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C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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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 정책
1. 개요
2. 내용
3. 여담
4. 같이보기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추구한 정책. 카이로(Cairo) - 케이프타운(Cape Town) - 콜카타(Calcutta)를 잇는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C 정책이라고 부른다.

2. 내용[편집]


영국의 국력이 최절정에 달했던 빅토리아 여왕 재위 시절에 벤자민 디즈레일리, 세실 로즈, 조지프 체임벌린 등이 주창한 제국주의 팽창 노선이다. 영국은 프랑스 등과 함께 선발 제국주의 국가로 세계 곳곳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은 이 식민지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구상을 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케이프타운을 연결하는 종단정책을 취하고 또 카이로에서 인도콜카타를 연결하기 위해 중동 지역으로 진출을 꾀했다. 이렇게 카이로와 케이프타운, 콜카타 3개 지역을 잇는 거대한 식민지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국의 팽창주의 노선은 곳곳에서 다른 나라들과 충돌하였다. 먼저 아프리카에선 숙명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마다가스카르를 잇는 이른바 횡단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영국은 남북으로 프랑스는 동서로 진출하다보니 결국엔 오늘날 남수단 일대에서 충돌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다.

또 카이로와 콜카타를 연결하는 정책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중 하나인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충돌하였다. 크림 전쟁,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거문도 사건 등 영국과 러시아의 잇달은 충돌은 모두 3C 정책과 남하정책의 충돌에서 나온 산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일본 제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의 손으로 러시아를 죽이는 차도살인을 단행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좌절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후엔 또 다른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 제국과 충돌하게 된다. 식민지 확장에 비판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해외 식민지 개척을 주문했다. 그 결과 나온 정책 중 하나가 베를린 - 비잔티움 -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이른바 3B 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영국과 독일이 충돌하게 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보물단지 수에즈 운하인도를 건드리게 될 것을 심히 우려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이같은 두 나라 간 충돌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3. 여담[편집]


  • 상술한 독일의 3B 정책과 더불어서 재플리시며 그게 그대로 한국으로 수입됐다. 인터넷에 영어로 3B, 3C Policy라고 쳐도 검색되는 건 대부분 한국어일어 콘텐츠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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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장 위키백과에 3B, 3C 정책이 별도 문서로 작성된 것은 이 두 언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