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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C 전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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優等形電氣動車 / Express Electric Car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중장거리 여객용 전동차. 1980년 11월 1일부터 2001년 2월 28일까지 우등, 무궁화호, 통일호로 운행됐다. 일본 국철의 485계 전동차를 참고해 만든 것이라 485계 전동차, 583계 전동차와 닮았으며 당시 트렌드인 '고공 운전석'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런 고공운전석은 50년대 말 다이이치 코다마 시절부터의 전통이다. 초기 도색 또한 일본 특급열차의 도색을 약간 변형만 시킨 것이다.
중앙선, 영동선[5] , 태백선[6] 의 전철화가 완료가 된 1970년대, 당시 대한민국 철도청은 해당 구간이 탄광으로 수요가 급증[7] 한 데다 전철화된 구간에 디젤 차량을 운행하는 데에 부담을 느끼게 되어서 특급형 전동차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8]
그리고 그때 마침 일본에는 전설의 485계가 절찬리 운행중에 있었고, 이에 영감을 받은 철도청은 1977년부터 일본 국철 및 히타치 제작소와 제휴하여, 운전실 및 내부 구조 등을 일본이 설계한 특급형 전동차인 EEC를 도입하게 된다.
이 전동차는 핵심부품인 전동기 등은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의 1세대형 차량과 같았으나 그 외 SIV 위치, 억속제동 추가, 집전장치 등이 특급형에 맞도록 재설계됐다.
10량 1편성, 총 2개 편성을 도입했다. 동력비율은 6M4T. 6량의 동력차와 4량의 무동력차로 이루어졌다. 특실, 식당차[9] , 운전실은 부수(T) 차량이었고[10] 나머지는 전부 모터차량이었다. 이 모터 차량은 저항제어 차량이었으며 성능은 초저항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991(9901-9902)편성, 992(9903-9904)편성이 운행했다.[11] 편성 조성은 아래와 같이 이루어졌었다. [12]
화장실이 식당차와 특실에 있어서 통일호 격하 이후에도 차량은 연결됐으나 식당 영업과 특실 추가금은 없었다. 그러나 식탁 등 식당 설비, 특실의 새마을호급 의자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통일호 격하 이후에는 장거리 통학생이 책 펴놓고 공부할 수 있는 식당차와 좌석이 압도적으로 편한 특실을 차지하려고 개표 이후 전속력으로 뛰어다닐 정도로 좌석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전동차인데다가, 열차에 들어간 전장품 일체가 모두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와 같은 저항제어였고, 구동음이나 성능도 비슷했다. 검수도 구로차량사무소에서 받았고, 중정비는 과거 용산역 옆에 있었던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에서 정비를 받았다.
청량리역 - 원주역 - 제천역 - 태백역 - 동해역 구간이 끝이었다.[13][14] 동해역[15] 이후로는 운행 당시 전철화가 되지 않은 구간[16] 이기 때문에 그 이북으로의 입선은 불가능했다. 우등형 운행 당시 청량리역에선 14시, 동해역에선 15시에 각 목적지로 출발했다. 통일호 격하 이후로는 아침에 청량리로 올라오고 저녁에 원주, 제천으로 가는 통일호로 운용했다.[17] 2개 편성 중 하나는 청량리-원주, 나머지 하나는 제천까지 운행했다. 다만 차량의 검수를 구로역 인근 구로차량사무소에서 받다 보니 청량리역에서 회송되어서 구로역으로 온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일반실은 모두 전환식[18] 이지만 특실은 당시 새마을호 특실의 의자를 그대로 가져왔다. 시트 색상은 빨간색이었으며 리클라이닝까지 가능했다. 그래서 특실에 한해서는 당시 무궁화호 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사양이었다. 하지만 일반실은 그냥 통일호 의자 그대로 썼다.
그리고 같은 제작사인 대우중공업에서 한달 먼저 제작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전동차의 영향을 받아서 철도차량에서는 국내에서 두번째로 평천장 구조가 도입됐으며, 장거리 여객용 차량으로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EEC 이후에 제작되는 무궁화호급 차량은 다시 둥근 천장으로 회귀했다가, 13년이 흐른 1993년에 와서야 다시 평천장 구조가 도입됐다.
일본국유철도의 기술지원을 받아 국내에서는 매우 드문 형태인 원유닛형 집중식 냉방기[19] 를 사용했기 때문에 통근형 전동차 같은 에어컨 덕트 구조도 특징.
그리고 화장실은 특이하게도 T차(무동력 객차)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당시 기술로는 복잡한 전동기와 화장실을 같이 설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기술상의 한계로 비산식 화장실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스템 비중이 적은 T차에다, 그것도 특실과 식당이 있는 칸에다가 화장실을 집중 설치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철도공사 9900호대 전동차/현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성기에는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의 차로가 2차로 뿐인 데다 선형마저 좋지 못해 EEC가 인기가 있었다. 구 영동고속도로였던 현 456번 지방도를 달릴 기회가 있다면 느낄 수 있겠지만 강릉 방향에서 대관령으로 올라가는 커브길을 달리다 보면 그다지 빠른 속력으로 달리지 않아도곡선이 너무 많아 빨리 달릴 수도 없다 타이어가 슬립을 견디지 못하고 타는 냄새가 날 정도... 거기에 대관령 근처까지 다 와서 이제 커브길은 없겠지...하고 안심하던 찰나 안개를 만나면 전방 10m 앞은 시야 완벽 차단...
게다가 중앙고속도로는 없었으며, 중간 수요인 태백선과 영동선 일대에는 탄광이 많이 개발되면서 탄광 노동자들의 인기[20] 도 상당했다. 게다가 당시 8000호대 전기기관차 견인보다 소요 시간이 더 짧았는데, 최고 속도에서도 미세하게나마 EEC가 우위를 점령했고 기동 가속도는 아예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태백선 연선 일대가 완전히 몰락하면서 이 열차를 이용한 승객 수도 줄어버렸다. 게다가 차량 노후화로 인한 서비스 품질의 저하도 문제였다.[21] 1990년[22] 부터 운행된 장대형 새마을호와 1994년[23] 부터 도입되어 운행하는 신규 제작 장대형 무궁화호와 상대적 품질을 비교당하기도 했고, 일부 승객들이 느끼는 서비스와 환경의 차이로 인해 철도청에 수시로 민원을 제기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각종 TV매체 등 언론을 통해서도 노후 차량이라는 사회적 비난까지 당하게 된다. 인테리어에서도 한번에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승하차 계단 쪽 출입문이 안전에 취약한 수동문이었고 일반실의 시트는 리클라이닝도 안 되는 통일호와 동일한 모델로서 이 상태로 무궁화호 운임을 고스란히 책정했던 점에서 이용객들의 원성#과 잦은 민원 쇄도라는 오점도 남겼다#.
결국 1998년 12월 1일, EEC 2개 편성은 아무 개조 없이[24] 통일호로 격하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청량리역 - 원주역, 청량리역 - 제천역 구간의 통근형 통일호로 격하되어 운행했다. 그렇게 또 2년 3개월을 운행하다가 1개 편성은 2000년 12월 14일에 제천발 청량리행 영업을 끝으로, 남은 하나의 편성은 2001년 2월 28일에 원주발 청량리행 영업을 끝으로 운용 21년만에 현업에서 조기 은퇴했다.
우선 이 문단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작전이라 적은 이유는 원래 철도청에서는 이 차량을 철도박물관에 보존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20량을 그대로 다 폐차해서 고물상으로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철도 동호인들의 반발은 철도청의 예상 그 이상이었다. 이를 알게 된 철도 동호인들은 다음의 레일플러스 철도 동호회[25] 를 필두로 EEC 폐차하지 말고 보존해 주세요라는 민원을 엄청나게 올려서 결국 2001년 8월 선두차 9904호가 철도 박물관에 전시됐다. 전시할 때는 바로 옆 경부선 철길까지 끌고 온 후 대형 크레인으로 옮겼다.[26] 대한민국 철도 동호인 역사 사상 최초로 동호인의 힘으로 철도 운영기관의 정책을 바꾼 대사건이 발생한 것. 그렇게 EEC는 철도 박물관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 있게 됐고, 철도 박물관 전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전성기의 도색을 했다.[27] 지금도 초저항 전동차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내부는 상당히 관리가 잘 되는 편이나, 운전실의 상태는 썩 좋지 못하다. 지금은 막혀 있지만, 초저항과 달리 운전실이 오픈되어 있어서 누구나 올라가 볼 수 있도록 한 적도 있었다. 상당히 높기 때문에 특이한 기분이 든다.
운전실의 온도가 꽤 높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운전실이 타 차량보다 높은 곳에 있는데다, 운전실 지붕이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승용차 지붕 스타일로 굉장히 얇은 편이다. 운전실에 공조장치가 원래부터 없었다면 하계 운행은 기관사들에겐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듯.
객실의 상태는 아주 좋은 편이고 퇴역 당시의 내부 광고를 그대로 존치해 두었다. TC 맨 뒤로 가면 초저항의 전두부를 볼 수 있다. 2012년 재도색을 했는데, 위 사진의 빨강에 가까운 원래 색상을 오렌지색 비슷한 페인트로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작업 자체도 완전히 잘못되고 말았다.
우선, 이 차량의 의의라면 한국철도 사상 최초의 특급형 전동차였다는 것. 운행 당시에는 우등형 전동차로 운행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만큼 수요도 뒷받침이 됐다. 다만 운행구간이 중앙-태백-영동선 뿐이었던 이유는 당시 경부선마저도 수원 이남은 비전철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수원까지나면, 1호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철화에 신경을 안 썼기도 했었으니...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일.[28] 주력노선인 경부선에 디젤기관차만 주구장창 굴러다녔던 이유. 경인선에나 1호선에서 보이는 그 흔한 전차선 카데나리가 수원역을 지나고 남쪽으로 간지 얼마 안 되어 뚝 끊겨 있었다.
2003년의 병점역 연장이 한국 철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경부선 전철화였다.[29]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는 천안역까지 연장됐고, 또 1년이 더 지나고, 경원선 전철화까지 이루어졌다. 경부선이 80년대에 이미 전철화됐다면 아마 이 차량의 후속형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무궁화호로 굴러다니거나 새마을호를 PP디젤동차가 아니라 진작 부터 전기동차로 도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KTX가 1990년대에 개통됐을 수도 있다[30] . 물론 TGV 001의 영감을 바도 기존선을 고속화 시키고 디젤 고속열차를 굴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기름 먹는 하마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일반석 조차 매우 비싼 말그대로 철도계의 콩코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1]
그리고 이때 국내 철도 기술자들은 이 차량을 열심히 연구하여 후일 8000호대 전기기관차도 재생해 내고, 저항제어 방식의 통근 전동열차의 개량 및 신규 제작하는 데 밑거름이 되게 된다.[32]
게다가 대한민국 최초로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도입한 동력분산식 전동차이기도 하다.사진 모음 보통 TEC부터 동력분산식 전동차에 최초로 도입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싱글암 팬터그래프가 최초로 적용된 전동차는 이 차량이다. 이 차량의 베이스가 일본 전동차 기술이었던 것과 달리, 먼저 도입된 8000호대 전기기관차처럼 유럽식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채택했다. 더블암 팬터그래프를 채택한 원본 485계 전동차보다도 진보한 부분이다.[33]
다만 화장실이 비산식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정화조가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곧 화장실을 사용하면 사용한 그 즉시 그대로 선로에 오물이 투척되는 방식이었다. 당대의 최신 기술을 적용하고도 동력분산식 전동차의 구조 문제상 어쩔 수 없이 정화조를 설치하지 못했다. 모터 부분의 문제로 동력차에 설치하지도 못했다. 물론 TEC 전동차부터 제조되는 차량들은 완전히 개선됐다.
또한 도입 당시 기준으로 한국철도의 전철화 부족도 문제였다. 위에 설명했듯 EEC는 한국철도 사상 최초의 중장거리 여객용 특급형 전동차로 그 기술적 가치는 형제기라 할수있는 DEC보다도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새마을호로 도입되고 격하되고도 무궁화호로 운행한 DEC와 달리 EEC는 처음부터 무궁화호로 도입되고 나중에는 통일호까지 격하되는 등, 첫 도입부터 마지막까지도 DEC보다 낮은 등급으로 운행했던 것도 당시 전철화 구간이 많지 않아 DEC에 비해 투입할 수 있는 노선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열차는 수도권 전철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저항 특유의 뜨끈한 열기를 느낄수 있었던 여객 열차였다.
응답하라 1988 사진에서 EEC 전동차가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촬영지는 철도박물관.
1998년에 방영된 전원일기 865회에서 구 양수철교를 운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34]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중앙선 항목에서도 EEC 전동차가 백척교를 지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다.
DEC 디젤동차와는 형제기로 볼 수 있지만, 최초 도입 당시 DEC는 새마을호로 도입됐고 EEC는 우등(무궁화)로 도입됐다. 이후 1987년 DEC가 무궁화호로 격하됐고, 두 동차는 이후로 1998년에 EEC가 통일호로 격하되기 전까지 약 11년을 같은 무궁화호 등급에서 활약했다.
36분 15초(그나마 음질이 깨끗한 부분) 부터 나온다.
1. 개요[편집]
優等形電氣動車 / Express Electric Car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중장거리 여객용 전동차. 1980년 11월 1일부터 2001년 2월 28일까지 우등, 무궁화호, 통일호로 운행됐다. 일본 국철의 485계 전동차를 참고해 만든 것이라 485계 전동차, 583계 전동차와 닮았으며 당시 트렌드인 '고공 운전석'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런 고공운전석은 50년대 말 다이이치 코다마 시절부터의 전통이다. 초기 도색 또한 일본 특급열차의 도색을 약간 변형만 시킨 것이다.
2. 탄생[편집]
중앙선, 영동선[5] , 태백선[6] 의 전철화가 완료가 된 1970년대, 당시 대한민국 철도청은 해당 구간이 탄광으로 수요가 급증[7] 한 데다 전철화된 구간에 디젤 차량을 운행하는 데에 부담을 느끼게 되어서 특급형 전동차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8]
그리고 그때 마침 일본에는 전설의 485계가 절찬리 운행중에 있었고, 이에 영감을 받은 철도청은 1977년부터 일본 국철 및 히타치 제작소와 제휴하여, 운전실 및 내부 구조 등을 일본이 설계한 특급형 전동차인 EEC를 도입하게 된다.
이 전동차는 핵심부품인 전동기 등은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의 1세대형 차량과 같았으나 그 외 SIV 위치, 억속제동 추가, 집전장치 등이 특급형에 맞도록 재설계됐다.
3. 운영[편집]
3.1. 편성[편집]
10량 1편성, 총 2개 편성을 도입했다. 동력비율은 6M4T. 6량의 동력차와 4량의 무동력차로 이루어졌다. 특실, 식당차[9] , 운전실은 부수(T) 차량이었고[10] 나머지는 전부 모터차량이었다. 이 모터 차량은 저항제어 차량이었으며 성능은 초저항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991(9901-9902)편성, 992(9903-9904)편성이 운행했다.[11] 편성 조성은 아래와 같이 이루어졌었다. [12]
화장실이 식당차와 특실에 있어서 통일호 격하 이후에도 차량은 연결됐으나 식당 영업과 특실 추가금은 없었다. 그러나 식탁 등 식당 설비, 특실의 새마을호급 의자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통일호 격하 이후에는 장거리 통학생이 책 펴놓고 공부할 수 있는 식당차와 좌석이 압도적으로 편한 특실을 차지하려고 개표 이후 전속력으로 뛰어다닐 정도로 좌석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3.2. 정비[편집]
전동차인데다가, 열차에 들어간 전장품 일체가 모두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와 같은 저항제어였고, 구동음이나 성능도 비슷했다. 검수도 구로차량사무소에서 받았고, 중정비는 과거 용산역 옆에 있었던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에서 정비를 받았다.
3.3. 운행 구간[편집]
청량리역 - 원주역 - 제천역 - 태백역 - 동해역 구간이 끝이었다.[13][14] 동해역[15] 이후로는 운행 당시 전철화가 되지 않은 구간[16] 이기 때문에 그 이북으로의 입선은 불가능했다. 우등형 운행 당시 청량리역에선 14시, 동해역에선 15시에 각 목적지로 출발했다. 통일호 격하 이후로는 아침에 청량리로 올라오고 저녁에 원주, 제천으로 가는 통일호로 운용했다.[17] 2개 편성 중 하나는 청량리-원주, 나머지 하나는 제천까지 운행했다. 다만 차량의 검수를 구로역 인근 구로차량사무소에서 받다 보니 청량리역에서 회송되어서 구로역으로 온 경우도 간혹 있었다.
3.4. 실내 인테리어[편집]
일반실은 모두 전환식[18] 이지만 특실은 당시 새마을호 특실의 의자를 그대로 가져왔다. 시트 색상은 빨간색이었으며 리클라이닝까지 가능했다. 그래서 특실에 한해서는 당시 무궁화호 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화스러운 사양이었다. 하지만 일반실은 그냥 통일호 의자 그대로 썼다.
그리고 같은 제작사인 대우중공업에서 한달 먼저 제작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전동차의 영향을 받아서 철도차량에서는 국내에서 두번째로 평천장 구조가 도입됐으며, 장거리 여객용 차량으로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EEC 이후에 제작되는 무궁화호급 차량은 다시 둥근 천장으로 회귀했다가, 13년이 흐른 1993년에 와서야 다시 평천장 구조가 도입됐다.
일본국유철도의 기술지원을 받아 국내에서는 매우 드문 형태인 원유닛형 집중식 냉방기[19] 를 사용했기 때문에 통근형 전동차 같은 에어컨 덕트 구조도 특징.
그리고 화장실은 특이하게도 T차(무동력 객차)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당시 기술로는 복잡한 전동기와 화장실을 같이 설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기술상의 한계로 비산식 화장실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스템 비중이 적은 T차에다, 그것도 특실과 식당이 있는 칸에다가 화장실을 집중 설치했다.
4. 현황[편집]
자세한 내용은 한국철도공사 9900호대 전동차/현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전성기와 그 이후[편집]
전성기에는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의 차로가 2차로 뿐인 데다 선형마저 좋지 못해 EEC가 인기가 있었다. 구 영동고속도로였던 현 456번 지방도를 달릴 기회가 있다면 느낄 수 있겠지만 강릉 방향에서 대관령으로 올라가는 커브길을 달리다 보면 그다지 빠른 속력으로 달리지 않아도
게다가 중앙고속도로는 없었으며, 중간 수요인 태백선과 영동선 일대에는 탄광이 많이 개발되면서 탄광 노동자들의 인기[20] 도 상당했다. 게다가 당시 8000호대 전기기관차 견인보다 소요 시간이 더 짧았는데, 최고 속도에서도 미세하게나마 EEC가 우위를 점령했고 기동 가속도는 아예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태백선 연선 일대가 완전히 몰락하면서 이 열차를 이용한 승객 수도 줄어버렸다. 게다가 차량 노후화로 인한 서비스 품질의 저하도 문제였다.[21] 1990년[22] 부터 운행된 장대형 새마을호와 1994년[23] 부터 도입되어 운행하는 신규 제작 장대형 무궁화호와 상대적 품질을 비교당하기도 했고, 일부 승객들이 느끼는 서비스와 환경의 차이로 인해 철도청에 수시로 민원을 제기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각종 TV매체 등 언론을 통해서도 노후 차량이라는 사회적 비난까지 당하게 된다. 인테리어에서도 한번에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승하차 계단 쪽 출입문이 안전에 취약한 수동문이었고 일반실의 시트는 리클라이닝도 안 되는 통일호와 동일한 모델로서 이 상태로 무궁화호 운임을 고스란히 책정했던 점에서 이용객들의 원성#과 잦은 민원 쇄도라는 오점도 남겼다#.
결국 1998년 12월 1일, EEC 2개 편성은 아무 개조 없이[24] 통일호로 격하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청량리역 - 원주역, 청량리역 - 제천역 구간의 통근형 통일호로 격하되어 운행했다. 그렇게 또 2년 3개월을 운행하다가 1개 편성은 2000년 12월 14일에 제천발 청량리행 영업을 끝으로, 남은 하나의 편성은 2001년 2월 28일에 원주발 청량리행 영업을 끝으로 운용 21년만에 현업에서 조기 은퇴했다.
6. 철도박물관 보존 작전[편집]
우선 이 문단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작전이라 적은 이유는 원래 철도청에서는 이 차량을 철도박물관에 보존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20량을 그대로 다 폐차해서 고물상으로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철도 동호인들의 반발은 철도청의 예상 그 이상이었다. 이를 알게 된 철도 동호인들은 다음의 레일플러스 철도 동호회[25] 를 필두로 EEC 폐차하지 말고 보존해 주세요라는 민원을 엄청나게 올려서 결국 2001년 8월 선두차 9904호가 철도 박물관에 전시됐다. 전시할 때는 바로 옆 경부선 철길까지 끌고 온 후 대형 크레인으로 옮겼다.[26] 대한민국 철도 동호인 역사 사상 최초로 동호인의 힘으로 철도 운영기관의 정책을 바꾼 대사건이 발생한 것. 그렇게 EEC는 철도 박물관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 있게 됐고, 철도 박물관 전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전성기의 도색을 했다.[27] 지금도 초저항 전동차와 함께 보존되어 있다. 내부는 상당히 관리가 잘 되는 편이나, 운전실의 상태는 썩 좋지 못하다. 지금은 막혀 있지만, 초저항과 달리 운전실이 오픈되어 있어서 누구나 올라가 볼 수 있도록 한 적도 있었다. 상당히 높기 때문에 특이한 기분이 든다.
운전실의 온도가 꽤 높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운전실이 타 차량보다 높은 곳에 있는데다, 운전실 지붕이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승용차 지붕 스타일로 굉장히 얇은 편이다. 운전실에 공조장치가 원래부터 없었다면 하계 운행은 기관사들에겐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듯.
객실의 상태는 아주 좋은 편이고 퇴역 당시의 내부 광고를 그대로 존치해 두었다. TC 맨 뒤로 가면 초저항의 전두부를 볼 수 있다. 2012년 재도색을 했는데, 위 사진의 빨강에 가까운 원래 색상을 오렌지색 비슷한 페인트로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작업 자체도 완전히 잘못되고 말았다.
7. 의의와 한계[편집]
우선, 이 차량의 의의라면 한국철도 사상 최초의 특급형 전동차였다는 것. 운행 당시에는 우등형 전동차로 운행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그만큼 수요도 뒷받침이 됐다. 다만 운행구간이 중앙-태백-영동선 뿐이었던 이유는 당시 경부선마저도 수원 이남은 비전철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수원까지나면, 1호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철화에 신경을 안 썼기도 했었으니...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일.[28] 주력노선인 경부선에 디젤기관차만 주구장창 굴러다녔던 이유. 경인선에나 1호선에서 보이는 그 흔한 전차선 카데나리가 수원역을 지나고 남쪽으로 간지 얼마 안 되어 뚝 끊겨 있었다.
2003년의 병점역 연장이 한국 철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경부선 전철화였다.[29]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는 천안역까지 연장됐고, 또 1년이 더 지나고, 경원선 전철화까지 이루어졌다. 경부선이 80년대에 이미 전철화됐다면 아마 이 차량의 후속형이 지금도 어디에선가 무궁화호로 굴러다니거나 새마을호를 PP디젤동차가 아니라 진작 부터 전기동차로 도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KTX가 1990년대에 개통됐을 수도 있다[30] . 물론 TGV 001의 영감을 바도 기존선을 고속화 시키고 디젤 고속열차를 굴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기름 먹는 하마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일반석 조차 매우 비싼 말그대로 철도계의 콩코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1]
그리고 이때 국내 철도 기술자들은 이 차량을 열심히 연구하여 후일 8000호대 전기기관차도 재생해 내고, 저항제어 방식의 통근 전동열차의 개량 및 신규 제작하는 데 밑거름이 되게 된다.[32]
게다가 대한민국 최초로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도입한 동력분산식 전동차이기도 하다.사진 모음 보통 TEC부터 동력분산식 전동차에 최초로 도입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싱글암 팬터그래프가 최초로 적용된 전동차는 이 차량이다. 이 차량의 베이스가 일본 전동차 기술이었던 것과 달리, 먼저 도입된 8000호대 전기기관차처럼 유럽식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채택했다. 더블암 팬터그래프를 채택한 원본 485계 전동차보다도 진보한 부분이다.[33]
다만 화장실이 비산식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정화조가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곧 화장실을 사용하면 사용한 그 즉시 그대로 선로에 오물이 투척되는 방식이었다. 당대의 최신 기술을 적용하고도 동력분산식 전동차의 구조 문제상 어쩔 수 없이 정화조를 설치하지 못했다. 모터 부분의 문제로 동력차에 설치하지도 못했다. 물론 TEC 전동차부터 제조되는 차량들은 완전히 개선됐다.
또한 도입 당시 기준으로 한국철도의 전철화 부족도 문제였다. 위에 설명했듯 EEC는 한국철도 사상 최초의 중장거리 여객용 특급형 전동차로 그 기술적 가치는 형제기라 할수있는 DEC보다도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새마을호로 도입되고 격하되고도 무궁화호로 운행한 DEC와 달리 EEC는 처음부터 무궁화호로 도입되고 나중에는 통일호까지 격하되는 등, 첫 도입부터 마지막까지도 DEC보다 낮은 등급으로 운행했던 것도 당시 전철화 구간이 많지 않아 DEC에 비해 투입할 수 있는 노선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8. 기타[편집]
해당하는 열차는 수도권 전철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던 저항 특유의 뜨끈한 열기를 느낄수 있었던 여객 열차였다.
응답하라 1988 사진에서 EEC 전동차가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촬영지는 철도박물관.
1998년에 방영된 전원일기 865회에서 구 양수철교를 운행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34]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중앙선 항목에서도 EEC 전동차가 백척교를 지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있다.
DEC 디젤동차와는 형제기로 볼 수 있지만, 최초 도입 당시 DEC는 새마을호로 도입됐고 EEC는 우등(무궁화)로 도입됐다. 이후 1987년 DEC가 무궁화호로 격하됐고, 두 동차는 이후로 1998년에 EEC가 통일호로 격하되기 전까지 약 11년을 같은 무궁화호 등급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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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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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6년까지는 구도색으로 운행. 1996년쯤에 도색을 다시 입힌 듯 하다. 하지만 1998년 12월 통일호 격하로 의해 해당도색은 2년여 만에 또 다시 도색변경을 해야했다.[2] 참고로 1994년 철도청의 CI도색이 바뀌면서 통일호는 위와 같은 노랑-초록-흰색 순으로 바뀌었다. 수도권 전철 당시에는 1호선, 경원선의 성북~용산 구간, 안산선에서만 운행했다. 새마을호, 통일호, 비둘기호가 저런 유형의 도색을 하고 다녔다. 사실 통일호는 원래 새마을호와는 다른 남색을 적용했으나 몇년 지나지 않아 완행화가 시작될 즈음 다시 새마을호와 동일한 녹색으로 바뀐다.[3] 같은 저항제어 10량 1편성 전동차일지라도, 운행에 따른 출력 차이를 고려하여 MT비 또는 배치가 다르다.
한국철도공사 9900호대 전동차: Tc-M-M-M-M-T-T-M-M-Tc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Tc-M-M'-T-M-M'-T-M-M'-Tc
서울교통공사 2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Mc-M'-T-T-M'-M-T-T-M'-Mc[4] 초기: 191~192호[5] 이때 당시 북평역(현.동해역) 이북 구간과 철암-영주 구간은 전철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는 EEC가 청량리-동해에서만 다닌 이유이기도 하다.(참고로 철암-영주 전철화는 이 차량이 통일호로 격하되기 1년 전인 1997년 중반에 완료)[6] 이때 태백선은 있으나 태백삼각선이 없다. 즉 철암역 방면으로만 태백선이 연결되어 있고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방향전환을 한번 해야 했다.[7] 영월군, 정선군, 태백시의 전성기이다. 당시엔 그런 곳들이 부자동네라면 부자동네였다.[8] 그 당시가 1970년대 후반이다.[9] 비화에 따르면 EEC 설계에 관여하던 철도청 실무진은 반식반객으로 설계를 주문한 철도청장의 지시가 있었지만 운행 연선지역의 특성상 수요에 부응하여 한 칸 전체를 식당칸으로 설계했다고 한다.[10] 화장실은 특실 1곳, 식당 1곳, 선두차량은 두 곳에 있었다. 흰색 사기 재질의 구멍 뚫린 화변기(동양식)가 설치됐으며 정화조가 없는 비산식이었다.[11] 초기에는 191(1901-1902)편성, 192(1903-1904)편성으로 다녔었다.[12] 현재 KTX-산천을 제외한 모든 코레일과 서울교통공사 10량 1편성의 전동차의 차량번호는 0~9 순서이다.
코레일: 311000호대, 312000호대, 3070호대, 341000호대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2000호대, 3000호대, 4000호대[A] A B C D 한 개 또는 두 개의 화장실 및 세면대[13] 이렇게 된 이유는 EEC 개업 당시(1980년) 경부선은 서울~수원,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충북선, 경전선, 경의선, 경춘선은 전 구간 비전철화였기에 EEC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앙선조차도 청량리~제천까지, 영동선은 철암~동해까지, 유일하게 태백선만 전 구간이 전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운행할 수 있는 구간은 청량리~동해가 유일했다. 그나마 중앙선이 1987년에 제천~단성, 1988년에 단성~영주까지 전철화되었는데 그마저도 청량리~영주, 청량리~동해로 운행계통이 딱 하나 늘어난 것에 그쳤다.[14] 참고로 호남선은 2004년, 충북선은 2005년, 경부선은 2006년, 경의선은 2009년(당시 서울~문산), 경춘선은 2010년, 전라선은 2011년에야 전철화가 이루어져 전기 기관차가 운행을 개시했으며, 경전선은 2023년(삼랑진~진주~순천), 장항선은 2028년에야 전철화가 이루어질 예정이다.[15] EEC 운행개시 직후에는 역명이 북평역이었다. 2020년 3월 2일 부터 일반열차의 단축으로 청량리-동해 열차가 부활했다.[16] EEC 퇴역 이후인 2005년에 이르러서야 전철화되었다.[17] 당시 제천착발은 열번 #1223~#1224, 원주착발은 #1225~#1226 열번을 썼다. 2020년까지는 #1625~#1628 청량리 - 제천 무궁화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었다.[18] 통근열차 CDC 디젤동차에 있는 좌석. 등받이만 전환해서 방향을 바꿔서 앉는다.[19] 그 당시 103계 냉방차나 201계에 쓰이던 것과 거의 같은 형태.[20] 당시 태백에서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다. 즉 그만큼 노동자들이 돈이 많았고 이는 상대적으로 고급 열차로 운용됐던 EEC의 운임 지불 능력도 됐다는 얘기다.[21] 당시 전동차의 내구 연한이 최장 25년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도입한 초저항과는 다르게 특급형으로만 운용되어 노후화가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22] 3월 15일 청량리-동해간 새마을호 운행이 개시됐다.[23] 3월 31일 청량리-동해간 새마을호가 강릉까지 연장됐다.[24] 앞서 언급했던 대로 식당차와 특실도 퇴역 직전까지 그대로 달고 다녔다.[25] 당시장사꾼 바이트레인이나 철도 갤러리는 없었다.[26] 경부선 선로와 철도박물관은 담장과 왕복 2차선 도로가 사이에 있을 뿐이라 30여 미터 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런데 연결되는 선로는 없다. 철박 대지가 선로보다 2미터 정도나 높기 때문에 상당히 멀리서부터 분기해야 하는데, 이미 도로와 주택이 있어서 선로를 놓을 땅이 없기 때문이다.[27] 엄밀히 말하면 도색이 틀렸다. 현업시절의 EEC는 바탕색이 엷은 하늘색이었다. 바탕이 아이보리색이었던 건 DEC 디젤동차였다. 둘다 외관이 비슷하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으니 참고. 그래도 해준 게 어디여[28] 경부선의 경우 주요 간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원 이남 구간은 전철화가 되지 않았다가 2003년 수원~병점 구간, 2004년 KTX 개통을 앞두고 지천~부산 구간, 2005년 병점~천안, 천안~조치원 구간이, 잔여구간인 조치원~지천 구간은 2006년 12월에야 최종적으로 전철화되며 전 구간 전철화됐다.[29] 그 이전에는 병점역 연장도 있지도 않았다. 병점 연장도 1990년대에 와서야 계획된 것이다.[30] 경부고속철도는 이미 70년대 말 부터 구상이 있었던데다 기존선을 개량하는 방안도 존재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닌 셈[31] 지금 KTX 일반석 표 가격의 2~3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2] TEC 전동차는 또 일본에서 수입해 왔는데, 당시에는 엔화가 쌌고, 히타치가 완제품을 직접 파는 방식이 아니고, 일부 부속을 SLS 중공업에 제공하여, SLS 중공업에서 최종 조립되는 방식이라 상당수의 전장품이 국산으로 대체됐기 때문에 완전한 일본산 열차는 아니다. 또한 한국철도공사는 히타치의 A-train기술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33] 애초에 싱글암 팬터그래프 자체가 무려 1955년 프랑스 훼브레 트랜스포트 (Faiveley Transport)사에서 개발한 물건이다. 고속 운전에 적극적인 SNCF의 경우 1960년대 후반 이후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널리 쓰고 있었고, 프랑스와 직통운전을 하는 독일(당시 서독), 이탈리아도 도입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 1971년 케이한 2000계 1량에 상술한 프랑스 훼브레의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일본 최초로 도입했으나, 정식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후 훼브레 사의 특허가 만료된 1980년대 말 이후부터 일본 업체들도 싱글암 팬터그래프를 만들기 시작했고, 오사카메트로 70계 전동차부터 싱글암 팬터그래프가 본격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EEC가 일본 전동차 베이스지만 싱글암 팬터그래프는 유럽식을 채택한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34] 극중 금동의 아내가 되는 남영의 친정집이 양수철교가 바라보이는 양수리 강변에 있었다.
한국철도공사 9900호대 전동차: Tc-M-M-M-M-T-T-M-M-Tc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Tc-M-M'-T-M-M'-T-M-M'-Tc
서울교통공사 2000호대 저항제어 전동차: Mc-M'-T-T-M'-M-T-T-M'-Mc[4] 초기: 191~192호[5] 이때 당시 북평역(현.동해역) 이북 구간과 철암-영주 구간은 전철화가 되지 않았다. 결국 이는 EEC가 청량리-동해에서만 다닌 이유이기도 하다.(참고로 철암-영주 전철화는 이 차량이 통일호로 격하되기 1년 전인 1997년 중반에 완료)[6] 이때 태백선은 있으나 태백삼각선이 없다. 즉 철암역 방면으로만 태백선이 연결되어 있고 청량리에서 강릉으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방향전환을 한번 해야 했다.[7] 영월군, 정선군, 태백시의 전성기이다. 당시엔 그런 곳들이 부자동네라면 부자동네였다.[8] 그 당시가 1970년대 후반이다.[9] 비화에 따르면 EEC 설계에 관여하던 철도청 실무진은 반식반객으로 설계를 주문한 철도청장의 지시가 있었지만 운행 연선지역의 특성상 수요에 부응하여 한 칸 전체를 식당칸으로 설계했다고 한다.[10] 화장실은 특실 1곳, 식당 1곳, 선두차량은 두 곳에 있었다. 흰색 사기 재질의 구멍 뚫린 화변기(동양식)가 설치됐으며 정화조가 없는 비산식이었다.[11] 초기에는 191(1901-1902)편성, 192(1903-1904)편성으로 다녔었다.[12] 현재 KTX-산천을 제외한 모든 코레일과 서울교통공사 10량 1편성의 전동차의 차량번호는 0~9 순서이다.
코레일: 311000호대, 312000호대, 3070호대, 341000호대
서울교통공사: 1000호대, 2000호대, 3000호대, 4000호대[A] A B C D 한 개 또는 두 개의 화장실 및 세면대[13] 이렇게 된 이유는 EEC 개업 당시(1980년) 경부선은 서울~수원,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충북선, 경전선, 경의선, 경춘선은 전 구간 비전철화였기에 EEC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앙선조차도 청량리~제천까지, 영동선은 철암~동해까지, 유일하게 태백선만 전 구간이 전철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운행할 수 있는 구간은 청량리~동해가 유일했다. 그나마 중앙선이 1987년에 제천~단성, 1988년에 단성~영주까지 전철화되었는데 그마저도 청량리~영주, 청량리~동해로 운행계통이 딱 하나 늘어난 것에 그쳤다.[14] 참고로 호남선은 2004년, 충북선은 2005년, 경부선은 2006년, 경의선은 2009년(당시 서울~문산), 경춘선은 2010년, 전라선은 2011년에야 전철화가 이루어져 전기 기관차가 운행을 개시했으며, 경전선은 2023년(삼랑진~진주~순천), 장항선은 2028년에야 전철화가 이루어질 예정이다.[15] EEC 운행개시 직후에는 역명이 북평역이었다. 2020년 3월 2일 부터 일반열차의 단축으로 청량리-동해 열차가 부활했다.[16] EEC 퇴역 이후인 2005년에 이르러서야 전철화되었다.[17] 당시 제천착발은 열번 #1223~#1224, 원주착발은 #1225~#1226 열번을 썼다. 2020년까지는 #1625~#1628 청량리 - 제천 무궁화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었다.[18] 통근열차 CDC 디젤동차에 있는 좌석. 등받이만 전환해서 방향을 바꿔서 앉는다.[19] 그 당시 103계 냉방차나 201계에 쓰이던 것과 거의 같은 형태.[20] 당시 태백에서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다. 즉 그만큼 노동자들이 돈이 많았고 이는 상대적으로 고급 열차로 운용됐던 EEC의 운임 지불 능력도 됐다는 얘기다.[21] 당시 전동차의 내구 연한이 최장 25년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도입한 초저항과는 다르게 특급형으로만 운용되어 노후화가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22] 3월 15일 청량리-동해간 새마을호 운행이 개시됐다.[23] 3월 31일 청량리-동해간 새마을호가 강릉까지 연장됐다.[24] 앞서 언급했던 대로 식당차와 특실도 퇴역 직전까지 그대로 달고 다녔다.[25]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