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킷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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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운용한 제트(국지)전투기. 일본 최초의 제트전투기이자,[1] 아시아에서 최초로 개발된 제트전투기이다.
흔히 생김새가 닮은 Me 262의 복제판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사실이다.
2. 상세[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말 일본은 사기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B-29[2] 를 필두로 한 미군의 전략폭격에 속수무책으로 얻어터지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도 B-29를 격추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지만 고고도 전투기 수량도 부족한 상황이거니와 태평양전선 일선의 격전 속에서 많은 에이스 파일럿을 상실하는 바람에 숙련된 조종사도 부족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어서 미 해군이 제해권을 틀어쥐면서 더 이상 인도네시아 등 남방 점령지에서 자원을 수송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연료 문제가 답이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항공기 엔진을 위한 고옥탄가 휘발유가 없어서 알콜도 섞어보고 소나무에서 송근유까지 짜내서 섞어보는 등[3] 여하튼 연소실에서 탈 만한건 죄다 섞은 대용연료로 전투기를 띄우는데다 원유가 없으니 윤활유[4] 같은 정비용 잡유도 같이 안드로메다 익스프레스를 탔다.
이런 까닭에 일본도 귀한 고옥탄가 가솔린이 아니라 등유나 경유 같은, 비교적 넉넉한 연료 또는 아예 대용연료를 집어넣어도 돌아가는 제트 엔진에 대해 연구를 개시했고, Ne-10, Ne-10改, Ne-12, Ne-12B 등의 제트엔진을 개발하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고 있었다.[5] 하지만 Ne-12B(추력 320kgf)까지 와서도 충분한 추력을 얻지 못한 일본은 선박용 디젤엔진 기술을 독일에게 넘겨주는 대신 Me 262의 BMW 003A 엔진(추력 800kgf)과 유모 004B엔진(추력 900kgf)각각 1기와 설계도를 독일에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1943년 12월 16일 일본 해군 잠수함 I-29에 각종 원자재[6] 를 실어 프랑스 로리엥으로 보낸다.
미군의 추적을 피해 무사히 로리엥에 도착한 I-29는 003A 엔진 실물과 많은 설계자료들, 그리고 기타 화물[7] 을 싣고 일본으로 출항했다. I-29는 순조로운 항해 후 중간 기착지인 싱가폴에 입항하여 기술인원과 항공편으로 전달할 서류를 내려놓고 출항하였으나, 출항 직후 기뢰에 걸려 침몰, 엔진 샘플과 설계자료는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았다.[8] 싱가폴에서 따로 하역된 003A 엔진의 일부 설계도와 004B 엔진 시험 보고서 등과 같은 간단한 자료만이 남아 항공기편으로 일본에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남들이 10년 걸려 이룬걸 일본 혼자 2년 안에 전부 이루어내야 하는 상황이다.[9]
물론 일본의 제트 엔진 연구는 태평양전쟁 전~전시 초반부터 조금씩이나마 이루어졌기 때문에 핵심 기술은 일단 보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는데, 주 엔진으로 선정된 Ne-12B가 추력이 부족한 관계로 전투기 자체도 최대한 소형 경량화가 요구되었다. 킷카의 생김새는 Me 262와 많이 닮아있으나 실제로는 Me 262보다 작고 가벼우며 주익형상도 테이퍼익을 채용하였으며 동굴진지 같은 데 짱박을 때 편하도록 육상전투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익을 접을 수 있는 등 우수한 설계의 전투기...라고 할 수는 없는 반푼이 모방. 속력이 대전 후기의 프롭기보다 느리고(!) 항속거리는 Me 262의 반밖에 안 되며, 무장도 30mm 기관포 2문으로[10] 더 약했다. 한마디로, 실제로는 육군에서 설계한 제트전투기인 Ki-201 카류와 달리 Me 262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독자적인 설계의 전투기였는데, 처음부터 실전투입을 가정하고 제작된 Me 262와는 다르게 제트엔진을 달고 일단 실제 비행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기술실증기적 성격이 짙은 기체이며 이 기체의 의의 또한 여기서 나온다.
기체의 제작은 나카지마 공장에서 진행되었지만 고가치 목표였던 나카지마 공장은 얼마 가지 않아 미군의 폭격으로 날아갔다. 킷카가 격납되어 있던 격납고도 폭탄을 얻어맞아 파괴되었으나 천운이 따랐는지 격납고 안의 킷카는 거의 파손되지 않았고 이후 제작은 시골 농가로 분산 이전되어 진행되었다. 시제기의 기체 조립은 45년 6월 완료되어 테스트 비행을 위해 키사라즈 기지로 이송됐다.
킷카 시제기 제작과 별개로 제트엔진의 개량도 계속 진행되어 45년 4월 BMW 003A를 참고하여 Ne-12B보다 좀 더 추력이 올라간 Ne-20 엔진이 완성, 기존의 Ne-12B 대신 이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이 내려진다. 이 엔진은 키사라즈 기지로 옮겨졌고 45년 6월 조립 완료된 킷카의 기체도 키사라즈 기지로 이송되어 기지 내에서 기체에 엔진을 탑재, 최종 테스트를 후 첫 시험비행 일정을 8월로 잡는다.
3. 시험비행[편집]
45년 8월 7일, 킷카는 활주로에서 이륙하여 12분간의 첫 비행에 성공한다. 이때는 첫 비행인 만큼 이륙중량을 줄이기 위해 노즈기어 커버와 라디오, 라디오 안테나를 뗀 상태였고 연료 역시 만재한 상태가 아니었으며 랜딩 기어는 내린 상태였다.[11] 첫 비행에 성공한 킷카의 다음 테스트는 연료를 만재한 상태에서의 비행시험 실시가 예정되었다. 연료를 가득 채운 킷카는 약 3.5톤으로 Ne-20 엔진의 추력으로는 이륙하기 다소 버거웠다. 따라서, 이륙시에는 보조로켓(RATO)을 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비행테스트는 계속해서 연기되었다. 본래 예정일은 10일이었으나 공습으로 연기, 11일에는 악천후로 연기되었고, 결국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벌어진지 6일 후인 8월 12일 킷카의 두번째 비행시험이 실시되었다. 엔진 전 출력 가동과 RATO 보조로 이륙 활주를 시작했지만 RATO의 연소가 종료되어 가속도가 떨어지자 테스트 파일럿[12] 은 이것을 엔진 트러블에 의한 출력저하로 판단, 이륙을 단념하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러나 킷카는 제대로 멈춰서지 못하고 그대로 활주로를 이탈한 후 전복되며 기체가 파손된다.
일본은 어떻게든 킷카를 수리하여 다시 테스트를 재개하기로 했지만 시간은 더 이상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3일 후인 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은 무조건 항복하고 제작된 두 대의 시제기는 미군에게 접수된다. 이 중 한 기는 현재 복원 중이며, 한 기는 엔진이 제거된 채 우드바 헤이지 센터에서 전시 중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 병기를 '특공병기'로 부른 것과 이름에 花자가 들어간 것, MXY-7 오카의 뒤를 이어 황국 2호 병기로 지정된 것을 보면 아마 이 놈도 자살병기로 사용하려 했던 것 같다는 의혹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는 '특수 공격기'로 취급한건데, 제트기로서 초고속으로 미국 함대에 500kg 폭탄을 떨구고 오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일반기에 비해 특수하다고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4. 미디어 등장[편집]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의 유일한 일본 제트기로 등장한다.
워 썬더에서 BR 7.0에 일본 제트기 입문 역할로 등장한다.
히어로즈 인 더 스카이에서는 일본 육군트리 102레벨 정규라인업으로 출시되었다. 성능은 모든면에서 완벽한 Me 262의 하위호환 취급이었지만 일본트리 최초의 제트전투기라는 이유로 울며 겨자먹기로 사용하던 유저들이 있었다.
함대 컬렉션에서는 쇼카쿠와 즈이카쿠 2차개장 업데이트 시 대중량 함재기와 제트기 운용 가능 가능성이 언급되었고, 이후 랭킹 보상으로 킷카에 쓰인 엔진인 네식엔진이 풀리면서 함재기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2월 9일 업데이트 이후 킷카 개(橘花 改)의 형태로 추가되었다.
전함소녀에서 아오시모라는 이름으로 동체하단엔진 계획안이 등장하며 즈이카쿠의 개조를 통해 입수가 가능하다.
파인몰드에서 48스케일 프라모델이 나왔다. 박스아트는 45년 8월 7일의 첫 시험비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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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밀히 말하자면 Ku-4가 1940년 초부터 개발되고 있었지만 일본 군부의 무관심으로 1944년경 프로토타입 제작 직전 개발이 중지되었다. 따라서 일본이 최초로 개발한 제트전투기는 아니지만 일본이 개발하고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제트전투기는 맞다.[2] 순항고도가 10,500m에 최고속도 574km/h라는, 대전 초기 어지간한 전투기 속도를 발휘하는 고속성능에다가 기체 중앙의 사수가 기계식 탄도컴퓨터의 보조를 받으며 목표를 조준하면 기체 4개소의 12.7mm 2연장 원격조작 포탑이 조준된 목표에 집중포화를 퍼붓는 진일보된 방어기총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 20mm 기관포를 실제로 쏘아가며 테스트한 방어력은 덤이다.[3] 이것은 대전말 독일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제대로 된 연료가 부족해서 목탄으로 가는 전차나 자동차를 만들 정도였다. 석탄에서 기름을 빼내는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가성비가 심각하게 떨어졌기에 이 기술로 대규모 공중 작전에 필요한 연료를 조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4] 일설에는 정어리 기름을 정제하면 고순도의 윤활유로 사용이 가능하다 하여 일본 근해에 풍족한 정어리를 잡아다 윤활유 수요를 메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근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40년대 초반부터 정어리 조황이 불황이어서 이 방법도 실패.[5] 참고로 일본 제트엔진 형식명의 Ne(일본어로는 ネ)는 연소로켓(燃焼(ネンショウ)ロケッ)의 앞글자.[6] 고무, 텅스텐, 주석, 아연 등의 원자재, 키니네와 아편 등의 의약품 원재료에다 커피 같은 기호품까지 실려있었다.[7] 문제는 이때 선적된 화물 중에 무려 산화우라늄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정련하면 핵폭탄을 만들 수 있으니 일본 외무부 암호 해독을 통해 I-29의 화물 선적목록을 알아낸 미군은 이 잠수함을 미친 듯이 찾았다고 전해진다.[8] 다른 설에 따르면 싱가폴 입항 후 I-29 함장이 이후 항로를 보고하는 무전을 미 해군이 방수, 암호해독을 통해 잠수함 2척을 예상항로에 매복시켰다가 어뢰로 격침했다고도 전해진다.[9] 사실 이런 상황은 꼭 킷카에만 적용된것은 아니다. 서양 열강들과 일본의 산업혁명의 시점과 기술력 차이를 생각했을때 실질적인 기술력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전 분야에 걸처 1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로 인한 압축성장으로 대전기 일본의 모든 장비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서는 타 국가에 비해 성능이 조금씩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미야자키 히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10] Me 262는 30mm 기관포(MK 108) 4문을 장착했다.[11] 사실 이건 특별하지는 않은 것이, 대부분의 항공기들은 첫 비행에서 랜딩기어를 내리고 비행한다. 첫 비행한 만큼 돌발상황이 벌어져 비상착륙을 해야할 수도 있는데, 기체 오류로 랜딩기어가 내려오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에 아예 비행 내내 내리고 있는 것.[12] 다카오카 스스무 소좌. 패전 후에는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최초의 일본제 제트연습기 T-1A의 테스트 파일럿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