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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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 / 시스플라티나 전쟁
Guerra argentino-brasileña | Guerra da Cisplatina
파일:attachment/1292668610_santiago.jpg
준칼(Juncal) 해전
날짜
1825년 12월 10일 ~ 1828년 8월 27일
종전으로부터 71448일.
장소
우루과이브라질 남부 일대
교전국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1]
파일:33인의동방인기.png 우루과이 독립군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1853).svg 브라질 제국
지휘관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베르난디노 리바다비아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카를로스 마리아 데알베아르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기졔르모 브라운
파일:33인의동방인기.png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
파일:33인의동방인기.png 프룩투오소 리베라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1853).svg 페드루 1세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1853).svg 로드리구 핀투 구에데스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1853).svg 펠리스벨투 칼데이라 브란트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1822-1853).svg 카를로스 페르데리쿠 레코르
결과
몬테비데오 조약
영향
우루과이의 독립
병력
총합 6,000명
15,000명
피해규모
총합 약 2,200명 사망
약 8,000명 사망

1. 개요
2. 배경
3. 내용
4. 이후


스페인어: Guerra argentino-brasileña[2]
포르투갈어: Guerra da Cisplatina


1. 개요[편집]


1825년부터 1828년까지 브라질령 시스플라티나의 지배권을 두고 우루과이 독립군,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오늘날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21세기 현재까지 내려져오는 남아메리카의 두 강국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두 나라의 앙숙 관계를 시작한 전쟁이기도 하다.


2. 배경[편집]


전쟁의 발단은 여느 이웃나라의 앙숙 관계처럼 영토나 국경 문제로 인한 영토분쟁이 아닌 바로 두 나라의 국경 사이에 끼어 있었던 우루과이의 독립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본래 우루과이는 이웃국가인 아르헨티나와 함께 스페인의 식민지인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중남미 일대의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들이 현지 세력의 독립운동으로 붕괴되는 틈을 노려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역시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월 혁명으로 스페인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최동단주였던 반다오리엔탈(Banda Oriental) 역시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반다오리엔탈의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호세 아르티가스 역시 5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1811년 반다오리엔탈에서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독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는 연합주를 구성하던 각 주들끼리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데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를 지향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정부에 반발하여 1814년 아르티가스의 주도로 반다오리엔탈, 코리엔테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등 연합주의 동부 지역이 연방동맹(Liga Federal)을 결성하여 중앙정부에 맞섰다. 연방동맹의 등장은 남쪽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연방동맹 북쪽에 위치한 (아직까지 브라질을 가지고 있던)포르투갈의 불안감을 샀고 이에 포르투갈은 브라질로 공화주의가 전파되는 것을 차단하고 히우그란지두술 등 브라질 남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1816년 전격적으로 반다오리엔탈을 침공하였다. 4년 간의 전쟁 끝에 독립군 잔당을 완전히 몰아낸 포르투갈은 1820년 정식으로 반다오리엔탈을 자국의 일부로 병합하고 그 자리에 시스플라티나(Cisplatina) 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1822년 포르투갈의 왕세자 동 페드루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을 세우자 시스플라티나 역시 새로 독립한 브라질 제국의 1개 주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아오며 언어, 역사, 문화 등 모든 것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는 판이하게 달랐는지라 정작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브라질의 지배를 결사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브라질의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군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브라질군을 공격하며 시스플라티나 주는 브라질군과 독립군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독립군 세력들은 군사력이나 인구 수에서 브라질에게 열세였고 이에 독립군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였다. 처음에는 연합주는 반다오리엔탈이 포르투갈군에게 침공당한 것을 보고 "기껏 뛰쳐나가더니 꼴좋다"는 반응을 보이며 관망하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브라질 해군이 몬테비데오 항을 통해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코앞의 라플라타 강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을 보고 강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는 라플라타 강을 사이에 둔 바로 지척으로 두 도시 사이에 실질적인 교류도 수운을 통해 손쉽게 가능했다. 또 반다오리엔탈이 브라질에게 갈려나간 것을 보고 겁을 먹은 연방동맹의 다른 주들이 연합주에 재가입하자 연합주는 마지막 남은 반다오리엔탈을 되찾고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 강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군을 지원한 것이었다.


3. 내용[편집]


결국 브라질군에 의해 쫓겨나 연합주로 망명했던 독립군의 지도자였던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를 중심으로 한 33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연합주의 지원으로 1825년 다시 시스플라티나로 들어와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연합주에 가입하자 이에 분노한 브라질이 연합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연합주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가졌던 브라질 해군이 라플라타 강을 봉쇄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무역을 차단하자 연합주 해군은 라플라타 강을 봉쇄한 브라질 해군을 상대로 돌파를 시도하고 라플라타 강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파타고니아 일대에 주둔시켜놓은 사략선을 대거 대서양으로 보내 브라질 상선을 대상으로 사략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연합주 해군은 준칼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파타고니아로 침공해온 브라질 함대를 물리치는 등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1828년 몬테산티아고 해전에서 브라질 해군이 쪽수를 앞세워 연합주 해군을 박살내자 결국 제해권은 브라질이 쥐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연합주군이 라플라타 강을 건너 시스플라티나를 점령하고 브라질 영내로 진격하자 황제 페드루 1세가 연합주의 공세에 반격하기 위해 브라질 전역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여 직접 친정에 나섰는데 전쟁에 끌려가기 싫었던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징병 거부 폭동을 일으키면서 페드루 1세는 어쩔 수 없이 친정 계획도 포기하고 얼마 없는 군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진격하도록 명령했으나 1827년 이투자잉고 전투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좌절되었다. 하지만 연합주 역시 이 전투의 여파로 공세를 이어갈 여력을 상실하고 브라질 영내에서 철수했다.

결국 양측 모두 서로에게 일격은 주지못한 채 전황은 지지부진해졌고 브라질 국내에서는 돈만 잔뜩 들고 인기도 없는 전쟁을 당장 중단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여론이 커져갔다. 연합주 역시 브라질에 공세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이 브라질 해군한테 봉쇄당하고 재정수입이 대폭 줄어들면서 재정부담이 커졌다. 결국 라플라타 강이 봉쇄당하면서 연합주와의 무역로가 막히게 된 영국이 양측에 빨리 전쟁을 끝내라고 압박하면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1828년 8월 27일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 하에 양국은 시스플라티나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4일 몬테비데오에서 우루과이 동방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반다오리엔탈 일대를 둘러싼 3국의 갈등은 마침내 끝나게 되었다.


4. 이후[편집]


사실 이 전쟁은 아무도 우루과이 자체의 독립을 노리고 전쟁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시스플라티나를 지키려던 브라질이나 반다오리엔탈을 되찾으려던 아르헨티나, 심지어 전쟁의 시발점이 된 33인의 혁명가들 또한 원래 의도는 브라질에서 독립하여 아르헨티나의 일부로 재편입을 시도한 것이었을 뿐인데 어쩌다보니 협상의 결과가 그렇게 나와서(브라질이 완패한 게 아니다보니 내가 못 먹을 거, 적성국인 아르헨티나 견제 삼아 독립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아르헨티나도 전비가 부족해 이를 용인했다.) 독립을 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루과이가 독립을 하게 되었으니 전쟁의 시발점이 된 이 33인의 혁명가들은 33인의 동방인(Treinta y Tres Orientales)으로 우루과이에서 독립영웅으로 대접받는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전쟁에서 사실상 패전하면서 시스플라티나를 잃어버린 페드루 1세에 대해 국민들의 반감은 커져갔고 결국 1831년 페드루 1세는 퇴위, 다섯살배기 아들 페드루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고향 포르투갈로 떠나야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 휘말린 세 나라는 나중에 어떤 한 나라에 맞서 동맹을 결성하게 되는데 3국 동맹 전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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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26년 아르헨티나로 국명을 바꾸었다.[2] 전쟁의 당사국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서는 브라질 전쟁(Guerra del Brasil)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