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트윈스/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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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역대 시즌
(MBC 청룡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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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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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1989
1990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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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LG 트윈스 1990 시즌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페넌트레이스 성적
순위



승률
1
71
0
49
0.592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1.2. 선수이동
1.3. 신인선수
1.4. 기타
2. 정규시즌
2.1. 시즌 전 전망
2.2. 전반기
2.3. 후반기
2.4. 상대 전적
2.5. 수상 및 기록
2.6. 선수별 개인기록
3. 포스트시즌
4. 총평


1. 스토브리그[편집]



1.1. 코칭스태프 이동[편집]


1989 시즌이 끝나고 정삼흠의 항명사건 등으로 인해 구단 눈밖에 난 배성서 감독을 해임하고, 원년감독이었던 백인천 전 감독이 다시 LG 감독으로 복귀했다. 계약기간은 2년에 연봉 5천만원.

그리고 우용득 타격코치가 다시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갔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계약이 만료된 유백만 전 감독도 삼성의 수석코치로 가게 되었다. # 2군 감독이었던 류영수도 삼성의 투수코치 계약을 맺으며 떠났다. #

해태와 롯데 코치직을 맡았던 조창수가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투수코치로는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 하기룡이 연봉 2,000만원으로 새로 부임했다. #

김인식 빼고 모든 코칭스태프가 싹 교체되었다. # 김재박은 플레잉코치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선수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김윤겸, 김충, 우용득, 이충순, 한동화, 유영수 대신 김봉기, 김용달, 정순명, 조창수, 최정기, 하기룡이 새로운 코칭스태프가 되었다.

5월 9일 2군 감독으로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 감독 박현식이 선임되었다.

1.2. 선수이동[편집]



태평양 돌핀스에서 방출된 외야수 양승관을 영입했다.

1월 22일 OB 베어스최일언김상호 간의 트레이드가 있었다. # OB는 우타거포 보강을 꾀했고, LG 측은 지난 시즌 초토화된거나 다름없었던 투수력 강화를 원했다. 이 트레이드는 89년 말부터 추진되었으나 구단 매각문제와 김상호의 미국 이민설 등으로 미루어졌었다. 88년에 데뷔한 김상호는 89년 팀 내 최다 홈런 타자에(12개) 2년 간 홈런 20개에 타점 99점을 기록한 중장거리 타자였으나 실책을 37개나 저지르며 수비가 불안했던 것이 트레이드의 빌미가 되었다.

1월 25일 이재홍이 쌍방울로 현금을 받고 이적했다. 30일에는 오영일이 이적료 2,300만원에 태평양으로 이적했고, 이길환김신부 간의 트레이드가 있었다. # 2월 5일에는 해태의 차동철과 장호익이 3,000만원, 2,200만원의 현금트레이드로 LG로 이적했다. #

1.3. 신인선수[편집]



1차지명: 김동수(서울고 - 한양대 포수), 이병훈(선린상고 - 고려대, 외야수)

거물 포수 김동수는 OB와 MBC의 지명을 동시에 받게 된다. 그러나 MBC는 OB와의 동전 던지기에서 또 승리했다.(...) 1차 1순위에서 김동수를 뽑은 MBC는 1차 4순위에서 외야수 이병훈을 지명하며 쏠쏠한 드래프트 성과를 얻었다.

2차지명: 최우석 (신일고-중앙대,투수), 구동환(충암고-상무, 외야수), 김선진(광주일고-연세대, 내야수), 김성재(대구상고-영남대, 내야수), 박승암(서울고-인하대, 투수), 오정민(신일고-성균관대, 투수), 김명환(동산고-경희대, 투수), 김종철(군산상고, 투수), 김성일(서울고-한양대, 외야수), 박종욱(광주일고-동국대, 외야수)

4순위 김성재는 전년도 드래프트에서 빙그레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하지 않고 다시 지명받은 선수이다.


1.4. 기타[편집]


MBC는 구단을 매각하려는 계획[1] 아래 대우, 현대, 일화, 한일합섬 등 여러 기업들과 접촉하다가 KBO 쪽에 인수의사를 비친 럭키금성과 협상을 벌이다가 1989년 12월 14일 양쪽의 세부이견조정이 끝나는 대로 럭키금성 측에 구단을 매각하기로 합의했다. 매매가격을 100억원에 합의했으나, 협찬광고료와 대금상환기간[2]에서 이견을 보였다. ## 다만 세금 문제와 구단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MBC 내의 일부의견으로 인해 12월 15일로 예정된 계약은 연기되었다. 세금 문제가 매각의 최대걸림돌이었는데 청룡은 8년 간 누적된 적자가 130억원에 이르나 적자를 모두 손실비용으로 처리해와 매각할 경우 양도소득세를 내야해 매각의 실이익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3] 또 MBC 내엔 공기업이 이익으로 공익서비스를 하는게 당연하다며 야구단 운영도 공익서비스라고 계속 구단을 운영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매각계약이 지연되면서 1989년 한해가 다 가도록 비시즌에 해야 할 기존 선수와의 재계약, 선수트레이드, 신인선수 계약, 코칭스태프 계약 등이 모조리 중단되었다. #

1990년 1월 6일 투수 하기룡, 최준호, 박달선, 포수 김진우, 내야수 김경표, 조상헌, 외야수 김성수, 황윤태 등 8명의 선수를 자유계약선수로 공시, KBO에 통보했다. #

1월 8일 오후에 열린 MBC 재단 이사회에서 매각에 제동을 걸었다. #

그러다가 1월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럭키금성빌딩 강당에서 1달 동안의 교착 상태 끝에 마침내 MBC 청룡에 대한 정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구단의 매각 대금으로 100억원을 1993년까지 4년 동안 분할결제하는 한편 광고비 형식으로 30억원을 별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 MBC 청룡 기업 자체는 매각 대금이 완불될 때끼지 존속법인으로 남기기로 했다[4].

1월 29일 KBO는 실행이사회를 열어 91년부터 잠실구장을 제외한 서울지역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구단의 인수인계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동대문 or 목동구장으로 장소를 옮겨 경기를 치러야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자 럭키금성 측은 이 결정에 대해 당초 계약조건이 MBC 청룡이 갖고있는 의무와 권리가 모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잠실구장 연고권도 당연히 양도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프로야구발전을 위해 홈구장을 따로 가져야한다면 뒤늦게 서울로 연고를 옮긴 OB에서 당연히 양보해야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럭키금성측은 OB가 수 년 동안 동대문구장 사용권을 얻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아마야구계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고있다면서[5] 이 결정 과정에서 OB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인상이 짙다며 분개했다. # OB는 이에 대해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사실상의 서울연고팀은 우리였다며 당시 MBC 측의 연고지 양도요청을 받아들여 대전으로 갔을 뿐이라고 설명했고 서울지역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KBO의 이 결정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KBO는 이 문제와 관련 2월 7일 구단주 회의를 열어 결정된 이사회안을 그대로 통과시킬 방침을 밝히자 럭키금성측은 법정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2월 7일 KBO는 구단주총회를 갖고 MBC 청룡과 럭키금성스포츠 간의 구단매각과 인수를 최종 승인하고, 91년 이후 럭키금성의 목동구장 사용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이웅희 총재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 91년부터 전용구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정은 사실상 철회되었다.

2월 8일 럭키금성 구단주에 구본무 그룹회장이 내정되었다. #

구단 회사 이름이 네자여서 표기나 발음이 불편하리라는 여론에 따라 두자로 줄이는 작업과 팀의 애칭을 공모했다. 2월 20일에는 구단 명칭으로 럭키금성의 머리글자를 따 영어 LG가 거론되었고, 팀의 애칭을 여의도 쌍둥이 건물과 이미지가 같은 트윈스가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 그리고 2월 22일 마침내 야구단 명칭을 LG 트윈스로 확정지었다. # 이 명칭은 그룹 임직원들의 공모로 채택된 것.

3월 15일 오전 럭키금성 트윈타워 대강당에서 이웅희 KBO 총재와 구본무 구단주, LG 트윈스 선수단 및 임직원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단식을 가졌다. 구본무 구단주는 기념사를 통해 투철한 스포츠맨십을 바탕으로 도전적이고도 끈기있고 활기 넘치는 경기를 통해 야구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 백인천 감독은 4위권 진입을 창단 첫해 목표로 밝혔다. #

1990년 1월 12일부터 진해에 동계훈련을 차렸다. 지난해 태평양 돌핀스의 돌풍으로 극기훈련 열풍이 부는 가운데 이에 동참하지는 않았다. # 2월 2일에서 28일까지 대만 전지훈련을 가졌다.

4월 3일 오후 10시 30분 중심타자 이광은이 귀가 중 반대쪽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차를 피하려다 담벽에 들이받아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지는 전치 4주의 부상으로 이탈하는 악재가 있었다. # 안그래도 그 전에 연습 중 신언호가 손목 뼈 골절을 입은 상황에서 엎친 데 겹친 격.

2. 정규시즌[편집]



2.1. 시즌 전 전망[편집]


전력분석 기사



2.2. 전반기[편집]



2.2.1. 4월[편집]


시즌 시작 전부터 이광은과 신언호, 박흥식, 김기범이 부상으로 이탈했다. OB와의 개막시리즈 2경기를 다 내준 뒤 5연승 행진과 함께 잠시 선두에 오르게 되나 곧바로 5연패를 기록하며 꼴찌로 4월을 마쳤다.

해당 항목 참조

2.2.2. 5월[편집]


5월의 첫경기 롯데전을 17사사구로 한 경기 최다 사사구 기록을 세우며 6연패로 시작했다. 박흥식이 돌아온 6일 롯데전에서 연패를 끊고 8일 OB전에서 연승을 기록했지만 곧바로 7연패의 늪에 빠지며 OB와 최하위 그룹을 형성했다. 백인천 감독에 실망한 나머지 김동엽 전 감독의 복귀를 바라는 일부 팬들도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인 성적이 나빴음에도 반등의 열쇠가 보이던 시기였다. 제구 불안으로 애증의 투수였던 김태원이 데뷔 첫 완봉승을 기록했고, 문병권도 2연속 완투승을 기록했다. 이광은과 신언호, 박흥식, 노찬엽이 부상에서 돌아오고 신인 포수 김동수가 선발포수 마스크를 끼기 시작하며 반등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김재박까지 타격감을 회복했다.

해당 항목 참조

2.2.3. 6월[편집]


6월 2일 문병권이 태평양을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했지만 다음날 0:5 영봉패를 당했을 때, LG의 성적은 14승22패로 꼴찌였다.

그런데 6월 5일~6일 광주 해태 원정에서 더블헤더 포함 3연전을 모두 가져가며 스윕승을 가져가더니 마산 롯데전-잠실 삼성전-잠실 태평양전까지 8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며 22승22패로 5할을 맞추는데 성공했다. 투수 쪽에서는 유망주로만 머물러 있던 문병권과 김태원의 포텐셜이 드디어 터졌고 정삼흠이 클로저로 보직이동한 뒷문이 강해졌으며, 타격에서는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최훈재, 김영직 등 막강한 좌타라인이 상승세의 원동력이었다.

6월 14일 태평양과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아깝게 10:9로 패하며 연승은 8에서 끊겼지만 이것으로 상승세가 끝이 아니었다. 6월 15일 대구 삼성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김동수가 홈런을 2개 치며 승리하더니 다음날에도 김동수가 연타석 홈런을 치며 삼성을 또 이겼다. 그 다음날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도 팀은 비록 졌지만 김동수는 또 홈런을 기록, 3경기 5홈런이라는 임팩트로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부상하게 되었다. 마운드에선 보직이동한 정삼흠이 이기는 경기에 나와 세이브를 적립해갔고 개막 직전 부상을 당했던 김기범이 부상을 털고 팀 전력에 복귀했다.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였던 빙그레와의 잠실 시리즈는 1점차로 지고 있던 마지막 경기에서 이병훈의 극적인 끝내기 안타로 위닝시리즈에 성공, 선두 빙그레에 2.5경기차인 28승 26패 4위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6월 한달, LG는 16승 6패, 승률 .727을 기록하며 꼴찌에서 단숨에 4위로 도약, 후반기 약진의 기초를 다졌다.

해당 항목 참조.

2.3. 후반기[편집]



2.3.1. 7월[편집]


올스타전 이후 재개된 후반기가 되었음에도 LG의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삼성과의 홈 3연전을 싹쓸이했고 롯데와의 잠실 시리즈 1차전까지 승리하며 6연승에 성공했으며 그 시리즈는 위닝시리즈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OB에 3연전 스윕승, 해태와의 더블헤더 포함 3연전 위닝시리즈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7월 13일 OB와의 더블헤더에서 모두 승리하며 빙그레를 제치고 4월 21일 이후 첫 선두에 올랐다. 14승22패로 꼴찌였던 6월 3일 이후 불과 40일 만에 거둔 대단한 성과였다. 꼴찌였던 6월 3일 이후 30경기 24승 6패로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상승세였다. 적어도 빙그레를 만나기 전까진 완벽했다. 후반기 개막 후 9승2패를 기록했는데 이 과정에서 선발로 보직을 옮긴 김용수는 3승, 부상에서 돌아온 김기범은 2승, 문병권은 시즌 8승, 김태원은 시즌 7승째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타격에서는 노찬엽, 이광은, 윤덕규, 김상훈 등이 꾸준한 활약을 보였고 김동수는 생애 첫 만루홈런을 치기도 했다. 여기에 김동재와 김영직까지 맹활약을 펼쳤다.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던 LG에 시련이 찾아왔다. 1988년부터 대전 원정에서 15연패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더블헤더 포함 대전 원정 4연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7월 20일 더블헤더 1차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경기에서 모두 팽팽한 접전을 펼쳤고 어떻게든 대전 징크스를 탈출하기 위해 투수들을 쏟아부었지만 장종훈, 이강돈 등 강력한 타선을 앞세운 빙그레에 4전 전패를 기록하고 말았고 대전 구장 연패기록은 19로 늘어났으며 선두에서 3위로 내려오고 말았다. 다행히 7월 24일 해태와의 잠실 시리즈 첫 경기에서 김용수의 호투와 함께 선동열의 예상치 못한 폭투가 결승점이 된 행운의 점수 덕분에 승리하며 연패에서 탈출했고 그 시리즈에서 7월 26일 에이스로 각성한 김태원의 완봉승으로 1:0 승리, 위닝시리즈를 따내며 빙그레전 4연패의 충격에서 벗어났다.

해당 항목 참조.

2.3.2. 8월[편집]


8월 첫 시리즈에서 OB에 2승1패 위닝, 잠실 롯데전 2승1패 위닝, 광주 해태전 2승2패로 동률, 휴식일 후 잠실 삼성전에서 2승1패 위닝시리즈를 기록하며 빙그레전 충격을 딛고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1988년 신인왕 이용철까지 부상에서 돌아와 팀에 커다란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8월 17일 문제의 대전 빙그레전이 찾아왔다. 이 경기에서 이용철의 호투와 윤덕규, 김동수의 홈런으로 빙그레에 5:2 승리, 마침내 대전 빙그레전 19연패에서 탈출했다. 그래도 대전 원정은 어려웠고 나머지 2경기에서는 무난하게 패배하며 루징시리즈를 기록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사직 롯데전에서 더블헤더 포함 4경기 3승1패로 반등했다. 8월 24일~26일 해태와의 주말 잠실 3연전에서는 해태 관중들의 난동이 있었지만 2승1패로 위닝시리즈에 성공했다. 28일~30일 OB와의 더블헤더에서는 2승2패로 동률를 이루었고 8월을 마쳤을 땐 정확히 100경기를 치러 56승44패, 선두 빙그레에 5경기차, 2위 삼성에 반경기차 뒤진 3위에 있었다. 따지고 보면 6월 시작부터 3달 동안 대전 빙그레전을 제외하곤 루징시리즈 없이 최소 동률이었다. 대전에서 기록한 1승6패로 인하여 선두 경쟁에서 밀려나 빙그레의 정규시즌 우승이 확정적이었고 LG는 7년 만의 포스트시즌이 유력한 상황에서 2위를 노리는게 현실적으로 보였다.

해당 항목 참조.

2.3.3. 9월[편집]


LG가 20경기만 남겨둔 가운데 선두 빙그레와 5경기차라 빙그레의 우승이 유력해보였으나 예상치 못한 반전이 찾아왔다. 9월 13일까지 LG가 총력전을 펼치며 12경기 10승2패로 계속 상승세를 지속하는 가운데 빙그레 김영덕 감독의 종신감독설을 둘러싸고 차기 감독으로 이어받는듯 했던 강병철 수석코치와의 갈등이 불거지며 빙그레는 갑자기 하락세를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즌 종료까지 8경기를 남겨둔 9월 13일에는 선두 빙그레에 1경기차로 턱밑까지 추격하는데 성공했고 그 상황에서 휴식일을 맞아 빙그레와 해태의 4연전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해태가 빙그레를 4번 다 잡아주며 9월 17일에는 LG는 가만히 앉아서 선두에 등극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5경기차 역전이 불과 2주만에 이루어졌다. 빙그레의 드라마틱한 추락으로 4강에 있는 LG와 해태, 빙그레, 삼성이 선두 자리를 두고 1경기차 이내에서 물고 물리는 대혼전이 벌어졌다.

LG는 시즌 내내 강했던 삼성 원정에서 9월 18일 첫 경기는 김태원의 호투로 승리했으나 나머지 2경기를 다 내줬고 9월 20일에는 빙그레와의 4연전을 싹쓸이한 해태가 8연승으로 LG를 추월하고 말았다. 9월 21일 태평양 원정에서도 패하며 중요한 상황에서 3연패를 기록했고, 빙그레의 추락으로 어부지리로 얻은 선두를 어이없게 쉽게 놓치는 듯 했다. 다행히 9월 22일 김태원의 호투로 연패를 끊어내며 해태와 승차에서 동률을 이뤘고 9월 23일 김용수의 역투로 태평양에 승리하며 반 게임차 선두에 오르게 되지만 LG는 남은 경기가 2경기 밖에 없고 해태는 6경기나 남아 자력으로 우승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태평양이 LG의 휴식일이었던 25일에 해태의 선동열을 공략하며 해태를 잡아줬고, 26일 LG는 사직 롯데전에서 김태원의 시즌 18승으로 4:0 승리를 기록하며 1경기 남은 가운데 1게임차를 유지했다. 이제 남은건 29일에 열리는 최종전에 우승 향방이 달려있었다. 최종전을 갖는 LG가 OB에 승리하고 태평양이 해태와의 더블헤더에서 1경기라도 잡아주면 LG의 우승 확정이었다.

그리고 9월 29일 LG는 9회말 김동수의 끝내기 홈런으로 OB에 1:0으로 이겼고, 태평양이 해태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해태를 잡아주며 LG는 MBC 청룡에서 LG 트윈스로 이름을 바꾼 첫해에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2.4. 상대 전적[편집]


LG 트윈스 1990년 팀별 상대 전적
상대 팀
승 - 무 - 패
승률
승패마진
우열
해태 타이거즈
11 - 0 - 9
0.550
+2
우세
빙그레 이글스
7 - 0 - 13
0.350
-6
열세
태평양 돌핀스
12 - 0 - 8
0.600
+4
우세
삼성 라이온즈
13 - 0 - 7
0.650
+6
절대우세
OB 베어스
13 - 0 - 7
0.650
+6
절대우세
롯데 자이언츠
15 - 0 - 5
0.750
+10
절대우세
총합
71 - 0 - 49
0.592
+22
순위: 1 / 7

  • 분류 기준
    • 남색은 압도(승률 ≥ .800)를 뜻한다.
    • 청색은 절대우세(.650 ≤ 승률<.800)를 뜻한다.
    • 하늘색은 우세(.550 ≤ 승률<.650)를 뜻한다.
    • 녹색은 백중세(.450 ≤ 승률<.550)를 뜻한다.
    • 오렌지색은 열세(.350≤승률<.450)를 뜻한다.
    • 적색은 절대열세(.200≤ 승률<.350)를 뜻한다.
    • 갈색은 압살(승률<.200)을 뜻한다.

빙그레를 제외한 모든 구단에 우세를 거뒀으며 삼성, OB, 롯데에게는 절대우세를 거뒀다. 유일하게 열세였던 빙그레에게는 승리 자판기였던 전후 2년과 비교했을 때 7승 13패로 선방한 편이었기 때문에 승패마진을 덜 깎아먹었고 이 점이 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숨은 원인이 되었다.

2.5. 수상 및 기록[편집]



정규시즌을 우승했지만 타이틀홀더는 없다. 그나마 정삼흠이 55경기를 나선 겻이 투수 최다출장기록이다.


2.6. 선수별 개인기록[편집]




3. 포스트시즌[편집]



3.1. 한국시리즈[편집]


파일:attachment/90V.jpg
파일:Twins_champion_v1.png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LG 트윈스

MBC 청룡 시절이던 1983년 이후 7년 만에 진출한 한국시리즈에서 준플레이오프부터 치른 삼성 라이온즈를 4전 전승으로 꺾고 MBC 청룡에서 LG 트윈스로 바뀐 첫 해에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서울 연고팀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기도 했다. MVP는 김용수.



4. 총평[편집]


6월 초까지 지리멸렬한 최하위에서 반등하여 치열한 레이스 끝에 최종전에서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하고 구단 처음이자 서울 연고팀 최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그것도 전승 우승으로 거두며 말 그대로 짜릿한 시즌을 보냈다. LG 트윈스라는 이름으로 치른 첫 시즌에 우승하여 더욱 뜻깊었다.

MBC 청룡 시절 1983년 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가을야구를 밟지 못했던 약체 팀이었고 청룡 시절인 불과 직전 시즌 1.5G차로 간신히 꼴찌를 면한 팀을 럭키금성에서 인수했을 때만 해도 이 팀이 한국시리즈 정상에 도전하리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LG 팬들도. 실제로 LG는 시즌 초반 잠시 반짝 선두에 올랐으나 곧바로 하락세를 타며 6월 초에는 OB 베어스와 꼴찌 경쟁을 했었고 일부 팬들은 백인천 사퇴를 바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태 원정 스윕승을 시작으로 8연승을 기록하며 단숨에 하위권을 벗어났고 7월까지 그 기세를 이어가 선두 자리를 탈환했다. 빙그레 원정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고꾸라지며 3위로 처졌고 9월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빙그레의 한국시리즈 직행이 유력시되었지만 빙그레가 김영덕 감독 종신감독설로 팀 분위기가 흔들리는 사이 LG는 어부지리로 1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LG, 해태, 빙그레, 삼성 4팀이 매일 순위가 바뀌는 치열한 순위 경쟁을 하게 되었고 1위를 탈환한 LG는 다시 흔들리며 해태가 맹추격해왔다. 다행히 LG는 정신을 차렸고 LG의 시즌 최종전이었던 OB와의 홈경기에서 승리한 뒤, 해태가 태평양과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패하면서 LG로 바뀐 후 첫 해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지었다.[6]

한국시리즈 상대론 LG의 천적 빙그레, 한국시리즈 100% 우승 해태 대신 LG가 상대전적에서 압도적이었던 삼성을 상대하게 되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시작한 삼성에 대한 전력분석을 완료했고 4승 무패[7]MBC 청룡 시절부터 이어져 온 부진을 LG 인수 이후 단번에 털어내는데 성공했다.

LG는 몇몇 유명선수에 기대거나 장타력만을 앞세운 공격야구가 아닌, 선수 전원의 고른 타격, 투수력, 주루, 수비력 등 4박자의 조화를 바탕으로 챔피언에 올랐다. 종전의 정규시즌이나 한국시리즈 우승팀의 비결은 강력한 특급투수 한 명의 활약이나 몇몇 타자들의 장타력으로 설명되어왔다. 82년 OB는 박철순이라는 특급 에이스가 있었고 83년 해태는 투수 이상윤김봉연 등 홈런타자, 84년 롯데는 최동원이라는 특급투수, 85년 삼성은 김일융, 김시진 원투펀치와 이만수 등의 장타력이 바탕이 되어 우승했다. 86-89년 해태의 4연패는 선동열이라는 국보급 투수와 김성한, 한대화 등 강타자들의 활약이 컸다.

하지만 LG는 지금까지의 공식과는 다르게 선수 전원의 단타 위주 야구로 우승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이렇다할 기둥투수가 부족했으나 김태원문병권, 정삼흠을 발굴해냈고 그러면서 한 투수에만 의존하지 않는 투수 운용이 가능해졌다. 잘 치고 잘 달리고 잘 던지고 잘 잡는 야구는 정규시즌이라는 장기전 뿐 아니라 한국시리즈라는 단기전에서까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런 야구가 이루어지는데 백인천 감독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한몫했으나 럭키금성 그룹의 전폭적인 후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우선 구단은 인수와 함께 MBC 청룡의 기존 선수들의 의사를 수렴하여 야인으로 머물던 백인천 감독을 영입했고 코치진과 선수 관리의 전권을 백 감독에게 일임하여 다른 구단들의 단골 골칫거리였던 프런트와의 갈등을 차단했다. LG가 흔들릴 때도 구본무 구단주가 직접 나서 '10연패도 괜찮다.', '60만명 관중 동원이 안되면 그룹직원이라도 동원하겠다.' 등으로 구단을 보호, 선수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했다. 선수들의 연봉도 최고 100% 인상, 최소 동결로 파격적인 지원과 함께 LG 선수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에 호응하여 백 감독의 지론인 프로정신이 넘치는 '혼의 야구'가 마음껏 펼쳐졌는데 끊어치는 타법 등 일본 프로무대에서 익힌 타격 방법으로 선수들의 타격을 끌어올렸고 마무리 투수였던 김용수와 선발투수 정삼흠을 절묘하게 임무를 교대하는 탁월한 용병술을 발휘했다. 한겨례 총평 매일경제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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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야구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고, 공익법인으로 이윤추구를 하는 프로구단을 운영할 명분이 적고 매년 구단 적자가 20억~30억에 이르렀기 때문에 매각을 검토해왔다.[2] 럭키금성측은 2년, MBC는 일시불을 요구했다.[3] MBC는 청룡을 매각할 경우 매각대금으로 새 체육사업법인을 만들어 체육문화사업에 활용한다는 방안을 마련해왔으나 매각대금을 법인에 출연하더라도 대금이 주식회사 청룡을 거치게 됨에 따라 세법상 세금을 물지 않을 수 없었다.[4] 현 LG트윈스의 법인은 주식회사 LG스포츠로 K리그 참가를 위해 83년 신설된 법인이며 프로야구팀 사업 권리를 이전받는 형태로 이루어졌다.[5] OB는 85년 서울입성 첫해 동대문야구장을 사용했으나 대한야구협회의 반발로 86시즌에는 1년 임시 사용을 전제로 잠실로 옮겼고 결국 이듬해 87시즌에도 야구협회와의 마찰로 동대문 사용이 결렬되면서 잠실에 눌러앉게된다.[6] 1995년 9월에도 태평양이 OB와 경기를 이겼마면 LG의 패넌트레이스 우승을 도와줄수 있었다.[7] 삼성은 이후 한국시리즈 11연패라는 흑역사를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