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바이에른 뮌헨/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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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자취를 남긴 인물
1.1.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1.1.1. 1930년대
1.1.2. 1970년대
1.1.3. 1980년대
1.1.4. 1990년대
1.1.5. 2000년대
1.1.6. 2010년대
1.2. 기타 레전드
1.2.1. 1970년대
1.2.2. 2000년대
1.2.3. 2010년대
1.3. 거쳐간 인물
1.3.1. 1920년대
1.3.2. 1970년대
1.3.3. 1980년대
1.3.4. 1990년대
1.3.5. 2000년대
1.3.6. 2010년대
1.3.7. 2020년대
1.3.8. 감독 및 스태프



1. 발자취를 남긴 인물[편집]






1.1.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편집]


파일:attachment/FC 바이에른 뮌헨/관련 인물/fc-bayern-fan-world---hall-of-fame.jpg

파일:attachment/FC 바이에른 뮌헨/관련 인물/Hall_of_Fame_1_variant960x400.jpg

아래 항목의 선수들은 FC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등록된 선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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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Libero'
리베로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Der 'Kaiser'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
Der 'Stratege'
전략가

파울 브라이트너
Der 'Chef'
지배자
슈테판 에펜베르크
Der 'Samba-Stürmer'
삼바 공격수
지오반니 에우베르
Der 'Erste Meister'
첫번째 챔피언

콘라트 하이트캄프
Der 'Macher'
창조자

울리 회네스
Der 'Titan'
거인

올리버 칸
Der 'Zuverlässige'
신뢰

필립 람
Der 'Titelsammler'
타이틀수집가

비셴테 리사라수
Die 'Katze von Anzing'
안칭의 고양이

제프 마이어
Der 'Leitwolf'
늑대사령관
로타어 마테우스
Der 'Bomber der Nation'
폭격기

게르트 뮐러
Der 'Bulle'
황소
프란츠 로트
Der 'Visionär'
공상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Der 'Kaisers Leibwächter'
황제의 기사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Der 'Rekordmeister'
기록챔피언

메멧 숄
Der 'Fußballgott'
축구의 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1.1.1. 1930년대[편집]


바이에른 뮌헨이 첫 독일 트로피를 얻을 때의 주장.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트로피를 지켜낸 인물로도 유명하다.
나치로부터 구단을 지킨 바이에른의 아버지. 바이에른 뮌헨 선수 출신 회장으로 1913년부터 회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나치당 집권 시기인 1933년 3월 22일, 구단 내 유대인 선수를 전부 쫒아내라는 나치당의 지시에 불응하여 강제로 사임당했다. 그 역시 아버지가 유대인이여서 1938년 11월 다카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39년 3월 15일 스위스로 추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형제 3명이 모두 사망하고 여동생 1명은 실종되며 다른 여동생 1명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종전 후 1947년 뮌헨에 돌아와 다시 회장으로 임명되어 1951년에 물러났다. 이후 1961년 12월 2일 77세의 나이에 뮌헨에서 세상을 떠난다.
2013년 란다우어는 레코드 마이스터를 위한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알리안츠 아레나 앞에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을 조성했으며, 2019년 5월 바이에른 뮌헨 훈련장에 란다우어의 동상을 건립했다.


1.1.2. 1970년대[편집]


현역 시절, 감독 시절, 그리고 수뇌부에 오른 현재까지도 내내 바이에른 뮌헨의 영광과 함께한, 살아있는 레전드이자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1970년대를 양분했던 불세출의 수비수. '카이저(Der Kaiser)'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70년대 바이에른의 유로피언컵[1] 3연패와 서독 대표팀UEFA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 우승을 이끈 주장이자, 감독으로써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과 1993-94 시즌 분데스리가, 1995-96 시즌 UEFA컵 우승까지 이끌었고, 회장직에 있던 2001년 리그와 챔스를 제패하였다. 이런 그의 활약 속에 FC 바이에른 뮌헨은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또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도 본격적으로 유럽 최강의 국가대표팀 중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다. 현재는 FC 바이에른 뮌헨의 명예 회장.

축구사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들어가는 전설적인 중앙 공격수.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누구보다 골 넣는 방법을 잘 알았던 '폭격기' 그 자체. 분데스리가에서 453경기 398골, 현역 시절 공식 경기 통산 669경기 572골을 기록한, 문자 그대로 폭격기였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62경기 68골을 기록했다.[2] 라울 곤살레스,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의 후배들이 경신하기 전까지 3~40년 가까이 한 해 최다골, 챔피언스 리그 최다골, FIFA 월드컵 최다골 등 득점에 관련된 기록이란 기록은 거의 다 게르트 뮐러의 차지였다.

어린 나이에 바이에른 뮌헨의 영광의 시대를 함께했던 공격수이자 현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 전도유망한 스트라이커로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 게르트 뮐러와 공격진을 이끌며 3연속 분데스리가 우승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1974-75 시즌 유로피언컵 결승전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후 회복에 실패하여 27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젊은 나이에 보드진의 부름을 받고 바이에른 뮌헨의 부흥과 현재의 성공을 이끈 훌륭한 스포츠 행정가로서 활약했다. 그가 보드진에 부임하기 전 바이에른 뮌헨의 메이저 타이틀은 고작 7개에 불과했으나, 그가 합류한 후 바이에른은 인터컨티넨탈컵, 유로피언컵, UEFA컵 등을 우승하고, 15차례 분데스리가 우승과, 7차례 DFB-포칼 우승을 하였다. 현역 시절 분데스리가에서의 득점 기록은 239경기 86골.
선수보다는 행정가로써 바이에른을 현재의 위상을 갖춘 클럽으로 성장시키는데 반평생을 바쳤으나, 말년에는 이미지를 구겨버린 사건을 저질렀는데, 2013-14 시즌 항목에 서술했듯 탈세 혐의를 시인하여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최근 회네스 본인은 스스로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과 바이에른 명예의 전당 자리를 모두 반납하였다. 2019년 11월 회장 재선에 불출마를 선언하여 은퇴, FC 바이에른 뮌헨의 명예 회장에 임명되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 계보의 선조격인 명수문장. 뮌헨에서 태어나 오직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활약했던 그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분데스리가 442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은퇴 전까지 536경기 출장으로 이 부분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75, 1977, 1978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로 3차례나 선정되었으며, 4회의 분데스리가, 포칼 우승과 유로피언컵 3연패, 1966년 웸블리에서의 준우승과 1974 서독 월드컵 우승, 유로 1972 우승 등 영광의 시대의 바이에른과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동의 주전 수문장으로 활약했다. 최근 팬들에게는 20세기 말부터 2008년까지 활약한 올리버 칸의 포스가 기억에 남아있으나, 바이에른 팬들과 독일 대표팀 팬들은 여전히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을 꼽으라면 골키퍼에 제프 마이어를 선택한다고 한다. 아직까지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하고있다.(685경기)

'철의 정강이'로 불린, 베켄바워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당대 최강의 수비수.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416경기에 출장해 6회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3회의 DFB-포칼 우승, 1회의 컵 위너스 컵과 3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기록하였다.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1973-74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는 연장 막판 환상적인 중거리 슛으로 동점골을 기록해 재경기를 이끌었고, 2차전에서 4:0으로 승리해 바이에른은 역사상 최초의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유로 1972와 1974 서독 월드컵을 제패할 때도 서독의 부동의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 파울 브라이트너[3]
불과 19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해 바이에른 뮌헨과 전차군단의 수비를 철통같이 지켜준 전설의 풀백이자, 말년에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함께 'FC 브라이트니게'라는 원투펀치를 형성한 당대 최강의 중원사령관. 바이에른에서의 3연속 분데스리가 우승과 1973-74 시즌 유로피언컵 우승 후 잠시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해 2회의 프리메라 리가 우승과 1회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1978년에 바이에른으로 복귀해 미드필더로 전향했고, 이후 80년대의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활약하며 1983년 바이에른에서 은퇴할 때까지 146경기 66득점을 기록하였다. 바이에른에서의 전체 출장기록은 255경기이며, 현역 시절 전체 기록은 369경기 103골. 또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조국의 우승에 크게 일조하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루메니게와 함께 중원 듀오를 형상하면서 준우승에 크게 일조한다.


1.1.3. 1980년대[편집]


70년대 말 침체기 독일과 바이에른 뮌헨의 공격진을 홀로 이끌며 80년대의 부흥을 이끌어낸 전설적인 공격수. 21세의 나이에 바이에른 뮌헨에서 데뷔해 74-75, 75-76시즌 유러피언컵 우승과 인터컨티넨탈컵을 우승했고, 1978년 파울 브라이트너의 복귀 이후에는 'FC 브라이트니게'라 불렸을 정도의 원투펀치를 형성하며 바이에른의 우승행진을 이끌었다. 바이에른은 79-80, 80-81시즌 분데스리가를 연속해서 제패했으며, 1980, 1981 2년 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루메니게가 바이에른에서 기록한 득점은 310경기 162골.
1984년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지만 독일의 UEFA 유로 1980 우승과 1982 스페인 월드컵,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89년에 은퇴할때까지 통산 424경기 출전 220골을 기록했으며, 독일 국가대표팀에서는 95경기 45골을 기록하였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사장이자 유럽 클럽 협회(ECA)의 회장으로 재직하며 여전히 팀을 이끌어가고 있다.

1980년대 바이에른의 주포로 활약하며 팀의 수많은 우승행진을 이끌었던 공격수. 현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인 울리 회네스의 동생인 디터 회네스는 70년대의 대부분을 아마추어 클럽이었던 VfR 알렌과 당시 2부리가였던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뛰었다. 슈바벤의 분데스리가 승격일 이끈 디터 회네스는 78-79시즌 리가에서 16골을 득점하며 슈바벤의 준우승을 이끌며 바이에른 뮌헨으로 화려하게 이적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시기 형 울리의 조기 은퇴로 형제가 피치에서 같이 뛰지는 못했으나, 형은 대신 스포츠 디렉터로 부임했다.
그 후 디터 회네스는 5회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3회의 DFB-포칼 우승을 견인했으며, 81-82, 86-87 시즌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회네스는 86-87시즌 종료 후 34세의 나이로 은퇴했으며, 바이에른 뮌헨에서 통산 224경기 102골을 기록했다.

유소년 팀부터 오직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뛰고 바이에른에서 은퇴한 원클럽맨이자, 70년대 말부터 16년간 바이에른의 수비진을 철통같이 지킨 센터백이자 말년의 리베로였다. 1976년 1군에 승선해 1991년 은퇴하기까지 무려 406경기에 출장했으며, 수비수임에도 통산 52골을 기록하였다. 84년부터는 은퇴할때까지 바이에른의 주장으로 활약했으며, 현역시절 7회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3회의 DFB-포칼 우승, 3회의 독일 슈퍼컵 우승을 기록했으며, 82년과 87년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하였다.[4] 서독 국가대표로서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을 함께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다.

루메니게의 은퇴 후 디터 회네스와 더불어 바이에른 공격진의 선봉으로 1980년대 바이에른의 우승행진을 이끈 스트라이커로,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통산 254경기에 출장해 119골을 기록하였다. MSV뒤스부르크에서 데뷔한 볼파르트는 3시즌간 39골을 기록하며 바이에른으로 이적했으나, 그 후 베스트 일레븐에 들어가는데 이적생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1989년 17골, 1991년에는 21골로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1993년 생테티엔으로 이적하기 전까지 5회의 리가 우승과 1회의 포칼 우승을 기록했으며, 86년 포칼 결승에서는 라이벌 VfB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우승을 견인했다.


1.1.4. 1990년대[편집]


디에고 마라도나의 라이벌로까지 불린 불세출의 중원 사령관이자 말년의 스위퍼. 1984-85 시즌부터 바이에른에 합류해 미드필더임에도 두자릿수 득점을 매 시즌 기록해주며 3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1988-89 시즌부터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팀을 옮겨 그 시즌 스쿠데토를 획득하고 이탈리아 수페르컵에서 우승했다. 1991년에는 UEFA컵도 우승했다. 국가대표에서는 1982, 1986년 월드컵 때는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다시 만나 승리하며 월드컵을 들어올린다. 이러한 활약으로 1990년 발롱도르와 1991년 제정된 FIFA 올해의 선수상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국가대표에서는 마티아스 자머의 등장으로 기용되지 못하다가 39세의 늦은 나이에 UEFA 유로 2000까지 출전하며 은퇴했고, 월드컵 역대 최다 출장(5대회 25경기)독일 A매치 역대 최다 출장(150경기)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후 1992-93 시즌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해 미드필더가 아닌 스위퍼로 포지션을 바꿨고, 이후 바이에른에서 세 번의 분데스리가를 더 제패했으며, 1998-99시즌에는 인테르,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CF 등 강팀들을 족족 격파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캄프 누의 비극이라 불린 경기 종료직전 통한의 역전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빅 이어를 넘겨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세의 나이에 팀을 부활시킨 활약을 인정받아 1999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다. 마지막 1999-00 시즌에서 다시 한번 리그를 제패했으나 결국 숙원이던 빅이어는 끝내 들지 못하고 은퇴했다.[5]

미친 호랑이로 불렸던, 굴지의 중원 사령관이자 바이에른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끈 캡틴. 다혈질적인 성격에 주옥같은 독설로 실력이 가려진 경우가 많은데,[6] 2000-01 UEFA 최우수 선수이자 로이 킨, 페르난도 레돈도와 함께 90년대 말~2000년대 초를 대표하는 월드 클래스 미드필더였다. 또한 지금의 샤비 알론소같은, '대지를 가르는 패스'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바이에른에서 활약한건 불과 6시즌 밖에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그의 역할은 팀에서 절대적이었다. 1990년 합류했으나 팀과의 불화로 바이에른을 떠나 ACF 피오렌티나와 친정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에펜베르크는 1998-99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으로 돌아왔고, 바이에른은 1998-99, 1999-00, 2000-01 분데스리가를 3연속 제패했으며, 1999년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에페의 환상적인 장거리 프리킥으로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꺾고 결승에 올랐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비극적인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2000-01 시즌, 주장 완장을 찬 에펜베르크를 중심으로 똘똘뭉친 바이에른은 아스날 FC, 맨유, 레알 등 강호들을 무너뜨리며 25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1.1.5. 2000년대[편집]


92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에 이적한 후 은퇴할 때까지 무려 15년간 바이에른의 No.7로 활약하며 영광의 시대를 지탱했던 전설적인 플레이메이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터키계 독일인인 숄은 올리버 칸과 함께 개인 최다 분데스리가 우승(8회)를 기록했으며, 98년부터 3시즌 연속 리가 제패에 98-99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2000-01 챔스 우승 등 바이에른의 제 2의 전성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독일의 UEFA 유로 1996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7] 메멧 숄은 바이에른 뮌헨에서 통산 기록은 334경기 출전 87골을 기록했으며 2007년 프랑크 리베리에게 등번호 7번을 넘겨주고 감동적인 현역 은퇴식을 가지고 물러났다. 이후 바이에른 뮌헨 U-13팀 코치를 거쳐 현재는 바이에른 뮌헨 2팀의 감독으로 활약중이다. 2005년에는 66,000명의 바이에른 팬들이 선정한 바이에른 뮌헨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분데스리가를 평정한 브라질리언 스트라이커. 슈바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7년 여름 바이에른으로 이적한 그는 분데스리가 통산 256경기 133골을 기록해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바이에른의 주전스트라이커로 6시즌간 맹활약하며 169경기 출전 92골을 득점, 4회의 리그 우승과 3회의 DFB-포칼 우승, 각각 1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준우승을 견인했으며, 2002-03시즌에는 24골로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해 말년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크루제이루 EC 등을 떠돌다가 부상과 부친상때문에 은퇴했으나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스카우트로 활약하고 있다.

전차군단과 바이에른의 골문을 14년간 철통같이 지킨 전설의 명수문장. 잔루이지 부폰, 페테르 슈마이켈 등과 쌍벽을 이루는 거물 골키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골키퍼를 논할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짐승같은 피지컬과 동물적인 반사신경, 필드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로 바이에른의 최후방을 든든히 지키며 1994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 14시즌간 429경기에 출장해 8회의 분데스리가 우승, 6회의 DFB-포칼 우승, 각각 1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및 준우승을 기록했으며, 2002년부터는 은퇴 전까지 6년간 바이에른의 주장을 역임했다.
특히 칸은 2000-01 챔피언스 리그에서 8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4강 레알 마드리드 CF전에서 신들린 선방쇼를 보여주며 결승행을 이끌었고, 발렌시아 CF와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페널티 킥을 3개나 막아내는 괴력을 보여주며 바이에른의 25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듬해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주전선수들의 대거 부상으로 역대 최약체로 평가받은,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독일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신들린 선방을 연발하며 결승행을 이끌었다. 결승까지 6경기를 치르는동안 칸은 단 1실점만을 기록했으며, 결승전에서는 카푸와의 충돌로 손가락이 삐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경기해 임했으나 치명적인 캐칭미스로 호나우두에게 멀티골을 허용하는 등 팀의 2대0 패배를 막지 못했으나 그의 활약은 대회 전체를 통틀어서 단연 최고였다는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칸은 2002 월드컵 야신상을 수상했으며, 골키퍼로써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골키퍼로써 대회 골든볼(MVP)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잔루이지 부폰, 페트르 체흐, 이케르 카시야스, 그리고 바이에른과 대표팀 후배 마누엘 노이어는 물론이요, 레프 야신도 이뤄보지 못한 기록이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칸은 2001, 2002년 골키퍼로써 발롱도르 최종후보 3인에 2년연속 선정되었으며, 2002년 FIFA 최우수 선수상에서는 호나우두에게 근소하게 밀린 2위를 차지했다. 또한 칸은 그의 커리어에서 무려 7회의 분데스리가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으며, UEFA 최우수 골키퍼로도 4번이나 선정된데다 2회의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를 수상하였다. 그리고 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 최우수 골키퍼에 3회나 선정되었다. 칸은 07-08시즌 더블을 기록한 후 많은 바이에른 팬들의 눈물과 박수를 뒤로하고 38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은퇴 후 오스트리아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으며, 독일 공영방송 ZDF의 해설자로 활약하고 있다.

바스크계의 프랑스 출신 풀백으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평정했던 바이에른과 레 블뢰 군단의 전설적인 레프트백. 호베르투 카를로스와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자리를 양분했던 그는 지롱댕 보르도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1996 UEFA컵 결승전에서 보르도 소속으로 바이에른에게 완패하긴 했으나, 8강에서는 AC 밀란을 격침시키는 등 이 대회를 통해서 명성을 떨치며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 8시즌 반 동안 174경기에 출장해 6회의 분데스리가 우승, 5회의 DFB-포칼 우승, 1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이 시기 레 블뢰에서도 1998 프랑스 월드컵유로 2000에서 조국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특히 2000년대 초부터 가동되었던 바이에른과 프랑스 국가대표에서의 양쪽 풀백 듀오였던 리사라수-사뇰 라인은 당대 최강의 사이드 수비라인으로 평가받았다.
2004년 여름 잠시 마르세유로 떠났으나 감독과의 불화로 2005년 1월 곧바로 바이에른으로 복귀했고, 그 후 한 시즌을 더 뛰며 2005-06 시즌에도 더블을 달성하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1.1.6. 2010년대[편집]


세계 최정상급의 풀백으로 바이에른과 전차 군단을 이끌었던 캡틴. 꾸준함의 대명사로 기복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안정적인 수비력과 위협적인 오버래핑, 강인한 체력까지 모두 월드 클래스로 평가받았다. 2003년 데뷔했으나 당시 바이에른의 양쪽 풀백인 리자라쥐-사뇰 라인에 출전기회를 잡을 수 없어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임대생활을 하며 성장했으며, 실제로 그 후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람은 가히 넘사벽 수준이었다. 그것도 왼쪽 오른쪽 가릴 것 없이.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 대표팀의 주장완장을 찼고, 10-11시즌부터 바이에른의 주장까지 겸임하였다. 그 후 바이에른의 트레블2014 브라질 월드컵 제패 등 2000년대 말부터 이어진 수많은 우승행진의 주역으로 맹활약하였으며, 2017년 5월 현역 은퇴와 더불어 2010년대 들어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10년부터 세계 최정상급의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한 바이에른과 전차 군단의 중원 사령관. 유스 시절부터 오직 바이에른 뮌헨에서만 뛴 성골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초창기에는 윙어로 활약했으나 2009-10 시즌부터 중앙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한 후 세계 최정상급 미드필더 반열에 올랐으며, 현재까지 11시즌 동안 6회의 분데스리가DFB-포칼 우승[8], 1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2회의 챔스 준우승, 1회의 월드컵 우승과 2회의 월드컵 3위, 1회의 UEFA 유로 준우승과 2회의 유로 4강을 기록했으며, 2010, 2013년 2번의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를 차지했다.
환상적인 패싱력과 볼키핑, 강인한 체력, 안정적인 포백보호, 그리고 강력한 중거리 슈팅 등 중앙 미드필더로써 갖춰야할 덕목들을 두루 갖추었다. 특히 필립 람과 더불어 매 경기 가장 많은 볼터치를 기록 중인 슈바인슈타이거는 바이에른 공격의 대부분이 그를 거쳐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중거리슛은 줄어들었으나 사비 알론소안드레아 피를로를 방불케 하는 날카로운 패스는 가히 최상급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2010년대 초부터 루이즈 구스타보, 하비 마르티네즈 등의 파트너들과 상대편 중원을 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경기력을 연이어 보여주며 수많은 우승 행진을 이어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거쳐 지금은 미국시카고 파이어 SC에서 뛰고 있다. 은퇴를 앞둔 2018년 8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현역으로서는 최초로 전당에 헌액되었다.


1.2. 기타 레전드[편집]


바이에른 소속으로 공식 경기 200경기 이상 출전, 혹은 단기간이더라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선수들만 기재할 것.


1.2.1. 1970년대[편집]


  • 프란츠 로트
바이에른의 유러피언컵 3연패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수. 74-75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었고, 75-76 생테티엔을 상대로 프리킥 결승골을 넣어 바이에른 뮌헨의 빅이어영구소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유의 강력한 피지컬로 인해 황소(The Bull)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이에른 유스팀을 거쳐 17년동안 바이에른 유니폼만을 입고 뛰었으며, 총 404경기에 출전해 90골을 넣었다. 바이에른의 가장 위대한 레전드 중 한명이지만 동시대에 뛴 동료들이 워낙 사기캐라 묻히는 감이 있다.(...) 분데스리가 우승 5회, DFB-포칼 우승 4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베른트 뒤른베르거
바이에른의 영광의 시대를 지탱한 당대 최정상급의 중원사령관.[9] 1972년 프로 데뷔해 13년동안 바이에른에서만 뛴 원클럽맨이다. 유프 카펠만, 프란츠 로트와 더불어 바이에른의 강력한 중원 삼각편대를 형성했으며, 수비적인 능력 뿐만 아니라 해결사 기질까지 보유한 미드필더였다. 특유의 강력한 중거리슛은 위기 상황마다 빛을 발했는데, 특히 75-76시즌 바이에른이 유러피언컵 3연패를 도전할 때 당대의 강호 SL 벤피카을 상대로 원정골에 대한 부담이 있는 중요한 경기에서 중거리슛으로만 멀티골을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쳐 팀을 구해낸 바 있다. 바이에른은 그 경기를 5대1로 이겨 4강에 진출했고, 그 시즌 빅 이어까지 들어올렸다. 바이에른에서 총 468경기에 출전해 68골을 기록했다. 분데스리가 5회, DFB-포칼 2회, 유러피언컵 3회 우승을 기록했다.

  • 요니 한센
왼쪽에 파울 브라이트너가 있다면 오른쪽엔 요니 한센이 있었다. 우도 라테크 감독에게 발탁되어 1970년부터 6년간 바이에른의 영광의 시대를 지탱한 전설적인 풀백으로, 바이에른의 3연속 분데스리가 우승과 3연속 유러피언컵 제패에 모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본업인 우측 풀백 임무 외에도 쉴새없이 오른쪽 측면을 오르내리며 공격가담에도 매우 적극적인 풀백이었고, 우측면에서 올라오는 오른발 크로스가 일품이었다. 바이에른에서 219경기 출장 8골을 기록했다.


1.2.2. 2000년대[편집]


현재의 활약도와 위상으로 평가할 때, 2000년대 명예의 전당에 오를 선수들로 매우 유력한 선수들이다.

페라리베리로 불리는 프랑스와 바이에른 뮌헨의 돌격대장이자 지네딘 지단의 후계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테크닉, 돌파, 양질의 크로스와 직접 마무리짓는 능력과 중거리슛까지, 장점을 꼽으라면 한도끝도 없을 정도이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과 마르세유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2007년 여름 바이에른에 합류해 메멧 숄의 7번을 물려받으며 바이에른의 공격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로번이 합류한 후에는 로베리 라인으로 불리는 황금날개를 형성하며 만나는 팀들마다 족족 양쪽 윙을 번갈아가며 철저히 파괴했다. 분데스 이적 첫 시즌 만에 리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워낙 저평가되었을 뿐 언제나 바이에른 공격의 핵심은 리베리였다. 2013년에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됨은 물론이요, 그 호날두메시를 제끼고 UEFA 유럽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한데 이어 발롱도르의 유력한 후보로까지 평가받고 있었다.[10] 또한 2007, 2008년 프랑스 올해의 선수상을 2년 연속 수상했으며 2013 프랑스 올해의 선수상 역시 리베리의 차지였다.
2007-08, 2009-10 시즌 더블과 2011-12 시즌 준우승 트레블, 그리고 2012-13 시즌 트레블을 포함한 2013년 5관왕에 이어 2012-13 시즌부터 2015-16 시즌까지 독일 최초의 분데스리가 4연패를 달성했다.

바이에른과 오렌지 군단의 측면 공격을 책임지는 황금날개. 초창기에는 주로 왼쪽 측면에서 공격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나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 후 오른쪽 측면에서 날카로운 왼발슛을 이용한 직접 득점을 노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2009년 바이에른에 합류한 후 로번의 왼발은 바이에른의 부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ACF 피오렌티나와 8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전에서 패배가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와 발리슛 두방으로 승부를 뒤집으며, 팀을 자신의 왼발로 억지로 높은곳으로 끌고갔다는 평가를 들었을 정도.
이적 첫 시즌 이렇듯 맹활약을 펼치며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준우승에 활약을 펼쳤다. 2011-12 시즌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실축을 범하며 바이에른의 준우승 트레블의 직접적인 원흉으로 지목되어 가루가 되도록 까인데다가 2012-13 시즌에는 주전 경쟁에서도 밀렸으나, 후반기 토니 크로스의 부상으로 찾아온 출장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맹활약을 펼쳐주었으며, 유벤투스 FC와의 8강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데 이어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1, 2차전 모두 환상적인 왼발슛으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결승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결승전에서 후반 89분 마침내 결승골을 터뜨리며 우승을 눈앞에 둔 결승전 마지막 문턱에서 수없이 눈물을 삼켜야했던 기억들을 뒤로하고 빅이어를 들어올리는데 성공한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 이후 성향상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예측이 있었으나 그런 평가가 무색하게 주전으로 기용되면서 2013-14 시즌에도 골과 어시스트를 쏟아내고있다. 5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는 현재 바이에른에서 각각 2회의 분데스리가, DFB-포칼을 들어올렸으며, 2013년 한 해에는 5관왕을 차지하는 등 우승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는 스페인을 상대로 무려 5:1로 이기는 대승에 일조하고 대회 내내 맹활약을 하며 조국의 대회 3위와 브론즈볼, 그리고 역대 단일 월드컵 최장시간 출장 세계기록을 경신하였다.

혜성처럼 등장해 현재는 바이에른의 리빙 레전드이자 프렌차이즈 스타.[11] 2009-10 시즌 정말 갑툭튀한 등장으로 20세의 풋내기가 13골 11도움을 기록하며 바이에른의 더블 우승과 챔스 준우승을 이끄는 활약을 펼친데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5골 3도움을 기록하며 베스트 영플레이어는 물론, 대회 득점왕까지 석권해버렸다.
'공간 연주자'라는 별명답게 상대팀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온갖 예측 불가능한 모험적인 플레이로 바이에른 공격진에 창조성을 불어넣어주는 존재로 맹활약하고있다. 2008-09 시즌 데뷔해 5시즌 동안 바이에른은 각각 2회의 분데스리가DFB-포칼 우승, 1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2회의 챔스 준우승, 그리고 클럽 월드컵과 UEFA 슈퍼컵을 제패하는 등 우승컵들을 말 그대로 쓸어담고있다. 매시즌 공격포인트를 30개 가까이 꾸준히 찍어주는 등 바이에른 공격진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도 두 대회 연속 5골을 넣으면서 득점 2위와 실버볼을 수상하면서 조국의 통일 후 첫 월드컵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제3주장이었다가 필립 람이 은퇴하면서 노이어가 주장이 되었고 뮐러는 부주장이 되었다. 그리고 2019-20 시즌 리스본 쇼크의 맨 오브 더 매치 활약, 팀 내 최다 도움 기록을 비롯하여 구단의 사상 두 번째 트레블 달성에도 큰 주역이 되었다.

1.2.3. 2010년대[편집]


현재의 활약도와 위상으로 평가할 때, 2010년대 명예의 전당에 오를 선수들로 매우 유력한 선수들이다.

2011년 바이에른으로의 이적을 기점으로 하여 바이에른과 전차군단의 후방을 제대로 책임졌던 센터백. 그의 장점은 센터백인데도 대지를 가르는 패스에 가까운 거의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로 오해하게 만들 정도의 롱패스 정확도와 센터백 본연의 깔끔하고 예리한 태클 능력과 빠른 발, 수비수답지 않은 준수한 테크닉, 강인한 피지컬과 제공권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속팀 바이에른에게는 2012-13 시즌 트레블과 조국 전차군단에게는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우승에 크게 일조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최정상급 센터백으로 평가 받았다. 그 외에도 바이에른에서는 2012-13시즌부터 분데스리가 8연패, 포칼컵 통산 5회 우승, 챔피언스 리그 통산 2회 우승을 기록하고, 전차군단에서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3위, 유로 2012 4강 등을 기록하고 이후 유로 2016에서는 대회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로 평가받는 활약을 펼치면서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기까지 하고 2016년 UEFA 올해의 팀,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상까지 받는 기염을 토한다.
비록 2016-17 시즌부터 폼이 하락하고,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광탈 등으로 이전보다 기량이 쇠퇴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2019-20 시즌부터 다시 주전 센터백으로 폼을 부활시키면서 팀의 통산 두 번째 트레블에 일조한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수비형 미드필더의 포지션의 주목성 문제로 인해 잘 부각되지는 않지만 2010년대 바이에른의 성공가도에 큰 주역이었던 선수. 뛰어난 피지컬과 예측력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고 볼을 끊어내는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스페인 선수답게 볼을 끊어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연결이나 탈압박도 가능하며, 활동반경도 넓어서 최후방 방어에서 최전방압박이나 슈팅까지 종종 시도하며 이러한 일련의 플레이가 대단히 역동적이라 상대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거기에 192cm의 큰 키인데다가 헤딩 능력까지 준수해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헤딩골도 꽤 넣었고, 펩 과르디올라 시절에는 센터백으로도 출전했었다. 특히 바이에른의 첫 시즌이었던 2012-13 시즌에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무시무시한 중원 듀오를 구성하여 리그든, 챔피언스 리그든 포칼이든 만나는 상대팀들마다 거의 다 박살을 내버리면서 구단과 분데스리가 사상 최초의 트레블에 크게 일조하였다.[12] 이후에도 2019-20 시즌 팀의 사상 두 번째 트레블에도 일조한 것을 포함하여 분데스리가 9회 연속 우승, 포칼컵 통산 5회 우승, 챔피언스 리그 통산 2회 우승을 기록하였다.

올리버 칸 이후 FC 바이에른 뮌헨전차군단을 모두 대표하는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 FC 샬케 04와 각급 대표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활약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엄청난 클린시트 횟수와 선방율과 더불어 골키퍼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범위와 활동량을 자랑하며 스위퍼 키퍼라는 골키퍼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2011-12 시즌부터 바이에른으로 이적하여 이적 첫 해부터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이뤄내며 팀의 트리플 러너업과 조국의 유로 2012 4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 다음 시즌인 2012-13 시즌부터 노이어는 제대로 각성해버리며 소속팀 바이에른과 분데스리가 사상 최초의 트레블을 이뤄내는데 크게 일조하면서 그동안 이케르 카시야스가 지키고 있었던 FIFA FIFPro 월드 XIUEFA 올해의 팀 골키퍼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 다음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는 대회 내내 맹활약하며 조국에게 24년 만의 FIFA 월드컵 트로피를 안겨주고 노이어 본인은 FIFA 월드컵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다. 그리고 노이어는 그해 골키퍼로서는 정말 드물게 2013-14 UEFA 유럽 최우수 선수상 2위, FIFA 발롱도르 3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에도 계속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2017-18 시즌 부상으로 인해 뮌헨에서 주전 골키퍼 자리에 잠깐 밀리게 되고, 이후 이어진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카잔의 비극을 맛보았지만 2019-20 시즌 다시 정상급 골키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의 또 다른 트레블에 크게 일조하고, 심지어 2019-20 시즌 UEFA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3위를 차지한다.


1.3. 거쳐간 인물[편집]


바이에른 데뷔 연도를 기준으로 현 선수단을 제외하고 위키에 등재한 선수들 위주로 가나다순 배열.


1.3.1. 1920년대[편집]




1.3.2. 1970년대[편집]




1.3.3. 1980년대[편집]




1.3.4. 1990년대[편집]




1.3.5. 2000년대[편집]




1.3.6. 2010년대[편집]



1.3.7. 2020년대[편집]




1.3.8. 감독 및 스태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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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UEFA 챔피언스 리그[2] A매치 최다 득점 기록은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기록한 71골로 이미 경신되었지만, 출장 횟수 대비 득점 기록에서는 가히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이다.[3]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2012-13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당시 갑옷을 입고 빅이어를 들고 나온 노인이 바로 이 사람이다.[4] 86-87 유러피언컵에서는 4강에서의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장하지 못하였다.[5] 근데 하필이면 마테우스 은퇴 바로 다음 시즌인 2000-01 시즌 바이에른은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해버린다.[6] "루이스 피구? 그가 누구지? 잘 모르겠다.", "지네딘 지단산티아고 솔라리가 내 앞에서 개인기를 할 때, 그들의 다리를 분질러버리고 싶었다.", "베컴 - 그는 수염난 계집애 같았다. 놈의 따귀를 갈기고 싶었다." 등...[7] 칼루스헤 유스팀에서 데뷔해 바이에른으로 이적해 레전드로 성장했다는것도 나름 올리버 칸과 걸어온 길이 흡사하다. 포지션만 다를뿐.[8] 모두 더블 우승이었다.[9] 중원에 뒤른베르거가 뛰었고 파울 브라이트너는 처음에는 왼쪽 풀백이었다.[10] 수상에는 실패했다. 실력과 팀 성적으로는 발롱도르 수상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투표가 기자단 + 감독 + 주장에 한해서 이루어진데다가 사상 초유의 투표 연장 사태가 일어나면서 사실상 인기 투표가 되어 버렸다. 비교적 객관성을 띄는 기자단 투표로만 진행했다면 리베리, 호날두, 메시 순으로 순위가 갈려 리베리가 수상했을 것이다. 리베리가 발롱도르를 강탈당한 2013년도의 발롱도르 수상 결과는 2010년도에 웨슬리 스네이더의 포디움 탈락과 함께 발롱도르 시상식 중 가장 큰 논란이 일어났던 사례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11] 임대조차 간 적없는 원클럽맨이다.[12] 특히 2012-13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만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그 당시 차비 에르난데스-안드레스 이니에스타-세르히오 부스케츠로 구성된 당시 최강의 중원으로 평가받은 세 얼간이 조합을 박살내면서 1, 2차전 합계 7:0으로 바르셀로나를 박살내면서 결승전에 진출한 경기가 가장 백미로 평가받는다.[13] 취소선으로 하그리브스를 비하하는 드립이 있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유통기한이 1년 정도 남은 선수를 맨유에 사기치다시피 팔아먹은 셈이다. 물론 하그리브스의 땡깡이 심했지만 하그리브스가 맨유, 맨시티에서 몇 년을 날린 것을 생각해 보면 유스 출신이라고 다이슬러처럼 몇 년을 안고 갔을 테니. 거기다 하그리브스의 이적료는 고스란히 리베리에게 투입됐다.유스가 아니고서는 발휘할 수 없는 깊은 충성심과 희생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