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밴드)

최근 편집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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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겜 아처
앤디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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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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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범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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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tely May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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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1994.8.29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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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1995.10.2
Be Here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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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1997.8.21
The Masterp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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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199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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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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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2000.2.28
Familiar to Mill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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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앨범

2000.11.13
Heathen Chem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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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2002.7.1
Don't Believe the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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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200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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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The Cl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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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2006.11.20
Dig Out Your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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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2008.10.6
Time Flies... 199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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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2010.6.14
Knebworth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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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앨범

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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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글 목록 ]
[ 참여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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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lp Album
1995.09.09

...Later Volume One: Brit Beat
1996

MTV 120 Minutes Live
1998

NME In Association With War Child Presents 1 Love
2002.10.14

Goal!: Music from the Motion Picture
200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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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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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인기
3. 음악적 성향
5. 멤버
5.1. 변천사
6. 음악
6.1. 다른 밴드와의 관계
6.2. 블러와의 관계
7. 갤러거즈
7.1. 형제 싸움
7.2. 해체 관련 일화
7.2.1. 형제 싸움 시즌 2
7.2.2. 재결합 가능성?
7.3. 축구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
8. 국내의 인식
8.1. 내한 관련
8.2. Butterfly 표절 시비?
10. 여담
11. 관련항목



1. 개요[편집]


잉글랜드 맨체스터 출신의 브릿팝[1] 밴드.

2. 인기[편집]


1994년 혜성처럼 등장해 한때 비틀즈 이후 영국 최고의 밴드라 불릴 정도로 영국의 국민밴드로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영국 대중들에게 얻은 인기는 90년대부터 해체하기 전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판매량, 싱글 차트, 앨범 차트 성적이 매우 뛰어나다. 1996년 영국 넵워스파크에서 열리는 그들의 공연을 직관하기 위해 영국 인구의 5%[2]가 예매를 시도했던 적도 있을 정도로, 단순한 대중음악의 영역을 넘어 영국의 90년대 자체를 상징하는 밴드이다.

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신인상, 올해의 밴드상, 올해의 앨범상, 평생공로상, 30년동안 발매된 앨범중 최고의 앨범상 수상을 포함해 6번 수상을 했고 이를 포함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시상식에서 90번 노미네이트, 45번 수상을 했다.

영국 차트에서는 8번의 앨범 1위, 8번의 싱글 1위를 기록했고 빌보드 차트에선 정규 3집 Be Here Now가 앨범차트 2위, Wonderwall이 싱글 차트 8위를 기록했다.

영국에서 1500만장, 전세계적으로 72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3. 음악적 성향[편집]


리드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노엘 갤러거와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인 리암 갤러거 형제가 주축이었다. 둘 다 1960년대 밴드들의 엄청난 팬이다. 특히나 비틀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밴드이고 노엘과 리암 갤러거를 비롯한 멤버들 모두가 자타공인 비틀즈 팬이다. 실제로 오아시스의 많은 곡의 진행이나 가사에서 비틀즈의 곡에 대한 레퍼런스를 엿볼 수 있다. 때문에 90년대 비틀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앨범들로 역대급 성공을 거두었다. 이 외에도 섹스 피스톨즈, 더 스미스, 스톤 로지스, 비 지스, 데이비드 보위, 버즈콕스, 킹크스, 댐드, 도어즈, 밥 딜런, 플리트우드 맥, 지미 헨드릭스, 더 잼, 조이 디비전, 더 라스, 티렉스, 뉴 오더, 버브, 더 후, 닐 영, 롤링스톤스과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90년대 밴드 음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 블러, 펄프, 스웨이드 등과 함께 "브릿팝 빅4"라 불리며 브릿팝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밴드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얼터너티브'라는 음악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한정하냐에 따라서 이견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좁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오아시스는 얼터너티브가 아닌 모던 록, 특히 흔히 브릿팝이라고 부르는 '브리티시 모던 록'에 속한다.하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스웨이드나 블러, 그리고 이후의 등장한 트래비스나 콜드플레이와 같은 말랑한 음악과는 다른 거친 디스토션이 많이 함유된 음악을 구가한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브릿팝 밴드들 보다 얼터너티브적인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틀즈를 필두로 하는 브릿팝 계열 밴드들의 영향 외에도 섹스 피스톨즈와 롤링 스톤즈와 같은 로큰롤 밴드들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평론가들의 평은 인기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 아니다. 롤링 스톤, 피치포크, 스핀과 같은 음악 잡지사는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음악과 다양한 시도를 하는 아티스트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오아시스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밴드이다. 오아시스의 음악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언제나 기본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것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음악을 내놓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인지[3] 90년대에 활동한 밴드 중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대중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너바나, 라디오헤드에 비해 비평적으로 다소 낮게 평가 받는다.[4] 정규 1집2집을 제외하면 블러, 펄프에 비해서도 평이 그리 높지 않으며 블러의 후기 앨범과 오아시스의 후기 앨범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전자 쪽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노엘의 탁월한 작곡 능력, 리암의 개성적인 보컬은 물론 오아시스가 갖는 상징성, 인기와 브릿팝 무브먼트의 임팩트를 반증하는 것.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DJ배철수 또한 오아시스에 대해 "음악적으로 새로운 건 없다. 그러나 멜로디와 사운드, 리프 모든 것이 한번 들으면 누구나 좋아할 수 밖에 없는 노래를 만든다. 그것 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라고 직설적으로 평한 적이 있다.

4.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아시스(밴드)/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멤버[편집]



  • 前 멤버
    • 폴 “본헤드” 아서스 (기타, 키보드)
    • 폴 “귁시” 맥기건 (베이스)
    • 토니 맥캐롤 (드럼)
    • 앨런 화이트 (드럼)
    • 스콧 멕레오드 (베이스)[5]

  • 세션 멤버
    • 잭 스타키 (드럼)[6]
    • 크리스 섀록 (드럼)[7]
    • 제이 달링턴[8] (키보드)


5.1. 변천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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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부터 1994년까지의 오아시스 (초창기)
폴 "본헤드" 아서스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폴 "귁시" 맥기건
토니 맥캐롤
기타, 키보드
기타[9]
보컬
베이스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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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1999년까지의 오아시스 (전성기)[10]
폴 "본헤드" 아서스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폴 "귁시" 맥기건
앨런 화이트
기타, 키보드
기타, 서브 보컬
메인 보컬
베이스
드럼

파일:external/britpopnews.com/9_2000OasisPA080911.jpg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오아시스 (과도기)
앤디 벨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앨런 화이트
겜 아처
베이스
기타, 서브 보컬
메인 보컬
드럼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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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부터 해체 직전까지의 오아시스 (황혼기)
앤디 벨
리암 갤러거
노엘 갤러거
겜 아처
베이스
메인 보컬
기타, 서브 보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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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별 참여년도

귁시와 본헤드는 3집 이후 탈퇴[11]했다. 토니 맥캐롤은 1집에 드러머로 참여하였다가 Some Might Say 싱글을 마지막으로 실력 부족으로 해고되었다.[12] 이후 앨런 화이트가 정규 멤버로서 그 자리를 대신하다 2004년 탈퇴하면서 드럼 멤버는 공석이 되었다. 이후로는 링고 스타의 아들인 잭 스타키, 크리스 섀록 등이 객원 드럼 멤버로 참여한 바 있다.

1집부터 4집까지 라이브 공연에서 사운드를 맡은 사람은 마크 코일이었는데 이후 마크 코일의 귀 고막손상 심화로 인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참고로 1집을 제작할 당시 마크 코일이 사운드를 뽑아냈지만 사운드합성에서 해매게 되자 다른 엔지니어(오웬 모리스)를 불렀다.


6. 음악[편집]


일반적으로 브릿팝은 어둡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오해로서 사실 전혀 반대에 가깝다.[13] 브릿팝의 전성기 시절, 그러니까 94-95년의 블러, 펄프, 슈퍼그래스 등의 앨범을 들어보면 오히려 밝고 경쾌하다. 즉 브릿팝은 기타와 멜로디가 주가 된 90년대 영국 스타일의 모던 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브릿팝의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브릿팝 밴드들에 비해 훨씬 볼륨이 크고 강렬한 디스토션을 먹인 거친 기타 소리를 특징으로 한다.

음악적인 특징은 투기타에서 뿜어져 나오는 꽉 찬 사운드와 보컬 리암 갤러거의 시원시원하고 독특한 발성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기본에 충실하고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음악은 하지는 않는다.[14] 오아시스 노래를 들어보면 정말 기본적인 코드로만 구성되어있는 경우가 많고 복잡한 코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15] 바레코드나 파워코드 또한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지, 대부분은 오픈코드로 잡는다.[16] 또한 코드 변환도 최소화하고 단순한 '3코드'로 구성되어있는 노래가 많다.[17] 이러한 면에서는 펑크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18]

하지만 단순한 코드 구성과는 달리 그 위에 얹혀진 멜로디는 굉장히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오아시스의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높게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쉽지만 단순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노엘 갤러거도 오아시스의 음악이 대중적의 사랑을 받는 이유로 굉장히 쉬운 코드 진행에 얹혀진 아름다운 멜로디를 꼽았다.

또다른 요소를 꼽자면 보컬인 리암의 목소리를 들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이 "노엘도 노래를 할 줄 아는 친구인데 리암을 왜 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한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리암의 존재를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렇게 보면 큰 오산이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음악의 방향이나 퀄리티가 크게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오아시스도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19] 물론 노엘은 부정할 수 없는 천재적인 송라이터이고 노래를 부를 줄 아는 것도 맞으나 목소리의 참신함은 적은 편이다.[20] 노엘 버전과 리암 버전이 둘 다 존재하는 노래(Live Forever, Wonderwall, champagne supernova, stop crying your heart out, Slide Away, Lord Don't Slow Me Down, Listen up 등등)를 들어보면 대부분 리암 버전이 훨씬 더 생기있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암 특유의 락보컬이 아니었다면 오아시스가 추구하는 정통록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라 평한다. 또한 오아시스 음악은 항상 어느정도 익숙한 클리셰에 맞춰져 있기에 음악에 참신함을 주기 위해선 다른 신선한 요소가 필요한데 리암의 개성있는 목소리가 그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해 준다. 물론 노래 자체가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노엘이 불렀어도 성공은 할 수 있었겠지만 리암이 없었다면 국민밴드급의 아티스트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리암의 목소리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서는 리암 갤러거 항목 참조.

앨범의 트랙간 퀄리티 밸런스가 굉장히 잘 맞춰져있는 밴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나 아티스트들도 싱글로 발매된 수록곡과 논싱글(non-single) 트랙간의 퀄리티 차이가 큰 경우가 많은데 그것에 비하면 오아시스는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는 편이다.

4집 이후부터는 멤버의 대부분이 교체되고 음악적 방향이 변화하는 등 밴드의 색깔이 크게 변하게 된다. 그나마 노엘의 개인적인 회고록 같은[21] 4집을 제외하면 언제나 한결같이 로큰롤을 지향하려 노력하였다. 오아시스의 음악은 변화하지도 않고 진보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나 평론가들이 항상 라디오헤드와 오아시스를 비교하면서 단골로 하는 말이 바로 '진보'인데, 노엘 역시 라디오헤드와 본인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은 안전지대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은데 왜 다들 굳이 새로운 변화를 강요하느냐"는 식의 인터뷰를 자주 해왔다. 다만 이렇게 혁신적이지 않은 음악관 때문에 일부 잡지나 평론가들(특히 미국 출신)이 밴드의 위상에 비해서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22]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반인 Definitely Maybe(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당연히 대부분의 잡지에서 역사에 남을만한 앨범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앨범의 퀄리티가 비교적 평범해진 Be Here Now,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Heathen Chemistry가 과도하게 까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23]

오아시스가 해체되고 나서 두 형제가 노엘갤러거즈 하이플라잉버즈와 비디 아이로 나뉜 뒤에는 노엘이 상대적으로 훨씬 진보적인 사운드를 보여주었기 때문에[24] 오아시스의 음악적인 정체(停滯)가 무조건적으로 노엘의 취향에 기반했다라는 인식은 틀린 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리암은 해체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통 로큰롤을 지향해 온 걸로 보아, 오아시스의 음악적 성향은 리암의 입김이 의외로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밴드로는 역시 비틀즈. 그 외 음악적으로 티렉스, 섹스 피스톨즈, 롤링 스톤즈, 더 스미스 그리고 스톤 로지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멤버가 교체된 4집 이후부터는 앤디 벨의 라이드와 겜 아처의 헤비 스테레오의 색깔도 찾아볼 수 있다. Q Special Edition 2002년 7월호 인터뷰에서 노엘은 '자신은 가장 유명한 비틀즈 팬이지만 오아시스의 음악은 비틀즈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악을 신나는 면에서 스투지스, 섹스 피스톨즈, 비틀즈, 롤링 스톤즈나 스톤 로지스와 같은 뮤지션들과 비유한다.

멤버 모두가 엄청난 비틀즈이다. 특히 리암 갤러거존 레논 코스프레도 몇 년간 하고 다녔고, 자신의 아들 이름도 레논[25]으로 지었다. 공연 중에는 비틀즈 9집 수록곡인 I am the Walrus를 부르기도 하고, Whatever 라이브를 연주할 때 종종 노래 끝부분에 비틀즈의 Octopus Garden을 넣는 등 짧게나마 비틀즈의 기타 리프를 빌려 넣기도 한다. 같은 예로 Don't Look Back In Anger의 인트로는 존 레논의 솔로곡 Imagine의 피아노 반주 일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리듬 기타의 기타 리프는 Let It Be에서 빌려 왔다. She's Electric은 본인들 스스로 '대놓고 비틀즈인 척한 음악'이라고 했다. 'The Turning' 마지막 부분의 기타 리프는 Dear Prudence를 대놓고 연주한 것이며, 가사 안에 Yellow Submarine이나 Magical Mystery, Tomorrow Never Knows 같은 구절을 쓰는 등 곳곳에서 비틀즈 오마주가 넘쳐난다. 리암은 존 레논은 찬양하지만 폴 매카트니에 대해서는 비교적 약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노엘은 매카트니를 좋아하며 개인적인 친분도 있다. 그 외에도 레드 제플린이나 롤링 스톤즈 등의 리프를 차용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오아시스의 사운드 그 자체는 참신함이 적은 편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밴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아시스만의 색깔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배철수의 평을 들자면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멜로디에 강한 스파이크로 되받아치는 듯한" 노엘의 작곡 능력에, 그 목소리만으로도 곡에 강력한 기운을 불어넣는 리암의 보컬이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6.1. 다른 밴드와의 관계[편집]


  • 90년대에 리암이 어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록 스타들을 깐 적이 있었다. 이 무렵 TV에서 오아시스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예정이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록 스타들이 오아시스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하는 내용이었는데 인터뷰에 출연한 이들이 모두 오아시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늘어놨고, 이 다큐멘터리는 사전에 검열한 갤러거 형제에 의해서 방송이 취소되었다. 이후 리암이 라디오에 술취한 채 출연하여 믹 재거를 엄청나게 깠는데, 믹 재거, 꼽냐? 꼬우면 내일 아침 몇시까지 우리집 앞에 와라. 우리집 주소가 OOO의 XXX니까 꼭 찾아와라 라고 선전포고하였다.[26] 하지만 그 다음날 아침, 믹 재거의 팬들 수십명이 믹 재거 가면을 쓰고 리암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결국 리암은 경찰을 불러 그들을 해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 데뷔 초기, 노엘이 폴 매카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폴 매카트니가 자네들 전성기때 우리랑 비슷하더군, 아주 잘 하고 있어.라고 칭찬을 하자, 그럴라고 돈 많이 썼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인터뷰로 다른 뮤지션을 잘 깐다. 모 음악지는 핀란드인은 자기 전에 자일리톨 껌을 씹지만, 갤러거 형제는 자기 전에 요즘 잘 나가는 밴드를 몽땅 씹는다는 표현을 썼는데 갤러거 형제의 평소 행적을 아는 이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대목. U2[27], 라디오헤드[28][29][30], 블러[31], 콜드플레이[32][33], 스타세일러[34], 펄 잼, 플라시보, 로비 윌리엄스[35],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슬립낫, 에미넴[36], sum41[37], 프란츠 퍼디난드[38], 카이저 칩스, 아델[39] 등등. 특히 프란츠 퍼디난드와 카이저 칩스, 라디오헤드는 단골로 까인다. 비틀즈도 까긴 까는데... 심지어 자기들도 깐다.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터뷰에서 욕설이 난무한다. 애초에 데뷔하면서 'Supersonic' 싱글을 낸뒤의 잡지 인터뷰부터 범상치 않았다.("퇴물들은 젊은 밴드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주로 아이러니하게 비아냥거리는 쪽은 노엘이며, 리암은 숨쉬는 것과 비슷한 빈도로 Fxxk을 애용한다.[40]

정작 오아시스는, 정확하게는 리더인 노엘 갤러거가 많은 선후배 뮤지션들과 친분이 깊으며 무대에도 함께 선다. 대표적인 친구들을 꼽아보자면, 선배들 중엔 더 잼의 폴 웰러와 스톤 로지스의 이안 브라운과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절친. 더 후의 멤버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무대에 함께선 적도 있고, 피트 타운젠드와 노동자 파업에 대한 자선공연을 하기도 했다. 더 스미스조니 마와는 데뷔 전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독설가로 유명한 노엘은 그에 대해서는 독설을 하지 않는다. 레스 폴 기타와 얽힌 인연 때문에라도 조니는 깔 수가 없다.[41] 모리세이와도 친하진 않지만 유머감각 때문에 좋아한다고 한다. 폴 웰러와 공연을 같이 했을정도로 친분이 있고[42] 아이리쉬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U2와도 친분이 깊다.[43] 노엘은 많은 선배 락스타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기도 하고, 노엘도 무척 존경한다.

그런 만큼 솔직하게 독설을 날릴 수 있는 관계이다. 후배들 중엔 카사비안을 무척 편애하며,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은 그냥 노엘빠. 트래비스는 스코틀랜드 지역 밴드 시절부터 노엘의 열렬한 애정을 받아 왔다. 마룬5 역시 오아시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마룬5의 경우, NME 2008년 8월호나 Q 매거진 2008년 10월호의 노엘 인터뷰를 보면 알수 있다.[44]

Magnet 잡지에서 푸 파이터스(밴드)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리암을 인터뷰했을 때, 리암은 퀸(밴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프레디 머큐리가 엄청난 목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알겠고, 밴드가 명곡들을 만들어낸 것도 알겠지만 뭔가 마음에 딱 들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노엘은 핑크 플로이드 사진전 입구에서 로저 테일러와 서로 웃으며 악수하는 사진도 있고, 보헤미안 랩소디(영화)를 잘 보았다는 말을 하여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일랜드 저항음악의 전설적인 밴드, 울프 톤즈(The Wolfe Tones)는 리암과 노엘 모두 팬이다. 유투브 영상에 보면 어릴 적 자라난 곳을 돌아보며 음반가게 'Sifters'를 가리키며 "울프톤즈 음반을 사던 곳"이라고 회상하는 것을 보면 정말 광팬이었던 듯 하다. 또한 울프톤즈의 브라이언 워필드 또한 인터뷰에서 "맨체스터에 공연가면 항상 보러오는 애들 2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노엘하고 리암이었다. 나중에 밴드를 결성했다고 말했는데 몇 년 후 TV를 틀어보니 걔네들이 바로 오아시스더라"라고 말했을 정도다. 2018년 월드컵 중, 리암 갤러거는 어떻게 셀틱을 좋아하면서 잉글랜드를 응원하냐고 따져묻는 사람이 있자, 트위터로 "나는 셀틱, 잉글랜드 그리고 울프톤즈를 모두 사랑한다. X까"라고 밝혔다. 노엘과의 성향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한데, 노엘은 스스로 아일랜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리암은 스스로 '맨체스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일랜드인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고 하며 노엘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6.2. 블러와의 관계[편집]


더욱 자세한 내용은 브릿팝 전쟁을 참고하길 바람.

파일:attachment/damon_gallaghers.png

사진은 오아시스 TOTP에 Whatever가 나오면서 데이먼 알반이 소개하는 부분 블러의 다큐멘터리인 No Distance Left To Run에 삽입되었으며 해당부분을 캡처하여 자막을 입힌 것이다. 사진 전체.

오아시스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블러. 이 둘은 오랜 기간 동안 브릿팝계에서 대립 구도를 펼쳤다. 이른바 '브릿팝 전쟁'도 이 둘을 언론들이 이용한 결과다. 이때 언론들은 60년대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사실 1995년 싱글 동시 발매로 충돌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45] 문제는 그 이후로 영국 언론 특유의 포장하기와 몰아가기로 인해 그 둘을 마치 영국 음악의 최강자를 놓고 싸우는 라이벌로 포장하였으며 이는 훗날 브릿팝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사실 이 싱글 발매 싸움은 블러 측이 먼저 도발한 측면이 있었고 (블러 측에서 먼저 일부러 발매 날짜를 2주 정도 늦췄다), 이에 오아시스 측에선 굉장히 어이없어하였다. 앨런 맥기가 노엘에게 "우리도 발매 날짜를 늦추자" 라고 했지만 노엘은 X까지 말라고 했다 리암은 이후로 사적인 자리에서 그들을 만나면 으르렁거렸으며 훗날 블러의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는 이 때의 일화를 두고 "전부 다 재밌었잖아 안그래?"라며 자조적인 모습을 취한다.

노엘은 블러의 리더인 데이먼 알반에게 "에이즈나 걸려 뒈져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발언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비난 속에 (심지어 이 시기에 노엘은 어머니인 페기에게 '난 네가 그런 말 하라고 가르친적 없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한다.) 이후 에이즈 환자들에게는 사과를 했지만 데이먼에겐 사과를 안했다고 한다.

블러 같은 경우엔 브릿 어워즈에서 최고의 싱글로 파크라이프가 선정되자 데이먼 알반오아시스도 같이 탔으면 좋았을거에요라고 말했던 일을 자신들의 최악의 실수로 꼽았다. 그래서 그 다음해 브릿 어워드에서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가 베스트 앨범을 수상하자 갤러거 형제는 Parklife를 Shitlife라고 놀렸다.

하지만 근래 들어선 양 쪽 다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다. 리암의 경우 데이먼 알반과 싸운건 노엘이지 자신이 아니라며 블러의 멤버들과는 오가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한다고 한다. 실제로 라이벌리가 한창이던 시절에 리암과 데이먼은 한 바에서 마주쳐 좋은 대화를 나눴고 데이먼은 "넌 괜찮음. 난 너네 형이 싫을 뿐임."이라 했다고 한다. 2009년 인터뷰에서 노엘 역시 데이먼 알반에 대해 자신과는 다르지만 재능있는 사람이라 했고, 브릿팝 전쟁을 회상하면서 철없던 시절의 얘기라 하기도 했다. 사실 노엘은 블러의 기타리스트인 그레이엄 콕슨에 대해선 줄곧 높은 평가를 해왔다.

2011년 Shortlist에서의 노엘 인터뷰에 따르면 우연히 모 클럽에서 데이먼 알반과 마주치게 됐는데, 그 날 둘은 15년 전 브릿팝 전쟁 때의 일에 대해 회상하며 서로 맥주를 마시며 깔끔하게 사과 및 화해를 했다고 전해진다. 원 디렉션이란 보이 밴드를 같이 깠다고 한다

사실 두 쪽 모두가 언론의 꼭두각시이자 희생양이었을 뿐이었고, 먼 훗날 노엘 갤러거데이먼 알반은 서로 화해하였고, TCT 공연에서 노엘이 블러와 함께 그들의 노래인 'Tender'를 같이 연주하면서 브릿팝 전쟁의 앙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2017년에는 고릴라즈 신보 Humanz의 싱글컷 중 하나인 We Got the Power에 노엘이 백킹 보컬을 넣으면서 처음으로 알반과 노엘 갤러거가 같이 작업한 음악이 나왔다. 이 즈음 이후부터는 탑스타들이 대거 얼굴을 비춘 노엘의 50세 생일파티에 데이먼이 참석하고 공연을 몇 번 같이 서는 등 도리어 친해진 듯 한 상황이다.

7. 갤러거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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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들에 대한 발언을 원하지 마. 그 녀석들은 원채 거칠어서 우릴 칠지도 몰라.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 오아시스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에. 전문은 여기에



오아시스의 주축이었던 갤러거 형제를 의미한다. 팬들 사이에선 갤러거지로 통한다
왼쪽부터 동생 리암 갤러거, 노엘 갤러거. 형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각 항목을 참고.


7.1. 형제 싸움[편집]


파일:갤러거지 사이좋을때.jpg
사이가 좋을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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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형제의 모습.[46]

"오아시스 최대의 강점은 리암의 관계였어. 그게 밴드를 끝장내버린 요소이기도 하지만.

노엘 갤러거


"오아시스는 페라리 같았지. 보기도 좋고, 성능도 좋고, 너무 빨리 몰면 제멋대로 튀어나가고."

리암 갤러거


형제끼리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어느 정도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부른다.[47]

밴드가 해체한 이후로 서로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 받는 일은 일체 없다. 사실상 인터뷰로 소통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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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까는 사이사이 형제애를 슬쩍슬쩍 드러내곤 해 그 사이를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으며, 굳의 정의를 내리자면 애증 관계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상당히 과격하게 서로를 저격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종종 드러나는 극단적인 형제애는 불행했던 형제의 어린 시절[48]에 기인한다.

96년 3월 22일 더블린 공연 후 호텔로 돌아온 갤러거 형제는 더선, 데일리미러 등 타블로이드 언론사에서 돈을 받고 호텔로 찾아온 토마스 갤러거(갤러거 형제의 친아버지)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노엘은 불안 증세를 보이며 방문을 잠구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리암이 뛰쳐나와 "한 번만 더 우리 애[49] 눈에 띄면 가만 안 둘 테니깐 빨리 꺼져!" 라고 외쳤다. 영화 슈퍼소닉에서, 리암은 몹시 화를 냈고, 노엘은 리암에게 거듭 "반응하지 마" 라며 형으로서 동생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리암이 "죽여버릴 거야" 라며 계속 화를 내자 결국 노엘이 리암을 보호하기위해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 리암이 회상하길 형이 있었기에 진정할 수가 있었다고.

"얼마나 우리가 다투냐고? 매일. 매시간. 하지만 그건 증오가 아니야. 사랑이지. 형을 미워하지 않아. 사랑이야." - 리암

(소리치며) "난 그 새끼를 사랑해! 누구라도 형의 발을 밟으면, 내가 그 발을 다 잘라버릴거야! 형을 위해 감옥도 갈 수 있어. 그를 사랑해." - 리암

" 난 노엘을 사랑해. 이 넓은 엿같은 세상 전체에서 누구보다도 더 그를 아껴. " - 리암

"...하지만 오아시스는 독립적인 세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지. 우리애랑, 나랑, 그리고 노래들이야. 그런 노력이 있고, 우리애 없는 오아시스는 존재할 수 없지. 하지만 리암은 그걸 모르고 있어. 왜냐하면 그 애가 술을 마시면, 경쟁 컴플렉스랑, 심각한 열등감 컴플렉스가 생기거든. 하지만, 있잖아. 그 애는 내 동생이야. 내가 그를 싫어한다고 해도, 사실은 리암을 하나하나 다 사랑하고 있다구." - 노엘

"난 너랑 존 레논 노래만 부를거야." - 리암

"나도 너랑 존 레논만 내 노래를 부르게 할거야." - 노엘


데뷔 때부터 이들의 싸움은 그 특유의 캐릭터와 맞물려 언제나 언론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의 싸움에서 어느 정도 부풀리거나 부추겨진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흔히 형제자매 사이에서 보이곤 하는 경쟁심리와 서로를 견제하려는 태도가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라고 보면 되겠다.

5집 활동 시기에는 답지않게 형제애가 두터웠으나, 6집부터 다시 조짐이 보이더니 7집을 낸 이후부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시 사이가 엄청나게 악화되었다. 월드투어를 진행 중일 때도 하루에 한두 마디하면 많이 할 정도. 심지어 같은 비행기 타기 싫다고 다른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8월 28일, 노엘이 밴드의 탈퇴를 선언하고, 이후 리암이 해체를 선언하면서, 교류가 끊기고 만다.

그런다 2015년 1월 26일, 밴드의 해체 직후 이래로 리암과 노엘이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후 2015년 3월 14일 리암이 노엘의 'Keep it dangerous' 투어의 백스테이지 패스를 목에 걸고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팬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그런데 이건 리암의 패스가 아닌 것이 밝혀지면서 팬들은 리암이 희망고문을 시전했다며 허탈해했다. 2014년에도 OASIS를 30분 마다 한 글자 씩 올려서 전세계의 팬들이 엄청난 멘션을 쏟아내며 재결합의 희망을 품었다. OASIS까지 올라오고 s가 안 올라오자 S 자판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는 멘션이 있을 정도. OASIS LG가 완성되자 팬들이 얼마나 환호했는지 모른다.[50] 또다시 1년 만에 이런 식의 트위터를 올렸으니 팬들은 희망에 부풀었다가 할 말을 잃은 상태. 리암은 트위터 상에서 노엘의 인터뷰에 관련하여 일일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데 밴드 해체 후에 형을 더 신경쓰는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여담이지만 해체 후 노엘은 인터뷰와 영화 Supersonic 등에서 리암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리암과 형제가 아니었다면 같이 밴드를 하지 않았겠지만, 형제이기 때문에 나쁘게 끝난 것", "우리가 형제란 건 밴드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의 고충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언급했다. 남들이라면 함부로 못할 말들을 형제지간이란 이유로 서로에게 막 퍼부어댔다고.[51]

7.2. 해체 관련 일화[편집]


밴드가 해체까지 이어진 결정적인 계기로 2009년 V 페스티벌 공연 취소사태 이후, 8월 파리 공연 바로 전에 있었던, 언론이 '놀라운 싸움(Wonderbrawl)'[52]이라 조롱하며 이름붙인 싸움이 꼽히는데, 확신할 수 없는 영국 찌라시의 보도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리암이 노엘에게 자두를 던졌고 리암이 자기 기타를 노엘에게 휘둘렀다. 노엘이 리암의 기타를 발로 밟아 부수자 리암이 기타 진열대로 달려가 노엘의 기타들을 역시 부쉈고 노엘은 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리암이 오아시스 해체 이후 이탈리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이야기가 맞다고 한다. 다른 내용의 이야기들은 모두 루머로 판명되었다. 리암이 말하길 "내 기타는 내 기타였어. 근데 형 기타는 오아시스 거였다고. 그 기타를 산 돈 일부는 내 돈이었던 거지. 그걸 부수면 안 되는 거였어!"

2011년 7월 6일 있었던 노엘 갤러거 솔로활동 발표 기자회견에서 노엘이 묘사한 그 날의 싸움을 요약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체 인터뷰 영상

파리에서 있었던 그 날 밤 동안에는, 리암은 꽤나 난폭해져 있었어. 꼭 WWE 레슬링 경기 같은 분위기에, 본인은 마초맨 랜디 새비지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건, 이렇게 온통 야단법석을 떠는 동안에 앤디는 옆에서 자기 신발이 몇 개인지나 세고 있었다는 거야, 한 마디도 없이. 리암은, "좆까 씨발" 하면서 탈의실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그러다가, 자두를 하나 집어와서는 훅 하고 던졌는데 그게 탈의실을 가로질러서 벽으로 처박혔어. 내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길 바랬는데, 왜냐하면 그랬다간 'Plum Throws Plum[53]

' 하는 식으로 훌륭한 헤드라인 하나가 뽑혀 나왔을 테니까.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가 방에서 나간 다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는데, 자기 탈의실 쪽으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자기 기타를 하나 들고 돌아와서는, 도끼라도 되는 양 휘둘러 대는거야. 처음엔 별 일 아닌 줄 알았던게 내가 뭘 어쨌든 간에 그건 정말로 쓸데없이 폭력적인 행동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걸로 내 얼굴 가죽을 거의 벗길 뻔했어. (기타가) 마침내 바닥에 떨어진 다음에는 내가 그 비극을 끝내버렸지(기타를 발로 밟은 것을 말하는 듯함). 거기 있던 밴드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우리 모두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 어떤- 누구도 한 마디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됐지, 나 나간다...' 그대로 차에 타서 거기 5분 동안 앉아 있다가, '씨발 안해' 그랬던 거지.


싸우다가 오아시스를 떠나겠다고 말한게 한두번이 아닌지라 비교적 낙관적인 팬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Liam Gallagher : the end of oasis

7.2.1. 형제 싸움 시즌 2[편집]


해체 이후 파리에서 있었던 싸움과 관련해 많은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마지막 공연의 진상과 그날의 싸움을 묘사하는 내용이 서로 미묘한 부분에서 어긋나는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언론을 통해 거짓말쟁이로 불러가며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노엘이 솔로활동 발표 기자회견 당시 밝혔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절대로 오아시스 활동이 질렸거나 솔로 욕심이 나서 탈퇴하게 된 것은 아니다.
  • 리암이 오아시스 투어 프로그램에 프리티 그린 광고를 넣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고, 나는 반대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 악화의 시발점이 됐다.
  • V 페스티벌 공연이 취소된 이유는 리암의 후두염 때문인데, 리암 본인은 후두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숙취일 수도 있을 것. (나는 별로 믿지를 못하겠다는 식으로 시니컬한 농담을 던지듯 말했다.).

2011년 7월 11일 이디스 보먼(Edith Bowman)이 진행하는 BBC Radio 1 프로그램에 출연한 리암은 노엘의 서술을 전면 부인한다.
  • 노엘이 숙취라고 짐작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며, V 페스티벌에서 나는 분명히 의사에게 후두염을 진단 받았었고, 의사가 공연에 나가면 안된다고 말했다.
  • 노엘과 나 사이에서는 프리티 그린과 관련된 어떤 논쟁이나 토론도 없었으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2011년 8월 12일 Japan Times에서 진행한 비디 아이 인터뷰에서 앤디 벨이 밝힌 개인적인 견해를 부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본문에 따르면 이 인터뷰는 노엘의 기자회견이 있은지 이틀 뒤에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관련 전체기사

"All that sh-t … there were three of us in that room, and I’m telling you it was nothing to do with Pretty Green. I’m not going to add more fuel to the fire."

위 인터뷰 본문에서 앤디는 노엘의 기자회견을 봤다고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싸움은 프리티 그린에 대한 것 때문이 아니다, 노엘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기자회견을 자세히 보지 않았거나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다. 노엘은 리암과의 파리에서 싸움이 프리티 그린 때문이라고 한 적은 없다.

이후 2011년 8월 19일 BBC 뉴스 엔터테인먼트 부분에서 리암이 노엘을 명예훼손으로 소송[54]을 제기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해당 기사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앞에서 서술한 리암의 주장 및 견해 차이와 같으며, 이미 변호사를 통해 공식 사과 요구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사실 BBC 뉴스 보도 이전에 이미 더 선이 발빠르게 단독 보도라며 기사를 올렸으나 기사 특유의 광역 어그로성 때문에 소설 취급을 받으며 가루가 되도록 까였었다. 당시 공개된 성명서에서 그는 "(노엘의 추측은) 이미 락앤롤 농담의 수준을 벗어났으며 내 프로 정신을 의심받게 만들었다"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그저 사과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이에 노엘은 8월 22일 있었던 팬들과의 라이브 웹챗 이벤트 중에서, 어떤 팬의 질문에 "분명히 말하자면 그가 후두염 진단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걸 증명할 진단서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며, "만약 그가 내 말 때문에 화가 나거나 했다면 사과하겠다"고 짧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2011년 11월 12일의 NME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로는 리암이 노엘이 짤막하게 사과한 사실(위의 라이브 웹챗 이벤트)을 알게 되어 소송을 취하한 상태로, 상황 자체는 일단락된 것으로 전해진다.


2011년 11월 21일, 데일리 미러 지를 통해 노엘이 리암이 제기했던 소송에 대해서 법원에 제출한 변론서가 공개되었다. 해당 기사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노엘은 09년도에 서로 싸울 당시의 갈등 상황과 94년부터 05년도까지 리암이 술을 마시고 공연을 망쳤던 일들, 그리고 09년에 파리에서 리암과 충돌했던 사건 등을 열거하며 자신의 발언이 정당하였으며, 따라서 해당 발언에 대해서 명예훼손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뉴스가 가디언 지 등 다른 언론에 인용 및 과장보도되면서 노엘이 리암에게 맞소송을 제기했다는 식의 기사가 퍼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관련 인터뷰 (해당 질문과 답변은 2:05부터)

7.2.2. 재결합 가능성?[편집]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2023년 기준으로 가까운 미래에 재결합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한다(...) 사실 해체 직후부터 지금까지 재결합에 대한 말은 늘 있었지만 제대로 진전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이 말이 나온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사실 멤버들 나이도 나이인지라 2023년 안에 재결합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55] 그러나 현재 각각 추구하는 음악스타일이 너무나 다르고[56] 이미 각자 성공적인 솔로 뮤지션 커리어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재결합을 할 이유가 크게 없다. 그나마 리암이 자기는 재결합에 긍정적이라는 언급을 할 때도 있지만 이것 또한 가끔일 뿐이고 태도가 자주 달라지고, 노엘은 해체 이후 지금까지 초지일관 재결합을 할 생각이 없다는 의견을 굳건히 하고 있다. 이제는 이 말이 질렸는지 아예 언급 자체를 거의 하지 않으며, 이야기가 나와도 답을 하는둥 마는 둥 하며 넘겨버린다. 무엇보다 재결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의 관계가 10년 넘게 개선되지 않고 사실상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지경이기 때문에 아마 재결합이 될 리가 만무하다.[57]

두 사람 모두 뼛속까지 맨시티의 팬이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맨시티 홈구장에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갤러거 형제가 마주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공간인데, 교묘하게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걸 피하는 듯하다. 축구를 볼 때도 서로 멀찍이 떨어져서 따로 축구를 관람한다. 맨체스터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도 같은 호텔에 있다고 하면 늦게 들어온 쪽이 알아서 호텔을 옮기는 듯. 노엘 갤러거는 '텔레비전에서만 종종 리암을 봤을 뿐 해체 이후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라고 말했다.

2011년 8월 17일 노엘 갤러거는 앱솔루트 라디오에서 진행한 Christian O’Connell의 아침 방송 인터뷰에서, 만약 자기 자신이 밴드를 탈퇴하지 않았다면,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20주년이 되는 2015년에 오아시스는 MG 20주년 기념 투어를 돌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다소 와전되어, 2015년에는 오아시스가 재결합을 할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인터뷰어: 해체한 지금 상황에 대해서 후회하는 건 없나요, 아니면 '이런, 우리가 이랬거나 저랬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거라도, 밴드가 그래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했을까요 아니면 어찌됐든 끝을 보았을 것 같나요?

 

NG: 뭐, 내가 그 때 그 차에 앉아서 성급한 결정을 내렸던 건 정말 후회스러워, 정말로,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 상황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돌아가서, 공연을 끝내고, 그 다음 걸 끝내고, 그 투어에는 공연 두 개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건 내가 했던 (것들 중에서 가장) 경솔한 결정이었어, 그리고 우린 아마 모든 걸 마무리 지은 다음에 몇 년간은 다른 일들을 좀 했겠지, 2015년에는 뭘 할 생각이었냐면, Morning Glory의 20주년이 다가오는 해니까 그때쯤 아마도 우린 다시 돌아왔을거야. 새 앨범을 만들었을거고 그 앨범 수록곡을 전부 연주했을 거고 그리고 가장 위대한 공연으로 남게 되었을 테고, 당신은 거기 갔을지도 모르는거지. 관련 전체 방송 스크립트


그런데 2011년 10월 20일, 롤링 스톤 지에서 리암이 재결합 가능성을 시사하는 떡밥강화 발언을 해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해당 기사 그의 말에 따르면 "2015년에, 만약 우리가 서로 똥고집 부리는 걸 그만둘 수 있다면, 우린 20주년을 기념해서 투어도 다닐 거고 앨범 수록곡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참고로 이 인터뷰는 스톤 로지즈의 15년만의 극적인 재결합 소식이 전해진 이후 나온 인터뷰이기에 더 뜻깊을 뻔했으나 사실 별 관련은 없다. 아래의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강조하는 것이지만, 리암은 이번 일은 스톤 로지즈와는 별 관련이 없으며 여기서 재결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에게 달린 문제라고 말한다.

리암은 이 인터뷰에서, 노엘의 공식적인 발언(위의 앱솔루트 라디오 인터뷰)이 자신으로 하여금 MG 20주년 투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계속 그런 말을 꺼내고 있는건 그 인간 뿐이지." "난 그를 고통 속에서 꺼내주고 싶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는 먼저 솔로 활동을 좀 해본 다음에 이제 아 내 동생 없이는 나는 잘 안 되겠구나 하는걸 깨달아야 할 것 같아. 알아서 스스로 깨닫겠지. 난 고려하고 있는 편이야 - 근데 난 그렇게까지 간절하지는 않아. 만약 (재결합이) 안 돼도, 신경 안써. 난 지금 비디 아이로도 충분히 행복하거든."

이후 하루 뒤인 21일 BBC Radio 4의 Profile에서도 MG 20주년 투어에 대한 리암의 긍정적인 답변이 이어졌다. 해당 인터뷰 그러나 인터뷰어가 재차 재결합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니며, 노엘이 원한다면 재결합할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엘과는 애초에 이 문제를 상의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 몇년간 서로 이야기조차 해본 적 없다고. 이 날 빌보드 지와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재결합에 관련된 질문에 "올해는 아님." 이라고 짧게 일축한 바 있다.

2011년 10월 25일 노엘은 BBC Radio 1 Newsbeat와의 인터뷰에서 MG 20주년 투어와 재결합 가능성을 다시 한번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 해당 기사 그의 말을 옮기자면, "나는 분명 이유가 있어서 밴드를 나온거고,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어." 라고 한다.

2012년의 오아시스 재결합 관련 질문좀 그만해 기자놈들아 노엘 인터뷰를 보아 노엘은 아직도 리암의 소송 건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듯. 링크 일단은 서로의 관계 개선이 더 중요해보인다.

2012년 9월 10일 노엘은 Nation radio의 Chris Blumer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설령 모든 세상의 굶주린 아이들이 이 일에 달려있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재결합 가능성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일부 팬들에게도 못을 박았다. 해당 기사 그리고 리암은 노엘의 굶주린 애들 운운한 구절을 그대로 트위터에 올렸다.

2013년 6월 26일 리암이 "뮤즈(음악의 신)가 원한다면 그렇게 되겠지"라고 글래스톤베리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발언했다. 또한 리암은 자신을 제외한 비디아이(前 오아시스 멤버들)멤버들과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만 리암 본인과 노엘은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Definitely Maybe 앨범의 20주년이 되는 2014년에 폴 웰러와 해피 먼데이즈를 게스트로 맞이하여 오아시스 재결성 공연을 열겠다는 계획이 나왔지만 노엘은 거부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340억원의 제의였지만 노엘 갤러거의 관계자에 따르면 오아시스 재결성은 완전히 가망이 없고, 노엘은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1월 25일, 노엘이 드디어 재결합 가능성을 예기하는 떡밥을 던졌다! 해당 기사

2015년 5월 12일(한국시간 기준), 리암 갤러거가 황색 언론 더 선이 보도한 "노엘 갤러거를 제외한, 원년 멤버인 본헤드, 귁시, 토니 맥캐롤과 재결합을 하겠다는 루머에 대해 부정하는 보도를 NME 매거진을 통해서 밝혔다.링크 이때까지만 해도 오아시스 재결합이든 솔로 활동이든 리암을 무대에서 볼 일은 없을 듯 보였으나...

2016년 7월초 리암 갤러거가 트위터링크에 짤막하게나마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내용에 따르면 자신은 오아시스의 결합을 바라고 있으나 노엘 갤러거측이 반대하는 상황 이라고. 노엘 갤러거 자신도 새 앨범을 거의 완성했다고 하는것을 보아 오아시스 재결합은 물건너 간걸로 보인다.

2016년 8월 초 리암 갤러거의 인터뷰링크에 따르면 자신은 오아시스를 할 생각이 있지만, 노엘이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재결합에 관한 노엘과 리암의 입장을 정리해보자면, 리암은 노엘이 재결합 하자고 하면 지금 당장이든, 먼 미래이든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같이 활동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다만 노엘이 하기 싫다는데 무릎꿇고 사정하면서까지 재결합을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노엘이 오아시스 활동을 하고 싶다면 자신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노엘은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듯 하다. 그래도 오아시스로 다시 활동하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일 것이라고 하면서 재결합의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고 언젠가는 리암이랑 같이 활동할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고 만약 재결합을 한다고 하면 미래의 일일 것이고 현재는 아니라고 인터뷰마다 못 박고 있다.

12월 7일(우리 시간 12월 8일) 진행된 BBC Radio2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오아시스의 해체에 대해 언급하였다.

"오아시스를 떠나기로 결정한 그날은 정말 악몽 같았지. 그 결정이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은 예상했어.

우리의 재결합에 대한 기사가 아직도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

후회하진 않지만, 오아시스를 계속 했다면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투어를 진행하고 돈도 훨씬 더 많이 벌었겠지.

난 정말 솔로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구.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오아시스가 끝난 건 정말 아쉬워.

물론 우린 각자의 길을 가는데 동의했고, 언젠가 다시 뭉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너무 먼 길을 와 버린 것 같아.

다시 뭉치긴 힘들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크게 후회하진 않아."


또 리암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과 20년 간 일하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 많진 않을 거라 생각해.

20년 동안 힘든 일이 많았지만 결국 다 괜찮아 지겠지. 확신해."


한편, 노엘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리암을 볼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결국 재결합하기엔 노엘도 리암도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에 노엘의 이 말로 오아시스의 재결합은 더 어려워진 셈이었다. 이로 인해 팬들과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워 할 뿐이었다.

참고로 2017년 6월 인터뷰에 의하면 리암은 노엘의 핸드폰 번호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도 리암이 트위터로 노엘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해 주기도 하는 등 예전에 비해서는 서로 많이 누그러진 줄 알았는데

2018년 6월 10일 트위터로

If you want 59k people to get wet do acquiesce at Finsbury X

(59,000명이 지리는 걸 보고 싶으면 핀스버리에서 ‘Acquiesce'[58]

불러줘요)라는 팬의 글에

Can't do that song without rkid

(우리 애 [59]

없인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거야)

라고 답하며 잘 살고있던 팬들을 또 울렸다.

2018년 7월, 리암은 트위터로 재결합 의향을 보였고 노엘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 이런 일도 연례행사 수준...


게다가 2019년 여름에는 둘 사이의 사이가 다시 극렬히 악화되어 쌍욕과 가족 욕 등을 주고 받기도 했다.
사건의 경위를 요약해보자면
  • 19년 7월 초, 노엘의 전 부인인 사라가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으로 리암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 이를 알게 된 리암은 노엘의 딸인 아나이스에게 '너네 양엄마 밤길 조심하라'는 식의 문자를 보냈다.
  • 그리고 이를 알게 된 노엘이 트위터로 "이제는 네 조카한테 지랄이냐, 조만간에 보자."는 식으로 응대하면서 고소미 시즌 2가 될 조짐이 보이는 기세였다.

한국 시간으로 2020년 3월 26일 오후 3시경, 리암이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업로드했다.

Wanna clear a few things up Oasis gig for NHS charity as in all money raised goes to NHS not to me will happen with or without Noel Gallagher it may not be the same but trust me it'll still blow you knickers off

As you were

LG x

C'mon Noel Gallagher

오아시스의 건강보험공단 자선공연에 대해 몇 가지 확실히 할게. 수익금은 내가 먹는 게 아니라 전액 건강보험공단에 기부될 거고, 노엘 갤러거가 있든지 없든지 공연은 할 거야. 물론 옛날만큼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지리는 공연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

쉬어(As you were)

리암 갤러거

노엘 갤러거씨, 해보자


2019년 6월 7일에 리암의 다큐맨터리가 개봉했다. 제목은 'As It Was'. 그러나 노엘이 영화에 오아시스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2021년 새해가 되자 웬일로 리암이 노엘에게 인사를 보냈다.

HNY Noel love you long time 2021 is our year c’mon you know LG x 트위터 링크


2021년 다큐 영화 Oasis knebworth 1996을 형제가 공동제작하며 둘이 만났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재결합을 원하던 많은 팬들은 다시 한 번 기대에 부풀었으나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어 재결합은 또다시 물건너 갔다.

2022년 10월, 리암의 넵워스 솔로공연 실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개봉일은 11월 17일. 그러나 노엘이 영 화에 오아시스 음악을 쓰지 못하게 차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리암은 트위터에 '곡을 쓰지 못하게 할 순 있어도 우리의 기억을 지우진 못한다.'라며 불만을 표했고, 노엘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놈’이라며 받아쳤다


2023년 1월 19일, 리암이 여러모로 엄청난 트윗을 올렸다.

Just had RKID on the phone begging for forgiveness bless him wants to meet up what Dya reckon meet up or fuck him off

방금 노엘하고 전화했는데, 나보고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하네. 어떻게 생각해. 만날까 아니면 꺼지라고 할까. #

해마다 한 번쯤은 재결합 떡밥을 던지며 광역 어그로를 시전하는 리암이기에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팬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리암이 이 트윗을 올리기 며칠 전, 노엘은 사라와 이혼하였는데, 기사에 따르면 이혼하면서 물어낸 위자료가 노엘 본인 자산의 절반 가량 된다고. 이러한 이유로 일부 팬들은 노엘이 돈 때문에라도 리암을 다시 만나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또한 며칠 전 노엘이 BBC 라디오에서 재결합 의사와 관련된 질문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지는 않겠다.(Never say never.)” 라고 대답하는 등, 해체 후 초지일관 재결합에 부정적이었던 태도였던 노엘을 생각하면 꽤나 긍정적인 말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팬들은 다시 엄청나게 기대를 품고 있다.그 와중 블러의 그레이엄 콕슨은 만나라는 리트윗을 올렸다.

그러나 2023년 6월 2일 노엘의 정규 4집이 발매되었기 때문에 재결합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2023년 6월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미국 투어 중 한 인터뷰에서 또다시 재결합 루머 질문이 나왔는데 노엘은 "리암은 지난 10년동안 항상 트위터로 재결합 한다고 떡밥을 막 뿌리지만 실제로는 리암이 재결합을 원하지 않고 있을테니 나한테 전화해서 제대로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트위터는 그만하고 나한테 전화라도 한 번 하면 나도 (재결합이)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말할 텐데 연락을 안 한다." 라는 취지의 대답을 했다. #

7.3. 축구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편집]



훌리건 출신 노엘과 리암 갤러거는 둘 다 엄청난 축구광이며 어릴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열렬한 팬이다. 갤러거 형제는 모두 뼛속까지 맨시티의 팬이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시즌 중에 자주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보고있다.[60] 이들이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 된 이유는 단순히 상대적으로 맨유 팬이 더 많았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응원하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별난 축구 사랑에 대해서는 이쪽으로.

실제로 갤러거 형제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홍보 담당 보드진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진정으로 성공한 축덕.[61] 게다가 2005년 맨시티 홈구장인 에티하드 스타디움 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62] 리암 역시 솔로 데뷔 이후 2022년 에티하드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내한공연 왔을때 어느 기자가 박지성에 대해서 아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은 맨시티 팬이라 그런 선수 모른다고 했다.

참고로 박지성도 오아시스라는 밴드를 잘 몰랐던 듯하다. 그래서 박지성이 영국 모 토크쇼에서 비틀즈와 오아시스 중에 어느 쪽이 좋냐는 질문을 받자 오아시스가 어떤 밴드인지 되물어 사회자가 "오아시스는 맨체스터 출신 밴드고 비틀즈는 리버풀 출신 밴드"라는 말을 듣자 오아시스를 택한 적이 있었다.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박지성이 농락당한 듯[63]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리오넬 메시"오아시스의 재결합을 위해 월드컵을 우승하겠다"라는 말을 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리오넬 메시에게 오아시스의 음악을 추천한 사람은 다름아닌 카를로스 테베즈. 2010년 영국 총선 때 노엘은 "난 투표용지에 Tevez is God(테베즈는 신이다)라고 쓰고 투표함에 던질거야. 난 테베즈를 뽑을거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아들 이름을 테베즈로 짓겠다고 하는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보다는 메시의 맨체스터 시티 이적이 오아시스 재결합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메시의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잉글랜드의 숙적 독일에게 4:0으로 쳐발리며 광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해프닝의 원인이 된 메시의 발언이 실린 매체는 유명한 영국 찌라시 더 선. 진위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찌라시 인걸로 밝혀졌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오아시스의 열렬한 팬이다. 인터뷰에서 여러번 매우 좋아한다고 언급했지만 유나이티드의 선수라 갤러거즈는 별 반응이 없다. 오아시스가 해체하기 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후 한 인터뷰에서는 맨체스터에서 살던 시절 길거리에서 몇번 오아시스 멤버들을 봤지만 말은 못걸었고 카카도 자기랑 취향이 비슷하니 카카와 함께 선수들을 설득해서 돈을 모으면 자기들만을 위한 오아시스 콘서트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맨시티 사랑으로 인해 맨시티가 트레블을 달성하면 다시 오아시스가 재결합 한다는 우스겟소리도 자주 나온다.

갤러거 형제가 굉장한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기 때문에 오아시스의 대표곡인 Wonderwall 또한 맨체스터 시티의 응원가로 널리 불리고 있다.

20-21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둘 다 직관했고 맨시티는 경기를 졌다. 2년 뒤에 맨시티가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뒀을 때 노엘은 샌디에이고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세르히오 아구에로가 맨시티를 떠날 때 두 사람 모두 영상편지를 보냈다.


8. 국내의 인식[편집]


파일:attachment/oasis_kyonghyang.jpg

뮤즈, 그린 데이, 린킨 파크와 함께 록 입문자들이 많이 듣는 밴드로 유명하다.

위의 사진은 96년 경향신문에 보도된 오아시스. 당시의 브릿팝 열풍은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주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 PC 통신의 락음악 동호회를 중심으로 오아시스는 큰 인기를 모으며 팬클럽이 결성되고 이들에 대한 활발한 정보가 오고 갔다. 록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음반 매장이 아닌, 서울의 웬만한 대형 레코드점에는 국내에 정규발매되지 않거나 정식 수입되지 않은 오아시스의 싱글은 물론, 부틀렉까지 구비해 놓았을 만큼 판매량도 인기도 보장된 밴드였다. 2집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는 당시 유행하던 팝음악 모음집 MAX 첫 번째 시리즈[64]에 수록되는 등 일반 팝음악 팬에게도 통할 수 있는 흔치 않은 밴드였다.

당시 한국 팝 시장은 빌보드 미국 차트에 굉장히 의존적이라(음악 잡지나 프로그램들도 유럽 차트는 소개 안해도 빌보드 싱글 차트와 앨범 차트는 100위, 200위까지 전부 수록했다) 영국, 유럽 쪽 아티스트와 브리티시 락 밴드의 인기는 매니아 층에 비해 대중적인 폭을 가지지 못했는데 오아시스는 2집이 빌보드 4위, 3집이 빌보드 앨범 차트 2위(당시 1위가 I'll Be missing you로 신드롬을 만들던 퍼프 대디)에 랭킹되면서 범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오아시스가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선 3집부터는 한국 소니 뮤직에서 싱글이 정식 발매되어 5천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금방 물량이 떨어져서 매장마다 가격을 올려 받거나, 개별적으로 영국에서 수입해와서 비싼 가격으로 싱글을 구해야 했다. 인기에 비해서 내한 공연이 무척 늦게 성사된 편이지만, 이렇게 꾸준히 유지해온 팬덤의 에너지가 극대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내한 공연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국내 음악 시장에서 오아시스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해체 이후에도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노엘의 성공적인 솔로 활동과 내한 공연 덕분에 10대의 젊은 팬층이 유입되는 몇 안되는 90년대 락 밴드이다. 락음악 팬들도 노엘 갤러거가 어린 나이의 신규팬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점을 굉장히 중시 여기고 있다. 2016년부터 솔로 활동을 시작한 리암도 성공가도를 달리는 중이라[65] 양측에서 새로 유입되는 10대 팬들로 오아시스의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8.1. 내한 관련[편집]


2006년 내한공연이 성사됐다. 이로서 오아시스의 성공적 데뷔 이후 10여년 간 오아시스를 짝사랑 해오던 한국 팬들은 드디어 이들을 직접 마주하게 된다. 예매 3주만에 5,500여 석이 매진되고 기획사 측에서 특별히 100석을 추가시켰다. 당시 관중들의 호응이 대단했으며, 타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넥타이 부대[66]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유명한 일화로 그 넥타이부대원 중 한 명이 대형 스피커 위에 올라가 괴이한 춤을 추며 열광했는데 리암이 공연 도중 관계자에게 '저 남자좀 내려가게 해! 웃겨서 노래를 못 하겠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며, 공연 도중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끝난 후 무대 뒤에서 노엘은 '내가 해왔던 공연 중 거의 최고 수준'이라고, 리암은 '관객들이 정말 무섭더라'고 떠들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이후 싱가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리암은 '관객이 미친 듯이 광분한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일본에 비해 음반 판매량도 적고, 유독 국내에선 락 음악이 마이너한 장르였기 때문에 오아시스에게 한국은 거의 인식 밖의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을 통해 그 존재감을 밴드에 알렸으며, 이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의 전화 인터뷰, 2009년 두 차례의 내한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에게 보낸 한국의 오랜 짝사랑이 작은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2009년 4월 1일, 오아시스는 'Dig Out Your Soul' 세계투어의 일환으로 이전보다 큰 올림픽 공원 체조공연장에서 두 번째 내한공연을 치렀다. 이 때는 10,000명 이상의 관객이 모였다. 오아시스는 투어 초기에 짜여진 셋리스트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 투어에서는 'Live Forever'가 빠져있어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 공연관계자가 팬들이 이 곡을 듣길 원한다는 간곡한 바람을 전했고, 또 공연에 앞서 호텔에서 Live Forever를 불러달라고 한 팬의 요청을 기억하고 있던 노엘이 특별히 어쿠스틱 연주와 함께 Live Forever를 불렀다.

이 때 오아시스는 대기실에 그들이 가져온 맨체스터 시티 깃발을 한쪽 벽면에 걸어줄 것을 요청했다. 역시 축덕 기획사는 무대연출팀까지 동원해서 깃발을 걸었다고.

끝난 후 열렬한 반응에 신이 난 그들은 7집 투어 당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노엘이 포함된) 술파티를 벌였다. 시설 이용 시간이 끝나가는데도 일어설 생각을 않는 그들에게 쩔쩔매던 관계자들이 대기실을 치워야 하니 비켜달라고 말하자, 밴드는 '이 의자테이블만 빼고 마음대로 치워도 돼'라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아랑곳 않은 채 날이 바뀌도록 술을 마셨다고. 특히 노엘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했는데, 09년 투어 중 노엘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술파티는 새벽 세시가 되어서야 끝났다고 한다.

2009년 내한 전후는 노엘과 리암이 각각 블로깅트윗을 하고 있던데다, 국내 오아시스 팬덤이 온라인상에서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던 시기라 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시간순으로 정렬하면 이렇다.

  • 리암, 공연 전날 도착 직후 트위터에서 '한국, 우리가 왔다.'
  • 호텔로 이동해 갈비를 1인당 평균 약 6인분씩 먹어치움.
  • 리암, 트위터에서 '나 한국에서 설사터졌어!' 이후 NME에서 리암 최고의 트윗으로 뽑았다.
  • 호텔에서 매너있게 팬들과 인사를 나누던 리암이 아주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곧바로 악수를 해보니 손에 물기가 전혀 없고 따뜻하더라는 이야기다.
  • 7집 활동 개시 직전 토론토 공연에서 노엘이 공연 도중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일 때문에 공연 보안이 강화된 후로 리암은 단 한 번도 무대 아래로 내려온 적이 없었는데, 모든 곡을 끝내고 밴드가 긴 후주를 연주할 때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와 탬버린을 팬에게 직접 건네고 퇴장. 이후 공연에서는 재미라도 들렸는지 시도때도 없이 뛰어내렸다 여담으로 한참 옛 인터뷰에서 노엘은 '리암이 객석으로 뛰어내리는 건 누군갈 때릴 때 뿐이다'라 말한 바 있었다. 늘 그렇듯 과장과 농이 섞인 거지만.[67]
  • 리암, 트위터에서 '어제 한국 서울 공연에서의 모두에게 그저 감사를 전하고 싶어. 90년대를 떠올리게 했어, 7월에 꼭 다시 만나자...(원문: I just wanna thank everybody that was at last nights gig in Seoul Korea. It reminded me of the 90's, we must do it all again in July... LG)' 리암에게서 이런 식의 공연후기는 확실히 이례적이다. 리암이 말하는 90년대란 오아시스 최고의 전성기를 가리킨다.
  • 노엘, 블로그에서 '그(한국) 공연은 그저 놀라웠다. 근래의 공연 중 가장 뛰어난 공연이었다. 누가 이럴 줄 예상이나 했겠는가? 적어도 내겐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한국 애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한국 관객들을 '애들(kids)' 등으로 칭하고, 공연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얼굴로 객석을 바라보는 등 한국 관객을 꽤 귀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관객 연령층이 비교적 낮기도 하다.
  • 약 1개월 후, 기타리스트 겜 아처는 남미에서 가진 공연 전 TV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연이 뭐였냐는 질문에 '내 전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는 언급을 덧붙여 서울에서의 09년 공연을 꼽았다.
  • 약 3개월 후 영국 리코 아레나에서 공연하던 오아시스는 한국의 한 소녀팬이 태극기와 내한당시 제작했던 수건(그들의 앨범 제목이자 투어 제목인 Dig Out Your Soul을 패러디한 Dig Out Your Seoul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을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엘은 '너 공연 보러 한국에서 이 먼 데까지 온 거야? 좋은 일이야' 하고 말을 건네는 등 반가움을 표시했다. 리암은 '우리 다음주에 한국 간당!' 하고 방정을 떨기도. 물론 모두 마이크에 대고. 실제로 그 당시에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을 앞두고 있었는데 1주일 뒤가 아니라 2주일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리암이 날짜를 착각해서 1주일 뒤라고 얘기한 듯 하다.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고 해당 링크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3분 38초부터 들어보자.

2009년 영국 코벤트리 리코 아레나 공연 : The Masterplan
노엘 - "You come all the way from Korea! Good For you.(한국에서 먼길 왔구나?!! 좋은 일이야)"
리암 - "We're going there next week.....We're going there next week.(우리는 한국에 다음 주에 가..x2)"

2009년 서울 올림픽공원 공연 : Live Forever
2009년 서울 올림픽공원 공연 : Don't Look Back in Anger

2008~9년 투어를 함께 뛰는 드러머 크리스 섀록[68]의 드럼 테크닉도 끝내줬다는 후문1, 스탠딩 관람석의 점핑을 견뎌내지 못하고 여러명이 실려 나갔다는 후문2
http://www.youtube.com/watch?v=eg_dKNTLmOg

'7월에 또 보자'는 리암의 약속은 2009년 7월 옐로우나인이 준비하는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서, 오아시스가 헤드라이너로 공연하게 되면서 지켜졌다. 이들은 페스티벌 3일 째에 출연[69]했다. 허나 아쉬운 점은 팬들 대부분이 페스티벌 1일째부터 이미 지산에서 3박 4일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기에 공연 전후의 뒷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 리암, 트위터에서 '일본이랑 한국아, 이번주에 너흴 만날 일을 목을 빼고 기대하고 있어!!'
  • 리암, 도착 직후 트위터에서 '한국아, 우리가 왔다 지난 번 거 복붙...'
  • 노엘, 공연 직전 인터뷰 중 한국 관객이 어떻냐는 말에 매우 짜증을 내며 '일본이랑 너네 나란 자꾸 왜 그런거 물어봄? 어느 나라건 오아시스 팬들은 똑같아 그딴거 자꾸 물어보지 마' 인터뷰어와 들떠 있는 한국팬들을 쫄아들게 만든 살떨리는 반응이었다.
  • 지산 측은 오아시스 공연에 앞서 무대 앞에 아티스트가 볼 수 있도록 'Thank you = Kam Sa Ham Ni Da'라고 써붙여 두었다. 리암은 등장하자마자 그것을 서툰 발음으로 따라했으며 후에도 몇 차례고 '캄싸함니다'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70]
  • 당시 정규 리스트에 포함된 'Live Forever'[71]를 부르며, 리암은 관객들의 선창을 유도하기도 했다. 지난 내한 당시 관객들의 떼창이 마음에 든 듯. 다소 뜬금없어서 원활하게 성사되진 못했다고 한다.
  • 직전 일본 공연에서 노엘은 'Whatever'를 불렀고, 한국 팬들은 역시 이를 불러줄 것을 엄청나게 어필했으나 가볍게 씹혔다. 왓에버는 일본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며, 더불어 노엘과 오아시스 멤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곡이다.
  •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은 09년이 첫 개최였기 때문에 안전사고를 우려해 무대와 객석 간의 이동이 불가능했다. 리암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가까스로 객석에 내려와 자신의 브랜드 '프리티 그린'의 모자, 탬버린을 팬에게 전했다.
  • 리암, 공연이 끝난 지 7분 만에 트위터에서 '대한민국, 그냥 너네가 존나 끝내준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대한민국 정말 사랑하고, 내 취향의 사람들인거 같아...영원히 살기를, 리암 갤러거'(원문: 'Korea, just wanna say you were absolutely fuckin amazing, I love your country, my kinda people... Live forever LG'. 끝의 Live forever는 이 당시 리암이 곧잘 붙이던 인사말.)
  • 노엘, 블로그에 '공연(한국 공연)은 굉장했다. 걔넨 박자에 딱딱 맞춰 박수 따윌 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장관이더군.'

8.2. Butterfly 표절 시비?[편집]


흔히 2009년 8월경 빅뱅의 멤버 G-DRAGON과의 표절시비가 붙었다고 알려져 있다. G-Dragon이 공개한 30초짜리 티저곡 3곡중 'Butterfly'라는 곡이 'She's Eletric'과 흡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아시스는 자신들이(노엘이) 좋아하는 밴드들의 스타일[72] 과 음악을 많이 따라한 밴드라 별로 의미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표절시비에 휘말린 적 있을 때[73] '그래 우리 베꼈다 어쩔래' 신공으로 상황을 타파한 전력이 있으며, 옛 곡의 오마주를 긍정하는 밴드이다. 또한 노엘은 오히려 '누군가 우리 곡을 베껴도 아무 상관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8.3. 짤방[편집]


국내에서는 하단의 짤방으로도 유명하다. 인터뷰 DVD Lock The Box의 캡쳐이다.

파일:attachment/오아시스(밴드)/lock_the_box.jpg

사실 이 짤방의 정체는 인터뷰 장면 두 개를 짜깁기해 놓은 것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대로 퍼졌다.

파일:attachment/5_8.jpg

전체 내용은 이렇다. 인터뷰 끝자락인 35분 18초경에 나온다.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마지막 짤방의 원문은 "You bunch of cunts. So buy fucking T-shirt and poster on the way out you fucker." 영국 영어를 좀 아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저 짤방의 욕설 번역은 매우 적절한 편. 웃길려고 욕 집어넣은 게 아니다!

이외 자세한 정보는 오아시스(밴드)/짤방을 참조.

이후 '엿같은 티셔츠'는 '동그란 시디'와 함께 노엘 갤러거의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노엘의 솔로 밴드인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의 2015년 내한공연 때, 매점의 티셔츠 이름이 '뭣-같은 티-셔쓰'에 음반은 '정말 동그란 CD'였다. #


9. 디스코그래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오아시스(밴드)/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여담[편집]


  • 오아시스의 최고의 히트곡은 보통 Live Forever, Don't Look Back In Anger, Wonderwall, Champagne Supernova 이라고들 하는데, 두 형제가 솔로로 전향한 지금 Live Forever은 리암 공연의 하이라이트. Don't Look Back In Anger은 노엘 공연의 하이라이트, Wonderwall과 Champagne Supernova는 둘 다 부른다. 노엘은 Live Forever을 부르지 않고 리암 역시 Don't Look Back In Anger을 부르지 않는다.[74] 노엘이 Live Forever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 노래가 더이상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되어서라고 한다. 하지만 NGHFB의 3집 Council Skies를 공개하며 보너스 트랙에 Live Forever 라이브가 실리고 나서는 노엘의 공연마다 Live Forever가 셋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 형제 둘의 보컬이 아주 달라서 같은 곡의 리암 버전과 노엘 버전을 찾아보는 맛이 쏠쏠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리암이 불렀던 노랠 노엘이 부른 적은 많지만 노엘이 부른 곡을 리암이 부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 노엘이야 자기가 쓴 곡이니 자기가 불러도 이상할 게 없지만, 리암은 자신이 쓴 곡도, 자신이 보컬은 맡았던 것도 아니기에 굳이 부를 필요성을 못 느끼는 모양.

  • 해체 이후 두 형제가 솔로 활동을 하던 중, 2020년 4월 노엘 갤러거가 오아시스 시절 사운드 체크 용으로 작곡한 데모 곡 "Don't Stop... (Demo)"을 공개하였다.[75] 정말 오랜만에 오아시스 이름으로 공개하는 곡인지라 많은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Don't Stop..


  • 조지 해리슨은 노엘의 능력은 훌륭하며, 노엘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왜 리암이 있는지 모르겠고, 리암은 그냥 싸움만 하는 놈팽이며 오아시스 자체도 형편 없는 밴드라 30년 뒤면 잊힐거라고 막말을 한 적이 있다. 이에 크게 화난 리암 갤러거가 방송에 출연해 조지를 향해 젖꼭지같은 놈이라며 마구 디스했다. 우상에게 샤라웃 당한걸로도 모자라서 디스전까지 뜨는 패기 나중에 이 점에 대해 조지와 리암이 서로에게 사과하면서 마무리 되었다는 후문.

  • 런던의 지역 일간지인 이브닝 스탠더드가 2019년 매긴 최고의 영국 20대 록밴드 순위에서 무려 7위에 올랐다. 이는 블랙 사바스, , 더 클래시 등 유명 록 밴드들보다도 높은 순위이며 특히 활동 기간을 90년대로만 한정할 시 라디오헤드에 이은 2위다. 스탠더드지는 오아시스를 "가장 부르기 쉬운 노래들을 만들었으며, 90년대의 상징적인 록밴드"라고 칭찬했다. 이브닝 스탠더드가 오아시스의 정치성향[76]과 정 반대인 보수, 중산층, 런던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 '오아시스(オアシス)'라고 쓰고 읽는 경우가 많지만 Oasis의 영어식 발음은 (əʊ|eɪsɪs), 한국어로는 [오우에이시스]에 가깝다. 현지에서 혹은 외국인에게 "오아시스"라고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경우가 많다.

  • 고질적인 라우드니스 워 논란에 시달리는 밴드다. 노엘이나 리암 모두 마스터링 과정에서 음압을 최대한 높이는 걸 좋아하는지 오아시스 및 형제의 솔로 앨범는 무자비한 라우드니스 워 몸살을 앓고 있다는 얘기가 많다. 심지어 리마스터링판은 안 그래도 높은 음압이 더 높아져서 팬들마저 불평하기까지했다.

  • 영국의 록밴드 The 1975의 멤버 매튜 힐리가 2022년 5월 한 인터뷰에서 오아시스 해체에 관해 갤러거 형제에게 일침을 가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밴드가 자기 형제한테 성질난다고 밴드를 안 하는 게 말이 돼?"라며 재결합을 촉구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에 대해 노엘은 "놀라울 만큼 멍청한 놈(...). 걔는 재결합이 뭔지 상상도 못할걸? 걔는 지 밴드가 얼마나 구린지 좀 알고 해체 좀 해봐야 돼. 만약 오아시스가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않은 채로 해체했다면 나도 좀 달랐겠지. 하지만 오아시스는 이미 모든 걸 다 이뤘다고." 라며 독설을 날렸고, 리암은 "낭비해도 우리 시간이지, 걔가 시간의 주인이라도 돼?"라고 했다. 아무리 싸워도 형제는 형제디

11. 관련항목[편집]



[1] 얼터너티브 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2] 그 당시 인구 기준으로 약 285만명[3] 평론가들이 실험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이고 복고의 음악을 추구하는 밴드들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아시스 초기 앨범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맞다.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건 '음악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가'인 것. 오아시스의 과도기 시절 그래피 그니까 3,4,5집이 높게 평가 받지 못하는 건 오아시스가 추구하는 음악의 특성보단 초기 걸작들에 비해 떨어지는 결과물, 자기 복제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나중에는 다시 좋아졌지만[4] 앨범 판매량은 너바나가 7,500만장, 라디오헤드가 3,000만장으로 추정된다.[5] The Ya Ya’s라는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귁시가 잠시 신경쇠약으로 밴드에서 나오고 영입된 멤버이다. Wonderwall 뮤비에서 나오는 베이시스트가 바로 이 사람. 하지만 미국에서 투어 중 영국에 있던 여자친구를 그리워해 밴드를 관두었다. 그가 탈퇴한 날에 생방 스케줄이 있었는데, 본헤드가 베이스를 대신 잡았다.# [6] 앨런 화이트가 탈퇴한 이후부터 7집 음반 녹음까지 활동한 멤버로, 링고 스타의 아들이다. 정식으로 오아시스의 합류를 권유받았지만 거부하였고, 현재는 더 후에서 활동하고 있다.[7] 잭 스타키가 나가고 오아시스가 7집 투어를 시작하면서 함께 활동한 멤버로 The La’s의 드러머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오아시스 해체 이후 비디 아이의 정식 멤버로 활동하다 비디아이 해체 이후 뒤로 2017년부터 겜 아처와 함께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드의 세션 멤버로 합류했다. 유명한 일화로는 수프 먹으러 잠시 나갔다 돌아왔는데 오아시스가 없어져 있었다고...[8] 본래 쿨라 셰이커의 멤버. 라이브 공연시 뒤 쪽에 있는 머리와 수염이 긴 예수 닮은 사람이 달링턴이다.[9] 데뷔 초반 노엘은 단순 송메이킹 담당&기타리스트이자 공연 중간중간 설 푸는 이야기 꾼 수준이었고 노래는 그닥 잘하는 편이 아니였다. 노엘이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건 2집부터다. 실제로 2집 수록곡 중 하나인 wonderwall의 경우 앨범에선 리암이 불렀으나 노엘도 공연에서 자주 불렀다.[10]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헤드 라이너, 얼스 코트 및 메인 로드 공연 전 좌석 매진, 넵워스 공연 양일 간 25만 명 이상의 관객 운집 등의 기록을 세우는 등 그야말로 최전성기였던 시절의 라인업이다.[11] 정확히 말하자면 본헤드는 4집 제작 시기에 노엘이 내린 금주령을 어긴 것이 계기가 되었고, 귁시는 신경쇠약을 이유로 스스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하지만 결국 본헤드가 나갈 무렵에 같이 나갔다.[12] 이후 토니는 2010년 10월에 자신의 오아시스 시절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Oasis: The Truth라는 자서전을 낸다.[13] 사실상 어두운 건 포스트 브릿팝이라 할 수 있다.[14] 메인 송라이터인 노엘 갤러거 뿐만 아니라 보컬 리암 갤러거도 이러하다.[15] 때문에 초보 기타연주자들이 오아시스 곡을 많이 연주한다.[16] 다만 초기에 폴 '본헤드' 아서스는 노엘에게 바레코드만 치라고 지시를 받았다고 하며, 실제로 본헤드와 귁시가 있었던 시절에 본헤드가 기타를 치는 걸 보면 전부 바레코드로 연주한다. 물론 이것은 본헤드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기타 실력을 고려한 결정이었고(노엘이 기타 솔로를 전부 혼자 소화해야하기 때문) 나중에 겜 아처가 영입된 후로는 연주 방식이 달라졌다.[17] songbird, Wonderwall 등[18]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사장인 앨런 맥기는 Definitely Maybe를 펑크락 앨범으로 분류했다.[19] 노엘의 솔로 음악들이 오아시스의 음악과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팬들은 노엘 솔로 음악 중 몇몇 곡은 리암이 불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20] 사실 오아시스 초창기 시절의 라이브를 보면 노엘은 노래를 수준급으로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21] 노엘이 마약을 끊은 직후의 앨범인데, 아무래도 그는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마약과 함께 보냈기에 그 후유증이 엄청났을 것이다. 한 때 마약을 끊은 이후로 우울증과 공황 장애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4집의 곡들 대부분은 그의 어두운 내면과 혼란스러움 등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Gas Panic!, Where did it all go wrong?, Roll it over 등.[22] 평론가들은 일반 대중과는 다른 시선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23] 컴필레이션 앨범인 The Masterplan이 3집보다 퀄리티가 더 좋아서 이 앨범이 3집이 됐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은 편이다[24] 물론 기본적으로 듣기 편한 기타 팝 락이 기본이지만 틀 내에서는 더욱 깔끔한 사운드를 지향하고 여러 영향을 받아들였다. 비디 아이는 사실상 몇십년 전의 정통 로큰롤음악을 구사했다.[25] 풀네임은 레논 프란시스 갤러거. 이름 한번 엄청나다.[26] 믹 재거만이 아니라 조지 해리슨도 깠다. 여담이지만 이때 노엘도 같이 있었는데 말리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기만 했다.[27] 물론 U2의 음악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며, 노엘과 보노는 꽤 가깝게 지내는 사이다. 심지어 2015년 우리나라에서 피키캐스트가 주관한 인터뷰에서 에릭남이 노래방 가면 누구노래 부를꺼냐고 묻자 U2 노래 부르겠다고 대답했으니, 말 다했다. 단지, 보노의 왕성한 사회활동이 꽤나 못마땅하다.[28] KID A 전까지는 칭찬했으나 그 이후로 지나치게 자신들만의 세계로 들어간다면서 본격적으로 까기 시작했다.[29] 노엘 한정으로, KID A 이후의 음반을 딱히 미워하는 것만은 아닌듯 하다. Q Magazine 2002년 5월호에는 Amnesiac에 대해, 그리고 Q magazine Exclusive! Noel Plans Solo Album 인터뷰에서 톰 요크 싱글에 대한 호의적인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욕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꾸준히 라디오헤드 음악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항상 지적이 나오는 건 앨범이 나올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진취성과 전쟁과 환경과 관련된 어두운 정치색에 대한 반감이다. 노엘의 성격상 "즐거운 음악을 해봐라"는 애증에 가까운 불평에 가깝다. #와 CROSSBEAT 지 2009년 10월 인터뷰를 보면 연주와 공연에 관해서는 호의적인 면도 보인다.[30] 리암의 경우에는 다소 의미가 없는 것이 2011년OK Computer를 한 번도 듣지 않았다는 인터뷰를 했기 때문. OKC마저도 안 들었는데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고 대중적인 사운드를 자른 뒷 앨범들을 유심히 들었을 가능성은 그다지 없고 그냥 맘에 안 드나보다. 다만 리암의 성장배경, 취향과 추구하는 음악을 봤을 때 라디오헤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Karma Police는 들어봤는지 '카르마 폴리스다. 그거 말곤 별거 없다'라는 나름 칭찬조의 트윗을 남기기도 하였다.[31] 블러와의 관계 참조.[32] 노엘 갤러거와는 사적으로 친하다고 한다. 같이 노래 부른 적도 있지만, 리암은 싫어한다. "크리스 마틴은 꼭 무슨 지리 선생같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사실 크리스마틴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역사학과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리스어나 라틴어 등으로 된 고전에 대해 연구하는 과를 나왔다.) 또, 노엘의 현재 부인인 사라가 한 시상식에서 당신들 노래가 좋다고 하자 콜드플레이의 멤버들이 사라를 스파이로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33] 그런데 리암도 같이 노래를 불렀다! https://youtu.be/NDJlPG_M600이 무대 이후 리암은 크리스에 대해 안 좋게 말한 것을 사과했다고 한다.[34] 스타세일러 쪽에서도 싫어한다지만 Cast No Shadow는 공연에서 자주 커버곡으로 연주했다. 노엘이 스타세일러를 싫어하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그들의 곡인 'Alcoholic'을 깐 전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노엘은 'Alcoholic'에 대해 자기는 "아버지에게 맞더라도 'Live Forever'를 부르는데 왜 이것들은 징징대냐"라는 식으로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이에 스타세일러는 라이브 공연에서 'Poor Misguided Fool'이란 곡을 하기 전에 "이 곡은 노엘 갤러거에게 바치는 곡입니다"라는 멘트로 응수했다.[35] 노엘은 쭉 로비를 온갖 말로 욕해왔고, 리암의 경우 로비 쪽에서 로큰롤한다면서 리암한테 붙어다닐 때도 있었으나 로비 윌리엄스가 솔로 앨범으로 크게 성공하고 오아시스가 추락하면서 서로 설전을 벌이다가 사이가 안좋아졌다.[36] 재밌게도 에미넴또한 논란이 있는 스타들을 디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37] 노엘 曰 "세상에서 제일 X같은 밴드의 음악을 들을만큼 내가 충분히 오래 살아서 기쁘다". 그런데 sum41의 보컬인 데릭은 Morning Glory를 방송에서 어쿠스틱 버전으로 부른 적이 있다.[38] 노엘, 리암 둘 다 깐다.[39] 오아시스라기 보다는 노엘 갤러거 개인적으로 깠다. 2015년에 공개되었던 Hello를 겨냥하였는데 너무 올드한 스타일 덕분에 "할머니나 듣는 노래" 같다라며 이 노래에 열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가 주요 골자이다.[40] 유일하게 Fxxk가 들어가지 않은 인터뷰. 어린아이들 앞이라서 그런지 욕설을 자제하고 나름대로 애들 눈높이에 맞춰서 농담도 한다.[41] 자기보다 고작 20개월 일찍 태어났는데 음악은 평생 한 것 같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존경의 표현이다.[42] 이때 조니 마도 함께 공연했다.[43] 2015년 내한 인터뷰에서 만일 노래방에 간다면 U2 노래를 부르겠다고 대답할 정도이다[44] 마룬 5의 베이시스트 마이클 매든이 노엘을 만났을 때 "당신 때문에 기타를 처음 배우게 되었다"라고 말하니까 노엘은 "어느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는데? (A: 마룬 5요) 뭐? Rock 'n' Roll Star를 듣고서 그딴 노래를 만들었다고?" 라고 말했다. 물론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후에 "마룬 5 나올 때 화장실 다녀오세요"라고 드립을 친 걸 보면 딱히 마룬 5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2008년 8월 노엘 인터뷰 참고로 그 날 새벽에 으리으리한 집에 가서 스톤 로지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놀다가 또 매든을 만났는데, 매든이 "여기가 내 집인데요" 한마디에 "집 열라 좋네, 친구."라고 한 마디했다.[45] Roll With It과 Country House로 시작된 브릿팝 전쟁 이전에는 서로 미국에서 라디오에도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오히려 당시의 영국 언론들은 스웨이드의 프론트맨 브렛 앤더슨과 블러의 프론트맨 데이먼 알반, 엘라스티카의 프론트우먼 저스틴 프리쉬먼의 삼각관계를 이용하여 스웨이드와 블러를 라이벌로 몰아가려 했었는데..[46] 참고로 사진 속의 V자 표식, 영국에서는 욕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 참조.[47] "물론 난 리암을 좋아한다. 컵라면만큼은 아니지만." - 노엘 갤러거[48] 맏형인 폴 갤러거를 포함한 갤러거 삼형제는 당시 영국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던 아일랜드 이주민 2세, 극빈민층이었며, 범죄가 일상이던 맨체스터의 버니지에서 자랐다. 부친은 알콜중독에 상습적인 가정 폭력범이었는데, 토마스는 리암에게마저 폭력을 가하면 결혼 생활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리암을 제외한 형인 폴과 노엘 갤러거에게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물론 아내에게도 그랬다. 그러나 오아시스 때의 인터뷰에 따르면 리암 또한 다른 가족이 없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폭행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노엘은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면 기절할 때까지 맞다가 다시 폭력으로 눈을 뜨는 게 일상이었고, 청소년이 되기도 전에 코가 두 번이나 부러졌다. 이때 휴우증으로 말더듬증이 있었고 고치기 위해 몇년이나 걸렸다고...당시 노엘과 리암은 같은 방을 썼었기 때문에 자주 싸우면서도 서로 유대감이 깊었다.[49] our kid 또는 rkid. 형제를 칭하는 맨체스터 사투리. 리암과 노엘 이 서로를 부르는 애칭이다. 해체한 후에도 이렇게 부르는 중이다.[50] 그 직후 NME에 의해 내한 당시의 '한국에서 설사 터졌어!' 와 함께 리암의 트위터를 사랑하는 이유 11개중 하나로 뽑혔다. 팬들이 얼마니 관심을 가졌는지 알수있는 부분이다.[51] 사실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인들도 가족이나 친척과 동업하다 여러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가 많은 걸 고려하면 갤러거 형제의 불화도 특이 케이스는 아닐 수도 있다.[52] 오아시스의 대표곡인 Wonderwall을 패러디한 것이다.[53] Plum에는 자두라는 뜻 외에도,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직업이나 지위, 역할 등을 뜻하기도 한다.[54] Accusation이 흔히 고소로 번역되기에 이번에도 고소를 했다는 식으로 알려졌으나, 이 사건은 형사가 아닌 민사 사건에 해당되기 때문에 정확히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 것이 맞다.[55] 2022년 리암이 50살이 되면서 멤버 전원이 50대가 되었다.[56] 노엘은 솔로 전향 이후 기존의 오아시스 음악에서 벗어나 훨씬 더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고 있는 반면, 리암은 약간의 팝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여전히 오아시스 시절의 정통 로큰롤을 추구하고 있다.[57] 형제의 어머니 페기 갤러거가 인생은 짧다며 둘의 관계 개선을 바랬는데 리암은 짧은건 노엘의 키라며 말대꾸를 한 적이 있다.[58] 몇 안 되는 형제 듀엣곡[59] 노엘이 리암을 부르는 애칭[60] 굳이 갤러거 형제가 아니더라도 맨유와 맨시티 팬들은 대개 서로를 싫어한다. 맨체스터 더비 항목 참조[61] 맨시티가 굉장히 암울한 성적을 내던 시절,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을 나가는 노엘에게 맨시티 팬들이 "노엘, 어떻게 좀 해줘."라 했다. 이에 대한 노엘의 답은 "난 200파운드밖에 없는데."[62] 물론, 진짜 맨시티 홈구장에서의 첫 공연은 최전성기였던 1996년에 지금은 철거된 메인 로드 스타디움에서 약 4만명 이상의 관객을 운집한 공연이 맨시티 홈구장에서의 첫 공연이다.[63] 당시 박지성은 맨유소속이었고, 설명했다시피 오아시스는 맨시티의 빠이며, 맨유 까다.[64] MAX, NOW 등은 음반 차트 1위를 독식하고 넘버링이 두 자리수에 달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 수록되느냐가 해당 가수의 한국 음반 판매량을 좌우했으니[65] 리암의 공연에서 십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66] 퇴근 직후 공연장을 찾은 중년 남성[67] 탬버린은 데뷔 초부터 리암이 연주하던 악기로 공연 끝에 곧잘 팬들에게 던지거나 선물한다. 한국에서만의 이벤트는 아니다.[68] 노엘이 가장 존경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는 리 메이버스가 주축이 된 초기 브릿팝 밴드 The La's의 전 드러머 출신.[69] 이 지산밸리 록페스티벌 참여 뒤 단 두 공연 후 오아시스는 해체한다.[70] 프랑스 토크쇼에선 프랑스어 하나 해보란 거듭된 부탁에 '난 영어도 겨우 하는데'라며 거절했던 사람이다.[71] 이번엔 노엘 솔로가 아닌 리암이 보컬을 하는 풀밴드 버전[72] 대표적으로 비틀즈와 스톤로지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73] 1집 시절 코카콜라의 CM송과 수록곡 Shakermaker 간의 4초 표절시비가 걸린 적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호주달러로 50만을 지불하게 된 노엘이 "자, 이제 펩시를 마시자."라고 말했다. 참고로 50만 호주 달러한화로 약 5억...[74] 예외로 딱 한번 리암이 맨체스터 테러 사태 때 Don't Look Back In Anger을 부르긴 했다.[75] 발매이유가 참 웃긴데, 코로나 19로 인한 자택격리 중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하다가 데모 CD를 찾아서 발매한 거라고 한다.코로나가 가져다준 행운[76] 정치적으로 진보적으로, 노동계급 출신이며,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공업지대 출신[77] 해당 문서와 관련 문서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해설들은 해외 포럼, 팬 뉴스 소식과 더불어 이 카페 내의 아카이브를 참고로 작성되었음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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