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사단 장교 무장탈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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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과
3. 원인
4. 후폭풍
5. 사건 처리
6. 그 후


1. 개요[편집]


1994년 9월 27일 울산 소재 대한민국 육군 제53보병사단 제127보병연대 해안소초에서 조한섭 소위(학군 32기), 김특중 소위(육사 50기), 황정희 하사가 무장 탈영한 사건.

두산백과에는 '장교 길들이기 하극상 사건'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경과[편집]


조 소위와 황 하사는 9월 27일 오전 2시 40분 경 탈영을 목적으로 부대 통신선을 끊은 후 자고 있던 소대원들을 전부 깨워 연병장에 부대원들을 모아 놓고 허공에 M16 소총으로 실탄을 몇 발 쏘며 "따라오는 새끼들은 죽여버린다!"고 협박하고 소총과 수류탄, 실탄 등을 휴대한 채 황 하사의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다. #

김 소위는 조 소위와 같이 탈영하기로 모의했다가 망설인 탓에 그날 부대 방위병 윤종천 이등병을 끌고 나와 을 먹고 망설이다가 결국 일행과 합류해 탈영 인원은 3명이 되었다.

조 소위와 김 소위는 수색작전에 들어가면서 주민들에게 탄로나 군경수색대와 대치하자 9시간만에 자수했고 황 하사는 4일 동안 달아나다가 검거되었다.


3. 원인[편집]


하극상 때문으로 밝혀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때까지 만연했던 쌍팔년도 군대의 문제점이 문민정부 시대에 터진 것.

조 소위와 김 소위가 자수할 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개인 문제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곧 진상이 밝혀졌다. 부대 내 모든 병들이 합세한 이른바 소대장 길들이기가 있었고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김 소위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1] 장교가 이런 꼴을 당하는데 황 하사가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2] 상등병이 "여기서 생활하려면 내 말 잘 들어야 한다. 상병 이상에게는 경어를 사용하라."고 하는 등 문자 그대로 후임 취급하려고 했다.

구체적인 하극상은 다음과 같다.

  • 소대장에게 경례를 하지 않거나 반말을 함. 경례나 존대를 하는 /이병들을 소대장이 보는 앞에서 구타함.
  • 일부러 소대장 방에 들어가서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며 소대장이 방에 들어왔어도 무시함.
  • 소대장이 말을 하면 소대장을 야유하거나 비웃음.
  • 상급부대 검열 시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소대장의 전투화를 감춤.

그리고 소대장 길들이기는 그 부대에만 있던 것이 아니고 꽤 많은 부대에서 거리낌없이 저질러진 부조리였다. 오죽하면 하극상을 저지른 상병장들 쪽 변호 전략이 '고참들도 그러던 부대에서 살아 군대가 원래 그런 곳인 줄 알았을 뿐이다'일 정도였고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장교들 사이에서는 이 세 간부들이 영웅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간부들은 병사들의 세계에 간섭하는 거 아니다'라며 이러한 병사들끼리의 부조리에 장교가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는 지금 보면 정신나간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옛날 군대에서 부조리와 가혹행위가 방치되었던 것에는 이러한 원인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부대의 소대장들은 이런 것을 두고 보지 못했고[3] 병사간 부조리를 막으려고 했다. 해당 소대에서 길들이기 문제가 심하게 터져나온 것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예를 들면 많은 부대에 현역병들이 방위병에게 선임 대접을 못 하게 하고 경례라도 하면 현역 선임병이 때리는 부조리가 널리 퍼져 있었다. 해당 소대에서도 그랬는데 일병이 방위병 상병에게 반말하는 것을 보고 소대장이 일병을 때리는 사건도 있었고 탈영 직전에는 군기를 잡겠답시고 총으로 협박하거나 진짜로 위협사격을 하는 등 갈 데까지 간 상태였다. 소대장들의 대응도 부적절한 것은 사실이였고 잡힌 후 탈영죄에 폭행죄, 협박죄까지 붙어 처벌되긴 했으나 여론은 '오죽 병들이 군기를 밥말아먹었으면 소대장이 저렇게까지 하냐?'에 가까웠다.

병사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짬밥을 서열로 매기는 못된 버릇을 갖고 있어서였다. 당시 병장 정도면 군 생활을 2년 가까이 한 인원인 반면 소위는 이제 갓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을 마친 인원인지라 병장의 눈에는 늦게 입대한 주제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계급을 무시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실제로도 군대의 구타 가혹행위하극상, 병영부조리 등 온갖 못된 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인 것이다. 왜냐하면 병장이 소위보다 우월한 게 짬밖에 없기 때문이다.[4]

탈영의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은 8월 23일 일어났는데 다른 소대의 이 모 소위가 이병을 때리는 신원식 병장에게 "왜 신병을 구타하냐, 차라리 날 때려라!"고 하자 "때리라면 못 때릴 줄 아느냐?"며 이 소위의 따귀를 때렸고 격분한 이 소위가 신 병장의 멱살을 잡자 주변에 있던 병 3명이 달려들어 소대장을 집단으로 구타했다. # 이 소위는 이를 중대장에게 보고했지만 신 병장에게 군기훈련을 주는 데 그쳤으며 미적지근한 대처에 소대장들이 집단으로 항의하자 마지못해 영창을 보내는 것으로 덮으려고 하였다.

역시 하극상에 시달리던 조 소위는 이 소위와 김 소위를 만나 '우리가 희생해서라도 군 태도를 바로잡자'며 무장탈영 범행을 제의했지만 막상 두들겨 맞은 이 소위는 별 반응이 없었고 김 소위가 가담했는데[5] 이후 이동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승용차를 산 황 하사를 끌어들였고 황 하사 역시 병(兵)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지라 역시 쉽게 가담했다.

지휘계통 내부에서 해결하려 했지만 안 되던 게 사건이 터지고 나서 고쳐졌으니 무장탈영한 목적은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4. 후폭풍[편집]


하극상으로 인한 장교의 무장 탈영 사건이 사상 초유의 일이라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되었다.[6]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지시했고# 복무기강 해이를 들어 여야가 모두 입을 모아 국방부 장관과 육군 지도부를 가루가 되도록 까댔다.

조사를 거처 해당부대 병들과 중대장, 대대장까지 무려 29명이 구속되었고 조사 과정에서 하극상에 거들어준 병 7명이 더 구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건 당시의 예비역 병장들은 대체로 "소대장 길들이기는 관행"이라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을 많이 보였다. 더 구체적으로 "병장이 소대장 안 가르치면 누가 쏘가리 교육시키냐?"는 반응이 대세였다. 1970~1980년대를 감안하자면 육군·해병대 복무기간이 36개월에 해군·공군은 39개월까지라서 부대의 터줏대감들이고 길어야 1년에 한 번, 많게는 수개월마다 발령이나 자주 교체되는 장교들이나 상병 달자마자 교육 몇 주 후에 임관하는 초임하사들은 짬이 많게는 1년 넘게 딸리며 엊그제까지 아들군번으로 눈도 못 마주치던 데다[7][8] 부대 사정에 어두워 우스갯소리로 병장의 육군 5대장성 드립이 통했고 이런 사정 때문에 하사들은 병장들에게 얻어맞고 소대장 길들이기는 너무나도 뿌리깊은 나쁜 버릇이었기 때문이다.

군생활 긴 장교나 선임 하사관들도 과거에 자신들도 당한 병장들에게 부대원 군기잡기나 자잘한 부대관리는 물론 교육훈련까지 일임하고 방관하며 하사 괴롭히기나 소대장 길들이기를 하극상을 모른 체 하는 군기빠진 관행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군대 내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도 "나 땐 안 그랬는데 문민정부에 들어서 육사 수준이 낮아져서 이랬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었다.

물론 위의 예비역들의 개소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대장 길들이기는 문민정부 이전부터 쭉 내려온 나쁜 습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차는 반응이다. 심지어 "지휘관들 때리는 거 금지 시키고 군기훈련이나 시키라고 하니 병한테 얻어맞았다."는 정신나간 발언도 나왔으며 일반인들 사이에서"장교도 탈영하니 병들은 오죽하겠나?"하는 반응도 나왔다. 이쯤 되면 계급 따위는 밥말아먹었고 그냥 장식이나 다름없는 오합지졸 군대가 따로 없다.

그러나 군대가 "당나라 군대 다 되었다."는 반응도 많았고 언론에서는 "X세대[9]가 군대에 적응을 못 하네?"라는 비판도 있었고 달라지는 사회상에 군대가 적응을 못 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반응도 나왔다.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가끔씩 커뮤니티에서 이 사건이 회자되면 '병장이 군대 돌아가는 것 더 잘 아는데 소위가 자기보다 짬 높은 사람이 하는 일 존중해주지는 못할 망정 FM대로 하려 하면 답답하다', '계급 가지고 자기가 윗사람인 줄 아는 짬찌끄러기 쏘가리는 괴롭혀야 제맛' 같은 반응을 하는 사람이 20세기에 군대 다녀온 세대도 아니고 심지어 20-30대 중에서도 상당한데 선임이 신병을 때리는 행위가 짬 높은 사람이 하니 존중해야 하는 일인가?

물론 부대원이 잘 굴리고 있던 부대를 사정도 잘 모르는 초급간부가 끼어들면서 답답하게 하는 경우도 많지만 간부가 부조리를 근절시켰더니 병들이 부조리 못 누려서 억울하다고 징징거리는 등 전적으로 병들이 잘못하면서 잘못 없는 간부 탓하는 사례도 많으며 이 사건은 명백히 후자였다.

한편 가장 큰 후폭풍이 있었을 군대에서는 1년 넘게 군 기강 해이를 바로잡겠다고 했는데..... 병영부조리로 인한 사건 사고가 또 발생했다.


5. 사건 처리[편집]


조 소위, 김 소위는 체포 당시와 동일한 증언을 했지만 군(軍) 검찰에서는 군의 구조적인 문제로 비춰지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껴서 피의자들의 범행 동기를 최대한 개인적인 일로 몰아가기 위해 다른 이유가 있지 않냐고 물타기를 시도했고 세 명의 피고인들은 모두 강하게 부인했다.

재판 과정에서 중대장은 물론 대대장, 사단 참모연대장까지 모두 하극상 사실을 알고도 미적지근한 대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극상 가해자를 영창 15일로 퉁친 것도 연대장의 지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심 제11군단 보통군사법원은 무장 탈영범 조 소위 김 소위가 다음날 순순히 투항한 것을 고려해 징역 7년, 4일 후에 체포된 황 하사는 징역 10년, 소대장을 때린 신 병장은 징역 10년, 소대장을 때린 신 병장을 도와준 병 둘은 각 징역 7년, 나머지 하극상에 거들어서 때린 자들에게도 3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하였다. 소대장의 보고를 무시한 중대장은 징역 3년 등을 선고받았다. 김 소위가 불러 같이 술을 먹은 윤 이병은 가장 불쌍한 케이스인데 무장 탈영한 김 소위의 수류탄을 지닌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구속된 대대장은 역시나 1심 과정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항소심에서는 국민적 관심이 시들해진 덕에 형량이 대폭 줄었다. 탈영한 3인방[10]은 징역 2년, 하극상인 상관폭행죄로 기소된 병들은 징역 2~4년, 보고를 모른 체 해서 직무유기로 기소된 대위 2명은 징역 1년, 소대장이 훔친 수류탄을 보관한 죄로 기소된 윤 이병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 사실 2심에서 형량이 대폭 줄어든 데는 일반적인 무장탈영과 다르게 단지 병들에 의한 하극상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간부가 일으킨 사건인 부분이 참작된 것으로 보인다.

김 소위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 다른 탈영 간부는 대법원 판결문에서 원심 공동피고인으로 칭하고 있어 상고를 포기한 것으로 보이고 그 외의 피고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법원은 법률심이므로 상고기각이나 상고포기로 2심대로 확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 그 후[편집]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이 하극상을 영창으로 퉁치려다 일어난 일이라 영창 징계 강화의 일환으로 이 사건 이후 영창 기간이 복무기간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대책안 기사 이는 징계로서의 영창이 폐지된 후 군기교육대로 옮겨갔다.

1995년 국방부와 육군에서 사건을 깊이 있게 조사하고 대책을 내놨는데 먼저 군대의 허리인 하사관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복무 수준과 지위를 향상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짬밥 찬 병장들을 억누르려면 하사관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후 하사관의 계급장은 장교의 계급장처럼 무궁화 잎 받침의 철제 계급장으로 바뀌었고 계급장 부착 위치가 옷 깃으로 바뀌었으며[11][12] 하사관은 부사관으로 개칭되었다. 즉 부사관은 병의 연장선이 아니라 완전한 간부로 바뀌었다. 단 21세기에도 대놓고 하극상을 저지르지 않을 뿐 민간부사관 출신 초임 부사관들이 선임병들에게 짬에 눌리는 건 현재진행형인 데다 원래 부사관은 병의 연장선, 즉 같은 사병인 게 맞기 때문에 엉뚱한 조치라는 평가도 있다. 애시당초 부사관은 병들 중 우수한 자원자들을 뽑아 계속 복무시키는 신분인데 처우가 열악해 충원률이 떨어진다고 뭣모르는 민간인에서 바로 하사를 뽑아 임관시키니 자기들보다 짬도 딸리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월급만 많이 받는다고 병들에게 무시받는 처지가 된 게 주 원인이기 때문이다. [13]

한편 대책이랍시고 "조 소위는 지방대 학군사관 출신이라서 리더십이 떨어진다."며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교들과 지방거점국립대들의 육군 학군단(ROTC) 정원을 대폭 늘리고[14] 기타 지방대들의 학군단을 폐쇄한다고 했다가 지방대 교수들과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애초부터 저런 계획 자체가 참 어이가 없었는데 이 사건의 당사자였던 김 소위는 ROTC가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저 논리를 그대로 따르자니 육사도 폐지해야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 하반기, 1993, 1994 군번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이며 이후 전후방을 막론하고 소대장 길들이기를 시도하는 경우 병장들이 대대적으로 개박살이 나면서 제대로 된 계급문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군대가 어쩌고 하는 기성세대 꼰대들을 입 다물게 만들 때 주로 언급되기도 한다. 결국 시간이 흘러 2020년대의 병사들이나 예비역은 소대장 길들이기가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단지 공포의 마음의 편지가 더 많이 언급될 뿐이다.

한편 김 소위는 수감 중이던 1995년 3월 중위로 진급한 후 징역 2년이 확정됨에 따라 보충역 편입 처분되었으며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 있는 육군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96년 7월 1일 출소 후 국민의 정부 시기인 1998년에 복권되어 예비역 중위로 편입되었다. 2017년 기준으로 사관학교 전문 학원에서 수학영역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실제로 육군사관학교 재학 때 주 전공이 수학이었다고 한다. 또 앞서 언급했듯 이 사건으로 인해 계급 문화가 정착되는 등 순기능이 분명 있었기 때문에 김특중 씨를 소개하는 글에서도 탈영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해당 블로그에서 자신을 언급한 글에 본인이 직접 댓글을 달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김특중 소위와 동기였던 육사 50기들은 거의 30년의 세월이 흐른 2022년 연말 소장으로 진급하여 각 사단의 사단장으로 재직중이다. (권혁동, 김화종, 윤봉희, 최병옥, 하헌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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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굳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임을 언급하냐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경우 말이 초임 장교지 4년간 생활반 생활에 준하는 생도 생활을 거쳤기 때문. 실제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다른 장교보다 2호봉이 높다.[2] 부사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부사관 자체가 상병 때 지원 혹은 선발하여 임관 후 소속부대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고 민간 부사관후보생 출신들과 함께 병장들에게 짬으로 밀려서 두들겨 맞는 일이 제법 많았다. 다만 병장 만기 혹은 부사관 출신으로 재입대한 소위/하사는 당연히 상병장들을 휘어잡았다. 쌍팔년도 군대는 무엇보다 짬이 절대적이었다. 2008년에 전문하사(현 임기제부사관)제도가 신설되었으나 초기에는 부작용이 많았다가 법률 개정을 거쳐서 대우가 그나마 나아졌다.[3] 육군사관학교에서 김 소위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교수는 김 소위가 생도 시절부터 다혈질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출처 - 국민의 군대 그들의 군대, 김남국 저.[4] 어느 과정이나 장교는 무조건 4년제 대학교 졸업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력상으로도 병장보다 우월하며 나이도 병장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원하면 무조건 입대하는 병장과는 달리 소위가 되기 위해서는 각종 장교 시험 과정 중 하나에 합격해야 하고 생도과정을 거쳐서 임관종합평가에 합격해야 한다.[5] 김 소위의 경우 자신의 사비를 털어 콜라 한 박스를 사 오니 그런 건강에 안 좋은 건 소대장이나 실컷 먹으라며 선임병들끼리 이온음료를 사 마셨다고 한다.[6] 그러나 육군의 자료공개 이후 1년간 30여 건의 장교탈영 사건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군이 사건 사고를 얼마나 폐쇄적으로 관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7] 같은 중대로 복귀는 안 하더라도 같은 대대로 보냈기 때문에 동기들끼리 몇 중대 몇 중대 있는 줄 다 알고 누가 몇 월 군번인지도 꿰는 판에 중대만 바뀐다고 달라질 게 없었다. 부조리가 심한 부대는 대대까지 선임, 후임을 따지기도 하고.[8] 정작 복무 기간이 육군과 해병대보다 훨씬 긴 해군과 공군에서는 소대장 길들이기와 같은 고참병들이 주도하는 초임장교나 신임 하사 길들이기가 없었다. 이는 육군보다 더 높은 난도의 운용을 요구하는 장비들을 직접 다루는 해군과 공군의 특성으로 인해 그것을 운용하는 장교나 부사관의 권위가 육군보다 더 높았던 데다(예를 들어 육군과 해병대의 견인포 조작 요원이나 전차 승무원 보직 전체를 병들에게만 맡겨도 전투수행 자체는 가능하지만 함정이나 전투기는 간부들이 없다면 교전은커녕 이동조차 불가능하다.) 하사 이상의 간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육군과 해병대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해군의 경우 말단 수병들도 근무지 변경이 가능한 데다 수병들의 숫자도 장교와 부사관보다 적었으며 주어진 임무의 성격도 육군처럼 독립된 하나의 전투원이 아니라 간부의 보조라는 역할이 강했다. 그리고 공군의 경우 조직 분위기 자체가 신사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다 도시 근처의 비행단에서 복무할 수 있다는 이점으로 인해 고학력/고스펙 자원들이 비조종병과의 장교로 입대하는 경우가 육해군보다 훨씬 많았다. 또 조종장교들은 국군에서도 최고의 인재들만 선발되는 데다 오랜 시간 동안 엘리트 교육을 받고 양성되는 만큼 징병되어 온 병들이 함부로 건들 자원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 조종장교들은 임관 직후부터 조종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다가 중위 달고 실무지로 오기 때문에 소위 시절에는 쏘대장 길들이기와 같은 하극상을 겪을 일 자체가 없다. 물론 해공군도 짬이 낮은 소위~물중위 정도의 짬 낮은 초임장교 및 신임 부사관과 고참병들 간의 알력은 있긴 했지만 앞서 서술한 이유 때문에 육군과 해병대의 소대장 길들이기와 같은 하극상 수준으로 막나가진 않았다.[9] 실제로 군사독재정권이 종식된 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사회의 탈권위적인 분위기로 각종 규제가 해소되고 대중문화에서도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구본승, 신은경이 인기를 끌었다. 암울한 시절보다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로 정신나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이 주책없이 크게 나오거나 여자거리 흡연을 하거나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다는지 남자가 치마패션(?)이거나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등 이전 세대들이 보기에는 낯선 풍경이 많이 연출되었다.[10] 장교 2명, 부사관 1명[11] 이전에는 병들처럼 포제 계급장을 재봉해 붙이고 다녔다. 당시 계급장은 병장 계급장 위에 갈매기 표시를 붙인 형태로 병의 연장선임을 뜻하는데 민간부사관 도입 이후에는 그냥 장식용으로 전락했다.[12] 철제 계급장도 장교는 은색이지만 부사관과 준사관은 금색이다.[13] 후에 간부의 자질문제가 거론되면서 2011년 6월에 사관생도/사관후보생/부사관후보생을 대상으로 한 임관종합평가가 신설되었다.[14] 사실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서울대학교의 ROTC 정원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ROTC 정원이 가장 많은 대학교는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로 둘이 서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