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년의 음모

덤프버전 :

1. 개요
2. 전초
2.1. 4세기 브리타니아의 상황
2.2. 야만인들의 합종연횡
2.3. 브리타니아의 무정부화
2.4. 로마군의 반격 실패
3. 진압
4. 여담

367년의 대 음모
영문 : The Great Conspiracy of 367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말기, 발렌티니아누스 1세 제위기에 브리타니아 관구에서 시작된 일련의 대규모 야만인 침략과 반란을 의미한다. 색슨족, 픽트족, 하드리아누스 성벽 북부의 브리튼인, 아타코티족, 스코트족, 칼레도니아족이 결탁한 대규모 이민족 침략으로 인해 1년간 브리타니아 관구 네 개 속주와 갈리아 북부의 해안지대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2. 전초[편집]



2.1. 4세기 브리타니아의 상황[편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원정 이후, 하드리아누스 장벽 남부의 브리타니아 지역은 다른 국경 속주에 비해 야만족의 공격에서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비록 더 북쪽의 안토니우스 장벽이 버려지기는 하였지만, 두 장벽 사이의 지대는 아직까지 조금이나마 로마의 권력이 닿고 있는 상황이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장벽을 넘어 더 북쪽의 픽트족들을 공격하였고, 콘스탄스 황제 또한 343년경 성공적인 성벽 너머의 원정을 완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세기 중엽에 다다르며, 브리타니아 속주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참칭 황제 마그넨티우스를 콘스탄티우스 2세가 진압하는 사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는 마그넨티우스의 잔당과 이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한 잔혹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브리타니아 관구장(Vicarius) 플라비우스 마르티누스가 파견된 감찰관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자살을 종용받을 정도로 브리튼의 사회가 혼란해진 상황에서, 브리타니아로 망명가거나 유배보내진 많은 인물들은 공공연하게 반란의 조짐을 나타냈다.

특히 프라에펙투스 우르비의 직위를 가졌던 실력자 막시미누스의 처남 발렌티우스가 그 음험한 두각을 나타내었다. 중죄[1] 막시미누스의 입김 덕에 겨우 극형을 면하고 브리타니아로 유배된 발렌티누스는 조금씩 범죄자들과 지방군 일부를 매수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2. 야만인들의 합종연횡[편집]


이와는 별개로. 브리타니아 인근의 야만족들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넘기 위해 거대한 연합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시기의 로마 제국은 내우외환을 겪고 있기는 하였지만,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몇십 년 전부터 로마군은 꾸준히 장벽 너머의 픽트족과 반 로마파 브리튼인, 칼레도니아인, 스코트인, 아타코티인등은 자신들을 북부로 몰아내고 통행과 무역을 장악한 로마인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발적인 장벽에 대한 기습이나 약탈 외에는 로마에게 타격을 줄 방법이 없었으며, 훗날 스코틀랜드가 될 외 브리타니아 북방의 척박한 땅에서 서로 반목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360년대의 어느 시점부터, 상술한 모든 부족들은 단결하여 대규모 남하를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2]


이들은 먼저 장벽 북쪽에서 로마에 충성하는 켈트족 요원들인 아르카니(Arcani 혹은 Areani) 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에 복속된 브리튼인들로 장벽 남북을 수호하고, 같은 언어를 쓰는 장벽 북쪽의 야만인들 사이에 숨어들어 공격이나 약탈에 대한 사전정보를 전달하는 토착 협력자 보조군이었다. 이들을 매수함으로써, 장벽 북부의 부족들은 로마가 이 대규모 연합공격을 예상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대비하였다.

장벽 남쪽 브리튼의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이러한 아르카니들과 이미 로마에 복속되어있던 켈트부족의 보조군과 징집병들은 장벽 북쪽의 동포들에게 쉽게 매수되어 내통을 시작하였고, 브리타니아를 방어하던 세 개의 군단(제6 빅트릭스, 제2 아우구스타,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들로 이루어진 야전군 '레기오 코미타텐세스 세쿤다 브리타니카'는 이미 내부에서의 암세포들을 안은 채로, 어떠한 침공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다가올 참극을 기다라고 있었다.

여기에, 이미 '색슨 해안'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수많은 해적질을 자행해왔던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이 대규모 침공에 가세하면서,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국경의 요새지대(Limes)의 야전사령관들과 로마 당국은 이러한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야만인들의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2.3. 브리타니아의 무정부화[편집]


강이 얼어붙고, 로마군 정찰대가 활동을 줄이는 367년의 겨울을 틈타, 거대한 야만인 군세가 하드리아누스 성벽 각지를 일제히 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상 브리타니아에 주둔한 제2 아우구스타와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두 군단[3] 은 이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공격은 장벽 너머에서만 시작된것이 아니었다.

아르카니 부대를 위시로 한 로마계 브리튼인 부족들과 보조군이 일제히 군단 내에서 봉기를 시작하였고, 로마에 충성하던 브리튼인들이나 본토 로마인들을 도륙하였다. 같은 시기 계획대로 아일랜드의 히베르니아족과 색슨족 또한 해상으로 내 브리타니아를 공격하니, 수 많은 내전과 침공에도 건재했던 브리타니아 속주의 군대와 행정력은 겨우 몇달만에 완전히 마비되었다.

영국 해협의 함대 사령관이자 색슨 해안의 코메스(Comes)였던 넥타리두스는 상륙해오는 적들과 맞서다 전사하였으며, 브리타니아 관구의 군정총독(둑스, DUX)였던 풀로파우데스는 병력을 이끌고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부까지 요격을 시도하였으나 내부 켈트인 보조병들의 반란과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행방불명되었다.[4]

풀로파우데스의 잔존병력은 후퇴하여 브리타니아 동남부의 도시를 사수하며 방어를 계속해나갔다.


2.4. 로마군의 반격 실패[편집]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군사적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당시에는 알레만니족을 토벌하기 위해 라인강 전선을 직접 지도중에 있었다. 그렇기에 코메스 도메스티코룸(Comes Domesticorum) 직책에 있던 세베루스를 대신 영국에 파견하였고, 이후 그를 기병 총사령관(Magister Equitum) 요비아누스와 교체하였다. 그러나 알레만니 토벌전이 장기화되고, 영국에서의 공격또한 단순히 습격수준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세베루스와 요비아누스의 휘하 병력으로는 할수 있는것이 없어졌다. 이들은 다시 황제가 이끄는 본대로 소환되었다.


3. 진압[편집]



3.1. 대 테오도시우스의 상륙[편집]


이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이후 대제 칭호를 받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 대 테오도시우스에게 정예군이었던 보조 팔라티나(Auxilia Palatinae) 네 개 부대를 주어 영국의 상황을 정리할것을 명했다. 이들은 각각 바타비 세니오레스, 이오바니 세니오레스, 헤룰리 세니오레스 그리고 빅토레스로 알려진 부대였다.

그는 아들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보노니아(현재의 브루고뉴) 지역에서 병력과 식량을 규합하는 한편, 일부러 날씨가 좋지 않은 겨울에 정예부대만 이끌고 영국해협을 상륙하며 야만인들의 허를 찔렀다. 그의 본대는 368년 봄에 상륙을 마쳤다.

이미 브리튼 군도에서 로마를 몰아냈다고 생각한 야만인들은 작은 단위로 교외에 쪼개져 약탈을 시작하고 있었다. 테오도시우스는 군대를 얇게 쪼개어 약탈을 하고 돌아가는 야만인들을 각개격파하는 한편, 되찾아온 약탈품들은 빼앗긴 이들에게 돌려주고, 구호품을 풀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테오도시우스는 런던을 장악하고 난 뒤, 그곳을 기지삼아 민간행정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브리타니아 내에서 로마의 민간행정이 멈춰버린지 약 1년만에 둘키티우스가 새로운 브리타니아 총독(Dux)로 임명되어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는 끝난것이 아니었다. 혼란을 틈타 결국 발렌티누스가 매수한 탈영병들과 함께 반란을 획책하였고, 이제 코메스 테오도시우스는 야만인들과 반란군 모두를 상대해야 하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특단의 대책을 내렸다. 자신이 데려온 중앙군을 제외하고, 브리튼 출신인 영국 전역의 보조병 모두를 강제전역시켜 후방으로 보내버린것이다. 이들이 야만인과 발렌티누스의 반군의 가장 큰 지지세력임을 깨달은 것이다.

전쟁은 각 부족을 하나하나 소탕하는 유격전 형식으로 지리하게 1년을 끌어, 결국 369년에야 종료되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남쪽에 잔존한 야만인들과 그 동조자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방벽은 다시 튼튼하게 방어되었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는 방벽 북쪽까지 응징 원정을 떠났으며, 아타코티족을 복속시켰다고도 한다. 이후 기록에 방벽 북쪽에 서식하던 아타코티족에서 데려온 보조병들의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브리타니아군 총지휘관(comes rei militaris per Britanniarum)에 임명되었고, 그의 노력 덕에 브리타니아는 이후 40년간 더 제국의 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는 이러한 후광 위에서 제위를 도모할 수 있었다.(물론 아들 테오도시우스 또한 야만인 대음모 사태에서 여러 군공을 세우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사태로 인해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부에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의 행정력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 시기 이후의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쪽 로마인 유적들이 버려진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야만인 대음모가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4. 여담[편집]


눈 속의 독수리의 극초반부가 이 시기를 잠시 다루고 있다. 이 시기 주인공 막시무스의 아내가 픽트족에게 강간당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8 07:30:01에 나무위키 367년의 음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어떤 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형이 확실한 죄였다고 당시의 역사가 안티오키아의 암미아누스가 기록한다.[2] 이러한 픽트인의 대이주에 대한 이유로는 식량과 영토의 부족, 내통, 장벽 방어의 약화 등 다양한 이유가 제기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3] 이 시기에 군단들은 고대시기처럼 완편된 상황은 아니었다.[4] 암미아누스의 기록이 불분명하여 죽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알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