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군자 체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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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7군자의 체포
3.2. 장쉐량의 항의
3.3. 장제스의 시안행과 12.9 시위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36년 11월 23일, 소위 7군자라 불리던 상하이 구국회의 지도자 7명이 긴급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전국적인 항일여론에 기름을 부어 서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배경[편집]


1935년 12.9 운동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구국회의 조직이 일어났다. 1936년 5월 31일, 상하이를 본부로 하여 전국각계구국연합회가 조직,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당시 일본의 화북분리공작을 비롯한 침략행위는 계속되고 있었고 장제스는 외교부장 장췬으로 하여금 일본과 교섭하게 하는 한편 대규모 국방건설을 통해 일본에 맞설 수 있는 현대적인 군대를 건설하고 있었다. 또한 국내를 안정시키기 위해 섬서성으로 숨어든 중국 공산당의 잔당에 대한 토벌을 독촉하였다.

그러던 중 1936년 8월, 관동군의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다나카 류키치 등이 푸쭤이의 35군이 수비하던 수원성 침략을 시도하였다. 이것을 수동사변이라고 한다. 푸쭤이는 일본군과 몽골 괴뢰군을 크게 격파하고 11월에 일본군의 근거지인 백령묘로 진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민정부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지만 동시에 중국 공산당과 전국각계구국연합회는 내전정지, 일치항일을 주장하며 이번 기회에 만주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두웨성, 우흡경, 전영명 등의 상하이의 재계가 구국회의 의연금 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자체적인 수원성 원조 의연금을 모집하는 한편 당국은 항일여론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구국회를 상대로 탄압을 준비하였다.

3. 전개[편집]



3.1. 7군자의 체포[편집]


1936년 11월 8일, 상하이의 일본인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항의 파업을 실시하였다. 11월 12일, 구국회의 선쥔루, 장나이치, 왕자오스 등과 구국회 회원 700여명이 상하이 정안사로에 위치한 교회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여기에 파업 노동자 대표들이 참가하여 파업 지원을 요구하였고 황흥로에서 파업 중이던 노동자 2천명 역시 집회를 열어 파업 경과에 대해 보고하였다. 뒤이어 선쥔루와 스량이 이 집회에 출석해, 일치항일을 위해 내전을 정지해야 하며 홍군에 대한 토벌을 중지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푸쭤이가 백령묘를 점령한 11월 23일, 국민정부 당국은 구국회 지도자 7인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 이들을 전격 체포하였다. 체포된 멤버는 다음과 같다.

  • 선쥔루: 61세, 상하이 변호사회 회장.






  • 스량: 28세, 변호사, 여성.

이중에서 스량은 얼마 안가서 석방되었으나 나머지 6명은 위해민국 긴급치죄법에 의거, '비합법 단체를 조직하여 적비와 결탁하거나 파업, 동맹휴교, 불매운동을 선동하고 은밀하게 치안의 요란을 계획하여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죄'로 수감되었다. 또한 항일을 주장하던 14종의 간행물이 폐간되었다.

3.2. 장쉐량의 항의[편집]


7군자 체포 소식에 제일 먼저 반발한 사람은 서북초비부사령관 장쉐량이었다. 11월 24일, 장쉐량은 백령묘의 함락과 산성보에서의 홍군의 승리와 더불어 선쥔루 등 구국회 간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미 동북군에서는 일본군이 아니라 같은 중국인과 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발 여론이 비등하고 있었고 장쉐량이 이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는데 7군자의 체포는 장쉐량이 겨우 무마하던 항일여론을 더욱 폭주시킬 민감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즉각 50세 생일을 맞이하여 한달간의 휴가를 받아 뤄양에 머물던 장제스에게 회견을 요청하였다.

11월 25일, 상하이 시정부는 정식으로 선쥔루 등 7군자 체포 경과에 대해 발표하였다. 11월 27일, 장쉐량은 "항일을 실행하지 않는 한, 부하의 통제가 곤란한다."라는 서한을 장제스에게 보냈고 12월 2일 칭다오의 일본인 방적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12월 3일에 일본군 해군 육전대가 칭다오에 상륙, 난징에서 열렸던 외교부장 장췬과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 사이의 회담은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장쉐량은 시안에서 뤄양으로 직접 가서 장제스를 만났다. 장쉐량은 섬감녕지구 6차 초공작전에 대한 군사회의에 참여, 내전을 정지하고 항일전에 나서지 않으면 동북군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면서 7군자의 석방과 초공전의 중지를 청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노기어린 태도로 이를 묵살했으며 안색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일전을 하고 싶다면 내가 죽은 뒤에 그대가 하라. 나 자신이 즉 혁명이다. 그러한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반혁명이다.


그러자 장쉐량은 큰 불만을 품었으며 그 당시에 품었던 생각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죄를 범했다는 것일까? 전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선쥔루는 60 몇살인가 되는 저명한 대학교수이다. 그의 죄는,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애국 미수죄'라고나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위원장에게 그에 대한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위원장은 "그렇게 보는 것은 전국에서 그대 하나 뿐이다. 나는 혁명정부다. 내가 하는 일은 즉 혁명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내심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혁명정부란, 중심이 없는 단순한 네 글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혁명적인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혁명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장제스에게 친히 시안으로 와서 장병들을 달래달라고 청했다. 쿵샹시, 천청 등은 시안으로 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했으나 복건사변, 2차 양광사변 등을 진압하며 중국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한 장제스는 이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시안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후일 <서안반월기>를 통해 자신이 시안으로 가기로 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국난에 대한 동북군의 심통과 그들의 특수한 경우를 생각하면 비분한 나머지 지나친 이론을 입밖에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통일의 기초는 이미 정해져 있다. 정리를 다해서 가르치고 깨우친다면 다시 중앙에 귀속시켜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를 이해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도 중화민족의 조상인 황제와 염제의 후손이다. 국책만 명확해지면 반역을 기도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첫째로 나에게는 최고 사령관으로서 그들을 훈계 지도하는 책임이 있었다.

3.3. 장제스의 시안행과 12.9 시위[편집]


12월 4일, 장제스는 장쉐량과 더불어 측근인 전대균, 천청, 웨이리황, 장정문, 주사오량, 소원충 등 중앙군 장령과 국민당 요인들을 거느려 열차를 타고 시안으로 갔다. 장제스는 숙소인 화청지에 여장을 풀자마자 동북군과 17로군 장령들을 소집하여 토벌작전의 중요함에 대해 훈계하며 1개월 안에 토벌작전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고 했다. 장쉐량양후청은 장제스에게 초공을 중지해줄 것을 수차례 설득했지만 장제스는 완고했으며 초공이 싫으면 복건이나 안휘로 떠나라고 할 뿐이었다.

12월 9일, 시안의 학생들이 12.9 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당황한 장쉐량은 양후청 및 섬서성 정부주석 사오리쯔와 의논하여 집회를 학교 안에서만 한다거나 항의나 의견 등은 문서로 제출할 것 등의 타협안을 제시하며 시위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2월 9일 아침, 헌병과 경찰들이 시위를 제지하기 위해 각 학교에 모였을 때 이미 시위대는 남원문 광장에 집결한 상태였다. 10시를 넘어서 학생들은 2만명 규모로 불어났고 대표단이 시위 개회를 선언하자마자 동관소학교 학생 한명이 정체불명의 총격에 맞아 사망했는데 이를 안 학생들은 흥분하여 원수를 갚자며 통곡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시위대는 먼저 장쉐량을 만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장쉐량이 없다고 하자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북원문의 섬서성 정부로 갔다. 섬서성 정부 관리들도 사오리쯔 주석은 공무로 외출한 상태라고 이들을 돌려보내려 했으나 시위대는 만약 주석이 없다면 쳐들어가서 확인해보겠다며 거칠게 나왔고 건물 안에 숨어있던 사오리쯔가 놀라서 뛰쳐나왔다. 사오리쯔는 학생들에게 구국을 하고 싶으면 공부를 하라고 설교한 후에 성정부 건물로 달아나서 문을 걸어잠궜다. 이어 학생들은 양후청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양후청도 없다는 핑계를 대고 학생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양후청을 대신해서 나온 참모장이 양후청이 임동에 있다고 하자 학생들은 흥분하여 임동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는데 임동은 다름아닌 장제스의 숙소인 화청지가 있는 곳이었다.

시위대는 노약자와 어린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다음에 임동으로 향했다. 이에 군경이 신성에서 서안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시위대에게 뚫리고 말았다. 당국이 손을 써서 기차화차도 없었으나 시위대는 걸어서 임동으로 몰려갔다. 이에 동북군 기병대가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시위대의 호소에 물러나버렸다. 이를 알게 된 장제스는 격노하여 사살해도 좋으니 시위를 중지시키라고 지시했고 헌병대와 시위대가 충돌하기 직전 장쉐량이 직접 나타나 시위대에게 호소했다.

학생 제군, 제군의 나라를 사랑하는 열정에는 나도 존경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 늦었다. 임동까지의 길은 아직 멀고 거기에는 식사를 하거나 숙박을 할 곳이 없다. 그러니까 되돌아주기를 부탁한다. 자네들의 청원서는 내가 보관하겠다. 내가 자네들을 대표해서 장 위원장에게 말씀드리겠다. 자네들의 애국 행동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학생이 국사에 관여하는 일이 불만인 것이다. 자네들이 기어코 임동에 간다고 하면 반드시 최고 당국의 노여움을 사서 유혈 사건이 일어난다.


학생들이 구국을 위해 죽어도 상관 없다고 외치자 장쉐량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호소했다.

제군, 나도 결코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동북사성을 잃고나서부터,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이 장쉐량을 매도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이 내가 왜 자진해서 일본과 싸우지 않았던가? 그것은 상급자가 그렇게 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숨겨진 고통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이 이 나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망국의 도당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다. 나는 항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제군! 이 나를 아무쪼록 믿어달라. 나는 1주일 이내에 사실대로 자네들에게 회답할 것을 약속한다. 지금 내가 한 말이 단순히 시간을 벌기 위한 속임수였음이 밝혀진다면, 제군에게 맞아 죽더라도 상관이 없다!


장쉐량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학생들도 설득되어 시안 시내로 돌아가 유혈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4. 결과[편집]


다음날인 12월 10일, 장제스는 장쉐량을 화청지로 불러 장쉐량이 제멋대로 쌍방을 대표한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호되게 질책했다. 12월 11일, 장제스는 양후청과 장쉐량에게 6차 초공작전을 실시할 것임을 통보했다. 결국 장쉐량과 양후청은 장제스를 무력으로 억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여기고 12월 12일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그날 오후 8개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그중 3항이 7군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서안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이후 정식으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7군자는 1937년 2월 15일 중국 국민당 5기 3중전회가 개최된 이후, 1937년 6월 11일 쑤저우 고등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7월 31일 7군자는 정식으로 석방되었다.

5. 참고문헌[편집]


  • 나가노 히로무, 서안사변(서울: 일월서각, 1982).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4).
  • 이건일, 모택동 vs 장개석 : 중국국공혁명사(서울: 삼화, 2014).
  • 이시카와 요시히로,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서울: 삼천리, 2013).
  • 조너선 펜비,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서울: 민음사, 2014)
  • 신은주, 「西安事變의 平和的 解決에 관한 一硏究」,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1997).
  • 한희정, 西安事變의 배경에 관한 연구, 서강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02).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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