 것을 듣자 일말의 지체 없이 군을 움직였다[6]

이 과정에서 비비오는 흉노와 함께 움직여 시선을 분산시키는 안을 제안했으나, 곧바로 비의가 중원에 조선이 북방의 부족들을 부린다는 것을 광고하는 꼴이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는 반려되었다. 그리하여 정서장군 곽전은 비록 정서장군부가 최근에 신설된 상태임에도 4만 5천의 숙련도 90의 병력을 이끌고 자신있게 단독 출진하게 되었다.



2.3. 진의 사정[편집]



진혜문왕 영사는 영질로부터 위와 조선이 합쳐 10만의 병사를 서하로 진주시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서하군은 전대에 진나라의 손에 들어온 이후 위의 하동군과 일상과도 같이 국지전을 경험하는 사이였고, 여기에 더해 내사지의 병력이 급파되어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거의 병력이 경수를 통해 운양방면으로 남하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영사는 곧바로 서하군의 규모와 정예도를 재확인했는데, 규모는 4만 5천인데 숙련도가 50이었다.(...) 작년의 피해를 급하게 벌충하느라 이렇게 된 것을 확인한 진혜문왕은 일단 행정상 서하군으로 분류되지 않은 약양과 빈양의 병력까지 고려했지만, 의거 견제 문제로 정작 내사지의 병력을 증파할 수 없다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영질은 전역의 우선도를 상기시키며 의거의 병력은 견제하는 선에서 대응하면 된다는 판단 하에 사마착에게 련도 79의 내사지 병력 1만 6천을 내주고 유사시 진군중 동부 징집 권한까지 허용하여 서하로 증파하고, 자신은 내사지 병력 중에서도 최정예인 련도 96의 1만 3천을 이끌고 의거가 함양에 닿지 못하게 하는 일을 이끌었다. [7]



3. 전투의 전개[편집]





3.1. 위조연합군의 결성[편집]



하동 태수 경리는 조선군을 맞이함에 있어서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였다. 이미 수차례의 국지적 교전을 통해 하동군 전체는 진나라를 대적함에 있어서는 위나라의 그 누구보다도 익숙했기에 양방향으로 긴장을 쏟을 필요가 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조선군이 안읍에 도착하니 서쪽으로 진군하기 위해 준비된 숙련도 78의 5만 5천 하동군은 곧 하나가 되어 서하로 향했다.

한편 서하군 사령관으로써 도하를 시도하려는 10만의 위조연합군을 확인한 임비는 그 대응으로써 총 병력중 3만 5천을 곧바로 소량으로 불러모았다.
이에 경리는 곧바로 진공을 생각했지만, 그 찰나 곽전의 부장으로써 주변정찰을 끝마친 악의는 소량에 모이지 않은 나머지 1만 가량의 병력이 소량과의 연결이 끊겨 유기적 연계가 안 된다는 점을 들어 소수의 별동대로 무난히 제압할 수 있음을 보고하였다.
곽전은 이 소식에 별동대 6000을 편성해 이들을 제압하기로 한 뒤 움직인다.



3.2. 석문산 추격전[편집]



의거는 석문산에서 파 놓은 영질의 함정에 제대로 걸려들었으나, 하필 그 군세의 격차가 통솔하는 자가 그 지혜의 저리자라는 것까지 더해 무시무시했던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함정임을 깨닫자마자 추격당하는 이는 자연재해에 당한 것이라 여기면서까지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영질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들을 쫓아들어갔는데, 원래 임무를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어지고 말았다.



3.3. 그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편집]



임비는 성 외의 병력이 모두 정리되자 각오를 다진 채 수성에 임하였으나, 시작하기도 전부터 거의 모든 점이 위조연합군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딱히 손발을 맞춰본 경험이 없는데도 그럭저럭 맞아떨어진 양국 사령관들의 상호 전술 이해,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가는 화살비, 이전 해의 소모를 회복하지 못한 서하군의 사정, 등 들라면 이외에도 수도 없이 많을 테지만, 마치 일말의 희망도 진군에게 줄 생각이 없을 정도로 전황은 압도적인 속도로 위조연합군에게 기울었다.

그 결과 서장 사마착은 원군으로써 소량에 미처 닿아보지도 못하고 소량이 연합군 손에 떨어졌음을 들어야 했다.



3.4. 일기토[편집]



성을 지키지 못한 임비는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 무용이 병사들이 감히 맞서지 못할 정도였기에 어차피 떨어진 성이니 도망치게 길을 내어줄 요량으로 적당히 군을 움직인 위조연합군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군 내에서 임비를 막아세우는 용사가 있었으니, 곽전의 부장으로써 이번 전쟁에 종군한 악의였다.
이 행동은 본래 명령과 어긋나는 것이기에 조선군 총대장 곽전은 순간 당황하였으나, 악의는 무예와 용력을 뿜어대는 이 진나라 무인의 갈 길을 틀어막고는 합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임비의 무용을 겪은 이들로써는 놀랍게도, 이 경합은 마지막 순간까지 백중세로 끝났다.
경합을 그칠 의사를 보인 임비는 악의의 무용을 고평가하였으나, 악의는 조금만 더 경합이 이어졌다면 승부가 임비 쪽으로 기울어졌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임비는 병사를 이끄는 장수로써 병사들의 승리와 위무를 거두었음을 들어 악의가 자신보다 뛰어난 장수임을 쾌히 선언하니,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졌지만 품위는 그 어느 쪽도 잃지 않은 채 양쪽은 서로 물러섰다.[8]

명령을 어기고 임비 같은 자를 상대하다 당하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대등하게 합을 겨루면서 오히려 사기를 끌어올린 효과를 얻은 악의를 눈여겨본 곽전은 별 말 없이 넘어갔다.

4. 결말[편집]



위조연합군은 서하군의 핵심인 소장성 지대의 탈환을 최우선시하였기에 음진 방면으로 손을 뻗진 않았지만, 이로써 위나라는 고토였던 서하를 다시금 얻었다.
여차하면 중천과 빈양도 위험했기에 섣불리 물러날 수 없는 사마착이었지만 위조연합군, 그 중에서도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였던 경리의 위군은 지나친 동원이 장기화됨을 우려했고, 이는 서로 왜 물러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키워갔다.

한편 의거는 위나라가 서하를 접수한 즉시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하여 위나라의 속번이 될 것을 청했고, 소진은 이를 상방의 직권으로써 접수하였다.


5. 전후처리[편집]



협상이 필요한 양군이었지만, 진나라는 협상하기도 전부터 패전의 여파에 휘둘리고 말았다.


5.1. 그들의 것을 되돌려주다[편집]



패전의 소식이 들리자마자 진나라의 대귀족들은 혜문왕에게 몰려가 담판을 벌였다.
전대부터 꾸준히 진행되어온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은 자연히 대귀족들의 운신폭을 죄어왔는데, 혜문왕 영사 대에 들어 군사적인 실패가 꾸준히 쌓여갔고, 이번의 패전은 영사 특유의 음습한 기지로 변통해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버린 것이었다.

귀족들의 거두였던 대부 감룡이 요구한 바는 간단했다. "본래 자신들의 것을 돌려받기를 원한다는 것."
혜문왕 영사는 이 요구에 응할 시 벌어질 일들이 눈에 훤했지만, 서하를 잃어버린 그에게 이 제안을 거절한다는 것은 실패의 책임을 온전히 자신에게 묻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진왕의 허락을 얻어낸 대귀족들은 진왕의 곁에서 나라의 규칙을 어지럽힌다는 명목으로 묵가와 법가계 인사들을 처단했고, 이 중 특히 그들의 편의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정면대치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에서 파견된 법가인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창칼에 꿰이고 베였다.

이렇게 하여 효공 영거량 때부터 착실히 진행해오던 진나라의 변법과 자강은 뒤집어엎혔다.
묵가는 비록 당시 상당수가 일을 처리하려고 내사지 밖에 있었던지라 영질이 화를 피하도록 지시하긴 했지만, 그렇게 전대에서부터 시작된 개혁은 허물어져내리고 말았다.



5.2. 카이두의 진노[편집]



이 때문에 진나라에서의 소식은 자연스레 그들의 수장인 카이두에게 닿았다.
고위군 공손앙의 수제자로써 아예 어렸을 때부터 법가의 인사들과 부대끼고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오다시피한 그에게 가족과도 같은 이들의 떼죽음이 방조되었다는 소식은 타인을 대함에 있어 지위고하를 막론할 정도로 눈을 뒤집히게 만들었고, 이는 그가 어전에서 격노를 억누를 생각조차 않은 채 강력한 항의를 종용함에 있어 원동력이 되었다.

이를 비비오가 제압하여 어전의 분위기를 진정시켰지만, 어쨌거나 법치에 철저한 법가인의 거두가 위법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진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조선에게 있어 만행과도 같았다.
이를 빌미로 진에게 강경하게 응대할 수록 법가를 만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당장 이미 한 번 정서장군부를 움직여 위나라를 도운 이후 발생할 연전을 유사시 치룰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거기에 조선은 조선장왕 기유가 칭왕회동 때 제위왕에게 모욕을 당한 일 때문에 이미 언젠가는 제를 쳐서 그 복수를 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이를 위해 여력을 가급적 축적하면서 때를 보고 있었다.

이러하여 조선 조정은 진나라 적장자의 신변과 주동자의 목, 그리고 상당량의 배상금을 최대 목표로 잡고 협상을 위해 악구를 파견하였다.

5.3. 전후협상[편집]



한편 이 말도 안 되는 압승은 제 국군 전벽강을 경악시켰다. 사실 애초에 진나라가 초나라를 치게 하는 게 목적이었지, 거기에 있어 진의 여력은 딱히 상관은 없어 조위연합의 서하 진주를 방조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서하가 이렇게 빨리 떨어지리라곤 예상치 못할 정도의 전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혜시를 위시한 제의 중진들은 패전 자체는 상정내의 일이었고 정보에 따르면 양 측이 대치중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곧바로 중재를 필요로 함을 간언하였고, 이에 제선왕은 대부 장축을 위나라로, 정곽군 전영은 그녀의 식객 제모변을 진나라로 보내 중재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겨우 서하 전역 자체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공짜는 없었다.


5.3.1. 위제협상[편집]



지금쯤이면 제나라가 개입과 중재를 위해 사신을 보낼 것이라 이미 계산하고 있었던 상경 소진은 부리나케 말을 몰아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 위나라의 어전 안에 있던 주군에게 닿았다.

일단 현 상황에서 명백히 승전을 거둔 쪽은 위나라였음으로 이대로 물러날 경우 서하를 온전히 장악할 가능성을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소진은 장축에게 그 요구를 진측에 전달하여 받아내겠다는 답을 받는다.

그러나 뭔가를 느낀 소진은 위와 진의 화친이 제왕의 의지임을 확인한 뒤 이를 바탕으로 그 보상은 제나라에서 내어야 하며, 보상으로 맹상군 전문을 객경으로써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제의 수뇌가 모두 기절초풍할 수도 있는 요구였지만,[9] 전벽강은 위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이유로 흔쾌히 허하였고, 전문 또한 국익과 본인의 명성 등을 생각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는 의중을 보였다.
그렇게 맹상군 전문은 위나라의 상방으로 오게 되었다.



5.3.2. 진제협상[편집]



진측에 중재를 위한 사신으로 보내진 제모변은 사신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태도로 제나라의 요구조건을 통보하였다.

위와 진의 화친을 보장하는 대신 한나라와 함께 남양을 치라는 것이었다.
저리자 영질과 그 친우 공손석은 속으로는 이게 뭔 개같은 소리인가 싶었지만 제모변은 곧바로 남양을 통해 손해를 벌충할 수 있으며 거절할 경우 위와 조선이 더 밀고 들어가든 말든 알 바 아니란 투로 나왔다.

말투를 떠나서 당시 진나라는 초나라와 전대에 아예 사돈지간으로 엮인 혈맹이었고, 거기에 소량이 넘어갔을 때의 형세는 아예 역사에서 여러 번 기록된 경험 수준으로 도가 텄다.
저울질을 해보자면 전자를 잃는 것은 후자를 일소하는 것보다 명백히 너무 무게카 컸던 진 조정은 그렇게 되어 이 조건을 대번에 거절하였다.

협상이 파토났음을 전해들은 제 조정은 일단 진에 대한 응징을 위해 위나라의 재량권을 늘리고 일대를 정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애초에 화친과 중재는 진나라의 행동을 유도하는 수단에 불과했고, 이미 진나라에서 일어난 법가인들의 죽음과 관련해서까지 죄 파악이 끝난 뒤었다.
따라서 제나라는 협상이 결렬된 이후 그 사실을 위나라에 통보한 뒤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위나라가 서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10]

5.3.3. 조진협상[편집]



조선의 사신으로써 영질의 앞까지 도달한 악구는 곧바로 요구사항을 통보한 뒤 거절 시 다시 전쟁을 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셋 중 두 개, 특히 학살 주동자의 목의 경우 사실 주동집단은 진 대귀족 파벌 내에서도 경멸당하고 있는 쪽이었기에 별 손해 없이 쉬이 내 줄 수 있었다... 고 여겼지만, 분명히 귀족의 세가 강해졌을 터인데 너무 흔쾌한 허락을 수상히 여긴 악구가 그 정도로 주동자의 목을 국왕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충신이 많으냐고 캐물으니 영질은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였다.

본론이 시작되고 영질은 적장자가 곤란하여 대신 그 외 왕족을 제안했지만, 요구에 근접하지 않을수록 법가인들을 비롯한 여론을 달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말에 서장자와 적자를 제외한 직계비속을 내어주기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11]

협상이 타결된 후 악구는 임비의 향방에 대해 질문을 하였는데, 애초에 질 수밖에 없던 싸움에서 진 것을 참작하여 그 어떤 죄도 묻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는 것을 전해들었다.[12]

5.4. 위래, 국군의 위상을 되찾다.[편집]



한편 소진이 간하여 왕명에 의해 상방 공손연은 상방의 자리에서 물러나 상경이 되었다.

소진이 앞서 제나라로부터 요구해 관철한 사항은 단순히 전과에 걸맞는 보상만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전 상방이자 한때 소진의 후원자였던 전수는 공손연의 견제로 낙향하여[13] 친척인 맹상군의 집에서 식객생활을 하는 중이었는데, 소진은 그녀의 편으로 공손연의 전횡 등을 전하는 편지 등을 꾸준히 보내왔다.

본래 진심으로 위나라의 상방으로써 일할 정도로 위나라를 아꼈던 그녀는 한탄이든 읍소든 맹상군에게 이것들을 털어놓았고, 이는 곧 위나라의 상방이 될 전문이 공손연을 유효한 수준까지 경계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게 단번에 공손연을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데 성공하였지만, 그 다음으로 관건이 되는 것은 본래 공손연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하동의 민심이었다.
본래 중원대전 이후 생존자들이 반조선 감정이 강할 가능성이 꽤나 높았지만 하동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위협인 서하가 조선의 도움으로 위나라의 손에 돌아온지라 소진조차도 믿기 힘들 정도로 반조선 여론이 부각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이번 전쟁의 공훈자로 경리와 소진을 생각 이상으로 매우 높게 보니[14] 이로써 서수 또한 하동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래를 좌지우지 하려 한 권신은 위광을 잃었고, 위의 국군은 자신의 운명을 건 도박에서 큰 판돈을 땄다.
한 때 잃어버렸던 위왕의 권위와 그에 비례하는 실권을 말이다.[15]



5.5. 악의, 중앙의 눈에 들다.[편집]



곽전이 악의를 기꺼워한 이유 중 또 하나가 있었다.
임비의 무용에 힘을 얻어 절망적 상황을 넘어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음에도 저항하는 진나라 병사들이 임비와의 경합을 보고 사기가 꺾여 최종적으로 제압할 수 있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발적이든 의도하였든 그저 형세에 의존한 것이든 간에 곽전은 결국 아군을 더 지켜냈음을 들어 상신할 장계에 이 내용을 포함할 생각을 굳혔다.

장계의 내용은 대승과 함께 적장 임비를 악의가 몸소 격퇴했다는 것이었지만, 대사마대장군 조옹은 대승 중 단기접전에서 승리했다면 임비는 필시 죽었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사실 승부 자체는 무승부였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그러나 그 상대는 진나라 최고의 장사였던 임비였기에 이 무승부는 영수 악가의 악의가 그와 호각의 무위를 지녔음을 의미하는 결과였고, 장왕 기유와 대사마대장군 무령군 조옹은 악의를 눈여겨보는 정도를 넘어 눈독들이게 되었다.



5.6. 배려이자 배신[편집]



한편 초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고 장의가 소환되었다. 장의는 여태껏 진나라의 남양 도모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왕 웅괴는 진나라가 남양을 노리기엔 위나라조차도 이기질 못하는 상황임을 들어 해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장의는 조선과도 화약을 맺었음을 들어 양국이 직접 화친하긴 뭐하니 조선을 중개인으로 간접 화친하여 잃은 것을 메우기 위해 남양을 도모하는 것임을 초왕에게 거의 설득시키기 직전까지 왔다.

너무 중차대한 사안이라 중진들이 어전에 모일 때 까지 기다리기로 한 웅괴를 이내 맞이한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이를 일축한 경취였다.
애초에 근래들어 무관 방면에서 군사와 물자 등이 관련된 이상행동이 목격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6]
그래도 초왕이 일단 왜 그렇게 여겼는지를 궁금해하여 다시금 기회를 얻은 장의는 이번엔 경취와 초군, 근본적으로는 초인의 긍지를 이용해 도리어 차후 사돈지간인 진을 지원하기 위해 무관을 요구해야 한다는 논지를 들었다.

경취도 넘어가기 직전, 딱 보니 이건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던 영윤 소양이 나섰다.

진의 4대 관 중 하나인 무관은 절대로 진에게는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임을 들어 시일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돕는 것이 맞다 말하는 소양이었다.
그러나 지지 않고 장의는 그러기엔 그 전에 진이 무너질 수도 있을 정도로 진군이 전대 대비 약체화되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비상한 수가 필요하다고 초왕을 설득하였다.

이 설전의 승자는 장의였다.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무관이 가지고 싶다는 크나큰 욕심을 이겨내지 못한 초왕 웅괴는 장의의 말에 넘어가버리고 말았고,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5.7. 기린아, 사지에 내몰려 지다[편집]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영윤 소양은 초의 진의(라고 쓰지만 사실 전달되었으면 하는 내용)을 숨겨서 전할 수 있는 달변가를 물색했으나[17] 굴평은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자가 없어 결국 본인이 가기로 생각을 굳혔다.

어떻게든 사돈지간으로써 신뢰를 강조하며 사실 인질을 받고 싶다는 의도를 전하려 했지만, 굴평을 앞서 대접했던 공손석은 대관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그렇게 굴평은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지 못한 채 권위를 상실해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혜문왕을 대신하고 있었던 영질을 대면하게 되었다.

영질은 동맹국에게 주요 방어 거점을 차후의 지원 탄력을 위해 내놓으라는 이 몰상식을 넘은 배신 격의 요구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결국 전쟁을 선포하는 가장 확실한 관습적 방법으로써 사신의 목을 베어 초나라에 돌려보냈다.

...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초와는 돌이킬 수 없게 척을 져버린 저리자는 결국 매듭을 지었다고 생각한 사안을 재논의하기 위해 제나라에 보낼 사신으로 진진을 정하여 파견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삼대세경가 굴씨의 일원이자 영윤 소양의 후계자, 그 외에도 (장의를 제한)초나라 각계각층의 인망을 가지고 있었던 좌도 굴평의 우발적인 죽음은 결국 온 초나라가 진나라를 대상으로 진심으로 군을 일으켜 곧 무관을 힘으로 빼앗아 보복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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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접 병력을 이끌지는 않았으나 군과 함께 움직이며 직책을 바탕으로 아예 전장에서 외교사안을 즉각적으로 처리하였다.[2] 후술하겠지만 여기서 얼마나 증강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3]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4] 임비의 탈출 과정에서 일부 극소수의 희생 추정됨[5] 제왕족 후손 출신의 전 상방 전수와 위나라는 물론 중원에서 활솜씨로 따를 자 없었던 경리였다. 한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직언을 올리다 화를 당한 것이다.[6] 소진은 한나라에도 이참에 함곡관을 건드려보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초나라가 남양병력을 증강했던 것을 경계하느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찔러본 것이었기에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7] 영사는 영질에게 함양이 노출될 경우 각오하는 게 좋다고 했지만, 정작 의거 또한 오로지 견제가 목적인 동원을 하였다.[8] 막아서는 건 막아서는 거지만 그걸 모두 뿌리칠 수 있음을 직감한 악의 또한 길을 내주었다.[9] 제위왕 시절에 이미 패자의 자리를 내쳐버린 제나라는 더 이상 패자의 권위를 빌려 열국에 명령을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기이할 정도로 패자 시절의 정세를 바탕으로 국제관계를 다루고 있었다. 이렇다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요구 자체를 일리가 있다기 보단 무례하게 여길 가능성도 그리 낮은 편은 아니었다.[10] 거기에 이미 제나라는 국경 건너의 이웃나라인 조선에서의 법가의 세와 위상을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진나라는 말로만 들었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이었는가에 대한 감흥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제나라의 제안을 받지 않아도 할 만하다 여겼고, 제모변은 그런 진나라를 더 극한으로 몰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파토가 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이 책임을 물어 제모변의 목을 베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제의 의중 그대로를 관철시킬 수 있는 조치이기에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11] 영질은 타결 후의 여론 문제는 조선 측이 해결할 일이지 협상카드가 아니라는 지적을 해 주었다.[12] 달리 말하면 지금의 진나라는 한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는 중책을 완수하지 못한 이를 내치거나 심지어 징계조차 하기 곤란할 정도로 쓸 수 있는 인재가 마땅치 않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13] 이는 위래에게 막 중용된 소진의 실권 상 아예 제 왕족의 핏줄이었던 전수의 자리까지 보전하게 할 수가 없었고 석방과 추방 선에서 끝나게 한 탓이기도 했다.[14] 물론 한 명 한 명을 따져보면 결국 하동의 아들(...) 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의 하동 토박이인 공손연에겐 밀리지만, 둘의 지분을 합쳐보면 백중세에 가까웠다.[15] 그러나 이때의 성공 경험 때문에 위래는 도박적인 수에 매달리게 되고 그것이 위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6]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무관으로써의 자존심까지 겹쳐 장의를 대놓고 깎아내리기까지 했다.[17] 당연하겠지만 장의는 논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