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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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사건 사진들

1. 개요
2. 원인
3. 발단
4. 항쟁의 격화
5. 진압과 학살
6. 이후
7. 기타
8. 창작물



1. 개요[편집]


二二八事件(ㄦˋㄦˋㄅㄚㄕˋㄐㄧㄢˋ/Jī-jī-pat sū-kiāⁿ) / February 28 incident

1947년 대만에서 벌어진 국민정부에 대한 반정부 봉기와 이에 대응해 국민정부에서 비무장 반정부 시민들을 학살한 사건. 중화민국 정부에서 인정한 사망자 수만도 28,000명 가량으로 추산되는[1] 대만 역사 최대의 아픔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다.


2. 원인[편집]


“신임 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타이완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미합중국 국무부, 중국백서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 제국은 타이완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게 되었다.[2] 대만일치시기 시절 대만은 조선에 비해서 식민 통치가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식민지 사람들이었던 대만인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당했고, 더군다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 등 전시체제는 대만인들의 삶을 더 고달프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제국이 물러가고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이 타이완에 진주할 때 많은 대만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중국 대륙의 국민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정부중일전쟁의 후유증과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고 대륙과 다른 문화를 사딩 대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게다가 대만인들은 청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지역이라는 고아의식에 더해서 중국을 조국이라고 여겼던 인사들조차 일치시기에 중국인들에 의해 일본의 앞잡이 혹은 미개한 토인으로 취급받으면서 대만과 중국을 구별하는 우적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직후 대만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대만인들이 우리 대만과 대비되는 너희 중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대만인과 구별되는 너희 중국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타이완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천이(진의)[3]부터 말단까지 상당수 국민당원들은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대만 본성인들을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간주하였다. 특히 대만 행정장관이었던 천이부터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까지 졸업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인들과 일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거부했고 오로지 관화(표준중국어)만 썼다. 당시 일제 통치 50년 동안 일본어를 상용하던 대만 지식인들 중 대륙에서 활동하던 극소수를 제외하면 관화를 쓸 줄 아는 사람은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4] 관화를 할 수 없는 대만인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타이완의 행정부는 소수 요직은 물론 교사와 말단 공무원, 경찰, 군인까지 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넘어온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구색 맞추기식으로 임용된 소수 본성인들은 본인 혹은 선대부터 본토에서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항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더불어 일제가 대만에서 물러가면서 남긴 공장들은 국민정부가 접수한 후 죄다 자신들과 연줄이 있는 외성인들에게만 불하했기 때문에 대만인들은 다시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또 전쟁이 끝나면서 징병/징용으로 해외로 떠났던 사람들이 대만으로 귀국했는데 국민정부는 이들을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로 몰아 탄압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천이가 실시한 전매정책으로 인해 많은 대만인들이 일감을 잃고 먹고 살기가 빠듯해진 데다 일본의 항복 후 일본 본토의 교역망이 일시에 붕괴되면서 타이완의 물가와 실업률 역시 폭등하였다.

결국 본성인들은 국민정부의 대만 통치에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실망감도 매우 커졌다. 당시 돌았던 "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이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말이었는데 일본인은 개처럼 대만인들을 괴롭히고 국민당은 돼지처럼 타이완의 재산을 먹어치우기 바쁘다는 뜻이었다.


3. 발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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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s227.jpg

린장마이
사건 묘사도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시 위안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과부 린장마이(林江邁)[5]담배 노점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대륙에서 담배는 정부 전매품이 아니었지만 대만에서는 전매품이었고 전매제가 실시되는 수준을 넘어 당시 대만은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통제경제체제 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 매일 노점을 단속하러 다녔는데 먹고 살기 팍팍했던 대만인들은 이를 피해다니며 노점판을 벌였다. 2.28 사건 당시 린장마이를 단속하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단속반과 경찰은 총신으로 그의 머리를 때리는 등 린장마이를 강압적으로 폭행하여 중상을 입혔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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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이 된 천원시 학생의 피살을 묘사한 판화도
매일 같이 벌어지던 이런 과잉 단속에 항의하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다 급기야 천원시(陳文溪)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으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다.


4. 항쟁의 격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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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2월 28일 천원시는 결국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은 국민당이 운영하던 경찰서와 군대로 몰려들어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중은 경찰서에 난입해 천원시를 죽인 가해자를 포함한 경찰관 2명을 죽이고 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군중은 행정장관 공서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는데 식량이 부족해 쌀값이 폭등하던 당시 행정장관 공서에 막대한 쌀이 비축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의 수가 급증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경비 병력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다. 결국 대만인들은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점차 시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타이베이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3월 1일 이후 소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도 폭발했는데 이는 결국 상호간의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던 데다 특권 독점에 따른 갈등도 있었고 의사소통까지 되지 않으니[7]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대만 본성인이 외성인과 국민당에 저항할 때 집단을 구별한 기준은 대만어(민남어)/일본어 구사 능력이나 기미가요 제창 가능 여부였는데 대만 본성인들은 저항의 메세지를 일본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노래를 부를 수 없고 민남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외성인들을 '짱꼴라(チャンコロ)'라고 부르면서 죽였는데 이는 과거 일제 육군에서 중국인들을 지칭하던 표현이였다. 처음부터 외성인이나 국민당에서는 일본 제국에 협력한 매국노라며 대만인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보였는데 충돌 과정에서 대만인들이 일본 제국 시대의 경험으로 피아 구분을 하면서 그런 인식이 고착되었다. 결국 두 집단 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8]

3월 1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담배단속으로 야기된 유혈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하려고 했으나 행정장관 천이와의 타협으로 다소 중립적인 명칭인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구성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2일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포하였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한 발포를 하는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부터 사태가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리위원회의 성격이 점차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외성인들에 대한 공격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타이베이의 미국 영사관에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국민정부 측에 대만 시민들이 미국의 신탁통치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국민당을 격분시켰다. 이후 3월 5일에 처리위원회 8항목 정치개혁안을 제출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1. 대만성 행정장관의 비서장, 민정장, 재정장, 교육장, 경무장은 본성인을 임용한다.
  2. 공영사업은 본성인이 경영한다.
  3. 현장과 시장은 선거로 뽑는다.
  4. 전매제도를 철폐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처리위원회 측은 3월 6일 좀 더 구체화된 32개조 정치개혁안을 제출한 후 장제스 주석 만세를 외치면서 정식성립대회를 마치는 등 급진주의를 자제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천이도 3월 6일 밤 방송을 통해 현시정부를 선출제로 구성하겠으며 관료 인사를 본성인 중심으로 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3월 7일에 이전의 32개조에 10개항을 더한 42개조 요구가 제출되었는데 여기에는 대만인 전범과 한간의 무조건적인 석방, 대만 행정장관 제도 폐지, 처리위원회 내부에 정무국 설치, 대만 주둔 육해공군에 대만인 채용 등 보다 근본적인 요구사항이 들어갔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징병으로 징집된 대만인이 인구의 1%에 달하던 상황에서 일본군 복무 여부만 가지고 한간으로 몰아 처벌/살해하고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던 국민당 정부의 조치가 얼마나 대만인들의 반감을 샀지 알 수 있다. 천이는 2.28 사건 발생과 동시에 장제스에 파병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고 시간을 끌기 위하여 대만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한 수습위원회와 협상에 나선 것이기 때문에 후일 42개조 요구를 두고 국민당 프락치가 강경진압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조작한 게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협상 모션을 취하면서 시간끌기에 성공한 당시 대만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관 천이는 국부군 증원부대의 대만 도착을 하루 남겨 놓은 3월 7일 제시된 급진적인 요구인 42개조 요구를 당연히 거부하였고 대만 엘리트들로 구성된 처리위원회도 42개조 요구가 성민의 합의가 아니라며 3월 8일 42개조 요구를 번복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3월 8일 지룽에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병력이 도착하였고 이들은 함상에서부터 항구로 소탕사격을 실시하며 바로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5. 진압과 학살[편집]


타이완 섬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陳儀)는 겉으론 대만 현지 주민들과 대화를 모색하는 척 했지만 뒤로는 중국에 진압 병력의 파병을 요청했다. 사건이 타이완 섬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대만내 자체 병력으로는 시위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장제스국공내전 때문에 최초 파병 요청을 받았을 때는 군대 파견을 거부했는데 이번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맘을 바꿔 결국 진압군을 타이완으로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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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증원군이 도착하자마자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되었다. 국부군 헌병 제4연대 소속 2개 대대병력이 최초로 지룽항에 도착한 후 소탕사격을 실시하면서 지룽에서 무차별 진압을 실시했고 이어 3월 9일 도착한 21사단 병력이 지룽시~타이베이시 축선, 타이완 북부에 투입되면서 시작된 진압은 대만 전국에 국부군 병력이 투입되면서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사건 가담자를 색출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본성인/외성인 여부를 가린 후 대만인들을 집단 처형했다.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 일본인들도 이때 대만인으로 몰려 희생되었으며 중화민국 정부가 도망친 후 타이베이시 시내에서 치안을 유지하던 중학교 학생들 수백 명도 총살당했다.


파일:unnamed-228.jpg

사건 발생 50주년에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9], 또 이와 별도로 외성인 7~8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대만 역사에 무지한 국민당군 입장에서는 2.28 관련 시위 참여자들이 매국노로 보였을 것이고 타이완 섬 외부가 고향인 국민당군 장병과 대만인은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되면 돌이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파일:external/blog-imgs-44.fc2.com/20100224123926d04.jpg


파일:external/www.newtaiwan.com.tw/571-38-2b.jpg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28f49a08.jpg

지룽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학살을 묘사한 기록화들
국민당군은 진압 과정에서 수상한 사람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고 대답하지 못하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몇몇 그림을 보면 피해자들 뒤에 바다가 묘사되어 있는데 몇 명을 사살하면 시체들의 무게로 사람들이 줄줄이 바다로 빠졌다고 한다. 2.28 사건의 희생자들의 추적이 어려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러한 학살은 3월 17일 바이충시가 타이완 지역의 군정장관으로 부임한 후 진정되었다.

또 장제스는 대만인 엘리트들이었던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해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만일치시기부터 활동하던 대만인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대만 지식인 사회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계엄령을 종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산간지방으로 도피한 대만인들을 잡아 죽이는 작업, 시골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른바 청향(淸鄕)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으며 그들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받은 대만인들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가 사법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고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학살된 사람들의 사진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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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후[편집]


이 사건은 민주화 이전 타이완에선 언급조차 꺼리는 최대 금기였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타이완으로 외성인들이 들어오고 대만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징역형을 선고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은 철저하게 잊혔다. 국민당이 피해자들의 재산을 싹쓸이해가고 이후에도 대만인 출신 지식인들을 친일과 친공의 싹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탄압했다. 당시의 대만 공산당 역시 이때 국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하면서 살아남은 소수는 중국 대륙으로 도주하였고 이들의 일파는 현재 중국 전인대의 구색정당인 타이완 민주자치동맹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재야 인사들이나 피해자들 사이에서 진상규명 요구는 있었겠지만 국민당이 철권통치하던 시절인지라 대만에서 제대로 된 논의는 이루어질 리가 없었고 주로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나 중국 대륙에서 2.28 사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1987년 2월 28일 정난룽이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연구회를 성립한 시점부터였다. 이후 대만 계엄령이 해제되고 1988년 타이완 출신의 리덩후이 총통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오랜 논란 끝에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정부가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2.28 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10]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중국국민당은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정하지만 장제스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철저하게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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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정부의 첫 공식 추도행사에 참석한 리덩후이 당시 대만 총통

중화민국 정부 추산에 따르면 민간인 2~3만명이 학살당한 사건이지만 진상 조사가 사건이 발생한지 약 50년 뒤에야 이뤄져 확실한 진상 규명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최소 1만 8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지만[11] 누가 2.28 사건으로 죽었는지 제대로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어 유가족에게 보상을 완료한 것은 2천여 명, 구체적으로 신상정보가 밝혀진 피해자는 겨우 5~6백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 중화민국 정부는 오늘날까지 2.28 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2.28 국가기념관(二二八國家紀念館)에는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有受害者 沒有加害者), 타이완 역사의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라는 문구가 있기도 했다.[12]

이 사건은 본성인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각인시켰고 중화민국 반환 직후부터 발생한 타이완 독립운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아울러 훗날 타이완에서 벌어지는 메이리다오 사건 같은 계엄 반대 운동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민주진보당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국민당을 이끈 장제스가 직접 연루된 사건이라 국민당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 사건이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다. 일례로 마잉주 전 총통은 재임 시절 2.28 사건을 '일부 부패한 관료들의 탐학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 정도로 언급하며 장제스와 국민당 핵심 계층, 타이완 독립과의 연관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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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가 이뤄지고 대만 민족주의 세력이 세를 얻으면서 2.28 사건 주간만 되면 장제스 동상이 공격받는다.

한편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당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14] 이는 대만에서도 논쟁거리다. 차이잉원 정권은 매년 2월 28일을 중정기념당의 정기휴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현재 2월 28일은 중화민국에서 '평화기념일'이란 이름의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중화민국의 공휴일 중 '실질적 영토(=타이완 지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날'은 이 날이 유일하다. 이 날에는 조기를 게양하게 되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덩샤오핑 집권 전까지는 이 사건을 국민당 집단의 폭정에 대한 '타이완 인민의 의거'로 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는데 이는 자신들과 대치하는 대만의 중국국민당 정부를 도덕적으로 비난해서 명분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후에는 기념행사도 사라지고 중국 내에선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데, 이는 국민당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15] 대만이 민주화된 후에는 오히려 대만 독립 성향의 민주진보당보다는 양안통일 성향의 중국국민당을 더 선호하게 되면서 국민당에 불리한 2.28 사건을 부각시켜서 자신들에게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2.28 사건 피해 후손 및 기념단체들은 주로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해서 중국이 이 사건을 기념하든 말든 크게 아쉬울 게 없다는 입장이다. 차이잉원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은 '이 사건이 대만 독립파들에게 이용되고 있다'고 재차 주장했다.


7. 기타[편집]


  • 사건의 원흉 중 하나인 타이완 성 행정장관 천이는 사건 이후 해임되었다가 1년 뒤인 1948년에 저장성 정부 주석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국공내전 도중에 중국공산당에 투항하려고 했다가 발각[16]되어서 1949년에 체포되었고 1950년에 자신이 사고를 쳤던 바로 그 타이완 땅에서 처형되었다.[17]

  •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 총통의 취임식 식전행사로 대만 역사를 요약하는 무용이 공연되었는데 2.28 사건에 대한 묘사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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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 정부 공식 발표 기준. 그러나 1960년 호적조사에서 실종자로 분류된 12만 명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2·28 사건 희생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 게다가 1945년 종전 당시 대만 본성인 인구는 불과 680만 명이었다.[2] 사실 1945년 패전 직전까지 일제가 줄곧 강화 조건으로 내세우던 4가지 조건이 (1) 국체호지(천황제 유지), (2) 외국군의 일본 영내 진주 거부, (3) 조선과 대만의 유지, (4) 일본군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무장 해제 등이었다. 사실 1차 대전 이전에 일본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획득한 영토인 조선과 대만은 연합국이 박탈하기 어려웠고 인도 제국 등의 식민지를 두고 있었던 영국은 특히 유화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고집한 대로 카이로 선언에 포함된 일제 식민지 해체는 핵폭탄 2방소련의 참전으로 야기된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관철되어 조선은 독립되었고 대만은 중화민국에 반환되는 결과를 낳았다.[3] 천이는 당시 국민정부에서 그나마 가장 대만 사정에 밝았다. 그는 1934년 복건성 주석으로 취임했는데 이때만 하더라도 대만의 근대화 상황을 보고 이를 복건성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이후 일제의 패망으로 대만을 점령하기 전부터 국민당 지도부와 장제스에 직접 건의하여 대만 연구반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대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인사였다. 하지만 그런 천이조차 대만 민심도 제대로 못 읽고 전후 혼란기에 강압통치로만 일관함으로써 결국 2.28 사건을 촉발했다.[4] 또 당시에는 중국 본토에서도 의무교육이 정착되지 못하여 문맹률이 80%에 달했기 때문에 본토인이라고 해도 남부지방 사람들은 관화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5] 린이 아닌 장이 자기 본성이다. 과거 중화권은 관부성이라고 하여 전통적으로 결혼한 여자가 자기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는데 남녀평등에 민감했던 공산당 집권의 영향인지 대륙에선 이 방식을 쓰지 않으나 타이완에서는 요즘도 쓰고 있다고 한다.[6] 당시 린장마이는 노점 활동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맞으면서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물건만은 돌려달라고 빌었다. 이 사건 이후 린장마이는 병원에 실려갔다가 치료를 받았고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평생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2016년에 나온 2.28 사건 관련 인물들의 가족들을 추적하여 인터뷰한 책에 따르면 린장마이의 딸은 "고향에 돌아온 이후 가족들은 늘 그날의 일을 함구한 채 평범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7] 지금은 대만에서도 표준중국어가 쓰이지만 당시 대만에서는 표준중국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본성인들이 썼던 대만어는 대부분의 중국어 방언들이 그렇듯 이름만 방언이지 외국어 수준이다. 식자층이 썼을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다.[8] 영화 <비정성시>에 이때의 일화가 나온다. 청각장애인 주인공에게 상대방이 대만어와 일본어로 질문했는데 이를 주인공이 알아듣지 못하자 곧바로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동행인이 사정을 설명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심각한 사회 갈등을 알 수 있는 장면. <비정성시>의 허우샤오셴 감독이 외성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보아야 한다.[9] 본성인측의 비공식적인 주장에 따르면 4만 명에 이르기도 한다.[10] 아이러니하게도 2.28 기념공원 바로 밑에는 장제스의 건강을 기원하는 제서우 공원(介壽公園)이 존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중정기념당이 있다.[11] 조사를 다시 할 때마다 희생자 수가 만 명씩 늘어난다.[12] 타이완대학병원역에 위치하는 2.28 평화공원과는 별개의 장소로, 과거 대만성 참의원으로 쓰였던 건물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한국의 제주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자료도 전시되어있다.[13] 그나마 마잉주 총통은 국민당 입장에서 껄끄러운 2.28 사건 추도행사에 재임 중 매년 참석하긴 했다.[14] 급진적인 대만 독립파 입장에서 보자면 장제스는 독재자 이전에 침략자다. 올림픽에서 국기 게양을 못한다고 하지만국기가 바로 그들에겐 침략자들의 상징물인 것.[15] 당시 양안의 집권자인 덩샤오핑장징궈는 상대 세력의 최고권력자라서 존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였다. 둘은 덩샤오핑이 20대 초, 장징궈가 10대 말이었을 때 처음 만났고 몇 년 동안 같은 공간에 있기도 했다. 양안이 갈라진 후에는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신을 주고받으며 함께 양안관계의 개선을 추진했다.[16] 자신의 옛 부하이자 장제스의 심복인 탕언보(湯恩伯)에게 같이 투항하자고 권유를 했는데 탕언보가 장제스에게 밀고해 버렸다. 다만 탕언보가 '밀고'했다기 보다는 '장제스도 천이를 잘 아니 좋은 말로 타이르겠지' 정도로 생각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일로 탕언보는 한때의 후견인인 천이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17] 원한관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여기를 참조해 봐도 좋다.

  • 희생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대만의 일본인들이나 기타 일제 식민지인들의 귀환은 1949년에야 완료되었는데 미처 일본 등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2.28 사건에 휘말려 희생된 것이다. 지룽에 거주하던 박순종과 기타 선원 2명 등 한국인 3명도 국민당군에 의해 끌려가서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아 보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18]

  • 본토에서 떨어진 바다 건너 섬에서의 학살 사건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제주 4.3 사건[19]과 비슷한 사건이라 그런지 관련 기념재단 및 단체와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4.3 사건보다 먼저 명예회복과 정부 사과가 있어서 4.3 관련 단체에서 2.28 사건의 명예회복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연장선상에서 2018년 4월 2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 교육국은 제주 4.3 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

  • 2.28 사건에 참가했던 대만 본성인들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폭압에 저항할 때 저항 메시지를 국민당 쪽이 모르게 일본어로 방송하거나 기미가요 제창 여부로 본성인과 외성인 여부를 구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국민당과 외성인을 더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28 사건의 이면에는 일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라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상술된 개돼지 발언 등으로 볼 때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기보다는 대만인이란 정체성이 식민지 시기 및 국민당 독재 시기를 거쳐 형성된 데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으로 보인다. 대만일치시기에도 힘들었지만 이후 집권한 외성인들도 만만찮게 자신들을 괴롭혔고 그 결과 추억보정까지 더해져 차라리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의 향수로 나타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타이베이 중정구에는 이 사건을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있다. 이름은 '2.28 평화기념공원'.[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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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평화기념공원
한국에는 228을 중국어로 발음한 '얼얼바 공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원 내에는 2.28 사건을 다룬 전시관과 국립대만박물관이 있다. 이것도 원래는 타이완성립박물관이었는데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성립이 국립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립고궁박물원이 중화 문명을 주제로 한다면 국립대만박물관은 타이완 섬 자체의 자연 인문 역사를 주로 다룬다. 타이베이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고 조금만 발품 팔면 중정기념당 및 국립대만도서관까지 갈 수 있다.


8. 창작물[편집]


허우샤오셴이 감독하고 양조위가 주연한 1989년작 대만 영화 비정성시는 1945~1950년대까지의 대만 현대사를 관통하는데 2.28 사건이 직접적으로 다뤄지며 영화 중간에 2.28 사건을 언급하는 장제스의 연설문도 나온다.

대만의 여러 록밴드들이 2.28 사건 당시 벌어진 전투 중 '우뉴란 전투(원어:烏牛欄戰役)'로 희생된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우뉴란대호법(烏牛欄大護法)'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각 밴드별로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서 '호법'은 인도 대승불교 유가행파의 승려로 유식설[21]을 동아시아 불교에 전파했다. 대만에서는 수호부처로 생각되는 모양이다.
[18] 해당 기사에서는 2.28 사건을 '대만 원주민에 대한 학살'로 서술했지만 아직까지 대만 원주민으로 일컬어지는 대만인들은 인구 비율상 극소수로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으며 2.28 사건의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대만인은 오래 전부터 중국 대륙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이민 온 자들로, 현재 대만의 소수민족으로 규정된 오스트로-미크로네시안 계열의 대만 원주민과 별개로 구분된다. 물론 명확한 집계조차 안 되는 실정이니 대만 원주민들도 학살당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고 일제강점기에 그나마 중국적 문화가 있었던 대만 본성인들보다 더 일본 황민화가 진행된 집단으로 일본군에서도 대만 원주민들로만 구성된 특수부대를 남양 최전방에서 운용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니 대만 본성인과 마찬가지로 친일파로 몰려 학살당한 사례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인구 비율상으론 2.28 사건 당시 대만 본성인들이 이미 원주민을 대체한 주류 거주민이긴 하다.[19] 특히 2.28 사건 바로 다음 날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발단이 되는 사건인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20] 참고로 대구에는 1960년 2월 28일 일어난 2.28 학생민주의거를 기리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21] 불교의 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에 그 근거를 두는 것으로 공에 의한 인과관계로 만들어진 법을 이해하는 능력을 '식'이라고 하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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