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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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1992 Los Angeles Riots (LA Riots)


파일:lariot.jpg

발생일
1992년 4월 29일 ~ 5월 4일
발생 위치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유형
폭동
원인
로드니 킹 사건,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
인명피해
사망
58명
부상
2,383명
체포
13,779명
재산 피해
약 10억 달러(1조 원)

1. 개요
2. 전개
3. 원인
4. 영향
5. 한인 사회와 LA 폭동
5.1. 한인 사회의 피해
5.2.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갈등
5.3. 한인 사회의 대응
5.4. 당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의 행동
5.5. 한인 사회의 변화
6. 기타
7. 유사 사례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폭동 당시 EBS[1] (현 EAS) 경보방송이다.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 비단 흑인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계 미국인까지도 가세했으며,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4.29 시민 봉기(4.29 Civil Uprising)라는 명칭도 유명하며, 이 폭동의 기폭제였던 '로드니 킹'의 이름을 따 King Riot이라고도 불린다.

2. 전개[편집]


폭동의 발단은 '로드니 킹 사건(Beating of Rodney King)'에서 시작된다.

1991년 3월 3일 이른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 210번 고속도로에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과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 등 경찰관들이 서쪽 방향으로 과속을 하던 차량 1대(현대 엑셀 5도어 해치백)를 추격전 끝에 멈춰 세운 뒤, 운전자를 현장에서 붙잡았다.

운전자인 흑인 남성인 로드니 킹(1965~2012. 사건 당시 27세)은 음주 상태로 과속 주행을 하고 있었고, 번쩍이는 경광등과 사이렌의 소리를 감지하고도 차량을 세우지 못했다. 킹은 술에 취한 탓인지 차에서 내리라는 경찰의 명령에 더디게 응했고, 경찰의 명령대로 땅에 엎드려 있지 못했다. 오히려 킹은 다른 경관들에게 저항했으며, 경찰의 체포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조사되지 않은 중범죄 용의자인 킹은 경찰관을 향해 달려갔다. 킹은 도망칠 계획이었다. 이때부터 경관들이 톤파를 사용해 킹을 구타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킹은 체포에 저항했으며, 경찰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지 않고, 몸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은 경찰관들이 초기에 로드니 킹을 위험하다고 인식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영상 또한 마리화나도 흡입한 상태였다 신문

폭동 1년 후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대부분의 구타는 적법하였고, 로드니 킹의 저항을 제압하려는 시도에 있었으며, 이는 경찰 정책에서 허용하는 수준의 무력 사용이었다고 판단했다. 위법성이 인정된 것은 마지막 6번의 폭행만 인정했다. 실제로 로드니 킹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누워서 저항을 했다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 총경(Daryl Gates, 1926~2010)은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플만 하고 있었다. 결국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기소되었고,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2]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법원이 배심원에서 흑인을 한명도 배치하지 않고 백인 배심원들만 참여하게 하면서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 결정.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이름은 스테이시 쿤, 로런스 파월, 티머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뇨, 롤란도 솔라노[3]이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계 미국인, 1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4]

무죄 평결 소식은 TV와 라디오로 즉각 발표됐다. 당시 흑인계 톰 브래들리 LA시장은 믿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했다.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지나가는 차량을 세우고 운전자를 끌어내려 구타하는 등의 장면이 생중계로 보도되었다. #[5]

그리고 방화와 약탈이 TV로 방송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 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워서 초동 진압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SWAT의 창설자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던 게이츠 총경은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 1992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게이츠 총경은 경찰 관련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폭동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 갱단들까지 무장하고 합세하여 경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과 다수의 험비, 트럭, 연방 육군 제7보병사단 2,000명 및 제40보병사단 헌병중대, 제1해병사단 병력 1,500명, 제1경기갑정찰대대LAV-25 장갑차 투입 명령을 내렸으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아예 제82공수사단 공수부대 대대를 18시간 안에 배치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된 건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다.[6][7] 여하튼 총합 13,500명에 달하는 사단급 군대가 투입되면서 경찰과 함께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해 5월 4일에 폭동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8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었다.


3. 원인[편집]


미국 경찰에게 구타 당하는 로드니 킹(성인 인증 필요)

어쨌거나, 로드니 킹이 폭행하는 장면만 촬영되지 않은 저 장면은 TV 생중계되었고, 미국 흑인을 포함해서 인종을 불문하고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거기다 당시 LA의 게토에는, 금주법에 버금가는 실책인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 요구를 폭동과 약탈, 방화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그 전에도 LAPD 즉 LA 경찰국은 흑인의 불신을 샀는데 당시 LA 경찰국장이었던 데릴 게이츠가 문제였다. 이 양반은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유명했다.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장갑차에 충각을 달아 가정의 벽을 부수고, 특수요원처럼 무장시킨 경찰을 투입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8], 이 무자비한 진압 방식으로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니 로드니 킹 사건의 경찰관이 무죄를 선고받자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후, 위에도 적혀 있지만 1992년 6월 28일에 LA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후 원인 제공자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는데, 그 결과 2명에게는 징역 30개월 유죄가 선고되고,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다.


4. 영향[편집]


이 사건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제정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지만, 이는 법적으로만 철폐된 것이었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인식은 당연히 바꾸지 못했다.[9]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되었는데,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로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그 당시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는 흑인을 말하는 '니그로'란 단어 자체도 차별적 요소가 없었으나, 이 단어와 슬랭에 해당하는 '니거'란 단어가 비하적으로 쓰이자 흑인들이 이 단어로 지칭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유색인종(colored)"이란 단어로 바뀌었고, 이 단어에도 거부감을 일으키자 결국 "블랙"으로 바뀐 것이다.[10] 따라서 현 시점에서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니거'를 쓰는 건 거의 정신나간 행위로 취급받고,[11][12] 니그로나 유색인종이란 단어는 흑인들 본인도 쓰지 않으나, "블랙"이란 단어는 많이들 쓴다. 흑인들이 본인들을 지칭할 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시피하고, 거의 블랙이라고 하며, 타인종이 하는 경우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편이다. 정확히는 "난 블랙이지만 니들이 날 블랙이라고 부르면 차별하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약간 불안해" 정도 인식이다.

결국 199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13]

LAPD는 데릴 게이츠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 않던 비백인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수사에 인권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고,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오던 강압수사 및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Grand Theft Auto: San Andreas>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이고, 스토리도 흑인 갱스터부패한 경찰관이 적대하는 이야기다.[14]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 거기다 최후반부에 나오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주다.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블랙팬서>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배경이 1992년이며, 흑인들이 무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5. 한인 사회와 LA 폭동[편집]



5.1. 한인 사회의 피해[편집]


LA 폭동 당시 연방 법 집행 노력을 지휘했던 FBI 관계자에 따르면 약탈자들은 한인 상인들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코리아 타임스의 기사 'Cry Koreatown'[15]

# #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게토로 알려져 있는 컴턴[16]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즉 이 동네 거주 흑인들이 뭔일 있어서 자기 동네 밖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한국계 미국인들 사는 동네이다.

당시 경찰의 대처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폭동을 막기 위해 백인 거주 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았지만 한인 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 것이었다. 계기가 흑백갈등이라 백인이 1차적인 목표가 된다 해도 시위가 폭동으로 변한 뒤에는 초기의 목적성이 대부분 사라지기 마련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흑인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한인들의 거주지가 흑인 거주지와 바로 접해 있어 주변으로 확산되면 피해가 생길 것임이 분명한 폭동에 대해,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폭동지역과 거리가 있어 대응할 시간이 충분한 특정구역을 보호하려는 식으로 대처한 것이다.

게다가 주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 때 차단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심각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약 4억 달러어치 손해[17], 점포 2,300여 곳 손실 등.[18] 피해를 당한 한인들의 대부분은 지방정부나 연방정부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 한인 상점 중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긴 했지만 극소수인 만큼 굉장히 드물었다.[19]

자경단 활동 덕인지 폭도들에게 살해된 한인은 없었다. 유일한 한인 희생자는 청년단 소속이었던 19세의 이재성으로 한인 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였다. 서로를 폭도로 착각해서 벌어졌고,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기사 참고

5.2.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갈등[편집]


한인 사회가 LA 폭동에서 큰 피해를 당한 건 흑인들과 한인들의 갈등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래퍼 아이스 큐브의 <Black Korea>란 곡이다.[20]# 한인 업체들 또한 흑인 손님들을 차별했었는데 이는 LA에서 갱단과 범죄율이 높아지자 더 심해져갔다. 결국 한인 업체들은 아예 흑인들을 고용하지 않는 수준까지 이어졌다. 범죄와 아무 상관 없는 흑인들에게까지 차별하고 무례하게 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었고[21] 이와 다르게 실제로는 흑인 차별을 하지 않는 한인들과 한인들을 차별하지 않는 흑인들도 많았다. 미국은 한•흑 갈등을 정치적 요소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차별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도를 한 것이다. 또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해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22]

이 사건은 아시아계, 특히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흑인에 대한 거센 반감과 분노를 야기하며, 한국계 이민자들과 흑인과의 갈등이 이후로도 불거지게 한 사건이다. 또한 모든 일의 근원인 로드니 킹 본인이 강도질을 벌인 대상이 다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인들 중에선 로드니 킹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다.

폭동 이후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이후 자성과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고, 이후 흑인 사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계 이주자들에 대해 사과했다. 흑인지도자 LA폭동 사과 LA 폭동 8년 만에 흑인사회 한인들에게 공식 사과

물론 지금도 한인과 흑인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후로 이어지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흑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일으키고 있다. LA 폭동의 여파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셈.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서 흑인 사회와 대화와 교류를 하며 이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한 협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흑인 사회에서도 반성과 함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한인 사회와 교류를 하며 이 사건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LA시 당국에서 이 사건으로 아주 처참하게 데였고, 미국 내 비판자들로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인 만큼 LA시 차원에서 한인 사회, 흑인 사회의 협력을 지원하며,[23] 한인 사회에 대해서도 행정적 편의 등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코리아타운 정중앙에 미국 최대 규모이자 최대의 자금으로 설립된 공립학교가 그 예).

5.3. 한인 사회의 대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루프 코리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rhymeswithhistory.files.wordpress.com/roofkoreans.jpg

당시 한인 가게 주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했으며, 총기와 탄약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폭도들과 공성전을 벌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폭도들 역시 시가전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없어서 저항이 거세 자신들이 되려 죽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


5.4. 당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의 행동[편집]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은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혼란을 틈타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이 들이닥치기 전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고 잽싸게 도망쳤다. 애초에 조폭 같은 사회 암적인 존재에게 정의로운 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지만, 보호한다고 해놓고 보호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구실조차도 내던져버린 셈이었다. 이는 당시 히스패닉 갱단과 중국계 삼합회가 어찌됐건 자신들의 물주들을 지키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때문에 당시에 차이나타운과 히스패닉 주거지는 털리지 않았다.

사실 이 당시 한인타운에서 삥 뜯던 조폭들은 한국에서 기반을 잃거나 쫓겨온 이들이 대부분으로, 특히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늘어났다. 게다가 민족 정서상 같은 한국인이라도 범죄자들은 따돌림당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겉돎으로써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기도 했다.

하여간 이 때문에 한인들은 조폭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경단을 구축해 대응했던 깡까지 더해져 사태 진정 이후, 뻔뻔스레 다시 나와서는 돈 내놓으라는 조폭들에게 돈만 갈취하던 놈들이 뭐하러 오냐, 한 번만 더 그러면 쏴죽이겠다며 분노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이 생겨 오히려 조폭들이 힘도 못 쓰고 부리나케 쫒겨난 사례도 부지기수로 생겼다. 그나마 한인 조폭들이 명분이 없어져서 이 사건 이후론 코리아 타운에서 쪽을 못 쓰게 됐다는 게 이 폭동의 몇 안 되는 긍정적 효과라 할 수 있겠다.

5.5. 한인 사회의 변화[편집]


이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 국적(시민권)을 취득 후 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얻어 공동체의 규범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생활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 이민자들이었으며, 영주권을 취득하는데서 멈추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24] 당시까지만 해도 한인사회는 개개인의 성공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나,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한 집단적인 노력에는 관심이 적었고, 이 때문에 소수 인종이지만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해 집단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던 흑인들에 비해 자신들의 권리를 더욱 주장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다.[25]

특히 이러한 한인 공동체의 특징은 흑인 공동체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수십 년간 흑인 공동체 집단이 민권운동을 통한 권리상승에 노력을 할 때마다 많은 백인들은 한인들을 이른바 사회에 잘 적응한 모범적 소수 집단으로 치켜세워주면서 흑인 공동체 집단의 민권운동을 폄하해왔고, 이 때문에 흑인 커뮤니티의 입장에서는 한인 커뮤니티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들의 이러한 소극적인 경향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인 공동체의 소극적인 정치활동은 흑•백 양 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고,[26] 이렇듯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자립에만 허덕였던 수많은 한인 교포세대를 지나,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 한인 2세대들을 중심으로 미국 시민권 취득과 정치활동의 참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한인들은 지역 정가에 많은 정치 기부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 지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인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증가하는 결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인들이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주류 백인사회는 다른 소수인종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할 때마다 한인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했고, LA폭동은 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류 백인사회에 의해 방패막이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터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인사회는 이 때를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다른 소수인종집단과의 인적 교류를 시작한다. 이는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는 데 바빠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식 문화를 학습하고, 다른 소수인종과 교류를 많이한 2, 3세대로 바뀌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 시점 이후 들어온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기존의 이민자들과 달리 전문직들이 많았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아 한인 공동체의 정치참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 2020년에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27] 직후에는 많은 동양인 커뮤니티가 직접 Black Lives Matter와 같은 소수인종 문제와 관련된 사회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해 인종간 갈등을 완화시키는 한편,[28] 일부 폭동으로 번져 혼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LA 총영사관과 한인회가 나서서 LA 한인타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 투입이 결정되었음을 알림으로써 주 방위군은 윌셔 대로의 코리아타운 주요 길목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방지했다.

6. 기타[편집]


  • 폭동 이후 교민 사회를 돕기 위해서 미국 자체에서 200만 달러, 한국에서 400만 달러가 모금되었다. 미국에서 모금된 돈은 미국 안에서 모아진 것이라서 즉시 분배되었지만 한국에서 모금된 돈은 언론사, 교회, 시민단체 등이 중구난방으로 보내온 돈이고 또 외국에서 온 돈이라서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자제해달란 요청을 해온 까닭에 LA총영사관에서 성금관리위원회를 조직해서 피해를 입은 교민들을 상대로 피해액을 조사해서 분배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하지만 총영사관에서 돈을 횡령하려 한다는 괴소문이 돌더니 흥분한 교민들이 영사관을 포위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총영사를 죽이겠다고 갖은 협박을 하며 농성을 하더니 급기야 돈을 즉시 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자살협박 시위까지 하는 통에 총영사관에서 돈을 성금관리위원회에 이관했지만, 이번엔 교민들이 성금관리위원회를 협박해서 돈을 모조리 뺏았고 돈은 제대로 나눠준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피해자협의회는 피해자들에게 2천 달러씩 공평하게 나눠줬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돈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다시 총영사관에 와서 돈을 달라고 시위를 하는 등 제대로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LA총영사를 지냈던 박종상은 짜증스러웠는지 "피해자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회고록에서 싸늘하게 촌평했다.


  • 방송인 썬킴이 당시 현장에서 이 사건을 몸소 겪었으며 당시 유언장까지 써뒀었다고 한다.

  • 1993년 해당 경찰 4명은 연방민권법 위반 혐의로 다시 기소됐다. 배심원 제도를 이용하여 재판했는데, 흑인 배심원을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아시아계 1명과 히스패닉 1명을 빼면 죄다 백인 배심원들이 판단을 하게 하였다. 가운데 2명은 징역 30개월을 선고, 나머지 2명은 무죄. 유죄 2명은 제압이 끝난 후 추가적으로 폭행한 것으로 보아 유죄로 판결했다.

  • 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또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고, 또 한인 상가가 불타고 약탈당했다. 정치계 진출이건 인종교류건 결국 아무런 영향도 없이, 다시금 흑인 동네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미국/인종차별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결국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이 다시금 그들의 분노를 자기들보다 더 약한 소수인종들에게 표출한 것이다. 다만 통계적으로 보면 아시아인 대상 인종차별 범죄의 70%가량은 백인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기사 하지만 실질적으로 뉴스로 나오는 건 흑인의 아시아인 대상의 인종차별범죄가 다수이고, 이러한 뉴스 전략들이 결과적으로 흑인과 아시아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 결과 흑인들에 대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경찰들의 강경진압에 대한 정당성만 강화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흑인 사회 내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폭동 시 공권력이 폭동과 약탈에 대처 못하는 추태를 보이고 한인들이 자체 무장하여 자신들을 지키는 모습으로 총기소지에 대한 옹호론이 강화되었고 한인 등 백인과 흑인에 비해 소수인 아시아계와 동유럽, 아프리카 이민자의 총기소유 비율이 높아져 이제는 총기규제 시 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 폭동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했던 곳도 있었는데, 당시 42세였던 홍정복 씨가 운영하던 밴네스 마켓이 대표적이다. 평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에게 무료로 생필품을 준다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알콜중독자인 남편이 정부에서 받은 생활비로 술을 사려고 하자 아내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막거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좀도둑을 향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면서 걱정해주는 등의 선행으로 지역 사회에서는 MAMA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 폭동 당시 흑인 주민과 갱단이 자진해서 주변을 호위했을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7년 후인 1999년 2월 3일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했고,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이 교회 장례식에 대거 모여 눈물로 추모했다.#[29] 이후 흑인 갱단이 홍정복 씨를 죽인 범인을 잡아서 죽여버린다는 경고 쪽지까지 붙였고,[30] 실제로 이 히스패닉 범인 중 한 명은 경찰에 잡혔으며, 다른 한 명은 실종되었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흑인들에게 끝없는 선행을 베푼 한인조차도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할 만큼 당시 LA 및 미국은 인종에 따른 범죄가 만연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 코리아타운과 다저 스타디움이 인접해있었기 때문에, 폭동 기간 동안 잡혀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홈 3연전 중 2경기(첫 경기는 폭동 당일인 4월 29일 열렸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홈 3연전 시리즈가 전부 연기되었다. 문제는 두 팀 연고의 거리는 거의 미국 동서 끝자락이라서 다음에 언제 올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되는지라, 다음 잡혀있는 필리스와 엑스포스의 LA 원정 때 잔여일정을 어떻게든 전부 다 끝내야 했다. 그래서, 두 팀이 다시 LA를 찾은 7월 2일부터 5일까지 필리스와는 4일동안 5연전(7월 3일 더블헤더), 그 다음 엑스포스는 3일 연속 더블헤더라는 엽기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1992년의 다저스는 리그 최하위 팀이었기 때문에 지구 우승 경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점이 다행일 정도. 다저스의 1992년 스케줄.

  • 대표적인 흑인 갱단이며 서로 라이벌인 블러즈크립스가 시위 참가와 주민보호 목적으로 잠시 연합했다고 한다.

  • 직/간접적으로 LA 폭동을 언급하는 영화는 현재 두 편으로, 첫 번째로 <다이 하드 3>에서 이 사건이 잠깐 언급된다. 존 맥클레인과 어거지로 파트너가 된 제우스 카버가 "자네 LA에서 무슨 일 있었나? 혹시 자네 유명인물이야? 설마 로드니 킹 사건은 아니겠지?"라고 묻자 존 맥클레인이 "내가 이 사건의 범인의 동생을 옛날에 빌딩 32층에서 던져버린 일이 있었어."라고 대답한다. 두 번째는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으로, 주인공인 N.W.A 및 그들의 음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언급되었으며, 최초로 LA 폭동 씬을 직접 촬영하고 상영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또한 현재 LA 폭동 씬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 한국에서는 MBC의 특집극 드라마 <억새바람>[31]에서 LA 폭동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 드라마가 나온 해는 1992년으로, LA 폭동이 발생한 바로 그 해다. <억새바람>은 한인 이민자 1.5세대를 다룬 최초의 한국 드라마[32]인데다 LA 폭동이 한인 사회에 남긴 상처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내용상으로 LA 폭동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관련 칼럼

  • 폭동을 키운 주범으로 지목되어 그간 몸담아 온 경찰계에서 완전히 쫓겨난 게이츠 총경은, 이후 자신의 특기를 살려(?) 게임 회사에 들어가 게임 디자이너로 활동해, 폴리스 퀘스트 시리즈 중 4편, SWAT 4 제작에 참여했다. 게이츠는 이후에 자서전에서 경찰국장 자리에서 질려서 자의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이후, 2008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스트리트 킹>에서 경찰서장 역으로 잠깐 나왔으며 이로부터 2년 뒤인 2010년 4월 16일, 만 83살로 병사했다.

  • 경찰에게 구타당해 폭동의 도화선이 된 킹은 사건 이후에 LA시로부터 보상금을 받아 사업을 했으나 실패했고,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33] 2012년에 LA 근교인 리알토 시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34] #

  • 2017년 4월 28일, 연합뉴스에 한인 2세들이 말하는 LA 폭동의 기억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 2021년 9월에 비디오카메라로 로드니 킹 사건을 촬영해 고발했던 조지 홀리데이가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숨졌다.#

  • 2022년 2월 한국계 미국인 배우 존 조가 LA 폭동을 주제로 한 청소년용 소설 '트러블메이커'를 출판했다. 소설은 주인공인 한국계 12살 중학생 조던 박의 시각에서 LA 폭동이 한인 사회에 미친 영향과 의미, 인종 갈등의 문제 등을 풀어냈다. #

  • 2022년 2월 3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LA 폭동에 대한 내용이 방영되었다. 당시 폭동의 피해를 입은 한인타운의 상인들 중 일부가 인터뷰에 참여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LA 사태를 폭동이 아닌 4.29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유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눈다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다고 밝혀졌다. 다만 한인타운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원인인 두순자 사건은 영상에서 다루지 않았다. 공홈 다시보기 영상

  • 2022년 4월을 맞아 폭동 발생 30주년인 29일 한인·흑인 단체가 LA 코리아타운에서 화합의 행사를 개최했다. #

7. 유사 사례[편집]


  • 대공황 약탈 폭동 (1929~1932)

  • 뉴욕 할렘 폭동 (1935)

  • LA 폭동 (1965)

  • 와츠 폭동 (1965)

  • 뉴어크 폭동 (1967)

  • 디트로이트 폭동 (1967)

  • 마틴 루터 킹 암살 관련 폭동 (1968): 미국 흑인들에겐 영웅 중 영웅이나 다름 없는 마틴 루터 킹이 갑자기 암살 당했으니, 미국 흑인들은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35]

  • 마이애미 폭동 (1980): 특히 해당 사건의 발단이 된 '아서 맥더피 폭행치사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과 진행양상이 대다수 비슷했다.

  • 신시내티 폭동 (2001)

  • 오클랜드 폭동 (2009)


  •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2020): 일부 지역에서 폭동도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평화적인 시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폭동들에 대해서도 흑인들에 의한 인종 폭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백인들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도 약탈에 많이 참여했다. 위의 퍼거슨 소요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36]


8. 관련 문서[편집]




9.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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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송에서 송출되는 밖의 상황을 보면 평소에 테스트 이외 방송이 거의 별로 안 됐던 EBS가 실제로 방송된 이유를 알 수 있다.[2] 로드니 킹 사건에서 주범인 4명의 경찰들에 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LA 폭동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3] 5명 중 이 사람만 킹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 현역이다.[4] 검사가 흑인이긴 하지만, 배심원에 히스패닉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은 배정해 놓고 그보다 수가 많았던 미국 흑인을 한 명도 배정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다.[5] LA 폭동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인 트럭기사 레지날드 데니의 폭행 장면이다. 흑인 4명이 차를 세우고 기사를 끌어내려 소화기와 벽돌 등으로 마구 구타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 방송국 헬기로 생중계되었다. 방송을 본 몇몇 사람들이 도우러 온 덕분에 레지날드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되었다.[6] 이 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 사건의 여파가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비하는 분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7] 서술된 것처럼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에도 미국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긴 했는데, 마틴 루터 킹은 미국 흑인들 모두에게 있어서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큰 충격과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8] 영화 <Straight Outta Compton>에서 제대로 묘사된다. 재임 당시 LA 반문화랑 사이가 안 좋아서 LA 하드코어 펑크 씬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서구 문명의 몰락> 상영도 막으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9] 그 당시의 미국 연방 민권법으로 미국 흑인에 대한 린치, 고문, 살인 등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일상적인 차별은 막을 수 없었다. 일상적인 차별을 본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폭동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의 인식 전환에 대한 윤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10] 사람 피부는 누구나 색이 있고 비교적 어둡거나 밝을 뿐인데 "유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한 차별적 단어라는 주장이다.[11] 국내에서는 흑인 갱스터들에게 다른 인종이 니거라고 한다면 거의 총을 맞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다.[12] 물론 이 미국 흑인들도 "니가(nigga)"라는, 흑인식으로 바뀐 슬랭을 쓰지,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내포한 "니거(nigger)"는 거의 쓰지 않는다. 게다가 저 "nigga"라는 슬랭을 쓰지 않는 흑인들도 아주 많다. 흑인들이 무조건 N-word를 쓴다는 것 역시 인종차별적인 편견이다. 힙합에서 nigga라는 단어가 워낙 많이 나오기에 착각할 수 있겠지만 힙합을 하는 이들 중 많은 수가 갱단 출신이거나 험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런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이다. 물론 칸예 웨스트 등 유복하게 자란 흑인이라고 N-word를 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13] 1980년대에는, 이 인종차별이 음지에서 진행되어서 잘 안 알려진 것뿐이지, 1940년부터 1980년까지 빠르게 떨어지던 흑인 빈곤율이 1980년부터 지금까지는 상당 부분 정체된 이유는 레이건 시대의 마약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흑인 빈곤층이나 히스패닉 빈곤층을 마구 잡아들였는데, 이로 인해 이 정책 이전과 비교하여, 감옥 재소자 수가 5~6배 정도나 늘게 되았다. 이 정책 전에는 감옥 재소자 수가 수십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는데 이 정책 이후 재소자가 폭증한 것이다. 1980년대 흑인 빈곤층의 갱 활동 증가와, 갱스터 랩의 확산, 흑인 게토의 파탄 역시 이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 나중에 공화당에서도 이 마약과의 전쟁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시인하였으나, 이미 파탄난 흑인과 히스패닉 빈곤층 사회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14] 덧붙여 <산 안드레아스> 미션의 최종적인 악당인 텐페니 경관은 백인으로 설정하면 인종차별을 조장할 것 같아 흑인으로 교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가 있다.[15] 기사 작성자 Richard Reyes Fruto.[16] Compton.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의 Compton이 바로 이 지역이다.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나오며 흑인 갱단의 근거지로 많이 묘사되기도 한다. Grand Theft Auto: San Andreas의 주인공 CJ가 사는 동네 갠튼(Ganton)은 이 곳의 패러디다.[17] 그 당시 일어난 모든 피해액이 약 7억 달러. 즉 한인 사회가 전체 피해의 절반 이상을 받은 것이다.[18] 이는 폭동으로 인한 모든 피해의 45퍼센트를 차지한다.[19] 그중에서는 평소 흑인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서 흑인들이 직접 지켜준 곳도 있다. 자세한 것은 후술.[20] 이 곡을 디스한 'Call me a tiger'라는 곡이 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타이거JK의 커리어가 시작됐다.[21] 사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남부 주들을 제외하고는, 항상 "대다수"는 문제가 없었다. 허나 서술한 미국 남부 주들에선 거의 대부분의 백인 주민, 즉 대부분의 주민들이 흑인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인종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대변하는 것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 흑인에 대한 수많은 린치가 매일같이 일어났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렇게 인간 취급도 못 받던 흑인들이 결국 흑인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다.[22] 물론 그 지역 거주 흑인들이 이 두 사건 이전부터 한국계 미국인 1세대들과 갈등을 빚고는 있었지만, 라타샤 할린스 살해 사건의 집중 보도로 인해 폭발한 것이 맞다.[23] LA에서, 한인 지역 사회 리더와 흑인 지역 사회 리더가 만나서 대화하고 친목을 다지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24] 이는 한국이 2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아무리 이민자라도 본래 국적을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경우, 한국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교민들의 자손들은 2010년대 이후 한국 내에서 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적은 후 병역을 이행하면 복수국적 유지가 가능해지긴 했다. 참고로 이렇게 병역을 이행하는 경우 정기휴가 때 미국을 다녀오는 것을 허가해준다. 항공권도 지원해주며 휴가기간도 최소 5일 이상은 늘려준다. 물론 휴가가기 전에 서류를 복잡하게 써야 된다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25] 이러한 특징은 한인공동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인들을 포함한 아시아인 공동체 전반에서 나타나던 경향이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정착이 오래된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그래도 오랜 정착기간으로 인해 나름의 권리를 주창할 기반이 있었지만, 한인들은 그런 기반이 더욱 부족했다.[26] 경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권 없고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이민자 집단보다 일단 시민권이라도 있는 미국 시민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27] 참고로 가해 경찰 중에는 같은 아시아계 경찰도 포함되어 있었다.[28] 실제로 BLM 운동 당시 많은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이전의 인권운동들에 비해 훨씬 많은 참여율을 보였다. 한인을 비롯한 동북아 인종 커뮤니티는 상대적으로 경찰에 의한 폭력을 덜 경험했지만, 동남아권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경찰에 의한 폭력과 차별을 많이 경험했었기에 특히 이들의 동참이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났다.[29] 그녀의 장례식에서 한 흑인 소년은 그녀는 우리를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 대해주었다.라면서 절규했다.[30] '마마, 우리가 범인을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할게요.'라는 내용이었다.[31] 1991년에 김유미 작가가 지은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32] 단, 시트콤까지 포함하면 1990년말 갓 개국했던 SBS의 이 더 먼저다.[33] 기사[34] 킹의 약혼녀였던 신시아 켈리의 증언에 따르면, 숨지기 전날에 대마를 피우고 과음을 한 뒤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LA 경찰이 조사를 했고 사고사로 판정되었다.[35] 이 주제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때는 연방 민권법이 제정된지 단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미국 흑인들은 "Black Pride Movement"라는 새로운 사회 운동으로 넘어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제 막 민권 운동의 결실이 나오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끈 리더 중 하나인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미국 흑인들을 분노케 할 수 밖에 없었다.[36] 게다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폭동을 선동한 자가 백인인 것으로 밝혀졌다.[37]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유튜브에 무료 공개한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이다. 2017년 에미상 수상작으로 별다른 해설없이 오직 당시의 생생한 기록 영상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영문 자막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