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 R. 톨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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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 R. 톨킨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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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E FRSL
J. R. R. 톨킨
J. R. R. Tolkien


파일:9c794dede71da826f6f0e21ae342ec7a.jpg

본명
존 로널드 루엘 톨킨
John Ronald Reuel Tolkien
출생
1892년 1월 3일
오라녜 자유국[1] 블룸폰테인[2]
사망
1973년 9월 2일 (향년 81세)
영국 잉글랜드 햄프셔 주 본머스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작가, 언어학자, 문헌학자, 번역가, 교수, 문학비평가
장르
판타지, 하이 판타지
서명
파일:J. R. R. 톨킨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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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4cm
혈통
독일계 영국인
묘소
영국 옥스퍼드 울버코트 묘지[1]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엑서터 칼리지 (영어영문학과 · 언어학 / 학사)
경력
리즈 대학교 영어언어학 교수 (1920~25)[2]
옥스퍼드 대학교 고대 영어학 교수 (1925~45)
옥스퍼드 대학교 영어학 · 문학 교수 (1945~59)
부모
아버지 아서 톨킨 (1857~1896)
어머니 메이블 톨킨 (1870~1904)
배우자
이디스 톨킨 (1916년 ~ 1971년, 사별)
자녀
장남 존 프란시스 톨킨 (1917~2003)
차남 마이클 힐러리 톨킨 (1920~1984)
삼남 크리스토퍼 톨킨 (1924~2020)
장녀 프리실라 톨킨 (1929~2022)
종교
개신교(성공회) → 가톨릭
군인 경력
복무
1915년 ~ 1920년
계급
중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솜 전투)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전쟁 참전
2.3. 학자, 작가 활동
2.4. 말년
3. 경력
3.1. 소설가로서
3.2. 학자로서
4. 그에 대한 말들
5. 기타 정보
5.1. 인간관계
5.2. 정치 성향
5.3. 종교
5.4. 저작권, 판권 관련
6. 오해
6.1. 인종주의 관련
6.2. 알레고리적 해석
6.3. "악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고……"
7. 여담
8. 주요 작품
8.1. 저서의 판본들
9. 팬덤
10. 관련 문서
11.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영국의 작가, 언어학자. 하이 판타지를 정립한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유명하다.

반지의 제왕을 필두로 호빗, 실마릴리온 등 그가 만든 작품들과 방대한 설정은 이후의 판타지 소설·게임 등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 때문에 톨킨은 판타지 장르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팬덤은 톨키니스트라고 불리며 일부 열성 톨키니스트들에게는 그는 거의 신앙 수준이다. 하이 판타지 장르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으로 그는 '근현대 판타지의 아버지'[3]라고 불린다.

환상문학계 뿐만 아니라 영문학계에서도 높이 인정받는 대문호이며 2008년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 더 타임스에선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6위로 그를 선정했고[4]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영어 작가 6위로 뽑혔다.[5]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톨킨의 조상은 대부분 기능공이었다. 가족의 기원은 나폴레옹 시대 독일 작센 왕국으로, 작센 지방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다. 18세기 경부터 영국에 거주하였다고 하며 이주 후 바로 정통 영어를 쓰는 영국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톨킨은 Tollkiehn의 영국식 이름으로 영어로는 덜 킨(Dull Keen), 즉 모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톨킨의 할아버지 존과 할머니 서필드는 침례교인으로 버밍엄시 중앙에 가게를 소유하였다고 한다. 서필드 가족은 한 빌딩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다고 한다. 톨킨의 고조부인 윌리엄 서필드는 1810년부터 서점과 문방구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톨킨의 증조부인 존 서필드는 포목업과 메리아스 직조업에 종사하였다.

1892년 톨킨은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렌지 프리 주의 주도인 블룸폰테인에서 은행 지점장인 아버지 아서 류엘 톨킨과 어머니 메이블 서필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서는 불룸폰테인 지사에 승진 발령나면서 영국을 떠났다. 톨킨 외에도 1894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톨킨은 정원에서 바붐 거미에게 물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톨킨의 집에서 일하던 사환이 톨킨을 자기 고향에 데려갔다가 다음날 집으로 보내준 적도 있었다. 톨킨이 예쁜 아이라 생각해 자랑하려 했다고 한다.

한편 톨킨의 부친은 톨킨이 3살 되던 해에 류머티즘 열로 사망했는데, 당시 모친은 동생과 함께 영국에 장기방문 중이었다. 가장을 잃은 톨킨 가족의 당장 생활을 걱정하게 된 모친은 어린 톨킨을 외할아버지에게 보냈다. 그 후에는 우스터셔로 이주했고 이 시골 마을은 후에 톨킨의 작품에 큰 영감을 주었다.

어머니 메이블은 직접 두 아들을 직접 가르쳤는데 톨킨은 가족들에게 섬세한 학생이었다. 톨킨이 식물을 좋아한다고 판단한 모친은 그에게 식물학을 가르쳤다. 어린 톨킨은 풍경과 나무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언어였다. 그의 모친은 톨킨이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라틴어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는데 4살이 되던 해에 글을 읽기 시작했고 곧 자연스럽게 글을 썼다고 한다. 모친은 그에게 많은 책을 접할 기회를 주었고, 어린 톨킨은 "보물섬"이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싫어했으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심란해 하면서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조지 맥도널의 판타지 "레드 인디언"과 앤드류 랑의 "페어리 북"을 좋아했는데 후에 톨킨의 작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톨킨은 버밍엄의 킹 에드워드 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조지 5세의 대관식 정렬식때 버킹엄 궁전 게이트에 붙일 포스트를 함께 작업했다. 상당히 공부를 잘해 전교에서 인정받았던 학생이었다. 그후 톨킨은 세인트 필립 스쿨에 입학하게 된다. 이 당시 어머니 메이블은 1900년에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 입교하게 되며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서 재정적 지원이 끊어지게 된다. 그로부터 4년 후 메이블은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때에 톨킨의 나이는 12살이었다. 톨킨은 모친의 사망은 믿음 때문에 순교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가톨릭 신앙이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메이블이 죽기 전에 두 아들의 후견인으로 버밍엄 오라토리오회[6]의 프랜시스 자비어 모간 신부를 지목했고, 톨킨은 버밍엄 에지바스턴 지역에서 페로트 폴리와 빅토리아 풍 건물인 지역 급수소 근처에 살았다. 이들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다크 타워를 상상 해내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다른 요소로는 버밍엄 박물관에 무료로 전시하였던 프리-라파엘리티 브라더후드와 에드워드 번-존스의 로마풍의 중세 그림들이었다고 한다.

1911년 톨킨은 킹 에드우드 스쿨에서 롭 길슨, 제프리 스미스, 크리스토퍼 와이즈맨 3명의 친구를 만나 자신들만의 비밀 조직 the T.C.B.S.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 거창한 조직보다는 친분을 다지는 모임으로, 이 조직의 이름은 Tea Club, Barrovian Society에서 따온 것으로, 학교 근처의 바로우 스토어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던 그들이 생각해낸 이름이다. 이들은 졸업 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1914년 런던의 와이즈맨 집에서 다시 뭉쳤고 톨킨에게 이 모임은 그가 시를 쓰는데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1911년 톨킨은 스위스로 휴가를 가게 되는데 이 여행은 빌보가 미스티 마운틴으로 여정에 직접적인 영향이 되었다. 그해 10월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 엑스터 칼리지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인문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을 바꾸어 영어언어학을 공부하고 1915년 졸업했다. 톨킨과 동생 힐러리가 같은 기숙사에 입숙했던 해, 톨킨은 16세가 되던해에 자신보다 3살 연상의 이디스 메리 브렛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후견인이었던 모건 신부는 톨킨이 개신교(성공회) 여인과 사귀는 것에 놀랐고 또 이디스를 톨킨의 학업을 방해하는 문제거리로 보고 21살이 되기전까지 그들의 만남을 금지한다. 톨킨은 결국 이 조건에 따르게 되며 21세가 되던 생일 아침에 톨킨은 이디스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시 받아주고 결혼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톨킨이 자신을 잊은 줄만 알았던 이디스는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하지만 결국 톨킨을 선택하고 결혼을 하고 톨킨의 설득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16년 3월 22일 둘은 워릭에 소재한 세인트 마리 이마큘레이트 성당에서 결혼을 했다.

2.2. 전쟁 참전[편집]


톨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자원 입대한 참전 군인이다. 톨킨은 영국 육군에 지원하고 소위로 임관한다. 톨킨은 케녹 체이스에서 13 보충 대대에서 11개월의 훈련을 받게 된다. 훈련을 마친 톨킨은 영국 파견부대 11대대 소속으로 프랑스에 투입되었다. 당시 글을 보면

"많은 신참 장교들이 죽어나갔다. 아내와 생이별을 하고...

이것은 죽음 그 자체 같았다."


입대한 해인 1916년에는 개전 당일 5만 8천명의 인명 손실을 낸, 1차대전 당시 가장 참혹했던 전투인 솜 전투에도 참전했다. 당시 톨킨은 소위 계급의 대대 통신장교였는데 비위생적인 참호의 환경 때문에 참호열(Trench Fever)에 시달려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그렇다고 농땡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자그마치 18개월을 병마에 시달렸다. 꾀병으로도 장기 요양이 가능할 정도로 톨킨에게 막강한 보호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못 내보낸 것 맞다.

하지만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으나 톨킨이 영국으로 후송되자마자 대대는 전멸했다. 게다가 톨킨으로선 이게 단순히 전우들을 잃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 당시 영국 육군은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게 보통이었다. 즉, 톨킨이 병으로 후송되었다가 돌아와 보니 같은 부대에 입대한 동네 친구, 동네의 아는 형님, 동네의 아는 동생, 동네의 아는 아저씨들이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된 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톨킨은 1차 세계대전에서 친한 친구들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끔찍한 경험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the T.C.B.S. 멤버들 4명 중 롭 깁슨과 제프리 스미스가 전사했다. 두개의 탑에서 나온 죽음의 늪 부분은 이때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모습이 담겨있다고 했다. 병으로 쇠약해진 톨킨은 병원과 수비대를 오가며 전쟁의 남은 기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아내 이디스는 그들의 첫아들 존 프란시스 루엘 톨킨을 임신하게 된다. 톨킨은 병 요양을 위해 스태퍼드셔 그레이트 헤이우드의 시골집에서 보내게 된다. 그는 요양중에 "잃어버린 전승들의 서(The Book of Lost Tales)"를 쓰게 된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해서 병이 재발하였지만 건강은 호전되어 국내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고 중위로 진급했다. 톨킨이 킹스톤에 배치되었을 때 톨킨과 이디스가 만개한 독미나리 숲을 거닐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디스는 톨킨을 위해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녀의 귀여운 행동으로 톨킨을 위로한 에피소드로 인하여 베렌루시엔의 설정이 소설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현대인들이 판타지 문학을 통해 현실도피를 하며 정서적 휴식을 취하듯, 젊은 톨킨도 이때부터 굉장한 집념으로 그의 일생을 결정짓는 장편 대작 판타지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2.3. 학자, 작가 활동[편집]


톨킨이 전역하고 민간인으로 처음으로 맡았던 일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 작업이었다. 톨킨은 주로 독일 기원의 단어들의 역사와 어원을 W부터 작업을 했다고 한다. 1920년 톨킨은 리즈 대학에서 영어 언어학 조교로 대학에 출강하게 됐고 1924년 그는 정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당시 최연소 교수였다. 리즈 대학에서 그는 E.V. 고든과 "미들 잉글리쉬 단어 /A Middle English Vocabulary"와 "가웨인경과 녹색기사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최종판을 작업하였다. 동시에 톨킨은 "오르페오경 / Sir Orfeo"과 중세 두운 시 "진주 / Pearl"의 번역도 하였다. 1925년 톨킨은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로 돌아와 "앵글로색슨 롤린슨과 보스워쓰 /Rawlinson and Bosworth Professor of Anglo-Saxon"(1925-1945) 교수직을 맡게 된다.

톨킨이 펨브룩에 있을 때 반지의 제왕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호빗을 쓰게 된다. 2002년 이곳에는 블루 플레이크(주: 영국에서 역사적 이벤트나 유명한 인물과 연관된 장소에 붙이는 표시)가 붙었다고 한다. 1932년 그는 문언학 에세이 "노덴스 / Nodens"를 출판하였다고 한다. 1936년 그의 강의 "베오울프 : 몬스터와 비평 / Beowulf : the Monstars and the Critics"으로 만들어진 대학 교재는 베오울프 연구에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루이스 E. 니콜슨은 톨킨이 베오울프에 대해 저술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톨킨의 작업은 베오울프 비평의 전환점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톨킨은 시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였다"고 호평하였다. 당시에 학자들은 베오울프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유치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며 멸시하였다고 한다. 톨킨은 베오울프의 작가는 기존의 논리에 구속받지 않고 인간의 운명을 그리려고 했으므로 몬스터는 이 서사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톨킨이 베오울프를 얼마나 값지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베오울프는 나에게 최고로 값진 자원이었다." 이 영향은 반지의 제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1945년 톨킨은 옥스퍼드 머튼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며 톨킨은 1959년 은퇴할 때까지 교직을 지키게 된다. 톨킨은 1948년 반지의 제왕을 탈고한다. 소설의 밑그림을 그릴 때부터 무려 10년이 흐른 후였다. 그리고 1954년 반지의 제왕이 출판된다.


2.4. 말년[편집]






말년의 모습. 톨킨의 목소리를 들어 볼 수 있다.
1959년 은퇴로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1973년까지 톨킨은 저작 반지의 제왕으로 인해 꾸준히 증가하는 대중의 관심과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인세가 급격히 증가하자 톨킨은 조기 은퇴를 후회할 정도가 되었다. 팬들의 관심이 과해지자 톨킨은 전화번호부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우게 된다. 결국 톨킨 부부는 영국해협의 풀만(灣)에 면해 있는 한가한 본머스로 이주하였다.

1972년 1월 톨킨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대영 제국 훈장 3등급을 지명받고 1972년 3월 28일 버킹엄 궁전에서 훈장을 받게 된다. 1971년 11월 29일 톨킨의 아내 이디스가 사망하자 톨킨은 묘비에 루시엔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21개월 후에 1973년 9월 2일 톨킨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톨킨도 같은 묘지에 묻히게 되고 묘비에는 베렌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부부의 묘지는 옥스퍼드 울버코트 공동묘지에 위치하고 있다.[7]


3. 경력[편집]



3.1. 소설가로서[편집]


반지의 제왕은 후대의 하이 판타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흔히 전근대적인 시대배경의 '판타지'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들은 상당수가 톨킨의 작품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오르크호빗, 엔트가 그의 창조물이며 엘프들과 드워프들은 그의 손을 거쳐 마침내 하나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정착하였다. 날개가 달려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장난치는 요정부터, 북구신화 속의 신적 존재로 퍼져있던 엘프들은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모델이자 불멸의 수명을 지닌 고아한 존재들, 그러면서도 가운데땅에서 살아가는 동 서쪽 바다 너머 발라들의 대륙 아만을 그리워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으며, 잘 쳐줘야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난쟁이들이고 심하면 사악하고 비열하다고도 묘사되던 드워프들 역시 땅의 미(美)를 알며 조각의 대가들이자 전투 때에는 요정들에 못지 않은 불굴의 전사들로 다시 태어났다. 그 외에도 발록을 창조해 냈으며 트롤을 일종의 요정 같은 성격에서 완연한 괴물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냥 쉽게 말해서 엘프, 드워프, 오크, 호빗, 트롤, 발록 등이 등장하는 수많은 판타지 영화, 게임, 소설, 만화가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톨킨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8]

또 톨킨의 반지의 제왕의 대히트로 판타지 소설의 인지도가 대폭 늘어났다. 반지의 제왕이 출판된 이후 판타지 장르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으며, 그 이전까지는 주로 단편 위주였던 판타지 장르가 서사시스러운 장편으로 방향성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9] 테리 프래쳇은 Magic Kingdom이라는 에세이에서 톨킨을 일본 판화에 나오는 후지 산에 비교했다. 작품마다 그 산이 뚜렷하고 크게 나오거나 배경으로 조그마하게 나오고, 설사 후지 산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화가가 일부러 산을 빼놓으려고 했다는 얘기거나 후지 산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테리 프래쳇도 어릴때 톨킨 책 보면서 펜레터를 보내기도 했으니…

톨킨은 오랜 이민족들의 침입과[10] 기록 미비로 잃어버린 영국의 신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관심이 많던 유럽, 아랍 등의 신화적 존재들을 일일이 정리하고 그 이미지를 창조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입, 그만의 새로운 신화, 레젠다리움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내 조국의 빈곤이 슬펐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수준의 이야기, 다른 나라의 전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희랍어켈트, 로망스어와 그리고 독일어, 스칸디나비아어, 핀란드어로 된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싸구려 책자에 나오는 초라한 것을 제외하면 영어로 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톨킨 백과사전> 中


"나는 거대한 우주 기원에 관한 것에서부터 낭만적인 동화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서로 연결된 전설의 체계를 만들 생각이었고…… 이것을 오로지 영국, 나의 조국에 바치고자 했습니다."

<톨킨 백과사전> 中

고대 지구인 아르다를 배경으로 수많은 존재들의 흥망성쇠가 펼쳐지는 이 인공 신화 속에서는 물론 실제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연결 고리 등이 즐비하여, 특히나 그의 전문이었던 언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1][12]

게다가 분량뿐만 아니라 디테일도 상당한데, 반지의 제왕을 비롯하여 자신이 쓴 글들의 번역을 위해 '각국 언어별 번역 지침'을 작성해둔 터무니없는 양반이다(톨킨 번역지침 참고). 이 언어 지침이 작성된 이유가 뭔고 하니 자신이 쓴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3부작은 자신이 '번역'한 것이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13] 특히 반지의 제왕의 권말 부록의 '번역에 관하여' 목차에선 작가가 정말로 그 시대의 자료를 영어로 번역했다고 가정하고 짠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설정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서부어[14]의 2인칭 대명사엔 '상대를 높이는' 형태와 '스스럼 없는' 형태가 있는데, 호빗들이 사용하는 방언은 스스럼 없는 형태만을 사용하는 형태였고, 때문에 피핀곤도르에 체류했을 때 곤도르인들 사이에서 피핀이 고위급 인사라는 루머가 나돌았다더라"는 설정이 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세세한 설정들이 목차를 빼곡히 채울 정도로 있다.

그는 결국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죽었고, 정리되지 못한 원고들은 셋째 아들이며 편집 작업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톨킨이 정리하여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 가운데땅의 역사서, 후린의 아이들, 베렌과 루시엔 등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 결국 크리스토퍼 톨킨도 2020년 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주변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글 쓰는 방식이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않았다고 한다. 욕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특이하고, 완벽을 기하느라 효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줄거리를 다 생각해 놓고 줄거리 위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톨킨은 세계관을 먼저 설정하고, 상황과 사건을 설정한 다음 정말로 가상의 프로도를 출격시켰다.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가상 중간계를 만들고 시뮬레이션 돌리는 것으로 반지의 제왕을 써 내려갔다. 대부분 마음에 안 드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럴 때면 모든 이야기를 백지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때문에 반지의 제왕 완결에 십 수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는 절친이었던 C. S. 루이스와 충돌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톨킨은 루이스가 책을 너무 성급하고 성의없이 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루이스의 대표작인 나니아 연대기를 놓고도 너무 주제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며 비판했고,[15]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서들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16][17]


3.2. 학자로서[편집]


옥스퍼드 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반지의 제왕 작가이기 보다 영문학자로서 알려지기를 희망했고, 자신의 작품은 언어와 신화를 연구하면서 얻은 부산물로 여겼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무협 작가보다 언론인으로 알려지길 원했던 일명 무협의 아버지 김용과 비슷하다.[18][19]

언어학자로서는 고대·중세 영어를 연구했는데, 『베오울프[20], 『가웨인경과 녹기사』[21] 등의 작품을 주로 연구했다. 사실 베오울프를 진지하게 문학으로서 연구한 선구자가 톨킨이다.

그 외에도 톨킨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고, 『On fairy stories』라는 에세이집을 남겼으며, 고대 웨일스어를 복원하기도 했다.

"영어의 탄생"에 따르면 톨킨은 1919년부터 1년간 옥스퍼드 영어사전(OED, Oxford English Dictionary)의 부편집장 자리에 있었고 W부분을 맡았으며, W로 시작하는 단어들의 정의에 대해 고심한 자료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영어사전 편집장은 헨리 브래들리.

덴마크의 신학자,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의 저작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와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고대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등을 할 줄 알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 신화 원서를 다 읽은 몇몇 안되는 인물이라 한다. 그리고 이 원서들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쓰는데 참고가 되었다고 한다.


4. 그에 대한 말들[편집]


"후지산이 너무 자주 일본판화에 나오는 것처럼, 톨킨은 모든 판타지에 등장하며 일종의 산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아주 크고 가까이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지평선 위에 걸쳐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산을 없애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결정이지요. 아니면, 작가가 사실 후지산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테리 프래쳇, 디스크월드 작가 #


내가 톨킨을 존경하는 만큼, 톨킨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반지의 제왕은 그 이후로 쓰여진 모든 다른 판타지를 뛰어넘어 현대 판타지를 형성한 산이다.

조지 R.R. 마틴#


반세기 남짓한 작업 기간에, 어떻게 한 인간이 민족 하나가 일구어낼 만한 창작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가?

How, given little over half a century of work, did one man become the creative equivalent of a people?

더 가디언


유례 없는 아름다움과 장려함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


그는 디킨스, 톨스토이와 동등하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 The New Daily#




5. 기타 정보[편집]



5.1. 인간관계[편집]


학자의 이미지로 보아 책만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다. 고대 영문학을 실감나게 가르친다면서 체인메일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강의실에 들어온 적도 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한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구상한 옛날 이야기를 모아서 출판한 작품이 호빗이다. 하지만 그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담은 자기 작품들이 왜 베스트셀러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가 됐는지는 본인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자신의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을 내보내야 했다. 그것도 공군 조종사로. 아들을 위해 호빗을 지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 톨킨에게는 하루하루가 끔찍한 나날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때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톨킨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켜나가게 된다.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나중에 아버지 사후 실마릴리온을 자신이 편집하고 보충해서 내게 된다. 이 당시부터 톨킨의 중간계 세계관에 크리스토퍼가 관여해 온 것을 생각하면 실마릴리온의 편집도 수월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C. S. 루이스와는 친구 사이였으며, 루이스가 주최하던 문학인 모임인 <잉클링스(Inklings)>에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처음엔 형인 워렌 루이스의 소개로 루이스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루이스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25년 05월 11일 머튼 칼리지 회의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톨킨과 문학에 대해 대화하면서 "모든 문학은 서른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의 남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를 들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톨킨에 대한 첫 인상으로 일기를 마무리했는데,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저 한두 대만 날려주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나니아가 반지의 제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네', '반지의 제왕은 루이스 덕분에 써진 것입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기를 참조.[22] 그리고 톨킨과 루이스의 관계는 짧은 글로는 설명이 잘 안 되므로 자세한 내용을 정리한 글을 참고하자.# 톨킨은 루이스의 종교관에도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루이스 항목 참조. 옥스퍼드대 모덜린칼리지의 뉴 빌딩 뒷편에는 사슴 수십마리가 사는 ‘사슴공원’이 있다. 톨킨은 뉴 빌딩에 있던 루이스의 연구실에 함께 앉아 애프터눈 티를 마시며 사슴공원을 내려다 보는 걸 좋아했다. 두 사람은 처웰 강을 따라 사철 꽃이 피는 산책로 에디슨 워크를 걸으며 인생과 문학, 사랑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겼다.

아내 이디스 브랫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16세 때 3살 연상이었던 이디스 브랫과 한동안 사귀었지만, '개신교(성공회) 여인과 부도덕한 연애를 한다'는 후견인 프랜시스 신부[23][24]의 반대로 성년이 될 때까지 그녀와 일절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1살이 되던 생일에 약속한 구름다리 밑에서 재회했다. 이디스는 이미 약혼했지만 톨킨과 만난 직후 바로 파혼하고 가톨릭으로 회심한 후 결혼식을 올렸다.[25][26] 참고로 톨킨과 이디스의 관계는 실마릴리온에서 몇 안 되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 베렌과 루시엔으로 나오게 된다. 실제로 톨킨 부부의 묘비에 에디스-톨킨 순으로 루시엔-베렌이라고 이름 아래에 새겨져 있다고 하니... 참고로 아내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결혼 직후 톨킨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27] 이디스가 그를 위해 발랄하게 춤을 추었다. 이를 본 톨킨은 실마릴리온의 전반적인 스토리와 이 작품의 여주인공 요정 루시엔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5.2. 정치 성향[편집]


나의 정치적 견해는 점점 더 무정부 상태에 기울고 있다. (철학적으로 내가 이해하는 아나키즘은 폭탄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아닌 통제의 폐지를 의미한다)

아들 크리스토퍼 톨킨에게 보낸 편지, 1943년 11월 29일

톨킨은 로마 가톨릭의 가치와 지역주의에 기반한 비교적 온건한 전통주의자, 군주주의자[28]였다.[29] 혁신과 근대화보다 기존의 관습과 정통성을 선호하는 전통주의자였으나 정부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했고 관료주의를 안 좋게 생각했다. 톨킨은 또 산업화의 부작용에 대해 비판했고 그는 영국의 시골 지역을 사랑했고 단순한 삶을 즐겼다.[30] 그래도 딱히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반공주의자였다. 톨킨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산주의 당원들이 성당을 파괴하고 성직자수도자를 죽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코 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또 톨킨은 스탈린을 경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톨킨은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늙은 살인자(that bloodthirsty old murderer)"라고 언급했다. 다만 1961년에 톨킨은 한 스웨덴 해설가가 반지의 제왕이 반공적인 우화이며 사우론을 스탈린과 동일시한다고 비유한 것을 비판하며 톨킨은 '나를 화나게 하는 어떠한 읽을거리도 전적으로 부인한다. 반지의 제왕은 러시아 혁명 훨씬 이전에 고안된 것이다.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톨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아돌프 히틀러나치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고, 특히 나치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경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톨킨의 작품을 감명깊게 읽은 독일의 편집자가 독일어 번역을 부탁하면서 아리아인 인증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노발대발했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좀 누그러뜨려 답장에 "자신의 조상 중에서 아리안은 없지만, 만약에 자신의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라면 아쉽게도 그 축복받은 이들이 내 조상 중엔 없는 것 같다"고 디스한 적도 있다.[31] 이건 당시 나치 독일이 출판사에다 저자가 비유대인임을 확인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 톨킨이 태도를 좀 누그러뜨리긴 했다.

톨킨은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민간인들을 징집해 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비판했다. 또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고,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을 "이 미치광이 물리학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위에도 나와 있지만 톨킨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모두 끔찍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한 전쟁에는 자신이 참여해 생사의 기로를 오갔고, 다른 전쟁에는 아들을 내보내고 노심초사해야 했다. 세계대전에 대한 경험은 어느 정도 그의 작품에도 반영이 되어 있어서 고대 서사시에 가까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현대적인 묘사를 많이 보여준다. <곤돌린의 함락>에서 등장하는 모르고스의 기계 병력은 탱크를 연상케 한다. <반지의 제왕> 후반에서 메리가 마술사왕의 발목을 찔렀던 팔이 평생 불편했다거나, 프로도가 매년 다쳤던 계절마다 앓아눕는 모습은 PTSD나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참전용사들의 모습과도 일치하며, 작품에 등장하는 전쟁터의 모습 또한 사방에 죽음이 널려 있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갑자기 닥쳐오는 등 현대전에 가까운 이미지가 많다. 그리고 죽음늪은 톨킨 자신이 참전했던 솜 전투의 전장을 모티브로 해서 묘사한 것이다. 이런 디테일 이외에도 용이나 나즈굴을 비롯한 항공전력의 위력과 공포에 대한 묘사,[32] 팔란티르로 대표되는 정보전의 개념도 기존의 전설과 신화, 환상문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

그가 생태주의자였다는 루머가 있으나 톨킨 자신은 나무를 심을 때 숲에 대한 사랑과 나무 벌채에 대한 슬픔을 담은 내용의 사적인 편지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생태주의, 환경보호주의자들의 대한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다. 이후에, 톨킨의 수많은 전기들이나 문학 분석가들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의 집필 동안에 야생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의 가치와 산업화된 세계에 남겨진 자연을 보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얻었다고 결론짓기도 했다.


5.3. 종교[편집]


"반지의 제왕'은 물론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랬지만, 개정에서는 의식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종교'와 같은 상상의 세계에서의 컬트나 관습에 대한 어떤 언급도 넣지 않았거나, 실질적으로 모든 언급을 배제한 이유입니다. 종교적인 요소가 이야기와 상징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J. R. R. 톨킨#[33]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내[34]가 될 사람에게 가톨릭으로의 회심을 강권했을 만큼 가톨릭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톨킨에게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어머니가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그래서 톨킨 역시 8살 나이에 가톨릭교회에 입교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의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 버밍엄 빈민가에 있는 가톨릭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앙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여동생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된다.[35] 톨킨의 가족은 톨킨이 상급학교에 지원, 합격하였을 때, 사랑하던 시골의 집을 떠나 산업화로 복잡하고 부산스러웠던 대도시 버밍엄으로 이주해야 했고 매일매일, 등교하기 위한 교통비를 댈 수가 없었다. 싼 집세의 집을 찾아 여러 번 이사해야 했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에드베이스턴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러나 이곳 근처에는 성인 존 헨리 뉴먼이 세운 영국 오라토리오회의 건물이 있었고, 이곳에 있는 신부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를 알게 됐다.

생활고와 집안에서 고립되고 냉대받는 마음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자녀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점점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졌고 프랜시스 신부[36]도움으로 잠시 시골집에서 요양할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1904년 11월 초 혼수상태에 빠졌고, 며칠 후 불과 서른네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녀는 브롬즈그로브에 있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영면하였고, 유언장에서 프랜시스 신부를 후견인으로 부탁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존경을 지니고 있었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평생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게 머물렀던 톨킨은 어머니의 죽음을 일종의 신앙을 위한 ‘순교’로 이해했고, 평생 어머니의 신앙으로 자신이 신앙을 지킬 힘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의 손자 사이먼 톨킨에 의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실시 된 전례 개혁과 변화들에 할아버지가 실망했다고 전했다. 신앙심도 그렇지만 본인이 언어교수라 라틴어에 애착이 간 것도 있을듯하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나는 본머스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간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교회가 미사식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꾼 직후였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분명히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나머지 신도들이 영어로 대답하는 동안 라틴어로 아주 크게 모든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톨릭용 성경 역본인 Jerusalem Bible 편찬[37]에도 참여했고 실제로 가톨릭용 성경 중 Jerusalem Bible이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데 아무래도 문학작가인 톨킨의 기여 때문인 듯하다. 장남인 존 프랜시스 루엘 톨킨은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5.4. 저작권, 판권 관련[편집]


톨킨의 작품들에 대한 판권은 크게 두 곳의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하나는 톨킨의 후손들이 세운 톨킨 재단과 지금은 타계한 명 프로듀서 솔 잰츠(Saul Zaentz)[38]가 세운 미들어스 엔터프라이즈로, 톨킨 재단은 캐릭터를 비롯한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들어스 엔터프라이즈는 영화와 머천다이징 권한을 1969년 톨킨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 판 것을 1976년에 사들인 후 계속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저작권에 관해 엄청나게 엄격하다.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의 경우 톨킨에게 저작권을 얻지 못한 제작자가 이름만 바꾸어 출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게리 가이객스는 공식 인터뷰에서 이를 부정했다. 데이브 아네슨 생애 중 공식석상에서 따로 코멘트를 한 적이 없었다. D&D 제작사인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는 톨킨과 관련된 부분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있다. 저작권 소송에 여러 번 당한 한 때문일까? 하지만 톨킨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나간 것은 사실. 심지어는 반지의 제왕 영화로 인하여 다시 D&D가 퍼져나가는 나라도 있다. 이스라엘 등 다국이 해당된다. 이러한 사정과는 별개로 워낙 멋지고 세밀한 세계관이다보니 디앤디 플레이어 사이에서는 홈브루 캠페인에서 많이 애용되고 Cubicle7같은 제3자 출판사에서는 수권에 걸친 본격적인 중간계 캠페인 북을 내기도 할 정도이다.

한국의 양판소, 게임, 인터넷 소설들이 톨킨의 창작물과 순수 오리지널 이름들을 멋대로 갖다 쓰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39] 따지고 보면 양판 깔 것도 없이 업계에서 이름 높은 사람들도 비슷하다.[41]

"호빗(Hobbit)"은 톨킨 재단에 판권이 있는 단어이므로 함부로 사용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유사단어로 대체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이외에도 미스릴 등 톨킨이 창조한 단어는 많다...고는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퀘냐 또는 신다린을 소설에 사용하고 싶은데 저작권은?'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톨킨 언어학 관련으로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헬게 파우스캉거가 직접 답변을 해 준 것이기에 신뢰도는 100%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작권법으로 보호가 된 단어가 무엇인지 알아본 후, 괜찮은 경우 써도 된다. 톨킨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고(이건 말할 것도 없이 표절이다.), 캐릭터 이름이나 장소의 이름 같은 경우는 멀티미디어 컨텐츠의 경우 이름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마찰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멀티미디어 컨텐츠 측,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온라인도 사이트 앞 화면에 보면 각 '고유명사'들에 저작권 표시가 되어있다. 일일이 단어들을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톨킨 재단 자체에서 클레임을 걸지 않더라도 2차 구입자가 클레임을 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단순히 이름 몇 개를 갖다 썼다고 재단하고 직접 소송이 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퀘냐와 신다린을 이용하여 직접 단어를 창작하는 경우도 자신의 창작이므로 당연히 소송에 걸리지 않는다.

ex) D&D에서 걸렸다가 수정한 것: 호빗하플링, 발록발러, 미스릴 → 미스랄, 헬메이드 → 헬브라이드, 엔트트렌트 등 다수.

톨킨은 몇몇 사어화되었던 단어들을 이들이 계속해서 쓰였다는 가정 하에 현대적인 문법을 주어 복구시켰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정(엘프)과 난쟁이(드워프)이다. 이는 톨킨이 부록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바인데, 엘프와 드워프의 경우 그 단어가 F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었기에 elfs, elfin, dwarfs라는 식으로 사용되었다. 톨킨은 이를 "언어학자임에도 과감한 실수" 라는 식의 이야기와 함께 은근슬쩍 elves, dwarves로 표기하였다.[42] 이 덕분에 원래는 없던 고유형용사 elven같은 단어도 톨킨을 기점으로 쓰이고 있다. (보통 사전에는 안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문에 책이 인쇄되면서 저런 단어들이 과도교정된 경우가 매우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Elves, dwarves가 elfs, dwarfs로 돌아간다거나, (톨킨이 최악으로 꼽은 것으로) elven이 elfin으로 바뀐다거나...

인터넷에는 톨킨이 dwarves라는 표현을 쓰자 편집자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며 반려했고 톨킨은 본인이 옥스퍼드 영어 사전 저자니까 자기 글을 교정하지 말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A draft of the Fellowship was rejected by Tolkien's Editor, who cited the reason being that the plural for Dwarf, was Dwarfs, not Dwarves according to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Dwarves was not a word that existed. Tolkien responded, very accurately wrote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don't correct me." - “I wrote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don’t correct me."

파일:Dumb-Tolkien-meme-II.jpg

하지만 실제로 톨킨은 'w'로 시작하는 단어에 참여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톨킨과 편집자 사이에 저런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43]

6. 오해[편집]



6.1. 인종주의 관련[편집]


반지의 제왕 같은 경우는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백인우월주의가 드러나 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집필 당시인 1950년대는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던 시기다. 살짝 이전 시대 작품이긴 하지만 꼬마 검둥이 삼보 같은, 인종차별을 넘어 아예 타인종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 작품이 동화로 인기를 얻기도 하던 그런 시절이기도 한 만큼[44]이런 것을 들어 톨킨이 인종주의자라고 보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오히려 요정-호빗-난쟁이 등이 합심하여 악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톨킨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문제는 오르크를 '인종'으로 보느냐, 아니면 '악마'로 보느냐이다. 오르크가 단순히 '악마'라면 인간-요정-난쟁이가 서로간의 반목을 잊고 함께 악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되지만, 오르크를 '인종'으로 보면 백인들끼리 서로 팀 먹고 유색인종을 악마라고 부르며 싸운다고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지의 제왕의 인종차별 시비를 보면 오르크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어 흑인이나 동양인을 연상시킨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문화권에서 검은색은 악을 상징한다. 아프리카도 지역에 따라서 검은색은 악하다고 여긴다. 피부색을 떠나 검은색은 곧 어둠을 상징하고, 미지의 어둠에 대한 공포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본능이기 때문.[45] 신화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톨킨의 작품들은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르크의 이미지를 몽골인에서 따왔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46] 고의는 아니지만 무의식에 인종주의적인 생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의 무시무시한 몽골군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이것만으로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얼음과 불의 노래도트라키라는 다른 예도 있다. 오르크만이 아니라 사우론 편을 든 인간들인 하라드림이나 이스터링들은 설정상 유색인종들이므로 이를 근거로 인종차별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실마릴리온에서는 배신자들과 싸우다가 충성스럽게 최후를 맞은 이들도 있었으니 미묘한 부분이다.

사실 톨킨의 편지를 읽어보면 오르크나 사우론 같은 존재들을 다른 인종이 아니라 악함 그 자체로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차 대전 당시의 편지인 Letter 66에선 연합군을 절대반지 들고 사우론이랑 싸우는데 어쩌다 보니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표현했으며, 이런 전쟁의 대가는 인간과 요정들을 오르크로 만들고 새로운 사우론의 창조라고 코멘트했다. 덤으로 자신의 아들을 우르크 하이 속의 호빗이라고 빗대었다. 더불어 Letter 71에선 오크는 어디에나 있다며 현실에선 어느 쪽(군대)이든 오르크, 악마, 괴물, 인간, 천사들이 다 모여 있다고 얘기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이 인종차별 시비를 부른 것과 달리 톨킨 본인은 인종차별과 제국주의를 매우 싫어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를 뼛속까지 증오한다고 얘기했을 정도. 뿐만 아니라 백인우월주의자들인 나치를 매우 증오했다.[47]그의 고향 남아공에서는 당시에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 지인들 앞에서 자주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 깊게 만연했던 인종차별 인식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을지도. 그나마 서구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덜하다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버스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체포된 일이 반지의 제왕이 쓰여지고 난 후의 일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연설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후에 나온다.

또한 반지의 제왕에서 곤도르친족분쟁순혈주의자들의 어그로가 발단이었다.


6.2. 알레고리적 해석[편집]


톨킨은 작품을 알레고리적으로 쓰거나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지양했다.[48][49] 60년대에 쓰여진 서문에서도 스스로 밝혔듯이 그는 이야기를 현실에 대한 어떤 은유나 시사로 받아들이기보다, 이야기 그 자체를 사랑하고 쓰는 작가였다. 자신의 글에서 상징성을 찾아내려는 행위를 지극히 혐오했다. 사우론은 히틀러스탈린이라느니, 자본주의라느니, 현대 과학이라느니 이렇게 말하는 평론가들을 너무 싫어했고 "그냥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톨킨의 이 관점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화나 전설, 역사에는 자연스럽게 '적용가능성(applicability)'이 생긴다. 톨킨은 본인의 이야기에 다양한 적용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은 무척 환영했다. 그러나 '적용가능성'은 결코 '풍자(allegory)'와 같지 않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해보면 쉬운데, "마치 이카로스의 날개가 녹아내리듯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카로스 이야기는 ~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이야기야"라고 말하는 건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톨킨은 후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톨킨의 표현들은 톨킨의 서간집(The Letters of J.R.R.Tolkien)에 고스란히 실려있다. 다만 역사적인 영감 정도는 받았으며, 예를 들어서 로한은 앵글로색슨족, 난쟁이는 유대인에서 따왔다고 밝힌 바 있다.


6.3. "악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고……"[편집]


Evil cannot create anything new, they can only corrupt and ruin what good forces have invented or made.

악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고 선한 세력이 쌓아올린 것을 부패시키고 망치기만 한다.

톨킨의 명언이라고 알려진 문장이지만, 직접 한 말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톨킨 작품의 주제 중 하나를 표현하는 문장이기는 하다. '악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개념은 그의 저술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 Don't orcs eat, and don't they drink? Or do they just live on foul air and poison?"

"No, they eat and drink, Sam. The Shadow that bred them can only mock, it cannot make: not real new things of its own. I don’t think it gave life to the orcs, it only ruined them and twisted them; and if they are to live at all, they have to live like other living creatures. (……)"

"(……) 오르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나요? 아니면 그놈들은 더러운 공기와 독만 먹고 사나요?" ()

"놈들도 먹고 마시지. 그들을 길러 낸 어둠은 흉내만 낼 줄 알지, 만들어 낼 줄은 모르거든.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만들지 못하는 거야. 어둠은 오르크에게 생명을 준 게 아니라 망치고 일그러뜨려 놓았을 뿐이지. 놈들도 살려면 다른 생물들처럼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 (프로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키리스 웅골 탑. 아르테판 pp.297-298

왕의 귀환에 나오는 프로도의 말인데, 이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인용하고자 한다면 가짜 명언 대신 프로도의 대사를 직접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아래 인용문 또한 같은 주제를 드러낸다.

Yet it is told among the Eldar that the Valar endeavoured ever, in despite of Melkor, to rule the Earth and to prepare it for the coming of the Firstborn; and they built lands and Melkor destroyed them; valleys they delved and Melkor raised them up; mountains they carved and Melkor threw them down; seas they hollowed and Melkor spilled them; and naught might have peace or come to lasting growth, for as surely as the Valar began a labour so would Melkor undo it or corrupt it. And yet their labour was not all in vain; and though nowhere and in no work was their will and purpose wholly fulfilled, and all things were in hue and shape other than the Valar had at first intended, slowly nonetheless the Earth was fashioned and made firm. And thus was the habitation of the Children of Ilúvatar established at the last in the Deeps of Time and amidst the innumerable stars.

다만 요정들 사이에 전해 오는 바로는 멜코르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발라들은 첫째자손들이 올 수 있도록 늘 땅을 다스리고 준비해 두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대지를 건설하면 멜코르는 파괴하였고, 그들이 골짜기를 파내면 멜코르는 채워 버렸으며, 그들이 산을 다듬어 내면 멜코르는 쓰러뜨렸고, 그들이 바다를 만들면 멜코르는 쏟아 버렸다. 어느 것 하나 평화롭게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발라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멜코르는 어김없이 뒤집어엎고 오염시켰다. 하지만 발라들의 노동이 결코 무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곳, 어느 일에서도 그들의 뜻과 목적은 완전하게 성취되지 못했고, 만물은 발라들의 처음 의도와는 다른 형체와 빛깔을 띠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은 서서히 제 모습을 갖추고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일루바타르의 자손들을 위한 거처는 마침내 시간의 심연과 무수한 별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실마릴리온: 아이눌린달레. 아르테판 p.54.


(……) that all those of the Quendi who came into the hands of Melkor, ere Utumno was broken, were put there in prison, and by slow arts of cruelty were corrupted and enslaved; and thus did Melkor breed the hideous race of the Orcs in envy and mockery of the Elves, of whom they were afterwards the bitterest foes. For the Orcs had life and multiplied after the manner of the Children of Ilúvatar; and naught that had life of its own, nor the semblance of life, could ever Melkor make since his rebellion in the Ainulindalë before the Beginning: so say the wise.

우툼노가 파괴되기 전에 멜코르의 수중에 들어간 퀜디는 모두 그곳의 감옥에 갇혔고, 서서히 잔혹한 술책에 의해 타락하여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멜코르는 요정들에 대한 시기심과 그들을 조롱하려는 생각으로 오르크라는 끔찍스러운 종족을 번식시켰고, 이들은 나중에 요정들에게 최악의 적이 되었다. 이는 오르크가 일루바타르의 자손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지니고 있고, 또 번식하였기 때문이다. 멜코르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 바로 아이눌린달레 동안에 반역을 일으켰기 때문에 자체의 생명을 지닌 존재나 그와 유사한 것을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현자들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실마릴리온: 퀜타 실마릴리온, 요정의 출현과 멜코르의 구금. 아르테판 p.95.


7. 여담[편집]


  • 톨킨은 킹 에드워드 학교 재학 시절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몹시 싫어했다. "셰익스피어의 '거대한 버넘 숲이 던시네인 언덕을 움직여 오는' 것 같은 표현을 배우는 학창 시절은 정말 실망스럽고 혐오스러웠다. 나는 진짜로 나무들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 행진하는 장면을 만들어내기를 오래도록 염원했다."

  • 1969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톨킨 팬클럽 중 하나인 ‘톨킨 협회(Tolkien Society)’는 매년 봄 총회를 잉글랜드 남부 소도시 아런델의 노포크암스 호텔에서 연다.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회원 200여 명이 모인 행사다. 현 회장인 29세의 숀 거너는 “톨킨은 우리 협회의 영원한 명예회장”이라고 말했다. “설립자 베라 채프먼이 톨킨 사망 1년 전인 1972년 런던에서 직접 그를 만나 ‘회장이 돼달라’고 부탁해 동의를 받았어요. 협회가 존재하는 한 톨킨은 영원히 우리의 명예회장입니다.” 매년 톨킨 협회는 호빗 빌보와 프로도의 생일이 있는 9월 옥스퍼드에서도 대규모 총회 ‘옥손무트’를 연다. 700여 명 정도가 모여 학술대회, 가장행렬, 파티를 사나흘간 이어가는 대규모 행사다. 모금을 통해 저개발국가에 톨킨의 책을 보내는 ‘톨킨을 세계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각자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오직 톨킨을 사랑한다는 공통점만으로 이런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톨킨이 죽은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자, 협회 아카이브 담당관인 팻 레이놀즈 박사는 “톨킨이 창조해낸 세계는 읽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은 소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누군가는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쓰고, 누군가는 중간계에 관한 노래를 만들죠. 제 본업은 박물관 큐레이터이지만, 여가 시간엔 톨킨 소설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인간 캐릭터의 옷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피터 잭슨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톨킨의 책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처럼요.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 사람들의 창조성을 자극해 또다른 무언가를 만들게 하는 것, 그게 톨킨을 톨킨이도록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 옥스퍼드 대학 식물원에 서 있던 200살 넘은 남미 소나무는 톨킨이 기대 앉아 책 읽기를 즐겼다고 해서 ‘톨킨 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무는 2014년 가을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여전히 옥스퍼드 대학과 도시 곳곳에는 톨킨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순례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 메탈밴드 블라인드 가디언이 톨킨의 작품을 자신의 곡에 많이 써먹었다. 정규앨범 중 하나인 Nightfall In Middle-Earth는 아예 통째로 실마릴리온의 내용으로 앨범들을 채웠으며 이 앨범은 블라인드 가디언의 앨범 가운데서 손꼽히는 수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앨범들의 곡 대부분이 톨킨의 작품들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있다. 그 밖에 유명한 심포닉 블랙메탈 밴드 Summoning[50], 핀란드의 Battlelore, 슬로바키아의 Orkrist 등 톨킨의 작품을 주제로 삼는(혹은 삼았던) 메탈 밴드들이 굉장히 많다. 내용상 톨킨과 관련이 없는 밴드도 반지의 제왕 등에서 등장한 지명을 밴드명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Amon Amarth, Gorgoroth, Minas Morgul 등). 절대반지에 블랙 스피치로 쓰여있는 단어 중 어둠을 뜻하는 Burzum을 밴드명으로 쓰는 익스트림 메탈계에서는 전설적인 밴드가 있다.

  • 2014년 5월 28일, 톨킨이 직접 반지의 제왕을 설명한 녹음본이 발견되었다. '놀랍다'

  • 2015년 '쿨레르보의 이야기'라는 신간이 출간되었다.

  • 2017년 6월 2일, '베렌과 루시엔'이라는 신작이, 쓰여진 뒤 100년이나 지나서 출간되었다.

  • 2013년 톨킨 본인을 다룬 전기영화가 제작에 들어간다는 뉴스가 나왔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제작사는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이고 제목은 톨킨(Tolkien)이다. 톨킨 역할을 맡게 된 배우는 니콜라스 홀트, 그의 아내 이디스 톨킨을 맡게 된 배우는 릴리 콜린스다. 개봉일은 2019년 5월 10일. 톨킨의 가족들과 톨킨 에스테이트는 이 영화의 제작을 승인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 보다 톨킨의 생애를 디테일하게 알고 싶다면 톨킨 전기(J. R. R. Tolkien: A Biography, 작가 험프리 카펜터)를 읽기 바란다. 톨킨 저작권 협회에서 공식 인증한 톨킨 평전으로 국내에서도 2004년 해나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 자신이 창조한 호빗을 좋아했는데 톨킨은 호빗을 통해서 산업혁명과 과학발전으로 인류의 삶이 좋아졌지만 반면에 끝없는 경쟁체재와 환경오염, 그리고 삭막해진 세상에 비록 신체는 작지만 재물에 욕심이 없고 가족과 이웃들이 서로 배려하는 등 평화로운 삶을 원하던 톨킨이 만든 이상적인 종족이기 때문이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싫어해서 절대 자기 작품에 손대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월트 디즈니의 사업 방식을 보고 사기꾼이라고 했을 정도[51]. 호빗이 출판된 해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개봉했는데, 친구 C. S. 루이스와 같이 보고 둘이서 같이 깐 적도 있다.
나는 월트 디즈니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절망적으로 타락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작품'에는 감탄하거나 매력적인 구절들이 있지만, 그것들 모두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역겹다. 몇몇은 나를 구역질나게 했다.

1964년 7월 15일 팬에게 보낸 편지

  • # 편지로 듄 시리즈의 감상을 남겼는데, 자신도 작가이기에 다른 작가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며 듄은 다소 격하게 마음에 들지 않기에 더 이상의 언급을 거부하는 것이 공평하고 최선이라면서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고 한다. 듄 시리즈의 작가 프랭크 허버트는 신화와 종교, 그리고 영웅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이자 신화를 진실되게 바라봤던 톨킨이 불편해했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 같은 SF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은 좋아했다.

  • 파이프 담배 애호가였다. 톨킨의 작품을 읽다보면 금세 이러한 면모를 읽어낼 수 있는데 반지의 제왕 초반부에 호비튼과 호빗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면서 연초의 종류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친구인 CS 루이스 역시 그러해서, 톨킨과 함께 파이프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썰은 유명하다.

8. 주요 작품[편집]




생전 작품
  • 호빗 (The Hobbit)
  • 니글의 이파리 (Leaf by Niggle)
  •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 햄의 농부 가일스 (Farmer Giles of Ham)
  • 톰 봄바딜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om Bombadil)
사후 작품
  • 빌보의 마지막 노래 (Bilbo's Last Song)
  • 북극에서 온 편지 (The Father Chirstmas Letters[52])
  • 실마릴리온 (The Silmarillion)
  • 끝나지 않은 이야기 (Unfinished Tales of Númenor and Middle-earth)
  • 가운데땅의 역사서 (The History of Middle-earth)
  • 로버랜덤 (Roverandom)
  • 후린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Húrin)
  • 베렌과 루시엔 (Beren and Luthien)
  • 곤돌린의 몰락 (The Fall of Gondolin)[53]
  • 가운데땅의 자연 (The Nature of Middle-earth) [54]


8.1. 저서의 판본들[편집]


톨킨이 쓴 책들의 참고할 만한 판본들. 모두 해당 링크를 타고 가면 된다.


9. 팬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톨키니스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톨킨의 팬들은 보통 톨키니스트란 이름으로 지칭된다. 톨키니스트들은 여타 다른 덕후들과 팬덤과는 그 규모와 깊이를 달리한다. SF쪽에서 팬덤의 본좌마블 코믹스, DC 코믹스, 스타워즈, 스타트렉, 닥터후 등이 규모나 상업적인 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면, 톨키니스트들은 학문적, 철학적인 면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기행의 천국 영국에서는 톨킨학(Tolkienology)이라면서 세계관 연구를 하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다.[55] 열성팬들 중 고학력자가 많고 이들이 나름 개인적인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학문적으로 연구된 판타지 문학은 드물다.[56]

한국 팬덤으로는 네이버 카페 중간계로의 여행이 가장 대중적이다.


10. 관련 문서[편집]




11.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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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남아프리카 공화국.[2] 1896년 4살 때 영국의 버밍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사실상 버밍엄이 고향인 셈이다.[3] 1, 2, 3, 4[4] 1위는 필립 라킨, 2위는 조지 오웰, 3위는 윌리엄 골딩, 4위는 테드 휴스, 5위는 도리스 레싱, 7위는 V. S. 나이폴, 8위는 뮤리엘 스파크, 9위는 킹슬리 에이미스, 10위는 앤절라 카터#[5] 1위는 셰익스피어, 2위는 제인 오스틴, 3위는 조지 오웰, 4위는 찰스 디킨스, 5위는 이언 뱅크스, 7위는 제임스 조이스, 8위는 도스토예프스키, 9위는 세르반테스, 10위는 마크 트웨인. 영어권 작가가 아닌 사람도 보인다. 다만 이 투표는 매체가 직접 순위를 선정한 더 타임스와 달리 독자 투표로 이루어진 순위다. #[6] Birmingham Oratory. 참고로 오라토리오회는 필리포 네리가 설립한 재속 사제 공동체이다.[7] 지금은 옥스팜 가게로 바뀐 세인트 자일스 거리 톨킨의 옛 집에서 옥스퍼드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밴버리 로드를 따라 13㎞쯤 북쪽으로 차를 달리면 울버코트 공동묘지가 나온다. 톨킨과 부인이 함께 묻힌 무덤엔 팬들이 다양한 언어로 써서 놓고 간 편지들이 돌 아래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작달막한 장미나무 한 그루가 자랐고, 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마다 톨킨 팬들이 가는 실로 묶어 둔 절대반지 여러 개가 함께 흔들렸다. 톨킨의 팬들이 쓴 편지 중 하나는 캐나다에서 온 ‘저스틴’이 써둔 것이었다. “톨킨, 모든 게 다 고마워요.”[8] 물론 이러한 영향권에 들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도 있다. 톨킨이 호빗을 발표하기 이전인 1920년대부터 이미 미국 잡지에서는 현대적인 판타지 장르의 많은 작품들이 탄생하고 있었고, 로버트 E. 하워드, 로드 던세이니, 프리츠 라이버, E. R. 에디슨, 머빈 피크 등이 있다. 톨킨 이후에도 로버트 홀드스톡미사고의 숲이나 차이나 미에빌의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등이 있다. 물론 조지 R.R. 마틴 같이 의도적으로 톨킨과 차별화되려고 한 작가들은 톨킨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 이후 그 아류작들(로버트 조던과 같은 해외 작가들이나 다수의 초기 한국 판타지 작가들) 중 일부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하이 판타지 또는 에픽 판타지라는 판타지의 한 서브장르일 뿐 결코 판타지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매우 많은 판타지적 요소, 판타지에 나오는 캐릭터는 톨킨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그래서 그가 현대 판타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9] Book of Swords, Introduction by Gardner Dozois 참조.[10] 지금은 그 이민족들이 영국의 국민의 일부가 되었다.[11] 2~3개의 언어를 만들어냈으며, 단순히 만든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언어 변천사, 문법, 발성법까지 세세하게 설정되어 있다. 또한 다양한 고유명사들이 톨킨의 예상한 변이의 과정을 통해 실제 고대 게르만어 등의 고유명사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언어 덕에 열성적인 톨키니스트들은 그가 만든 요정어로 대화도 하며, 톨킨이 창조한 언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있다.[12] 전반적으로 반지의 제왕이나 실마릴리온 등은 묘사가 적고 많은 부분을 요약해서 서술하는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를 현대식으로 살을 붙인다면 무지막지한 양의 텍스트량이 쏟아져나올 가능성이 높다.[13] 반지의 제왕의 무대가 되는 가운데땅은 고대 지구고, 자신은 빌보와 프로도가 쓴 '레드북'을 번역했다는 말. 물론 설정상 그렇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톨킨 문학은 '영문학'이다. 도서관만 가봐도 알 수 있다. 분류 카테고리에서 당당히 영문학 쪽에 서적들이 위치한다.[14] 반지의 제왕에서 톨킨이 영어로 번역한 언어.[15] 기독교인이라면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아슬란이 예수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영미 문화권에서 나니아 연대기는 거의 '성경 동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6]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기독교 서적을 쓰고 톨킨에게 헌정했지만, 정작 톨킨 자신은 이 책을 정말 싫어했다.[17] 루이스가 현재도 종파를 막론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는 주옥과 같은 기독교 서적들을 많이 집필한 반면, 톨킨은 가톨릭용 성경 역본인 Jerusalem Bible 편찬에 참여한 것 외에는 기독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을 내지는 않았다. 이 뿐 아니라 종교적인 색채를 글 안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 안에서 기독교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도 제발 그런 시도는 하지 말고 작품을 작품으로만 봐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다만 소설 속에서 창조주 일루바타르의 현실세계 개입을 통한 악의 문제를 넌지시 언급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스쳐지나가듯 나오는 장면들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인식하기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18] 참고로 톨킨이 판타지의 아버지라면 김용은 무협소설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중국 등지에선 이미 김학이라고 부르며 그의 작품을 연구하기도 한다.[19] 다만 무협소설 경력을 호스티스 경력(...)에 비유할 만큼 다소 까칠하게 자기 작품을 대한 김용과 비교하면 반지의 제왕을 자신의 생혈로 썼다고 한 말도 그렇고 톨킨 쪽이 레젠다리움을 인생 숙원 사업으로 더 진지하게 생각한 면은 있다.[20] 톨킨의 재해석이 매우 유명해서, 거의 모든 영문학도가 이 작품을 해석할 때 그의 논문을 인용한다.[21] 이 작품은 그가 20대일 때부터 최초로 현대어로 해석했다. 그것도 두운(게르만 시가의 특징적인 운율법 중 하나로, 각 행의 맨 처음을 같거나 비슷한 발음으로 통일하는 것. 각운과는 반대이다.) 하나하나를 전부 살려가면서 말이다.[22]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쓰는데 루이스가 끼친 영향은,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계속해서 쓰도록 격려해 주었다는데 있다. 루이스는 톨킨에게 그 작품세계 전반에 걸친 영향을 받았고, 톨킨은 루이스에게 그 작품 세계를 실제로 구현시키는 것에 대한 많은 격려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루이스와 톨킨>이란 책을 참고.[23]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모건 신부라고 하는데, 사실 풀네임이 프랜시스 재비어 모건이다.[24] 사건의 발단은 연애질하다가 장학금을 놓쳐서이다.[25] 가톨릭의 경우는 결혼은 가톨릭 신자끼리만 권장하나 '태어날 2세'에게 가톨릭 유아 세례를 주겠다는 약속만 해준다면 비신자와의 결혼도 가능한다. 톨킨 부부의 경우는 관면혼이 아니라 가톨릭 회심을 선택했다.[26] 톨킨이 가톨릭 신자인 것엔 사연이 있다. 톨킨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자, 그의 어머니가 주변 일가 친척이 모두 성공회 신자임에도 가톨릭으로 회심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시 영국은 여전히 가톨릭 신자에 대한 차별이 심한 나라였으므로, 톨킨 어머니의 개종은 매우 큰 결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친척과 이웃들의 회유에도 톨킨 모자는 끝까지 가톨릭 신앙을 지켰고, 이웃들로부터의 사회적 고립과 친척들의 경제적 지원 단절 때문에 힘들고 빈곤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유년기를 지낸 톨킨으로서는 가톨릭은 어머니의 종교이자 어머니의 신념이었다. 12세 되던 1904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톨킨은 가톨릭에 더욱 깊은 애정을 갖게 되어, 가톨릭 신자가 아닌 톨킨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27] 1차 대전 중 최대의 인간 도살장 중 하나였던 솜(Somme)에서 살아 돌아왔다.[28] 영어로는 monarchist로 왕당파(royalist)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다.[29] Carpenter, Humphrey; Tolkien, Christopher, eds. (1981). The Letters of J. R. R. Tolkien. London: George Allen & Unwin.[30] 그는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동차를 경멸했으며, 자전거 타기를 더 좋아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호빗들이 그대로 물려받는다.[31] 참고로 톨킨의 조상은 독일계로 7년 전쟁 당시 작센에서 잉글랜드로 이주했다고 한다.[32] 또한 호빗에서는 스마우그폭격을 비판했다.[33] 1953년 12월 2일, 톨킨은 그의 친구 로버트 머레이(Robert Murray) 예수회 신부에게 상당히 짧은 다섯 단락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그의 모든 편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편지가 되었다. 머레이 신부는 ‘반지의 제왕’의 일부를 읽고 논평했으며, 그 글로 인해 “은혜의 질서와 긍정적인 양립성”에 대한 강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The Letters of J.R.R. Tolkien, 171-72).#[34] 아내는 성공회 신자[35] 가톨릭교회 입교는 톨킨의 어머니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전환점이 되고, 한편으론 인생의 시련과 고통의 시작이 된다. 왜냐하면 성공회 교인이었던 친정 가족가 이웃들이 이런 결정에 매우 분개하여, 그녀를 여러 방법으로 회유 및 협박하였기 때문이다. 갖가지 정신적인 압력 뿐만 아니라 끝내는 일체의 재정적 지원과 도움을 끊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결심을 굳건히 지켰고, 자식들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자라나도록 애를 썼다.[36]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읜 톨킨과 동생은 그의 어머니가 임종하면서 후견인으로 지정한 프랜시스 자비에르 모건 신부로부터 큰 영향과 도움을 받았는데, 신부의 존재는 그야말로 어머니를 잃은 큰 슬픔을 딛고 톨킨 형제가 잘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부는 고아가 된 후 친척들의 냉담한 반응에 처했던 톨킨 형제에게 사비를 들여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규율 있는 모습으로 형제들에게 신앙과 삶의 모범을 보여 줌과 동시에 자신이 소속된 오라토리오회에 관한 정보와 해당 공동체의 설립자이자 수호성인필리포 네리의 일생과 교훈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이로 인해 톨킨은 훗날 견진성사를 받을 때 자신의 견진명으로 필리포 네리의 이름(영어로는 필립)을 택했으며, 가끔씩 자신의 이름을 존 로널드 필립 루엘로 쓰기도 했다. 또한 톨킨은 아들 마이클에게 쓴 편지에서 프랜시스 신부에 대해서 “진짜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묘사했다.[37] 직접 번역했다기보다는 윤문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38] 아카데미상을 3차례나 수상한 유명 영화 제작자다. 그가 제작한 작품들은 1976년 켄 키지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각색한 동명의 영화로 작품상을 비롯해 5관왕, 1985년 아마데우스로 작품상을 포함해 8관왕, 1997년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작품상을 비롯한 9관왕을 차지했다. 2014년 1월 3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39] 심지어 중국에게 표절당한 한 게임에서는 엔트들이 등장한다.[40] 요정어로 왕이라는 뜻이다.[41] 한국의 유명 2D횡스크롤 MMORPG에도 발로그나 아란[40] 등 여러 부분에서 베낀 언어•설정이 등장한다. 단 후자는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이며 한자 표기도 따로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완전히 베꼈다고 볼 수는 없다.[42] dwarves의 경우는 사실 단수형은 dwarrow, 복수형은 dwerrow로 쓸 것도 고려했으나, 이 단어는 모리아를 가리키는 옛말 dwarrowdelf에만 쓰였다.[43] 출처 #[44] 참고로 해당 작품의 작가는 정말 사심없이 순수하게 동화로서 글을 썼고, 작중 배경이 되는 인도인 들에게 읽으라고 권유하기 까지 했다! 물론 돌아온 반응은 좋을리가 없었지만 작가는 인도인이 주인공인 동화를 정작 인도인들이 싫어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45] 인종차별자들이 흑인을 차별할 때 이러한 상징성을 들먹이기도 한다.[46] 그들은 쪼그리고 앉아있고, 넓고, 코가 납작하고, 살갗이 넓으며, 입이 넓고, 눈이 갸름하다; 사실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몽고 유형의 타락되고 혐오스러운 버전이다.[47] 정확히는 반유대주의와 게르만족우월주의였다.[48] 이는 루이스와 작품관으로 인해 갈등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49] 다만 다수의 평전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바로는 후에 종교적인 요소는 인정을 하고, 많은 모티브를 따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50] 후기로 갈수록 가사에서 톨킨의 영향이 조금씩 줄어들지만, 여전히 반지의 제왕 관련 메탈밴드로 유명하다.[51] 월트 디즈니 문서의 비판 문서를 참조하면 어느정도 알 수 있다.[52] 'Letters from Father Christmas'로도 불린다.[53] 2018년 8월 30일 발행[54] 2021년 발행[55] 톨킨 연구(tolkien studies)와는 다르다. 톨킨학은 톨킨 세계관을 실제 세계로 보는 관점 속에서 연구를 하는 것이고 톨킨 연구는 작품으로서 세계관을 연구하는, 그러니까 문학 연구다.[56] 사실 톨킨 본인은 자신의 소설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정치적 해석도 거부했지만, 소설의 내용을 보면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학적인 경구로도 인용 가능한 부분도 곳곳에 보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