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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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연락처
Korea Liaison Office(KLO)
켈로부대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09090105380006200_P2.jpg
파일:켈로부대 부대패치.jpg
파일:13745D4A503C993720.png
창설일
1949년 6월 1일
해체일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 휴전 후 대한민국 육군에 흡수)
기능
서해 부속도서 및 해상 방어
대북 군사정보 수집
대북 침투 및 게릴라전, 사보타주 수행
소속
파일:미국 국기.svg 미군 극동사령부(FECOM)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UNPIK)
대한민국 육군
1. 개요
2. 시초
3. 활약상
4. 8240부대에 대한 보충 설명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의 지리와 언어에 익숙한 이북 출신 한국인들을 모집, 북한 지역에서 정보 수집과 게릴라전 등을 비공식적으로 수행한 특수부대로, 정식명칭은 미 육군 제8240부대이다. 미군 소속이지만 카투사와 달리 병적을 법적으로 공식 관리하지 않아서 군인 신분이 아닌 미군이 고용한 민간고용인 신분이다.[1]

휴전 후 이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 육군에 편입되었고 그 중 일부는 육군 정보국으로 소속을 옮겨 계속 근무하거나 특전사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특수부대에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러나 이관 전의 기록이 없다시피 했기에 그 전에 전사, 행방불명, 부상, 기타 이유로 켈로를 떠나게 된 인원들은 (동료의 증언, 보증이 없는 한) 신원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병역미필 신분이라 다시 한국군에 징집되기도 했다. 그나마 90년대 후반부터 이런 분들을 위해 부대원 명단 복원 및 신원 확인 작업 등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완전히 다 복원된 건 아니다.


2. 시초[편집]


광복 이후 남한에 주둔한 미 육군 제24군단은 예하에 크게 두 그룹의 정보기관을 거느렸다. 하나는 4개의 일반참모부(G-1, G-2, G-3, G-4) 중 정보 참모부로 알려진 G-2였고, 다른 하나는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로 일컫는 방첩대였다. 1945년 9월 9일에 제224 CIC파견대(the 224th CIC Detachment)가 최초로 남한에 들어왔으며, 소속 요원 대부분은 태평양전쟁 당시 레이테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224 CIC파견대는 전투분견대(combat unit detachment), 도시전부대(metropolitan unit), 지역대(area unit) 등 CIC 소속의 다양한 부대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들 각 파견대는 도쿄의 제441 CIC 파견대 통제를 받다가, 1946년 2월 13일 서울의 제224 CIC파견대가 남한 주둔 모든 CIC파견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뒤, 4월 1일 모든 CIC파견대가 971CIC파견대로 교체되고 나서야 본격 활동에 돌입한다.

1946년 미국 육군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대북공작을 담당했던 첩보부대인 442CIC를 창설하고, 이후 1948년 8월 미국 극동군사령부(GHQ) 정보참모부에서 442CIC를 기반으로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의사[2], 정의사 등 여러 반공단체를 망라하여 켈로(KLO)부대를 만드는데, 대북첩보를 위해 주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북출신이 중심이었다. KLO는 '코리아 리어전 오피스(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 흔히 '한국 연락 사무소', '한국 연락반', '주한 첩보 연락처' 등으로 번역된다. 당연히 이러한 명칭은 KLO의 첩보부대적 성격을 가리고 평범한 통신 사무소로 위장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케이엘오를 줄여서 흔히 켈로부대라 불린다. 1948년 12월 CIC는 공식 철수했으나 그 요원 상당수는 그대로 남아 켈로부대로 알려진 KLO와 미국 극동공군의 대북 첩보기관인 미국 공군 인간첩보부대(USAF HUMINT)로 역할이 옮겨진 것이다.


3. 활약상[편집]



파일:external/www.agkdced.org/1134698961_8e4dced3_Inchon_Palmido.jpg

인천 상륙작전 직전 팔미도 주변에서 활약한 KLO부대원을 비롯한 작전팀원들[3]
초창기의 켈로부대는 고트(Goat: 대장 최규봉), (Sun: 대장 전훈), 위스키(Whiskey: 대장 박태현) 등 3개의 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각 대별로 통상 2-3백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지역(초도·영종도·백령도·주문진 등)에는 파견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구성원들은 각 지대장이 직접 모집하였고 첩보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1951년 7월 26일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제8240부대를 창설하여 첩보부대 및 유격부대를 통합 운영하게 되는데, 베이스캠프는 용산 선린상고에, 본부는 종로 태화관에 설치했다. 부대명을 특수공작대로 바꾸고 전직 육군대령 계인주가 지휘를 맡고, 공작과장은 최규봉, 군수 및 보급과장은 전훈, 총무 및 인사과장은 박태현이 맡았다. 당시의 계인주는 대한민국 육군에서 파면된 상태라 육군대령이 아닌 그냥 민간인 신분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무이탈 혐의로 체포됐다가 미군헌병대에게 신병이 넘겨진 후 일본에 위치한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미군 정보부서에 대한 조력자로 활동했는데, 한국군 입장에선 군무이탈 후 장기 실종자로 취급되어 한국군으로부터 이미 불명예제대 조치를 당한 상태였다. 그 후 KLO부대를 통해 한국전쟁에 기여한 공로가 참작되어 나중에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사면/복직되었다. 그러나 1952년 6월에 발생한 미군 정보장교단 39명 몰살사건을 계기로 몇몇 파견대는 8240부대의 지휘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1953년 9월 전격 해체되었다. 그 후 이들 중 군에 계속 남기를 원한 인원들은 휴전 후에 미군 극동군사령부 소속에서 한국군 소속으로 이관된 8240부대에서 계속 복무하다가, 1954년에 8240부대가 해체되자 일부는 육군의 여러 부대들로 갔고, 또 다른 일부는 HID에 배속되기도 했다. 한국군으로 소속체계가 변경된 후로는 이들을 관리하는 상위부대인 국방부 직할 8250부대가 만들어져서 공식적으론 8250부대가 공식명칭이 됐으나, 이전 습관대로 8240부대라고도 계속 불렸다. 마치 HID에서 AIU로 공식명칭이 바뀐 뒤로도 여전히 HID라는 원래 이름을 더 많이 쓰는 것처럼. 그리고 육군 부대들로 간 켈로부대원들 중 일부가 재소집되어 1957년에 육군본부 특전감실이 주도한 육군 특수부대 창설준비 요원이 되었고 이듬해 일본 오키나와의 미 육군 특전부대(그린베레) 제1특전단에서 교육받고 온 뒤에 이들을 창설요원으로 하여 제1공수특전단(현재의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을 창설하게 된다.


파일:/file/201310/DNKF_11530_296729_1382938760_i.jpg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인천 용유도에서 찍은 켈로부대원 단체사진
휴전 이후 남측 지역으로 복귀하지 않고 북한 지역에 남아서 활동하던 KLO부대원들은 대부분 담당부대에서 통신망을 끊어버려 휴전협정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 정부 양국에서 버림받았다. 첩보부대에선 이런 일들을 용도폐기 되었다고 표현한다. 육군 첩보부대에 흡수된 상당수는 북에 남겨진 동료들을 구해오려는 비공식 활동을 휴전 이후에도 수 년간 계속했다. 휴전협정 체결 전 북한 해안가의 대부분의 섬을 차지하고 있었던 그들은 휴전과 더불어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었다며 한탄했다.

부대원 중 여성첩보원도 있었는데, 남녀 대원의 성비가 약 8대2 정도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주로 북한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적지에서 의심을 덜 받기 때문에 생존율도 남성대원들보다 높았다. 여성첩보원들은 남성대원과 함께 부부로 가장해 침투하기도 하였다. 켈로부대는 한국군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비밀로 붙여졌는데, 공산주의자나 북한군 측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자적으로 재판, 처형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는 소규모로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해산 때까진 보다 많은 인원이 첩보/게릴라 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2062200084_1.jpg

켈로부대 최규봉 대장을 비롯한 한미 연합작전팀원들[4]
6.25 전쟁 중에 활발한 활동으로 여러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전과가 인천상륙작전팔미도 등대 점령작전[5]이었다. 지휘관인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 정보장교 비롯 미군 장교들과 전직 한국 육군 장교 계인주, 전직 해군 장교 연정, 최규봉 등 KLO부대원들로 이루어진 합동 작전팀이 1950년 9월 14일 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천 앞 바다 팔미도등대를 점령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팔미도 등대 점등의 주체와 관련하여 첩보부대장 유진 F. 클라크 대위와 KLO부대원 최규백의 주장이 서로 달라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동안 이 켈로부대 출신들은 국가의 배려를 받지 못하다가 『참전군인등지원에관한법률』에 의해 1996년에 들어서야 2,410명의 켈로출신 전사자들이 대전 국립묘지에 봉안되었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생존자 230여 명의 군번없는 전사들이 군번과 참전용사증을 받게 되었다. 명단이 확인된 대원 중 전사·실종자 총수가 3,415명이고 생존대원 총 수는 3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켈로 출신 생존자들이 KLO·8240전우총연합회(대표 최규봉)라는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안 총연합회는 회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장학금 지원, 팔미도등대에 기념비 건립, 팔미도 점령 기념 행사 등의 활동을 해왔다.


4. 8240부대에 대한 보충 설명[편집]


한국전쟁 당시에 북파되어 활동하던 특수부대로는 KLO 직할 부대인 특수공작대, 선린상고의 공작대, 서울여상의 공작대가 있었고, 이 외에도 KLO 직할 부대는 아니었지만 귀순자로 구성된 공작팀이 따로 있었다. 소위 '동키부대'로 불리는 유격부대들이다. 동키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1.4후퇴 당시 서해상의 각 섬으로 피난온 반공 무장대원들을 조직해서 편성한 유격부대인 울프팩, 커크랜드 부대도 있었다.

이 부대들은 KLO 직할부대들과 함께 1951년 7월부터 미 극동군사령부 산하의 제8240부대(8240th Army Unit)으로 통합되어 운용되었고 이때부터 이들 부대들도 모두 KLO부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즉 1951년 6월까지는 미군의 주한 첩보연락처에서 운용하던 몇 개의 지대들을 켈로부대라고 일컬었으나, 1951년 7월에 KLO 직할부대들과 동키 등 유격부대들을 통합 지휘 운용하는 8240부대가 창설되자 이 부대들이 모두 8240부대 소속이 되었고 이 8240 소속 부대들이 모두 KLO부대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KLO(켈로)부대라는 명칭이 원래는 주한 첩보연락처 소속 부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 좁은 의미의 기존 KLO부대와 유격부대들이 1951년에 8240부대로 통합된 후로는 8240 예하 부대들(기존 KLO + 미국이 운용하던 한국인 유격부대들)을 모두 KLO부대라고 부르게 된 것이고 이런 이유로 현재 'KLO·8240부대' 이렇게 호칭하는 것이다.

부대원들은 대부분 38선 이북 출신들이었다. 보급은 미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각 섬에 파견된 미군 작전 고문관의 통제를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이 8240부대를 한국군으로 이관했는데, 1953년 8월 12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219호"로 창설된 국방부 8250부대사령부가 8240부대의 지휘, 인사, 행정, 포상 및 징계권을 이양받았다. 즉 이때부터는 대한민국 국방부 직할 8250사령부 소속의 8240부대가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때부터 공식적으론 8240부대라는 명칭은 없어졌고 8250사령부 예하의 8250부대가 정식 부대명칭이었으나, 실제로는 그 후로도 8240부대라는 익숙한 명칭을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휴전협정 체결로 이런 부대가 사실상 필요 없어졌다고 판단한 군 수뇌부는 1954년 2월 8240부대를 공식 해체하고 소속 대원들을 육군으로 일괄 편입시켰다. 8240부대원들은 육군 편입 이전보다 한 계급 아래 계급[6]으로 육군에 편입되었고, 18세 미만 30세 이상의 대원들은 제대할 수 있었다. 8240부대 지휘관 가운데 753명이 장교로 현지임관하고, 대원 약 12,000명이 하사관이나 병으로 신분 전환됐다고 한다. 당시 부대원들 중 일부는 미군에서 지원해 준 독일군복, 특히 슈츠슈타펠의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기도 했다.


파일:external/bemil.chosun.com/%C7%D1%B1%B9%20m44%20%C0%FC%C5%F5%BA%B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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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t 44 패턴의 무장친위대 전투복 상의를 착용한 KLO 부대원들. 심지어 친위대가 왼쪽 상완에 박는 독수리 오버로크까지 그대로 붙어있다.

이후 육군에선 정식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로 하고 육군본부 특전감실에서 그때까지 육군에 남아 있던 8240부대 출신 장교 20여 명과 8240부대 출신 하사관들을 창설요원으로 차출하여 제1전투단을 창설한다. 초대 지휘관 백문오 대령이었다. 제1전투단 창설요원들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국 육군 그린베레 제1특전단(그린베레) 교육대에서 공수교육과 특수전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58년 10월 1일 부대명을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한다. 이 부대가 이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이 된다. 결국 켈로부대원 중 일부가 남아 특전사핵심 창설요원이된 것이다.


5. 기타[편집]


이외에도 미국 국무성 산하의 SOU(Special Operation Unit)라는 첩보부대가 있었는데, SOU도 켈로와 유사한 임무를 띤 부대였지만 창설시기가 1952년 4월로 비교적 늦은 편이다. SOU는 대원들을 뽑아 사이판 미군기지에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의 증언 속에서도 미군이 지휘한 첩보부대로 잭, 닉, 월백, 동키부대, 위스키부대, 고트부대 등이 언급된다.

1966년에는 액션영화로도 각색되었다. 군번없는 용사들로 기록조차 제대로 남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서 연구가 어렵다고 한다. 그야말로 베일에 싸여 있는 부대.


파일:external/file.newdaily.co.kr/1253520239.jpg


파일:external/file.newdaily.co.kr/1253520313.jpg

이창건 KLO 기념사업회 회장
최규봉 KLO 고트 대장
당시 KLO부대의 간부급인 기획참모로 활동했던 이창건이 KLO의 한국전 비사라는 책을 출간했으니 참고. 평안북도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공대 출신의 엘리트였다. 켈로부대를 떠난 후엔 핵공학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창건의 KLO부대에 대한 자세한 증언 인터뷰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개인 블로그에 전설의 켈로부대 실록이라고 작성 된 글과 김광인의 블로그에도 상당한 자료가 있다. 이 사람은 연풍부대 부대장 김종벽 대위(소령 예편)과 이정숙 유격대원의 아들이다.

미 극동군사령부에 관한 문서로 극동사령부 한국관련 연구문서[7]에 켈로부대가 작성한 대북 비밀첩보 보고서들의 내용이 들어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 전쟁의 유격전사. 여기에서는 6.25 당시 유격부대와 첩보부대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총 693페이지.

전쟁 당시에 미군이 켈로부대에게 급한대로 2차대전 때 압수한 무장친위대 위장복을 지급했었다.[8] 이를 입수한 중공군과 북한군이 소련에 분석을 요청했는데, 소련은 독일군이 참전한 줄 알고 정식으로 항의를 했다 오해를 푼 사건이 있었다.

공작활동 중 중국영해에서 체포되어 중국감옥에서 14년을 복역 후 출소하였으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2008년 사망한 장근주씨의 사례가 있다. 장근주씨를 취재한 MBC PD수첩 2008년 6월 24일 방영분

2023년 6.25전쟁 제73주년 기념식에서 KLO 출신 이창건 전 한국원자력학회장이 한동훈 법무부장관에게 즉석에서 감사편지를 전달해 화제가 되었다. 이창건 전 회장은 "KLO가 (국가에서) 인정받은 건 이번(윤석열 정부)이 처음"[9]이라고 소개하며, 이어 "2월엔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고 6월 14일엔 청와대[10] 오찬에 초청받았다"며 "북한에 침투했다가 휴전 때문에 못 돌아온 동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편지에 썼다. #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켈로부대'로 등장한다. 시라소니(야인시대)는 대장으로서 이들을 위해, 이정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설태호가 이 부대 출신이었다.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29 01:48:06에 나무위키 KLO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월남전 당시 미군 특수부대가 현지 원주민을 고용해 편성한 블랙옵스 특수부대 CIDG와 유사하다.[2] 백의사와 KLO의 활동을 통해서 본 남한 대북정보활동의 원류(1945-1953),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3] 미 해군 대위 유진 F. 클라크(맨 오른쪽), 대한민국 육군 대령 계인주(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대한민국 해군 소령 연정(가운데, 허리에 권총)[4] 인천상륙작전 직전 팔미도에 침투해 등대의 불을 밝혀 작전 성공 후 기함 마운트 매킨리로 복귀하고 있다. 모자를 쓰고 일어서서 옆을 보고 있는 이가 최규봉 대장, 오른쪽에 뒤돌아보는 이가 계인주 대령.[5] 관련 자료 - 해군지 2012년 09월호 12페이지[6] 대대장은 대위, 중대장은 소위로 계급을 부여받는 식.[7] 2002. 11. 15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 김영호[8] 몇몇은 견장에 SS 상징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9] 실제론 21년 4월에 비정규군 보상법이 공표됐다.[10]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로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했는데 헷갈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