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국프로야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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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이현곤의 타격왕
2.3. 현대 유니콘스의 팀 타율 1위
2.4. 김동주 두 자릿수 도루 + 최준석과의 더블스틸
2.5. 투수 20승 및 200이닝
2.6. 우규민 30세이브
2.8. 이호준의 3할
3. 애매한 경우
4. 부진했던 경우
5. 그 밖에
6. 비슷한 시즌



1. 개요[편집]



2007년 시즌 KBO 리그에서 일어난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한 일들의 일람.


2. 상세[편집]



2.1. 이현곤의 타격왕[편집]


2002년 입단 후 2006년까지는 잦은 부상과 부진 등으로 인해 타격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이 해에 타신이 들렸는지[1] 양준혁과의 타격왕 경쟁에서 1리 차이, 정확하게는 0.3378과 0.3371의 7모 차이로 반올림에 성공하면서 타격왕 + 최다 안타왕에 등극했다. 거기에 전 경기 출장[2]은 덤. 그러나 2007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서 3할은커녕 그 근처도 가지 못하고 매년 고질적인 부상으로 골골대며 별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대신에 광고소환에 눈을 떴다. KIA에서 자리를 잃은 뒤 2013년부터 NC 다이노스로 이적했으나 NC에서도 처참한 성적을 보여준 뒤 얼마 못 가 은퇴했다.

이후 BABIP를 통해 이현곤의 성적을 재조명했는데, 이현곤의 2007년 BABIP는 무려 0.379로, 개인 커리어 평균이었던 0.308, 리그 평균 0.311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았다. 그렇다고 이현곤이 BABIP를 올리는데 유리한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양산하는 중장거리형 선수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론만 말하자면 세이버메트릭스의 관점에서는 천운을 타고난 시즌.


2.2. 이승화, 이대형의 3할[편집]


2007년 이승화[3]는 비록 중간에 부상으로 인해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0.301의 타율을 기록했고, 올스타전 멤버에도 선정되었다. 이대형은 0.308의 타율에 도루왕을 차지하며 LG의 리드오프로 맹활약하고 KBO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그런데 2007년 이후에는 3할은커녕 2할도 힘든 이우민과 도루말고는 깝깝한 이대형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둘 다 내야안타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4] 다음해부터 상대팀들이 이에 대비해서 극단적인 전진 수비 시프트를 사용하면서 BABIP가 하락해서 성적이 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두 명 모두 실질적으로는 2007년이 첫 풀타임 시즌이었기 때문에 분석이 덜 되면서 3할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대응책이 나오자 그대로 성적이 급전직하한것.

이대형은 한동안 깝대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발과 수비 빼고 혹평을 들었지만, 2013시즌 후 FA를 통해 KIA로 옮긴 뒤 2014시즌에 타율 0.323을 기록하였다.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임을 감안해서 타율에서 2푼을 빼도 3할이다. 이때부터 정착한 특유의 타격폼을 기반으로 2016년까지 3년 연속 3할을 기록했고, 2016년에는 200안타에 근접한 192안타까지 쳤다. 본래 이대형은 배트를 돌리며 몸이 1루로 나가는 탓에 공이 제대로 맞지 않고 땅볼 타구만 나왔으나, 앞머리를 낮게 숙이는 타격폼을 만들자 타격시 앞발이 고정되어 타구질이 좋아지는 효과를 보며 BABIP가 상승했다. 아쉽게도 2017년 후반 주루툴에 치명이 갈 수 있는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고, 복귀는 했지만 결국 더이상의 활약을 남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이우민은 2017시즌 초반에 좋은 활약을 해주었으나 결국 내려갈 타율은 내려간다고 3할과는 좀 거리가 있는 타율을 기록했지만, 그래도 다른 시즌에 비해서는 좋은 활약을 하며 일명 10년 주기설이 돌았다. 2007년 이후 정확히 10년 뒤인 2017년에 좋은 활약을 보였으므로 이우민은 10년마다 한 시즌 잘한다는 의미.2027년이면 거의 50대 가까운데 감독으로 부임해 롯데의 우승을 이끈다고 합니다

2.3. 현대 유니콘스의 팀 타율 1위[편집]


KBO의 위탁 관리를 받을 정도로 멸망한 현대 유니콘스는 .271의 팀 타율을 기록하며 2위 롯데 자이언츠와 1리 차이로 팀 타율 1위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타율만 높은것도 아니라서 팀 OPS는 .729로 SK 와이번스에 이은 2위, 팀 홈런도 96개로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에 이은 3위였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스탯에 비해 팀 득점은 530점으로 고작 6위에 불과했다. 이렇게 비율스탯과 실제 득점의 격차가 큰데는 여러 추측이 나오는데, 일단 홈런은 클리프 브룸바 버프를 받아 3등이라지만 2루타+3루타는 전체 꼴찌에 그치며 중장거리 장타를 잘 생산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냉정히 말해 홈런도 당시 투고타저 영향이 커서 3등을 한거지 객관적인 수치로 보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2~3루타가 잘 나오지 않으니 생각보다 공격이 원활이 풀리지 않은 것. 여기에 51도루 36실패로 리그 도루 7위, 도루 성공률 최하위에 그친 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이 시즌이 워낙 투고타저였던만큼 강공 위주의 빅볼보다는 도루나 작전 위주의 스몰볼에 강점이 있는 팀들이 잘나갔다.[5] 문제는 홈런 빼면 장타도 안나오고 주루 플레이를 통한 득점도 안나오니 결국 타율에 비해 생산력이 뚝 떨어질 수 밖에 없던 것.

그나마 마운드라도 잘 굴러갔으면 모르겠으나 이해 현대는 투수진도 썩 좋지 못했다. 3점대 ERA를 기록한 선발투수가 김수경(3.88), 장원삼(3.63) 둘 뿐이었는데, 또 말하지만 이 시즌은 투고타저였다. 김수경과 장원삼은 저 ERA로 ERA+ 102, 110을 기록해 평균보다 살짝 좋은 수준이었다. 저 둘이 1, 2선발에서 버텼으니 3선발 이후는 뭐... 불펜에서는 조용훈. 송신영, 박준수가 호투하긴 했으나 저 셋이 전부였다. 거기에 수비도 좋지는 않았는데, 당시 기록의 한계상 완전한 수비 능력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리그 최다 실책, 최저 수비율을 보면 수비도 마운드를 도와주지 못한 듯 하다. 그래선지 평균자책점은 4.41, 팀 전체 자책점은 552실점으로 리그 7위인데, 실점은 612실점으로 리그 최하위다. 이해 KIA 타이거즈가 투타에서 총체적 난국을 보이며 최하위로 처진걸 생각하면, 그 기아보다도 실점이 많았던 것.

결국 현대는 7위에 그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 현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격 생산력을 보여준 한화 이글스가 리그 최소실점 3위를 기록한 마운드와 수비의 힘으로 가을야구까지 간걸 보면 현대의 부족한 투수력과 수비력이 하위권으로 처진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어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현대 유니콘스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고, 이후 현대의 선수들을 바탕으로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된다.

2.4. 김동주 두 자릿수 도루 + 최준석과의 더블스틸[편집]


커리어 내내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적이 없고 몸집도 꽤 있어 도루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보였던 김동주였지만, 이 해에만 11개의 도루로 커리어에서 유일한 단일시즌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다. 참고로 11개는 같은시즌 전준호(타자), 이우민(당시 이름은 이승화)과 동률이었으며 1번 타자였던 정수근, 박한이보다 1개 많은 수치였다. 사실 김동주도 고등학교땐 호타준족 유격수로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 비록 프로 입단 후 벌크업을 하는 바람에 체중이 증가하면서 발이 느려졌고 부상 위험으로 인해 도루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여전히 주루센스만큼은 살아있었고 그 덕에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해볼 수 있었던 것. 베이징 올림픽때 홈에 슬라이딩해 들어오면서 간결하게 손바닥으로 홈 플레이트를 찍는 장면이 김동주의 주루센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6]

사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07년 6월 9일 잠실 삼성전에서는 최준석0.15톤 더블스틸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24초부터[7] 이 도루는 최준석의 2007년 유일한 도루 시도이자 도루 성공이다. 사실 최준석도 고교때는 발이 빠르고 마른 포수였으며, 입단 당시엔 100m를 12초에 끊는 호타준족형의 포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하고 나서 같이 동거하던 이대호와 야식을 즐겨먹다보니 살이 쪄 도루능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FA로 롯데로 돌아간 시절에 비하면 두산 시절은 비교적 날렵하기도 했고. 물론 어디까지 비교적이라는거지 두산 시절 초반에도 이미 세 자릿수 몸무게를 찍는 거구였다. 이 더블스틸이 나온 2007년에도 두산 타자들 가운데 가장 무거웠고 가장 느렸다.

2.5. 투수 20승 및 200이닝[편집]


이 해가 투고타저임을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두산 베어스다니엘 리오스234⅔이닝 투구에 22승을 거두었고, 한화 이글스류현진이 211이닝을 투구했다. 이후로 20승 및 200이닝은 나오지 않다가 2012년에 넥센 히어로즈브랜든 나이트가 208⅔이닝 던지면서 5년 만에 200이닝을 넘긴 투수가 나왔다. 그리고 2013년은 레다메스 리즈가 202⅔ 이닝을 투구하면서 또다시 200이닝 투수가 나왔다. 그리고 2014년에 넥센의 앤디 밴 헤켄이 187이닝을 투구해 20승을 거두면서 7년 만에 20승을 달성한 투수가 되었다. 2015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조쉬 린드블럼NC 다이노스에릭 해커가 200이닝을 돌파했다.

그리고 2016년 두산 베어스더스틴 니퍼트가 20승을 기록했다. 같은 해 KIA 타이거즈 헥터 노에시양현종[8] SK 와이번스메릴 켈리는 200이닝을 달성하기는 했는데 메릴 켈리는 승수가 고작 9승이다(...). 2017시즌에는 10년 전과 다르게 타고투저였음에도 양현종헥터 노에시가 1985년[9] 이후 최초로 동반 20승, 선발승 20승 듀오로는 최초의 기록을 세웠으며 헥터 노에시는 200이닝 역시 돌파하며 다니엘 리오스 이후 11년만에 200이닝+20승 고지를 밟았다. 양현종은 1995년 이상훈 이후 두 번째 토종 좌완 선발 20승 투수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외국인 선수로는 2014년 10월 14일 앤디 밴 헤켄이 20승을 거둔 것이 처음이자 현재까지는 외국인 좌완 선발 20승으로는 유일하다. 이후 투고타저로 바뀌긴 했지만 2019년 조쉬 린드블럼이 20승과 194.2이닝을 기록했다.

한가지 씁쓸한 부분은, 200이닝+20승을 달성한 다니엘 리오스헥터 노에시 모두 금지 약물 복용 전과가 있다는 점. 차이점은 다니엘 리오스는 달성 후 타 리그에서 걸렸다는 점, 헥터 노에시는 이미 전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여담으로 다니엘 리오스는 이 해 6월 16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이진영, 박경완, 최정을 모두 3구삼진으로 잡아내 역대최초 1이닝 3타자 연속 3구삼진[10]을 잡아내 KBO 최초의 무결점 이닝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날 경기는 10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마이애미로 떠나 서둘러 장례식을 치른 뒤 15일 오후 5시10분에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하루 쉬고 16일 SK 와이번스전 선발 등판을 자청해 9회까지 3피안타 2볼넷 7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거둔 것이다. 시즌 9승(3패)과 평균자책점 1.74로 각각 이 부문 1위. 다니엘 리오스의 완봉투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SK 와이번스를 1-0으로 꺾고, 전날 뺏긴 1위를 하루 만에 되찾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슬픔도, 22시간의 장거리 비행과 14시간이나 나는 시차도 다니엘 리오스의 투혼을 막지 못한 것.[11]

또한 이 해 다니엘 리오스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8⅓이이닝동안 퍼펙트 피칭을 펼치고 8번 9번 타자만을 남겨둬 대기록을 목전에 뒀으나 부진하던 8번 강귀태[12]에게 3유간 빠지는 안타를 맞아 퍼펙트 게임노히트 노런이 날아갔다. 그리고 다니엘 리오스는 바로 강판됐고 덕아웃에서 손가락 욕을 날렸다. 그리고 이 해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고 리그 MVP까지 수상한 다니엘 리오스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뒀지만 4차전에서 쌩신인 김광현과의 대결에서 3일 쉬고 등판, 5이닝 8피안타 3실점을 기록하며 무너지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시리즈 패권도 내줬다. 그것도 승승패패패패로. 이 기록도 현재까지 깨지지 못하는 2007년만의 기록이다. 다만 2007년 한국시리즈 자체는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 와이번스 선수단의 비매너 플레이로 최악의 한국시리즈로 남았는데 그 이유는 2007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

2.6. 우규민 30세이브[편집]


후반기 체력이 떨어지면서 13블론세이브를 기록하긴 했지만[13] 이 해 우규민은 시즌 중반까지 오승환과 팽팽한 경쟁을 하였고 최종 성적으로도 30세이브를 기록해 오승환의 뒤를 이은 세이브 2위자리를 찍으며 LG의 새 수호신으로 우뚝 서는 듯했다. LG팬들은 김용수, 이상훈의 뒤를 잇는 철벽 마무리 투수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길 바랐지만….현실은 서울 불바다 다행히도 이후 경찰청 야구단에서 선발 투수로서 준수한 성적을 냈고, 2013시즌 이후 우규민은 선발 투수로 뛰면서 완봉승도 거두고 두 자릿수 승수도 올리며 FA대박까지 터뜨린다. 그리고 삼성에서 먹튀

그 당시 우규민의 투구스타일은 사이드암 보다 낮은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제구력은 떨어지지만 135키로대의 낮게 깔리는 힘있는 직구를 던저 땅볼을 얻어내는 스타일이였다. 그래서 힘이 떨어지면 털리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언더핸드 투수인 우규민을 김재박감독은 그냥 엄청난 혹사를 시켰다. 그래서 30세이브 중 20세이브 가까이를 전반기에 기록하였고 후반기에 블론세이브를 하며 꾸역꾸역 30세이브를 기록하였다. 이후 군대에서 회복되기 전까지 망가진 팔로 지속적으로 혹사를 당했다.

2.7. 양준혁20-20[편집]


양준혁이 이전에 20-20을 달성했던 적은 3번 있었을 정도로 준족이긴 했지만 가장 최근이 1999년, 2002년 이후로는 두 자릿수 도루는커녕 5개 이하의 도루 개수를 기록하다가, 2005년에 10개를 하고 2006년에 12개를 하더니 2007년에는 20개를 해서 만 38세의 나이로 덜컥 20-20을 달성해버렸다. 이로써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 20-20을 경신. [14] 발 빠르던 선수들도 나이를 많이 먹으면 도루 개수가 점점 주는데 마흔이 다 되던 나이에 20도루를 했으니….

그런데 양준혁의 19, 20호 도루는 강민호가 대놓고 도루를 허용했다.이때부터 삼민호의 기질이… 나름대로 대선배에게 예우한 듯. 물론 팀을 위해 도루를 막아야 할지 또는 대기록 수립을 위해서 허용해야 할지는 다각적으로 판단해볼 듯하다. 그리고 강민호는 이 일로 갈매기 마당 꼴리건 아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러나 이후 사례를 보면 2009년 6월 5일 이종범의 500도루[15]진갑용사례나 2009년 9월 25일 전준호의 550도루[16]차일목사례를 보면 보면 대기록에서 도루를 허용해주는 경우가 왕왕 있는 듯.

박경완 역시 20도루를 한적이 있다. 대채로 팀이 이기고 있을 때 기회를 봐서 도루를 시도하게 지시한다. 이는 팀이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승패에 비교적 자유로울 때 의식적으로 기록을 노리고 시도하며 팀에서도 그걸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통산 홈런과 도루 수만 보면 박재홍 다음으로 양준혁이 최고의 호타준족마냥 되어 버린다. 하지만 둘의 도루 성공률을 보면 성공률이 높은편이 아니다. 박재홍은 64%, 양준혁은 고작 61% 이다. 도루는 도루성공률이 70~71%는 나와야 본전으로 보는데 이 둘은 이 확률보다 성공률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리고 투수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서라도 성공률을 의식하지 않고 도루를 시도하는 톱타자 들과 달리 중심타선인 이 둘의 도루는 항상 이길 때 시도하고 심지어 성공률까지 낮기 때문에 투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결론은 이들은 타석에서나 부담스럽지 루상에서는 오히려 뛰어주면 땡큐인 케이스라 호타준족으로 보기에는 애매하다.

2.8. 이호준의 3할[편집]


1998년 해태 시절 때 0.303의 타율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평생 3할 타율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이호준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이탈했다가 부상으로 1년만에 돌아온 후 복귀한 2007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391 타석으로 규정 타석(390타석)을 아슬아슬하게 채우며 타율 0.313을 달성했다. 103경기를 뛰면서 당시 팀내 타점 1위, 타율은 정근우에 이어 팀내 2위이자 전체 8위, 홈런은 팀내에서 4위를 기록하며 2007년 SK의 통합 우승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2007년 시즌 후 이호준이 FA가 되었고 팬들은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는 그를 꼭 잡아야 한다고 하며 FA 릴레이까지 펼쳤다. 그리고 결국 4년 34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고 팬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계약 첫 해인 2008년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달랑 8게임 뛰고 시즌을 접고 말았고 2009년에는 타율 0.298을 기록하면서부터 다시 반등세(?)를 타는 듯 했지만 스탯관리만을 하며 돈값 못한다고 까였고 2010년과 2011년에는 기대에 못 미치고 말았다. 그리고 2012년 시즌, 504타석에 0.300의 타율과 18홈런, 78타점으로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호준이 이렇게 괜찮은 성적을 낸 이유가 다음 해가 FA라 FA로이드를 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팬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2013년 NC 이적 후의 활약으로 이것이 뽀록이 아님을 증명했다.


3. 애매한 경우[편집]



3.1. 한기주[편집]


한기주를 2007년 한 시즌 반짝이라고 하기에는 앞뒤인 2006년에 꽤나 솔리드한 모습을 보였으며 2008년에는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문제는 그런 한기주를 감독들이 엄청나게 혹사시켰다는 것. 고교 시절부터 혹사가 심했던 한기주는 입단 당시에도 이미 수술을 하는게 좋은 상태였다. 철저하게 관리해준다는 전제 하에 재활을 병행하며 기용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문제는 당시 감독이던 서정환은 그런거 없고 한기주를 죽어라 굴려댔다. 특히나 2006년에 그 혹사가 안좋은 쪽으로 빛을 발했는데 한기주 항목에 들어가보면 그 참담한 실상을 알 수 있다. 결국 조범현 감독 부임 후 수술을 원했으나 조범현은 마무리 투수가 갑작스럽게 빠지면 안된다며 수술을 두 차례나 반대했고, 결국 기아가 영광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2009년 한기주는 구위를 상당히 잃어버리며 추격조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기주의 모습은 우리가 잘 하는 수술과 기나긴 재활, 그리고 몰락이다.

정리하자면 한기주의 2007년 시즌이 미스터리로 꼽히기에는 그 전후 시즌에도 잘 했다는 문제가 있으며, 한기주의 몰락도 실력 문제보다 지나친 혹사와 관리 실패의 문제가 압도적으로 큰 만큼 이 시즌을 플루크로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해야 한다.


3.2. 임경완[편집]


임작가, 임천사, 사직불바다라는 악평을 들었지만 롯데에 저만한 불펜도 감지덕지였다. 2004년에 홀드왕을 딸 정도의 실력도 있었다. 그러나 양상문의 혹사로 허리가 망가지면서 기존의 구위와 각좋은 슬라이더를 상실했고, 결정구였던 싱커에 의존했으나 심판 성향에 영향을 많이 받는 구종이라 마무리에는 부적합했다. 여기에 포수는 직구 사랑 강민호. 게다가 유순한 성격상 긴박한 상황에 올라오는 마무리보다 중간계투가 더 어울렸는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무리한 기용 탓이 크다. 마인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났는 데도 계속 기용한 로이스터의 잘못도 크다. 덕분에 임경완은 임경완대로 욕먹고 강영식이 모든 부담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2009년 준수한 불펜으로 돌아왔다.


3.3. 강영식[편집]


본인의 새가슴 성격과 좌상바 기질이 문제였지만 제대로 된 좌완 불펜이 없는 롯데에 귀중한 자원이였다. 실제로 다음 해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양승호 감독 때 소위 '양떼불펜'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유일하다시피 한 좌완이라 엄청 굴려졌고 08시즌 언터처블이었으나 불펜 붕괴로 이후 시즌에는 다소 불가피하게 혹사당한 감이 있다.


3.4. 정민철[편집]


2005년에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인대가 손상됐으나 재활을 선택했다. 늦깎이 나이에 재활이였지만 2007년 10년 만에 방어율 2점대를 기록했다. 내용상으로도 썩 좋았던 편. 무엇보다도 이닝을 많이 먹은 덕분에 한화 마운드 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사사구 숫자와 피홈런 숫자도 작았다. 덕분에 시즌 초반 부상으로 전력 이탈된 문동환의 빈 자리가 훌륭하게 메워졌다. 때문에 언론이나 팬들 모두가 에이스 부활을 외쳤으며 일구상 재기 선수상을 차지했다. 올드 팬들은 류현진과 원투 펀치를 형성한 정민철을 보며 신구 에이스가 동시에 활약한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만 삼진이 적고 피안타가 많았고 방어율에 비해 FIP이 높았다.

그리고 다음 해 귀신같이 부진. 부진의 이유는 딱 봐도 노쇠화. 정민철의 나이도 어언 37세였으니. 특히 이닝 소화력이 크게 떨어져 25경기 127⅓이닝, 평균 5이닝을 간신히 채웠으며 후반기에는 5회도 못 채우고 강판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해 160승 고지를 돌파하긴 했지만 결국 류현진의 등장과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3.5. 박명환[편집]


도핑 경력이 있고 본인의 갑상선 질환으로 하락세가 보이던 시점이였다. 이 시절부터 부상이 잦은 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190이닝을 넘겨 본 적이 없으며, 특히 두산에서 보낸 마지막 두 시즌 역시 피안타율 2할대 초반, 이닝당 1개 이상의 탈삼진율 등 비율 성적은 매우 좋았지만, 부상으로 두 시즌 합쳐 234.2이닝 투구에 그쳤다. 구위로 먹고 사는 투 피치 파워 피처에게 유리몸은 최대의 약점이었으니, 결국 내구성 부족으로 FA 먹튀의 조짐이 보였다. 그럼에도 당시 FA 선수 수집에 돈을 아끼지 않던 LG 트윈스가 4년 40억 원이라는 거액에 그를 낚아챘다. 하지만 LG는 예전부터 FA 시장의 큰 손으로 불려오며 여러 명의 거액 FA를 영입했으나, 줄곧 실패한 사례가 많아 우려하는 반응이 많았다.[17]

박명환의 LG에서의 첫 시즌인 2007년에는 10승 6패 평균자책점 3.19, 155.1이닝 동안 117삼진이라는 나름대로 괜찮은 기록을 내며 전년도 꼴찌였던 LG를 5위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나 연봉 10억짜리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기록은 아니었다. 그 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부상에 시달렸다. 2008년 부상과 수술 이후에는 구속, 구위 모두 수준 이하의 투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3년 동안 던진 투구 이닝이 115이닝, 올린 승수가 단 4승이며, 이마저도 2010년 한 해 올린 승수이다. 그렇게 먹튀가 돼 방출됐으나 공백기를 거쳐 NC 다이노스로 이적해 황혼기를 불태워 나름의 유종의 미를 거두긴 했다.


3.6. 심정수[편집]


오버 트레이닝으로 인한 무릎 부상과 라섹수술 후유증의 피해자. 과거 우동수 트리오이자 이승엽과 불꽃튀는 홈런왕 경쟁을 할 정도로 파워 하나는 알아주었던 선수였다. 현대 시절 라섹 수술을 받은 후 시력 저하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심정수는 시력 검사로 인한 메디컬 테스트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눈을 문제 삼는 구단과는 얘기 안한다는 선언을 했고, 우타 거포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최대 60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이며 심정수를 영입한다.

첫 해인 2005년은 부상 악화로 부진이 심해져 먹튀 소리를 들었다. 물론 파워툴은 살아 있어 7번 타자로 내려가는 등 수모를 겪었지만 .275, 28홈런 87타점 OPS .903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망한 시즌이라는 게 OPS 9할이다. 게다가 시즌 홈런도 2위[18]를 기록. 그리고 2006년 초 수술을 결심하여 왼쪽 무릎과 오른쪽 어깨를 독일에서 수술하고 그 해를 통째로 재활에 날리게 되었지만 다음 해인 2007년 안경을 뿔테로 바꾸고 타석에 등장, 31홈런과 101타점을 기록하며 53홈런을 칠 때도 해보지 못했던 타점왕과 홈런왕 타이틀을 함께 거머쥐었다. 하지만 타율은 많이 떨어져서 1995년 OB 베어스의 김상호가 세운 25홈런, .272를 뛰어넘는 .258라는 최저 타율 홈런왕 기록을 수립하였다. 당해 시즌 초반에 극심한 타격 슬럼프가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 시즌에 심정수는 단 한번도 3안타 이상을 기록한 경기가 없었다. 즉, 시즌 초 부진이 그 시즌 전체 타율을 깎아먹게 된 셈. 그러나 세이버스탯을 보면 WAR 5.15에 wRC+ 153.8이라는 대단한 스탯을 기록한다. 타율은 .258이지만 출루율이 .381로 자기 타율보다 무려 1할 이상이 높아 OPS .896을 기록했으며, 더구나 이 시즌은 06에 이어서 투고타저 시즌이라 wRC+가 더욱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즉 07시즌은 낮은 타율 때문에 저평가된 케이스로, 세이버 관점에서 본다면 심정수의 07시즌은 매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팬들은 심정수의 정확도 하락에 대단히 아쉬워 하면서도 여전히 장타력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아쉬워 할만한 것이 해가 긴 여름에는 타율이 3할을 넘겼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2008년이 돌아오자 왼쪽 무릎 부상이 재발했다. 결국 시즌 아웃. 역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며 재기와 명예 회복을 노렸지만, 무릎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결국 33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택했다. 다음 시즌에 부활하리라는 보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삼성 팬들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팬들 입장에서도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19]


3.7. 고영민[편집]


전성기인 07, 08년에는 2할7푼 가까운 타율을 때려내며 활약을 했지만, 그 이후로 폭망 행진이 계속 이어지면서 07, 08년이 플루크 아니었냐는 평가가 대세. 사실 큰 문제는 극악의 컨택능력. 거기다 뻥스윙이라서 타율이 그렇게 높게 올라갈 수가 없다. 그나마 타율에 비해 출루율은 1할 가량 높고 볼넷도 많지만 못 칠 것으로 보이는 공은 그냥 아예 포기해버렸기 때문에, 이 때문에 삼진도 많고 루킹 삼진 비율도 높은 편이다.그래도 수비와 주루 능력은 KBO 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고, 쓸만한 출루율에 뻥스윙+강한 손목힘으로 만들어내는 뜬금포도 갖췄기에 타율이 너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주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으나, 그 타율이 점점 추락하고 2010년 이후 오재원의 대두로 인해 백업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2017년에 은퇴했다.


4. 부진했던 경우[편집]




4.1. 김재현(1975)[편집]


잠실을 오랜 기간 홈으로 썼는데도 통산 ops가 .860을 넘어가는 캐넌히터 김재현이 이 해엔 타율 .197,6할대의 ops를 기록하며 멸망했다. 2007년을 제외하면 커리어 내내 ops가 .785 이하로 떨어진 시즌이 없다!

그래서 감독 김성근과 갈등이 심했고, 트레이드 요청을 하거나 은퇴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그해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5. 그 밖에[편집]


  • 쌩신인 손용석(1987년생)이 백전노장 구대성(1969년생)을 상대로 역전 적시타를 친 것도 2007년의 일이다.
  • 2007년 7월 14일 LG 트윈스KIA 타이거즈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경기에서 1회초 무사만루에서 최희섭의 희생플라이로 이용규김종국을 불러들이는 2타점 희생플라이를 기록했다. KBO 역사상 여섯 번째이다. 일곱 번째는 2019년 9월 26일 한화 이글스와 NC 다이노스의 마산 경기에서 8회초 무사만루 상황에서 송광민이 기록했다. 출처
  • 사직 야구장에서 나온 최초의 장외홈런도 2007년이다.(2007년 4월 21일 상대 투수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 타자 이대호) 알다시피 사직 야구장은 타 구장에 비해 펜스 높이가 높아 홈런을 치기 힘든 구장이다. 그런데 그 구장에서 장외홈런이 나온 것이다. 현재 사직 야구장에는 첫 장외 홈런을 기념하는 동판이 당시 낙하지점에 있다.
  • 2007년 5월 4일이우민이 끝판대장 오승환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쳐냈다.[20]
  • 엠스플 선정 대첩 1위에 기록된 522 대첩도 이 해 나온 것이다.
  • 2007년 6월 13일에 그 나오기도 어렵다는 무보살 삼중살이 나왔다. MLB나 NPB에서는 퍼펙트 게임보다도 기록된 횟수가 적은 진기록인데, KBO에서는 퍼펙트 게임보다 먼저 나왔다. 2군에서도 퍼펙트 게임은 나온 적 있지만 무보살 삼중살은 없으므로, 2021시즌까지도 한국 프로야구를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기록. 자세한 내용은 무보살 삼중살 문서 참고.
  • 2007년 8월 29일에는 이종열한 이닝에 좌.우 양 타석에서 안타를 쳐냈다. 이 또한 2021년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 8개 구단 중 한화 이글스가 이상하리만치 우천연기 경기가 많았다.[21] 특히 한여름이었던 6월~8월 중에 우천취소된 경기가 많았고, 당연히 9월 이후 우천연기 경기 추가편성 기간에 그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그런데 9월 중에도 계속 우천연기가 걸리는 바람에 잔여경기가 계속 미뤄지고 말았고, 심지어 KIA 타이거즈와의 원정 경기 1경기는 준플레이오프 2일 전인 10월 7일에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10월 7일마저 광주에 비가 내리면서 우천취소. 결국 포스트시즌 예정일 전까지 정규리그 경기를 소화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KBO는 "한화의 포스트시즌 일정이 끝나면 차후 연기된 경기를 개최한다" 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결국 그 남은 1경기는 한화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3전 전패로 탈락이 확정된 다음에야 치러졌다. KBO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6. 비슷한 시즌[편집]


이와 비슷한 시즌으로 2009년이 있다. 주전-백업의 경계에 있던 수준의 선수에서 역대급 플루크 시즌을 보내며 MVP를 차지한 KIA 타이거즈김상현[22]이나 CK포로 같이 활약한 최희섭, 역대급으로 운이 따라주면서 BABIPFIP에 비해 0.53이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유동훈[23], 데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 홈런(12홈런)과 65타점 달성,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을 수상한 김상훈이나 95⅔이닝 투구에 평균자책점 4.05를 기록한 곽정철, 94이닝 투구에 5승 2패 12홀드 1세이브에 2.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수위급 불펜으로 활약한 손영민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우주의 기운 참조.

또한 준수한 성적과는 거리가 멀던 삼성 라이온즈강봉규신명철이 동반으로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하였고[24], 부상이 잦아 풀타임 출장이 힘들었던 SK 와이번스박재상이 2번 타자로 전 경기 선발출장에 성공하고 타율 0.295, 15홈런, 81타점, 33도루의 기록을 찍는 등 커리어에 길이 남을 플루크 시즌을 보낸 이들이 많았다.

박재상과 비슷하게 김원섭도 이해 100경기를 턱걸이로 뛰며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날아다녔다. 그러나 원래 간염 보균자였고, 그 전해와 2012년에도 100경기 100안타를 치고 타선에서 깨알같이 활약해 단순히 플루크라 보기 어폐가 있다. 다만 우주의 기운을 받은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데, 이 해 김원섭은 커리어하이를 찍은 것도 있지만 시즌 초반 무등구장에서 수비하다가 발목이 나가버린 이용규를 대신해 수비부담이 큰 중견수로 뛰면서 이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명단에 .372라는 역대급 타율로 타격왕을 수상한 LG 트윈스박용택[25]도 추가될 예정이었으나 평소에 2할대 후반을 치던 실력에서 이 시즌 이후 각성한 것인지 2018년까지 10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고 2000안타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서며 스스로 이 시즌이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이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비슷하게 KIA 타이거즈양현종이나 나지완, 안치홍 등도 본인들이 실력으로 증명하고 이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프로야구 최장시간 경기도 이 해 나왔는데 2009년 5월 21일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2009년/5월/21일 참조. 또한 2007년의 다니엘 리오스에 이어 KBO 역사상 두 번째 무결점 이닝도 나왔는데 2009년 5월 27일 금민철이 9회 서울 히어로즈클리프 브룸바 - 김일경- 송지만을 차례로 잡아내며 만들어냈다. 여기에 엘롯기의 일원으로 있던 KIA 타이거즈가 우주의 기운을 받아 2009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으나 다음 우주의 기운까지는 8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정말 이 해 KIA 타이거즈는 시즌 전 4강권 후보로도 예상되지 않았고, 실제로 팀타율 0.267로 8위로 최하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넌트레이스와 2009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해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다만 이는 변론의 여지가 있는게 KIA 타이거즈는 눈야구로 출루율 5위를 차지했고, 팀 장타율 4위, 홈런3위(156홈런), 팀타점 2위, 팀득점 3위로 정말 타율만 낮았을 뿐 강력한 OPS 기반의 야구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타선으로 우승을 차지하기까지는 힘들었지만 결정적으로 KIA 타이거즈에게는 우수한 투수들이 즐비했다. 이 해 KIA 타이거즈는 팀 평균자책점 2위, 최저 사사구, 최저 피홈런을 기록했고, QS와 WHIP도 1위였다. 상술된 2007년 현대 유니콘스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 핵심 전력이 플루크였다는 점이 독이었지만 당시 KIA 타이거즈는 강력한 선발투수와 마무리, 그리고 OPS를 기반으로 당시 선동열-김경문-김성근으로 이어지는 불펜 이어던지기와 기동력 야구를 직접 박살내고 팀타율 1위, 팀 평균자책점 2위를 기록한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해 2000년대의 야구를 끝내고 2010년대의 야구의 서막을 열었다.

타고투저의 광풍으로 2014시즌 이후 타격 지표에서 커리어하이를 찍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물론 대다수가 다음 해 전만한 성적을 못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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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서정환 감독으로부터 망치 타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2] 이현곤은 갑상선기능저하로 체력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그래서 경기 기복이 굉장히 심하고 경기 수도 적은편이다. 여름에는 쥐약이다.[3] 이우민의 개명 전 이름[4] 두 명 모두 2007년 안타 중에 내야안타 비율이 30%에 육박한다.[5] 1위 SK는 감독이 김성근이었으니 설명 생략. 2위 두산도 당시 이종욱-고영민-민병헌으로 이어지논 '육상부'를 위시한 스몰볼을 주로 활용했다.마침 당시 감독도 작은 김성근이었다[6] 김동주 이후 이와 비슷한 성향의 선수로 나지완을 꼽기도 하나, 사실 나지완은 주루 센스는 그냥저냥인데 체격 대비 주력이 꽤 빠른거라 체격 대비 주력이 그냥 나쁘지만 않은 수준인데 주루 센스가 뛰어난 김동주랑은 차이가 있다. 오히려 느린 발+좋은 주루 센스라는 점만 착안하면 소속팀 후배인 양의지가 더 비슷한 스타일. 물론 김동주도 동시대의 발 느린 거포로 유명한 이승엽, 심정수, 이대호, 김태균같은 선수보다는 당연히 빠르며 같은 팀이었던 손시헌, 이원석 같이 호리호리하지만 발이 느린 선수보다 빠르다. 당연히 양의지보다도 빠르다.[7] 게다가 이 날은 양준혁의 통산 2,000안타도 달성된 날이다.[8] 토종 선수로서는 2007년 이후 최초 200이닝 투구다.[9] 김시진, 김일융[10] 이전까지는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을 비롯해 송진우(한화 이글스), 손민한(롯데 자이언츠) 등 12명이 한 이닝에 10개의 공으로 삼진 3개를 잡아낸 게 최고였다. 플로리다 말린스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뛰던 지난 2002년 5월 12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서 한 이닝 9구 3탈삼진을 기록한 바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33번째로 나온 진기록.[11] 이날 최고 150㎞짜리 강속구를 뿌린 다니엘 리오스는 "내일이나 모레 던지면 오히려 더 피곤해진다. 차라리 오늘 던지고 4일간 시차에 적응하는 게 낫다"고 등판을 자청한 이유를 설명했다. 다니엘 리오스는 "특별히 아버지를 생각하고 던지진 않았지만 언제나 아버지가 곁에 계신다는 생각으로 공을 던진다"고 했다. 다니엘 리오스와 선발 맞대결을 벌인 SK 와이번스 에이스 케니 레이번도 9회까지 삼진 11개를 잡아내면서 안타 3개만 허용했지만 1점을 내준 탓에 패배의 멍에를 썼다. 시즌 2패(7승)째. 홈경기 7연승 행진을 이어가던 케니 레이번은 이날 패배로 '안방 불패'가 깨졌다.[12] 다만 강귀태 선수는 기록 브레이커로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강귀태 문서 참조.[13] 페넌트레이스 최종 순위 때 5위 LG가 4위 삼성과의 경기차가 얼마나지 않아 우규민의 블론세이브 수에서 몇 세이브만 더 챙겼으면 LG를 10년동안 괴롭힌 비밀번호가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14] 2021년에 추신수가 만 39세로 20-20을 기록하며 다시금 경신됐다.[15] 도루로 2루까지 진루한 뒤 최희섭의 적시타로 역대 4번째 1000득점도 달성했다.[16] 부상 이후 167일만의 도루였다.[17] 2001년 홍현우를 4년 18억으로 영입했으나 해태 시절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의 여파로 인해 그 후유증으로 부상과 부진이 연달아 찾아오며 퇴물로 전락, 2004년 진필중을 4년 총 30억으로 영입했으나, 두산 시절부터 김인식의 혹사로 망가진 그는 FA 직전 해인 2003년 이미 하락세를 보였고, 결국 진필패로 전락해서 2007년 방출, 마해영은 사실 계약은 2004년 KIA와 4년 총 28억에 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LG로 트레이드되면서 LG가 잔여 연봉을 대신 내줘야 했었다. 그렇게 해서 LG가 마해영에게 쓴 돈이 8억 남짓. LG의 FA 잔혹사는 이진영정성훈을 영입한 후인 2009년에야 끝난다.[18] 1위는 래리 서튼.[19] 당시에는 무릎 부상이 원인이었다고 밝혔지만 먼 훗날 2021년 인터뷰에서 라섹수술 후유증이 더 컸다고 밝혔다.[20] 여담이지만 이 날은 이우민의 생일이기도 하다.[21] 하지만 어찌보면 이는 한화가 이득을 본 것도 있는데, 시즌 중 우천연기가 계속되는 상황을 써먹으며 선발 로테이션을 '류현진-정민철-비-비-비-류현진 혹은 류현진-정민철-세드릭-비-비-류현진' 으로 주축 선발투수 3명을 적절히 돌려쓰는 희대의(?) 전략을 구축하기도 했다.[22] 그나마 kt wiz에서 한 시즌 부활하면서 이 시즌이 순도 100% 플루크는 아님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09시즌의 성적은 플루크가 많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기록할 수 없었을 괴물급 성적이었다.[23] 세부스탯은 57경기 출장(67.1이닝)에 6승 2패 22세이브 10홀드 3블론 4자책점 평균자책점 0.53에 WHIP 0.74 ERA+는 882.2로, 50이닝 이상 기준으로 09유동훈보다 더 높은 조정 평균자책점 시즌을 기록한 투수는 KBO 역사상 단 한명도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했다. 기록만 놓고 보면 93/95선동열, 11오승환, 07정대현보다 잘 던졌다.[24] 플루크 시즌이라면 비정상적인 BABIP의 증가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본인들의 통산 BABIP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신명철은 2010시즌에도 활약을 이어간 반면, 강봉규는 본인의 평균 커리어로 도로 되돌아갔다.[25] 졸렬택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그 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