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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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8.15 광복은 일본 제국이 시작한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을 실감한 1945년 8월 15일 쇼와 덴노가 일본방송협회(現 NHK) 라디오로 옥음방송을 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일본 제국이 병탄한 옛 대한제국령에 설치한 조선총독부가 해체되고 한반도의 주류 민족이자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의 지배를 받던 한국이 일본 제국의 통치로부터 해방[1] 된 사건이다.
2. 상세[편집]
광복은 일본의 수탈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 조선민족을 일시적으로 구원했으나 곧 이이서 소련과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게 되었다. 다만 이 점령통치는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켜서 일본 제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한반도에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은 1945년 8월 15일 당시를 해방으로 1945년의 해방과 1948년 8월 15일 독립정부 수립을 묶어서 광복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복절을 대한민국 독립한 날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1945년 8월 15일은 한민족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이고 미군정 체제가 종료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져서 외국의 통치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한 날은 1948년 8월 15일로 연도가 다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양력 8월 15일을 광복절로 지정하였으며 북한에서도 해방절이라 하여 이날을 기리고 있다.[2]
일본에서는 이날을 종전기념일이라고 기리고 있다.[3] 일본 제국이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은 1945년 9월 2일이며 실제로는 천황이 서명한 것이 아니라 천황 및 일본 정부, 대본영의 명에 따라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4] 와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가 서명했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도 8.15 광복의 3주년 날짜로 맞추었고 1974년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첫 지하철인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 개통식이 이날 개최된 것을 보면[5] 이날이 얼마나 의미있게 쓰였고 지금도 쓰이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3. 8월 15일[편집]
이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6] 5개 조항[7] 을 요구했다. 당혹스러운 조건이었지만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이 돌던 상황에서 다급했던 총독부는 여운형의 요구를 받아들였다.[8]
이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자세한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옥음방송 참고.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천황의 종전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난해한 한자어가 섞여 있었던 데다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문어체로 방송되었다. 때문에 방송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9] 그나마 매일신보 등의 신문 매체에는 해당 조서의 원문이 실려 있었기에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지식인은 표면적인 내용을 한결 수월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서는 물론이고 당시 신문에 실린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논고 역시 장황하고 암호문 같은 문체로 쓰인 탓에[10] 행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시대를 연다', '연합국의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내용의 종전만을 언급했을 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 방송을 전부 이해하는 조선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전이 당장 조선의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런 방송을 했다고 해서 15일에 바로 일본군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여 빠져나간 것도 당연히 아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조선인 민중들로서는 뭔가 긴가민가하는 상황이었고 해방의 첫날은 조선 민중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온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바로 태극기를 들고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11] 강준만 같은 경우는 '방송 직후 바로 조선 민중들이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오후부터 서서히 마포 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퍼져 나가면서 경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타 증언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정오에는 조용했지만 반복된 라디오 방송과 일본인들의 이상한 분위기, 행정의 공백(배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는 입소문 등으로 당일 오후와 밤 동안 도시 지역에는 광복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는 이 부분이 은근히 고증이 잘 되어 있다. 8월 15일 광복 당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가만히 있다가 그 다음 날부터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8.15 당시 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월 15일 당일에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며 이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의 태극기의 태극 무늬가 비정상적으로 큰데 일장기에 덧칠한 태극기다.
4. 8월 16일[편집]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12] 그때서야 경성[13]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로 태극기를 모조리 압수당한 지 26년이 지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했던 노인들 또는 중장년층들이나 어렴풋한 기억으로 태극기를 그리고 청년층 아래로는 생전 처음 태극기를 보는 상황이었다. 애당초 태극기의 형태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복 당시 태극기 문양이 맞네 틀리네 하는 서술 자체는 의미가 없다. 독립문과 가까운데 살았던 지역 주민들은 독립문 태극기를 보고 태극기를 그렸지만 급한대로 기존에 있던 일장기에 아래쪽을 먹칠하고 사괘를 그려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파도처럼 휘몰아쳤던 광복의 기쁨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그대로 시민들은 계동에 있는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여운형은 집 바로 뒤에 있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는 연설을 했다.(위 사진 참고)
그런데 이 연설은 중간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했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면서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몰려가면서 중단되었다.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헛소문의 실상은 조선인들의 습격을 두려워한 조선총독부 관료들이 변절자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공작이었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정무총감을 말한다)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5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상적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는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하자.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곧 여운형은 기존에 자신이 운영했던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기본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고 YMCA 건물에서 건준 강령[16] 을 발표하였다.

YMCA 건물의 건준회의에서 연설하는 여운형.
그리고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은 며칠간 전국에 조선이 광복되었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며칠간 광복을 환호하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5. 당시 상황[편집]
광복 소식을 듣자 반일 인사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친일 경찰들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일본군들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9월 9일까지 시내를 돌아다니며 광복을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조선인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을 염려해 비행기로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건준 명의의 선전물을 뿌렸다.[17]

조선동포여!
중대한 현 단계에 잇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광명이 잇스니
경거망동은 절대의 금물이다
제위(諸位)[18]
의 일어일동(一語一動)[19] 이 민족의 휴척(休戚)[20] 에 지대한 영향이 잇는 것을 맹성(猛省)[21] 하라!절대의 자중으로 지도층의 포고에 따르기를 유의하라.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재조선 일본인들은 황급히 재산을 팔아 치우고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그러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몇몇 조선 출생 일본인들이나 처분할 재산이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 땅을 고향으로 생각했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걸 오히려 꺼렸다고도 한다. 치안이 유지되었으나 일본인들이나 친일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도 있었다. 의외로 전국에서는 크지 않았으며 경상도에서 좀 더 많았다고 한다. 광복이 기정사실화되었는데도 여전히 치안을 유지한답시고 일본 제국 경찰이나 군인이 총격을 가해 조선인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 당시 상황이 소상히 나왔다. 특히 퉁허사건(通化事件)이 유명하다. 광복 후 한참이 지난 9월 미군 진주 때도 미군을 본다고 모여든 구경꾼들을 통제하던 일제 경찰이 구경꾼 조선인 2명을 현장 사살하기도 했다.
한편 건준은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고 일본인 자본가와 지주로부터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여 조선인들에게 배분하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경찰들이 도망간 빈 자리를 대신하여 전국의 청년들을 모집해 치안대를 결성해 치안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본국의 지시로 건준에 내주기로 되어 있었던 행정권, 치안권 등을 제대로 이양하지 않았고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결국 행정권 등은 미군정에 이양되었다.
경성부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일본육군성직속 비밀 테러단이 연합군 요인들을 암살하려다가 적발되어서 감옥에 갔다. #
참고로 다수는 아니었다지만 8.15 광복이 선언되고도 몇 달 동안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위와 같은 깽판을 치는 일본인들이 일부 존재했던 이유는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 중에는 "항복은 천황 폐하의 뜻이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조선 반도를 포기하는 것은 천황 폐하의 뜻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외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정도로 극단적인 주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반도가 일본령에서 떨어져 나감에 따라 일본이 곡창 지대를 잃고 앞으로 주기적인 기아에 시달릴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건 틀린 전망이었다.[22]
6. 기타[편집]
- 부산광역시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집중거주지역은 변천정(弁天町, 벤텐마치), 금평정(琴平町, 코토히라마치) 일대였는데 매우 일본스러운 지명이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광복을 기념해 동네 이름을 '광복동(光復洞)'으로 바꾸었다.
- 위와 비슷한 사례로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일본인 위주의 상업지역이었던 혼마치(本町)는 과거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에서 따 온 충무로로 바꾸었다. 그 외의 도시들도 대개 중심 번화가에는 본정 즉 혼마치(本町)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23] 해방 후 각자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24]
- 광복을 기억하기 위해 광복절에 태어난 아기에게는 이름을 ‘광복’이라고 붙이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광복절에 태어난 남자아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한국과 인도의 해방 날짜가 같다. 다만 요일은 한국 쪽이 수요일, 인도 쪽이 금요일로 달랐다. 인도네시아 역시 일제 패망으로 주권을 회복하였으나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8월 17일이 국경일이다.
-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세대는 ‘해방됐을 때 몇 살’ 하는 식으로 본인의 나이를 세기도 했다.[25] 해당 세대는 대다수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들어간 세대였다. 광복 당시 졸업을 앞둔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세대의 경우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일본어로만 수업을 듣다가 졸업 직전에 해방되는 바람에 한글을 배우느라 학교를 1년 더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 당시 대한민국 법조계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일제는 1년에 한 번씩 조선변호사 시험을 실시해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변호사를 뽑았다. 그리고 1945년도 변호사 시험은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치러질 예정이었다. 첫날 시험은 정상적으로 치러졌지만 두 번째 날인 8월 15일 시험은 오전만 치러지고 중단되었다. 응시생은 200명이었는데 이 중 106명은 변호사 자격을 달라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제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계속되는 항의에 지쳐 106명 전원에게 변호사 자격을 줘 버렸다. 그리고 이들 106명의 조선변호사가 대한민국 법조계의 근간이 되었다. 관련 기사
- 2021년 8월 15일 한국이 광복절 76주년을 맞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정부가 탈레반에게 항복하고 주권을 탈레반에게 빼앗겨 버렸다. 한국이 나라를 되찾은 날 아프가니스탄은 자유를 잃은 것.
- 북한 함경북도 지역 일부는 8월 15일 이전에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소련군이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 이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 따라 8월 11일 한반도로 진입해 웅기군, 나진시 등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후 청진시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이 항복했다. 하지만 북한 지역의 일이라 관심이 적기도 하고 북한 당국도 소련군의 자리에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구인 군대를 대입하여 8.15 해방이 된 것이라고 선전하며 시기적으로도 8.15 광복과 며칠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뤄지는 경우는 별로 없고 8.15 광복으로 퉁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근현대사 관련 매체에서도 필연적으로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인데 대다수 매체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친다는 등의 소소한 고증 오류들이 있다.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 1회,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 1회 등지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 1999년 MBC 드라마 국희에서는 어린 국희가 장태화의 심부름으로 떡판 영업을 하다가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이 유난히 한적한 것에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멍해 있을 때 갑작스레 태극기를 들고 달려오는 시민들에 의해 넘어진다. 이때 어린 국희는 광복의 기쁨이 뭔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었으나 다음 회에 역사적 의식이 제대로 된 장태화의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배우게 된다.
-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 50화에서 일제가 항복하고 광복을 맞는다. 서울 시내에서 사람들과 거지촌 거지들 등 온갖 사람들이 '해방조선'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뛰어다니고 미와 경부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멘붕하여 그냥 경찰서에 남아 김두한을 만나 죽기를 택한다. 이때 김두한의 우미관 패거리도 독립 소식을 기뻐하는데 정진영은 기뻐하며 '드디어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잘 사는 독립 공화국이 만들어질 겁니다!'라고 말하며 이는 광복 후 좌우대립 속에서 정진영이 공산주의자로 빠져서 김두한과 대립하게 된다는 복선 중에서도 절정에 달한 복선이다.[26] 해당 회차에서 김두한이 뒤를 돌아보는 장면 다음에 주연 배우들이 바뀌면서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2010년대 이후 '시청률 반토막나는 회차'로 손꼽히게 됐고 이는 MBC <라디오스타> 2020년 2월 5일 방영분에서 언급되었다.
-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온다.
8. 관련 어록[편집]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 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삼각산 돌아보니 별들이 떴네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동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30]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며,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 일에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