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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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September 11 attacks[1]

파일:9.11테러 2번째 충돌.jpg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는 모습

파일:9.11 테러 펜타곤.jpg

아메리칸 항공 77편이 충돌한 미 국방부 청사 펜타곤의 모습
발생일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사고일로부터 8234일, 22주년
발생 위치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 펜타곤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유형
하이재킹을 통한 자살 테러
원인
알카에다의 정치적·종교적 극단주의
테러 주동자
오사마 빈 라덴, 아이만 알자와히리
테러 주동 세력
알카에다[2]
피해
재산피해
항공기 AA11기, UA175기, AA77기, UA93기 완파
구 세계무역센터 붕괴, 펜타곤 일부 붕괴
도이체방크 뉴욕지점 사옥 대파,[3] 국제금융센터 반파
뉴욕시 GDP 273억 달러 감소
여행 관련 지출 비용 전년 대비 20% 감소
관련 직종 실업자 43만 명 발생
사망자
총사망자 수 3,000명 이상[4]
세계무역센터 2,606명 이상
펜타곤 125명
4개 기체 탑승자 265명 전원 사망[5]
부상
최소 6,000여 명 ~ 최대 25,000여 명
분진 피해자
5,771명 ~ 75,000여 명[6]
여파
테러와의 전쟁 선포, 미국의 아프가니스탄(2001) 및 이라크(2003) 침공
애국자법(2001) 등 미국 정부의 테러리즘 감시 관련 정치적 논란 확산
국토안보부 창설
아랍계 미국인 등 미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증오 범죄 증가
세계적 공항 터미널 보안 검색대의 절차 강화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왜 막지 못했는가
6. 이후
6.1. 끝나지 않은 피해
6.2. 후속 테러
6.3. 2014년 후유증 사기 적발
8. 9·11 테러를 다룬 대중매체
8.1. 게임
8.2. 서적
8.2.1. 소설
8.2.2. 논픽션
8.3. 만화
8.4. 영화
8.5. 드라마
8.6. 음악
8.7. 뮤지컬
8.8. 다큐멘터리
8.9. 당시 방송 및 뉴스
8.10. 기타
9. 기타
10. 외부 링크
11. 틀 둘러보기



1. 개요[편집]


9·11 테러(September 11 attacks)는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 알카에다 주도의 테러리스트들은 납치항공기미국의 주요 건물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뉴욕 맨해튼세계무역센터워싱턴 D.C.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이 공격받았고,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도 목표로 노려졌으나 이 공격을 위해 납치된 UA93기는 승객의 저항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했다. 이로 인해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2023년 기준 가장 큰 인명피해를 유발한 테러 공격으로 기록되고 있다.

테러는 피해 당사국인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우방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으며, 미국 내부에서는 이 사태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알카에다에 대한 무제한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은 테러 직후 90%에 육박하게 되었다.[7]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으로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월 20일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1개월 뒤 미군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하여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1)을 일으켰고 이에 탈레반 정권이 일시 축출되었으며[8], 2002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선포, 2003년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라크 전쟁(2003~2011) 발발 및 후세인 정권의 붕괴, 그리고 최종적으로 2006년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사살과 사담 후세인의 처형, 2011년오사마 빈 라덴 사살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러와의 전쟁은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및 이라크 공습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 위키리크스 등으로 밝혀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인권 유린 행위 발각, 애국자법(2001)과 같은 감시권한 강화에 대한 논란, 대침체와 더불어 미국의 패권 약화에 기여 등 국내외적 영향을 미쳤으며, 이에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9·11 테러를 21세기 세계 현대사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평가한다.


2. 배경[편집]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후 이슬람권 각지에서는 '불신자 공산군'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한 지하드의 일환으로 궐기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9]으로 몰려들었다. 냉전으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 정부는 CIA를 통해 그들을 지원하였고, 서방 유학을 통해 영어에 능통했던 오사마 빈 라덴이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던 1988년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철수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에 대항한다는 방향성을 잃고 지하디스트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빈 라덴은 지하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였고, 그 대상은 바로 기존의 동맹이던 미국이었다. 같은해 빈 라덴은 (후일 그를 계승하는)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의 무자헤딘 베테랑들과 함께 페샤와르에서 '지하드의 선봉'이 될 조직으로 (아랍어로 '근본'이란 뜻인) 알카에다를 창설하였다.

1990년 사담 후세인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빈 라덴은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 지원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사우디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빈 라덴은 사우디 왕가에 대해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10]'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에 주둔하는 미군에 대한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11] 알카에다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 정권들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빈 라덴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의 미국인들에 대한 테러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998년 알카에다는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 테러[12]를 감행하면서 전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하였다.

같은 해 빈 라덴은 미국의 대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하여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빈 라덴은 1998년 말부터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구성원 중에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였던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미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의 고층 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보복 심리로 미국의 마천루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빈 라덴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했던 칼리드의 합류는 9·11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미국 군사력의 기반인 (미국의)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그들은 재건을 해야만 할 것이다.

ㅡ 2004년 파키스탄에서 습득된 빈 라덴의 녹취록[13]


알카에다의 최종 목표가 된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에 있어 빈 라덴은 미국 군사력의 기반은 미국의 경제력에 있고, 따라서 미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의 주요 목표로 선정하였다.

또한 9월 11일을 실행일로 정한 것은 그가 누차 서방의 중동 개입의 시작으로 간주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절정에 달했던[14] 날이였고, 또한 유엔 총회개막일이자. 빈라덴 자신의 궐석재판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쳤기 때문에 9월 11일로 계획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테러를 실행한 시간도 이른 아침 시간대라 관광객들이 아닌 출근하는 미국 시민들을 노린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99년 빈 라덴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의 실행 방법으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하였다. 선발 결과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로 약 20여명의 납치조가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본거지로 삼고 있던 알카에다는 이들을 초청하여 훈련시켰다.[15]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미국에 입국하였고, 빈 라덴은 사우디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하여 그들의 여권을 발급하였다. 2000년에 입국한 1차 납치조는 플로리다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 훈련을 받았고, 2001년 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하였다. 2001년 7월, 납치조의 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카에다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 계획을 브리핑하였다.

빈 라덴은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미국 정보 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카에다의 음모를 눈치채고 있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사우디 정보 당국의 협조로 CIA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미국 비자를 소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세계 각지의 요원들에게 경고하였다. 2000년 7월, CIA는 알카에다 조직원 2인 이상이 미국에 입국한 것을 확인하였고 FBI는 미국 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하였다.

하지만 두 정보 당국 간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하였다. 심지어 알카에다 조직원에 대한 FBI의 정보 공개 요청을 C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미국 법무부가 극비 사항을 정보 당국 간에 공유하는 것에 대한 규제를 내린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2000년 US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카에다가 단순히 해외 주둔 미군에 대한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미국인들에 대한 경계 강화에만 치중하였다.

2001년 8월, 요르단 정보 당국은 미국 측에 알카에다가 미국 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 중이고, 이는 한 달 내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하였다.[16] 그 후 비로소 민간 비행 학교에 알카에다 조직원이 있다는 FBI의 의혹 제기를 받아들인 CIA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하였다.

8월 16일에는 알카에다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미네소타의 비행 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 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 하지만 FBI는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조지 부시 대통령을 위시로 한 미국 수뇌부 역시 알카에다를 과소평가하며 해봤자 납치 후 인질극 정도 벌일 뿐 감히 미국 본토를 향한 직접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빈 라덴이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묵묵히 다가오고 있었다.


3. 전개[편집]


이 모든 일들은 불과 9월 11일 오전 8시에서 11시까지 약 2-3시간만에 걸쳐 벌어졌다. 그럼에도 전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3.1. 항공기 납치[편집]



파일:9.11 테러 납치 항공기 비행경로.jpg

사건 당일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항공기들의 비행경로
본래 목적지로 가다가 갑자기 뉴욕과 워싱턴 D.C.로 기수를 틀었다.


3.1.1. 항공기[편집]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AA11 · UA175 · AA77 · UA93 4편의 비행기가 납치되었고 UA93편을 제외한 3편의 비행기는 테러의 목표 지점에 충돌하였다. UA93편은 승객들의 저항에 의해 목표 지점까지 이동하지 못하고 도중에 추락하였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메리칸 항공 11편 테러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오전 8시 43분경 마르완 알 셰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UA175편이 납치되었다. 이후 UA175편은 뉴욕으로 향하여 오전 9시 3분경 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테러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오전 8시 51분경 하니 하뇨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편이 납치되었다. 이후 AA77편은 워싱턴으로 이동하여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충돌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메리칸 항공 77편 테러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테러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2. 테러리스트[편집]



파일:hijackers_of_2001-911_attack.jpg


이름
나이
국적
특이사항
모하메드 아타
(Mohamed Atta)
1968년 9월 1일
당시 33세
[[이집트|

이집트
display: none; display: 이집트"
행정구
]]

AA 11편의 납치 행동대장.
마르완 알 셰히의 사촌.[17]
압둘아지즈 알 오마리
(Abdulaziz al-Omari)
1979년 5월 28일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와일 알 셰리
(Wail al-Shehri)[18][19]
1973년 7월 31일
당시 28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왈리드 알 셰리의 형
왈리드 알 셰리
(Waleed al-Shehri)
1978년 12월 20일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와일 알 셰리의 동생
사탐 알 수콰미
(Satam al-Suqami)
1976년 6월 28일
당시 25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이름
나이
국적
특이사항
마르완 알 셰히
(Marwan al-Shehhi)
1978년 5월 9일
당시 23세
[[아랍에미리트|

아랍에미리트
display: none; display: 아랍에미리트"
행정구
]]

UA 175편의 납치 행동대장.
모하메드 아타의 사촌.
파예즈 바니하메드
(Fayez Banihamed)
1977년 3월 19일
당시 24세
[[아랍에미리트|
아랍에미리트
display: none; display: 아랍에미리트"
행정구
]]
|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모한드 알 셰리
(Mohand al-Shehri)
1979년 5월 7일
당시 22세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함자 알 감디
(Hamza al- Ghamdi)
1980년 11월 18일
당시 20세

아메드 알 감디의 동생
아메드 알 감디
(Ahmed al-Ghamdi)
1979년 7월 2일
당시 22세

함자 알 감디의 형

이름
나이
국적
특이사항
하니 하뇨르
(Hani Hanjour)
1972년 8월 30일
당시 29세

AA 77편의 납치 행동대장
칼리드 알 미드하르
(Khalid al-Mihdhar)
1975년 5월 16일
당시 26세
.

마제드 모퀘드
(Majed Moqed)
1977년 6월 18일
당시 24세


나와프 알 하즈미
(Nawaf al-Hazmi)
1976년 8월 9일
당시 25세

살렘 알 하즈미의 형
살렘 알 하즈미
(Salem al-Hazmi)
1981년 2월 2일
당시 20세

나와프 알 하즈미의 동생

이름
나이
국적
특이사항
지아드 자라
(Ziad Samir Jarrah)
1975년 5월 11일
당시 26세

UA 93편의 납치 행동대장
아메드 알 나미
(Ahmed al-Nami)
1977년 8월 17일
당시 24세


사이드 알 감디
(Saeed al Ghamdi)
1979년 11월 21일
당시 21세


아메드 알 하즈나위
(Ahmed al-Haznawi)
1980년 10월 11일
당시 20세



사실, 이들 19명 중 15명은 '메카메디나, 두 성지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들 중에는 법대 재학생이나 재벌 집안의 자녀 등 부유한 가정의 도련님들이 많았다. 즉, 굳이 자진해서 테러를 할 필요가 없는 금수저임에도 저지른 것. 유달리 사우디 출신이 많은 것은 두 성지를 품은 조국 사우디아라비아 내부에서도 '이교도 군대'인 미군이 주둔하던 것에 불만을 품은 사우디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영어 위키백과 관련 문서로.

당시 미국의 큰 공항들은 CAPPS I[20]이라는, 공항에 들어온 모든 개개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는데 논문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논문에 의하면[21] 19명의 테러리스트들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렸고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걸린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19명 중 10명이었는데 이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려들었고 나머지 4명은 가방 속 내용물과 같은 이유로 인해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수색을 했음에도 이들이 실질적으로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 게다가 이 테러리스트들은 9·11 테러를 벌이기 전에 사전 답사로 보이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CAPPS I에 걸리는 행동들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공항을 사전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로 인해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실용성에 대해 의문들이 쏟아져나왔으며 미국이 곧 CAPPS II를 개발하는 이유가 된다.

알 자지라 방송국에서 9·11 테러의 원흉 알카에다의 총수 오사마 빈 라덴의 2004년 생전 비디오를 녹화한 것을 공개했다. 이 비디오가 대테러 전문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비디오 내용(접기/펼치기)
Praise be to Allah who created the creation for his worship and commanded them to be just and permitted the wronged one to retaliate against the oppressor in kind. To proceed:
찬양받기 위해 창조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정의로움을 명하시고, 핍박받는 자들이 핍박하는 자들에게 당한 만큼 복수할 것을 허락하신 알라를 찬양하노라.
Peace be upon he who follows the guidance:
이 안내를 따르는 이들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People of America this talk of mine is for you and concerns the ideal way to prevent another Manhattan, and deals with the war and its causes and results.
미국인들이여, 나의 이 담화는 그대들을 위한 것이고, 또 다른 9·11을[1] 방지하기 위한 이상적인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며, 전쟁과 그 원인과 결과를 다루기 위함이다.
Before I begin,
시작하기 전에,
I say to you that security is an indispensable pillar of human life and that free men do not forfeit their security, contrary to Bush's claim that we hate freedom.
나는 당신들에게 안전이란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대들보이며, 우리가 자유를 증오한다는 부시 행정부의 주장과는 반대로 자유인은 안전을 박탈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자 한다.
If so, then let him explain to us why we don't strike for example - Sweden?
만약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들로 하여금 왜 우리가, 예를 들어, 스웨덴을 공격하지 않는지 설명토록 하라.
And we know that freedom-haters don't possess defiant spirits like those of the 19 - may Allah have mercy on them.
그리고 우리는 자유를 증오하는 자들은 그 19명(9·11 자살 특공대)과 같은 저항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들에게 알라의 자비가 있기를.
No, we fight because we are free men who don't sleep under oppression.
우리는 핍박 아래 잠들지 않는 자유인이기에 싸운다.
We want to restore freedom to our nation,
당신이 우리 조국을 파괴하는 짓을 하기에,
just as you lay waste to our nation.
우리는 조국의 자유를 되찾고 싶다.
So shall we lay waste to yours.
그러므로, 우리 또한 당신의 조국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 것 이다.
No one except a dumb thief plays with the security of others and then makes himself believe he will be secure.
멍청한 도둑놈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남의 신변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본인은 안전할 것이라 믿지 않는다.
Whereas thinking people, when disaster strikes, make it their priority to look for its causes, in order to prevent it happening again.
반면에, 생각하는 사람들은, 재앙이 닥치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 예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But I am amazed at you.
하지만, 그대들은 날 놀라게 했다.
Even though we are in the fourth year after the events of September 11th, Bush is still engaged in distortion, deception and hiding from you the real causes.
우리가 9·11로부터 4년째를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여전히 사실을 왜곡하고, 기만하며, 그대들로부터 진정한 원인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And thus, the reasons are still there for a repeat of what occurred.
그러므로, 과거(9·11 테러)의 일이 반복될 불씨는 여전히 존재한다.
So I shall talk to you about the story behind those events and shall tell you truthfully about the moments in which the decision was taken, for you to consider.
그대들의 심사숙고를 위해[2], 나는 당신들에게 그 일련의 사건들 너머 감춰진 이야기들을, 그리고 그 결정이 내려졌던 순간에 대해 진실되게 말하겠다.
I say to you, Allah knows that it had never occurred to us to strike the towers.
내가 그대들에게 고하노니, 알라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원래 전혀 그 건물들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다.
But after it became unbearable and we witnessed the oppression and tyranny of the American/Israeli coalition against our people in Palestine and Lebanon, it came to my mind.
그러나 상황이 참을 수 없게 흘러갔고, 미국-이스라엘 동맹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동포들에게 자행했던 압제와 폭정의 장면들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The events that affected my soul in a direct way started in 1982 when America permitted the Israelis to invade Lebanon and the American Sixth Fleet helped them in that.
내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82년 미국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을 묵인하고 미군 제6함대가 이를 지원했던 때로부터 기인한다.
This bombardment began and many were killed and injured and others were terrorized and displaced.
이 폭격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고, 부상당했으며, 다른 이들은 공포에 질렸고, 살 곳을 잃었다.
I couldn't forget those moving scenes.
난 그 피비린내, 살육의 현장을 잊을 수가 없다.
Blood and severed limbs, women and children sprawled everywhere.
피와 절단된 사지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사방에 널브러진 그 순간을.
Houses destroyed along with their occupants and high rises demolished over their residents, rockets raining down on our home without mercy.
가옥들은 그 안의 거주자들과 함께 파괴되고 고층 건물들은 그 안의 입주자들과 함께 붕괴되었으며, 사람들의 삶의 터전에는 로켓포가 자비 없이 비처럼 내렸다.
The situation was like a crocodile meeting a helpless child, powerless except for his screams.
이러한 상황은 비명지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무력한 어린아이가 악어와 마주하는 것과 같다.
Does the crocodile understand a conversation that doesn't include a weapon?
그 악어가 과연 아무런 무력 없이 대화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And the whole world saw and heard but it didn't respond.
이를 전 세계가 지켜보았고 들었음에도, 어떠한 답도 없었다.
In those difficult moments many hard-to-describe ideas bubbled in my soul, but in the end they produced an intense feeling of rejection of tyranny, and gave birth to a strong resolve to punish the oppressors.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설명하기 힘든 수없이 많은 번뇌가 내 영혼을 채웠으나, 최후에는 이런 포학 행위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이 일어났고, 이런 압제자들을 처벌해야겠다는 단호한 각오가 탄생하였다.
And as I looked at those demolished towers in Lebanon, it entered my mind that we should punish the oppressor in kind and that we should destroy towers in America in order that they taste some of what we tasted and so that they be deterred from killing our women and children.
그리고 나는 레바논에서 부서져 버린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압제자들을 동일한 방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말해 우리가 "미국"의 건물들을 파괴함으로써 "미국"에 우리가 맛본 고통의 일부를 맛보여 주어야만 그들 또한 우리네 부녀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단념하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And that day, it was confirmed to me that oppression and the intentional killing of innocent women and children is a deliberate American policy.
그리고 그 날, 압제, 그리고 무고한 부녀자와 아이들에 대한 의도적인 살해야말로 미국이 지향하는 정책임이 입증되었다.
Destruction is freedom and democracy, while resistance is terrorism and intolerance.
파괴가 곧 자유이며 민주주의였고, 저항은 테러와 불관용이었다.
This means the oppressing and embargoing to death of millions as Bush Sr. did in Iraq in the greatest mass slaughter of children mankind has ever known, and it means the throwing of millions of pounds of bombs and explosives at millions of children - also in Iraq - as Bush Jr. did, in order to remove an old agent and replace him with a new puppet to assist in the pilfering of Iraq's oil and other outrages.
이는 이라크에서 아버지 부시가 저질렀던 인류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아동 학살과 같은 억압과 금수 조치를, 그리고 역시 이라크에서 아들 부시가 그러했듯 오래된 스파이[3]를 제거하고는 자신을 돕는 새로운 꼭두각시[4]를 세워 이라크의 기름을 좀도둑질하고 다른 포악한 짓들을 저지르기 위해 수백만 명의 아이들에게 수백만 파운드의 폭탄과 폭약을 던져버렸던 행위를 의미한다.
So with these images and their like as their background, the events of September 11th came as a reply to those great wrongs.
즉, 이러한 정황을 감안하면, 9월 11일에 벌어졌던 그 사건은 미국이 저지른 거대한 악행에 대한 응분의 보답이었을 뿐이다.
Should a man be blamed for defending his sanctuary?
과연 한 인간이 자신의 안식처를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Is defending oneself and punishing the aggressor in kind, objectionable terrorism?
자신을 지키고 압제자에게 동일하게 되돌려주는 것이 과연 객관적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할 테러리즘인가?
If it is such, then it is unavoidable for us.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것 외에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다.
This is the message which I sought to communicate to you in word and deed, repeatedly, for years before September 11th.
이것이야 말로 9·11 테러 수 년 전부터 말과 행동으로 당신들과 함께 소통하고자 했던 메시지이다.
And you can read this, if you wish, in my interview with Scott in Time Magazine in 1996, or with Peter Arnett on CNN in 1997, or my meeting with John Weiner in 1998.
당신이 원한다면, 이러한 것들을 1996년 타임 지의 스캇 기자와 했던 나의 인터뷰, 혹은 1997년 CNN의 피터 아넷 기자와의 인터뷰, 혹은 내가 1998년에 존 와이너와 가졌던 만남 등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You can observe it practically, if you wish, in Kenya and Tanzania and in Aden.
아울러, 당신이 원한다면, 보다 실질적으로 케냐와 탄자니아[5]와 아덴에서 벌어진 일[6]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And you can read it in my interview with Abdul Bari Atwan, as well as my interviews with Robert Fisk.
또한 내가 압둘 바리 아트완과 가졌던 인터뷰, 그리고 로버트 피스크와의 인터뷰에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The latter is one of your compatriots and co-religionists and I consider him to be neutral.
후자는 그대들의 동포이며 그대들과 같은 종교를 믿고 내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So are the pretenders of freedom at the White House and the channels controlled by them able to run an interview with him?
그럼 백악관에 있는 자유의 위선자들과 그들이 통제하는 방송국들이 내가 그와 가진 인터뷰를 방송할 의향이 있을까?
So that he may relay to the American people what he has understood from us to be the reasons for our fight against you?
그럼으로서 그가 우리가 그대들과 싸우는 목적을 이해한 것처럼 미국 국민들도 이해시킬 아량을 베풀어줄 수 있겠는가?
If you were to avoid these reasons, you will have taken the correct path that will lead America to the security that it was in before September 11th. This concerned the causes of the war.
만일 그대들이 이러한 이유를 회피한다면, 그대들은 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9월 11일 이전의 안보로 향하는 올바른 길로 가게 되리라.
As for its results, they have been, by the grace of Allah, positive and enormous, and have, by all standards, exceeded all expectations. This is due to many factors, chief among them, that we have found it difficult to deal with the Bush administration in light of the resemblance it bears to the regimes in our countries, half of which are ruled by the military and the other half which are ruled by the sons of kings and presidents.
그 결과, 그들(미국인)은 알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독단적이고 극악무도하였으며,[7] 여러 기준에서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는 여러 요인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은 반쯤은 군부가, 반쯤은 왕자들과 대통령이 다스리는 우리 (이슬람) 국가들의 여러 정권과 흡사한 부시 행정부가 우리에게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8]
Our experience with them is lengthy, and both types are replete with those who are characterized by pride, arrogance, greed and misappropriation of wealth. This resemblance began after the visits of Bush Sr. to the region.
이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꽤 오랜 것으로, 이 둘은 교만하고, 거만하며, 부를 남용하는 자들로 즐비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 부시 시니어가 이 지역들을 순방한 이후 나타난 공통점이다.
At a time when some of our compatriots were dazzled by America and hoping that these visits would have an effect on our countries, all of a sudden he was affected by those monarchies and military regimes, and became envious of their remaining decades in their positions, to embezzle the public wealth of the nation without supervision or accounting.
당시 우리의 동료들 중 몇명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갖고 그의 순방이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장기독재를 해오며 회계 감사도 없이 나라의 공공의 부를 횡령해온 우리의 왕정들과 군부들에 큰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수십 년은 남은 이들의 임기를 부러워했다.
So he took dictatorship and suppression of freedoms to his son and they named it the Patriot Act, under the pretense of fighting terrorism.
그리하여 그는 이 독재체제와 자유의 탄압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어,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다는 목적으로 '애국자 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In addition, Bush sanctioned the installing of sons as state governors, and didn't forget to import expertise in election fraud from the region's presidents to Florida to be made use of in moments of difficulty.
더 나아가 아들들을 주지사로 임명했고[9] 플로리다 대통령 선거부정을 이용하는 점도 잊지 않았다.
All that we have mentioned has made it easy for us to provoke and bait this administration. All that we have to do is to send two mujahidin to the furthest point east to raise a piece of cloth on which is written al-Qaida, in order to make the generals race there to cause America to suffer human, economic, and political losses without their achieving for it anything of note other than some benefits for their private companies.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것들 덕분에, 우리는 손쉽게 이 행정부를 도발하고 미끼로써 유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우리의 무자헤딘 두 명을 동부의 더 먼 지역으로 투입시켜 '알카에다'라고 쓴 천조각(깃발)을 게양함으로써 장성들이 그곳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과, 미국으로 하여금 인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손실을 겪게 하여, 미국인들의 사기업에 돌아가는 약간의 이익 외에는 미국이 특별히 가치 있는 것을 얻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This is in addition to our having experience in using guerrilla warfare and the war of attrition to fight tyrannical superpowers, as we, alongside the mujahidin, bled Russia for 10 years, until it went bankrupt and was forced to withdraw in defeat.
여기에는 우리가 러시아에게 적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10년이나 출혈을 일으켜 파산을 내고 물러가게 했던 게릴라전도 아울러 적용했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All Praise is due to Allah.
알라께 찬양을.[10]
So we are continuing this policy in bleeding America to the point of bankruptcy. Allah willing, and nothing is too great for Allah.
그러므로 우리는 알라께서 원하시는 대로 미국의 계속적인 출혈을 강요해 그들로 하여금 파산직전으로 몰아부칠때까지 계속 투쟁할 것이며 이는 알라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That being said, those who say that al-Qaida has won against the administration in the White House or that the administration has lost in this war have not been precise, because when one scrutinizes the results.
이는 바로 알카에다가 이 행정부를 상대로 승리하였다고 말하는 자들이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밝혀두기 위함이다.
One cannot say that al-Qaida is the sole factor in achieving those spectacular gains.
알카에다가 이 대결의 단독승자라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해주려는 까닭이다.
Rather, the policy of the White House that demands the opening of war fronts to keep busy their various corporations - whether they be working in the field of arms or oil or reconstruction - has helped al-Qaida to achieve these enormous results.
오히려 이것은 백악관으로 하여금 계속되는 전쟁을 강조해 그들의 이득원인 방위산업과 석유, 혹은 재건사업의 촉진시켜 알 카에다의 목적을 성취시키게 함에 있는 것이다.
And so it has appeared to some analysts and diplomats that the White House and us are playing as one team towards the economic goals of the United States, even if the intentions differ.
그리고 이는 일부 전문가들로 하여금 백악관과 우리가 미국의 경제를 위해 한 팀으로 일하는 것으로 보여지게 함도 있음이다. 물론 그 의도는 다를지라도.
And it was to these sorts of notions and their like that the British diplomat and others were referring in their lectures at 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그리고 이는 영국 외교관들과 다른 사람들이 왕립외교학회에서 지적한 것과 비슷한 개념의 것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When they pointed out that for example, al-Qaida spent $500,000 on the event, while America, in the incident and its aftermath, lost - according to the lowest estimate - more than $500 billion.
일례로 그들은 미국이 -최소 대략금액으로- 이 사태로 인해 5억 달러를 지출했을때 알 카에다가 지출한 금액은 50만 달러에 불과했다라는 지적을 했었다.
Meaning that every dollar of al-Qaida defeated a million dollars by the permission of Allah, besides the loss of a huge number of jobs.
이는 곧 엄청난 숫자의 일자리가 사라진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알 카에다는 알라의 허락 하에 1달러를 지출할 때마다 (적들에게) 백만 달러씩의 손실을 입혔다는 뜻이다.
As for the size of the economic deficit, it has reached record astronomical numbers estimated to total more than a trillion dollars.
아울러 이는 미국의 경제적 적자 규모를 봐도 1조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손실이 예상된다는 셈이다.
And even more dangerous and bitter for America is that the mujahidin recently forced Bush to resort to emergency funds to continue the fight in Afghanistan and Iraq, which is evidence of the success of the bleed-until-bankruptcy plan - with Allah's permission.
여기에 미국에게 더욱 쓰라리면서 위험한 것은 알라의 허락하심으로 이러한 무자헤딘이 부시로 하여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이중전선에의 긴급자금지원이란 대책까지 이끌어 냈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의 파산되기까지의 출혈이란 전략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음이다.
It is true that this shows that al-Qaida has gained, but on the other hand, it shows that the Bush administration has also gained, something of which anyone who looks at the size of the contracts acquired by the shady Bush administration-linked mega-corporations, like Halliburton and its kind, will be convinced. And it all shows that the real loser is… you.
이것은 알 카에다의 소득으로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부시 행정부의 소득이기도 한 것이다. 뒤가 구린 부시 행정부와 밀착한 할리버튼과 같은 대기업이 얻어든 대형 사업계약만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 소득에 납득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 전쟁의 진정한 패자는 다름 아닌 당신들(미국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It is the American people and their economy.
우리의 목표는 미국인들과 그들의 경제이다.
And for the record, we had agreed with the Commander-General Muhammad Ataa, Allah have mercy on him, that all the operations should be carried out within 20 minutes, before Bush and his administration notice.
공개적으로 언급하자면 우리는 행동책임자 무하마드 아타[11]와 부시와 그의 행정부가 눈치채기 전에 20분안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It never occurred to us that the commander-in-chief of the American armed forces would abandon 50,000 of his citizens in the twin towers to face those great horrors alone, the time when they most needed him.
우리에게는 적어도 미군의 군 통수권자가 그의 국민들이 그를 필요로 할때 있지 않았다는 사실 즉 쌍둥이 빌딩안의 5만명의 그의 시민들이 홀로 그 공포를 당해야 하는 실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But because it seemed to him that occupying himself by talking to the little girl about the goat and its butting was more important than occupying himself with the planes and their butting of the skyscrapers.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비행기들이 마천루들을 들이받는 것에 골몰해 있기보다는 어린 소녀와 함께 염소가 서로 들이받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리라.
We were given three times the period required to execute the operations.
우리에겐 이 작전을 세번씩이나 더 세밀하게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All praise is due to Allah.
알라께 찬양을.
And it's no secret to you that the thinkers and perceptive ones from among the Americans warned Bush before the war and told him: "All that you want for securing America and removing the weapons of mass destruction - assuming they exist - is available to you, and the nations of the world are with you in the inspections, and it is in the interest of America that it not be thrust into an unjustified war with an unknown outcome."
그리고 이것은 미국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일부 지각있는 사람들과 통찰력을 가진 인물들이 부시로 하여금: "당신이 미국을 지키고 다른 국가들과 함께 조사를 벌이고 있는 대량살상무기를 -그것들이 있다는 가정하에- 제거하고자 한다는 것이지만 불확실한 결과를 일으킬 정당성이 없는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라는 경고를 했었다는 것 역시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But the darkness of the black gold blurred his vision and insight, and he gave priority to private interests over the public interests of America.
그러나 그에게는 검은 금[12]의 어두움에 시야가 흐려지고 현안이 없어졌고,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을 공공의 이익에 우선했다.
So the war went ahead, the death toll rose, the American economy bled, and Bush became embroiled in the swamps of Iraq that threaten his future.
결국 전쟁은 진행되었고 사상자는 늘었으며, 미국의 경제는 출혈이 심화되고, 아울러 부시는 이라크라는 늪에 얽매여 그의 미래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He fits the saying "like the naughty she-goat who used her hoof to dig up a knife from under the earth".
과연 그에겐 "암염소가 굽 있는 발로 땅 밑에 묻힌 칼을 파낸다."라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다.
So I say to you, over 15,000 of our people have been killed and tens of thousands injured, while more than a thousand of you have been killed and more than 10,000 injured.
이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우리 인원 1만 5천명이 죽고 수만명이 부상할 동안 그대들은 수천이 죽고 1만명이 넘는 부상을 치뤘다.
And Bush's hands are stained with the blood of all those killed from both sides, all for the sake of oil and keeping their private companies in business.
이 모든 것이 석유와 그의 개인 기업의 상업 활동을 위하여 양쪽의 인명의 피를 그 손에 묻힌 부시에게 있다.
Be aware that it is the nation who punishes the weak man when he causes the killing of one of its citizens for money, while letting the powerful one get off, when he causes the killing of more than 1000 of its sons, also for money.
이 나라(미국)는 돈 때문에 자신들의 자녀들 수천명을 죽인 강한 자는 도주하게 하고 돈 때문에 자신의 시민들 몇을 죽이는 약자는 징벌하는 국가인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13]
And the same goes for your allies in Palestine.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그대의 동맹국들도 마찬가지이며.
They terrorize the women and children, and kill and capture the men as they lie sleeping with their families on the mattresses, that you may recall that for every action, there is a reaction.
그들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가족들과 함께 침대에서 잠든 남성들을 잡아가거나 죽이는 것을 일삼던 자들이며 이에는 응분의 보응이 따를 것 이다.
Finally, it behooves you to reflect on the last wills and testaments of the thousands who left you on the 11th as they gestured in despair. They are important testaments, which should be studied and researched.
끝으로, 그대들은 11일에 남겨져 절망에 허덕이는 남은이들의 증언과 유언에 대해 심사숙고 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Among the most important of what I read in them was some prose in their gestures before the collapse, where they say: "How mistaken we were to have allowed the White House to implement its aggressive foreign policies against the weak without supervision."
이것들 중 내가 중요하게 읽은 것들 중 하나는 빌딩이 무너지기 전 쓴 산문 가운데 "우리가 백악관으로 하여금 통제없이 약소국으로 하여금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세우게 한 것이 얼마나 오판이었는가."라고 쓴 것이었다.
It is as if they were telling you, the people of America: "Hold to account those who have caused us to be killed, and happy is he who learns from others' mistakes."
이는 그들이 당신들 미국 국민들에게 "우리를 죽게 한 자들에 대해 책임을, 그리고 상대의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여기는 이에게는 행복을."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And among that which I read in their gestures is a verse of poetry. "Injustice chases its people, and how unhealthy the bed of tyranny."
아울러 또 그들의 쓴 시 가운데 "불의는 그들의 백성을 추격하고, 폭정의 침상은 얼마나 불결한가?"란 것도 있었다.
As has been said: "An ounce of prevention is better than a pound of cure."
이는 "한 되의 대비가 한 말의 치료보다 낫다."라는 격언과 같다.
And know that: "It is better to return to the truth than persist in error." And that the wise man doesn't squander his security, wealth and children for the sake of the liar in the White House.
아울러 "잘못을 고집하는 것보다 진실로 회귀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과 현명한 자는 백악관의 공갈꾼을 위해 자신의 안전과 부와 자녀들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In conclusion, I tell you in truth, that your security is not in the hands of Kerry, nor Bush, nor al-Qaida. No.
결말로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는 사실은 그대들의 안전은 부시나 케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알 카에다에게 있는 것 또한 절대 아니다.
Your security is in your own hands.
그대들의 안전은 그대들의 손 안에 있다.
And every state that doesn't play with our security has automatically guaranteed its own security.
그리고 우리의 안전과 장난치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And Allah is our Guardian and Helper, while you have no Guardian or Helper. All peace be upon he who follows the Guidance.
아울러 그대들의 인도자와 협력자는 없을지라도 알라께서는 우리의 인도자요 협력자가 되시니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가 있을지라.




3.2. 첫 번째 충돌: 제1세계무역센터[편집]






나레이션[22]: 오전 8시 46분[23]이었습니다.

조지프 파이퍼[24] 서장[25]: 맨해튼 가에서는 듣기 힘든 비행기 소리가 들렸죠. 그것도 아주 크게요.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

주변 사람들: 이런 미친!

한 소방관[26]: 직감했죠. 소방관으로서 최악의 날이 되리라는 걸요.[27]

세계무역센터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순간의 영상. 이 영상은 마침 뉴욕시의 신참 소방관[28][29]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프랑스 출신 영화 제작자 쥘 노데(Jules Naudet)[30]가 찍은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되고 알려진 영상 중 1WTC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이 제대로 담긴 세계에서 유일한 영상이다.[31][32]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리면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쥘 노데가 카메라 앵글을 돌리다가 우연히 비행기에 피격당하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찍었던 것이다. 엄청난 불길과 폭발음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Holy Shit!" 같은 반응을 보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알 수 있다.

1WTC에 충돌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으로, 그 중 대장인 모하메드 아타 등 5명의 하이재커를 제외한 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비행 중이었다. 초유의 사태에 연방 항공국은 긴장했고 미국 공군은 사라져 버린 AA11편을 찾기 위해 전투기를 내보냈지만 전투기가 출격했을 때에는 이미 충돌한 지 한참 지난 후인 데다 첫 충돌 비행기가 AA11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불타고 있던 AA11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헛수고를 벌였다.

목격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고의적인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조종사의 조종 실수나 비행기의 오작동으로 충돌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장 언론들은 이 "사고"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람들에게 비상대피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충돌이 일어난 곳은 1WTC라는 것 때문에 2WTC에 있는 사람들의 피난을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2WTC에 있던 사람들은 밖에 불이 났나 생각하고 있었고 2WTC의 방송실에서는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는 방송을 했는데,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시는 첫 번째 충돌이 의도된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는 것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항공사고로 추정되고 있었고 2WTC에 또 비행기가 날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후 2WTC 건물까지 무너진다는 상황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또 사람들이 당황하며 밖으로 급하게 나가다간 위에서 떨어지는 잔해에 압사 등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었고, 무사히 나갔다 해도 옆 1WTC의 파편 등에 의해 다칠 확률도 높았다. 이런 부분들을 생각해 볼 때 그 때 2WTC의 방송이 결과적으로 피해를 키운 행위가 되긴 했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3.3. 두 번째 충돌: 제2세계무역센터[편집]




파일:wtc12.jpg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충돌하기 직전의 모습

승객 51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비행 중이던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의 교신이 끊어지고 불규칙하게 비행하고 있는 것이 뉴욕 관제소에서 포착되었다. 비행기는 항로를 벗어나 뉴욕 상공으로 들어왔고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이 남쪽 타워에 충돌하는 장면



CNN 생방송 보도 중 충돌하는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결국 1WTC가 불타는 모습이 언론사들을 통해 전세계에 거의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중인 9시 3분(한국시각 오후 10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비행기 테러가 일어났다. 각 언론사들이 1WTC가 불타고 있는 모습을 중계하던 중 또 다른 비행기가 2WTC에 충돌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해야 할 뉴스들의 아나운서들조차 중계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참상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최대한 자제해서 내뱉은 비속어를 쓰는 등 경악했다. 위 영상의 CNN의 경우 카메라맨은 항공기 소음이 커지던 시점부터 크게 동요해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아나운서와 취재진은 10초 가량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발표 등을 중계하는 게 아닌 이상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10초씩이나 말이 끊기면 방송 사고인데, 이 전대미문의 상황은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을 만큼 모두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는 9·11 테러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1WTC 충돌 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한 번 더 2WTC에 충돌하여 미국 전역의 사람들에게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정말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례이다. 알 카에다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뉴욕을, 그것도 두 번의 공격이 가능하고 충격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인 쌍둥이 빌딩을 선택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첫 번째야 사고로 추정하고 있었지만, 바로 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것도 바로 옆 건물에서 벌어지면 누가 봐도 사고가 아닌 고의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첫 번째 충돌이 발생한 상태에서 바로 옆 빌딩에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으니 사람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Fox News TV 중계 앵커가 "This seems to be on purpose(이건 아무래도 의도적인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할 정도로 무언가 평범한 사고가 아닌 고의적인 사고, 즉 테러라고 사람들은 하나 둘 눈치챘지만[33]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34] 한국의 경우 1차 테러 이후 한국 시간인 2001년 9월 11일 밤 10시경 부터 CNN을 동시통역으로 중계하며 방송 3사가 긴급 속보를 시작했고, 하이텔 PC통신 등을 통해 대화방에서 몇몇 이용자가 자신의 사설 서버에 올린 CNN과 MBC 녹화 영상을 공유하는 형식으로 전파되어 갔다. 다음날인 9월 12일부터 방송 3사에서 하루종일 속보방송을 편성하여 내보냈고, 당연히 속보를 보던 국민들은 패닉에 빠졌다.2001년 9월 11일 MBC 특집 뉴스데스크 모음

당시 미국 현지 방송 자료와 뉴욕에 있었던 사람들이 찍은 영상을 보면 두 항공기의 충돌과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까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당시 뉴스 생중계를 보면 사고 그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무역센터 인근 고등학교에서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든가 주변 건물이나 차에서 폭탄이 폭발했다거나[35], 워싱턴 몰에 불이 난다거나 하는 등 온갖 소문으로 인해 방송사부터 뉴욕시 경찰, 구조대원까지 모두가 대혼란에 빠진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 최강의 초강대국이라 자부하던 미국의 심장 뉴욕이 무방비로 테러에 노출되었다는 것이 모두에게 각인되었고, 항공기를 테러에 2대 이상씩이나 동원할 수 있을 만큼 적은 치밀하고 대담하며, 거기에 그 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은 수많은 미국인들을 대혼란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항공기 테러가 가능할 정도의 집단이라면, 폭탄을 설치하는 테러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인데다 정확히 공격의 규모와 목표도, 그리고 공격 대상과 공격 주체가 누군지 아무것도 정보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야 조사가 이루어지며 알 카에다의 공격이란 것을 알았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초기 상황에선 연쇄 폭탄 테러나 추가적인 테러 공격이 가해질 수 있단 가능성은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특히 CNN에서는 세계무역센터 바로 아래에서 터진 폭탄이 북쪽 타워가 무너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도해 이후 음모론의 중요한 떡밥으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WTC 충돌부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등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는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가 대피를 해도 괜찮다는 등 오락가락한 정보를 내보냈기 때문이다.[36]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민들[37]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열기와 유독가스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고층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했다. 희생자들은 내부에서 유독가스로 질식사하거나 고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이다.[38] 오전 9시 30분경엔 추락하는 투신자에 직격으로 맞은 소방관이 사망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렇게 추락사로 사망한 사람의 수만 200명이 넘으며, 추락사한 사망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얼마 후 건물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대개 신원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광경은 비행기 충돌 후 계속 돌아가던 뉴스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미국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안타깝게도 불타는 잔해물들이 아래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불가항력이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물 밑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소방대원들은 억울하고도 애처로운 분노를 곱씹었을 뿐이며,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은 그저 하염없이 절망만 할 뿐이었다. 옥상으로 헬기를 보낼 수 없었냐고도 하지만 화재현장, 특히 초고층 건물 화재에 헬기를 동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화재현장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기류를 헬기가 그대로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헬기마저 건물에 충돌하거나 열기에 의해 공중에서 폭발해버릴 위험이 매우 크다. 이런 까닭에 당시 사건 현장에 투입된 헬기들은 구조작업은 엄두도 못내고 건물 곁을 빙빙 돌면서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빌딩 상층부에 갇힌 희생자들도 헬기 생각을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제어 시스템에 의해 굳게 닫힌 옥상은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에게 피격당한 2WTC에 9시 37분 뉴욕 경찰 항공대의 헬리콥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무역센터의 옥상으로 착륙과 강하(레펠)를 시도했으나, 화재의 열기 때문에 엔진 온도가 급상승해 실패했다. 급기야 9시 41분에는 뉴욕 경찰국이 "헬기 구조 작업을 포기하라"고 지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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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39]




같은 시각 플로리다 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동화책을 읽어 주던 수업에 참관 중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40]은 앤드루 키드 비서실장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에도 아이들에게 계속 책을 읽어주다가 약 7분이 지난 후에야 교실을 떠났다.[41][42]

이후 조사위원회로부터 "왜 7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냐"는 지적을 받자 부시는 "학생들과 이후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간을 약간 지체했다."고 해명했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 상황에서 바로 격앙된 반응을 내서 학생들이나 이를 지켜보던 취재진 등을 당황하게 할 수 없어서 태연한 척했다고 말했다.[43] 사건 당시 백악관 측에서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즉시 교실을 떠났다"고 과장해서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 다만 소식을 듣자마자 태연한 척을 하다가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지고, 수업 참관에 집중하지 못한 채 여러 생각에 잠긴 부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직후 부시 대통령은 학교 체육관에서 9·11 테러에 관한 첫 번째 긴급 대국민 담화를 가졌다. # 이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대국민 연설로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연설들 중 9월 11일 밤 10시에 한 연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



9·11 대국민 연설

1WTC 충돌 이전부터 발생한 심상찮은 징후에 긴장하던 연방 항공국은 사안의 심각성에 크게 경악해 본격적으로 미 공군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담당 인력이 매우 부족한 마당에 휴가까지 간 인원들도 있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미국 공군도 여러 제보와 항공국이 제공한 정보 등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나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진 데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정보들이 아닌 헛소문들이 많아서 사태 파악이 늦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상정 외의 상황이어서 공군도 처음 겪는 일이었고 하필 테러 몇 시간 전에 있던 훈련까지 겹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투기를 다시 띄우는 것도 상당히 지체되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미 공군과 연방 항공국을 비롯한 수많은 관제 요원들은 불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미국 상공에 있는 수만 대의 비행기들 중 납치된 항공기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3.4. 세 번째 충돌: 펜타곤[편집]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신이 안 되는 비행기들도 있었으며 항공국은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을 금지함과 동시에 고층 건물이나 대도시 인근을 지나는 비행기들을 감시해야 했다. 미국 공군은 만일을 대비해 전투기의 추가 출격을 준비하였고, 여객기 격추 명령을 허가받으려 했으나 절차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로 인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동부 지역이 사실상 비행기 테러 공격에 무방비인 상황이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곧바로 백악관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워싱턴 D.C.뉴욕 일대의 모든 주요 시설과 공공기관 건물에 대피 명령을 내렸고 추가적인 납치 비행기 수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메리칸 항공 77편의 교신이 끊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지만, 항공기의 진로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44] 결국 항공기는 미국 국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펜타곤에 오전 9시 37분 46초[45]경 서쪽 편에 충돌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정신이 나가 있던 미국 정부의 지휘 체계는 이로 인해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져 수습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 전까지 단순 비행기 사고로 생각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부터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첫 번째 충돌과 두 번째 충돌로 인해 혼란한 와중에 연방 정부 건물, 그것도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까지 여객기가 충돌하니 누가 뭐라고 해도 고의적인 테러인 것을 확신했다.



펜타곤 충돌 재현 영상[46]

펜타곤 서쪽 편[47]
5층: 피해 없음. 전원 생존.
4층: 피해 없음. 전원 생존.
3층: 항공기 파편 피격. 2명 사망.
2층: 항공기 본체 피격. 31명 사망.
1층: 항공기 본체 피격. 92명 사망.

앞선 두 테러 때는 범인들이 최대한 건물에 피해를 주기 위해 항공기의 뱅크각을 25~40도 정도 꺾은 반면 저층 건물인 펜타곤에서는 기수를 꺾지 않았다.

결국 미국 연방항공청 국장으로 항공국에서 가장 권한이 높았던 벤 슬라이니[48]가 자신의 권한으로[49] 미국의 모든 영공의 폐쇄를 지시[50]하여 국내선 항공기는 무조건 착륙, 국제선 비행기는 북미권에 들어왔다면 캐나다나 알래스카에, 북미 밖이라면 출발지나 제일 가까운 국가의 공항으로 회항해야만 했다.


3.5. UA93편의 추락[편집]






플라이트 93에서 묘사된 UA93편의 마지막 순간

UA93편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되어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저항으로 오전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하였다. 이 비행기의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나 정황상 워싱턴 D.C.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임은 분명했다.[51]

93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52]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UA93편의 승객들은 미국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이 제작되었다.


3.6. 세계무역센터 붕괴[편집]



두 번의 충돌 이후 충돌에 의한 구조적 손상과 화재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오전 9시 59분경 제2세계무역센터가 완전히 붕괴하였다. 뒤이어 10시 28분경 제1세계무역센터 역시 붕괴하였다.


3.7. 테러 직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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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더 뉴요커[53]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호외를 찍어냈다. 헤드라인은 "AMERICA UNDER ATTACK". 일부는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고 칭했다.# 테러라고는 하나 미국 건국 이래 최초로 '미국 본토'가 외부 세력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사건이었다. 미국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 미 본토 전역의 경찰과 공공기관, 주방위군에 비상이 걸렸으며 대부분의 학교가 일제히 임시휴교를 선언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테러 당시 미국의 영공 상황
역사상 첫 SCATANA가 FAA로부터 발령되자(0:52) 순식간에 비행기들이 사라진다.

사건 직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전체 영공이 봉쇄되었다. 이는 SCATANA(항공교통업무 우발계획)라는 통제 조치로, 미 본토가 적국에게 침공받거나 공습당하는 등의 응급상황을 대비하여 미 영공상의 모든 비행기를 강제로 착륙시키고 Navaid 비콘도 전부 꺼 버리는 조치이다. 이는 1960년대에 처음 제정되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사례는 9·11 테러 당시가 유일하다. 이 조치가 발동됨으로서 영공에 떠 있던 약 4,200대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비행기들에 강제 착륙 지시가 내려졌으며,[54] 모든 비행기의 이륙이 금지되었고 미국으로 접근 중이던 모든 민항기들도 회항시켰다.[55][56] 뉴욕항도 봉쇄되었고 모든 화물선들이 정박하거나 회항한 후 미합중국 해군 항모전단이 입항했다. 뉴욕과 워싱턴 D.C.는 패닉에 빠진 인근 시민들이 차량이나 도보로 도시를 빠져나가며 유령도시가 됐다. KBS

상술한대로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에 나가 있었지만 당시 백악관에는 딕 체니 부통령이 있었고, 상황을 알아차리자 곧바로 지하 벙커로 피신했다. 부시는 지상 테러를 우려해 플로리다 학교 일정을 전격 취소하고 에어 포스 원에 올라탔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전투기의 호위 없이 버텨야 했다.[57] 부시는 당장 워싱턴 D.C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58] 체니와 경호팀, 그리고 보좌진이 모두 뜯어말렸다. 게다가 '다음 타겟은 에인절(에어 포스 원의 암호명)이다'라는 첩보가 들어와서 에어 포스 원의 조종사 마크 틸먼이 조종실 입구에 보안 장교를 배치해서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비행기 안에 있는 모든 무기를 압수하고, 경호 요원들을 대통령실 주변에 집중 배치하고 최측근들도 허가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각종 규정들을 지켜야 했지만 전부 다 무시된 상황이었다고 한다. 에어 포스 원에 탑승한 사람이면 대통령의 최측근이거나 신원이 입증된 언론인들인데도 확인되지 않은 첩보를 듣고 이렇게까지 했을 정도로 당시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심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도 대통령 주치의는 탑승자들에게 탄저병 예방약을 나눠줬다고 한다.

결국 루이지애나의 박스데일(Barksdale) 공군기지에 착륙[59]했다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직후 다시 에어포스 원을 타고 좀 더 나은 설비가 갖춰져 있는 네브라스카주의 오펏(Offut) 공군기지로 이동했다.[60] 여기에서 부시는 처음으로 제대로 정부 관료들과 화상 회의를 할 수 있었다. 이미 이때쯤에는 탑승객 명단 분석을 통해 알카에다의 소행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상태였고, 부시는 이 회의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착수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CIA 국장이 여기서 그 날의 공격은 끝난 것 같다고 말했고, 저녁에야 부시 대통령은 DC로 복귀하여 오벌 오피스에서 다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3.7.1. 미국 정부의 마비[편집]


이 테러는 또 다른 부분으로 미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테러의 충격으로 뉴욕은 대혼란에 빠졌고, 국무부에서도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 테러가 감행되었다느니 국회의사당 및 연방대법원 건물에서도 폭탄이 터졌다느니 등의 유언비어들이 항공기 충돌을 전후로 대대적으로 퍼지면서 미국의 주요 정부기관이 일제히 마비되었다. 미국 상하원 양당 지도부는 테러 직후 급히 전용 방탄차량을 타고 엄중한 호위와 함께 교외의 핵전쟁 대비 시설로 이동했다. 뉴욕항에 항모 2척이 입항했으며 준계엄령과 동시에 모든 항공기들은 착륙해 통제를 받아야 했다.

상황이 원체 혼란스러웠던 데다가 당시 에어 포스 원에는 위성 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대통령과 보좌진은 큰 도시 위를 지나갈 때나 가끔 잡히는 영상을 보고서야 상황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백악관 벙커로 피신한 부통령과 정부 수뇌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냉전 시대 이후 제대로 설비 개량을 거치지 않은 벙커의 시스템이 낙후[61]되어 있던 탓에 영상이 나오면 소리가 안 나오고 소리가 나오면 영상이 안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산소가 부족해서 벙커에 있는 사람들이 졸음에 빠지는 일까지 발생했다고.[62] 통신장비에도 문제가 있어서 에어 포스 원과 백악관 벙커 간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공중에서 납치한 민항기를 건물에 들이받아 자폭 테러를 한다는 발상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기상천외한 작전이지만 9·11 테러 발생 불과 6개월 전에 FOX 채널에서 방영한 《엑스파일》의 스핀오프 시리즈 《론 건맨》 1시즌 1화에 미 정부가 민항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에 충돌시키려 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한편으로 톰 클랜시의 9·11 이전에 집필된 《적과 동지》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일본인 기장이 여객기를 몰고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 중인 미국 국회의사당에 돌진해서 미 정부 요인 중 반수 이상이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63][64] 이 때문에 톰 클랜시는 9·11 직후 한층 더 유명해졌고, 실제로 CNN는 사건 초기 방송에서 톰 클랜시와의 생방송 중 인터뷰를 하루에도 수차례 했다. 사건 당일 방송 그리고 펜타곤은 할리우드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들을 불러 모아 '가능한 모든 미 본토 침공 시나리오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공중 납치는 아니지만, 비행기를 납치해 자폭 테러를 한 시도는 이미 예전에도 있었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도 다룬 사건으로 알제리에서 반정부 테러리스트들이 공항에서 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파리에 날아가 에펠탑에 자폭테러를 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연료가 부족해 마르세이유에 중간기착을 했을 때 프랑스 국가 헌병대 특수부대 GIGN를 투입시켜 막아냈다. 생존자들 중에는 9·11 테러를 보고 '만약 저들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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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PD는 근처 버거킹 점포를 임시 본부로 사용했다.[65][66]

한편 재난 대책 업무를 맡은 뉴욕 경찰국뉴욕 소방국에서는 일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라는 희대의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에 더해서 당시 경찰과 소방, 기타 행정부서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이후 경찰과 소방 인원들을 통합 지휘하는 기관인 커맨드 센터는 제대로 설치되어 있어 제 역할을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기관이 세계무역센터의 로비에 있었다. 붕괴 직전까지 역할을 다했으나 결국 붕괴 직전 인원들이 급히 철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 것.


4. 왜 막지 못했는가[편집]


위에서도 계속 언급되었지만 당시 미국의 항공 보안은 지금과는 달리 구멍투성이였는데, 탑승객의 신원 파악조차 제대로 안 한 건 물론 조종실 문도 잠그지 않았고[67] 심지어 무기로 사용될 여지가 있는 소지품까지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68]

테러와의 전쟁과 9·11 테러의 전조를 감지한 정보기관들은 90년대부터 테러를 큰 위협으로 여겨 우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비롯해 연이은 대사관 테러와 USS 콜 테러사건 등으로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알카에다와의 전쟁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정보기관 일선의 판단과 우려에 비해 미국은 소련 붕괴 후 찾아온 90년대의 대호황에 국가도 아닌 일개 테러조직 따위가 초강대국 미국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 클린턴 행정부 전반기는 셧다운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중동의 테러조직 따위에는 관심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이후 행정부가 뒤늦게나마 관심을 두려 할 시기에 이번엔 유고슬라비아에서 코소보 전쟁이 터져서 모든 관심은 발칸 반도로 집중되면서 또다시 테러 얘기는 아오안.

  • 그러다가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등 테러에 대한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자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 번이나 암살 작전이 취소되었다.

  •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제법 위반 등의 이유로 두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미리 화근을 제거할 기회를 놓쳤다는 정황들이 발견되면서 클린턴 정권에도 9·11 테러의 책임이 일정 정도 존재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 당시 미국의 항공보안은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당시도 미국의 항공교통수단은 대한민국의 기차 같은 개념으로 조종석이 달랑 커튼 한장으로 객실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고, 탑승구도 티켓 미소지자도 버젓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스위스 나이프 같은 자그마한 칼은 문제없이 기내에 들고 갈 수 있었다. 실제로 9.11 테러의 납치 범인들도 스위스 나이프 같은 작은 칼로 범행을 저질렀다.

미국의 항공보안에 이러한 심각한 허점들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 개선을 요구하는 의회, 정부 보고서가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여러 차례 올라왔으나 무시되었다. 이러한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조사위에서는 CIAFBI를 비롯한 정보당국이 항공국에 위험인물의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권고했으나, 정보 당국은 이를 무시했다.

  • CIA와 FBI를 비롯한 정보당국끼리도 정보 공유를 꺼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으로 밀입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FBI가 정보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CIA는 정보 제공에 비협조적이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69] 결국 테러리스트들을 찾는 수사관은 단 1명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났고, 이 문제점은 테러가 일어날 때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CIA는 테러 발생 후 자신들이 경고했으나 정부가 무시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만 하다가 실속은 없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문 스캔들이다.

  • 부시 행정부의 안보 담당들도 취임한지 1년도 안 되었다 보니 알카에다의 존재와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알카에다의 위험도가 고조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아랍 쪽 첩보 담당자들을 제외하면 미국 수뇌부들 중 그 누구도 알카에다의 위험성과 존재를 알지 못했다. 클린턴 정권의 안보 담당자들이 업무를 인계하면서 '알카에다를 경계하라'고 이야기하자 부시의 안보 담당자들이 "알카에다가 도대체 뭐요?"라고 되물어볼 정도였다. 게다가 2001년 4월, 미 EP-3E 정찰기가 중국 공군 J-8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 섬에 불시착한 이른바 하이난 섬 충돌사고로 중국과의 사이가 냉각되면서 알카에다 따위에게는 전혀 신경을 쓸 여건이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

  • FBI가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로 건물에 테러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2001년 8월에 보고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테러리스트들이 거의 모든 준비를 마쳤을 시기였다.


  • 민간항공과 공군이 사용하는 용어도 달라 테러 초기에 정보전달이 잘 되지 않아 혼동이 발생해 이미 추락한 비행기를 찾는 등의 혼선이 벌어졌다. 게다가 미국 공군에서는 적국의 침공만 상정하고 있던 상태라 제대로 된 초기대응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내륙에서 날아와 공격을 가했는데도 공군의 전투기들은 엉뚱하게도 대서양 방향으로 출격했다. 오로지 미 공군의 강력한 제공권 장악력만 믿고 있던 당시 미국의 방공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방공부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아무리 방공무기가 강력하다 해도 납치된 자국민이 타고 있는 자국의 민항기를 자국 공군이 격추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5. 세계의 반응과 여파[편집]





6. 이후[편집]


뉴욕의 주간지 <더 뉴요커>의 9·11 추모 표지[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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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1주기
(2002년 9월 16일 호)
테러 10주기
(2011년 9월 12일 호)
테러 20주기
(2021년 9월 13일 호)
9·11 테러 당시 미국은 냉전도 끝나서 딱히 외부의 위협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대외정책에 대한 명분과 필요성, 그리고 예산의 부족으로 슬슬 해외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려고 했지만 테러 이후 약 10여 년간 분위기가 반전되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을 치르는 등 개입정책에 나섰다가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개입이 줄어든 상태다. 물론 9·11에 가담한 알카에다 인사들은 모조리 죽거나 체포되어 끝없는 재판 중에 있고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사담 후세인이라크 정부는 단박에 깨강정이 나서 흔적만 남아 있게 되었으며 미국을 방해한 탈레반 역시 죽기 직전까지 맞고 명줄만 겨우 붙어 있다가 10년이 다 돼서야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테러 단체의 수괴인 오사마 빈 라덴은 안구와 심장을 비롯한 부위에 벌집이 되도록 돌격소총에 맞아 죽은 후 데브그루 대원들의 사격 내기용 표적으로 두개골이 두쪽 나는 수모를 겪었으며, 그 시체는 망망대해에 던져졌고 개인 컴퓨터에 담아 놓은 불법 다운로드한 미제 영화와 온갖 야동, 야애니들까지 일일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최악의 모욕을 당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 역시 드론의 미사일로 산산조각 나는 최후를 맞았다. 그나마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처럼 너무 일찍 잡혀왔거나, 가담의 정도가 덜하거나 철저한 협조를 통해 선처를 구한 자들만 관타나모 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후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겨우 목숨만 붙어 있게 되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71]라고 불리고 있으며, 건물 붕괴 후에 쌍둥이 빌딩의 철골 구조물 중 일부가 십자가 형태로 남아 있어 '굴하지 않는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재 여기에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조성되었고 세계무역센터가 새로 지어졌다. 현장 옆의 빌딩에는 소방관 추모비도 걸려있다.

2011년에 Park51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슬림 센터가 근처에 생겼다. 이 사실이 그라운드 제로 주변에 모스크(이슬람교 성원)를 건립한다는 가짜 뉴스로 와전되며 미국인들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무너진 건물 주변에 이슬람 성원을 건립한다는 건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라는 반대 의견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찬성 의견이 대립했다. 버락 오바마는 지지를 천명했다. 이 때문에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본인의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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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있는 Pool 근방에는 Tribute in light라는 서치라이트 설비가 설치되어 해마다 9월 11일이 되면 위와 같은 조명을 밝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같은 항공기 시뮬레이션들은 과거에는 표기되었던 장소[73]들이 사라진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이후 조금씩 상황이 진정되며 도시전경 같은 경우 전문적으로 도시전경이나 공항 시너리를 제작하는 업체들이 판매하고 있고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에 와서야 Bing 지도 기반으로 고층건물 풍경이 구현되기 시작했다.

사건 당시 CNN을 비롯한 주요 보도 채널에서 순간마다 쏟아지는 관련 보도들을 소화하기 위해 뉴스 내용을 실시간 자막 스크롤 형식으로 내보내야 했다. 이후 세계의 여러 보도 채널들이 자막 뉴스 보도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건축 쪽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건 이후 미국에서 건물에 관한 규제가 강화되어서 설계를 할 때에는 그 건물이 테러에도 견딜 수 있는지 고려를 해야 된다고 한다.

테러 2개월 후 또 다시 뉴욕, 그것도 시가지인 퀸즈에서 항공기 사고가 일어났다. 다만 이쪽은 테러가 아닌 단순 추락사고였다. 하지만 테러의 여파로 미국은 다시 준계엄령을 선언하고 뉴욕의 교통이 통제되기도 했다.

또한 서방권에서 이슬람의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지는 데 기여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전만 해도 이슬람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처럼 그저 아시아 쪽의 신비주의적인 종교 정도로만 여겨졌으며 딱히 미치광이 극단주의 사상이라는 인식은 적었다. 오히려 20세기 냉전 시기에는 미국이 대놓고 공산주의 막겠다고 반공 성향의 이슬람주의자들하고 대놓고 협력을 하기도 했다. 놈 촘스키는 이것이 이슬람 극단주의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면서 비난했다.

2009년 4월 27일, 미국 국방부에어 포스 원 홍보물 촬영을 위해 뉴욕에 F-16과 함께 저공비행을 하고 갔는데 이걸 보고 시민들이 9·11 테러의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고[74] 심지어 주가까지 0.7% 급락했다. 이러한 소동이 일어난 데는 국방부로부터 비행통보를 받은 뉴욕 이벤트 담당자가 본인만 통보를 받고 어디에도 전달을 안 하고 국방부는 더 상급기관인 백악관에 보고도 안 한 채 비행을 했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노발대발했고 당시 뉴욕 시장이던 마이클 블룸버그 역시 긴급 기자회견에서 국방부에 대놓고 쌍욕을 했다. 이 사건은 영어 위키백과에 아예 별도의 문서가 생성되어 있다.# 그만큼 미국인들에게는 9·11 테러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미국정부는 남아있는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차고 넘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형을 확정하는 것은 물론 재판조차 열지 못하고 있는데, 용의자 체포부터 심문까지가 전부 불법으로 자행되었기 때문 용의자를 비행기로 납치한 뒤,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해 얻은 증거라서 이것을 증거로 사용하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법불신을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판례법주의인 미국의 판례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진노를 일으킨 이들을 사법거래하기에는 자존심이 용서를 하지 못해서 어떻게 손을 못 해고 있는 상태로, 20여년간 재판장만 8번 바뀔 정도로 답이 없다.


6.1. 끝나지 않은 피해[편집]


9·11 테러 이후 20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천 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에 시달리고 있다. TV로 비행기가 충돌하여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생방송되었으니 이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이로 인해 보안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 게다가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시민들이나 수습을 위해 현장에 다가간 각종 구조대원들은 다량의 유해 가스와 먼지를 마신 후유증에 아직까지 시달리고 있다.[75] 9·11 테러 당일 사망자보다 각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사건 발생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 현장의 시민들이나 정부기관 관계자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가고 있고 이로 인한 순직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소방 및 구조, FBI 및 뉴욕경찰 등 관련자들의 순직 기록을 보면 9·11 테러 당시 구조 작전 수행으로 인한 순직으로 기록된 사망이 현재도 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이에 의해 158가지 이 발병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56가지에 불과하며, 치매,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자살 등 수많은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부에서 보험 처리도 잘 안 해 주기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인터뷰(연령 제한 주의)

9·11 테러 이후 1년간 미국의 무슬림 400명 이상이 애꿎게 보복성 증오범죄를 당했고 그 뒤로도 매년 100명 가량이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 이슬람이랑 아무 관련 없는 시크교도들까지 터번을 쓴다며[76] 공격당했다. 조지 부시는 이로 인해 악화될 무슬림계 미국인들의 여론을 달래기 위해서 9·11 테러 직후인 9월 17일 워싱턴 D.C의 모스크를 방문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무슬림계 미국인들 역시 소중한 미국의 국민이다.'라고 연설하였다.

피해자가 워낙 많다 보니 무슬림의 피해 사례도 있는데, 특히 미 의회에서도 언급된 사례로 파키스탄계 미국 귀화인으로 뉴욕 경찰 견습생이 된 이슬람 신도 모하메드 함다니의 사례도 있다. 초기에는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이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의료가방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어 영웅으로 명예 회복되었다. #

9·11 테러가 발생한지 22년이 지난 2023년에도 아직도 유해 신원 확인이 진행중이다. 2023년 9월에는 사망한 1천648번째, 1천469번째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차세대 DNA 염기 서열 분석등 법의학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희생자의 40%인 약 1,100명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6.2. 후속 테러[편집]


9·11 테러의 재현, 모방을 노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77]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서 많은 테러 시도가 저지되었지만, 일부는 실제로 실행에 옮겨졌다. 굵직한 것만 해도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테러 참사,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2015년 튀니지 수스 테러,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등이다.

이들의 주 목적은 테러를 통해 사회를 이슬람과 반-이슬람으로 갈라 놓고 세속주의 이슬람을 반-이슬람 세계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흑백논리로 몰아세워 궁극적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 중심의 세계로 재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잠시나마 실현된 것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리는 교리대로 어겨가면서 같은 무슬림들도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ISIL의 모순이 밝혀지고, 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토벌 작전 등을 거치면서 이슬람 세계주의는 그 위세가 크게 줄었고 탈레반조차 2021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재수립한 이후에는 외세는 간섭 말라는 식의 지역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현재 탈레반은 자신들이 테러 단체라는 것조차 부정하며, 오히려 호라산 이슬람 국가 토벌에 협조하겠다고 세계에 손을 내밀기고 있기도 있다.

미국 다음으로 테러 피해가 가장 컸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가장 강하게 내린 조치도 무슬림 공동체를 정보 당국에서 더 철저히 감시해서 테러분자들을 사전에 색출해내는 것과[78] 테러를 선동하는 자들은 법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사회와 격리시키는 정도다.


6.3. 2014년 후유증 사기 적발[편집]


CBS의 9·11 후유증 사기 적발 보도 영상

뉴욕타임스 기사, 연합뉴스 기사, 쿠키뉴스 기사, 헤럴드경제 기사, SBS 기사, MBC 기사, KBS 기사, YTN 기사

2014년 미국의 전직 뉴욕시 경찰관과 뉴욕시 소방관 등이 9·11 테러 수습과정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4억달러(당시 기준 약 4300억원)라는 거액의 장애연금을 챙겼는데 이 후유증이 허위로 드러나 106명의 관련자가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 최대의 연금 관련 사기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의 주범에는 변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변호사 레이먼드 래벌리(Raymond Lavallee, 적발 당시 연령 83세), 토머스 헤일(Thomas Hale, 적발 당시 연령 89세), 전직 뉴욕 경찰관인 조셉 에스포지토(Joseph Esposito, 적발 당시 연령 64세), 존 미네르바(John Minerva, 적발 당시 연령 61세)가 주범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미국 당국이 당시 급증한 사회보장보험 관련 사기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여기에서 적발된 전직 경찰관과 소방관은 헬리콥터 비행을 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블랙잭 게임도 즐겼으며 오토바이와 제트스키를 타고 무술 도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음악에 맞춰 춤추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이도 있었으며, 외출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며 연금을 타낸 전직 뉴욕 경찰관이 낚시여행에서 잡은 대형 물고기를 안고 배 위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이 적발된 것이다.


7. 음모론[편집]



일반적으로 음모론은 자잘한 사례를 통해서 실체가 불분명한 거대한 음모가 존재한다는 식이라 그다지 대중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반면, 9·11 사건은 역으로 정황 자체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 정황을 입증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사실로 받아들였다.[79]

음모론은 크게 2가지인데, '부시 행정부의 자작극' 설과 '자작극은 아니나 미리 테러 정보를 입수하고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방관했다'는 설이다.

당시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사건 자체가 워낙 세계사적인 대사건이었고 전세계에 극적으로 생중계되었던 점.
    • 일종의 인지부조화 현상으로 항공기가 충돌하고 거대한 건물이 불에 타 쓰러지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목격했던 이들이 이 충격적인 장면이 사실이라는 것을 수용하기 어려워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부시와 미국 보수 매파의 불리했던 정치적 입지가 극적으로 반전된 점.
    • 음모론이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당시는 부시 대통령의 임기 첫해였고(01년 1월부터 임기 시작) 중간선거 또한 02년도에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굳이 정치적으로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았다. 설령 음모론으로 본다 해도 그 어떤 정치인이건 하이재킹으로 민항기를 자국 빌딩에 자폭시킬만큼 무모하진 않다. 물론 미국 정부가 갱단이나 마약 밀수업체, 반군한테 무기나 자금을 지원한 사례는 많다. 이란-콘트라 사건이 대표적.
  • 통킹만 사건 같이 미국이 실제로 여론 전환을 위해 조작한 사건이 정보 공개를 통해 대중에 많이 알려진 점.
  • 부시 일가가 오사마 빈 라덴 일가와 친분이 있었던 점.
    • 빈 라덴의 집안은 “사우디 빈 라덴 그룹”을 소유한 소위 재벌가였고, 부시 일가와는 CIA 국장, 부통령, 대통령을 역임한 아버지 부시 시절부터 친분을 맺어오고 있었다. 특히 아들 부시의 석유관련 사업에 큰 돈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테러리스트로 전직한 빈 라덴과는 오래 전부터 절연한 상태였다. 오사마 한 명 때문에 온 가문이 영문 이름을 Laden에서 Ladin으로 개명했다.
  • 오사마 빈 라덴과 CIA와 연관이 있었다는 점.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아프간의 무자헤딘 반군을 CIA가 지원했는데, 오사마 빈 라덴도 그러한 지원을 받은 인물 중 하나이다. 즉 “빈 라덴은 CIA의 훈련을 받았다”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팩트이다. 물론 당시는 소련이 멀쩡히 살아 있던 냉전 시절이었고 빈라덴은 반미 테러리스트가 되기 전이기는 했다.
  • 항공기에 탄 희생자들의 명단이 없는 점.
  • 부시가 군수 및 석유업체의 지지를 받았던 점.
    • 9·11 테러로 인해 강행할 수 있었던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러한 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이런 음모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설마 부시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한두명도 아닌 저렇게 많은 자국민들을 희생시키겠느냐 정도 수준이었고 당시 미 정보부가 사건 이후 보안을 위해 제한된 정보만 공개했던 점[80], 9·11 테러 직전에 보여준 너무나도 허술한 모습이 국회 청문회에서 낱낱히 밝혀지면서 이후 미 정부가 내놓는 반박 자료가 대중의 신뢰를 받지 못한 점도 음모론이 탄력을 받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후 석유 때문에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는 국내외 비난 여론과 막대한 재정 지출을 감수하고 부시 정권이 적극적으로 강행했던 이라크 전쟁[81][82]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었던 군수업체와 석유기업들의 배만 불린 채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 무기가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음모론이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것이 《루스 체인지(Loose Change)》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은 다음과 같다.
  • 비행기에 부딪히지 않았는데 세계무역센터 7번 건물은 왜 무너졌나?
  • 철골로 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어떻게 비행기 충돌 하나만으로 자유낙하 속도로 무너졌나?
    • 항공기의 충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또한 충돌과 동시에 4만 리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가 유출되면서 폭발했고 건물 안에 남은 항공유도 엄청나게 뜨거운 열을 내뿜으며 연소되면서 건물이 전체적으로 약해져서 무너졌다(9.11 테러/세계무역센터의 붕괴 문서 참조). 또한 붕괴될 때 밖으로 튀어나온 외벽 파편들만 보면 아무런 저항이 없으니 자유낙하 속도와 얼추 비슷하게 나오지만 실제 외벽 파편들이 땅에 닿았을 때 아직 건물은 30 ~ 40층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가 붕괴가 꼭대기층인 110층이 아닌 70 ~ 80층에서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낙하 속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 붕괴된 층보다 20 ~ 30층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편들은 대체 무엇인가?
    • 건물 내부가 먼저 무너졌기 때문에 나온 파편들이다. 건물 내부 코어가 먼저 무너지고 그 층들에 있는 수많은 배선, 수도관, 사무용품 등등이 코어와 함께 밖으로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 왜 세계무역센터의 건물주(래리 실버스타인)는 9·11이 발생하기 6주 전에 35억 달러짜리 테러보험과 함께 건물을 임대계약을 했나?
    • 6주 전에 계약을 한 것은 정말로 운이 없던 것이고 테러 보험을 든 것은 세계무역센터는 이미 1993년에 큰 테러를 한 번 당했기 때문에 든 것이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문서 참조.
  • 9·11 이전 몇 주 동안 예고에 없던 대피훈련은 무엇인가?
    • 전술했듯 이미 세계무역센터는 93년에 초대형 폭탄 테러를 당한 건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훈련은 매우 정상적인 훈련이다.
  • 건물 내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폭발음을 들었다는데? 특히 소방관들은 건물 안 밝은 섬광을 보았다는데?
    •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1,000도에 육박하는 엄청난 열기에 녹은 비행기 동체(알루미늄)가 층에 있던 구멍 곳곳으로 새나가면서 하층부에 있던 물과 만나면서 산화알루미늄이 만들어졌고 이 상태에서 엄청난 열과 에너지를 내뿜어서 폭발처럼 느껴졌다는 가설이다.
  • 펜타곤 충돌 현장에서는 보잉 757기 파편이 없는가?
  • 비행기가 스쳤다는 펜타곤 잔디밭에는 왜 아무 흔적이 없나?
  • 펜타곤에서 엔진이 들이받았을 자리는 왜 멀쩡한가?
    • 위 3개 음모론은 펜타곤 피해상황을 찍은 많은 사진들이 소방수나 짙은 연기, 화재에 가려 엔진과 날개 충돌 부위가 제대로 안 보였기 때문에 크게 제기된 설이다. 비행기 파편은 사진으로 전부 나올 정도로 많이 나왔으며 흔적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날개, 엔진이 있던 자리도 크게 충격을 받아 그 부위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부서졌고 기수(機首)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 날개가 살짝 안쪽으로 꺾이면서 충돌했기 때문에 날개 및 엔진이 들이받은 자리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 펜타곤 직원들은 사고 당시 군용 화약 냄새를 맡았다고 하는데?
  • 미국 정부는 왜 사고기의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나?
    • 블랙박스를 회수했으면 그것이 더 기적이다. 세계무역센터 충돌 같은 경우에는 충돌 이후에도 1,000도가 넘는 화염이 1시간 가량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거기다가 2개의 건물이 붕괴된 충격을 생각하면 블랙박스는커녕 잔해를 찾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펜타곤의 경우에도 충돌 이후 무려 40시간이나 화재가 지속됐는데 이러한 열기에서 멀쩡하게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경우에는 건물이 아닌 평지에 추락하여 화재가 금방 진압되어 FDR(비행정보기록장치), CVR(조종실 음성 녹음장치) 모두 회수에 성공하였고, 2006년에 민간에 모두 공개하였다.
  • 흔적 없이 사라진 UA93편은 어디로 갔을까?
    • UA93이 추락한 곳이 땅이 진흙에 가까운 광산 지역이라 대부분의 파편이 지하 깊숙히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기의 잔해가 매우 많이 남았으며 유골도 발견되었을 정도로 실제로는 많은 파편이 발견되었다.
  • 미국 정부는 9·11 테러 당일 주요 각료들의 비행 탑승을 왜 금지시켰는가? 미 공군은 왜 비행기가 납치된 시각으로부터 2시간 동안 늑장을 부렸나?
    • 정말 우연히도 9월 11일에 NORAD의 연례 훈련인 '글로벌 가디언 훈련'이 있었다. 그 때문에 훈련 상황을 위해 주요 각료들이 사령부에 모여 있어 훈련을 진행하였다. 또한 납치된 비행기들이 트랜스폰더를 끄고 추적하기 매우 어렵게 만들어 비행기를 찾기도 어려웠으며, 비행기를 찾은 시점은 이미 테러가 발생한 직후 상황이었으며 처음 겪는 상황에 공군 비행기들도 대서양 쪽으로 발진하여 더더욱 대응이 어려웠다.
  • 거짓 전화통화 // 거짓 빈라덴 비디오 // 거짓 납치범
    • 초기 혼란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공개된 납치범, 전화 통화, 빈 라덴의 2001년 12월 비디오 등은 나중에 9·11 테러 위원회 연구로 실제 존재했음이 밝혀졌으나, 언론에서 속보 보도로 내놓으면서 급하게 내놓느라 인명을 틀리게 적은 경우가 나중에 음모론으로 공격받은 사례이다.
  • WTC 지하에 숨겨져 있던 1,600억 달러의 금괴 중 2억 달러어치만 발견한 점.
    • 4WTC에 있던 금괴 양 자체가 잘못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는 2-3억 달러 어치만 있었는데 음모론자들이 언론 보도에 인용된 수치를 단순히 합친 결과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것.
  •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제트 연료의 연소로는 쌍둥이 빌딩의 철제 골조를 녹일 수 없다).
    • 진실: 말 자체는 사실이나 녹지 않아도 충분히 약화된다. 음모론자들은 철근의 녹는점은 대략 1,400도 정도이고 제트연료의 연소온도는 900도 정도인데 왜 철근이 죄다 녹아 건물이 무너졌냐, 화재를 대비해서 철근에는 화재대비 코팅 처리가 되어 있을 텐데 왜 화재로 무너졌냐고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실제로는 시속 수백 km로 여객기가 건물에 부딪혀 기둥, 바닥, 여객기 등 온갖 자재들이 순식간에 파편화된 상태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기 때문에 충돌층의 대부분의 코팅이 벗겨졌다. 또한 철근이 녹는 온도까지는 도달하기 힘들지만,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녹게 하지 않아도 그냥 열을 가해서 약하게 만들기만 해도 된다.[83] 쉽게 예를 들어 종이를 돌돌 말아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책을 얹은 상태에서 굳이 그 종이기둥을 치우지 않고 기둥에 물을 뿌려 약하게만 만들면 책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84] 그럼 철강은 약해져서 건물이 무너졌다고 치고, 저기 흘러내리는 붉은색의 금속성 액체는 무엇인가 반문할 수도 있지만 상술한 것과 같이 비행기 동체가 녹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동체는 대부분 초듀랄루민이라는 알루미늄계 합금이 수톤 사용되는데 안타깝게도 듀랄루민은 알루미늄이 주재료답게 녹는점이 600도대로 매우 낮아 화재에도 충분히 용융된다. 애초에 그냥 녹은 금속이 보인다고 다 쇳물이라고 생각하는 점도 음모론자들이 전문가를 자처하기엔 수준이 너무 낮다. 재료공학계열 전문가가 듣는다면 헛웃음이나 치게 할 내용.

한때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네리던 음모론들 중 하나였으나 screw loose change 같은 반박 영상도 나왔고 다른 반박 의견들도 나와서 《루스 체인지》를 제작한 딜런 에이버리는 그 의견들에 대해 반박하면서 논쟁을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방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건축 전문가들이 건물의 붕괴 원인을 설명한 판에 이런 음모론이 발붙일 자리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10년대 들어서 미국 인터넷에서는 음모론을 비꼬는 뜻으로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가 화 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9·11 테러 직전 찍은 사진'이라며 한 남자가 쌍둥이 빌딩 옥상 위에 올라가 있고 그 뒤로 비행기가 날아오는 사진이 떠돌아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나중에 합성으로 밝혀졌다. 원본. 덕택에 이 사진은 Tourist guy라는 이름으로 필수요소가 되어 버렸다.

이외에도 마약과 관련된 루머도 역시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마 역시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UN에서도 당해년도 마약 시세를 알아보는 데 일단 아프가니스탄부터 언급을 할 정도로 마약 생산 대국이다. 만일 아프가니스탄에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의 지하경제가 초비상에 돌입한다고 봐도 될 정도이다. 그런데 매우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탈레반[85]이 아프간을 장악한 이후 이슬람법에 어긋난다고 마약 생산을 금지했던 것이다. 물론 금한다고 쉽게 걸려들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큰 타격은 받지 않고 있었지만 탈레반은 완전 근절을 위해 UN과 협력하여 아편 생산을 무려 90% 이상 줄여 버렸다. 이는 안티드럭 캠페인 역사상 가장 큰 쾌거라고 모두가 기뻐했는데, 이게 바로 2001년이다. 그리고 이 일 이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으며 미국은 아프간을 지목해 탈레반을 몰아냈는데 미국이 점령하고 나서 아편 생산량은 순식간에 원상복구되어 지금까지도 왕성히 아편 생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2004년에 출간된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1권 초판 p247에선 이 테러의 원인을 '유대인의 미국 장악'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애당초 WTC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에 있고 이마저도 유대인이 장악한 터라 사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2007년에 미국의 유대인 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 등이 항의를 하면서 저자가 사과한 뒤 다음 판본에서 지워졌고,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사장됐다.

한국에는 아직도 9·11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우스 파크》 시즌 10 에피소드 9 'Mystery of the Urinal Deuce'은 9·11 테러 음모론을 주제로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들 4분의 1은 음모론 따위를 믿을 정도로 멍청하니 직접 음모론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포하게 하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그리고 나머지 4분의 3에게는 진실을 말한다고 했다. 음모론의 음모론

2000년도에 출시된 게임인 데이어스 엑스는 음모론과 세계를 뒤에서 조종하는 비밀조직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데 주인공이 속한 대테러 조직 UNATCO가 설립된 건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로 파괴됐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게임 용량 문제로 삭제된 것을 테러 때문에 날아갔다고 설정을 붙인 것이었는데, 여기서도 사람들은 이 일이 미국 정부의 자작극, 즉 Inside job이라고 생각한다. 테러로 사라진 세계무역센터라는 설정도 그렇고 어떻게든 앞을 내다본 게임이다.


8. 9·11 테러를 다룬 대중매체[편집]



8.1. 게임[편집]


  • 08:46: 오큘러스 리프트 전용으로 나온 게임으로 9·11 테러를 추모를 위해 제작된 게임으로서 9·11 당시 북쪽 타워 내부 상황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엔딩이 탈출해 생존하는 게 불가능하고 질식사해 죽거나 떨어져 자살하는 결말[86]밖에 없어서 영 좋지 못한 평을 듣고 있다. 생존하는 결말이 없는 것은 9·11 당시가 얼마나 비참하고 살인적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112 오퍼레이터: 지령요원 시뮬레이터로 사건사고에 경찰, 소방, 구급 유닛을 배치하는 게임으로 2차 창작 모드로 뉴욕에서 게임을 시작하면 9·11 테러 신고가 들어온다. 끝없이 들어오는 신고전화와 사건들이 당시 911 지령요원의 심정을 체감할 수 있게 한다.


8.2. 서적[편집]



8.2.1. 소설[편집]


  • 붉은 하늘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87]: 아버지를 9·11 테러로 잃은 9살 소년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상당히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 페이지가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든지, 한 장에 한 문장만 있거나 아예 빈 종이라든지, 텍스트가 겹쳐 알아볼 수 없다든지, 특히 결말부의 사진[88]을 리와인딩하는 기법 등이 특이점이다.
  • 조지 부시의 위대한 미국


8.2.2. 논픽션[편집]


  • 《문명전쟁》[89]
  • 《102분》[90]: 세계 무역 센터에서 항공기가 충돌한 후 북쪽 타워가 붕괴되기까지 102분간 벌어진 일을 그린 논픽션이다.


8.3. 만화[편집]


  • 마블 코믹스: 테러 당시(2001년 11월) 출판된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가 쓰고 존 로미타 주니어가 그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36은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루크 케이지 등 여러 히어로들이 사고 현장에서 시민들을 구출하는 내용으로,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고 20주년인 2021년 마블은 조 퀘사다가 쓰고 존 로미타 주니어가 그린 만화 The Four Fives(2021) #1을 출판했다. 이 만화는 스파이더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등장하고 역시 사고를 추모하는 내용이다. 이 만화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8) #73, 데어데블(2019) #34, Excalibur #23, Ka-Zar: Lord Of The Savage Land #1, X-Force #23에 추가로 수록되었다.[91]

  • 네모바지 스폰지밥 '제발 한 입만!'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징징이가 게살버거를 먹으러 갔다가 두 번이나 불타 죽을 뻔한 장면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고 미국에서는 이 장면이 잘렸다.[92]


8.4. 영화[편집]


  • 《2001년 9월 11일》[93]: 각각의 에피소드가 11분 9초 1프레임 길이가 되게끔 맞춘 단편 11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에피소드 순서대로 사미라 마흐말마프, 끌로드 를르슈, 유세프 샤힌, 다니스 타노비치, 이드리사 오에드라오고, 켄 로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아모스 지타이, 미라 네이어, 숀 펜, 이마무라 쇼헤이 연출.
  • 화씨 911[94]: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 《루즈 체인지 제2판》[95]
  • 플라이트 93[96]
  • 《월드 트레이드 센터》[97]: 9·11 테러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명작.
  • 레인 오버 미[98]: 9·11 테러로 아내와 세 딸을 잃고 정신적 충격을 겪는 치과의사 찰리 파인맨의 이야기.
  • 시대정신[99]
  • 내 이름은 칸[100] 테러 이후 미국에서 이미지가 나빠진 미국의 무슬림들에 대한 영화이다.
  • 《주저하는 근본주의자》[101]: 모신 하미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102]: 조나단 사프란 포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스토리는 훈훈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산만한 영화라서 호불호가 좀 갈렸다.
  • 제로 다크 서티[103]: 9·11 테러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주인공 '마야'가 10여 년간 추적하는 과정을 다루며 촬영 직전에 빈 라덴이 넵튠 스피어 작전을 통해 실제로 사살되어 스토리가 변경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9·11 테러 당시 무전, 통화 음성들이 나와 영화 시작부터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 《9/11》: 테러 직후 무역센터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버린 5명의 인물들을 다루는 이야기. 찰리 쉰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2017년 9월 개봉.
  • 논스톱》: 하이재킹을 다루는 영화로 9·11 테러에서 친구를 잃고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가 미국에 실망한 인물이 빌런이다. 테이큰리암 니슨 주연.
  • 나의 연인에게》: 9·11 테러에서 비행기를 하이재킹했던 테러리스트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그와 그의 애인의 연애담 중간 중간 나오는 서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과 심리 변화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라 이것을 모르고 봤을 때의 둘의 심리 변화를 천천히 따라갔을 때 느낌과 미리 알고 봤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굉장한 스포일러이다.


8.5. 드라마[편집]


  • CSI : NY》 시즌 1 1회: 주인공인 맥 테일러 반장의 아내인 클레어가 9·11 테러의 희생자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맥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아내를 찾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후에도 클레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언급된다.
  • 뉴스룸》 시즌 1 7회
  • 웨스트 윙》 시즌 3, 0회(특별편) "Isaac and Ishmael": 9·11 테러로 인해 추가된 특별편. 에피소드 내용에서는 9·11 테러와 직접적 연관성은 나타나지 않고 극단적 종교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그에 대처하는 자세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에피소드 시작 전 9·11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관련 단체의 후원을 독려하는 부분이 나온다.
  • 본즈》 시즌 8 6회
  • 《더 루밍 타워》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 빌리언스》더블 주인공 중 하나인 바비 액슬로드(대미언 루이스 분)의 인물배경으로 언급된다.
  •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기계는 9·11 테러 이후 비슷한 사태가 재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9-1-1: 론 스타》주인공 오웬 스트랜드가 9·11 테러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으로 나온다. 에피소드가 전개되며 당시 생존자들이 어떤 후유증을 겪고 있는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 스물다섯 스물하나》주인공 백이진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시기에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으로 출장 가 애인인 나희도와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되었지만 테러의 막심한 피해와 테러와의 전쟁 선언으로 인해 백이진의 출장 기간이 길어진다.
  • 재벌집 막내아들》드라마 기준 10화에서 등장하고, 원작에서도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는 9·11 테러로 인한 미국 증시 하락과 뒤이어 발생하는 코스피 지수의 붕괴, 그리고 이후의 시장 흐름으로 인한 이익과 손실 여부가 작중의 경영권 이슈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8.6. 음악[편집]


  • Yellowcard - Believe[104]: 생존자와 희생된 소방관의 관점에서 쓰인 노래인데, 간주 부분엔 전 뉴욕 주지사 조지 퍼타키, 마지막 부분엔 전 뉴욕 시장인 마이클 블룸버그의 연설이 들어가 있다.[105]
  • 브라이언 맥나잇 - Back at One: 가사는 상관은 없으나 뮤직비디오는 911로 죽은 남자친구가 죽기직전 연인과 통화하면서 죽은 이후 슬퍼하는 그녀를 찾아가 위로하는 내용이다.
  • Dream Theater - Sacrificed Sons[106]: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에서 죽어나간 이들에 대한 곡. 초반부에 전세계의 뉴스 보도가 흘러 나온다.
  • 조성모 5집 《내 것이라면》 뮤직비디오: 9·11 테러 때 사망한 소방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모델인 '제이 임'이 남주인공인 소방관 역을, 임은경이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 Lily Allen - Him[107], 2009
  • anti-flag - 911 for peace
  • My Chemical Romance[108] - Skylines and Turnstiles, Sleep, The Only Hope for Me is You
  • John Mayer - Covered In Rain
  • Velvet Revolver - Messages
  • Green Day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원래 보컬인 빌리 조 암스트롱이 어릴적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 충격을 받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어머니에게 "9월이 끝나가면 깨워 주세요"라고 말한 걸 토대로 작곡한 곡이다. 가사의 내용은 9·11 테러와 큰 연관은 없어 보이나 빌리 조는 9·11 테러의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작곡을 했다고 한다. 노래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 때문에 이후에도 미국에서 굵직한 사고가 터질 때마다 추모곡으로 자주 쓰였다.
  • Celine Dion - A New Day Has Come: 911 테러 3개월이 지난 후에 발표된 곡으로 미국인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1200만장 이상 판매로 그 해 2위로 가장 많이 팔리는 앨범이자 셀린의 2000년대 음악 커리어 중 큰 순간이 됐는데 당시 음악시장이 붕괴수준까지 갔다는걸 생각한다면 대단한 판매량이다. My Heart Will Go On[109]도 위로곡으로 사용됐다. 한국에서도 10만장 이상 판매됐다.
  • Madonna - American Life: 마돈나의 곡 중 유일하게 가장 심한 여론의 비판을 받은 노래다. 당시 마돈나는 9·11 테러를 빌미로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는 부시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가 있는데 당시 충격과 공포에 휩쌓인 미국 대중은 이러한 의지에 대해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돈나가 뮤직비디오를 수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잘못된 국수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상황을 본다면 자기 나라 도심 한복판에 빌딩이 추락했고 여러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에 대한 복수를 비판한다는 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는 현상이었다. 물론 결과는 복수로 인한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지금도 중동 쪽에서 큰 증오를 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 Coldplay - Politik: 9·11 테러에서 영감을 얻은 크리스 마틴이 작곡한 곡.
  • Wilco - Jesus, etc.: 윌코의 최고 명반인 Yankee Hotel Foxtrot에 수록된 곡. 'Tall building shake'나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 같은 가사를 보면 9·11 테러를 강하게 연상시키지만 사실 곡 자체는 9·11 테러 이전에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테러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가사로 많은 찬사를 받은 곡이다.
  • Interpol - NYC: 데뷔 앨범인 Turn on the Bright Lights에 수록된 곡으로 NYC는 뉴욕의 자원봉사 단체인 'New York Care'의 약자이다. 인터폴다운 공간감과 폴 뱅크스의 읊조리는 듯한 저음으로 시작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며 빛을 환하게 밝히자는 희망적인 가사로 마무리하는 구조가 인상적인 곡.
  • 카라바오 - เดือน 9 เช้าที่ 11(9월 11일): 존 레논Imagine의 구절을 인용하며 서로간 복수가 아닌 평화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 히토토 요 - ハナミズキ: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뉴욕시의 친구에게 전해듣고 일주일간 고심한 끝에 지은 곡. 가사에는 자식에게 '먼저 가라'고 하며 아이가 성장해서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보낼 것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성애가 담겨 있다. 제목인 ハナミズキ(서양산딸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의 재료로 희생을 의미한다.
  • Stephen Mcknight. - HEAVEN INSIDE: GUITARFREAKS 8thMIX & drummania 7thMIX의 수록곡. 9·11 테러를 계기로 평화를 기원하며 쓴 곡이라고 한다.
  • 사일런트 포스 - Heroes: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비판하는 가사를 썼다.


8.7. 뮤지컬[편집]


  • 컴 프롬 어웨이: 테러 직후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9·11 테러 당시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들은 캐나다에 비상착륙을 해야 했는데, 대서양을 횡단 중이던 비행기들은 모두 제일 가까웠던 뉴펀들랜드 갠더 공항으로 몰려들었고 그 인원은 당시 갠더 지역 인구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식량, 숙박 등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지역민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먹고 마실 것과 집을 내주었고 이때의 경험이 매우 특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는 승객과 지역민이 결혼한 사례도 나왔다고 한다. 결국 이 훈훈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미국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8.8. 다큐멘터리[편집]



  • 9/11(2002): 위에 언급된 쥘 노데의 사건 당일 다큐멘터리. 맨해튼의 소방서에서 다큐를 찍다가 우연히 9·11 테러가 일어나 유일하게 첫 번째 빌딩 공격을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110]



8.9. 당시 방송 및 뉴스[편집]




  • 2001년 9월 11일 CNN 뉴스 생중계 영상. 북쪽 타워에 비행기가 충돌한지 약 3분 후인 8시 49분부터 긴급 속보로 생중계를 시작했다. 이후 남쪽 타워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상황이 점차 심각해지는 게 영상 속에 생생히 담겨 있다.

  • 2001년 9월 11일 밤, ABC 뉴스[111]





  • 9·11 테러 당시 뉴스 생중계 영상들을 모아 편집한 영상으로 테러 발생 불과 몇 분 전 평화롭던 아침부터 테러 후 당일 밤까지 상황이 잘 정리되어있다. 한국어 자막 영상


8.10. 기타[편집]


주요 배경은 아니나 언급된 것도 포함한다.
  • 모키 쇼: Sr pelo의 장기 연재 작품. 9·11 사건을 풍자했다.
  • 세계 다크투어: 3회에서 9·11 테러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다.
  • Wake Up, Girls!: 언급이 나왔다.
  • 아이리스 2에서 최민에 의해 테러에 아이리스가 연관되었다며 간접적으로 거론되는데, 최민이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그의 약혼자가 사망했으며 최민이 아이리스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계기가 된다.


9. 기타[편집]


파일:t1larg.box.cnn.jpg
  • 9·11 테러 당시 출동하던 뉴욕 소방국 소방관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자세한 내용은 뉴욕 소방국 문서 참고.
  • 9·11 테러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난 2006년까지도 매일 수백 통의 우편물이 사라진 세계무역센터의 우편번호로 전송됐다고 하며 우편물들은 전화요금 고지서에서부터 보험증서, 와인클럽 홍보물, 대학 동창회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세계무역센터의 우편물을 취급하는 한 우편배달부는 이러한 우편물들을 보고 "언젠가는 그들도 우편물이 전달될 건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며 "다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우편물들은 보낸 사람에게 반송되거나 일부 기업에선 사람을 보내 우편물을 가져갈 때까지 우체국이 이를 보관하도록 비용을 지불하였으며, 나머지는 파쇄되었다고 한다. 세계무역센터에 지금도 하루 수백 통 우편물
  •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수상쩍은 행동을 한 이스라엘인 5명이 체포된 적이 있다. 차를 타고 온 이들은 무역센터를 지켜보던 중 비행기 테러로 무너지자 춤을 추면서 환호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체는 이스라엘의 첩보원들로 잠정 결론 났다. 기사
  • 9·11 테러 생존자 이동훈씨 7년 만의 회고
  • 생존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뉴욕 뉴저지 항만청 경찰관인 John McLoughlin과 Will Jimeno다. 이들은 붕괴 직전에 WTC 타워에서 구조 작업을 하다가 대피하려고 시도했지만 건물이 붕괴하여 장애물과 파편에 매몰되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두 사람은 살아남았으며, 구조대원들에 의해 구조되어 생존하게 되었다. 이들의 실화는 니콜라스 케이지마이클 페냐 주연의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제작되었다.
  • 마이클 잭슨은 테러 당일에 WTC에서 미팅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자명종이 고장나서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고 한다. 만약 제시간에 일어났다면 테러에 휘말렸을 것이다. 마이클 입장에서나 팬들의 입장에서 천운이었던 것. 이후 마이클 잭슨은 추모곡 를 발표하였다.
  • 9·11 테러 당시 두 타워 사이의 광장에서는 이벤트 준비가 한창이였는데, 이 때 음향 테스트 목적으로 한 곡을 반복재생으로 틀어놓다가 WTC1에 비행기가 충돌하자 음악이고 뭐고 끌 새도 없이 다들 대피하느라 지옥도가 펼쳐지는 현장에 이 곡이 계속 반복재생으로 틀어져 있었다고 한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곡은 현장의 상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평화로운 재즈음악이였다. #링크, 원곡
  • 한국서 활동하는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친구 부모님이 희생되셨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은 차마 그 사실을 직접 전하지 못하고 부모님께 무슨 일인지 물어보라고 했다고. 기사


10. 외부 링크[편집]




11. 틀 둘러보기[편집]




[1] 미국에서는 흔히 줄여서 '9/11(나인-일레븐)'이라고 부른다.[2] 직접 테러를 주동한 세력은 모하메드 아타를 비롯한 19명의 테러리스트들이지만 오사마 빈 라덴알카에다의 수장으로서 사실상 9·11 테러의 배후였다. [3] 41층 건물이었으며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어 결국 2011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재는 제5세계무역센터 건설을 위한 부지로 활용 중이다.[4] 민간인 2,977명, 테러리스트 19명. 사망자 중 412명은 화재 진압과 인명구조 활동을 벌이던 소방 및 경찰 공무원 순직자이며 또한 경찰견 한 마리도 사망했다. 이 사건은 테러 및 건물 붕괴로 인한 사망자 수로 현재까지 세계 최다이며 22년 동안이나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2021년 9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종자 또는 신원파악불가자의 수는 1,106명이며 그 수를 포함하면 사실상의 사망자는 3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5] 하이재커 19명 포함[6] 붕괴할 때 가루로 흩날린 석면으로 인해 암에 걸린 사람들의 수.[7] 이는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의 최고 지지율 기록이기도 하다.[8] 이후에도 탈레반은 세력을 유지하다가 2020년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이듬해 8월 미군 철수를 기회로 총공세를 펼쳐 다시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권력을 탈환했다.[9] 아프가니스탄은 내륙국이기에 인접국이자 파슈툰인이 많은 파키스탄을 거쳤다.[10] 정확히는 무함마드가 살아 있는 한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아라비아 반도에서 축출할 것[11] 다만 타이마 문서에서 볼 수 있듯 무함마드 사후 5백여년이 지난 12세기 후반까지 아라비아 반도 내륙(네지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12] 역설적이게도 탄자니아 미 대사관이 있던 다르에스살람은 아랍어로 '평화의 집'이란 뜻이다.[13]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9·11의 책임을 부인하던 빈 라덴의 9·11 주도가 더 확실해지는 증거가 되었다.[14] 정확히는 기병대 윙드 후사르를 앞세운 폴란드군이 막 빈의 성벽을 돌파한 오스만 제국의 후위를 습격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날[15] 훈련 내용 중에는 서구 의상을 입는 법,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법과 같은 것 등도 있었다고 한다.[16] 심지어 요르단 정보 당국은 알카에다 측의 작전 암호(큰 결혼식)까지 전달하였다.[17] 2001년에 보도된 한국의 한 뉴스 기사에서 언급된 부분.[18] 셰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셰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19] 다만 외래어 표기법 '기타 언어의 표기'에서 '자음 앞이나 어말의 h는 음가가 있더라도 적지 않는다'고 했기에 '셰리'가 맞는 표기이다.[20] Computer-Assisted Passenger Prescreening System Version 1, 컴퓨터 보조 승객 판별 시스템.[21] Barnett, A.(2004). CAPPS II: The foundation of aviation security?. Risk Analysis, 24(4), 909-916.[22] 나레이션도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관 중 1명이었던 제임스 핸론(James Hanlon) 소방관이 맡았다. 9월 11일 당시 이 분은 비번이었던 날이어서 테러가 일어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23] 한국시각 오후 9시 46분[24] Joseph Pfeifer[25]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 소방서의 서장. 2018년에 정년퇴직했다.[26] 존 오닐(John O'Neill) 소방관. 그 역시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얼굴도 원본 영상에 등장한다.[27] 이 발언은 원본 영상에 등장한다. 원본 영상과 한국어 번역 영상은 유튜브에 각각 '9/11(documentary, 2002)', 9/11(소방관 다큐멘터리, 2002)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28]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에 2~3개월 전 쯤 들어왔었던 토니 베네타토스(Tony Benetatos) 소방관. 지금도 뉴욕 소방국 대원으로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29] 테러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대원들은 사망자 없이 모두 무사 귀환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들이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서 기적 또는 천운이라고 말했다.[30] 쥘 노데는 그의 형인 제데옹 노데(Gédéon Naudet)와 함께 소방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6월 말~7월 초쯤부터 9·11 테러 몇 주 후까지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서에서 그곳의 대원들과 함께 지냈다. 9월 11일 당시 쥘이 제데옹 대신에 촬영 연습차로 가스 누출 의심 신고 현장에 대대원들과 함께 출동했다. 그 현장에 도착해서 촬영하던 도중에 비행기가 굉음과 함께 날아와서 부딪혔는데 이 때부터 평범했던 일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재난 현장이 된다.[31] 초고화질 변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St7ny38gLp4[32] 첫 번째 충돌이 담긴 다른 영상들도 있지만 우연히 주변에서 다른 곳을 찍다 폭발 직후 카메라를 돌린 뉴스 촬영기사 영상, 몇 초에 한 번씩 사진을 찍은 웹캠 영상, 그리고 도로 위 차량에서 찍어 전부 다 충돌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영상들뿐이다. 영상 모음 사건이 발생하기 전이여서 모두가 예상을 못 했던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희귀영상이나 다름없다.[33] 이 충돌이 있고 난 후 CNN 뉴스 타이틀이 America Under Attack(미국이 공격받고 있다)으로 바뀌었던 걸 보면 미국 언론을 비롯한 2차 충돌을 목격한 시민들은 테러임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34] 2001년 당시엔 스마트폰은커녕 카메라 기능이 있는 피쳐폰도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당연히 당시 긴급하게 폰으로 동영상을 찍어봤자 질 낮은 영상일 뿐이었다) 무선인터넷도 있긴 하나 요금이 비쌌다.[35] 실은 휘발유LPG 등의 가스는 주변의 열이나 압력이 급상승하면 폭발하는데 9·11 테러 때 하필이면 WTC에서 떨어지는 여러 불붙은 잔해들이 차량들이나 주위 건물의 LPG 가스통을 덮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난 것.[36] 충돌 이후에도 대피 방송은 1WTC와 달리 충돌부와 상층부에서도 멀쩡히 나왔다. 이는 1WTC와는 달리 2WTC에 충돌한 UA175편은 측면에 충돌하였기 때문에 건물 중심 코어부분을 지나는 전기라인은 손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충돌 이후에도 상층부, 심지어는 충돌층에서도 전기가 멀쩡히 공급되었다.[37] 이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에서도 다뤄지는데, 상당히 충격적이고 끔찍한 내용인 것을 감안해 아예 다른 전시 공간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보기 싫다면 그냥 지나가도 무방하도록 되어 있고 전시 공간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차마 관람을 이어가지 못할 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여러 곳에 만들어 두었다.[38] 이런 사례는 30년 전에 발생했던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에서도 있었으며 이와 같은 이유로 고층에서 추락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39] 정확히는 '두 번째 항공기가 두 번째 타워에 충돌했습니다. 미국이 공격받고 있습니다.'(A second plane hit the second tower, America is under attack)라고 했다. KBS 시사기획 창 "미국, 새 게임을 시작하다"에서 인터뷰 때 증언. [40] 수업 참관에 들어가기 직전 첫 번째 비행기의 충돌 사실을 전해들었지만 이때는 부시는 물론 보좌진 모두가 '사고'로 취급하고 있었다. 20주년을 맞이하여 나온 다큐멘터리에서 부시가 한 말에 따르면 상황이 걱정은 되었지만 '형편 없는 조종사들' 때문에 일어난 사고일거라 생각했지 다른 것은 상상도 못 했다고. 다만 이때까지 플로리다에 간 부시와 보좌진은 뉴욕 현장 영상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41] 영상 20초경(부시 대통령이 보고받기 직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발음을 교육하던 중 나온 단어들이 절묘하게도 Hit, Steel, Plane(때리다, 철, 비행기)로 들려 한동안 인터넷에 관련 낭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온 단어는 Kit, Steal, Playing이었으며, 결국 저화질의 영상불분명한 발음이 맞물려 일어난 단순 해프닝으로 판명되었다. #[42] 한편 미국의 유명 교육 유튜브 채널인 Vsauce에서 소개한 내용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이 상황 보고를 받을 당시 그와 아이들이 읽고 있었던 동화는 "Pet the goat"이라는 동화였는데, 그 동화의 마지막 구문은 "More to come(앞으로 더 많이)"이었고, 이 문장까지 학생들이 모두 읽었을 때는 3번째 항공기가 펜타곤에 충돌 겨우 22분 전이었다고 한다.#[43] 때문에 당시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9·11 Kids"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행동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44] 위에서 언급된 미 공군의 여객기 격추 방법을 썼다면 적어도 펜타곤의 사망자 125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될 경우 미국 정부는 항공기에서 납치된 자국민 59명을 직접 사살하는 꼴이 되며, 만약에라도 여객기의 잔해가 지상에 흩뿌려질 경우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지상의 피해도 감당해야 한다. 즉 만약에 항공기를 따라잡는 데까지 성공했을지라도 그 다음의 모순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45] 사건 이전에 설치된 펜타곤 CCTV로 인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46] 위 영상은 CG로 재현한 장면으로 실제로 펜타곤과 여객기가 충돌한 장면을 찍은 영상은 검문소에 설치되어 있던 CCTV 영상이 유일하다.사고 영상 하지만 당시 CCTV 기술의 한계로 인해 영상품질이 1fps 남짓이라 온전한 충돌 과정을 파악하긴 어려웠기 때문에 고층의 세계무역센터와 달리 5층밖에 안 되는 낮은 펜타곤을 비행기가 수평으로 충돌할 수 없으니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식의 주장도 나왔다.[47] 다른 4개의 편은 붕괴되지 않고 서쪽 편 일부만 붕괴.[48] 하필 이 날이 벤 슬라이니가 국장 직책으로 업무를 시작한 첫 날이었다.[49] 이 때문에 벤 슬라이니는 9·11을 다룬 다큐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플라이트 93》이라는 극영화에도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50] 이른바 SCATANA, 즉 Security Control of Air Traffic and Air Navigation Aids라 불리는 항공 교통 및 항로 시설의 보안 통제 조치다. 한국에서는 항공교통업무 우발계획이란 이름으로 한국 공군공군작전사령부가 발령권을 쥐고 있다. 이 SCATANA 조치는 규정 출범 이후 9·11 테러 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51] 이 비행기가 승객의 저항이 없거나 실패한 채 목표에 도달했으면 더 치명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미 미군의 군사 핵심 시설인 국방부에 테러가 일어났는데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에까지 테러가 일어났다면 국가의 군 수뇌부는 물론 행정부 또는 입법부가 일시에 마비될 수도 있었다. 다만 만약 충돌에 성공했어도 부시는 상술했듯 당시 백악관에 있지 않았으며 플로리다에 있었기에 가족들만 죽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52] 다른 항공기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자살 테러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하여 저항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하이재킹 범죄는 항공기를 착륙시킨 후 승객들을 인질로 삼아 협상을 요구하는 대형 인질극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항공기 자체를 테러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전무후무한 계획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53]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로 유명한 아트 슈피겔만이 디자인했다.[54] F-15와 F-16, E-4B, VC-25를 비롯한 군용기와 연방보안관 죄수호송기만이 계속 비행할 수 있었다.[55] 유일하게 뜬 비행기가 있었는데, 플로리다에서 한 남자가 독사에게 물리는 바람에 급히 해독제를 맞아야 해서 몇 시간의 설득 끝에 개인 비행기 한 대가 해독제를 싣고 샌디에이고에서 플로리다로 날아갈 수 있었다.#[56] 이때 캐나다에서는 노란 리본 작전을 발동해 출발지로 회항할 수 없는 지점을 지난 미국행 민항기들을 캐나다 각지의 공항으로 대신 유도한다.[57] 보통 국내 영토를 비행할 때는 전투기 호위가 붙지 않는다. 이후 호위기로 주방위군 F-16 2대가 합류했으나,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탓에 에어 포스 원 조종사는 F-16의 순항 속도보다도 더 빨리 VC-25를 과속으로 운항했다. 이 모습을 보고 F-16 조종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58] 당시 에어 포스 원에는 방송을 위한 전파시설이 없었던 이유도 있다. 당장 대국민 긴급성명을 발표할 필요가 있었기에 부시는 최대한 빨리 워싱턴 D.C의 백악관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59] 어떠한 준비도 없어서 관용차가 아닌 일반 파란색 미니밴에 탑승해야 했다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이 그런 차량에 타는 건 처음 봤다고. 일반적으로 미 대통령 전용 차량인 캐딜락 프레지덴셜 스테이트 카와 대통령을 태우는 VH-3D 시킹 헬리콥터와 UH-60 계열기인 VH-60N 나이트호크 등의 헬기들은 미 해병대 소속 제 1해병헬기비행대대(HMX-1)가 운용하며, 미 시크릿 서비스의 작전 통제 하에 대통령의 다음 목적지들에 미리 차량 및 헬기 등 운송수단을 보내놓는다. 보통은 대통령의 다음 목적지와 다다음 목적지까지 차량과 헬기 편이 준비된다. 이 경우, 외부 공격으로 인해 급격히 목적지를 변경한 경우이므로 의전차량이 마련되지 못했다.[60] 두 기지 모두 현재는 미 지구권타격사령부 산하의 핵 및 정찰 감시전력을 운용하는 기지다. 박스데일 기지에서 동아시아 등지로 B-52H 폭격기를 보내며, 또한 북핵 위기 때 등장하는 RC-135 등의 정찰기가 바로 이 오펏 기지 소속이다.[61] 당시 관계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장비도 가구도 적어도 20년 전의 것들이었다.[62] 결국 몇 명을 내보내서 해결했다고 한다.[63] 충돌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경호원들이 맨패즈로 요격 시도를 하지만 워낙 대형기체라 미사일을 맞고도 그대로 들이받는다.[64] 실제 톰 클랜시는 소설 출간 전에 자문을 위해 미 공군 고위 장교에게 이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는데, 상당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클랜시는 이런 시나리오를 군쪽에서 대비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한 거지만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고.[65] NYPD TEMP. HQ는 "New York Police Department Temporary HeadQuarters" 즉 뉴욕 경찰국 임시 본부[66]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지방경찰청롯데리아 건물을 빌려 임시 경찰청을 운영한 것과 같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67] 대한민국은 1969년 발생한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을 계기로 조종실 문을 꼭 잠그는 게 의무화되었다. 덕분에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에서 조종석 문을 잠그는 규정과 당시에 존재하던 항공보안관, 그리고 전명세 조종사의 희생으로 58명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68] 9·11 테러 이전에도 초소형국민체의 여권은 신경쓰지 않았는데, 시랜드 공국은 이걸 알아채고 여권을 대량 말소하였다.[69] FBI와 CIA간의 반목은 원체 유명했지만, 특히 콘트라 사건을 계기로 두 집단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70] <뉴요커>는 재치 있으면서도 깔끔한 표지 삽화로 유명한 언론사인데, 특히 9·11 테러 이후에는 매년 9월 둘째 주에 발행되는 모든 호에 9·11 테러와 관련된 독특한 삽화를 싣고 있다. 왼쪽 상단의 뉴욕시의 물가 상승에 맞추어 올라가는 잡지 가격도 볼거리.[71] 본래 '폭발 등의 진원지'를 뜻하는 일반적인 표현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이 지점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72] 다만 9·11 테러를 저지른 게 전체 무슬림을 대표해서가 아니라 알카에다라는 테러단체를 대표한 것이고 종교적 목적보다는 미국의 중동 개입에 대한 보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일반 무슬림이 센터를 짓는 것까지 막을 명분은 없었다.[73] 예를 들면 과거엔 있던 미군기지 같은 곳이나 항공기로 자폭 테러하기 적절한 것으로 취급되는 장소.[74] 유튜브에 air force one new york city라고 검색하면 영상을 볼 수 있다.[75]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질 때 발생한 분진에는 건물 및 각종 구조물과 비행기 잔해뿐만 아니라 항공유와 유해, 그리고 석면이 함유되어 있었다.[76] 무슬림과 시크교도는 서로 다른 터번을 쓴다. 정작 시크교도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수백년간 이슬람을 믿는 무굴 제국에 탄압받고 싸워 왔던 종교이며 가르치는 교리 또한 완전히 다르다.[77] 어이없게도 이들은 9·11 테러가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무슬림, 아랍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겨줬다(그러니까 비극단주의 무슬림 또는 무고한 아랍인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힌 것을 의미)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그저 자신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일명 미제와 서방 세계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만 보고 배웠다. 한 마디로 나무만 보고 숲을 안 본 셈이다.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해도 이들이 테러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무조건 자신들이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슬람 이외의 모든 것을 무력으로 없애 버리길 바랄 뿐이며, 이슬람 내부의 중립 내지 온건파들을 그저 내부의 적, 용기없는 겁쟁이 등으로 볼 뿐이다. 이 정도 정신상태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극단주의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테러하는 목적 자체가 서양인들이 이슬람을 혐오하게 만들어서 무슬림들이 서구 문화에 동화 및 흡수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는 음모론적인 추측도 있는데, 이 주장에 따르자면 저렇게 이슬람을 고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나 이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78] 물론 무슬림이라고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극렬 분자들을 감시하는 것이다. 겸해서 극우, 극좌 단체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되었다.[79] 음모론자들이 내놓은 근거들이 당시에는 명백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몇 년 혹은 길게는 10여년이 지나서야 반박된 것도 음모론이 오랜 세월 동안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원인 중에 하나다.[80] 이 문서의 많은 자료들도 기밀 기한이 마감된 후 대중에 공개된 내용이 많다.[81] 이라크 전쟁도 9·11 테러가 없었으면 추진하기 어려웠다.[82] 심지어 부시 정권의 실세였던 딕 체니 부통령은 측근들과 9·11 테러 바로 당일 오후부터 이라크 침공을 논의했다고 한다. 아직 사건의 전모나 배후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전부터 이라크 침공을 주장하던 네오콘 그룹이 9·11 테러가 일어나자마자 팩트체크는 생략하고 바로 전쟁으로 돌진한 것이다.[83] 철은 온도에 따라 고체상을 유지하면서도 원자 배열(조직)을 바꾸며 성질이 가지각색으로 변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철강 재료는 500도만 되어도 이걸 철이라고 불러야 하나 싶을 정도로 무른 상태가 된다. 실제로 900도 정도면 롤러에 넣고 밀면 껌 늘어나듯 쭉 늘어난다. 제철소에서도 철강 빔을 이런 식으로 만든다.[84] 실제로 1,000도 정도에 도달하면 철은 상온 강도의 5%조차 못 내는 사실상 말랑말랑한 덩어리가 되고 만다.[85] 탈레반의 시작은 종교 학교였다.[86] 빌딩 내부에 계속 남아있으면 화면이 점점 어두워지며 게임이 종료되고 빌딩 밖으로 뛰어내릴 경우 바닥에 추락하기 직전에 화면이 암전되며 게임이 종료된다. 실제로 북쪽 타워는 비행기 충돌과 함께 계단이 모두 파괴되어 충돌 부분 위에 있던 사람들은 탈출할 수 없었다.[87]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2005, 조너선 사프란 포어[88]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찍은 것[89] The Looming Tower: Al-Qaeda and the Road to 9/11, 2007, 로렌스 라이트[90] 2005, 짐 드와이어[91] 뉴욕타임스 보도[92] 한국 더빙판은 EBS에서는 수정 전 장면을 방송했고, 재능TV판은 수정된 장면으로 방송되었다.[93] 11'9''01 September 11, 2002, 사미라 마흐말마프 외[94] Ferenheit 9/11, 2004, 마이클 무어, 다큐멘터리[95] Loose Change 2nd Edition, 2006, 딜런 애버리, 다큐멘터리[96] United 93, 2006, 폴 그린그래스[97] World Trade Center, 2006, 올리버 스톤[98] Reign Over Me, 2007, 마이크 바인더[99] Zeitgeist, 2007, 피터 조저프, 다큐멘터리[100] My Name Is Khan, 2010, 카란 조하르[101] The Reluctant Fundamentalist, 2012, 미라 네이어[102]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2012, 스티븐 달드리[103] Zero Dark Thirty, 2012, 캐스린 비글로[104] Ocean Avenue, 2003[105] 다만 테러 당시인 2001년까지의 뉴욕 시장은 루돌프 줄리아니였다.[106] Octavarium, 2005[107] It's Not Me, It's You[108] 보컬 제라드 웨이가 뉴욕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두 눈으로 직접 9·11 테러 공격으로 인해 구조되지 못한 사람이 무역센터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지금 그림이나 그릴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밴드의 결성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09] 타이타닉 주제가. 후에 2015 파리 테러에서도 위로곡으로 사용됐다.[110] 두 번째 테러는 33분 53초에 나온다.[111] 정확히는 뉴욕 지역 방송사인 WABC에서 방송한 로컬 뉴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