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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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관련된 니체의 어록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ㅡ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ㅡ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1]

『이 사람을 보라』

아모르 파티(Amor Fati)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라틴어이며, 운명애(運命愛)라고도 칭한다. 영문은 Love of Fate 또는 Love of One's Fate.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근본 사유라고 인정한 영원 회귀 사상의 마지막 '결론'이 아모르파티다.


2. 상세[편집]


니체가 말하는 '운명'이란 자기 내부의 의지가 내리는 명령의 목소리를 듣는 것, 즉 자신에게 자신의 강한 의지가 원하는 과제, 사명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히.[2]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절망 없이, 다가올 것과 존재할 모든 것이 나의 의지가 원한 것이라는 필연성을 느끼는 것, 일체의 '그러했다'를 '나는 그러길 원했다!'로 변형시키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되기를 하나의 운명으로 여기는 것, 그러한 일종의 결의를 다지는 모든 것[3]을 말한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발견하는가?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의 자신의 의도나, 종교, 도덕이 지시하는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를 조심하기만 한다면,[4] 조직하고 지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본능(이념[5])'이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옆길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도록 서서히 인도한다. 그 본능은 또한 어떤 지배적인 과제, 즉 '목표', '목적',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도 전에, 그것에 봉사하는 모든 능력이 차례로 형성되도록 미리 준비한다. 따라서 모든 능력은 갑자기 성숙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어느 날 개화하게 된다. 그러한 자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본 적이 없다. 단지 그 자신의 삶 자체에서 비롯된 사명이, 어느 순간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우리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급해질 필요는 없다. 본능이 너무 일찍 자신을 자각하여, 자신의 능력에 비해 감당하지 못할 과제와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인생의 실책들, 즉 때때로 옆길로 샌다든지, 길을 잘못 든다든지, 주저한다든지, 소극적으로 군다든지, 자신의 과제가 아닌 과제들에 진지한 관심을 낭비한다든지 등과 같은 실책들조차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오히려 이러한 실패의 경험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시험할 고통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자신의 과제, 혹은 사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수수께기이자 놀이이다. 인간은 그 수수께기와 놀이를 푸는 자이다. 그러나 의지가 병들었을 때 이것은 그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인간과 사물이 집요하게 그에게 달라붙고, 체험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아버린 상처가 된다. 반면 의지가 건강할 때 이것은 그에게 오히려 넘쳐 흐르는 싱싱함과 쾌활함, 가벼운 발걸음과 성취감을 가져다 준다. 이 모든 것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이다. 병들어 있다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 즉 방어 본능과 공격 본능이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이러한 병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힘을 낭비해선 안 된다. 강행군 끝에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숙명론처럼 '다른 것'에 가능한 한 드물게 반응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러한 경우에 위대함 그 자체다.

다시 말해, 강하고 건강한 의지를 통해서야 자신의 사명을 확인할 자격이 주어지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평생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극복할 사명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는 저항을 찾아 나선다. 그가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는 그가 보다 강력한 적수 또는 보다 강력한 문제를 찾아 나서는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상대가 나보다 약할 경우 굳이 결투할 필요가 없다. 그의 과제는 단순히 일반적인 저항을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과 유연함 그리고 싸움 기술을 쏟아부을 만한 저항을, 즉 자신과 대등한 적수를 제압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는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즐거워 한다. 강하면 강할수록 의욕이 넘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란, 이러한 자신의 과제와 사명,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과 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을 필연으로 여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견뎌내라는 것이 아니다. 감추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과거의 모든 것에서 후회와 한탄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의욕을 찾아내고, 미래의 모든 것에서 두려움과 절망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의욕을 찾아낸다. 그 의욕에서 나오는 기쁨은 너무나 강력해서 심지어 그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으로 인해 그 자신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그 과제를 위해 자신을 탕진하고 아끼지 않다가 기어코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기까지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며, 강물이 강둑을 넘어서 흐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생에의 의지, ㅡ 그러한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에 대한 니체의 대답이자 결론이다.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그 말 때문에 부서진다. 그러므로 나의 영원한 운명은 다음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예고자로서 나는 파멸하고자 한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자신에게 축복을 내릴 때가 왔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고통스런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헤쳐나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의지의 결과를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의지 그 자체'를 사랑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결과니까 후회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지, '그 결과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차라리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니다. 즉,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는 이유가 있어야, 그 이후의 필연적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므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운명이니까 받아들여라" 식의 운명론적 체념은 니체의 의도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6]

3. 관련된 니체의 어록[편집]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의 소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말한다. 그래서 나도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이해를 함에 있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스쳐가는 생각,—앞으로의 삶에서 내게 근거와 보증, 달콤함이 될 생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ㅡ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ㅡ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7]

『이 사람을 보라』


가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영감 아래서, 즉 삶의 광학 아래서 말한다. 즉 우리에게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삶 자체이며, 우리가 가치를 설정할 때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 (중략)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다가올 것과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법칙, 하나의 필연성이다. 그러한 개인에게 '달라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는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조차도 달라지라고 하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관된 도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달라지기를 바랐다. 다시 말해 유덕해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을 닮기를, 다시 말해 위선자가 되기를 바랐다.

『우상의 황혼』 [8]


하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환경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각 개인의 숙명적인 본성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나 어떤 의지 혹은 어떤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ㅡ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맞추려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목적'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것은 우리 자신이다. 목적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은 필연적인 존재이며 하나의 숙명이다. 그는 전체에 속해 있으며 전체 안에 존재한다.

『우상의 황혼』 [9]


아름다움에서 인간이 완전성의 척도로 정립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특별한 경우에 그는 아름다운 것을 찬탄할 때 실은 자기 자신을 찬탄한다. 이런 식으로만 인류는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깊은 본능인 자기보존 및 자기확장 본능이 아름다움과 같이 고상한 것들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인간은 세계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다름 아닌 인간이 세계에 아름다움을 선사한 것이다. 아아! 다만 아주 인간적이고 ㅡ 너무나 인간적인 아름다움만을 그는 세계에 선사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사물에 자기 자신을 반영하며, 자신의 모습을 되비추어주는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중략)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아름답다. 모든 미학은 이런 소박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미학의 제일의 진리다.

『우상의 황혼』 [10]


어떤 일의 가치는 때로는 그 일에 의해 달성되는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위해 치러지는 것에, 즉 우리가 얼마나 비용을 치러야 하는가에 있다.

『우상의 황혼』 [11]


천재란 필연적으로 낭비하는 자다. 자신을 다 내준다는 것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그에게서) 자기보존의 본능은 이를테면 그 활동이 중지되어 있다.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이 그에게 자신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희생적 행위'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점에서 그의 '영웅성'과 자신의 안위에 대한 무관심, 어떤 이념이나 어떤 대의 혹은 조국을 위한 그의 헌신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오해다. 그는 다만 내부로부터 솟아나고 넘쳐흐르며 자신을 탕진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을 뿐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며, 강물이 강둑을 넘어서 흐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상의 황혼』 [12]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생에의 의지, ㅡ 이것이야말로 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비극 시인의 심리학에 이르는 교량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공포와 연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해석하는 것처럼 공포와 연민을 격렬하게 방출함으로써 그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의 영원한 기쁨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ㅡ 파괴에 대한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이와 함께 나는 일찍이 내가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ㅡ 『비극의 탄생』은 모든 가치에 대해 내가 최초로 시도한 재평가였다. 이와 함께 나는 나의 의지와 능력이 자라나오는 토양 안에 다시 뿌리를 박는다.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인 나 ㅡ 영원회귀의 스승인 나는⋯⋯.

『우상의 황혼』 [13]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자신의 사명을 ㅡ 그것은 또한 나의 사명이기도 하다 ㅡ 엄격하게 규정했기에 이제는 그 누구도 그것의 의미를 오해할 수 없다. 그는 과거의 모든 것을 시인하고 구원하기에 이르기까지 긍정한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거닐지만, 이 경우 사람들은 미래의 파편들이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미래의. 그리고 파편이요 수수께끼요 끔찍한 우연인 것을 하나로 모으고 응축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시작(詩作)과 노력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시인도 아니고 수수께끼를 푸는 자도 아니며 우연의 구원자도 아니라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과거의 것들을 구원하고 일체의 '그러했다'를 '나는 그러길 원했다!'로 변형시키는 것 ㅡ 이것만이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14]


병들어 있다는 것, 허약하다는 것에 대해 무언가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치유 본능, 즉 방어 본능과 공격 본능이 쇠퇴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줄 모르고 아무것도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며 어떤 것도 퇴치할 줄 모르게 된다.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인간과 사물이 집요하게 그에게 달라붙고, 체험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아버린 상처가 된다. 병들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원한 자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병자는 오로지 하나의 위대한 치료법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러시아적 숙명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강행군 끝에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숙명론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하지도 않으며 자기 속으로 흡수하지 않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15]


나에게 유연히 주어졌던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 장소, 거처, 모임들을 몇 년 동안 끈질기게 견디고 있을 때, 내가 앞에서 말했던 '러시아적 숙명론'이 나를 찾아왔다. 이 러시아적 숙명론이 그런 우연한 것들을 바꾸거나 그것들을 바꿀 수도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또한 그것들에 반항하는 것보다 더 나았다. 이런 숙명론 속에서 견디고 있는 나를 방해하거나 강제로 깨우려고 하는 일을 그 당시의 나는 치명적일 정도로 나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것은 매번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했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러한 경우에 위대한 이성 그 자체다.

『이 사람을 보라』 [16]


이 모든 것에서 ㅡ 즉 영양, 장소와 기후, 휴식의 선택에 있어서 ㅡ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이다. 자기보존 본능은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가장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많은 것을 보지 않고, 많은 것을 듣지 않으며, 많은 것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첫째가는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첫째가는 증거다. 이러한 자기방어 본능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란 말이다.

『이 사람을 보라』 [17]


이 대목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하는 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아래와 같이 답을 제시함으로써 나는 자기보존, 즉 자기애의 기술에서 걸작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과제, 사명, 과제의 운명이 평균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경우, 그러한 과제를 갖는 자기 자신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에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희미하게라도 예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가 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인생의 실책들, 즉 때대로 옆길로 샌다든지, 길을 잘못 든다든지, 주저한다든지, '소극적으로 군다든지', 자신의 과제가 아닌 과제들에 진지한 관심을 낭비한다든지 등과 같은 실책들조차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략) 의식의 전 표면 ㅡ 의식은 표면이다 ㅡ 은 모든 위대한 명령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순수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를 조심하라! 본능이 너무 일찍 '자신을 자각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 사이에, 조직하고 지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이념'이 의식의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옆길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도록 서서히 인도한다. 또한 그 이념은 언젠가 전체를 위한 수단으로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입증될 개별적인 성질과 자질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지배적인 과제, 즉 '목표', '목적',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전에, 그것에 봉사하는 모든 능력을 차례로 형성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18]


누군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즉 도대체 왜 나는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는가라고. 더군다나 내가 위대한 과제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면,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닌가라고. 나는 이렇게 답한다. 사소한 것들 ㅡ 영양, 장소, 기후, 휴식, 자기애의 결의론(Casuistik) 전체 ㅡ 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배우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이 사람을 보라』 [19]


나는 진정으로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 하나는 지하의 은밀한 복수욕과 함께 삶에 대해 저항하는 퇴화하는 본능이다. 다른 하나는 충만과 충일에서 탄생한 최고의 긍정 형식, 즉 고통과 죄 자체에 대한 그리고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이다. 삶에 대한 이렇게 궁극적이면서도 가장 기쁨에 차 있고 가장 충일하면서도 가장 의기양양한 긍정은 최고의 통찰일 뿐 아니라 진리와 학문에 의해서 가장 엄격하게 입증되고 보존되는 가장 심오한 진리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교인들과 그 외의 허무주의자들에 의해서 거부된 삶의 측면들이야말로 데카당한 본능이 시인하고 시인해도 되었던 측면들보다도 가치들의 위게질서에서 무한히 높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그러한 용기를 갖기 위한 조건으로서 넘치는 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용기가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로 그만큼, 즉 바로 그 힘의 정도만큼 사람들은 진리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한 자들에게 그러한 인식이, 즉 현실에 대한 긍정이 필연적이듯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함으로 인한 현실에 대한 비겁과 현실로부터의 도피, 즉 '이상'이라는 것이 필연적이다. 약한 자들은 현실을 아무리 제대로 인식하고 싶어도 인식할 수 없다. 데카당들은 거짓을 필요로 한다. 거짓이 그들을 유지하는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보라』 [20]



4. 기타[편집]


  • 국내에선 에픽하이의 노래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후 이 단어 유행이 김연자의 트로트 곡의 인기로 확대되며 2017년 대한민국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유행어가 그렇듯 유행이 지난 뒤로는 잘 사용하지 않으며 'Amor Fati'라는 문구도 심오한 뜻이 다소 곡해되는 경우가 많다. 힘든 일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운명이니까 받아들이고 포기해'라는 굴복의 의미로[21] 'Amor Fati'라는 말을 건네거나, '난 못났으니까 이대로 살아야지'라며 순응의 의미로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허무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철학 용어라는 점에서, 사용에 유의해야 한다.


5.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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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eine Formel für die Größe am Menschen ist amor fati: daß man nichts anders haben will, vorwärts nicht, rückwärts nicht, in alle Ewigkeit nicht. Das Notwendige nicht bloß ertragen, noch weniger verhehlen – aller Idealismus ist Verlogenheit vor dem Notwendigen –, sondern es lieben...[2]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ㅡ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ㅡ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3] 니체는 이를 '자기애의 결의론(Casuistik)'이라고 칭한다.[4]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는 남의 과제와 남의 사명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과제와 사명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나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찾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한다.[5] 여기서 '이념'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가리킨다.[6] 주의해야할 점은 이 사랑이 기독교가 강조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동정과 연민)을 비판하는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 비판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니체의 의도는 단지 위버멘쉬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기사랑이, 이웃사랑(동정과 연민)보다도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쓰기 때문에 보여주는 '타인에 대한 사랑'은 위선에 불과할 뿐이라는게 니체의 지적이다. 반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의 평판에 신경쓰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동정과 연민은 순수하다. 즉, 위선적이지 않다. 그래서 니체는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7] Meine Formel für die Größe am Menschen ist amor fati: daß man nichts anders haben will, vorwärts nicht, rückwärts nicht, in alle Ewigkeit nicht. Das Notwendige nicht bloß ertragen, noch weniger verhehlen – aller Idealismus ist Verlogenheit vor dem Notwendigen –, sondern es lieben...[8]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60~61[9]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76~77[10]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20~121[11]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20~121[12]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55[13]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76[14]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03~204[15]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51~52[16]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52[17]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92~93[18]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97~98[19]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101[20]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135~136[21] 사실 이런 경우는 "VAE VICTIS(패자는 비애뿐)"이 더 적합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