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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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ばい旋風(せんぷう[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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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교야구 제일의 기적으로 평가받은 사가키타의 코시엔 제패가 결정된 순간

만화보다 더욱 만화같은 스토리로 우승기를 거머쥔 이들의 이야기는 고교야구 팬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코시엔 구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2007년은 꿈이 이루어진 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샤다라빠, 레진코믹스 코시엔으로 go!

1. 개요
2. 약체 야구부, 코시엔 그라운드를 밟다
3. 본선에서의 파란
4. 결승전
4.1. 경기 내용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 고교야구에서 코시엔 우승을 노리는 명문 강팀들은 대부분 사립고등학교들이며 공립고등학교들 중에서는 고시엔 진출까지는 몰라도 우승을 노릴만한 강팀들은 매우 드물다. 고교야구 명문으로 유명한 PL학원고등학교[2] 등의 일부 사립학교들은 뛰어난 중학 유망주들을 장학생으로 스카웃하고 명장이라 불리는 감독들을 고용하며 전용 그라운드와 기숙사를 운영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으로 막강한 팀을 꾸린다. [3][4][5]

반면 상당수의 공립 고등학교들은 야구장학생은 당연히 없고 감독은 학교 교사가 겸직하며 운동장도 다른 체육부와 공유하며 연습시간도 수업 전과 방과후의 몇 시간으로 규제되는 등 말 그대로 야구 동호회 수준의 야구부를 보유한 곳이 대부분이다.[6] 사가키타의 기적은 바로 이런 야구 명문 사립 고등학교들을 물리치고 그저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하는 평범한 동네 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들어낸 기적과 같은 우승을 일컫는 말이다.

2. 약체 야구부, 코시엔 그라운드를 밟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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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사가현에 위치한 사가현립 사가키타고등학교(佐賀県立佐賀北高等学校, 약칭 사가키타)의 야구부가 돌연 돌풍을 일으키며 제89회 코시엔 사가현 예선을 돌파해 개교 이래 2번째로[7][8] 코시엔 본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어디에나 있을 보통 현립학교다보니 야구부에 대한 특별취급은 전무했고, 야구부 운영도 그저 서클 활동의 일환에 불과했다. 당시 사가키타 고교 야구부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야구 장학생은 당연히 없음. 야구부원들은 그냥 학교 근처에 사는 보통 학생들.
  • 주전들의 평균 신장이 170cm 이하.
  • 감독은 야구를 좋아하는 국어교사였던 모모자키 토시카츠(百崎敏克, 당시 51세)[9][10]
  • 그라운드는 축구부와 공유.
  •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야간 훈련이 전면 금지되었고, 시험 일주일 전에는 아예 부활동 자체가 전면 금지되었다.

1년 전인 2006년 지역예선에서는 1차전에서 광탈했을 만큼 약체로 평가받던 야구부였고, 이러한 이유로 사가키타가 코시엔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기적으로 평가했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2007년 사가키타 고등학교가 코시엔에서 첫 승리를 넘어 우승까지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3. 본선에서의 파란[편집]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야구소년들만이 모인 이런 동네야구 수준의 팀이 고시엔에 올라와서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1회전, 그것도 대회 개막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주장이었던 포수 이치마루 다이스케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것만으로도 위대한 업적. 2승은 기대 안 해."라고 공개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가키타 고교는 이후에도 프로 지망생들로 점철된 명문 사립고교들을 연파하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8강전 테이쿄 고교[11]와의 13회 연장 혈투는 고시엔 역사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명승부. 여기서 사가키타의 투수 쿠보 타카히로는 연장전에서 테이쿄의 스퀴즈 번트를 2번이나 글러브 토스로 막아내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테이쿄 고교는 동도쿄 최고의 야구 명문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2006년 대회에서 치벤 와카야마에게 역사적인 역전패를 당한 데 이어 이번엔 동아리 수준의 사가키타에게까지 끝내기 안타를 맞고 분패하며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이하는 사가키타 고교의 결승까지의 전적이다.
경기
상대 고교
도도부현
결과
비고
1차전
후쿠이 상고
후쿠이
2:0 승
개막전
2차전
우치야마다 상고
미에
연장 15회 4:4 무승부
고시엔 역대 5번째 연장 15회 무승부
9:1 승

16강
마에바시 상고
군마
5:2 승
재시합
8강
테이쿄 고교
동도쿄
연장 13회 4:3 승
끝내기 안타로 승리
4강
나가사키 니치다이 고교
나가사키
3:0 승

고시엔에서 결승에 오를 정도의 강팀이라면 1,2회전 정도는 압승해버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가키타 고교에게 쉬웠던 시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강했던 엘리트 고등학교들을 상대로 매번 접전에 연장전을 거듭하며 기적적으로 이겨나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결승에 진출했다. 4강 모든 자리가 공립교였고 기적의 백홈까지 나온 1996년 이후, 11년 만에 이뤄진 공립고교의 결승 진출이었다.[12]

4. 결승전[편집]


내로라 하는 야구 명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결승에 도달한 사가키타 고교를 기다리고 있던 팀은 춘계 코시엔 2회 우승을 거둔 바 있는 히로시마의 초명문 코료(広陵) 고등학교로 한신 타이거즈의 간판이었던 카네모토 토모아키 등 수많은 유명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한 명문 고교이자 코시엔의 단골 손님으로 꼽히던 강호였다.

여기에, 이들의 결승전 선발 투수는 노무라 유스케[13], 주전 포수는 고바야시 세이지[14]였다. 배터리부터 후일 프로에서 주전으로 활약할[15] 선수들이 나왔을 만큼 야구가 좋아서 모였던 사가키타의 선수들과는 차원 자체가 다른 급이었다.


4.1. 경기 내용[편집]


1회전부터 4강까지 총 64이닝을 소화하며 지칠대로 지친 사가키타 고교는 경기가 시작하자 내내 노무라에게 7회까지 1안타로 압살당하며 0-4로 끌려가게 되었다.[16]

그리고 맞이한 8회말. 이 경기를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을 기다린 것은 코시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승부가 갈린 8회 경기 영상. 소에지마의 만루홈런 장면은 영상 시간 11:05부터 보면 된다.
선두 타자 에가시라 에이지(江頭英治)가 풀카운트 승부 끝에 6구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1사, 8번 타자이자 에이스 투수 쿠보 타카히로(久保貴大)가 이때까지 12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던 상황 속에서 1볼 카운트에서 바깥으로 빠지는 변화구를 3루수-유격수 사이로 빠져나가는 안타로 만들며 자신의 대회 첫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어서 9번 타순에서 대타로 나선 니카와 카츠마사(新川勝政)가 1스트라이크에서 변화구를 공략해내어 우전 안타를 만들었고,[17] 1번 타자 츠지 타카토(辻尭人)는 풀 카운트 승부 끝에 7구 볼넷을 골라내 1사 만루를 만들며 7회까지 사가키타 타선을 1안타로 압살하던 노무라를 흔들었다.

여기서 2번 타자 이데 카즈마(井手和馬)가 나섰고, 1스트라이크 3볼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하게 들어온 5번째 공을 주심이 볼로 판정하면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3루 주자였던 쿠보가 홈을 밟으며 사가키타가 1점을 얻게 되었다.[18] 노무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포수인 코바야시 역시 말도 안된다는 듯 미트를 꼈던 손으로 그라운드를 치며 항의했으나 주심은 판정을 바꾸지 않았다.

사가키타 고교가 1점을 득점한 후 여전히 1사 만루, 1:4로 뒤지던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는 팀의 주포였으나 이 경기에선 이때까지 안타 없이 볼넷-2타석 연속 삼진으로 침묵하던[19] 3번 타자-3루수 소에지마 히로시(副島浩史)였다. 소에지마는 1볼 1스트라이크에서 노무라가 3구째로 던진 슬라이더를 풀스윙으로 쳐내었고, 타구는 펜스를 넘어가 좌측 스탠드에 내리꽂히며 사가키타가 단박에 5:4로 역전했다. 코시엔 역사상 최초의 결승전 3점차 역전 만루포 기록[20]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역전포를 얻어맞은 노무라는 4번 이치마루 다이스케(市丸大介)를 3루 땅볼로 잡고 5번 오쿠시 료헤이(大串亮平)에게 우전안타[21]를 얻어맞은 뒤 6번 타나카 료(田中亮)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내며 추가 실점 없이 8말을 마치기는 했으나, 분위기는 이미 사가키타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22].

파일:external/www.asahi.com/OSK200708220068.jpg
타격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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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말 극적인 역전 만루홈런을 터뜨리고 환호하는 소에지마와 사가키타 고교 선수들

9회초, 코료 고교의 선두타자로 들어선 6번 하야시 류키(林竜希)는 쿠보를 상대로 풀카운트 승부 끝에 6구째를 3루수-유격수 사이로 빠져나가는 좌전 안타[23]로 만들며 1루로 나갔다. 동점까지 단 1점만이 필요했던 코료는 후속 타자였던 7번 오카다 쥰키(岡田淳希)에게 보내기 번트를 준비시켰고, 오카다는 3구째에서 쿠보의 몸 쪽으로 향하는 높은 직구를 1루 방향 번트 타구로 쳐내며 하야시는 여유롭게 2루로 보내는 데 성공하며 코료가 1사 2루 찬스를 만드는 줄 알았으나..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투구 직전부터 사가키타의 3루수 소에지마 히로시는 오카다가 번트를 대는 순간에 홈 바로 앞까지 달려와 있었고, 1루수 츠지 타카토가 공을 잡는 걸 보고 3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 2루로 간 하야시가 3루 베이스가 비어있다고 판단하여 3루까지 노리며 내달린 것. 이게 오카다를 태그한 츠지의 눈에 딱 걸렸고, 전력으로 달려 3루 커버를 들어간 소에지마에게 정확하게 송구되면서 하야시는 3루에서 태그 아웃되었다. 이렇게 1사 2루 찬스를 만들어야 했을 보내기 번트가 주자의 판단 실수로 인해 순식간에 주자 없는 2아웃 상황이 되었다.

위기를 넘긴 사가키타의 에이스 쿠보 타카히로는 마지막 타자였던 8번 겸 에이스 투수 노무라 유스케를 변화구로 삼진 아웃시키면서 경기가 종료되었다. 평범한 야구 동아리였던 사가키타 고교 야구부가 결승전에서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제89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의 우승팀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돌풍(がばい旋風)'으로 불리는 코시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승이자 사가키타의 기적이라는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 이 경기를 중계하던 아사히 방송 캐스터는 우승콜을 다음과 같이 외쳤다.

三振!! 佐賀北高校が、甲子園球場で、奇跡を起こしました!

삼진!! 사가키타 고교가 코시엔 구장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2007
甲子園

제8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第89回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

━━━━━━━━━━━━━━━━━━━━━━━━━━━━
결승전, 8.25, 13:00, 고시엔 구장 45,000명(매진)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코료 고교
노무라 유스케
0
2
0
0
0
0
2
0
0
4
13
0
6
사가키타 고교
바바 마사후미
0
0
0
0
0
0
0
5
X
5
5
0
4
상세 기록

샤다라빠레진코믹스에 연재한 코시엔 만화에서 2007년 결승전을 "코시엔에 모인 모든 야구팬의 꿈을 이뤄준 기적"이라고 찬양했다. 아다치 미츠루가 그런 걸 그렸어도 욕먹었을 것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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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키타의 기적의 주역 투수 2인
쿠보 타카히로(좌), 바바 마사후미(우)
  • 사가키타 고교는 결승까지 포함해 무려 7경기 73이닝을 소화, 역대 고시엔 최다 이닝 신기록까지 수립했다. 당시 사가키타 고교가 쿠보 타카히로-바바 마사후미의 두 투수를 현란하게 로테이션시키면서 최다 이닝 신기록까지 수립하며 우승한 것은 절대적인 에이스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일본 고교야구의 풍조에도 경종을 울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 우승 직후 모모자키 감독고시엔의 라루사에게 우승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잘 지킨다.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

  • 한편 사가키타 선수들 중 이후 프로에 진출한 선수는 한 명도 없다.[26] 사실 프로팀의 눈길을 끌 만한 재능의 소유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선수들 스스로도 대부분 프로 야구선수가 아닌 다른 진로를 준비하고 있었다.[27] 주축 선수들의 진로는 다음과 같다.
    • 쿠보 타카히로(久保貴大): 고시엔 우승으로 미일친선야구 고교 대표로도 뽑혔고[24] 수도대학연맹 소속 츠쿠바대학 진학 후 2학년 가을 리그 방어율 2위, 3학년 봄 리그에서도 스가노 도모유키(토카이대학,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어 방어율 2위를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 활약했다. 2012년 졸업 이후 나고야의 선술집 회사가 운영하는 제이프로젝트라는 사회인 팀에 들어가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훈련하며 야구를 계속했지만 2013년을 끝으로 은퇴. 2014년 사가대 대학원에 입학, 고교 교사를 준비함과 동시에 사가대 부속중학교 연식야구팀을 지도하며 지도자의 꿈도 키워가고 있다. 이후 교원면허 시험에 합격, 2016년부터 모교 사가키타 고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보건체육 담당교사 겸 야구부 부부장 자격으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중. 그리고 2019년 사가키타 고교가 여름 고시엔 진출을 확정지으면서 지도자로서 다시 고시엔을 가게 되었다.
    • 소에지마 히로시(副島浩史): 쿠보와 마찬가지로 당시 미일친선야구 고교 대표로도 뽑혔다. 이후 큐슈 6대학 연맹 소속 후쿠오카대학 진학 후 어깨 부상으로 고생하다 3학년 때 레귤러가 되고 그해 가을 리그 홈런, 타점왕을 차지했다. 지역 강호인 후쿠오카대에 진학한 덕분에 2009년을 제외하면 매년 전국대회에도 출장했다.[25] 대학 졸업 후에는 이데와 함께 사가은행에 입사했지만 2014년 여름 퇴직하고 사가현립나카바루특별지원학교(천식 등 특수 질환 아동을 위한 학교)에서 체육 수업 등을 담당하고 있다가 4수 끝에 교원채용시험에 합격, 2018년 가을에 사가현립 카라츠공업고등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한다. 카라츠공고 감독으로서의 목표는 물론 고시엔 진출. 이 학교는 1996년 여름 고시엔 진출 경험이 있는 곳이다.
    • 바바 마사후미(馬場将史): 쿠보와 함께 팀을 이끈 두번째 투수. 츄오대학 진학 이후에는 준경식야구부(경식과 연식 사이의 공을 사용하는 야구부)에서 활동, 이후 도요타 통상에 취직했다.
    • 이데 카즈마(井手和馬): 163cm의 작은 신장으로 타순으로는 2번에 섰고, 수비의 중추인 유격수를 맡았으며, 8강 테이쿄전에서는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기도 했던 이데는 동도야구연맹 소속 아세아대학 야구부에서 활동하고 이후 소에지마와 함께 사가은행에 입사했다.
    • 이치마루 다이스케(市丸大介): 4번 포수이자 주장을 맡았던 이치마루는 역시 미일친선야구 대표에도 뽑혔고 도쿄 6대학 연맹 소속의 와세다대학에 진학, 이후 '손수건 왕자' 사이토 유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2010년에는 메이지진구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고 대학에서의 성적은 통산 44경기 출장 123타수 31안타 14타점. 졸업 이후 도시바 경식 야구부에 들어갔지만 2013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 8회 말, 노무라 유스케의 공이 이전 까지 스트라이크로 판단된 지점으로 통과되었지만 모두 볼로 선언되며 심판 판정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다.

  • 2007년에는 고교야구계에 선수 영입과 관련한 금품수수 스캔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회의 극적인 우승으로 전국적인 열광을 일으키면서 어영부영 묻혔다고 한다[28].

  • 2011년에 사가키타의 여름 - 고시엔 사상 최대의 역전극(佐賀北の夏―甲子園史上最大の逆転劇)이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 2015년에 이 내용을 다룬 프로그램이 나왔다.

  • 이 우승 이후, 일반 동아리 수준이었던 사가키타 야구부는 동문 졸업생들과 지역민들의 열렬한 환호와 지원 속에 정식으로 제대로 된 야구부로 재탄생했고, 지역의 유망한 학생들도 다수 진학 - 사가키타의 기적 이후 고시엔에 3회 더 진출하는 준수한 기록을 세우며[29] 사가 현 내에서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강팀으로 꼽히게 된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고시엔에 진출한 건 2019년[30]으로, 아쉽게도 1회전에서 카고시마현 대표인 카미무라 학원에게 패해서 탈락했다.

  • 동호회 수준의 야구부로 평가받긴 했으나 사가키타 고교는 과거 프로야구 선수를 1명 배출한 적이 있긴 하다. 1984~1998시즌까지 난카이/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외야수로 뛰었던 키시카와 카츠야(岸川勝也)가 그 주인공.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초창기였던 1989-91시즌에 주전으로 도약하여 3년 연속 20홈런을 치며 당시 후쿠오카에 갓 정착해 가던 팀의 주포로 활약했으나, 91시즌 도중 부상으로 시즌아웃당한 뒤 급격한 기량 하락을 겪으면서 1994년 이후로는 출장기회를 거의 박탈당했고, 결국 말년엔 요미우리, 요코하마를 떠돌다 98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야구 해설가와 요미우리 코치직 2회 역임을 거쳐 현재는 2020년부터 신설된 요미우리 구단 OB 스카우트를 역임 중.

6. 관련 문서[편집]


[1] 엄청난 돌풍이라는 의미로, とても(매우)의 하카타벤인 がばい와 旋風(선풍, 돌풍)을 합친 단어. 일본에서는 사가키타의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がばい旋風(가바이 센푸)로 부른다.[2] 2016년 고시엔 참가를 끝으로 해체. 야구부내 폭력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코시엔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와 더불어 학원 자체적으로 야구신입부원을 받지 않았다.[3] 때문에 다른 지역의 유망주들을 대거 모집하는 명문고, 이른바 "외인부대"가 과연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교육의 연장선상이어야 할 고교야구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등의 논쟁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2006년 이후 고교야구 연맹은 특기생 모집, 장학생 지급, 일반 학생과와 분류된 체육과 운영 등에 대대적인 규제를 가하며 이러한 사립고의 엘리트중심 야구는 일반 학생들도 참여하는 개방 노선으로 전환되는 추세이다.[4] 고시엔 출전을 위해 상대적으로 수월한 타지역 강팀으로 떠나는 경우도 매우 많은데 2005년 연맹에서는 1996~2005년, 즉 10년 사이에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 중 다른 현에서 온 경우를 조사했다. 그 결과 다른 현에서 와서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는 10년 간 916명에 달했고 특히 오사카부 출신이 457명에 달했다. 이는 오사카부가 PL학원, 오사카토인 등 수많은 강팀이 몰려 있기 때문에 A급 선수라도 고시엔 출장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NPB 정상급 투수 중 하나였던 마에다 켄타는 2004년 1학년 때는 여름 예선 결승에서 츠지우치 타카노부와 히라타 료스케가 이끌던 오사카토인을 잡고 본선에 진출했으나 그 다음해에는 다시 준준결승에서 오사카토인에게 패배, 고3 때는 준준결승에서 히가시오사카대학카시와고교에게 패퇴하며 고1 이후 여름 고시엔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처럼 지나치게 경쟁이 치열한 지역을 떠나 상대적으로 경쟁이 약한 지역의 강팀에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2012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카가와니시 고교의 경우 카가와현 출신은 커녕 시코쿠 4개현 출신조차 없었고 대신 오사카부 10명, 효고현 5명 등 벤치에 들어가는 18명 전원이 다른 현에서 온 선수였다. 특대생 문제와 더불어 고교야구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렇다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2015년 여름 고시엔에도 역시나 오사카 출신 선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5] 오사카, 효고 지역에서 타 지역으로 진학한 선수는 다르빗슈 유(미야기현, 도호쿠고교)와 다나카 마사히로(홋카이도, 코마다이도마코마이고교)가 있다. 선망하던 PL학원고의 입학에 실패한 니시오카 츠요시고치현의 야구명문교 메이토쿠기주쿠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은 PL과 대결하기 위해 같은 오사카부의 야구 강호 오사카토인 고교 진학을 택했다.[6] 물론 전국 우승도 거두는 초명문 공립고교들도 일부 있지만, 이 공립고들은 지원과 육성 측면에서는 명문 사립고들과도 막상막하인 어디까지나 일부의 케이스이다.[7] 2000년 82회 대회에 첫 출전했으며 이 때는 첫 경기(2차전)에서 카나가와현의 야구 강호 요코하마 고등학교에 1-12로 대패하며 바로 짐을 싸야 했다.[8] 참고로 사가 키타(北)고의 전신인 현립 사가고가 1958년까지 고시엔에 총 7회 진출한 적이 있으나, 1963년에 사가고가 동, 서, 북 3개 교로 분리되면서 사가고의 역사는 사가 니시(西)고가 가져가서 사가 키타고와는 관계가 없게 되었다. 참고로 사가 니시고는 1963년 이후 한 번도 고시엔에 진출한 적이 없으나, 일본 전체에서 유일하게 유니폼에 학교명/지명 이외의 다른 이름인 에이조(栄城)를 쓰는 특례를 허락받은 학교로 유명하다.[9] 이 사람도 사가키타고교 야구부 출신이었다. 포지션은 외야수. 코시엔 예선에서 현 대회 4강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주장까지 역임했으며 고쿠가쿠인대학 야구부까지 진학했다. 고쿠가쿠인대학은 당장 2018년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1라운더까지 배출할 정도로 나름의 저력을 가진 야구부였다. 그러나 대학교 입학 이후 자신의 실력이 프로에서 먹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야구부를 퇴단하고 교원 자격증을 따서(전공이 문학부였다.) 사가 현 공립고교 교사로 활동했으며 2004년에 모교 교사로 부임했다.[10] 단, 1980년 교사자격 취득 및 교사 부임 이후로 부임하는 곳마다 야구부 부장교사 또는 감독을 맡아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왔으며, 1992년 사가 동고의 고시엔 첫 출전, 2001년 사가 칸자키고의 고시엔 첫 출전 등 약체 공립고등학교의 고시엔 출전을 만들어낸 경험은 처음이 아닌 사람이긴 하다.[11] 모리모토 히초리, 야마사키 야스아키, 마츠모토 고 등 수많은 프로선수를 배출한 야구 명문고로, 하계 코시엔 도쿄 예선이 동/서부 2개 지역으로 분리된 이래 동도쿄 지역 고등학교로썬 유일하게 하계 코시엔 우승을 달성한 학교다.[12] 그 후 공립고교의 결승행은 꼬박 1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학교는 100회 대회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로 요시다 코세이의 가나아시 농업고교(아키타).[13] 메이지 대학교를 거쳐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1지명으로 입단. 201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2016년 센트럴리그 다승왕에 오른다.[14] 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지명으로 입단한 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포수를 맡게 된다.[15] 다만 코바야시는 프로 데뷔 후엔 수비력에선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심각하게 낮은 공격력이 발목을 잡으며 2019년 이후론 오시로 타쿠미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고 백업으로 밀려났다.[16] 노무라는 7회 초에 쿠보를 상대로 좌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때려내며 2타점까지 기록했다.[17] 직후 니카와는 대주자 마츠오 타카요시(松尾孝嘉)로 교체되었다.[18] 포수 미트에 들어온 위치는 확실히 스트라이크지만 타자의 몸 쪽으로 온 데다 백도어성 볼로 들어온지라 존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 듯하다.[19] 준결승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21타수 7안타 2홈런을 기록했으며, 홈런은 각각 첫 경기인 후쿠이 상고전, 8강 테이쿄전에서 쳐냈다.[20] 1994년 여름 대회 결승전에서 같은 현의 사가 상고(佐賀商業)가 가고시마현 대표 쇼난 고교(樟南)를 상대로 7회까지 3-4로 뒤지다가 8회 초에 4-4 동점을 만든 다음 9회 초 2사 만루에서 여름 코시엔 사상 최초의 역전 만루포를 작렬하며 8-4로 승부를 뒤집고 사가현 최초의 코시엔 우승팀이 되었다. 소에지마의 홈런이 3점차를 역전한 만루포임을 명시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1] 워낙에 잘 맞아서 코료 고교의 우익수 오카다 쥰키(岡田淳希)가 슬라이딩으로 이 타구를 끊지 못했으면 2루타가 될 수도 있었다.[22] 당연하지만 7회까지 1안타 무실점으로 건재하던 노무라가 대거 5실점을 하면서 무너진데다 사실상 다음 9회 초가 코료에게 마지막 찬스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코료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사가키타는 5득점으로 리드 중인 상황에서 마지막 이닝인 9회만 막아내면 되니까.[23] 결승전 4타수 3안타 1볼넷 기록[24] 나카무라 아키라(도쿄 테이쿄(帝京) 고등학교, 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나카 켄지로(토키와학원, 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사토 요시노리(센다이 이쿠에이(育英) 고등학교, 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이 포함되었고 운명의 상대인 노무라도 함께 뽑혔다.[25] 4학년이었던 2011년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때 2회전에서 강호 토요대학을 만나 탈락하는데 당시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였던 후지오카(현 치바 롯데 마린즈)를 상대로 마지막 타석에서 대형 파울 홈런을 날리기도 했지만 4삼진으로 침묵. 이 경기 이후 지금까지 해왔던 야구를 포기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이치마루가 이 경기를 스탠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26] 샤다라빠는 코시엔으로GO!에서 "누구도 프로나 대학에서 지명받지 못했지만..."이라고 표현했지만 프로 레벨에 진출한 선수가 없을 뿐이지 대학야구부에는 많이 갔다. 게다가 일본 대학야구도 그 수준이 매우 높은데다 숫자도 많아 대회도 많은 터라 굳이 프로에 가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야구를 실컷 할 수 있는 구조다.[27] 실제로 쿠보 타카히로의 경우 츠쿠바 대학 시절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로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졸업 후에는 고교야구 지도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28] 그만큼 이 경기의 역사적인 가치가 높았다는 점의 반증이다. 항목과 이 문서에도 설명했거니와 고시엔 대회 자체가 경쟁이 치열하고 특히 내로라하는 고교야구 명문고들을 꺾기란 쉬운게 아니다. 여기에 사가키타 고교 야구팀은 정식 학교 야구부도 아닌 동아리 부서와 같은 수준의 듣보잡이었다. 그런 팀이 전국 고교야구 명문고 중의 한 팀을, 그것도 결승전에서 잡아버린 것은 대단한 사건인 셈이다.[29] 2012년, 2014년, 2019년[30] 이 때의 감독이 바로 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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