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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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 1944년 올림픽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역대 하계올림픽 / 역대 하계패럴림픽 / 역대 동계패럴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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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fff 제20회 동계올림픽 경기대회
XX Giochi olimpici invernali
XX Olympic Winter Games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Olympic Winter Games Torino 2006 }}}
파일: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로고.svg
파일:external/colorlib.com/Torino-2006-winter-olympics-poster.jpg
대회기간 2006년 2월 10일 ~ 2월 26일[1]
개최국 이탈리아/토리노
슬로건 ' La Passione Vive Qui
Passion Lives Here
(이곳에 열정이 살아 숨쉬네)
마스코트 Neve
주제가 Because We Believe - 안드레아 보첼리
참가국 80개국
참가선수 2,508명
(남자: 1,548명, 여자: 960명)
경기종목 15개 종목, 84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이탈리아 대통령
선수 선서 조르조 로카
스키
심판 선서 파비오 비안케티
스피드 스케이팅
성화점화 스테파니아 벨몬도
개·폐회식장스타디오 올림피코 그란데 토리노

1. 개요
2. 유치
3. 대회
4. 메달 집계
5. 한국측 중계진
5.1. KBS
5.2. MBC
5.3. SBS
6. 기타



1. 개요[편집]



2006년 2월 10일부터 2월 26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최된 20회 동계올림픽. 이탈리아에서는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이후 2번째로 개최하는 동계올림픽이며, 1960 로마 올림픽까지 치면 3번째 열리는 올림픽이다.


2. 유치[편집]


1999년 6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신라호텔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06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었다. 의외로 대한민국에는 이 사실이 잘 안 알려져 있는데, 이 때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각국의 유치전 역시 그리 과열되지 않았기 때문. 한국은 이로부터 4년 후, 2003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2010년 동계 올림픽 유치에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2번의 실패 후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게 된다.

유치를 신청한 곳은 모두 6개로, 헬싱키(핀란드)[2], 토리노(이탈리아), 시옹(스위스), 클라겐푸르트(오스트리아), 포프라드타트리(슬로바키아)[3], 자코파네(폴란드)[4]였다. 모두 유럽 국가였다. 이번에는 유치를 신청한 도시들이 모두 유럽 지역에 있고, 신청국도 그리 많지 않아 압축 과정을 거치지 않아 6개 도시 모두 프레젠테이션을 준비, 서울특별시로 와서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유치전은 일찍부터 스위스 시옹과 이탈리아 토리노의 2파전으로 좁혀지는 분위기였다. 이들 두 국가가 시설도 잘 되어있는 편이고, 개최 열기도 높았기 때문. 핀란드는 동계 스포츠의 인기가 높고, 헬싱키의 도시 인지도도 높기는 했지만, 헬싱키와 스키장의 거리도 멀고 정부의 유치 의욕도 낮은 것으로 평가되어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우선 IOC 평가위원회는 6월 12일부터 서울특별시에서 각 평가 항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2개를 선정하여, 19일 IOC 위원들의 투표로 개최지를 선정하게 되었다.

예상대로 시옹과 토리노가 최종 리스트에 올라 이 두 도시 중 한 곳을 선택하게 되었다.

1차 투표 결과득표수
토리노53표
시옹36표

1차 투표에서 바로 토리노로 결정되어 버렸다. 치열한 접전을 벌이거나 시옹이 다소 우세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이후 50년만에 다시 동계올림픽을 열게 되었다.

동계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특별시에서 결정된 것은 1988년 이후 2번째였다. 이때는 1988 서울 올림픽 기간 중에 임시 총회를 열어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했었다.

3. 대회[편집]


총 80개국의 국가에서 2663명(남자 1642명, 여자 1021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15개 종목이 치러졌다. 세부 종목이 몇 개 추가되었다. 스노보드의 크로스, 스피드 스케이팅 팀 추발, 크로스컨트리 스키의 팀 스프린트, 바이애슬론의 집단출발 등이 신설된 것.


4. 메달 집계[편집]


■ 2006 20회 토리노 동계올림픽 (2006 Winter Torino Olympics)


파일:대한민국동계올림픽성적16.png


4.1.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성적[편집]




한국은 스피드스케이팅 이강석의 동메달을 제외하고는 모든 메달을 쇼트트랙 한 종목에서만 따내며 종합 7위 성적을 거뒀다. 안현수, 진선유, 이호석이라는 역대급 쇼트트랙 레전드들을 출격시켰고 안현수진선유가 3관왕을 하며 쇼트트랙 8개 종목에서 6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 동메달 1개 따내는 기염을 토해냈다.[5] 순위상으로는 좋은 성적이었지만 쇼트트랙 쏠림 현상이 극심했던 대회였다.[6]


5. 한국측 중계진[편집]




5.1. KBS[편집]




5.2. MBC[편집]




5.3. SBS[편집]




6. 기타[편집]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처음으로 남북한 공동 입장이 성사되었다. 하계 올림픽에서는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이미 공동 입장이 이루어졌지만, 동계 올림픽에서는 북한이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 불참하는 바람에 이 대회에서 처음 공동 입장을 하게 되었다.

뜬금없이 개회식 세레모니에서 포뮬러 1의 차량이 등장하였다. 개최지가 이탈리아였기에 당연하게도 차량은 페라리가 가지고 온것이며, 피트 크루들도 등장하였다. 해당 차량은 토리노 동계올림픽 특별 도색을 씌우고 스타디움에서 도넛을 그렸다.

더불어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출연하는 축하 공연도 있었는데, 그가 자주 불렀던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 dorma)' 가 선곡되었다. 하지만 파바로티는 당시 췌장암 말기로 매우 쇠약한 상태였고, 영하의 날씨 속에서는 제대로 노래를 부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파바로티는 출연을 고사했지만, 동계올림픽 위원회에서는 '그럼 립싱크라도 해달라' 고까지 간곡히 부탁했다.

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인 파바로티는 자신과 여러 리사이틀을 같이 개최한 지휘자 레오네 마제라가 이끈 관현악단을 대동하고 개회식 1주일 전에 비공개로 녹음을 했는데, 그마저도 원래 조성으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이 낮춰 편곡한 형태로 녹음해야 했다. 개회식 무대에서 파바로티와 마제라, 관현악단은 미리 녹음한 소리에 맞추어 완벽하게 공연을 연출했고, 이를 모르던 관객들은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다. 그리고 이것이 파바로티가 생전에 출연한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개회식 중 입장순서는 이란과 이스라엘은 견원지간이라서 여타 대회에서는 이 둘 사이에 이탈리아를 끼우고 입장시키지만, 이 대회는 이탈리아가 개최국이라서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우지 않는 대신에 맨 마지막에 입장시켰다는 사실.

한국 대표팀은 아홉 개 종목에 41명의 선수로 구성되었다. 전 대회보다 선수단 규모가 약간 줄었는데, 피겨 스케이팅에서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고[7], 스키 종목에서도 전 대회보다 출전권을 얻은 선수가 줄었기 때문. 피겨 스케이팅의 경우, 이 시즌 만15세의 김연아가 참가한 국제대회들을 모두 제패하는 등 주니어 무대를 호령하고 있었으나, 올림픽 출전이 가능한 연령 제한 기준일(전년도 7월1일)에서 67일이 모자라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쇼트트랙은 역시 남녀 전 종목에 출전권을 확보했으며, 스피드 스케이팅도 전 대회보다 참가 선수가 늘어, 당시까지 가장 많은 선수가 참가했다.

이런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의 활약으로 당시까지 동계올림픽 참가 사상 역대 최고 성적인 금메달 6개[8], 은메달 3개[9], 동메달 2개[10]의 종합 7위라는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메달 수(11개)로는 이탈리아, 중국과 함께 공동 9위) 금메달 수 기준으로 동계 스포츠 강국으로 통하는 개최국 이탈리아나 스위스, 노르웨이 등을 앞서는 대단한 성적이었다.

종합 1위는 독일(금 11, 은 12, 동 6), 종합 2위는 미국(금 9, 은 9, 동 7)이 차지했다. 스웨덴은 금 7, 은 2, 동 5로 지난 두 대회 연속 노메달의 아픔을 뒤로 하고 종합 6위로 올랐다. 오스트리아는 금메달 9개로 자국 동계올림픽 역대 최다 금메달을 땄다. 에스토니아는 금메달 3개로 깜짝 12위를 기록했고, 중국도 금 2, 은 4, 동 5로 지난 대회부터 상승세를 이어갔다. 반면에 전 대회에서 금 13개로 종합 1위를 했던 노르웨이는 종합 13위(금 2, 은 8, 동 9)로 내려앉았다. 핀란드는 은 6, 동 3으로 12년 만에 노 골드를 기록했다.

한국은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동메달 1개를 제외한 모든 메달은 쇼트트랙에서 나왔다는 메달 편식에 대한 걱정거리는 이번에도 계속 나왔다. 그래도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이강석이 10여년 만에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메달을 획득하여서 앞으로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 희망이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때 결국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 3, 은 2라는 성적표로 돌아오게 되었다.(밴쿠버 대회에서는 획득한 금메달 6개 중 절반이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나왔다.) 이강석의 동메달 외에도 이규혁이 남자 1000미터에서 3위와 불과 0.05초차로 4위를 하고, 당시 여고생 신분이었던 이상화가 여자 500미터에서 5위에 오른 것도 큰 기대를 남겼다.

절대 강세를 보이던 쇼트트랙에서 안현수진선유라는 두 스타 플레이어가 출현. 안현수는 쇼트트랙 3관왕(1000m, 1500m, 계주 5000m)을 함과 동시에 500m에서도 동메달을 받아가 전 종목에서 메달을 쓸어담았으며, 진선유도 3관왕(1000m, 1500m, 계주 3000m)을 기록해서 독일의 미하엘 그라이스(바이애슬론 남자 개인전, 집단 출발, 계주)와 더불어서 올림픽 다관왕을 한 3명의 선수로 기록이 되었다.

한편, 프리스타일 스키 모글 스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토비 도슨이 한국계 입양아라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올림픽 후 토비 도슨은 생부모를 찾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 언론에서 과도한 관심을 갖는 바람에 찾는 일을 그만뒀으나, 이듬해에 다시 시도한 끝에 자신과 붕어빵처럼 닮은 생부와 연결되어 26년만에 상봉하게 됐다. 생부와 상봉하면서, 토비 도슨은 자신의 원래 이름이 '김봉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11] 그의 부모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려서 미아가 된 것도 알게 되었다. 이후 토비 도슨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했고, 평창 올림픽이 결정된 이후에는 대한민국 프리스타일 국가대표팀 코치로도 일하여 평창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다.[12]

일본이 유독 힘을 못쓴 대회다. 스키점프, 노르딕 복합, 알파인 스키, 스피드 스케이팅 등의 종목에서 4위, 5위, 6위 정도로 아깝게 메달을 놓친 경기가 많이 나오면서 이리저리 치이다가 대회 후반부까지 노메달 상태가 이어졌다.

결국 이대로 대회를 마감하는가 했는데, 아라카와 시즈카가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노메달의 수모는 피해갔다. 이는 올림픽 역사상 일본이 피겨스케이팅에서 얻은 최초의 금메달이었으며,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기획된 얼음폭풍 프로젝트의 시행 이래 최대 성과였다. 아라카와 시즈카는 당시 만 24세로 여자 싱글 선수로서는 그야말로 환갑급 나이였던 노장 선수였으나, 현지 관중들을 사로잡기 위해 프리프로그램으로 2년 전 썼던 투란도트를 재탕한 것이 제대로 먹혔고, 먼저 했던 메달 후보들이 줄줄이 폭망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차례에는 3-3점프를 뛰지 않는 안전책을 선택하여 프리를 클린한 것이, 결국 금메달 획득에 주효하게 작용했다. 아라카와 시즈카는 만 24세로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여자 싱글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으며, 토리노 올림픽이 끝난 직후 일본에서는 아라카와의 시그니처 기술이었던 이나바우어가 한동안 유행어가 되었다. 아라카와의 금메달은 두 일본 선수의 운명까지 완전히 바꿔놨다. 아라카와는 올림픽 금메달을 끝으로 명예롭게 은퇴하여 아이스쇼를 열고 피겨 해설가를 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아라카와의 오랜 라이벌이었던 수구리 후미에는 이 대회를 4위로 마치고 은퇴 시기를 놓쳐 무려 나이가 삼십줄에 접어들 때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가게 된다. 비록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아라카와 시즈카가 역대 여자 싱글 올림픽 챔피언 중에서도 존재감이 희박한 챔피언으로 분류되지만, 일본에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준 것만으로도 일본 피겨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선수다. '올림픽 챔피언의 코스튬은 파란색'이라는 징크스가 이 대회를 통해 굳어졌는데, 이는 아라카와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서 두 대회의 올림픽 챔피언들(타라 리핀스키, 사라 휴즈)이 푸른색 옷을 입어서 자신도 파란색 코스튬을 골랐다고 말한 것이 미디어를 거쳐 와전되었기 때문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아라카와의 투란도트 코스튬은 역대 최악의 피겨 코스튬을 꼽으라면 꾸준히 꼽힌다. 아라카와 시즈카에 대한 사족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외신들이 붙여준 아라카와의 별명이 '쿨뷰티'였는데 그 쿨뷰티의 어원으로 추정된다.

스노보드 크로스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지만, 채택되자마자 희대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영상을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한 순간의 실수로 메달 색깔이 바뀌어버리는 사건. 결국 세계의 모든 선수들의 웃음과 동시에 실망을 안고 은메달을 받게 되었다고. 이 선수는 다음 올림픽인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했지만 준결승에서 떨어지는 굴욕을 맛봤다. 그래도 메달이라도 땄으니 망정이지...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준결승에서 1위로 달리다 넘어져 결승에 가지 못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출전했으나 불과 0.003초 차이로 4위에 랭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16년만에 한을 풀었다.

따뜻한 이탈리아의 지중해 기후가 연상되어 동계올림픽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산맥을 끼고 있는 나라로 유럽에서 스키로 알아주는 나라의 하나다.[13] 동계올림픽 유치의 경쟁자였던 스위스 시옹도 사실 이탈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스키장의 설질은 그리 좋지 못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실내 경기장의 경우, 저지대에 위치하여 애초에 좋은 기록은 나오기 힘들 것이 예상되었는데, 빙질마저 엉망이어서 기록은 더욱 안 좋았다. 경기장은 대회 직전에야 공사가 완료되어 좋은 빙질이 나오기 힘들었고, 관리도 잘 되지 않아 녹은 얼음이 반들반들한 게 TV로도 보일 정도. 이런 곳이 어떻게 1차 투표에서 스위스를 발랐지 토리노는 대도시라 도시 인프라는 잘 되어있는 편이지만, 토리노 시내와 스키장과의 거리가 멀어 이동에 불편이 큰 데다가, 따뜻한 겨울 날씨 덕분에 스키장 설질도 안 좋았다. 하지만 뒤이은 밴쿠버는 시내와 스키장의 거리도 더 멀고 날씨는 더 따뜻해 춘계 올림픽이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고, 겨울철 피한(避寒) 휴양지이자 여름철 해변 휴양지소치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망했어요

대회 로고의 타이포그래피는 Neuropol계통의 폰트이다. 보통 미래적인 느낌을 주고자 할 때 많이 쓰이던 폰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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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지 시간 기준[2] 1952 헬싱키 올림픽 개최.[3] 1999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 당시 대한민국 팀은 자국에서 열린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에 주력하느라 이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쇼트트랙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래 처음으로 노메달에 그쳤었다.[4] 1993, 2001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5] 한국이 메달을 못딴 종목은 여자 500m 하나다.[6] 그러나 다음 밴쿠버에서는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내며 처음으로 쇼트트랙의 금메달 갯수를 넘겼고 여자 피겨 싱글에서 1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쇼트트랙 쏠림 현상을 해소하는데 성공했다.[7] 북한은 이 대회 출전권을 획득해서 여자 싱글에 김용숙 선수가 출전했다. 순위는 27위를 기록했다.[8] 쇼트트랙 남자 1000m, 1500m, 계주 5000m / 여자 1000m, 1500m, 계주 3000m[9] 쇼트트랙 남자 1000m, 1500m / 여자 1000m[10] 쇼트트랙 남자 500m,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11] 입양 기관에 맡겨졌을 당시 기관에서 지어준 이름이 김수철이었다.[12] 그의 지도 아래 최재우서정화 등 여러 선수들이 평창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13]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중반까지 알파인스키의 황제로 불렸던 알베르토 톰바가 이탈리아 사람이다.[14] 한국에서 익숙한 사용례를 보면 크레이지 아케이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