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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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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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5.17 내란 · 배경 및 전개 · 계엄군의 학살
관련 인물
및 단체

진압 및
왜곡 관련

전두환 · 노태우 · 정호용 · 황영시 · 이희성 · 최세창 · 박준병 · 하나회 · 주영복 · 신군부 · 지만원 · 김대령 · 이주천 · 서석구 · 김진태 · 이종명 · 김순례
저항 관련
윤상원 · 박남선 · 정상용 · 조비오 · 박관현 · 윤한봉 · 김완섭 · 광주시민 · 투사회보 · 시민군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 헤닝 루모어 · 인요한 · 김영택 · 김사복 · 조갑제 · 정동영 · 서청원 · 서정갑 · 심재철
피해자
사상당한 경찰과 시민 · 김경철
사건 사고
5.18
관련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 광주교도소 습격 조작 사건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일반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 광주 폭격 시도 논란 ·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전우원)
왜곡 관련
5.18 민주화운동/왜곡 (북한개입설 · 무장폭동설) ·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 · '5.18 광수' 날조 논란
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채널A · TV조선) ·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 · 전두환 회고록
기타
창작물에서의 묘사 · 5.18 사적지 ·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 5.18 특별법 · 5.18 관련 의문점 · 임을 위한 행진곡 · 화려한 휴가 · 택시운전사 · 오월의 노래 · 오월의 청춘 · 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 · 관련 자료김남주




1. 개략
2. 18일 7공수여단 실제 투입 시각 논란
2.1. 공식 사실: "오후 4시부터 진압 시작"
2.2. 의혹: "오후 1~2시부터 진압 시작"
2.3. 왜 중요한가?
3. 최초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가?
3.1. 계엄군의 발포 현황
3.2. 진압군의 지휘권 이원화 의혹
3.3. 전두환이다?
3.4. 정호용이다?
4. 행방불명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4.1. 5.18 행방불명자의 조사과정과 그 현황
4.2. DNA 감식과 그 결과
4.3. 암매장과의 연관성
5. 암매장 의혹과 발굴조사
5.1. 5.18 당시와 직후의 암매장 의혹과 시신발굴
5.2. 계속되는 의혹과 발굴조사
5.2.1. 발굴조사의 잇따른 실패
5.3. 새로운 발굴조사
5.4. 광주교도소 첫 암매장 진실 확인
6. 사망자 숫자[1]는 정확하게 얼마인가?
6.1. 사망자 숫자 추이의 변화[2]
6.2. 사망자 숫자에 대한 가설
6.2.1. 2천 명 사망설
6.2.2. 아놀드 피터슨의 가설
6.2.3. 또 다른 가설들
6.2.3.1. 광주 국군통합병원 시신 소각 의혹
6.2.3.2. 시신 모처 수송 후 해양 투기 의혹
6.3. 전망



1. 개략[편집]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현재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분석하는 문서다.


2. 18일 7공수여단 실제 투입 시각 논란[편집]




2.1. 공식 사실: "오후 4시부터 진압 시작"[편집]


그동안 1995년 검찰 수사와 2007년 국방부 조사 등등 5.18에 대한 진상 조사가 여러 번 있었다. 그 결과, 5월 18일 7공수여단이 광주 시내에 투입된 시각은 '오후 4시'임이 밝혀졌다.

(3) 5월 18일 상황

(...)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4: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으니 빨리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정웅 31사단장은 16:00에 병력을 투입하겠다고 보고하였음. 14:05경 정웅 31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갔음.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경찰이 수세에 몰려있다면서 16:00에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되, 도청 앞은 경찰이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였음. 정웅 31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15:35경 전남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3대대는 유동삼거리를 거쳐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금남로 끝부분으로 이동,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 16:00경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에도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33대대장은 시위 진압 명령을 내렸음. (중략) 조선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5대대는 16:00경 광주전화국 부근과 광주일고 부근 천교에 도착, 시위 진압 작전에 들어갔는데, 35대대장은,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1천여 명의 시위대에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을 하였으나 시위대가 계속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지 아니하자, 대대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음.

서울지방검찰청 「5.18 관련 사건 수사 결과」, 1995., p60~62


31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5. 18. 15:40에 7공수여단 33대대(35/267)와 35대대(26/196)가 광주시내 시위 진압에 투입됐다.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광주 시내로 출동한 시각은 각각 15:40과 15:50이었고, 금남로와 충장로로 이동한 시각은 16:00였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p63


당시 7공수여단 33대대장이었던 권승만 중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후 3시께 전남대에서 당시 31사단장이던 정웅 소장의 지시를 받고 오후 4시께 금남로 일대 시위 진압 작전에 병력을 투입했다.

권승만 광주청문회 증언, 1988년 12월 20일[3]


5월 18일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서 금남로 상황을 생생히 목격했던 김영택 박사는 본인이 저술한 『5월 18일 광주』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공수부대의 '살육 작전'이 개시된 오후 4시는 정확하다. 취재차 현장에 있었던 저자는 당시 손목시계의 시간에 따라 작전 개시 시간을 오후 4시 정각으로 메모했고 향후 5.18이 진행되는 기간 모든 시간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제31사단장 정웅 소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16시부터 작전을 개시하도록 2개 대대에 명령했다'고 증언했고, 정웅 사단장을 상대로 이 항목을 질의한 이해찬 의원 역시 「특전사 작전일지」에 오후 4시부터 작전이 개시된 것으로 나와있다고 밝혔다(같은 국회 『광주청문회 회의록』 제21호, 1988년 12월 21일, 136쪽). 권승만 33대대장도 오후 4시 금남로에 도착했다고 증언했다.(같은 국회 『광주청문회 회의록』 제20호, 1988년 12월 20일, 126쪽). 또한 정상용·유시민의 『광주민중항쟁』(166쪽)은 현장 출동 시간을 오후 3시 50분에서 4시 사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월간조선』, 1985년 7월호, 「미공개 조선일보 취재일지」는 '오후 4시 계엄군이 나타나기 시작,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 연행 시작'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95년 7월 18일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공개한 「5·18 사건 수사 결과 발표문」을 보면 '정웅 사단장의 출동 명령에 따라 15시 35분경 전남대를 출발한 7공수여단 33대대는 유동3거리를 거쳐 북동 180번지 앞 횡단보도 금남로 끝부분으로 이동,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 16시경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에도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33대대장은 시위 진압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월간조선』, 1995년 9월호, 556쪽). 또한 서울지방검찰청의 「5·18 공소장」(35쪽) 역시 '16:00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시위 진압 개시 시간은 오후 4시임이 분명하다. 한편 광주광역시 5·18 사료편찬위원회 편, 『5·18 광주민중항쟁』은 오후 1시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한 후 오후 2시 시위대와 대치하다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강제 해산을 시작한 다음 오후 4시 도청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시위를 진압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고(같은 책, 103~104쪽), 나의갑은 오후 4시 정각 공수부대의 '사람 사냥'이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나의갑, 앞의 글, 229쪽). 「전두환·노태우 등 8명 내란 혐의 공소장」에는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시내 금남로 일대로 출동, 16:00경부터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라고 밝혀 오후 4시를 분명하게 명기하고 있다(한상범 외, 『12·12, 5·18 재판과 저항권』, 법률행정연구원, 1997, 226쪽). 또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에는 제33대대와 제35대대가 18일 오후 3시 30분에 경찰과 함께 최초로 시위 진압에 나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김영진,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 동광출판사, 1989, 210쪽). 이밖에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동서, 42쪽)와 최정운은 오후 2시(한국사회학회 편, 앞의 책, 270쪽, 註2), 『한국논단』, 1995년 5월호(「광주 15년, 총 누가 먼저 쏘았나」)는 오후 4시 30분, 한용원은 오후 4시 40분(한용원, 앞의 책, 384쪽)에 작전이 개시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밝혀진 제7공수여단의 「전투상보」는 공식적인 작전 시간을 16:00으로 기록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8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2007, 63쪽).

김영택 『5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2010., p260



2.2. 의혹: "오후 1~2시부터 진압 시작"[편집]


그러나 신군부의 주장과 공식 사실과는 달리, 18일 공수부대가 시내에 등장한 시각을 두고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실제로 18일 7공수여단의 진압 작전과 살상 행위가 오후 4시가 아닌 '오후 1~2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일부 기록과 목격자들의 증언이 상당수 존재한다.

11:40 - 7공수여단 33대대 출동 예정.

보안사령부 「광주사태 일일속보철」(!)[4]


12:45 -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14:42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5]


오후 1시께 광주역 인근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트럭마다에 가득 실려 시내 중심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김준태 『5월과 문학』, 남풍 1988.[6]


한편 오후 1시쯤 수창국민학교에는 20여 대의 군용 트럭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병력은 전원 공수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두 시간 동안 작전 명령을 받고 조를 재편성했다. 공수대원들은 모두 완전 무장을 갖추었는데, 얼굴에 투석 방어용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총은 등에다 엇비슷하게 메고, 한 손에는 대검을, 또 다른 손에는 살상용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오후 2시부터 시외버스 터미널을 출발점으로 해서 시내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진압을 시작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초판), 풀빛 1985., p42


1시가 조금 넘어서 수창초등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 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 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김정섭(당시 공무원) 증언[7]


오후 2시 15분에서 20분 사이 수창국교 육교 인근에서 등에 총을 메고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와 대학생 간의 충돌을 목격했다.

박병률 씨 광주청문회 증언, 1989년 2월 23일[8]


점심시간 이후 얼마 안 있어 시내에서 학생들이 연행돼 와 쪼그려 뜀을 하는 등 기합을 받은 뒤 대학 건물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김웅산(당시 전남대 수위) 증언[9]


북동우체국 인근에 있는 형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께 공용터미널 앞으로 나가 봤다. 소방서 쪽에 계엄군이 포진해 있고 로터리 쪽에는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있었지만 분위기에 눌려서인지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그러던 중 뒤쪽에서 갑자기 공수부대가 튀어나와 무차별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상황은 변해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급한 김에 공용터미널 옥상으로 피신했다. 잠시 후 옥상에서 내려와 공수부대원들에게 대항했으나 총검과 진압봉, 그리고 인정사정 없는 구타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이재의(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3학년) 증언[10]


오후 3시가 가까워지면서 자동차보험 쪽으로 나가 봤다. 시위대 2~3백 명이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경 지휘자는 군인들이 곧 투입될 것이니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10분이 지났을까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무지하게 두들겨 팼다. 위협을 느낀 나는 잠시 후 터미널 내 배차실로 숨었다. 거기서 내다보니 공수부대원들이 대한극장 앞에서 구타를 견디지 못해 실신한 학생들을 가마니 던지듯이 싣고 있었다.

임열학(당시 공용터미널 직원) 증언[11]


당일(18일) 오후 2시경에 22세 남자가 공수부대원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당해 응급실로 왔다. 이때를 기하여 오후 내내 18일 총 16명의 환자가 왔는데 대부분 곤봉으로 가격당해 두부열상, 골절, 찰과상 등 외상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김현종(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증언[12]


그리고 당시 11공수여단장이었던 최웅 준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후 3시께 정호용 장군이 숙영지인 동국대로 찾아와 광주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 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11여단을 증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최웅 광주청문회 증언, 1988년 12월 20일[13]


다음은 1988년 광주청문회를 앞두고 평화민주당에서 접수한 「피해자 신고서」에 나와 있는 18일 부상자 사례 중 일부이다.[14]

김규진(남, 50, 당시 교사) - 오후 3시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공수에 허리를 발로 채이고 개머리판으로 맞는 등 전신 구타당해 앞니 4개가 빠지는 등 부상.

김남일(남, 48, 당시 운전기사) - 오후 3시경 광주공원 부근에서 공수에 구타당해 우척골 골절당하고 연행. 5.20.에 통합병원 후송.(우상지, 안면부, 옆구리, 좌족 타박상)

김범동(남, 34, 당시 조리사) - 오후 3시경 충장로 5가 입구 중국집(제일관) 주방장 근무 중 광주일고 구내이발소 정문 앞에서 여자 1명이 공수부대 3명에 옷도 찢기고 발로 차이면서 집단 구타 목격 중, 갑자기 금남로5가에서 몰려온 30~40명의 공수가 다가와 가게 유리창 파괴, 집단 구타, 의식 잃고 쓰러짐.

박병률(남, 당시 조선대 의대 2학년) - 오후 2시경 광주일고 교정에서 구타당함.

양일준(남, 29, 당시 기능공) - 오후 2시경 신안동에서 공수에 구타당하고 연행됨. 통합병원에 후송돼 한 달 이상 치료받음.

이승민(남, 49, 당시 상업 종사) - 오후 2시경 광주소방서 옆 본인 점포에 난입한 공수들에 무차별 구타당하고 실신함.

장성암(남, 23) - 오후 2시경 수창국교와 공용터미널 사이에서 공수 7명에 곤봉, 군홧발, 개머리판 등으로 전신 구타당하고 실신.

하용만(남, 34, 당시 건축미장) - 금남로5가 송월정 건축 미장작업 마치고 귀가하던 중 오후 3시경 충장로4가 도로에서 공수가 이유 없이 무자비하게 구타하여 실신한 채 트럭에 실려 연행됨.

김막동(남, 25, 당시 건축 종사) - 오후 3시경 예비군 훈련받으려고 공용터미널에서 장흥행 버스에 올라타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수가 갑자기 차내로 올라와 본인을 끌어내어 진압봉으로 머리 등 전신을 구타.

박용기(남, 22, 당시 학생) - 오후 2시경 전대 후문 입구에서 3명의 계엄군에 구타를 당하고 전대로 끌려들어 갔다가 의식불명.



2.3. 왜 중요한가?[편집]


전두환,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 인사들은 "광주 시위를 처음에는 경찰로 진압하려 했으나, 경찰이 미온적으로 대처해 오후 2시부터 오히려 상황이 악화됐다. 그래서 오후 4시에 공식 지휘계통(계엄사령부-전남북계엄분소-전남계엄분소-공수부대)을 통해 할 수 없이 공수부대가 투입, 진압을 시작했다"며 사태 악화의 원인을 공수부대가 아닌 경찰과 시위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광주 진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위 의혹이 사실일 경우, 신군부의 주장은 자신들의 만행을 합리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설령 신군부의 주장대로 학생 시위가 오후 2시부터 거세졌다 한들, 이는 오후 1~2시에 시작된 공수부대의 잔인한 살육 때문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의미한다. 게다가 정식 지휘 계통을 통해 하달된 명령과는 달리, 당시 7공수여단이 오후 4시 이전부터 이미 비공식 명령을 통해 진압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시위를 일부러 악화시켜놓고 군을 투입했다'는 의혹과 '지휘체계 이원화' 의혹으로 이어진다.[15]

이 의혹을 사실로 가정했을 시, 5월 18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11:40 - 7공수 출동 준비

12:45 - 7공수 33대대, 진압 명령 수령

13:00 - 7공수 33대대 시내 투입

14:00 - 비공식 진압 작전 개시, 학생 시위 거세짐

14:42 - 7공수 35대대, 진압 명령 수령

15:00 - 7공수 35대대 시내 투입

15:40 - 7공수 33대대 정식 투입

15:50 - 7공수 35대대 정식 투입

16:00 - 정식 진압 작전 개시



3. 최초 발포 명령자는 누구인가?[편집]




발포권(자위권)은 진압작전 책임 지휘관인 위수사령관에게 있다.[16]

그리고 발포권한을 가진 지휘관은 발포명령을 하달하기 전에 민간당국과 협의하지만 발포명령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기는 다중 폭동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유혈난동으로 변질, 무장폭도로 조직화되고 지휘계통에 의해 체계적인 저항을 감행하여 도시 게릴라 형태로 발전하게 될 때이며, 발포가 부득이한 경우에도 먼저 발포한다는 것은 군중에게 경고하고 실탄사격 전에 반드시 공포사격을 실시한다. 그리고 사격은 지휘자(관)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사태수습이 도저히 곤란할 시는 지휘관의 상황팡당에 의거, 일제사격을 실시하되 발포에 대한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으므로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 육군본부의 교범 <폭동진압작전>에 명시되어 있는 자위권 규정


1995년 검찰에서 행한 12.12 및 5.18 수사에서는 발포명령자를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고, 2007년 국방부 조사에서도 발포명령자의 신원은 오리무중이었다.


3.1. 계엄군의 발포 현황[편집]


#
날짜
시간
발포장소
발포한 부대
비고
1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계림동
11공수 63대대
최초의 발포, 1명 부상
2
1980년 5월 20일
밤 11시 30분
광주역
3공수
최초의 집단발포, 최소 5명 사망
3
1980년 5월 21일
낮 12시
전남대학교 앞
3공수
최소 2명 사망
4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7공수 35대대, 11공수 61·62·63대대
최소 54명 사망
이후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17]에 열린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 → 광주시민 공격 및 학살

계엄군의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발생했다. 시민들에게 쫓기고 있던 장갑차에서 퇴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총을 발사한 것이다. 이 일로 고등학생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장갑차에는 차씨 성을 가진 11공수여단 63대대 대위 하나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 날 보안대에서 간단한 조사만 받고 부대로 복귀했다. 헌데 이 발포는 그가 복무하던 11공수여단과 상위부대인 31사단과 전교사의 상황일지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보안부대에서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계엄군의 소행이 아닌 '불순세력의 선동수법'으로 치부하며 발포를 부인했다.

한편 다음 날 5월 20일 밤에는 광주역에서 3공수여단에 의해 최초의 집단발포가 발생했다. 당시 광주역에서의 상황은 시민들과 계엄군들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대응은 과격해졌고, 각 부대장들은 실탄 지급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오후 10시 30분에 3공수여단장이 "경계용 실탄은 위협사격용으로만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에 사용할 때는 사전에 보고하라"며 실탄을 각 부대에 지급하였다. 밤 11시 15분, 광주역에 있던 3공수 병력에는 누군가로부터 실탄 장전 및 발포 명령이 하달되었다.[18] 이후 오후 11시 30분[19]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발포했다. 이로 인해 4~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발포도 3공수여단과 상급부대의 기록에는 빠져 있다. 광주역 발포는 별도로 파견된 정보원들의 정보 수집을 통하여 31사단과 전교사에 알려졌다. 한편 이날 밤 10시 30분, 2군사령부에서는 "발포 금지, 실탄 통제"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는 계엄군 지휘관들이 독단적으로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발포명령 없는 발포가 잇따르는 비상식적인 현상들이 일어났다. 밤 11시 4분에는 아세아자동차나 서부경찰서 쪽에서 LMG 연발총성이 들렸고, 밤 11시 20분에는 광주시청 옥상에서 공수부대가 예광탄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밤 11시 30분에는 계림동 파출소에서 총성이 3,4발씩 울렸고, 같은 시각 광주역 집단발포가 일어났다. 밤 11시 35분에는 계림동 사무소에서 총성이 울렸다.[20]

5월 21일에도 집단발포가 발생했다. 이 때의 집단발포는 20일의 그것과 비교해서는 대규모였고, 조직적이었다.[21] 이미 10시 10분 경에 11공수여단 63대대는 1인당 10발씩 실탄을 지급받았고, 이에 놀란 전북도지사는 윤흥정 계엄분소장에 연락을 걸어 "발포만은 삼가달라"고 호소했다. 계엄군 측에서는 11공수여단 61대대장이 도청 앞에 있는 4개 대대[22]의 총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상황은 갈수록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상부에서는 '선무활동을 강화하라'는 지시만 내려오기에 61대대장은 "도대체 상부에서는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거냐?", "발포를 할 것인지, 철수를 할 것인지, 어떤 지시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 그러던 중 12시 30분 경 전남매일신문 기자 나경택이 공수부대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발포명령 어떻게 됐나?"

"아직 안 떨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0분 정도 지났을까? 통신병이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발포명령입니다."[23]


오후 1시가 되기 직전에 시민들과 군인들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분수대 쪽 광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향해 발포가 발생했다.[24] 그리고 오후 1시 정각에 애국가가 울리더니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서 조준사격과 저격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오후 2시경 국방부장관실에서 열린 회의[25]에서 자위권 발동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26]


3.2. 진압군의 지휘권 이원화 의혹[편집]



파일:광주진압군 지휘체계도.png
광주진압군 지휘체계도

3.3. 전두환이다?[편집]



"대한민국에서 상식을 가진 사람치고 광주대량학살이 당시 실권자인 전 씨 몰래 단행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1%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 김대중


"당시의 책임을 굳이 거론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통과 역학이라는 두 가지 측면입니다. 법통으로 본다면 전국 계엄 하의 명령권자가 되겠는데 그건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학적으로 본다면 당시의 실질적인 실력자가 되겠지요. 모든 시선이 법통, 즉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인 이희성씨 쪽을 버리고 역학 쪽인 당시 실력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초점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 이희성의 증언


전두환은 21일 점심 12시를 전후로 K57(광주 제1전투비행단, 광주비행장)에 왔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으며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과 불상자 1명 등 4명가량이었다" - 전 주한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의 증언


3.4. 정호용이다?[편집]


"선배님,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습니까?" - 정호용이 윤흥정에게 강경진압을 주장하며 한 말



4. 행방불명자들은 어디에 있는가?[편집]





이 영상들은 2004년 5월 15일 KBS가 5.18 특집으로 방송한 '70인의 실종자 -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사라져 현재까지도 그 행방이 묘연한 사람들을 '5.18 행방불명자'라고 불린다. 이들은 계엄군에게 붙잡혔거나, 잠깐 외출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은 가족들은 사라진 식구들을 생각하며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그렇기에 행방불명자들의 행방은 5.18의 또 다른 미해결 문제다.

- 5.18 행방불명자들의 사연 -
곤로 기름을 사러 갔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
광주를 빠져나가려다 실종된 학생
증발해버린 일가족 4명

참고로 5.18 국립묘지에서 10번 묘역은 행방불명자 묘역이다.[27] 후에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된 분들은 4번 묘역으로 옮겨졌다.

4.1. 5.18 행방불명자의 조사과정과 그 현황[편집]


5.18 특별법의 제정과 6차에 이르는 보상 동안 441명의 사람들이 행방불명자로 신청되었다. 이 중에서 5.18로 인해 실종되었다는 것이 증명된 76명만이 '5.18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5.18 행방불명자(사실상 대부분 추정 상 사망자)는 어쩌면 900명의 묘연한 사람들 외에도 더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행방불명자를 조사하기 위해서 관련자료와 인우보증[28] 등을 요청했기 때문에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는 모두 탈락되었기 때문이다. 행방불명자 심사에 대한 비판1 비판2 한편 2017년 5.18 연구소 정수만 비상임연구원은 5.18 당시 체포 및 구속되었던 2474명의 명단과 병원 기록, 석방자 명단 등을 비교분석한 결과 900명 정도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밝힌 바 있다. #

한편 행방불명자 76명의 정보를 분석한 결과 남자가 60명, 여자가 13명, 성별 미확인 3명으로 밝혀졌고, 최고령자는 66세며 최저령자는 5세였다. 그리고 76명 가운데 48명이 주변인들에게 목격되었는데 마지막 목격장소는 바로 5.18 당시 치열한 접전지였던 광주 시내였다. 그리고 대다수가 5.18 초기에 실종된 것으로 드러났다. #

2019년 4월 8일. 행방불명자 76명 중 69명이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광주에서 김해로 ‘시체’를 운송했다고 비밀 문건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4.2. DNA 감식과 그 결과[편집]


그러던 중 2001년 광주시에서 조직한 '5.18행방불명자사실조사위원회'는 DNA을 통해 신원 미상의 시신들이 누구인지를 밝히려고 했다. 당시 기사 그 때까지 망월동에 묻혀 있던 신원 미상의 시신은 총 11구였다. 시신들의 DNA와 행방불명자의 가족들(93명)의 DNA을 채취하여 분석한 결과 이 중 6구의 신원이 밝혀졌다.

무연고 분묘 DNA 감식 신원 확인자(2002년)[29]
#
성명
출생년
직업
사망일
사망장소
사인
검시일
관련 사건
1
권호영
1963
재수생
미상
미상
총상
5월 28일

2
김기운
1962
송원고2
5월 21일
미상
총상
5월 28일

3
김남석
1959
직업훈련생
5월 23일
지원동
총상
5월 29일
지원동 승합차 학살
4
김준동
1963
목공
미상
미상
총상
5월 28일

5
양민석
1960
노동
5월 23일
주남마을
총상
6월 3일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
6
채수길
1959
식당 종업원
5월 23일
주남마을
총상
6월 3일
이리하여 76명이었던 행방불명자는 현재 70명으로 줄었다. 아직도 광주광역시는 실종자들을 DNA 감식을 통해 찾고 있으며 사람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도 DNA를 광주광역시에 제공하고 있다. 80년 5월 실종된 우리 학생들을 찾습니다


4.3. 암매장과의 연관성[편집]


5.18이 끝난지 37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행방불명자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점을 미루어볼 때, 현재까지 행방불명으로 밝혀진 사람들의 대다수는 "사망했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되면 그 시신들은 계엄군에 의하여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암매장을 당했다는 것이다.[30]


5. 암매장 의혹과 발굴조사[편집]





5.1. 5.18 당시와 직후의 암매장 의혹과 시신발굴[편집]


5.18 당시에도 암매장에 대한 의혹은 존재했다. 항쟁 처음부터 자행된 계엄군의 만행은 그런 의혹을 증폭시켰다. 그리하여 실제로 해방광주 기간 동안 시민들이 암매장된 시신들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시신을 발굴한 사례도 있었다.

전남대 학생과장이었던 서명원은 계엄군이 철수한 후 전남대로 돌아와 교정을 둘러보다가 피 묻은 허리띠와 신발 더미를 발견했다. 혹시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변을 뒤졌다. 암매장했다는 소문도 있던터라 학교 뒷산에도 가보았다. 거기서 솔잎이 유난이 많이 쌓여 있는 부분이 눈에 띄여 발로 밟아보니 쑥 들어갔다. 파보니까 고등학생 시체 한 구가 나왔다. 시체는 칼맞은 자국도 있었고 구타당한 흔적도 있었다. 소지품을 훑어보니까 광주상고생인 것 같았다. 광주상고에 연락 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 시체를 상무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시신은 아마 광주상고 2학년생이던 이성귀(16세)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광주상고 재학생 중 그가 유일하게 27일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31] ###

계엄군에게 사살된 사망자 중 일부는 시민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 수는 매우 적었고, 여전히 발견되지 못한 시신이 더 많았다. 계엄당국은 5.18 진압 이후 탄압과 은폐에만 급급하여 매장된 시신들을 찾는 데는 회의적이었다. 결국 시청 내 민원담당부서인 '복지계'에서 시신 수습이 이루어졌다. 시청 직원들은 시민들의 제보 등을 통해 광주시 곳곳에서 암매장되어 있던 시신들을 찾아냈다. 시신이 묻힌 곳은 대개 급하게 무언가를 묻은 흔적이 보이거나 시신의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주로 계엄군이 주둔하던 곳(전남대, 광주교도소, 주남마을 등)이나 그 주변지역(인근 야산)이었다.

가장 어린 암매장 피해자는 송암동 야산에서 발견된 신원미상 사망자 중 하나인 4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어린이가 있다. 현재 이 어린이는 무명열사 묘 5기(묘역번호 4-90[32], 92, 93[33], 96[34], 97) 중 4-97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 아이는 1980년 6월 7일 광주광역시 남구 송암동 야산에서 여자 옷에 싸여 암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1000원짜리 지폐 한장과 함께 발견되었다. 한겨레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현재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증언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로 송암동 야산은 광주효덕초등학교 근처의 야산으로 광주효덕초등학교는 광주에서 나주나 목포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는 학교이다. 때문에 계엄군이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목인 현재 지원동/용산동 근처 산에서 진을 치고 학살을 자행한 뒤 앞에 있는 광주천 근처의 밭과 진흙을 파거나 근처에 있는 당시 현대교통 종점에 총살로 피범벅이 된 수많은 시신들을 암매장했던 일이 광주에서 나주나 목포로 가는 길목인 송암동/진월동 근처 산에서 진을 치고 학살을 지행한 뒤 근처 산에 암매장함으로서 똑같이 일어난 것. 실제로 효천역과 효덕초교 근처의 도꾸 구덩이(분뇨 수거장)에 총 맞아 죽은 수많은 시신을 마구 넣었다는 증언이 있다.

● 시신발견지역: 광주교도소, 전남대학교, 주남마을, 지원동, 상무대 101사격장, 인성고 앞산, 효덕동, 천일버스 종점, 일곡부락 산, 부엉산 등
● 시신미발견지역: 송암동, 조선대(뒷산), 생용저수지, 광주비행장 초소, 황룡강 주변지역, 화정동 잿등 부근지역, 학동 현대교통 종점, 용산동 광주천변 근처 밭과 진흙, 효덕동 분뇨수거장(도꾸 구덩이)

조성갑(광주시청 사회과) 시신 발굴 일지[35]
구분
일자
장소
인원
인적사항(성명)
기타사항
인수
5월 27일
광주교도소
1명
미상, 남, 25세

인수
5월 27일
광주고
2명
양동선(1935년생, 광주고 수위)

미상, 남, 30대

인수
5월 27일
YWCA
1명
박용준(1956년생)

인수
5월 27일
전남여고 옆
1명
이금재(1951년생)

인수
5월 29일
공용터미널 욕조
1명
미상, 남, 20대
총상
매장, 발굴
5월 29일
교도소 도랑
8명
안두환(1935년생)
타박사
장방환(1922년생)
타박사
임은택(1945년생)
총상
고규석(1960년생)[36]
총상
민병열(1949년생)
자상
3구 신원 미기재

매장, 발굴
5월 29일
교도소 앞산
2명
최열락(1953년생)
총상
1구 신원 미상

신고, 접수
5월 29일
지원동 도로 옆 고랑
7명
7구 신원 미상
여성 1구 포함
인수, 발굴
5월 29일
상무대 101사격장[37]
11명
김재평(1951년생, 5월 22일 인수)
관구 의무실
조규영(1942년생, 5월 22일 인수)
관구 의무실
함광수(1963년생, 5월 22일 인수)
관구 의무실
임정식(1962년생, 5월 26일 인수)
통합병원
박종길(1956년생, 5월 26일 인수)
통합병원
양회남(1950년생, 5월 26일 인수)
통합병원
김평용(1962년생, 5월 26일 인수)
통합병원
송정교(1929년생, 5월 26일 인수)
통합병원
김형렬(경찰, 5월 26일 인수)
통합병원
전재서(1954년생, 미상)

1구 신원 미상

신고, 발굴
6월 3일
주남마을 뒷산
2명
채수길(1959년생)
유전자 감식(2002년)으로 확인[38]
양민석(1960년생)
신고, 발굴
미상
인성고 앞산
1명
전재수(남, 1969년생)[39]
총상
신고, 발굴
미상
효덕동 논
1명
남, 20대 추정
총상
신고, 발굴
미상
천일버스 종점
1명
김상태(1950년생)

신고, 발굴
미상
일곡부락 산
1명
미상(남, 40대, 정신이상)
정신이상(?)
신고, 발굴
미상
주남마을 뒷산(5월 24일, 부엉산)
1명
김부열(1963년생, 조대부중 3학년)
6월 7일(검시)



41명



한편 피해자 가족들이 직접 암매장된 시신을 찾아낸 경우도 있었다. 서만오(25세) 씨의 사례가 그렇다. 그는 동생을 찾기 위해 5월 22일 차량을 타고가다 계엄군의 사격으로 사망했다. 군인들은 그의 시신을 암매장했고 사라진 그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았다는 할머니의 신고를 통해 그가 계엄군에게 끌려갔다는 걸 안 가족들은 암매장 장소를 찾아나섰다. 결국 교도소 뒷산에서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40]

5.18 이후 1~2달 동안 광주는 암매장된 시신들을 찾느라 분주했다. 시민들의 제보에 따라 의심되는 지역들이 파헤쳐졌고, 직접 수소문까지 해가며 시신 발굴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통 소식이 없었다.

5.2. 계속되는 의혹과 발굴조사[편집]



5.2.1. 발굴조사의 잇따른 실패[편집]


이같은 성과에 힘입어 5.18 기념재단과 광주시는 90년대 후반부터 암매장 의심지역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발굴조사는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997년~1999년

▲1997년 8월~1999년 5월 = 암매장지 추정 신고 57건, 중복 10건·신고부실 42건 제외한 5건 발굴(관련성 없음)

◇2000년

▲11월29일 = 5·18 행방불명자 소재 찾기 사실조사위원회 구성

◇2001년

▲2월7일~11월30일 = 전남대 의과대 법의학교실 유전자 감식을 위한 유가족 혈액 채취·분석, 94가족 220명 채혈

◇2002년~2005년

▲2002년 5월~2004년 12월 = 암매장지 추정 신고 4건 중 2건 발굴(관련성 없음)

▲2002년 6월26일 = 광산구 소촌동 42-2번지 발굴 조사, 유골 1기·유품 7점 발굴했으나 일치하는 유가족 없음

▲2002년 6월27일~8월26일 = 전남대 법의학교실, 16가족 42명 채혈

▲2002년 10월28일 = 광산구 삼도동 발굴 조사, 유골 9기 발굴했으나 일치하는 유가족 없음

▲2003년 4월12일~4월14일 = 광주통합병원 담장 밑 발굴 조사, 특이사항 발견 못함

◇2006년~2009년

▲2006년 4월~2009년 4월 = 암매장지 추정 신고 3건 중 2건 발굴(관련성 없음)

▲2006년 1월18일·2007년 12월30일 = 남구 주월동 호반아파트 2차 공사장 발굴 조사, 유골 137기 등 발굴했으나 관련성 없다고 결론(김제평화원 보존)

▲2009년 3월17일~3월18일 = 북구 효령동산 145-2번지 발굴 조사, 유골 3기 발견했으나 관련성 없다고 결론

5.18 행불자 암매장 발굴작업 일지

이렇게 되자, 나중에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대량의 시신이 발굴된 경우에 5.18과의 연관성을 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들도 5.18과는 관련이 별로 없다는 것이 5.18 기념재단의 결론이다.


5.3. 새로운 발굴조사[편집]



2017년 문재인 정부가 5.18에 대한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서면서 지난 날의 암매장 관련 증언이나 양심고백을 기반으로 암매장 시신 발굴조사가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다.[41] 그리하여 11월에 1차적으로 과거 광주교도소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 도중 배관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는 암매장된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 조사진은 위치를 바꿔서 재발굴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암매장된 시신을 다시 파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던 중에 2019년 4월 8일에 경향신문 단독보도로 시체를 실은 공군 수송기가 김해로 옮겼다는 문건이 발견됨에 따라 지금과 다른 국면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5.4. 광주교도소 첫 암매장 진실 확인[편집]



[단독] 5·18 암매장 진실 첫 확인…옛 광주교도소 유골 DNA 일치
5·18 암매장 유골 신원 확인됐다
전남대서 이송됐거나 교도소 내부 방치 사망 추정
5·18 행불자 유족들·기념재단 “부정할 수 없는 현실…진실 밝혀지고 있다”

광주광역시청도 보도자료를 냈다. [이슈] “5·18 실종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5·18 실종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6. 사망자 숫자[42]는 정확하게 얼마인가?[편집]



6.1. 사망자 숫자 추이의 변화[43][편집]


#
발표주체
발표날짜
전체 사망자
민간인 사망자
군인 사망자
경찰 사망자
1
계엄사령부
1980년 5월 31일
170명
144명
22명
4명
2
계엄사령부
1980년 6월 4일
174명[44]
148명
22명
4명
3
육군본부
1982년 3월 15일
189명
162명
23명
4명
4
윤성민 국방장관
1985년 6월 7일
191명
164명
23명
4명
5
서울지방검찰청
1995년
193명
166명
23명
4명
6
대한민국 정부
2001년 12월 18일
195명
168명
23명
4명
7
5.18 기념재단
2005년 5월 13일
192명
165명[45]
23명
4명

그 동안 발표된 사망자 수치 변화를 볼 때 군인 사망자와 경찰 사망자는 별로 변함이 없는 것에 비해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숫자는 발표할 때마다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6.2. 사망자 숫자에 대한 가설[편집]



6.2.1. 2천 명 사망설[편집]


이러한 전두환의 특별살륙 명령으로 희생된 사망자는 2000여 명, 부상자 1만 1천명을 헤아리고 있다. -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2000명 설은 5.18 기간 중에 처음 제기되었다.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가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46]이라는 유인물에서는 5.18 때 발생한 사망자가 2000여명, 부상자 1만 1천여명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다. 5.18 때 발생한 계엄군의 만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솔깃한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정권 타도를 성토하는 유인물들에는 광주에서 2000명이 죽었다는 식의 내용이 들어가기도 했었고,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 문익환 목사는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광주 이천여 영령이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사태 직후 사망 및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인원이 2,000여명으로서 이 중에는 사망자, 체포구금자, 부상입원자, 피신자 등이 포함돼있었는 바, 이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으로 사료된다."면서 일축했다.

현재는 많은 역사학적 연구를 거치면서 2000여명 사망설을 믿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왜냐하면 사망자 2000여명을 뒷받침할 만한 의미있는 자료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망자 숫자 그 자체도 실제 밝혀진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고려한다해도 터무니없이 많다.

경향신문은 1995년 12월 14일자 신문에서 광주항쟁 당시의 사망자 숫자에 대해 말하면서 2000명 사망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참 뒤에야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확인돼 빛을 잃긴 했지만 처음 나돈 것이 <2000명 사망설>. 80년대 광주에서는 이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동네 어른들이 "6.25 때도 이러진 않았다."며 제 눈을 의심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과 사망, 중태자 처리 모습을 직접 본 시민들이 생각하기에, 2000명은 사실에 아주 가까운 숫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6.2.2. 아놀드 피터슨의 가설[편집]


광주의 침례교회에서 목사 직을 맡고 있었던 아놀드 피터슨은 자신의 저서 <5.18 광주사태>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그와 내가 최근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그 항쟁 동안 광주에 거주했던 한국군에서 일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 따르면 조사당국자들은 사망자 수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다시 회고해보면 그 수는 통계적으로도 내 추측과 일치한다. 1980년에 광주 인구는 약 75만명이었다. 그 인구 중 광주의 여러 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수는 대략 2천명이었다. 이들 2천명의 침례교인들 중에서 우리는 두 명의 사망자를 경험했는데, 그 비율은 1,000명 대 1명인 것이다. 만일 그 비율을 광주시 전체에 적용하면 약 750명의 사망자가 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일반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망자를 경험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 832명의 사망자는 - 혹은 대략 그 정도의 수는 - 통계적으로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47]


아놀드 피터슨의 가설 또한 '2000명 사망설'보다는 사망자 추정 수치는 적으나 여전히 믿기에는 신빙성이 약하다. 하지만 국군 조사당국자라면 절대 병사 계급일 리는 없는데다가 낮아도 이런 중요한 군내 보안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보안병이 아닌 상사에 소령 정도의 중견 간부급의 임무영역이기에 만약 해당 조사당국자 군 간부가 확보한 정보 중 하나라고 한다면 그냥 넘기기에는 꽤나 껄끄러운 증언일 것이다.


6.2.3. 또 다른 가설들[편집]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19일 사망자는 김경철, 김안부 등 2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 북미한국인권문제연합회장이었던 페기 빌링스는 5월 19일에만 자신이 본 시신(corpse, dead body)의 수가 무려 200구에 달한다고 증언했다.

On May 19. Students were stripped, their hands tied behind their heads and were made to sit on the road where everyone could see them with their heads between their legs for two or three hours. The paratroopers began shouting (in Kyungsang province dialect) "Let's kill the Cholla province bastards and then get out of here." Many were killed and injured. I counted 200 corpses. Other witnesses and rumors put the number much higher but I myself counted 200 dead bodies.

5월 19일이었다. 학생들이 발가벗겨지고 두 손이 뒤통수에 결박된 채 길바닥 위에 꿇어앉아있었다. 그것도 시민들이 대놓고 볼 수 있는 곳에서 2~3시간 동안 두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은 채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전라도 놈들은 다 죽여버리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난 200구의 시신을 셌다. 다른 목격자들과 소문들은 더 많이 죽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센 시신은 200구였다.

페기 빌링스(Peggy Billings, 전 북미한국인권문제연합회장, 1929~2019) 증언[48]

[49]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한 날에 200명을 끌고 가 집단 사살을 행했거나, 작전 중 사살 형태가 아닌 연행 후 학살 형태 및 진압봉 및 신체부위 직접 구타를 통한 타살과 총검을 통해 찌르는 척살, 화염방사기나 유탄발사기 사용 등 온갖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이 날에 자행되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다.

6.2.3.1. 광주 국군통합병원 시신 소각 의혹[편집]

5.18 때 사망자들의 시신을 화장터나 국군광주통합병원 보일러실에서 소각해버렸다는 주장과 소문은 항쟁 당시부터 제기됐다.

'광주사태' 기간에 희생당한 시체의 일부가 화장됐다는 루머는 끈질기게 번지고 있었다. '시체 화장설'은 이미 5.27 재진압 작전 이전부터 꾸준히 나돌았다. 이번 사태 동안 번졌던 유언비어의 상당 부분이 나중에 사실로 밝혀짐에 따라 이 화장설도 사실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게 됐고 뒤에 사망자 수와 관계가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중략)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광주에는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는데 당시 유언비어 중에는 시체들이 군용 트럭에 실려 서울의 벽제화장터[50]

로 옮겨져 화장됐다느니 또는 많은 시체들이 암장됐다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김영택 『5월 18일, 광주』, 역사공간 2010., p556~557


현재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나 행방불명자가 발굴되거나 발견되지 않는 크나큰 의혹에 불을 지피는 내용이자 그냥 넘겨짚기는 어려운 부분으로, 군 병원의 보일러실을 개조해 시신을 소각 처리하는 화장터로 썼다는 의혹이다. 무엇보다도 군 환자나 부상당한 시위대 등을 치료했던 곳이 국군광주병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보일러실은 현재는 문제가 된 보일러실 내 구형 보일러 하나를 완전히 철거해버렸다. 그리고 원본 사진도 없기에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는 하나, 해당 보일러실 앞에 엉뚱하게도 '보안 목표' 용지가 붙어있었으며 '문서 소각' 등의 위장 업무가 붙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수상하다는 것이다. 전혀 습격당할 위험이나 이유조차도 없는 데다 군인들이 삼엄하게 무장 경비를 서던 엄연한 군사 시설인지라 시위대와 시민군들이 습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판국이었다는 것이다.[51]

무엇보다 국군광주병원의 보일러실을 개조해 시신을 소각했다는 것에 대한 추측 중 미심쩍은 부분은 봄은 추운 것은 맞다지만 5월은 그렇게까진 춥지 않은데다가 심지어 5월은 여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인지라 되려 덥기만 해서 그렇게 보일러를 겨울 수준으로 틀어야만 할 이유들도 없다. 무엇보다 보일러실을 굳이 5월항쟁이 있었던 기간 내내 실시간으로 풀가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합리적으로 어느 정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 구 국군광주병원 부근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유독 5월항쟁 기간에만 집안에 국군광주병원 굴뚝에서 나온 재가 집에 하도 내려앉으니 도저히 장독대를 열 수 없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거기다가 당시 시민군이었던 양기남 씨에 따르면 일부 피해자들의 유골은 무언가로 태운 듯 시꺼멓게 그을려있었다고 한다. (출처: 강연주 「'광수' 지목된 두 시민군의 증언 "통합병원 시신 정말 이상했다"」, 『오마이뉴스』 2019. 5. 15.)

이 부분은 전 미군 정보요원인 김용장 씨와 505보안부대(안보지원부대) 출신 예비역 상사 허장환 씨가 시신을 소각하기 위해 10일간 풀가동한 것이 아닌가 의혹을 제기했다. 그 의심의 단서들은, 지금은 철거된 보일러실 내부에 화덕이 시멘트로 막혀있고 영안실에서나 사용되는 시신 안치 시설이 존재한다는 것, 무엇보다 굴뚝 외부에 별도 청소 공간이 존재하며 화덕 근처에 전기식 점화 장치를 둔 흔적이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511특명반 창설일의 근일에 진압 현장을 지휘한 군인들도 아닌 국군광주병원장이 표창보다 훨씬 높은 훈장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는 관련도 거의 없는 사람이 받는 것 아니냐는 의혹뿐 아니라 더 의심해보면 전두환 측에서 시신 소각을 통한 인적 피해 증거 인멸의 정황을 간접적으로 인증한 셈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할 수 있다.

2018년에는 5.18 사망자 시신들을 전주 승화원에서 소각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당시 보안사 차량 운전사였다 한다. (출처: 고승우 「5.18 당시 행불자 전주 화장장에서 비밀리에 소각됐다?」, 『오마이뉴스』 2018. 1. 3.)


6.2.3.2. 시신 모처 수송 후 해양 투기 의혹[편집]

허장환이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제때 처리하거나 소각하지 못한 시신이 많아 부패가 심각했고 결국 시취가 흐르지 않게 비닐로 싼 후에 수송기나 수송헬기들을 동원하기까지에 이르러 결국 모두 다 해양에 투기하여 처리했다고 한다.

5.18 사망자 시신들을 바다에 수장했다는 소문은 항쟁 당시부터 돌았다.

21일 아침 우리는 도청을 제외한 광주 일원을 장악했다. 상원 형을 찾아온 동생 윤태원과 함께 YMCA 앞까지 갔다. 군인들이 도청 앞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중앙국민학교 후문에 세워진 도로 공사 덤프트럭에 올라가 키 박스를 열어 차를 운전했다. 조수석에 윤태원이 앉았다. 트럭을 몰고 백운동, 지원동, 산수동, 중흥동 등 가는 곳마다 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음료수, 주먹밥, 심지어는 누룽지까지 차 위로 올려다주었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 서점 앞에서 상원 형을 만났다. 형은 "도청 옥상에서 헬기가 2분 간격으로 떴다 앉았다 하는데 아마도 어제 죽은 사람들을 서해 바다로 빠뜨리는 모양이니 사람들을 오후 1시에 도청으로 모이도록 하자"고 했다.

김상집(당시 24, 전남방직 잡역부) 증언[52]


2019년 김상집은 『녹두서점의 오월』에서 당시 시신 수장 소문에 대해 1990년 위 증언보다 더 구체적인 증언을 다시 남겼다.

당시 외신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는 1976년부터 민주 인사들의 실종이 5만여 명에 다다랐는데 고문하다 죽으면 시신에 돌을 매달아 대서양에 빠뜨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윤상원은 어제 그제 민주화를 외치다 공수들의 총칼에 죽은 시민들을 전두환 군부가 아르헨티나처럼 서해에 빠뜨렸다는 소문이 무성하다고 했다. 의로운 무명 용사들을 아르헨티나처럼 실종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우리의 계획은 모든 차량에 시민이 탑승하여 그대로 도청 안으로 밀고 들어가 공수들을 무장해제하고 무명 용사들의 시신을 인수하여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김상집(당시 24, 전남방직 잡역부) 증언[53]


6.3. 전망[편집]


5.18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가 어렵겠지만 일단 최소한으로는, 암매장과 가매장 및 소각처리되었던 신분미상의 희생자 정보 관련 문제나 행방불명자 문제의 해결이 있을 때에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월이 야속하게도 그를 증언해줄 수 있는 비밀들과 키를 쥐고 있는 신군부 인사들 중 발포 명령의 장본인격으로 판단되는 전두환이 사망했고, 그 정황을 직간접적으로 알 만한 이희성, 황영시 등도 점점 사망하면서 남은 핵심 인사는 정호용, 최세창, 장세동, 최웅, 신우식 정도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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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사망자는 항쟁 당시(1980.05.18 ~ 1980.05.27) 민간인 사망자만 다룬다. 상이 후 사망자나 후유증으로 인해 자살한 사람은 항쟁 이후 사망자로 여겨 이 문서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인용할 가치가 있는 부분은 각주를 통해 적어놓았다. 군인,경찰 사망자 숫자 또한 그런 방식을 택했다.[2]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만 따른다.[3]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3[4] 노영기 『그들의 5.18』, 푸른역사 2020., p153~154[5]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24~25[6]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3~174에서 재인용.[7]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24[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9]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10]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61~162[11]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62[12] 노성만 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전남대병원 2017., p53~54[13]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14] 이해찬, 유시민 외 『기억하는 자의 광주』에서 재인용[15]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174[16] 위의 영상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범대로라면 발포명령의 책임은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신군부는 군대를 장악한 상태였기에 그는 사실상 바지사장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이희성도 책임이 없다 할 수는 없으나) 발포명령의 핵심적인 책임 문책은 신군부 주요 인사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신군부 인사 중 발포명령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과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있다.[17] 실제로는 20일 밤 11시 20분에서 21일 오전 사이일 가능성이 크다.[18] http://www.sisa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51[19] 현재 수많은 5.18 자료에는 광주역 집단발포가 20일 밤 11시경에 일어났다고 모호하게 기록돼 있거나 밤 11시 30분에 발생했다는 기록과 증언들이 있다. 그러나 광주역에서 발포했던 3공수 병력에 발포명령이 하달된 시각이 밤 11시 15분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3공수가 발포한 시각은 밤 11시 30분임이 사실에 가깝다. # #[20]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81~82쪽[21] 21일의 집단발포는 당시의 정황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했을 때 우발적 성격이 아닌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이 강했던 반면, 20일의 집단발포는 계엄군에 대한 시민들의 공격이 치열했고 사상자도 비교적 적었기에 우발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 20일 광주역 집단발포가 발포명령에 따른 계획적, 체계적 발포였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시민들의 공격이 심하지도 않은 상황 속에서, 일제히 집단사격하고 저격수와 기관총까지 동원하여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의 경우에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22] 당시 도청 앞에 있던 계엄군 부대는 11공수여단 61,62,63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였다.[23] 전남매일신문 기자 나경택의 증언, <한국기자협회보> 2010년 5월 12일자[24] 이 발포로 버스를 운전하던 1명이 사망했는데 이 때의 발포는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25] 이 회의에는 국방장관 주영복,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육사 교장 차규헌,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참석했다.[26] <제5공화국 전사> 4권, 보안사령부, 1982, 1653~1654쪽, 이 기록에는 '전 각하:초병에 의한 난동 시 군인복무 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적혀 있다.[27] 그런데 2017년 현재까지 행방불명자 수는 70명인데 10번 묘역의 묘지는 66개뿐이다.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4명의 경우에는 안장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10번 묘역[28] 이웃이나 친구가 보증을 서는 것을 말한다. 5.18 행방불명자를 다룬 책인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1권)>에 따르면 일부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인우보증을 얻지 못해 애를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29]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458쪽[30] 위의 DNA 감식 결과와 아래의 암매장 시신 발굴 기록을 점검해보면 실제로 5.18 이후에 암매장되었다가 발굴된 시신 중에서 행방불명자가 존재했다.[31] 참고로 광주상고에 다니다 죽은 학생은 이성귀, 문재학, 안종필인데 문재학과 안종필은 27일 전남도청에서 죽었다.[32] 신동남 씨로 확인되었다.[33] 김재영 군으로 확인되었다.[34] 양창근 군으로 확인되었으며 기존에 양창근 군 묘역에 묻혔던 무명열사는 김광복 군으로 확인되었다.[35]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455~456쪽/다만 수습일자는 작성자의 기억에 의존했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조성갑은 복지계 직원이 아니었는데도 자발적으로 시신 수습에 나섰으며 그에 대한 일지를 남겼다. 그의 검찰진술조서[36]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고영태의 아버지가 맞다. 참고로 원문에는 '고귀석'으로 오타가 났다.[37] 총 14구가 가매장되었으나 3구는 가족이 인수했거나 행방을 알 수 없음[38] 이 문서 3-2에 수록된 DNA 검사 관련 표와 함께 보면 채수길 씨와 양민석 씨는 그 동안 행방불명자였다가 DNA 검사를 통해 신원 미상 시신으로 망월동에 묻혀져 있음이 드러났다.[39]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 계엄군의 총격으로 인해 사망한 초등학생이다. 그는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진 5.18 사망자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리다.[40] <그 해 오월 나는 살고싶었다(1권)>, 5.18 기념재단, 한얼미디어, 2006, 430~436쪽 #[41] 2009년에 발굴조사가 있은지 8년만이다.[42] 여기서 사망자는 항쟁 당시(1980.05.18 ~ 1980.05.27) 민간인 사망자만 다룬다. 상이 후 사망자나 후유증으로 인해 자살한 사람은 항쟁 이후 사망자로 여겨 이 문서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인용할 가치가 있는 부분은 각주를 통해 적어놓았다. 군인,경찰 사망자 숫자 또한 그런 방식을 택했다.[43]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만 따른다.[44] 사망자 숫자를 최초로 발표한 지 나흘만에 4명이 늘었다고 발표했다.[45] 당초 발표한 숫자는 606명으로 항쟁 당시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 376명이었다.[46] 이 글의 작성자는 김현장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수배자가 되었는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 영향을 끼친 바 있다.[47] <5.18 광주사태>, 아놀드 피터슨, 풀빛, 1995, 171쪽[48] 광주매일신문 『정사 5·18』, 사회평론 1995., p200. 책에는 한국어 번역문도 나와있으나 오역이 많아 정확하게 번역해놓음. 영어 원문은 책에 나온 대로와 동일함.[49] 한국 이름은 '변영숙'으로, 1953년 한국전쟁 때 선교사로 한국에 와 사회 복지와 여성,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1975~1990년까지 15년간 북미한국인권연합을 이끌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 상황을 미국, 캐나다인들에게 꾸준히 알렸다. 5.18이 진압되고 이틀 후인 1980년 5월 29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에서 광주 희생자 추모 예배를 드려서 미국 사회에 처음으로 5.18을 알린 사람이다.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는 활동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 여성, 인권, 통일 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2019년 7월 19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50] 현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51] 무엇보다 문서 소각에 필요한 화력은 그리 크게 필요하지 않다. 야전용 고체 연료나 기름, 화염방사기나 라이터 불 등 여러 방법으로 문서 소각은 간단한 데다 그렇게까지 고유 공간까지 만들어둘 정도로 심하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즉, 그렇게 공간을 별도로 둘 정도로 심각한 은밀성이 필요한 작업은 아닌 셈. 어차피 일반인 입장에선 종이가 타든 말든 심각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대놓고 태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엇이겠는가?[52]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 1990., p890[53] 김상윤 외 『녹두서점의 오월』, 한겨레출판 2019., p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