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운동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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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운동 당시 서구 제국주의와 군벌을 성토하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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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五卅運動
영어: May 30 movement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영향
5. 참고문헌



1. 개요


1925년 5월 30일 상하이에서 반일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영국 경찰들이 인도 경관들에게 시켜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 5.4 운동 이래 중국에서 발생한 최대의 민중 운동이었으며, 그때까지 소규모 조직에 불과했던 중국 공산당은 이 운동을 계기로 이 중국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2. 배경


1920년대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특히 1924년에 발발한 2차 직봉전쟁은 중국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쟁으로 중국의 여러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농촌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의 승리자 장쭤린돤치루이의 직계 군벌을 무찌르고 베이징을 장악했지만 베이징 외곽, 특히 양쯔강 이남 일대엔 권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으며 민중도 마적출신의 만주 군벌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편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맺고 광둥성 남부 일대에서 정부를 세우고 북벌의 시기를 노렸다.

그러던 1925년 3월 12일, 중국에 공화정부를 세우기 위해 평생동안 투쟁했던 쑨원이 사망했다. 이에 중국 전역에서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민당은 이 틈을 타 중국 주요 도시에 친일파 및 서구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선전활동을 개시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도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4년 5월 공산당 상하이 지부 보고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가담한 당원은 56명이지만 실제 활동하는 이는 47명이며 신당원의 증가율은 매우 저조했다. 이에 공산당은 당원 가입 요건을 완화시켜서 더많은 이들을 끌어들이려 애써 1925년 상반기엔 22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공산당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그나마 공산당에 가입한 이들 중 상당수는 이름만 공산당에 올렸을 뿐 실제로는 당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국민당의 반제국주의 선전이 가장 잘 먹혀들어간 곳은 바로 상하이였다. 상하이의 중국인들은 다른 도시들에 비해 강력한 노조가 조직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 지식인들이 많았다. 또한 많은 중국 가정은 상하이시의회가 제안한 아동고용법안에 불만을 품었다. 상하이시의회는 12세 미만의 아동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서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했지만, 많은 노동계급 가정은 아동들이 벌어오는 임금에 의존했기에 상하이시의회의 이같은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중국 지식인들은 상하이 당국의 "모든 출판물에 본명과 출판사의 주소를 기입하라"는 검열법 도입에 불쾌감을 느꼈다. 불만을 품은 이들은 1925년 상반기에 시위를 벌였고, 상하이 당국은 강경진압으로 응수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3. 경과


1925년 2월 2일, 일본인 감독관이 여성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50명의 남성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한 아동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에 공장노동자들은 "우리는 암소와 말 취급을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걸며 파업을 단행했고, 4월 19일 칭다오의 원사 공장에 근무하던 4천명 이상의 근로자가 노동조합의 권리와 임금 인상을 얻어내기 위해 파업위원회를 설치하고 총파업을 실시했다. 이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대거 호응해 5월 무렵엔 상하이에서만 22개의 공장들이 파업을 단행했다.

일본인 고용주들은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직장폐쇄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에 5월 14일 노동자들이 공장 대표와 협상하기 위해 5명의 대표를 선출해 협상을 벌이려 했지만 당국은 5명 전원을 체포했다. 다음날, 공산당원 고정홍(顾正红)이 이끄는 무리가 공장 진입을 시도했고 시위 진압대는 그들을 향해 발포했다 . 이로 인해 고정홍은 사망했고 7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상하이 노동자들을 격양케 했으며 학생 및 지식인들도 여기에 호응했다. 칭다오 대학 학생연합 총책임자 뤄룽환(羅榮桓)은 노동자 지원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고, 학생들은 파업을 지원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기부금을 내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청도 시민"의 편집장 호신지(胡信之)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무장 투쟁을 벌일 것을 호소하는 사설을 실었다. 5월 24일, 대학생들은 고정홍의 장례식을 거행하면서 일본의 만행에 저항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에 당국은 그들을 체포하고 5월 30일에 재판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다양한 학생 단체가 재판 전날 소집되어 상하이 국제 거주지와 재판소 밖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5월 30일, 수천명의 노동자, 학생, 그리고 일반인들이 상하이의 주요 도로를 점거하고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상하이 당국은 3천명의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와 대치하게 했다. 시위대는 경찰 앞에서 "상하이는 중국의 상하이다!", "제국주의 타도!"를 외쳤다. 그러다가 오후 3시 55분,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 발포로 13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넘는 이들이 부상당했으며 15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이후 상하이 산업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업을 지원한 대학들을 폐쇄했다.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서양에 대한 오랜 증오심에 불을 붙였다. 5월 31일, 마로상계연합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처방안을 논의한 끝에 상점 운영을 중단하고 당국에 맞서기로 결의했다. 또한 상해학생연합회는 각교대표회의를 소집해 6월 1일부터 동맹 휴학 및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6월 1일부터 상하이의 상인과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단행했으며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도 6월 1일에 상하이 노동조합 총연맹을 설립하고 리리싼을 회장으로 선임하며 호응했다. 이에 영국, 일본,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및 여러 열강의 전함들이 상하이에 진주해 시위를 수습하려 했지만 한번 폭발하기 시작한 운동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중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중국인 경찰들도 당국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에 가담했다. 그리고 6월 4일, 상하이 노동조합, 전국 학생 연맹, 상해 학생 연맹은 상하이 노동조합 총연맹을 창립해 반제국주의 연합 전선을 형성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을 장려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6월 4일 취추바이가 편집한 <열혈일보(热血日报)>를 창설했다. 열혈일보는 당의 지도운동 관련 지침과 정책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제국주의 범죄를 폭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6월 5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제국주의에 의한 잔인한 학살을 폭로한다."며 "상하이와 중국 전역의 투쟁 운동의 목표는 처벌, 보상, 사과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모든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고 제국주의의 모든 특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5.30운동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각지에서 약 600~700개의 운동 조직이 결성되었고 17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베이징, 광저우, 난징, 충칭, 천진, 칭다오, 한커우 등 수십개의 대도시와 주요 광산 지역에서 수만 명이 시위 및 파업을 벌였다. 또한 홍콩에서도 반영 시위가 발생해 당국과 충돌했다. 1925년 6월 11일, 한커우에서 시위에 참가한 이들이 영국 해병대와 충돌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30명 넘는 이들이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중국인들은 "제국주의 타도", "불평등한 조약 폐지", "중국에서의 외국군 철수", "죽은 동포에 대한 복수"를 외쳤다.

6월 5일, 상공회의소 회장 위챠칭(虞洽卿)은 더이상의 혼란은 상하이 상업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거라며 대표단을 파견해 협상을 벌이고 있으니 정상대로 영업하자고 제의했다. 상업연합회도 이를 받아들여 각 상점에 개시를 청했다. 이에 일부에서는 위챠칭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매수되었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6월 8일 위챠칭의 집에서 폭탄이 폭발했다. 그러나 위챠칭은 이러한 위협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며, 자신은 혼란이 더이상 확대되지 않고 교섭이 빨리 이뤄지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상점 페쇄는 손실만 클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6월 19일, 상하이 상공회의소는 6월 26일에 시장을 개방한다고 발표했고 영국과 일본 등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할 자유를 인정하고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의했다. 그후 1925년 8월 10일, 상하이 노동조합 총연맹은 9가지 조건을 제시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1. 상하이 정부는 공청회의 결정을 무조건 수용한다.

2. 양허권 내에서 출판, 언론, 집회 및 조합의 자유를 인정한다.

3. 양허 중인 중국인은 외부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4. 근로자는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조직하고 노동조합이 근로자를 대표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권리가 있음을 인식한다.

5. 모든 근로자는 고용되어야 하며 근로자는 이 파업을 이유로 해고되어서는 안된다.

6. 공장주는 파업 기간 동안 급여의 50%를 지불한다.

7. 임금을 15% 인상한다.

8. 근로자의 권리, 특히 여성 근로자와 아동 노동자의 근로 조건을 개선한다.

9.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학생 및 근로자에게 보상한다.


상하이 당국이 이를 인정하면서, 상하이 상업연합과 노동연합은 파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5.30 운동으로 촉발된 시위는 중국 각지와 홍콩에서 이어졌지만 9월 즈음에 사그라들었다.

4. 영향


5.30 운동은 그때까지 세력이 한미했던 중국 공산당의 역량을 크게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공산당이 5.30 운동을 영도했다는 현 중국 공산당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세력이 극히 한미해 5.30운동 같은 대규모 민중 운동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고, 5.30운동의 주류 세력은 공산당과 별개의 노동조합을 결성한 노동자, 학생,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에 공산당원들이 대거 가담한 것은 사실이며, 그중 리리싼, 캉성 등 몇몇은 두각을 드러냈다.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은 5.30운동 과정에서 공산당의 이같은 활동을 주목하고 가입을 요청했다. 1925년 1월 중공당원은 수백명에 그쳤으나 7월엔 2500명으로 늘어났고 9개월 후에는 다시 3470명으로 증가했다.

반면 중국 국민당의 5.30운동에 대한 참여는 매우 간접적이며 취약했다. 당시 국민당 고위층은 쑨원의 서거 이후 당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어서 5.30운동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그나마 5.30운동을 지원한 국민당 지방당무기구는 대부분 중국 공산당 당원의 통제하에 있었다. 청년단 상해지부의 보고에 따르면, 5.30 시기 학생운동을 지휘한 상하이 학생 연합회는 명의상으로는 국민당의 지휘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공산당의 많은 활동이 국민당의 간판을 걸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5.30운동은 국민당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전국적으로 크게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