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팍 샤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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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pac Shakur Discography

[ 정규 ]


[ 사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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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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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n Killuminati: The 7 Day Theory
(1996)
R U Still Down?
(1997)
Greatest Hits
(1998)
Until The End Of Time
(2001)
8집
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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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Dayz
(2002)
Loyal to the Game
(2004)
Pac's Life
(2006)

[각주]




투팍 샤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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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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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투팍 샤커
TUPAC SHAKUR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7년
후보자격 연도
2017년
후보선정 연도
2017년













투팍 샤커
Tupac Shakur


파일:2PAC.jpg

본명
투팍 아마루 샤커
(Tupac Amaru Shakur)[1]
출생
1971년 6월 16일
뉴욕 주 이스트할렘
출신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사망
1996년 9월 13일 (향년 25세)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웨스트찰스턴대로 1800번지[2]
유니버시티 메디컬 센터
거주지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그린마운트가 3955번지[3]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래퍼, 배우, 사회운동가
서명
파일:투팍 샤커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VEVO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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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빌리 갈란드(1949년생), 어머니 아페니 샤커(1947년 출생 ~ 2016년 사망)
배우자
케이샤 모리스(1995년 결혼, 1996년 사별)
파트너
키다다 존스[1]
학력
폴 로렌스 던바 하이 스쿨
타말파이스 하이 스쿨
볼티모어 예술 학교
신체
176cm, 75kg
혈통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명
2Pac[2], Makaveli, MC New York[3]
로고
파일:투팍 로고.png}}}
정당

종교
무종교(유신론)
활동
1989년 ~ 1996년
악기
보컬, 신디사이저, 드럼, 샘플러
장르
힙합, 웨스트 코스트 힙합, 갱스터 랩, 폴리티컬 힙합
소속
디지털 언더그라운드 (1990 – 1991)
떠그 라이프 (1992 – 1996)
레이블

1. 개요
2. 위상
5. 대중매체
5.1. 필모그래피
5.2. 다큐멘터리
6. 싱글
6.2. 빌보드 핫 100 2위~10위
6.3.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6.4. 빌보드 핫 100 21위~50위
7. 여담



1. 개요[편집]


미국래퍼, 배우.


2. 위상[편집]


힙합의 아이콘이자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고 대중과 평단 양 측으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4] 투팍과 비기는 역사상 최고의 랩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힙합 아티스트들로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생전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래퍼였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불법을 저지른 법조인에게 총까지 겨눴을 정도로 매우 투쟁적인 성격을 지녔다. 또 성공 후에도 거리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변함 없는 갱스터적 면모를 보였던 동시에 그 속에서 찾아낸 현실을 시적으로 녹여 쓴 가사와 그만의 리듬감 있는 랩으로 다양한 뮤지션들에게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아티스트 개인의 역량으로 봤을 때 가장 크게 인정받는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가사.[5][6] 그 외에도 갱스터 랩이나 파티 음악처럼 거칠고 화려한 힙합음악까지도 커버할 정도로 작사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투팍은 안정적인 랩 메이킹으로 빠르고 흥겨운 파티곡부터 느릿하면서 안정적인 느낌의 자전적인 곡까지 어떤 비트에서도 잘 녹아드는 랩 스타일이 특징이다. 또 투팍의 대표곡들을 보면 대부분 템포가 느리고 투팍 역시 느릿하게 그루브를 타는 곡들이 많아 타이트하게는 못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있는데, Above the Law의 Call It What You Want나 투팍의 Holler If Ya Hear Me, Digital Underground 시절의 Same Song을 들어보면 타이트하고 빠르게도 랩을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음색과 발성이 상당히 뛰어난데, 비기 역시 묵직한 랩 톤이지만 음색적으론 허스키하고 거친 느낌이라면 투팍은 웬만한 배우나 성우에 버금가는 굵직하고 깔끔한 목소리 톤이 매력으로 손꼽힌다. 투팍의 랩을 이후 시대 아티스트들과 리믹스했을 때도 목소리가 가장 귀에 탁 들어오는 느낌을 준다.

흔히 서부 힙합의 전설이 된 아티스트로 꼽히며, 동부 힙합의 전설로는 노토리어스 B.I.G.가 꼽힌다.[7][8]

그의 이름은 페루의 원주민 독립운동가였던 투팍 아마루 2세에서 따 왔다고 하며 예명도 본명의 Tupac을 변형시킨 것이다. 본토에서는 아직도 Tupac이라고 불린다. 더불어 '마카벨리'(Makaveli)라는 예명도 있다. 이 예명은 그가 데스 로우에 영입된 후 마키아벨리즘에 심취하여 지은 예명이다. 뉴욕에서 랩하던 시절엔 MC New York이란 예명으로 활동했다.[9]

래퍼와 프로듀서 및 영화배우를 겸함으로서 7편의 영화와 한 편의 시트콤에 출연했다. 그중 대부분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데뷔작 Juice는 힙합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Eazy-E, 투팍비기, 커트 코베인, 제프 버클리 등 미국 음악계에 길이 남을 천재들을 동시기에 잃은 미국 음악계는 당시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던 시기였다.[10]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투팍 샤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사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투팍 샤커 살인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디스코그래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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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pac Shakur Discography

[ 정규 ]


[ 사후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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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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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s-na.ssl-images-amazon.com/51435y6IkwL.jpg

The Don Killuminati: The 7 Day Theory
(1996)
R U Still Down?
(1997)
Greatest Hits
(1998)
Until The End Of Time
(2001)
8집
9집
1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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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Dayz
(2002)
Loyal to the Game
(2004)
Pac's Life
(2006)

[각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투팍 샤커/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대중매체[편집]



5.1. 필모그래피[편집]


  • 1992년 "Juice" (갱스터 랩)
  • 1993년 "Poetic Justice" (포이틱 저스티스)
  • 1994년 "Above the Rim" (할렘덩크)
  • 1996년 "Bullet" (블렛)
  • 1996년 "Gridlock'd"
  • 1996년 "Gang Related" (갱 릴레이션)


5.2. 다큐멘터리[편집]


  • 1997: Tupac Shakur: Thug Immortal
  • 1997: Tupac Shakur: Words Never Die (TV)
  • 2001: Tupac Shakur: Before I Wake...
  • 2001: Welcome to Deathrow
  • 2002: Tupac Shakur: Thug Angel
  • 2002: Biggie & Tupac
  • 2002: Tha Westside
  • 2003: 2Pac 4 Ever
  • 2003: Tupac: Resurrection[11]
  • 2004: Tupac vs.
  • 2004: Tupac: The Hip Hop Genius (TV)
  • 2006: So Many Years, So Many Tears
  • 2007: Tupac: Assassination[12]
  • 2009: Tupac: Assassination II: Reckoning


5.3. All Eyez on Me[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올 아이즈 온 미(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싱글[편집]



6.1. 빌보드 핫 100 1위[편집]




6.2. 빌보드 핫 100 2위~10위[편집]




6.3. 빌보드 핫 100 11위~20위[편집]


  • I Get Around (1993)
  • Keep Ya Head Up (1993)
  • Smile (1997)[13]
  • Thugz Mansion (2002)
  • Runnin' (Dying to Live) (2003)


6.4. 빌보드 핫 100 21위~50위[편집]


  • Are U Still Down? (1998)[14]
  • Do for Love (1998)
  • Changes (1999)
  • So Many Tears (1998)


7. 여담[편집]



  • 2Pac Legacy Net2PAC13이라는 그에 대한 상당히 많은 정보가 담긴 팬사이트가 있다. 그의 인터뷰, 미발매 앨범 프로젝트, 다양한 일화 등이 담겨있으니 참고하자.

  • 이 시대, 그리고 서부 힙합이 늘 그래왔듯이 가사에는 폭력마약 그리고 섹스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흑인의 인권과 빈민가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실제로, 투팍의 무덤에는 "I'm not saying i'm gonna change the world. But I guarantee that I will spark the brain that will change the world."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이를 해석해보면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세상을 바꾸는 생각에 불을 붙일 수는 있다고 장담한다."[15]라는 의미이다.

  • 그의 슬로건인 '깡패 같은 삶(Thug life)'라는 말 자체가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자신 같은 사람을 일컫는다. 말 그대로 깡패같이 살겠다는 말이 아니라, 깡패취급 당하는 소외된 비주류들의 삶을 의미한다. 험난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상당히 시적인 가사를 써서 이 분야에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평을 받는다.[16]

  • 투팍 사망 당일인 1996년 9월 13일, Playboi Carti가 정확히 그 날짜에 태어났다.


  • 괴물같은 작업 속도를 자랑했었다. 하루에도 몇 곡씩이나 녹음을 끝냈다고 한다. 한 곡 녹음을 끝내면 바로 다음 비트를 틀라고 하고 새로운 녹음으로 들어갔다. 한 곡 녹음에 막혀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일단 녹음부터 끝내고 나중에 보강을 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 이러한 공장장스러운 스타일인 투팍과는 정반대로 서부 최고의 프로듀서 닥터 드레는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한 문장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 때까지 무한 반복시킬 정도로 작업 속도가 느리기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둘은 데스 로우 레코즈(Death Row Records)에 같이 몸 담을 당시 서로 맞지 않아서 인간적으로도 별로 친하지 않았다. 특히 스눕 독이 살인 가담 혐의로 재판을 받을 당시 투팍 본인을 포함한 데스 로우 멤버들이 스눕 독의 재판에 찾아가 스눕 독을 응원한 반면 드레는 재판에 나타나지 않자 투팍은 이를 매우 아니꼽게 보았다고 한다.[17][18]

이후 드레가 데스 로우를 떠나자 투팍은 인터뷰에서 “그 놈은 좋은 프로듀서지만 몇 년동안 놀고만 있었지. 난 거기에 신물이 났고. 내가 밖에서 직접 다른 놈들과 전쟁을 하고 앨범을 낼 동안 그 자식은 집구석에서 ㅈ이나 빨며 놀고 있었어! 3년동안 달랑 한 곡 만들었다고!”라며 쌍욕을 퍼부었다. 또한 투팍의 유작이 되는 The Don Killuminati: The 7 Day Theory의 Toss It Up 트랙에서는 사랑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두번째 벌스에서 드레를 디스했다. 드레는 이러한 투팍의 디스에 반응한 적 없고, 콘서트 투어 등에서 자신과 투팍이 같이 작업했던 California Love를 틀며 투팍을 추모한다. 2022년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는 캘리포니아 러브는 물론, 잠깐동안 피아노로 투팍 4집의 I Ain’t Mad At Cha를 연주하며 투팍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 데스 로우 시절 중반까지는 스눕 독과 절친한 사이였으나[19] 나중에 크게 틀어졌다. 그 시작은 1996년 5월 4일에 방영된 Saturday Night Special 방송이었다.# 원래 둘은 함께 2 of Amerikaz Most Wanted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투팍은 모습을 드러냈으나, 호텔에 있던 스눕 독은 일방적으로 방송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투팍은 크게 분노.[20] 이후 이 둘은 투팍 사망 3일 전인 9월 3일에 있었던 MTV와의 인터뷰 때까지 같이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인터뷰도 투팍만이 주도할 뿐 스눕 독은 그냥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인다.#[21]

여기에 원래 스눕 독은 투팍과 함께 노토리어스 B.I.G.퍼프 대디의 배드 보이 레코즈를 까고 있었는데,[22] 스탠스를 바꾸고 뉴욕 라디오 방송에서 그들을 좋아하고 존중한다고 밝혔다.[23] 스눕 독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게 된 투팍은 이에 크게 분노해 뉴욕에서 LA로 돌아오는 길에 스눕 독이 걸어오는 말을 전부 무시했다.[24] 스눕 독은 투팍이 라스베이거스에서 돌아오면 그 때 풀 생각이었으나, 그는 앞으로 영영 투팍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앙금없이 투팍을 기리는 이벤트에 앞장서고 있으며, 자신의 공연에서 투팍과 같이 작업한 곡을 할 때마다 투팍을 추모하고 있다. 2012년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에서 스눕 독의 무대 도중 홀로그램으로 부활해 사후앨범의 Hail Mary를 부른 다음 스눕 독과 둘이서 같이 4집의 2 of Amerikaz Most Wanted를 부르기도 하였다.[25] 또한 투팍이 201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오르자 투팍에 대한 소개 멘트를 하고 대리 수상을 한 사람도 스눕 독이었다.#

  • 사후에도 앨범이 계속 나오고 있다. 특유의 빠른 작업 속도를 바탕으로 살아있을 적 이미 수백 곡을 녹음해놨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계속 앨범이 나오고 있는 것. 이쯤 되면 생존설이 생길 만도 하다. 미스터리 갤러리의 유명한 꾸준글 중에는 '투팍은 살아있다'라는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꾸준글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곡들은 앨범에 발매되지 않을 만한 퀄리티라는 점, 같이 껴서 나오는 기존 곡들의 리믹스가 개판이라는 점 등에 의해 사후 앨범은 계속해서 까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래퍼라는 위상에는 변함이 없을 듯하다. 애초에 투팍이 자의적으로 낸 앨범이 아니기에 본토에서도 이를 그의 커리어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저 그를 추억하기 위한 노래 모음집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한다. 만약 정말로 살아있는 상태로 앨범을 계속 냈다면 현역 시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작업물들을 계속 보여줬을 것이다. [26]

  • 생전에 다큐멘터리를 통해 책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손무의 <손자병법>, 조지 오웰의 <1984>, 허먼 멜빌의 <모비 딕>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 말콤 X의 자서전 등 다양한 책들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앞서 서술하였듯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특히 좋아하여,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조금 바꾼 마카벨리(Makaveli)를 자신의 별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서광으로서의 면모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원점 수사>에도 나온다. 투팍이 읽은 책을 정리해놓은 목록도 있으니 투팍의 철학을 이해하고 싶다면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감수성 때문인지 직접 시를 쓰기도 했고 1999년에는 투팍이 직접 쓴 시를 모아 'The Rose That Grew from Concrete'라는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 유명한 영화 사회에의 위협에 나올려고 했으나 역할에 대한 견해차로 감독을 폭행하고 짤렸다. 투팍은 데스 로우에 계약한 후에 감독인 휴즈 형제와 화해했다.

  • 아웃로우즈의 멤버이자 투팍의 절친이었던 야키 카다피도 투팍이 죽고 2달 후 살해당했다. 또 투팍이 1994년 총격을 당하고 정확히 1년 후에 Thug Life의 멤버 스트레치가 사망했다.

  • 죽어서도 비기이지 이와 더불어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더 게임 같은 베테랑이나 켄드릭 라마, 제이 락, 스쿨보이 Q 등 2013년도 즈음 확 뜬 신인래퍼들에게도 상당한 리스펙을 받는다.[27]

  • 이걸 투피에이씨로 혹은 투팩으로 투팍으로 읽느냐에 따라서 힙덕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골라낼 수 있다.[28] 일단 본인이 자기 이름을 '투팍'으로 읽었으니 그렇게 불러주는 게 맞지만, JAY-Z도 지적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투팩'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일단 'tupac' 이라는 스펠링을 보면 '투팩'이 자연스럽고, '투팍'이라고 읽는 것은 서부식 미국 흑인 영어 발음이다.[29] 투팍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후로는 오히려 반대로 'pac'을 '팩'으로 읽어야 하는 곳에 '팍'으로 읽는 경우가 많아졌다.[30]

  • 사실 투팍과 비기가 살아생전 나온 앨범의 라이센스 버전에는 100에 99는 평론가들의 짤막한 평론이 담겨있었는데, [31] 당당하게 투이라고 적혀있는 버전이 투팍이라고 적혀있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힙찔이들의 논리대로 본다면 힙알못들이 앨범 리뷰와 평론을 했다는 말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물론 투팍의 이름이 친숙해진 현 시점에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가벼운 일이 되었다.

  • 투팍의 사망사건이 타임지에서 선정한 미해결 힙합 살인사건 탑 10중 1위에 올랐다.


  • 그가 생전 직접 찍은 마지막 뮤비는 Toss it Up이다.


  • 2016년 03월 30일에 투팍의 전기인 '투팍 샤커'가 출판사 1984에서 출간되었다. 번역자은 국내 1세대 힙합 래퍼인 UMC/UW이다.

  • 네이버 웹툰인 연애의 정령 75화에서 힙제이가 주인공에게 방해되는 사람들을 쓰러트리면서 "투팍의 곁으로!"라고 한다. 캐릭터 이름이랑 위 말을 보면 알겠지만, 약간 힙찔이스러운 면이 좀 있다.

  • 데프콘이 힙합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투팍의 음악을 듣고나서부터였다고 한다.[32]

  •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과도 꽤 깊은 우정을 주고받은 사이였다. 데뷔 전 Shock G의 소개로 알게 되었으며 타이슨의 경기에 참석하기도 하고 타이슨은 투팍을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투팍은 라스베가스에서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관람한 후 같은 경기를 관람한 갱단에게 그 날 밤 살해당했다. 투팍이 사망한 후 타이슨은 그를 추모하면서, 투팍을 죽인 사람과 딱 5초만이라도 링에서 만날 시간을 달라고 하며 분노하기도 했다. 투팍은 Ambition Az Fighta(Ambition Az Riadh의 다른 버전)과 Road To Glory, Let's Get It On 등의 타이슨 헌정곡들을 만들었으며 타이슨 또한 투팍 사후 첫 경기에서 Toss It Up을 틀었다.

  • 현재 활동하고 있는 래퍼 중에서는 프레디 깁스가 투팍과 닮은 외모로 잘 알려져 있다. 외모와 중저음톤의 래핑, 현재 래퍼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팬들이 종종 '투팍의 재림'이라고 부르는데, 정작 깁스는 "투팍은 내가 아는 최고의 래퍼이며, 그 옆에 내 이름이 끼는 것 조차 말이 안된다."라며 오히려 이 별명에 대해 부담스러워 하는 인터뷰를 했다.[33]

  • 에미넴이 투팍의 어머니에게 자필로 편지를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편지 내용에는 "아드님은 힙합의 세계뿐만 아니라 제 음악에 큰 영감을 주었으며, 커리어 전체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며 투팍에 대한 리스펙을 보였다. 또한 투팍이 죽었을 때의 인터뷰도 있는데 그날 에미넴은 레스토랑에서 알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 알게 된 것은 TV를 보면서 일하다가 알았으며 그걸 알게 된 에미넴은 큰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투팍을 모르는 직원들은 에미넴과 투팍을 아는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야? 그게 뭐가 대수라고 일이나 해."라고 했다고 한다. 에미넴은 정말 오랫동안 X같은 날이라고 했고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힙합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안 애도를 했다고 밝혔다.#

  • 그가 사망하고 6개월 후 그와 힙합계 양대산맥이었던 The Notorious B.I.G.도 역시나 총격으로 인해 뒤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동부와 서부의 거장들을 고작 반년만에 모두 떠나보낸 힙합 음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 파일:Tupac_communist_card.jpg
미국 공산당 메릴랜드 지부 청년조직 회원이었다. 사진은 투팍의 회원증. 나이롱 회원도 아니라서 지역 내 사회운동도 활발히 했고 심지어 볼티모어에 있는 공산당 지부장 딸이랑 사귀기도 했다고 한다. 친모와 양아버지가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흑표당 당원이었던 것은 덤. 이름부터가 페루의 원주민 출신 독립운동가 투팍 아마루 2세이다.


  • 투팍 본인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1992년 인터뷰 영상. 돈이 많은 사람들을 예로 도널드 트럼프, 마이클 잭슨을 언급하며, 부자들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투팍 본인도 돈이 많진 않지만 지나가는데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냥 지나치면 죄책감이 든다고 한다. 뭐라도 줘야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34] 흑인 아이들, 멕시코 아이들, 한국 아이들, 누구든지 우리 모두 죽기전에 도와줘야한다고 한다. 실제로도 투팍은 매우 어렵게 살았던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가난을 정말 잘 알고 있다. 이후 래퍼로 성공해서 재단을 설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으로 인해 한국과도 간접적인 인연이 생겼다. 흑인 여성에게 바치는 자신의 대표곡 "<Keep Ya Head Up>"의 뮤직 비디오를 라타샤에게 헌정했다. 다른 곡에서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 돼. 주스 한 병 때문에... 죽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게 아니잖아”[35]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의 다른 곡 에는 한국인을 욕하는 가사도 있다.[36][37]

  • 그 외에도 god의 대표곡인 어머님께의 저작권 소유자다. 이 노래가 그의 Life Goes On라는 곡의 멜로디와 Dear Mama 라는 곡의 가사를 조합하여 표절한 곡이라는 의혹이 있었는데, 당시 god 소속사였던 JYP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들을 인용한것을 시인하고 저작권을 포기하고 투팍 측에 넘긴 바 있다. 다만 이 일이 발생한 게 투팍의 사후 3년이 지난 뒤에 발생한 일이라서 실질적인 수익은 투팍의 유족과 저작권 위탁 주체에게 돌아가고 있다.

  • 경주마인 에어 샤커가 이 이름에서 따왔다. 성격이 투팍처럼 난폭한지 전설의 아이돌 기수조차 머리속이 궁금하다 할정도로 엄청 고생했으며 스탭들도 에어 샤커가 있는 마방 관리를 제비 뽑기로 결정을 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 경주마를 모델을 한 동명의 캐릭터가 나온다.

  • 2023년 9월 30일, 미국 경찰이 그를 살해한 용의자를 27년만에 검거하였다는 기사가 나왔다.해당 기사, 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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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당시의 이름은 Lesane Parish Crooks였지만, 이듬해에 개명되었다.[2] 1800 W Charleston Blvd, Las Vegas, NV 89102, United States[3] 3955 Greenmount Ave, Baltimore, MD 21218, USA[4] 힙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비기와 함께 이름 정도는 한 번쯤 들어 봤을 정도로 영향력과 파급력이 큰 아티스트다.[5] 과언이 아니라 Nas, JAY-Z, Mos Def, Common, Lupe Fiasco, Eminem, Kendrick Lamar, Big L, Big Pun, MF DOOM 그리고 The Notorious B.I.G.와 같이 힙합 역사상 최고의 리릭시스트를 뽑으라 하면 항상 최상위권에 놓인다. [6] 철학적인 가사는 'Me Against the World'의 4절 가사에서, 컨셔스 랩 가사는 'Changes'와 'Keep Ya Head Up'의 가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가사 해석을 보며 듣는 것을 추천한다.[7] '동부와 서부를 대표한다'는 말은 언론들이 먼저 시작했고, 결국 기획사들 간의 수입을 위한 피튀기는 경쟁의 수단, 희생자들이었다 보면 된다. 결국 모든건 인기와 돈이 원인이기 때문에 투팍도 1, 2집 때의 순수한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에서 화려한 서부 갱스터랩으로 색깔을 조금 바꾸면서 동부, 서부간의 음악적인 색깔 대립으로 더 유명해진 케이스이다. 비기도 길거리에서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이후 사업가이자 프로듀서인 퍼프대디가 비기를 보고 돈냄새를 맡았는지 서부 힙합계와 투팍에 견줄 동부 힙합의 스타로 앨범 데뷔한 케이스이다. 물론, 투팍과 비기는 둘 다 어마어마하게 랩을 잘하기는 한다.[8] 비록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고 장르도 다르지만,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대서양 건너편에서도 언론과 지역사회가 주도한 같은 장르 안의 아티스트들 간의 살벌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브릿팝 전쟁은, 미국으로 따지면 힙합 씬이 아니라 그런지 록 씬에 가깝다.[9] 이후 투팍이 뉴욕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동부 래퍼들을 싸잡아 디스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때문에 해외 힙합 골수 팬들은 "서부의 왕이 사실 동부의 래퍼"라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10] 모두 불과 1994년~1997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11] 죽은 투팍 본인이 나래이션을 하는 영화로, 과거 그의 인터뷰 녹음들에서 적절한 구절을 따와 입혔다. 다큐멘터리 영화중 가장 유명하다. 완성도 또한 높아서,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12] 그의 사망사건에 대해 진실을 폭로함으로서 세계적인 이슈를 몰고온 다큐멘터리[13] 스카페이스의 곡을 Johnny P와 함께 피쳐링.[14] Jon B.의 곡에 피쳐링.[15] 그가 1995년의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했다.[16] 1994년 총격사건 이후 Death Row에 들어간 이후로는 가사에 사회 문제보다는 돈, 마약과 같은 이야기를 더욱 많이 쓰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가사들조차 매우 유려하게 썼다. [17] 다만 투팍과 같이 안 갔던 것 뿐이지, 드레도 스눕 독의 재판에 따로 참석한 적이 있다.[18] 데스 로우의 CEO이던 슈그 나잇의 주장에 따르면, 드레가 스눕 독의 재판에 가지 않은 이유는 인터스코프 측이 드레에게 스눕 독이 무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은 없으니 갈 필요가 없다고 해서였다고 한다. 스눕 독과는 화해한 것과는 달리 슈그 나잇은 여전히 드레를 싫어하고 그를 깎아내리는 발언들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사실인지는 불명. 참고로 슈그 나잇은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자신의 슈퍼스타인 스눕 독이 끝끝내 무죄판결을 받게 하였다.[19] 투팍이 수감 중일 때 슈그 나잇에게 투팍을 데스 로우에 데려오자는 말을 꺼낸 것도 스눕 독이었다고 한다.[20] 데스 로우의 CEO이던 슈그 나잇을 비롯한 일부 증언에 의하면 스눕 독은 그동안 투팍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던 데스 로우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닥터 드레가 데스 로우에서 이탈하면서 불만이 시작된 듯하다. 당시 데스 로우에는 스눕 독, 대즈 딜린저, 네이트 독, 커럽트, 레이디 오브 레이지 등 드레가 데려온 아티스트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는데 불화로 인해 그들의 수장격인 인물이 나가 버렸으니 당시 내부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21] 이 인터뷰에서 투팍은 동부와 서부의 전쟁은 미디어가 만든 허상일뿐 비기와 본인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며 사태를 무마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인터뷰를 할 때쯤 그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동부 레이블 래퍼들과의 합작품인 One Nation이라는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다.[22] 투팍과 스눕 독은 같이 비기와 퍼프 대디를 디스하는 곡을 녹음하는 도중이었으며, 스눕 독은 그 전에 Keep It Real Dogg이라는 곡에서 비기 디스 벌스를 쓰기도 했다.[23] 오늘날까지도 이런 스눕 독의 앞뒤 다른 행보를 비판하는 팬들도 많은 편이다.[24] 투팍 뿐만 아니라 슈그 나잇도 LA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스눕 독의 말을 전부 무시했다고 한다. 슈그 나잇을 비롯한 데스 로우의 방식을 잘 알았던 스눕 독은 자신이 공격당할 줄 알고 반격하기 위해 포크를 집어 자신의 담요 아래로 숨긴 다음 돌아오는 비행 내내 긴장 상태였다고 한다. 실제로 공격 받지는 않았다고.[25] 홀로그램을 제작한 회사는 Digital Domain으로 타이타닉,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같은 유명 영화에 참여한 적이 있었으나 파산했다.[26] 이와 별개로 투팍 생존설은 밈으로 정착한 상태. 상기한 꾸준글 형태가 대표적이고 Remove Kebab과 엮어서 위대한 세르비아에 살아있다는 꾸준글이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은퇴 농장에서 함께 살고 있다던가 등의 바리에이션들이 존재한다.[27] 그래서인지 투팍을 보고 '래퍼들의 래퍼'라고 하기도 한다.[28] 이와 비슷하게 한국에선 2Pac을 '투팍'으로 읽냐 아니면 '팍'으로 읽냐로 구분하기도 한다.[29] 사실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름 읽는 사람이 없는 리아나도 그렇고 비욘세도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비욘스'라고 불렸다. 문제는 한국 리스너들에게 '투팍을 투팩이라고 발음하는 건 힙알못'이라는 일종의 밈이 생겨버린 것. 더 콰이엇의 '그것은 힙합 혹은 발라드'라는 곡에도 '2PAC 그건 투팩으로 읽지'라는 구절이 있다. 참고로 이 곡은 음악으로 부심부리며 X문가질 하는 사람들을 까는 곡이다. 허나,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힙합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 조차도 '투팍'이라는 이름에 대해선 익숙해졌기에 사실상 사라진 밈이나 다름없어졌다. 그리고 해당 인물이 실제로 불리는 방식으로 이름을 불러줘야 하는 것이 일종의 예의이기에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30] 가장 대표적인 예로 프로레슬러 PAC이 있는데, 본토에서도 해당 링네임을 '팍'으로 읽는 경우가 매우 많아서 유명 프로레슬링 평론가인 데이브 멜처가 '팍'이 아닌 '팩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한 바가 있다.[31] 라이센스 버전 해외음반들은 거의 다 앨범 리뷰가 첨부되어 나온다. 이는 라이센스 버전만의 묘미[32] 여담으로, 투팍이 죽은 건 당시에 워낙 큰 이슈여서 한국의 라디오에도 투팍이 죽었다는 소식이 간간히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데프콘은 알바를 하다가 투팍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33] 사실 닮은 외모 때문에 생긴 별명일 뿐이지, 둘의 음악 스타일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프레디 깁스를 '투팍의 재림'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34] 영상에 언급된 마이클 잭슨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어린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특히 1992년에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해 세계 곳곳에 가난하고 아픈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35] Something 2 Die 4[36] Korean motherfuckers was crooked. so niggas had to burn and loot 'em. 미공개 곡이었으나 그의 사후 음반으로 공개되었다.[37] 다만 이후 부자들은 미국사회의 가난하고 불우한 흑인, 멕시코, 한국 아이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한걸 보면 한국인들 자체에 대한 깊은 증오가 있었거나 그러했건 건 아닌듯 하다. 애초에 한국 아이들을 언급한 것 자체가 미국의 한국인들이 흑인들과 비슷한 포지션의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꼈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