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왜곡/채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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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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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관련 인물
및 단체

진압 및
왜곡 관련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 황영시 · 이희성 · 최세창 · 박준병 · 하나회 · 주영복 · 신군부 · 지만원 · 김대령 · 이주천 · 서석구 · 김진태 · 이종명 · 김순례
저항 관련
윤상원 · 박남선 · 정상용 · 조비오 · 박관현 · 윤한봉 · 김완섭 · 광주시민 · 투사회보 · 시민군
목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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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사상당한 경찰과 시민 · 김경철
사건 사고
5.18
관련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 광주 폭격 시도 논란 ·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전우원)
왜곡 관련
5.18 민주화운동/왜곡 (북한개입설 · 무장폭동설) ·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 · '5.18 광수' 날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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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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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2. 역사 왜곡
2.1.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2.2. 특수부대는 당시 밧줄처럼 태아(창자)를 목에다 걸고 돌아다녔다?
2.3. 특수부대는 80년 5월 27일 교전 과정에서 세 명 이상의 특전사를 죽였다?
2.4. 특수부대는 3일 안에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그리고 태백 산맥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2.5. 5·18 사망자 중 69%가 카빈 총에 의해 사망했다?
2.6. 38곳의 무기고가 시민군에 의해 4시간 만에 탈취된 것은 간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3. 5.18 단체 및 유가족들의 반발
4. 참고
5. 관련 문서



1. 설명[편집]


채널A에서 방송하는 2013년 5월 15일 《김광현의 탕탕평평》은 97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나 거기서 방송한 내용들은 사실이 아닌 게 이미 밝혀졌거나 근거가 없는 내용들이다. 한 마디로 압축하면 '5.18은 북한이 개입한 사건인데 다들 쉬쉬하고 있다'는 개소리. 방송에서 사실 확인도 안 하고 함부로 내보낸 것.

그러면서 채널A는 해당 방송 내용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채널A는 인터뷰 내용이 최초로 밝혀진 것이라고 자극적인 발언까지 더 했으나 실은 해당 인물과의 인터뷰는 지 모 씨와 과거에도 진행된 바 있다.


2. 역사 왜곡[편집]



2.1.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편집]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1.jpg

이주성 : …어, 제가 그 북한에 있을 때, 아마 북한에 있었던 분들은 다 누구나 알 겁니다. 5월 18일 그, 사건이, 이게, 북한군이 개입해서, 저, 그, 일어난 사건이라는 걸, 북한에서는 뭐, 그, 누구나도 다 아는 사실인데. 제가 한국에 와보니깐, 전혀, 그게 이렇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탈북자들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반례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 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 라고 말한 바 있다. #[1]

강성산 전 총리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친척이었던 강명도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북한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강명도 씨가 증언한 북한의 대남 공작원 파견 시도와 보고서의 존재 역시 진위를 가리기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김명국 씨의 증언은 강명도 씨의 증언과는 모순된다는 것이다.

"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 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 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 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 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 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의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북한 최대의 대남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 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 명의 정예 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써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옮겨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돌연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공작원들은 무기를 내려야만 했다."[2]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씨도 김일성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간첩을 파견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평화라는 것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우리 국군도 더욱 강화하고 우리 여기서 안보체계를 잘 세워서 파견하는 간첩들이 맥을 못 추게 만들면 그것이 곧 평화입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 라고 말입니다. 제일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

이렇게 고위 탈북자들 간에서도 큰 의견 차이를 보이니 특수부대가 광주에 침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그 밖에 그 밖에 수많은 탈북자들이 광주엔 북한 특수부대가 침입했다는 주장에 반박하고 있다. 1981년부터 10년간 북한군 특수부대의 하나인 민정경찰(JSA)에서 사관장(준위) 계급으로 복무했던 김성호(가명·47)씨는 '5·18 북한군 개입설' 에 대해 이리 말했다.

"군복무 시절 '광주 사건이 장기화됐다면 북한의 특공대가 참가할 수도 있었다' 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 말조차 소문에 불과했다.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 주목을 끌고 싶은 일부 인사가 잘못된 발언을 해 광주 시민들에게 상처를 줬다. 만에 하나 북한군이 투입됐다고 치더라도 최정예 군인만 선발됐을 특수부대원들이 당시 계엄군에게 몰살됐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예 특수부대원이라면 계엄군 경계선을 뚫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 작전을 수행했어야 맞다."

82년부터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대위)로 복무한 박영기(가명·47)씨도 관련 증언을 하였다. "한국 내 소요 확산시 북한군이 침투할 것이란 얘기는 인민군 내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 들리던 말은 소요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대돼 남한 내 혼란이 확산될 경우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내용이었다.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

국내 북한군 출신 탈북자들도 난감해하고 있다. 북한재향군인협회 한 회원은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 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 말했다. #

정말 만에 하나, 수백명에 달하는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심각한 경계 실패에 해당하며, 특히나 그 당시 이 운동으로 인하여 전군에 경계태세가 내려졌던 마당에 이러한 규모의 북한군이 정말 국군의 감시에 발각되지 않고,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광주까지 내려왔다면 그것은 국군이 자동문이 되어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므로, 오히려 이러한 주장은 북풍 사건처럼 전두환 정권의 요청에 의한 북한군 파견이라고 하는게 더욱 말이 될 지경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명국의 증언은 증언 내부에서도 아래와 같이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2.2. 특수부대는 당시 밧줄처럼 태아(창자)를 목에다 걸고 돌아다녔다?[편집]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2.jpg

김명국 (가명) : 그 저 뭐야… 대가리들 좀 길고 야들은 다 전투원이야. 나는 그럴 새가 없어요. 지휘관 따라다니니깐… 밧줄처럼 태아를 여기다 목에다 끌고 주렁주렁 매 그… 그 저 뭐 삼층 아파트 가는 거 있잖아 무슨 시청, 야산이 뒤에 있어요. 조그만 산이. 그쪽 뒤를 막 끌고 다니고 막 그랬어요.


머리카락이 긴 이들은 다 전투원이라는 김명국 씨의 주장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 중 장발의 머리를 가진 이들은 모두 북한 간첩들이었다는 근거 없고 논리에 문제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주장에 근거라고 갖다대는 말이 '1970년대에는 두발 길이 단속을 했는데 어떻게 저런 긴 머리가 나오느냐, 북한에서 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단속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다음 링크의 영상에서 볼 수 있듯 1979년엔 기자들도 제법 머리가 길었다. 김명국 씨 주장을 그대로 따르자면 다음 링크의 영상 속 기자분들도 북한 간첩이다. 그것도 전두환 앞에서 당당히 질문하는 간 큰 간첩 혹은 전두환을 눈앞에 두고도 암살하지 않은 직무유기 간첩 대한뉴스 미공개필름 1266호(1979년 11월 23일) 중 - 1분 19초부터 보길 바란다

뿐만 아니라 김명국은 당시 전투원들이 밧줄처럼 태아를 (자막에선 "창자") 목에다 걸고 주렁주렁 매달아 다녔다고 주장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어떤 기록물이나 영상물에서도 태아(창자)를 목에 걸고 다니는 이들은 없다. 만약 신군부가 관련 사진을 발견했다면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선전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을 테니 바로 선전에 활용했을 거다. 그렇다면 신군부는 그들이 필요로 하던 자료를 찾았을까? 실제로 1980년 6월 25일 미 국방부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국방.png

"…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4]

이와 같이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탈북자의 주장은 상식으로 봐도 불가능한 행동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조차 없다.

2.3. 특수부대는 80년 5월 27일 교전 과정에서 세 명 이상의 특전사를 죽였다?[편집]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3.jpg

이주성 : 예. 27일 오전 9시 경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는데요. 그런데요. 후퇴를 하는데, 후퇴를 하는데 이제 특전사, 에 특전사와 하고 그 이제 조우했답니다.

김광현 : 아, 후퇴를 하다가.

이주성 : 예.

김광현 : 특전사를 만났군요.

이주성 : 예예.

김광현 : 우연히 만났군요.

이주성 : 에예. 그니깐, 아, 특전사 쪽에서 자기를 먼저 본 게 아니고, 이, 김명국 선생 쪽에서 특전사를 먼저 봤다는 거죠. 그 거리가, 뭐 한 300m 좌우 안에서 이렇게 봤답니다. 에, 그러니깐 불리한 상황이니까 먼저 쏴야된다. 그, 제압 안 하면 자기가 죽은니깐. 제압 당하니깐.

김광현 : 근데, 그 김명국 씨 복장이 전부 다 대한민국 육군 복장이었을 것 아닙니까.

이주성 : 아, 육군이 아니고 사회인 복장.

김광현 : 아, 그냥 그 개인 복장.

이주성 : 사복. 사복. 사복 사복.

김광현 : 사복을 한 사람들이 총을 들고 있으니깐 그쪽에서 우리를 먼저 공격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우리가 먼저 공격하자. 공격했군요.

이주성 : 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김광현 : 예, 그래서 그 때는 김명국 씨가 직접 그, 조준사격으로 쐈나요. 몇 명이나 쐈나요?

이주성 : 대장이 그 때 능력껏 쏘면, 그 사격 먼저 해라, 해서 내려서 자기 쏜 것만 해도 세 명이랍니다.

김광현 : 아, 자기가 쏘아서 맞아서 쓰러진 사람만 세 명이다.

이주성 : 예.

김광현 : 야, 그런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데. 야, 저도 들었습니다. 세 명을 쏘았는데, 쓰러지더라. 그, 죽지 않았습니까, 했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죽은 것 같더라, 맞은 위치를 봐서. 야, 그런 증언을 했습니다. 여기에.


김명국에 따르면 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정복된 뒤인 5월 27일 오전 9시, 북한에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하는 도중에 특전사를 조우했다고 한다. 그때 불리한 상황이 될 수 있으니 먼저 사격을 가했고 김명국 씨 자신은 국군 3명을 총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교사 작전일지의 5월 27일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도청에서의 시민군과의 교전과 관련한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스캔본[5]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518계엄군의작전일지.jpg

육군 보병 20사단의 공수여단의 진압작전기록인 「20사단 충정작전 보고」의 27일자 기록도 마찬가지로 오전 9시 이전 도청 주변에서의 전투만을 다루고 있다. #[6]

"5월27일
◇ 06:50 62연대 전투 결과보고
사살:3, 포로:20, 방독면:1, 칼빈:3, P-77:1
◇ 06:51 91포병 대대 도청 도착 61연대 증원 개시
◇ 07:05 공수 여단 철수(3,7,11여단)
◇ 07:25 20사단 전 임무 인수
◇ 07:40 기갑 전차대 15 APC2대 1/4톤 1대 광주 시내 무력 시위 및 도청 증원
◇ 08:00 부대 배치 조정, 지역 수색 및 작전 소탕 주민 통제 야간: 소대 단위 주요 지점 확보 및 기동 순찰"

앞서도 언급했듯 신군부는 시민군의 무장 투쟁을 부각해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선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취했다. 그런데 사복 차림의 무장 집단이 광주를 빠져 나가는 과정에서 특전사를 세 명 이상 쏴죽였는데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도 않고 국방부의 교전 기록과도 모순이다. 마지막에 김광현은 자기도 뭘 들었다는 걸까

2.4. 특수부대는 3일 안에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그리고 태백 산맥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편집]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4.jpg

김광현 : …근데 돌아갈 때는 어떤 경로로 돌아갔습니까. 북한으로.

이주성 : 예, 그래서 그… 조장이 하는 소리가 경남 산줄기라고 그 뭐, 여기와서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근데 경남 산줄기가 어디냐 하니깐 문경 고개 그쪽으로 간답니다.

김광현 : 아, 지리산으로해서 일로 쭉 올라갔군요.

이주성 : 예. 그 문경 고개 쪽을 올라가는 과정에, 그, 조, 부, 그 이제, 부조장이죠. 부조장 이 사람이 아침에 식사를 하러 가는데, 어디 갔다 와보니 아. 누구 하나 좀 해치웠다, 발각 되가지고. 이런 보도를 하더라 이거죠.

김광현 : 누구한테요.

이주성 : 예, 조장한테.

김광현 : 아, 자기 조장한테, 예예.

이주성 : 예예, 그 처녀 애가 하나, 위의 산 속에, 우리가 길을 잘못 탄 것이 아니냐. 아니 우린 바로 가고 있어. 그니깐, 왜 그 산 속에 여자 애가 있느냐, 그러면 마을이 인근에 가깝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니야, 우리는 그, 벗어나지 않았어. 조사는 이렇게 해서 무슨 일이 있었냐, 하니깐 여자애를 땅에 묻어버렸다. 에, 그런 보도를 하더라구요.

(중략)

김광현 : …근데 그, 문경 태백 산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휴전선을 뚫고 북으로 올라갔나요.

이주성 : 네, 예.

(중략)

김광현 : …그 휴전선에 도착한 게 5월 30일, 80년 5월 30일, 저녁 밤 11시경이었군요.

이주성 : 예.


김명국에 따르면 5월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는 5월 27일, 전라남도에서 출발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문경)을 거쳐 태백 산맥을 따라 5월 30일에 강원도에 위치한 휴전선에 도착했다. 불과 3일 안에, 전국 비상 계엄하에서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강원도를 가로지른 것이다. 퇴각 과정 속에서 예상과는 달리 산길에서 여성을 발견했을 정도로 당시 남한 지리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부대가 3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강원도를 가로질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 비상 계엄이 내려져 있는 상태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4개도를 아무런 문제 없이 행진했다는 것은 당시 국내에 있었던 분위기를 고려해보았을 때 불가능하다.


2.5. 5·18 사망자 중 69%가 카빈 총에 의해 사망했다?[편집]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채널A사진5.jpg

김광현 : 5·18 사망자 중 69%가 카빈 총에 의해 죽었다는 이 조사는, 누가 조사한 겁니까.

서석구 : 그러니깐, 이제, 이 수사 당국에, 기록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김광현 : 아, 누가 개인이 주장하는 게 아니고.

서석구 : 예.

김광현 : 수사 당국이 수사를 했고.

서석구 : 예. 수사를 했는데, 그렇죠. 총기 사망자, 타박상, 이렇게, 이 뭐, 칼로 찔린 거, 이런 사망자 원인 분별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런 것이 나왔고.

김광현 : 총 사망자는 얼마입니까.

서석구 : 총 사망자가, 그 1980년 판결문에 의하면 191명입니다. 191명이고, 민간인 사망자가 164명입니다. 그리고, 그, 이제, 나머지는 군경이겠죠. 그런데, 그 5·18특별법에 의해서 새로, 이제, 그 이후에, 소위 말해서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분으로 했는 이 판결문의, 사망자 수는, 106, 민간인 사망자 수가 166명. 그러니깐, 전에는 164명인데 166명, 2명이 늘어난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그 외에 군경 이런 건 똑같습니다. 그러니깐, 191명 사망자가, 그, 5·18특별법 이후에 193명, 두 명만 늘었습니다. 그러면, 사망자 수만 본다면, 그 때 1980년 판결이나, 그리고 그 특별법 이후의 판결이나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에서 보고서가, 한국군이 발표하는 사망자 수는 정확하다…


민간인 총상 사망자 중 69%가 M16 이외의 총으로 사망했다는 통계는 지○○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수치다. 지○○은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의 5부, 사망자 명단에서 학생 사망자 33명과 민간인 사망자 131명을 토대로 88명이 카빈 소총에 의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채널A의 서석구는 이를 토대로 해 "69%의 사망자가 카빈 소총에 의해 사망했다" 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지○○이 첨부한 보고서 원본을 살펴보자. #[7] 아래는 보고서의 97쪽이다.

파일:attachment/5.18 역사왜곡/채널A/안기부보고서.png

보고서의 "사망원인" 열에는 총상, M16 총상, 칼빈총상, 타박상, 자상사, 차량사고, 그리고 사인 미상 등이 있다. 이 중 총상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 항목은 "총상", "M16 총상", 그리고 "칼빈총상" 뿐이다. 69%라는 통계는 이 중 "칼빈총상" 에 의한 사망자 뿐만 아니라 "총상" 에 의한 사망자까지 모두 포함해서 나온 수치이다. 여기서 "총상" 은 당시 총기를 밝히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실제로 후에 밝혀진 사망자와 대조해보면 "총상" 에 해당하는 이들 중 계엄군에 의해 죽은 이들이 많다. 지○○이 사실로 가정하고 올린 검찰이 1995년 7월에 발표한 수사 결과 보고서 「5·18 關聯 事件搜査結果」를 살펴보자. #[8]

수사 보고서 118쪽에서 사인이 "총기 불상" 으로 언급된 조규영 씨의 사인은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총상" 으로 보고되고 있다. 수사 보고서 120쪽에 언급된 계엄군에 의한 미니버스 사격 사건의 사망자 김윤수 씨의 사인 역시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총상" 으로 보고되고 있다. 수사 보고서 126쪽에서 언급된 11공수에 의한 사망자 김윤수 씨와 임병철 씨의 사인도 안기부 보고서에서는 "총상" 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는 즉, 사망자의 69%가 M16 이외의 소총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은 어불성설임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안기부 보고서에서 사인이 "칼빈총상" 으로 표기된 학생과 민간인 사망자 수는 88명이 아닌 10명이다. 서석구는 사망자의 69%가 카빈 소총으로 사망했다고 이를 더 부풀렸으니 이 주장 역시 거짓이다. 탄환 구경 검사는 안했다


2.6. 38곳의 무기고가 시민군에 의해 4시간 만에 탈취된 것은 간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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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 : 또 중요한 문제라서 한번 더 여쭤보겠습니다. 그, 무기고를, 에, 약 38군데를 이제 5시간 만에.

서석구 : 4시간 만에. 그리고 또 17군데에.

김광현 : 동시에 한 겁니까, 순차적으로 한 겁니까.

서석구 : 그러니깐, 4시간 만에 동시다발로 했겠죠. 동시다발로, 4시간 만에, 동시다발로. 그저, 4시간 만에 17군데에 산재돼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탈취를 했는데, 에, 이 무기고 위치를, 첩보를, 미리, 이, 저, 저희들이 갖고 있는, 이, 저, 탈북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미리 간첩들이 3개월 간에 거쳐서 거, 전남에 흩어져있는, 각 지역에 흩어져있는, 무기고 위치를, 다 첩보를, 받아 가지고, 에 그 간첩들이 첩보를 받아가지고, 이 그 간첩들이 첩보를 받아가지고, 북한 특수부대가 내려와가지고 쳤기 때문에 삽시간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아래는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 중 시민군의 무기고 탈취와 관련한 부분이다. #[9]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 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 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에,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다. #[10] 실제 1973년에 서울에서 벌어진 구로동 카빈 강도사건의 범인들도 예비군무기고에서 카빈소총 3정을 절취해 강도살인에 이용한 실례가 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산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1]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 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11일 하루 안에 무기고가 탈취당했다는 주장도 틀렸다. 전교사 작전일지의 5월 22일자 기록에는 목포 연동지서무기고 및 목포경찰서 무기고 피복창고가 탈취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스캔본[12].


3. 5.18 단체 및 유가족들의 반발[편집]


(흥분한 어조로 화를 내며)역사를 왜곡하고 북한군이 왔다는 잘못된 편파된 보도에 대해서 왜 채널A를 징계를 하지 않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33년 동안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은 그들의 가슴 속에 맺힌 한을 들어야 합니다!

5.18 구속부상자회 사무총장 이동계(2013, 뉴스타파)


(울부짖으며)자식 잃은 부모들이 다 올라왔습니다! 하도 분해서... 자식을 잃은 것도 분한데 이게 몇 번(째)이야!

5.18 유가족 임금단[13]

(2013, 뉴스타파)


논란이 커지자 채널A측은 기자들에게 '21일 해당 프로그램과 메인뉴스에서 사과방송을 하겠다'고 약속했고, 김광현 채널A 산업부장은 이날 오후 자신의 프로그램 끝에 "만약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유족이나 관계자를 가리키진 않았다. 또 "채널A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과 본질을 존중한다고 그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했고, 앞으로도 이런 자세는 계속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작진은 방송과정에서 부족했던 점을 엄밀하게 검증해 다시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겠다"며 석연찮은 태도를 보였다.

'채널A 종합뉴스' 박상규 앵커도 21일 방송 마지막에 '5·18 북한군 개입설'을 사과했다. '김광현의 탕탕평평' 때와 달리 <채널A>는 사과문 전문을 자막으로 공개했다. 한국기자협회 <채널A>지회가 '김광현의 탕탕평평' 사과방송을 본 후 사측에 '이왕 사과를 한다면 전문을 다 공개해 진실한 사과를 한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한 게 반영된 결과였다.

채널A는 그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프로그램 관계자 징계 및 경고'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4. 참고[편집]


이 문서는 원저자의 허락하에 거의 대부분 배추답이 쓴 글에서 나무위키에 맞게 옮겨온 것이다.

이 후, 이주성은 보랏빛 호수란, 5.18 북한군 개입설을 담은 논픽션이라고 주장하는 장작을 만들었다. 정작 논픽션이라고 만든 이 책엔 자신이 북한에서 들은것이 증거라거나 상관없는 사실을 5.18에 끼어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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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일리NK. 2008. 「"김정일 정권 붕괴, 軍이 바뀌어야 가능"」[2] 강명도,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중앙M&B, 1995), 239-241.[3] 자유북한방송. 2007.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종이쪽지」 #[4] 이흥환,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삼인, 2002), 부록.[5] 말 편집부, <광주진압계엄군의 작전일지>, 『말』, 1988년 8월, 26쪽.[6] 전남대학교5·18연구소. 2007. 「월간지 관련기사 20사단 충정 작전보고 국방부 원자료 전문(신동아, 1988. 12)」[7] 지○○. 2013.「안기부자료 5.18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8] 지○○. 2013.「5.18관련사건 수사결과(1995.7.18)를 공개합니다.」[9] 연합뉴스. 1995.「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10] 연합뉴스. 2000. 「'예비군 무기고' 철거놓고 경찰-군 갈등」[11] 지금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인 옛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해보라.[12] 말 편집부, <광주진압계엄군의 작전일지>, 『말』, 1988년 8월, 26쪽.[13] 참고로 임금단 씨는 5.18 최초 희생자인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