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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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6.25 전쟁 정전 협정 이후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에 대한 내용은 군사분계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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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
三八線 | the 38th parallel


파일:삼팔선 및 휴전선.png

삼팔선과 군사분계선의 비교[지도해설]
접경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경계 설정일
1945년 8월

1. 개요
2. 역사
2.1. 발효
3. 경유 지역
3.1. 지형지물
4. 문제점
4.1. 미국의 조정 시도
5. 군사분계선과의 차이
6.1. 미국의 안대로 조정되었을 경우
6.2. 현재보다 남쪽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2.1. 북위 37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2.2. 북위 37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3. 현재보다 북쪽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3.1. 북위 38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3.2. 북위 39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6.3.3. 북위 40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논의된 적 없음)



1. 개요[편집]


삼팔선일본 제국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에서 9월 사이 광복을 맞이한 조선에 미군소련군이 진주,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북위 38도 위선을 기준으로 설정한 경계선이다. 총 길이는 312km 이며 이는 군정이 끝나고 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실질적인 경계선 역할을 하다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무효화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으로 현재의 휴전선이 확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사[편집]


삼팔선에 대한 지정학적 유래는 러일전쟁 이전 일본 제국제정 러시아(로마노프 왕조)에 제시했던 절충안 가운데,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양분하자는 구상이 최초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을 동양의 신생 제국으로 생각하던 러시아는 이러한 제의를 무시[1]했고, 일본은 이후 러시아와의 대결 노선으로 돌아서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미국영국을 등에 업었다. 나중에 러시아 측에서 39도선 분할을 재차 제의했지만 이 때 이미 외교적 수세라 판단한 일본은 제의를 무시했고, 양국의 긴장은 러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5월, 일본군은 38도선 이북은 관동군이, 38도선 이남은 조선주재 일본군(17방면군)이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일본이 남북 분단을 예견 또는 유도했다'는 설을 제기하나, 이에 관해서는 명확한 인과관계가 부족한데다[2] 상술했듯 한반도를 특정 위도선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러일전쟁 이전부터 나왔던 것이므로 특별한 정치적 판단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적어도 근대 이후 북위 38도선이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서 널리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38도선 이남 지역은 이북 지역에 비해 면적이 좁지만 인구는 2배 정도 많은 데다 수도 서울을 포함하고 있는 대신 이북 지역은 면적이 더 넓으면서 북부 지방의 요충지인 평양이 있기 때문이다.


2.1. 발효[편집]


파일:external/doopedia.co.kr/35147.jpg
"당신은 지금 38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미 육군 제728 헌병대-


실제 경계선이 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본토 진공에 따른 병력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1945년 8월 8일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이 물밀듯이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만주에 100만 명이 넘는 일본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소련군에 의해 1주일 만에 무너졌고, 8월 15일 청진시까지 점령한 소련은 쇼와 덴노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이렇게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에 놀란 미국이 한반도의 반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소련과 협상했다.

미군은 아직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기에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경계선 정도로 협상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26일 평양비행장에 도착한 소련군 사령관은 삼팔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하면서 삼팔선 이북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때 미군이나 연합군은 한반도에 없던 상황에서 소련이 먼저 삼팔선을 봉쇄하고 북한을 준비해둔 계획대로 공산화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다른 사전계획설이 있다.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이 1949년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 전화통화를 한 녹취록이다. 녹취록에서 헐 중장은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며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3]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따라서가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8선 획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1945년 8월 11일 새벽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이미 착안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겠다고 하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를 38도선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고 소련과 협의함에 따라 설정되게 되었다. 경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은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휴전선이 대신하게 된다.

또한 애초에는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삼팔선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 정도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한 정도로 경비했다. 그러나 북한을 일제로부터 자유를 주러 온 해방군이라고 선전하고 포섭한 소련은 1945년 8월 26일 공식적으로 삼팔선을 봉쇄하면서 전화 통신, 물자의 왕래 등 대부분을 끊고 당분간 민간인의 통행은 모르는 척 했을뿐이다.


3. 경유 지역[편집]


삼팔선은 서해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옹진군 - 벽성군 - 해주시[4] - 벽성군 - 연백군 - 경기도 개풍군 - 개성시 - 장단군[5] - 파주시 - 연천군 - 포천시 - 가평군 -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 춘성군 - 화천군 - 양구군 - 인제군 - 양양군을 통과한 후 동해에 닿는다.


3.1. 지형지물[편집]


다음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기준의 삼팔선 통과지역의 지형지물과 좌표이다. 삼팔선이 지나는 곳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이 교차하는 곳은 백령도 동쪽 앞 바다, 경기도 연천군 매현리와 개성시 장풍군 매현리이다. 휴전선이 38선보다 북쪽에 위치한 대한민국 실효지배 지역은 38선을 쉽게 넘어다닐 수 있으며 백령도를 제외한 지역 기준으로 38선을 통과하는 도로 앞에 "여기는 38선입니다" 등의 38선 표지석, 표지판이 있다. 38선 표지석, 표지판은 38선 반경 1km 이내의 도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설치되지 않은 곳도 있다. 아래의 지형지물은 바다, 산, 하천, 호수, 교통시설, 마을, 관광지 같은 곳이다.

실효 지배국
주소
지형지물
소수점 좌표
대한민국

백령도 앞 바다
38 124.700000
서해 북방한계선 교차점
38 124.850000
북한

운동저수지
38 125.310000

해주만
38 125.640000

해주시 털섬
38 125.696950

해주만
38 125.740000

배천군 배천읍 일대
38 126.310000

예성강
38 126.400830

경의선
38 126.445700

개성평양고속도로
38 126.510290

송악산 일대
38 126.550470
육상 군사분계선 교차지역
(개성시 장풍군 매현리, 경기도 연천군 매현리 일대)
38 126.812470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통구리
노곡리의 38선 마을 인근
38 126.916670

자유로CC
38 126.949990

임진강
38 126.964990

37번 국도(동서로)
38 126.988320

3번 국도(평화로)
38 127.070000

경원선[6]
38 127.075730

신천
38 127.076660

87번 국도(포천로)
38 127.167910

37번 국도
38 127.235980

포천천
38 127.238050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 일대

38 127.242500

관모봉
38 127.281100

47번 국도(금강로)
38 127.340550

75번 국도(가화로)
38 127.441400

화악산 일대
38 127.507500

341번 지방도(화악산로, 화악터널)
38 127.525955

화악산 일대
38 127.540500

5번 국도(영서로)
38 127.641800

북한강(춘천호)
38 127.650000

407번 지방도(춘화로)
38 127.732210

구 46번 국도(배후령길, 배후령 일대)
38 127.790550

46번 국도(춘양로, 배후령터널)
38 127.794950

오봉산 일대
38 127.806100

소양강(소양호)
38 127.926100

소양강(소양호)
38 128.042500

46번 국도(삼팔선로)
38 128.05180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
빙어마을 일대
38 128.10100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설악로 1112
44번 국도
38 128.11538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남전리 1100
하늘내린도리안공원
38 128.16207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75-22
인제 자작나무숲 일대
38 128.19865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인제읍 회동길 40
자작나무마을 인근
38 128.23631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북리 1396
소양강
38 128.280550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내린천로 4886
31번 국도
38 128.28124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북리 1500
인제 스피디움 컨트롤타워
38 128.29174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산71
가칠봉 이남 450m
38 128.42752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1024-16
방태천
38 128.486645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산71-79
조침령 일대[7]
38 128.50833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영덕리 산81-63
서울양양고속도로 서양양IC + 0.6km
38 128.53652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구룡령로 2272
56번 국도
38 128.53765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구룡령로 2272
로드박스 (카페)
38 128.53787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영덕리 444
영덕호(후천)
38 128.54055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서면 용소리 산1
정족산 이북 180m
38 128.575495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남대천로 1179
59번 국도
38 128.63839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부소치길 5
놀골교(양양남대천)
38 128.64103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명지리 산168
한천산 이남 750m
38 128.66473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송이로 486
418번 지방도
38 128.68041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 산124-2
동해고속도로 남양양IC + 11.6km
38 128.715550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북면 동해대로 1176
7번 국도
38 128.737350


4. 문제점[편집]


파일:attachment/38th_sign.jpg
38선 팻말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경계선으로 대충 만들어진 까닭에 너무나 인위적인 분계선이었다. 같은 분단국인 월남(베트남)도 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되었지만, 실제로는 북위 17도선보다 약간 남쪽인 강을 경계로 분단된 것이었고 남북으로 긴 영토 특성상 길이도 짧았다. 북위 38도선은 지형이나 행정경계, 교통로 등과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 고립된 지역 발생
예를 들어 황해도 서남단의 옹진반도는 남한 땅이지만 옹진반도에서 개성 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해주는 북한 땅이라서 육로 교통이 차단된 월경지가 되었다. 또 38선 이북에 위치한 해주의 경우 해주항이 위치한 용당포 일부 지역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해주항 일부가 월경지가 될 판국이었다. 때문에 해주의 경우 용당포를 포함한 해주 전체를 소련이 관할하고 38선 이남의 해주만은 미국이 관할하는 것으로 미군정과 소군정이 합의를 해서 월경지가 생기는 건 피했으나 해주항과 서해를 연결하는 해주만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6.25 이전까지 해주는 이름처럼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정작 바다를 쓰지는 못하는 무늬만 항구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다.[8]

  • 강제 분리되는 행정구역
삼팔선은 자연지물 (하천, 산, 호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의 (面)이나 (里)가 삼팔선에 의해 분리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당국 간에 마을의 관할권을 두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쪽에 귀속될지를 놓고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충돌이 발생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9]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 방어상의 문제점
이는 특히 남한 측이 심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삼팔선 인근에 고지대를 형성한 곳이 많아서[10] 쉽게 방어진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북한의 고지가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평지에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니 유사시 방어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덤으로 앞서 언급한 옹진, 연백, 개성 지역은 조금만 밀려도 바로 바다나 강이 나오기 때문에 자연적인 배수진이라서 유사시 일단 포기하는 지역으로 선정되고[11] 실제로 이 지역들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결국 북한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부신성모 국방장관이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대책없는 강경 연설로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됐으나 근거 없는 북진 연설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은 오히려 남한에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38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12]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38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 미국의 조정 시도[편집]


위와 같은 문제점들 때문에 38선은 남북의 경계선으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선이었고 1945년 11월에 미국 국무부는 주 모스크바 대사인 해리만 통해 소련과 38선 경계 조정을 협상하도록 지시했는데, 당시의 안은 38선 이남의 황해도를 소군정으로, 38선 이북의 경기도를 미군정으로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6년 1월의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가 소군정 책임자인 테렌티 시티코프[13]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1. 황해도의 38선 이남 지역을 소 군정 관할로 한다.
  2. 경기도의 38선 이북 지역을 미 군정 관할로 한다.
  3. 강원도는 38선과 근접한 행정구역(시군) 경계를 따라 관할 경계를 재조정한다.

이 안에 따르면 강원도는 철원-김화-양구-인제-양양 및 그 이북이 소 군정, 화천-춘천-홍천-강릉 및 그 이남이 미 군정 관할이 된다.[14] 그러나 소련측이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음[15]으로써 실제 경계가 조정되지는 못했다.


5. 군사분계선과의 차이[편집]


6.25 전쟁정전 협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군사분계선(휴전선)과 삼팔선을 오인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외국 언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인들도 현재의 경계선이 군사분계선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어휘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삼팔선은 휴전선보다 존속기간은 훨씬 짧지만 아무래도 최초로 남북한을 갈라놓은 정치적인 경계선이고 어감이 있는데다가 지구상의 위도선을 기준으로 했다는 점이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점 등이 꼽힌다.[16]

휴전선은 1953년 휴전회담 이후에 설정된 선으로 38선과 비교해 보면 개성을 포함한 경기도 서북부와 황해도 연백평야, 해주 이남의 옹진반도 부분은 북한이 좀 더 남하하였고 거꾸로 연천, 포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설악산, 간성, 거진 등을 포함한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지역은 남한이 북상했다. 때문에 혹자는 태극기태극 모양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평지는 북한이 더 많이 먹었고 남한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와 영토 자체를 더 많이 먹은 셈이다. 남한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특별시가 38선 때보다 최단거리가 북한에 약간 가까워졌지만, 방어에는 더 유리해졌다.[17]

왜 이런 모양이 나왔나면 1951년 4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UN군에 의해 격퇴된 이후 전황이 교착화 양상이 되자 6월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회담장소가 판문점이었고 그 때문에 그 주변인 서부전선쪽에선 전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협상이 완료되기 전까진 한뼘이라도 땅을 넓히려는 양쪽의 지루한 공방전이 동부전선 쪽에서 장장 2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UN군이 북으로 야금야금 밀고 올라간 결과 저런 모양이 나온 것이다. 김영옥(군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공군의 1951년 여름까지 이어진 대공세 이후에는 UN군이 오히려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고지전을 전개하여 전선을 밀어올리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상술한 판문점 인근에서도 1953년 6월경에는 국군 해병대를 주축으로 해서 거의 개성 인근까지 연백평야 일부분을 전개하고 있다가 휴전 성립 직전에 예성강철교를 끊고[18] 수복지를 내준 후 퇴출해 와야 했다.

사실 38선 당시보다 군사분계선인 현재 서울특별시가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맞지만 주로 드는 강서구(구 경계 기준 휴전선과 24km)의 예시는 좀 잘못되었는데, 직선거리상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강서구는 휴전선이 그어진 1953년 당시 애초에 서울의 영역이 아니었고[19] 이후 1963년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서울특별시의 영역 확장과 맞물려 서울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1953년 당시의 서울 시계 기준으로 38선이나 휴전선이나 직선거리는 거의 비슷했고[20] 한강 하구와 임진강을 경계로 서쪽 돌출부만 방어하면 되는 휴전선이 의정부 방면에서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는 38선보다 방어에는 훨씬 유리했다.

6.25 전쟁 직전에 개성시에서는 "1950년은 단기 4283년인데 4283을 거꾸로 하면 3824 3×8=24여서 이 해에 38선이 이사 가서 통일이 된다" 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정작 단기를 사용한 것은 오히려 북한이 아니라 남한 쪽이었다. 단군은 신화, 대종교의 인물이므로 공산주의 정부에서는 단군기원을 쓸 이유가 없었다.

6. 대체역사[편집]



6.1. 미국의 안대로 조정되었을 경우[편집]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미국이 제시한 안대로 경계가 조정되고 그대로 분계선으로 고착화되었을 경우, 행정구역 경계는 일반적으로 산의 능선이나 하천 등의 자연 지형을 따라 그어지기에 그를 따른 이 경계는 삼팔선보다 육상 방어가 유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휴전선에 비해선 여러 모로 불리한 점이 많다. 물론 개성이라는 상징성이 높은 도시를 포함한 미수복 경기도[21][22]를 차지하게 되어 서울 방어가 다소 유리해지는 점[23],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자연경계를 따르게 됨에 따라 육상 방어하기 나아지는 점은 있으나 휴전선에 비해 경계선 길이가 긴 것을 시작으로 당장 서해 5도가 북한 땅이 됨[24]으로써 서해북방한계선 대신 북한이 1973년, 1999년 등에 주장했던 경계선과 비슷한 해상 경계선이 분계선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에 따라 교동도, 석모도, 용유도 등이 최전선 해군 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해주는 서해 5도로 남쪽 바닷길을 확보하여 실제 역사보다 민간 항구 역할을 잘 하게 될 것인 반면, 인천은 민간 항구로서의 중요도가 실제 역사에 비해 줄어들고 군항의 성격이 강해졌을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은 물론 만들어지기 힘들었을 것이고, 김포국제공항도 제약을 많이 받게 되어 수원 공군기지가 민항 겸용화, 시설 확장 등을 통해 서울권의 대표 공항 역할하게 되었을지도.이어 동쪽 경계도 상당히 남하하여 철원 평야나 북한강 상류 지역[25], 설악산권은 북한령이 되고 춘천시, 강릉시 등이 최전방 도시가 되는[26] 등, 전체적으로 서부의 서해 5도를 위시한 영해와 동부의 철원, 북한강 상류, 설악산 및 동해안 영토 등을 포기하고 대신 중부의 미수복 경기도를 얻는 모양새가 된다. 한 마디로 서울 방어와 개성을 얻고 나머지를 다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삼팔선과 비교하면 강원도 지역은 경계선 차이가 적으므로[27] 서울 방어와 개성을 얻고 경기만 제해권을 포기하는 형태가 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있을 수 있는게 동부전선이 상당히 남하한다 한들 서울이 위치한 경기도와 산악 지대로 인구가 적은 강원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단순히 물리 면적만 가지고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수복 경기도가 확보되면 적어도 전선이 서울과 2배 가까이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개성이 점하는 위상 역시 무시 못하는 게 만약 남한이 개성을 온전히 장악하면 남북간 역사적 정통성 문제에서도 큰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경우 역사적 도읍이었던 도시가 평양 하나밖에 남게 되지 않아 체제 선전에도 불리함이 작용했을 것이며 또한 한국사의 고려시대 연구 역시 현재보다 더욱 진전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성이라는 규모 있는 도시가 최전방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효용성도 무시할 수 없다.[28] 괜히 휴전협정에서까지 이승만과 김일성이 개성에 집착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개성의 가치를 민족 대표의 명산인 금강산도 아니고 아류인 설악산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현재의 휴전선과 비교했을 때는 양자 간의 득실이 명확하기 때문에 무엇이 낫다고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육지에서는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경기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현재보다 다소 유리한 입지를 가질 수도 있지만 반면 해안에서는 서해 5도, 양양 이북 동해안 지역의 부재로 인해 전선이 다소 남하하고 경기만에서의 현재와 같은 확실한 우위를 뺏긴다는 불리함이 존재한다.


6.2. 현재보다 남쪽으로 분단되었을 경우[편집]



6.2.1. 북위 37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편집]


파일:37도선.jpg

만약 북위 37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서울특별시, 개성시, 인천광역시, 서해 5도, 울릉도, 독도, 강원도[29], 경기도[30]의 사실상 전 지역이 북한에 속하게 된다. 게다가 경상북도[31], 충청북도[32] 일부, 충청남도[33]의 극일부까지 북한이 가져가게 된다.

이 경우 서울북한의 정식 수도가 되었을 것이다.[34] 대한민국서울 환도를 포기하여 서울이 미수복지이자 헌법상의 수도로서 규정되었을 것이고, 남한의 범위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지역으로 국한된다.

일부만 남한령인 경기도, 강원도 지역 만으로는 를 존치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남한령 경기도 지역은 충청남도, 충청북도로, 남한령 강원도 지역은 경상북도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수도는 대전이 된다. 부산도 있긴 하지만 부산은 너무 남쪽이다.

남한의 수도권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3곳이다.

1) 부울경권

* 37도선이 군사분계선이 되었다면 부산광역시가 수도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먼저 임시수도였던 지역이기 때문에 따로 뭔가를 할 필요 없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행정상 이전하는 절차가 필요가 없어지며 일단 부산항 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부산 자체가 항구로써는 천혜의 요새이며 북한과 멀리 떨어진 후방 지역[35]

이므로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나 장사정포 위협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시에 방어를 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전쟁 직후 피해도 가장 적어서 기존 인프라를 그대로 쓰면 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다른 지역보다 발전이 쉽다. 일본과의 거리도 가까운데, 당시 일본은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했다가 미국한테 도전장을 내민 국가였으며 맥아더의 뜻과는 다르게 냉전 정국이 되면서 미국은 일본한테 수많은 경제 지원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경제 및 후쿠오카는 지금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크게 발전했을 것이며, 남한이 경제 성장 시 가까운 일본의 기술을 많이 차용하여 미국한테 신기술을 배운 것에 대입하면 남한의 수도는 큰 항구가 있고 남아있는 인프라를 이용한 경제 발전이 유리한 부산광역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남한의 수도권은 오늘날의 부울경권 혹은 부산·울산권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언론 통제 역시 일본의 방송이 잡히기 때문에 당대 경제력에서 독재로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언론 통제가 기존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다.

2) 충청권

* 대전광역시를 비롯한 충청권 지방이 남한의 수도권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충청권 자체가 북한에 가까운 최전방 지역이 되기 때문에 북한이 "대전 불바다" 등의 위협을 하며 대남 도발을 자주 했을 듯하며, 당진, 천안 지역이 최전방으로 격상되고 이 지역으로 침투할 북한 게릴라를 막기 위한 병력 또한 증강되어 지역 발전에 크나큰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 호남권

* 평야가 많은 김제평야 (김제시, 군산시, 익산시, 전주시, 부안군 일부, 정읍시 일부, 논산시 일부) 일대가 남한의 수도권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6]

거기다 새만금까지 완공될 경우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다만 37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대한민국이 무사했으리란 보장이 없다. 38도선으로 분단되어 비슷한 땅 크기와 2배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전 이후 한 달만에 낙동강까지 밀렸는데, 만약 37선으로 분단되었다면 대한민국은 훨씬 작아진 땅, 적은 인구만 보유한 상태로 북한과 상대해야 되기 때문에 실제 역사보다 조건이 매우 열악해질 수 밖에 없다.[37]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역사적 고도서울, 평양, 개성북한이 가져가게 되고, 대한민국에 남는 고도경주, 공주, 부여 정도인데 경주를 제외하곤 수도였던 기간이 짧으며, 무엇보다 중세사 이후의 한국사 수도가 부재하게 되므로 역사적 정통성 문제에서 대한민국이 상당히 불리해진다.

37도선에서 분단되었다면 경기도 평택시, 안성시 일부 만으로는 경기도를 존치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경우 남한령 경기도 지역은 충청남도, 충청북도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울진군의 경우 군역(郡域)이 분단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즉, 울진군 일부는 북한 지역이 되는 것. 울진군 일부 만으로는 강원도를 존치시키기 어렵기 때문에,[38] 남한령 울진군 영역은 정전 협정 이후 바로 경상북도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UN은 새로이 참전한 중공군과 휴전하기를 원했으므로, 1.4 후퇴 당시 모택동이 여기서 만족하고 정전회담에 응해 남북한 간의 경계를 37도선에서 그어버린 상태로 휴전했었다면 실제로 37도선에서 남북분단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있는 부석사의 경우 정확히 37도선에 있다. 37선에서 분단되었다면 부석사는 실제 역사의 철원 궁예도성처럼 정확히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군사분계선이 관통하게 되므로, 조사 및 관광은커녕 접근 자체부터 어려웠을 것이다.


6.2.2. 북위 37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편집]


파일:37도 30분선.png
파일:37도 30분선-수도권.png
파일:37도 30분선-울릉도.png

만약 북위 37도 30분을 기준으로 했다면 서울의 경우 북위 37도 30분선이 도시 중심부를 정확히 관통한다.[39] 영등포구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광복 당시 경성부 영역의 사실상 대부분이 이북으로 넘어가고, 북으로 넘어간 경성부 영역은 남북 경계에 바로 맞붙게 된다. 39도선의 평양시처럼 지금의 서울특별시가 한강 바로 밑에서 잘리게 되며, 인천광역시도 절반이 이북으로 넘어가게 된다.[40] 또한 37도 30분선은 양평읍과 횡성읍,[41] 동해시[42] 바로 위를 지나가게 되며, 울릉도[43]마저 절반으로 갈리게 된다. 이 시나리오의 경우 갈리게 되는 행정구역은 수도권의 경우 인천광역시, 부천시, 서울특별시, 하남시, 광주시, 양평군, 강원도의 경우 횡성군, 평창군, 정선군, 동해시, 경상북도의 경우 울릉군이 되며, 이로 인해 남한은 경기도의 40%를, 강원도는 1/4 정도만 차지하게 되어 중부 지방의 대부분이 북한 측에 넘어가게 된다.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상태로 휴전에 돌입했다면 해당 축선과 유사하게 분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아무리 서울이 명시된 수도라고 할지라도 사이가 험악한 이상 자기쪽 서울이 언제 포탄을 맞을지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서울을 비웠을 것이고, 정 안된다면 서울이 중립도시화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수도는 수원이 된다.

6.3. 현재보다 북쪽으로 분단되었을 경우[편집]



6.3.1. 북위 38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편집]


파일:38.5도선.jpg

이와 비슷한 분단 가능성이 고려된 적이 딱 한번 있는데,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북한이 미루나무 제거 작업 중 추가 도발을 했을 경우 미국 측에서 북한으로 진격해 서해안 부분 휴전선을 위로 올리고 옛 38선 이남 남한 영토 및 연백평야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이 경우, 옹진반도 연결 및 방어의 용이함을 위해 황해도 산악지대까지 올라갔다면 38도 15분선 내외로 휴전선이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4] 참고로, 현행 휴전선 중 수평에 가까운 철원-양구 축선이 약 38도 20분이다.

만약 북위 38도 30분선(북위 38.5°)을 기준으로 했다면 황해도에서는 송화군 대부분, 은율군 일부, 신천군 사실상 전역, 안악군 일부, 재령군 대부분, 봉산군 대부분, 사리원시 일부[45], 서흥군 일부, 신계군 일부가[46], 강원도에서는 이천군 일부,[47] 평강군 일부,[48] 회양군 극일부가[49] 남한에 속하게 된다. 특히 김화군은 금성면과 임남면의 극히 일부와 원북면 대략 절반, 창도면 대부분, 통구면 전체를 제외한 대부분이 남한에 속하게 되어 남한에서 김화군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의 면적을 갖추게 된다. 금강산선 철도는 여전히 단절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좀 더 많은 연선지역이 남한에 속하게 되고 기점인 철원역도 남북 경계에서 멀어지므로 김화군에 교통 편의를 제공하거나 병력, 물자를 보급하는 용도로 활용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수복지구에 해당하지만 일부 지역이 군사분계선 이북인 양구군인제군의 경우 인제군은 전 지역이, 양구군은 수입면 최북단 극일부를 제외한 사실상 전역이 남한에 속하게 된다. 대신, 현행 휴전선의 최북단이 38도 37분이므로 수복지구에 해당하는 고성군 현내면의 일부가 북한령이 된다. 동사리원역이 남한의 역이 되며[50] 제진역은 북한의 역이 된다. 그리고 금강산 지구는 최남단 봉우리인 국사봉까지 모두 아슬아슬하게 이 선 북쪽에 있어 전부 북한령이 된다. 또한, 이 선은 구월산임남호를 관통한다.

중요한 점은 38도 30분선 이남에는 북한의 핵심 곡창지대인 연백평야 전부와 재령평야 절반 이상이 포함된다. 해당 지역에서 나오는 쌀이 북한 전체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것을 감안했을때 만약 해당 시나리오대로 분단되었다면 이곳을 잃은 북한은 식량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그 외에도, 평양이 분단선부터 최단거리로 50km 내외로 들어가기 때문에 포 사정권에 충분히 넣을 수 있는 거리라 대한민국 측에서 평양 불바다(...)를 거론할 수 있게 되고,[51] 황해도 최서단인 장산곶도 손에 들어오므로 서해안 해상전력을 가둬두기에도 훨씬 유리해진다.


6.3.2. 북위 39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편집]


한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참모였던 에드워드 로우니의 회고록 《Smoky Joe and General》에 따르면, 일본의 공식 항복(1945년 9월 2일) 직전 조지 마셜 장군이 참모들에게 남북 분단선 설정안을 건의토록 제의했을 때 딘 러스크 대령 등 영관급 장교들은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일본 사이에 오갔던 북위 39도선 분할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상관이었던 조지 아더 링컨 장군이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인 스파이크만이 1944년 저술한 '평화의 지리학'을 인용[52]하면서 38도선을 주장[53]했다고 한다. # 참고로 북위 39도선은 평양을 관통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

파일:39thparellelkorea.png

만약 북위 39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평양의 경우 북위 39도선이 도시 중심부를 정확히 관통한다.[54]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남포시는 39도 이남, 원산시는 39도 이북이 된다.[55] 대략 통일신라의 영토와 비슷해진다. 이 경우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포함해, 평양 도심의 1/4이 남한령이 된다. 그리고 평양역은 북위 39도선이 역 구내를 지나가기 때문에[56] 철도역의 기능을 상실한다. 다만 남한령 평양 시내가 39도선과[57]대동강 사이에 갇혀 사실상 고립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북위 39도선이 분단선이 되었을 경우에는 대동강을 따라서 경계 조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38도선에 아슬아슬하게 남한령으로 걸렸던 해주시 남쪽 끝 반도 지역이 결국 북한령으로 조정된 것처럼 경계 조정이 되지 않더라도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남한에서 남한령 평양 시민들을 대동강 이남으로 이주, 대동강 이북 지역을 비무장지대화 시켜 평양급의 대도시가 유령 도시가 되는 아스트랄한 상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평안남도에서는 남포시를 포함한 용강군과 중화군 전체, 강서군 일부, 대동군과 평양시 일부, 강동군과 성천군 극일부가, 황해도에서는 곡산군 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강원도에서는 통천군 일부와 이천군 극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그리고 함경남도에서 문천군 극일부와 안변군 2/3 정도가 남한령으로 들어오게 된다.

아예 간단하게 그냥 평안도와 함경도 전체를 북한에 내주는 방법도 있다. 왜냐하면 39도선은 평안도와 함경도 남쪽 경계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58] 이렇게 되면 함경남도와 평안남도 남쪽 행정구역 경계가 그대로 자연적인 남북 분할 경계가 되었을 테니 오히려 큰 고민 없이 선택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러일전쟁 직전 일본과 러시아의 39도선 분할안도 이렇게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통째로 러시아가 갖는 안으로 하려고 했다.


6.3.3. 북위 40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논의된 적 없음)[편집]


파일:40도선.jpg

만약 북위 40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평안북도에서는 의주군 극일부, 용천군 대부분, 구성군 과반, 태천군 대부분, 운산군 일부, 영변군 대부분, 정주군과 박천군 전부가, 평안남도에서는 영원군 절반 정도를 제외한 전역, 함경남도에서는 정평군 대부분, 함흥시와 흥남시를 포함한 함주군 대부분, 홍원군 극일부와 영흥군 이남 전역이 남한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40도선으로 분단 시 남한의 서쪽지역이 중국과 살짝 맞닿게 되어 철도나 교통이 중국이나 유럽 등지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39도선, 38도선으로 분단되는 것과는 역사가 차원이 달라지게 된다. 통일을 안 하더라도 중국과 남한이 국경을 직접 맞닿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하는 것도 가능해질 수가 있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대한민국은 반쯤 남북통일에 가까운 형태가 되며, 북한 영토는 거의 100% 가깝게 산악지대밖에 남지 않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지막지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평양대한민국의 영토로 넘어왔기 때문에 북한의 수도는 강계시[59]가 된다.

대략 공민왕 이전의 고려의 영토와 비슷해진다. 함흥은 아슬아슬하게 40도선 이남, 신의주와 신포, 그리고 묘향산은 아슬아슬하게 40도선 이북이며 특히 신포는 시가지는 40도선 이북인데 항구를 막고 있는 남쪽의 섬인 마양도 대부분이 40도 이남이 된다. 북위 40도선이 기준이 됐다면, 쓸 만한 황해도와 평안도의 평야 지대와 평양, 진남포, 해주, 사리원, 원산, 함흥 등의 알짜배기 도시들[60]은 모조리 남한이 가져가고 그나마 가져가는 신의주는 항구와 서해 바다를 이어주는 압록강 하구가 남한 관할인지라 항구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고자 상태가 되기 때문에,[61] 결국 북한이 가지는 건 척박한 개마고원과 함경도의 동해안 밖에 없다(...). 당연히 서해안으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단천의 마그네사이트와 무산의 철광 같은 주요 지하자원 일부와 청진의 제철소 등은 북한이 보유할 수 있으나, 인구가 부족하므로 공업을 일으키는 것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한편 이 선 북쪽의 개마고원 일대에 다수의 수력 발전소가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나리오에서는 분단 초기에 공장과 도시들은 대부분 남쪽에, 여기에 전기를 공급해야 할 발전소는 상당수가 북쪽에 위치하는 사태가 벌어져 전력난이나 전력 사용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실제 역사보다 더 부각되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함흥은 전역이 40도 이남이지만 40도선에서 3~4 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분단 직후 개성에서 벌어졌던 문제가 함흥에서 똑같이 발생했을 것이며, 흥남에 위치한 산업시설 역시 최전선에 위치하게 되는 문제로 인해 원산 등지로 설비를 이전하여 함흥 및 흥남은 남한에 속하기는 하나 그 발전은 다소 저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62]

40도선 분단의 경우 대한민국의 경제가 더욱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평양급 대도시를 대한민국이 손에 넣게 되는 것이며, 직접 도시 개발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울 공화국화 된 대한민국이라지만, 북부 지방의 개발을 위해서 평양시원산시는 확실히 크게 개발했을 것이다. 평양시는 틀림없이 지금의 부산광역시 정도의 대도시가 되었을 것이며, 원산시 역시 지리상, 입지상 이점을 안고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를 아우르는 동북권 거점 대도시로 급성장하여 최소 대전광역시광주광역시 정도의 광역시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김일성이나 그 이후의 직계 후손 수령들이 도시를 개발하는 능력이야 뻔한 것이므로 평양의 입장에서 보면 실제 역사보다 이게 훨씬 좋은 것이다.

좀 과한 시나리오로는 북한은 반 고자 상태가 되어[63] 소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위성국 신세로 광업과 소규모 공업으로 연명하다가 동구권 붕괴 시 남한에 흡수당하는 형태로 멸망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판도가 남한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해지지만 북위 40도선에서 분단된 상태에서 주변 국가, 특히 중국의 눈치 때문에 북한이 남한에 완전 흡수까지는 곤란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게 통일이 되지 않을 경우를 가정한 3840 유격대의 목표였다. 1980년대 반공 드라마 3840 유격대에서는 북위 40도선을 사수하려고 고군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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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해설]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기된 지역은 삼팔선 획정 후 남한 관할이었다가 휴전 후 최종적으로 북한에 편입된 지역으로 북한에서 신해방지구라고 부르는 지역이고, 파란색으로 표기된 지역은 삼팔선 획정 후 북한 관할이었다가 휴전 후 최종적으로 남한에 편입된 지역으로 남한에서 수복지구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해주 용당포는 아슬아슬하게 북위 38선 이남에 위치하나, 전쟁 이전 북한이 실효지배했다. 또한, 1953년 휴전 당시 북한의 상세한 국토면적은 약 123,369㎢, 남한의 국토면적은 약 97,534㎢로 현재의 남북한 면적보다 좁았는데, 이는 남북한 모두 농업 부지 확보 등의 이유로 지난 반세기 동안 간척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국가통계포털 자료 참조).[1] 여담으로 이를 황성신문에 보도한 남궁억은 일본의 압박을 받아 투옥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내려왔다.[2] 아래에도 나오지만 미국은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을 제안한 것이지 관동군의 위수지역 때문에 38도선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반으로 나누는 기준을 38선으로 하는 데에는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3] 부산, 인천, 원산[4] 다만 해주 시가지의 거의 전체는 북위 38도선 이북이고, 해주항의 남쪽으로 돌출된 일부분만이 38도선 이남이라 딱 이 작은 부분만 따로 관리하기 너무 힘들어 그냥 남북간에 합의해서 해주 전체를 북쪽이 관할했다.[5] 남한령 장단군은 한국전쟁 이후 파주군연천군에 분할 편입.[6] 2023년 12월 15일까지는 3번 국도와 같은 위치이다.[7] 조침령옛길 70m 이북으로 38선이 지나간다.[8] 이 점을 이용해서 해주시 자체가 북한 주민들의 주요 탈북 루트가 되기도 했다. 항구를 경비 중인 경비대만 따돌려서 배만 띄우면 바다가 미군정 관할이라 경비대가 잡을 겨를이 없었다.[9] 정확하게는 38선이 송악산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 사면을 지났다. 육탄10용사도 이러한 지리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10] 위에서 언급한 송악산이나 옹진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감제고지인 국사봉 등등.[11] 그래서 전쟁 이전에 개성박물관의 고려청자 문화재 등 옮길 수 있는 건 미리 남쪽으로 피난시켰다. 유사시 개성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건 전쟁 이전부터 예상되고 있었다.[12] 다만 인구수는 남한의 절반도 안 된 마당에 농사나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대거 군대로 보내버리는 무리를 해서 소련 측에서도 감축을 하라며 우려를 표했을 정도다.[13] 당시 소군정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이나 그는 정치는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었기 때문에 정치장교인 시티코프에게 군정 업무를 일임했다.[14] 현재와 이 당시 행정구역의 차이로 인해 이론상으로는 현재 화천 관할이나 당시 춘천 관할이던 사내면은 미군정 관할이 되며, 반대로 현재 홍천 관할이나 당시 인제 관할이었던 내면은 소군정 관할이 된다.[15] 명시적으로 거부했다는 설도 있음.[16]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이 "38선 밑으로는 골목까지 훤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17] 38선 때는 개성 대신 현재 남한 땅인 연천, 포천 북부가 북한이었는데, 개성은 한강과 임진강이라는 방어선이 있지만 연천, 포천은 별다른 자연의 방해 없이 서울로 침투할 수 있다. 실제로 6.25때 서부의 파주 축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비교적 잘 방어했는데 포천-의정부 축선에서 구멍이 나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여담으로 38선 돌파비가 있는 연천 한탄대교 사거리에서 수유역까지 마라톤 풀코스 거리가 나온다.(3번 국도 평화로-도봉로 루트) 그만큼 서울 강북 지역이 38선과 상당히 인접해 있다는 것이다.[18] 개성시를 지나 해주시로 이어지는 협궤철도의 철교로 북한군이 이용하지 못하게 파괴했다.[19] 당시에는 김포에 속했다.[20] 물론 당시의 서울시계 기준으로도 휴전선이 조금 더 가까웠지만 생각만큼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1963년 서울의 대확장 과정에서 휴전선 돌출부와 가까운 방향으로도 확장이 이루어져 지금과 같은 지도가 된 것이다.[21] 38선 때는 시내와 남부 교외지역만을 점유했다면 해당 안은 북부 교외지역까지 완벽히 가져간다. 개풍군, 장단군 북부 지역은 38선보다 북쪽에 있다.[22] 1914년에 강원도로 편입된 옛 삭녕군 동부 지역은 제외[23] 미수복 경기도를 송악산 포함해 완전히 확보할 시, 경계가 개풍-강화 라인으로 그려지며 김포와 파주가 현 고양시 수준으로 안전해지고 고양이랑 서울 또한 그만큼 전방에서 멀어진다. 추가로 한강 하구에 둑을 건설해 한강과 임진강 강안경계 필요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 다만 철의 삼각지대에 속하여 공격과 방어에 모두 유리한 철원과 없을 시 경기만 섬들이 최전방으로 전락하게 되는 서해 5도의 상실도 생각해야 한다.[24] 우도는 강화군 관할이기에 남한령으로 남았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당시 미군 지도에 연백군 관할로 잘못 기재되어 서해 5도의 하나가 된 점을 감안하면 미군의 실수로(…) 북한령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5] 화천, 양구, 인제가 북한령이 되면 소양강댐, 춘천댐 건설이 불가능하고, 분단 이전에 만들어진 파로호는 실제 역사에서처럼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다.[26] 이렇게 되면 강원특별자치도청은 춘천이 아닌 조선시대 도청인 감영이 위치했던 원주시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령 강원도는 실제 역사대로 도청을 철원에 두거나, 오늘날처럼 원산 일대를 편입해서 원산으로 보내거나 했을 듯. 다만 철원에 둘 경우에는 연천군과 포천군 북부가 남한 땅이 되어 철원이 남북 경계와 바로 맞붙는 문제가 생기게 되므로 실제 역사처럼 원산을 편입해 이전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27] 포천, 춘천 일대는 경계선이 삼팔선보다 약간 북상하고 인제, 양양 지역은 다소 남하하는 형태가 된다.[28] 실제로 북한이 개성공단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많지는 않으나 개성 주변에 군사 기지를 여럿 운용했다.[29] 울진군 일부 제외. 울진군은 1945~1953년 당시 강원도였다.[30] 평택시, 안성시 일부 제외.[31] 영주시 극일부, 봉화군 일부.[32] 진천군 극일부, 음성군,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 일부.[33] 서산시, 당진시 극일부. 하지만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남한령으로 귀속 시킬 가능성이 높다.[34] 실제로 북한1948년에 제정한 북한 헌법 제10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다.'라고 명시했고, 1972년 헌법 개정 전까지 서울을 명목상의 수도로 하였다.[35] 서부의 경우 경기도평택교육지원청부산광역시청까지 343km, 중부의 경우 충주시청부산광역시청까지 285km, 동부의 경우 영주 부석사부산광역시청까지 266km, 울진군청부산광역시청까지 245km.[36] 만약 이 지역에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선다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평야가 넓다.[37] 해방 당시 경기도+강원도 인구가 통째로 북한에 넘어갔다면 남북한 인구 격차는 거의 1:1에 가깝게 변하는데 이 상황에서 6.25가 발생했다면 좁아진 영토와의 이중고로 인해 북한을 막는 것이 몇 배는 어려워졌을 것이다.[38] 울진군은 1945~1953년 당시 강원도였다.[39] 다만 주의할 것은, 이것은 현재의 서울특별시의 범위를 기준으로 한 설명이고, 북위 37도 30분선은 조선시대 한성부 영역은 단 1 cm도 지나가지 않는다. 광복 당시 경성부 영역을 기준으로 해도 사실상 전역이 이 선 이북에 있다.[40] 인천항은 대부분 남쪽으로 넘어오며, 인천북항은 두동강난다. 원도심인 동인천 일대는 아슬아슬하게 이남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영종도는 반으로 갈리게 된다.[41] 이 두 읍의 경우 37도 30분선이 중심 시가지 바로 북쪽을 지난다.[42] 대략 옛 북평읍 지역과 옛 묵호읍 지역의 경계 부근을 따라 지나간다. 특히 옛 북평읍의 경우 읍내는 이 선 남쪽인데 시가지 북쪽에 있는 보림산은 전체가 북측으로 넘어가버리게 된다.[43] 성인봉은 북측으로 넘어간다.[44] 38도 15분선의 장풍-봉천-신원-벽성-태탄-룡연을 가져갈 경우 개성, 연백평야, 해주, 옹진반도, 장산곶을 군사분계선에서 20km 이상 떨어뜨리고 손에 넣을수 있고, 현재보다 전선의 길이가 길어지긴 하지만 늘어난 전선이 대부분 산악지대라 방어에도 용이하며 NLL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 가능한 어마어마한 실리를 챙기게 된다.[45] 사리원역은 아슬아슬하게 38도 30분선 이북이 되나 38도 30분선이 정방산 정상 부근을 지나 사리원 시가지 남쪽을 관통하기 때문에 시가지가 둘로 분단된다.[46] 황해도의 대부분을 남한이 차지하게 된다.[47] 이천면, 학봉면 대부분, 용포면 극일부, 옛 안협군 지역 전체. 이렇게 되었다면 기존 군청 소재지이지만 남북 경계선과 너무 가까운 이천면 대신, 옛 안협군의 중심지인 안협면이 새롭게 이천군의 중심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48] 남면 전체, 평강읍, 서면 대부분, 현내면 절반 이상, 목전면 극일부. 면적상으로는 38도 30분선 이북 지역이 더 넓지만, 군청소재지인 평강읍과 평지의 대부분이 이 선 남쪽에 위치하게 된다.[49] 난곡면과 내금강면의 남쪽 일부, 하지만 면적이 매우 작고 두 지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이들 지역을 평강군과 양구군으로 분할 편입시켰을 것이다.[50] 다만, 38도 30분선까지 고작 55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여객취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38도 30분에 가장 가까운 중요 시설물이므로 판문점처럼 정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51] 실제로 38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다면 소련이 북한의 수도를 전방인 데다가 너무 영토의 서남부에 위치한 평양이 아닌 함흥으로 정했을 확률이 높다. 이 당시의 함흥+흥남 인구는 평양의 인구와 큰 차이가 안 나기도 했고.[52] 근데 막상 그 평화의 지리학에 나오는 38도선은 한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위대한 인물과 사상과 발명의 대부분이 38도선 이북에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었다.[53] 참고로 군 주둔 38선은 미 소간에 종전 직후인 8월 16일 새벽에 결정됐다. 정확히 얘기하면 분할 통치선을 39선으로 할 지에 대해 의논이 있었던 것이며, 이미 군대 주둔 분계선은 38선이였다.[54] 이는 현재 북한이 적용하는 평양의 범위가 아닌, 광복 당시의 영역을 기준으로 해도 마찬가지이다.[55] 북위 38도선이 도시를 관통했던 개성도 도심 뒷산인 송악산을 관통했지, 시내 자체를 둘로 나누진 않았다. 39도선은 원산시 경계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안변군 석왕사면, 신모면 일대를 지나고, 당시 원산 행정구역 안쪽은 단 1cm도 지나지 않는다.[56] 북위 39도선이 대략 평양역 구내의 남쪽 끝단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57] 평양 지도를 살펴보면 대동강이 남서쪽 방면으로 흐르다가 두로도가 시작되는 위치에서 갈라진 북쪽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꺾여 올라온 다음 이 물줄기가 다시 남서쪽으로 꺾여 남쪽 물줄기와 만나는데, 북위 39도선이 이 북쪽 물줄기의 최북단 강안을 지나가서 북위 39도선과 대동강 사이에 초승달 모양의 땅이 갇힌다.[58] 게다가 당시 원산은 강원도가 아니라 함경남도 소재였다.[59] 북한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평양을 탈환당했을 때 실제로 강계시에 임시 수도를 세웠다.[60] 공장들 또한 도시에 있으니 공업지대도 함북 및 단천 지역을 제외한 원산, 함흥, 평양 등에 있는 북한 전체의 절반 가량의 공장들도 모두 남한이 가져간다.[61] 실제로 6.25 전쟁 이전의 해주가 그랬다.[62] 물론 이 시나리오상에서는 부족한 인구와 공업 능력으로 인해 북한이 국지도발 수준을 넘어서는 대남공격을 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도시의 존립을 방해할 정도의 문제가 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63] 땅을 뺏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해도 인구와 공업지대의 대부분이 남한에 있으니 전쟁을 일으킬 능력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