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디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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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 디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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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1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클레이튼 커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R.A. 디키
(뉴욕 메츠)


클레이튼 커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13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투수 부문 골드 글러브
제레미 헬릭슨
(탬파베이 레이스)
제이크 피비
(시카고 화이트삭스)

R.A. 디키
(토론토 블루제이스)


댈러스 카이클
(휴스턴 애스트로스)


파일:MLB 로고.svg 2013년 메이저 리그 투수 부문 필딩 바이블 상

마크 벌리
(마이애미 말린스)

R.A. 디키
(토론토 블루제이스)


댈러스 카이클
(휴스턴 애스트로스)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51번
마이크 무뇨즈
(1999~2000)

R.A. 디키
(2001)


후안 알바레즈
(2002)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45번
이라부 히데키
(2002)

R.A. 디키
(2003~2006)


카를로스 리
(2006)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41번
짐 슬레이튼
(2005~2007)

R.A. 디키
(2008)


크리스 자쿠바우스카스
(2009)
미네소타 트윈스 등번호 39번
후안 링컨
(2001~2008)

R.A. 디키
(2009)


앤서니 슬라마
(2009~2010)
뉴욕 메츠 등번호 43번
브라이언 스톡스
(2008~2009)

R.A. 디키
(2010~2012)


션 헨
(2013)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번호 43번
앤서니 고스
(2012)

R.A. 디키
(2013~2016)


마이크 올먼
(201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등번호 19번
브랜든 스나이더
(2016)

R.A. 디키
(2017)


아니발 산체스
(2018)




파일:R.A._Dickey_New_York_Mets.jpg

로버트 앨런 디키
Robert Allen Dickey

생년월일
1974년 10월 29일 (49세)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출신지
테네시 주 내슈빌
학력
몽고메리 벨 아카데미 - 테네시 대학교
종교
개신교
신체조건
190cm / 97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8번 (TEX)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 (2001~2006)
시애틀 매리너스 (2008)
미네소타 트윈스 (2009)
뉴욕 메츠 (2010~2012)
토론토 블루제이스 (2013~2016)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2017)

1. 개요
2. 커리어
3. 피칭 스타일
4. 연도별 성적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야구는 후회를 관리하는 게임이다.

본인의 자서전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에서 남긴 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한 우완 투수로,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가 끝날 위기에 처했을 때 너클볼로 돌파구를 찾아 이후 각성하여 필 니크로팀 웨이크필드를 잇는 메이저를 대표하는 너클볼러로 자리잡은 선수다.


2. 커리어[편집]



2.1. 텍사스 레인저스[편집]


테네시 대학교에 입학해 활약하던 시절에는 메이저가 주목하는 강속구 유망주로 손꼽혔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어 활약해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1]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텍사스 레인저스가 1라운드에서 디키를 지명하고 당시로선 거금인 81만 달러의 계약금까지 안겨주며 젊은 투수의 앞길엔 밝은 미래가 비치는 듯했으며, 공식 계약을 앞두고 있었던 메디컬 테스트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구단측에서 베이스볼 아메리카 잡지 표지에 나온 디키의 팔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실시한 마지막 단계 검사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견되었다.#


파일:R.A._Dickey_Baseball_America.webp

문제의 사진[2]
디키의 오른쪽 팔꿈치 인대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인대는 뼈와 뼈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 위아래 팔뼈를 연결하는 인대가 없는 상태에서 강속구를 펑펑 뿌려댔다는 것이다.[3] 충격에 휩싸인 텍사스 프런트는 약속했던 $0.81M 대신 $75k로 계약금을 후려쳤고, 디키도 인대가 없다는 사실이 뉴스를 탄 이상 다른 팀에도 입단할 수 없을 거란 불안감에 어쩔 수 없이 계약을 받아들였다. 이때 대학교 2학년 때 들어둔 팔꿈치 보험이 있었고, 만약 야구를 완전히 접는다면 $1M을 수령할 수 있었지만 결국 계약을 선택했다.[4] 그래도 5년 동안의 마이너 생활 끝에 결국 2001년에 메이저에 데뷔했고, 2003년과 2004년에는 부상으로 먹튀로 전락한 박찬호의 빈 자리를 메우는 땜빵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면서 활약했다. 하지만 2005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가 오른쪽 어깨에 통증을 느끼면서 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는데, 이 부상을 계기로 갑자기 구속이 떨어져 140km에도 못미치게 되면서 계속 메이저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연마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를 본 벅 쇼월터 감독과 오렐 허샤이저 투수 코치, 그리고 마크 코너 불펜 코치는 이틀 뒤 디키를 불러 마이너로 내려가 너클볼러가 될 것을 제안했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가 너클볼러였다는 사실을 듣고 시합에서 한두번 던져보긴 했지만 본격적인 것은 아니고 취미 수준에 불과해 너클볼을 어느 정도 던질 줄은 아는 정도였으나 너클볼러는 아니고 흔히 보는 조금은 던질 줄 알지만 주무기는 아닌 상태였다.[5] 하지만 당시 31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72경기 239.2이닝 15승 17패 ERA 5.48이라는 초라한 통산 성적으로 메이저에서 쫓겨나기 딱 좋은 성적이었고, 결국 이 면담에서 7분만에 너클볼러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6] 이러한 과정으로 그는 너클볼러가 될 각오를 하게 되며, 이렇게 되기에는 타자들에 대한 자신감 상실, 준비되지 못한 은퇴와 아내와 어린 두 딸에 대한 걱정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마이너에 내려간 후 본격적인 너클볼러로 전향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전향 후에는 너클볼을 지도할 코치가 없어서 독학과 실전 경험을 통해서 연마를 했었다가 시즌 막바지에 구단의 소개로 이후 디키가 너클볼 인생을 바꾸어 놓은 은인으로 표현하는 찰리 허프를 만나 너클볼 연마에 큰 도움을 받는다. 이를 통해 텍사스 구단은 찰리 허프에게 디키가 너클볼 투수로서 성공 가능 여부를 타진했고, 오프 시즌 기간 동안 캘리포니아의 찰리 허프의 자택을 두 차례 찾아가 너클볼을 배웠고, 찰리 허프에게 허프가 34세 이후로 162승을 거둔 사실에 많은 격려를 받았다.

하지만 너클볼러가 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는데, 2006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1경기 6피홈런이란 불명예기록을 남기며 처참하게 두들겨 맞았고, 이 경기는 텍사스에서의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7]


2.2. 시애틀 매리너스[편집]


이후 룰5 드래프트에서 시애틀 매리너스가 지명하며 기회를 얻었지만 여전히 영점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2008년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는 1이닝 4폭투란 대기록을 남겼다.[8] 그렇게 실패와 좌절을 맛 보던 중에 2008년 5월에 큰 기회가 찾아오는데, 당시 너클볼 현역 최고의 투수인 팀 웨이크필드의 지도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만남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시애틀로 원정을 왔을 때 이루어 졌는데, 10분의 시간을 약속하고 시작했는데 45분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상대팀 투수를 자신의 팀 불펜으로 데려와 지도한 것은 야구 업계의 통념을 깨트린 일로 디키 본인도 너클볼러간의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2008년 시즌 중반 절친했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포츠 캐스터 데이브 니하우스를 통해 너클볼 역대 최고의 투수였던 필 니크로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되어 시즌 종료 후인 2009년 1월 애틀랜타에 있는 필 니크로 자택 근처의 실내 야구 시설에서 배우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그는 필 니크로의 지도까지 받으며 선배들의 너클볼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너클볼을 만들어 가게 된다.

이렇게 총 3명의 선배들에게 너클볼을 배우게 됐는데, 그가 자서전에서 말하길 찰리 허프 덕분에 올바른 그립과 문틀을 상상하며 던지는 법을 배웠고, 팀 웨이크필드에게 팔을 휘두르는 올바른 팔 동작과 적절한 릴리스 포인트에 대해 배웠으며, 필 니크로에게는 엉덩이를 앞으로 밀면서 홈플레이트 쪽으로 힘을 싣는 법을 배워 가공할 만한 피니시를 가진 공을 배웠다고 한다.


2.3. 미네소타 트윈스[편집]




2.4. 뉴욕 메츠[편집]



2.4.1. 2010년[편집]


2010년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은 직후에도 별다른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스프링 캠프에서 첫 번째로 정리되어 마이너로 내려가는 명단에 포함되었을 정도다. 하지만 4월 19일 더럼 불스[9]와의 경기에서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두는 등 8경기 60.2이닝 4승 2패 ERA 2.23이라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고, 이러한 활약 덕에 올리버 페레즈가 완전히 망가지자 페레즈의 공백을 매꾸기 위해 메이저에 콜업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최종 성적 27경기 174.1이닝 11승 9패 ERA 2.84라는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며 완전한 너클볼러로 안착하는데 성공했고, 프로에 지명된지 14년 만에 리그간 메이저 승격과 마이너 강등을 35번 반복한 만 36세의 노장 투수가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2.4.2. 2011년[편집]


지난 시즌의 활약으로 홈 개막전 선발로서 선정되었으며,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다년 계약을 맺는데도 성공했지만 최종 성적 33경기 208.2이닝 8승 13패 1홀드 ERA 3.28이라는 준수한 활약에 비해 승운이 없는 시즌이였다.


2.4.3. 2012년[편집]


6월 13일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경기에서 9이닝 1실점 (비자책) 12탈삼진 완투승을, 6월 18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9이닝 무실점 13탈삼진 완봉승을 거두었다. 그것도 2012 시즌 AL 동부지구에서 잘나가는 팀을 상대로 말이다. 두 경기 연속 2자릿수 탈삼진 + 1피안타 완투승은 디키가 메이저리그 최초이다. 최종 성적 34경기 233.2이닝 (NL 1위) 20승 6패 ERA 2.73 230탈삼진 (NL 1위)이라는 리그 최정상급의 성적을 기록하며 클레이튼 커쇼를 제치고 너클볼러 최초의 사이 영 상 수상에 성공했다.[10]

시즌 종료 후 연장 계약이 논의되었지만, 많은 나이 때문에 구단과 선수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고, 연장 계약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더니 토론토 블루제이스로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양 측은 디키와 유망주들 외에 디키의 너클볼을 캐치할 포수도 교환하는 등의 합의에 이르렀으며, 결국 포수 조시 톨리와 유망주 한 명과 함께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메츠가 받는 선수는 블루제이스의 팀내 최고 유망주인 포수 트래비스 다노와 대형 투수 유망주 노아 신더가드, 또 다른 하위 유망주 한명과 마이애미 말린스에서 넘어온 존 벅인데 아무리 사이 영 수상자라고 해도 토론토 측에서 퍼줘도 너무 퍼줬다는게 중론이다. [11]


2.5. 토론토 블루제이스[편집]


시즌을 앞두고 토론토와 3년 $30M의 연장계약을 맺었고, 2016년에 $12M의 클럽 옵션과 $1M의 바이아웃도 포함된 계약이다.


2.5.1. 2013년[편집]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미국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당초 저스틴 벌랜더도 참가할 가능성이 있어서 벌랜더 - 디키의 꿈의 사이영 원투펀치가 미국 대표팀에서 실현될 지 관심이 모아졌으나 벌랜더가 몸상태를 이유로 출전을 포기했고, 지오 곤잘레스가 뒤늦게 참가를 선언하면서 디키 - 지오의 원투펀치가 형성되었다.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사정없이 털리더니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미국의 첫 경기인 멕시코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했으나, 1회부터 2실점하며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3회 아드리안 곤잘레스에게 중월 투런을 얻어맞으며 떡실신당하는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4이닝 4실점 탈삼진을 기록했다 돔구장빨[12] 때문에 너클볼의 무브먼트가 무뎌진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스프링 트레이닝 구장에서도 사정없이 털리던 모습이라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반응도 있고, 2012년 탬파베이 레이스에게 완투승을 거두었던 곳이 트로피카나 필드인지라 돔구장이 너클볼의 무브먼트를 더욱 변화무쌍하게 만들어준다는 의견도 있다. 정말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컨디션이 꽝일 뿐이었던 것인지 2라운드 승자전인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경기에서는 호투했고, 돔구장이 어떤 변수가 되리라던 예상도 말린스 파크의 지붕이 닫혀진 상태에서 호투하며 쏙 들어갔다.

토론토 소속으로 첫 등판한 4월 2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는 포수 때문에 말 그대로 지옥을 맛보았다. WBC에서는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게 호흡을 맞춘 J.P. 아렌시비아가 제대로 공을 받지 못하다 보니 실로 엄청난 경기를 치뤘다. 토론토는 아렌시비아와 늙다리 포수 헨리 블랑코만 믿고 메츠에서 같이 트레이드로 온 조시 톨리를 마이너로 보내버렸는데 제대로 뒤통수 맞은 경기가 되고 말았다. 포수들이 못 받을까봐 너클볼을 일부러 구속과 무브먼트가 덜하게 살살 던졌다는 말도 있었고, 승패야 그렇다 치더라도 ERA와 WHIP까지 심각하게 올라가 버렸다. ERA 5점대 중반을 찍는 총체적인 난국이 벌어지자 존 기븐스 감독은 6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톨리를 콜업해 전담 포수를 담당하도록 했고, 이후에는 사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져 조금씩 승수를 벌충해서 시즌 끝무렵에는 겨우겨우 5할 승률은 넘겼고 3년 연속 200이닝을 소화하며 최종 성적 34경기 224.2이닝 14승 13패 ERA 4.21 177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수비력을 인정받아 시즌 종료 후 커리어 최초로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13]

2012년에는 33경기동안 볼넷을 54개만 허용했는데, 2013년에는 볼넷을 1.4배 정도 많은 71개를 내줄 정도로 제구력이 나빠진데다 너클볼의 구위 역시 안 좋아져 평균 80마일을 자랑하던 구속은 2013년 전반기에는 70마일대를 기록했고, 이 때문에 홈런을 33개나 얻어맞았다. 게다가 홈구장인 로저스 센터와의 궁합이 너무나 안 맞는 것도 문제인데, 홈경기에서는 5점대에 가까운 ERA를 기록한 반면 원정 경기에서는 오히려 ERA 3점대 중반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거포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것은 물론, 양키 스타디움이나 펜웨이 파크 등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구장들이 꽤나 타자친화적인 성격인 것을 감안하면 디키의 극단적인 홈 - 원정경기 성적은 굉장히 기묘한 대조를 보인다.


2.5.2. 2014년[편집]


3월 31일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시즌 개막전에 선발로 나와 5이닝 6실점을 기록하고 패전한 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크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듯 했지만, 4월 말 이후부터는 꼬박꼬박 6이닝씩 소화하면서 호투를 보여주며 5월까지 10경기 60이닝 4승 4패 ERA 4.20을 기록하고 있는데, 희한하게도 이번 시즌엔 전년과는 정반대로 홈경기 성적이 좋고 원정에서 죽을 쑤고 있다.

최종 성적 34경기 215.2이닝 14승 13패 ERA 3.71을 기록해 승패 뿐만 아니라 세부 항목을 살펴봐도 지난 시즌과 차이가 별로 없고, ERA만 조금 하락했다.


2.5.3. 2015년[편집]


팀이 23년만에 지구우승과 포스트 시즌 진출을 거머쥐며 포스트 시즌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지만 2경기에 나와서 2번 모두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교체됐다. ALDS 4차전에서는 무난하게 잘 던졌지만 이날 다른 타자들과는 달리 디키의 공을 잘 치던 추신수 타석이 되자 존 기븐스 감독이 5회 종료까지 단 1아웃이 남았음에도 그를 내리고 데이비드 프라이스를 구원 등판시켰다. 디키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내려갔지만 프라이스가 추신수를 외야 뜬공으로 돌려세워 일단 노림수는 성공했고, 토론토는 4차전을 승리하면서 이후 5차전까지 승리해 역스윕으로 ALCS에 진출했다.

ALCS 4차전에 등판했지만 1회부터 너클볼의 약점을 간파한 캔자스시티 로열스 타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1.2이닝만에 5실점 (4자책)으로 강판당한 후 팀이 14:2로 대패하면서 패전투수가 됐고, 이후 6차전에서 패배하면서 디키의 포스트 시즌은 그렇게 쓸쓸히 끝난다.


2.5.4. 2016년[편집]


더더욱 성적이 하락해 이번에는 이닝 소화력도 부족했으며, 포스트 시즌에서는 아예 로스터에도 들지 못해 사실상 디키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기대했던 사이 영 위너의 실력은 전혀 아니지만 지난 3년간 매년 최소 33경기 출장에 210이닝이란 내구성, 3점 후반대의 ERA로 지옥의 알동부에서 좋은 3 ~ 4선발[14] 평가를 받고 있다.

너클볼의 특성을 감안해도 투구 내용이 매우 기괴했다. 실점없이 6회를 가다가 갑자기 5실점을 하고, 1 ~ 2회부터 만루를 쌓고 3 ~ 5실점을 해서 강판 될 듯 하더니 8회까지 버틸때도 있고, 2회까지 거의 60구를 던지더니 이후 귀신같이 투구수를 줄이는 등, 털리는 시점과 살아나는 시점이 그야말로 예측불허다. 물론 6 ~ 8점까지 털리는 상황은 드물지만 시청자들도 수비하는 야수들도 너무 지치게 한다. 일단 한번 장작을 쌓기 시작하면 거의 무조건 실점하고, 정말 신기하게도 병살이라는 운은 죽어라 안따라줘서 삼진이 되거나 외야 플라이가 되기전까진 이닝이 끝나지를 않으며, 외야 플라이는 대게 홈런성에 가까운 타구여서 팬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이런 형편에 언젠간 한번 야수들에게 만루 상황에서 병살을 지시하는 제스쳐를 해서 팬들의 뒷목을 잡게했다.[15]

4년 계약 마지막을 앞두고 나오는 평가는 보는 게 너무 답답하다는 것과 이 정도 성과를 볼려고 노아 신더가드를 내줬냐는 평가로, 물론 지난 몇년간 선발 투수 때문에 고생하는 토론토를 마크 벌리와 함께 잘 지탱해 준 것은 사실이이지만 대가가 너무 컸다.

그리고 같이 트레이드되어 온 전담 포수인 조시 톨리가 지난 몇 년 간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타격과 수비를 보여주며 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너클볼을 잡는 것 이외엔 그 어떤 능력도 없다. 과장이 아니고 정말로 없다. 디키의 등판과 땜빵 포수로서 매년 겨우 40 ~ 50경기[16]를 뛰는 주제에 꼬박 음수의 WAR를 적립하며 마이너에서 고생하는 포수 유망주들이 불쌍해 질 지경이다. 지난 몇 년간 OPS가 3번이나 5할아래였고, 타율은 1할만 2번[17], 장타율은 3시즌이나 .245 아래였던지라 장타율이 없는 J.P. 아렌시비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게 토론토에겐 얼마나 무시무시한 재앙이냐면 디키가 등판할 때는 아예 지명타자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디키는 단 한번의 잔부상도 없이 매시즌 33 ~ 34경기를 풀로 뛰었는데, 이 말은 곧 토론토가 매년 162경기중에 34경기나 지명타자 없이 자동아웃을 헌납한 것이다. 단순한 WAR 계산으로는 도저히 수치화가 되질 않는 재앙이다. 그렇다고 투구수라도 뺐느냐면 그것도 아니며, 공 3개 이하가 다반사고 공 5개면 꽤나 잘 버텨준 거다. 보다 못한 감독이 너클볼을 받는 임무를 주전 포수 러셀 마틴에게 몇번 맡겨보기도 했지만 어지럽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보통 주전 포수면 고생하는 걸 모두가 아니까 너클볼 받는 것과 같은 특수업무는 휴식일 주는 겸 해서 전담포수한테 짬때려도 그러려니 하지만, 이 해 러셀 마틴은 연봉이 무려 $20M이면서 WAR -0.2를 기록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괜히 욕을 더 먹었다.

조시 톨리는 디키와 팀이 갈린 이후 당연히 마이너로 강등당했고, 2016년 이후 단 한 차례도 메이저를 밟지 못했다. 더스틴 니퍼트가 한국에서 8년 동안 그렇게 던지고 받은 공식 연봉이 724만 7천 달러였는데 조시 톨리는 트리플A에서도 멘도사 라인에 걸치던 타격실력으로 메이저에서 주전 포수도 몇 시즌을 해보고 통산 700만 달러 이상을 받아갔으니 상당히 성공한 인생이다.[18] 조시 톨리는 2020년 양키스와 계약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마이너리그가 열리지 않았고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19]

2.6. 애틀랜타 브레이브스[편집]


시즌 종료 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1년 $8M의 계약을 맺었고,[20] 최종 성적 31경기 190이닝 10승 10패 ERA 4.26 fWAR 1.4 bWAR2.2를 기록하며 $8M의 연봉은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근데 이 성적이 팀내 다승 공동 2위, 이닝 1위, 정규 이닝 소화 선발 투수 ERA 1위라는 점이 팀 투수진 사정을 말해준다.

시즌 후 팀은 젊은 투수들에게 기회를 더 주겠단 이유로 옵션을 실행하지 않기로 했고, 자신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며 43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3. 피칭 스타일[편집]




주무기는 최고구속 81마일(약 130km/h)의 고속 너클볼이며 60마일대의 저속 너클볼을 간간히 배합하며 던진다.[21] 너클볼 치고 구속이 빨라서 필 니크로팀 웨이크필드의 너클볼보다는 변화가 적지만, 디키의 뛰어난 제구력이 합쳐진 덕에 폭투나 포일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 이로 인해 니크로나 웨이크필드에 비해 포수도 비교적 덜 가리는 편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덜 가린다는 것이지 안 가린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 비교적 변화가 적다고 해도 너클볼은 너클볼이라 순간적으로 불규칙적인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너클볼에 익숙지 않은 포수와 배터리를 짜면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위에서 토론토 시절에 전담 포수 톨리 대신 아렌시비아와 합을 맞췄다가 고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22] 위의 이미지를 잘보면 전담포수마저 한순간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너클볼 이외에 평균 83~84마일에서 형성되는 포심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잡는 공을 던지기도 한다. 포심 패스트볼 역시 웨이크필드에 비해 10마일 이상이 빠르며, 너클볼을 예상한 타자들이 완급조절에 말려서 타이밍을 뺏기고 놓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너클볼러의 문제점은 다른 구종을 던지기 매우 힘들다는 건데, 디키의 경우에는 너클볼-포심 외에도 서클 체인지업을 서드 피치로 장착하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 상대하는 타자들은 당연히 너클볼만 생각하고 임하다가 갑자기 들어오는 서클 체인지업에 당황하여 말려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여기에 포심 외에 투심도 꽤 구사하는 등 너클볼러 치고는 쓸만한 구종이 꽤 많았던 선수.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1
TEX
4
0
1
0
0
12
6.75
13
3
7
0
4
1.667
71
-0.2
0.0
2002
메이저 기록 없음
2003
38
9
8
1
3
116⅔
5.09
135
16
38
5
94
1.483
99
1.4
0.7
2004
25
6
7
1
0
104⅓
5.61
136
17
33
4
57
1.620
90
0.6
0.0
2005
9
1
2
0
0
29⅔
6.67
29
4
17
2
15
1.551
69
-0.1
-0.3
2006
1
0
1
0
0
3⅓
18.90
8
6
1
0
1
2.700
27
-0.5
-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8
SEA
32
5
8
0
0
112⅓
5.21
124
15
51
2
58
1.588
81
-0.2
0.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9
MIN
35
1
1
0
1
64⅓
4.62
74
8
30
4
42
1.617
95
-0.4
0.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0
NYM
27
11
9
0
1
174⅓
2.84
165
13
42
4
104
1.187
138
3.3
4.2
2011
33
8
13
0
1
208⅔
3.28
202
18
54
9
134
1.277
112
2.5
3.5
2012
34
20
6
0
0
233⅔
2.73
192
24
54
9
230
1.053
139
4.7
5.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3
TOR
34
14
13
0
0
224⅔
4.21
207
35
71
10
177
1.237
98
1.9
2.0
2014
34
14
13
0
0
215⅔
3.71
191
26
74
14
173
1.229
102
1.7
2.2
2015
33
11
11
0
0
214⅓
3.91
195
25
61
11
126
1.194
105
1.7
2.5
2016
30
10
15
0
0
169⅔
4.46
169
28
63
6
126
1.367
96
0.8
0.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17
ATL
31
10
10
0
0
190
4.26
193
26
67
10
136
1.368
102
1.4
2.2
MLB 통산
(15시즌)
400
120
118
2
6
2073⅔
4.04
2033
264
663
90
1477
1.300
103
18.7
23.7


5. 기타[편집]


  • 디키의 이름 R.A.는 로버트 앨런의 약자인데,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인 로버트 그린을 R.G.라고 부르면서 디키도 R.A.로 불리게 되었고, 13살부터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R.A.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어머니는 계속해서 로버트라고 불렀다고 한다.

  • 약물을 극도로 혐오한다. 약물에 대해 생각하면 약물로 인해 자신이 맞은 내야안타나 다른 선수들의 활동이 생각나며, 약물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약을 안한 선수들에 대한 속임수라고 분노한다.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시합 전 욕실에서 약물 투입 주사기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약물을 사용하는 선수는 속임수를 쓴 것이나 다름없으며, 상대 선수를 속이고 팬을 속이며 시합을 속이는 짓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당연히 옳은 관점이다. 특히나 투수로서 여러 활로를 찾다가 너클볼러로 전환하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정당하게 재기한 인물이기에 약물이 아니면 방법이 없었다면서 징징대는 꼴을 절대 참고 봐 줄 수 없는 인물이다.

  •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은근히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약물과 관련해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로드리게스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2개가 있다. 하나는 2001년 처음 메이저에 등판했을 때[23] 마지막 타자인 마리오 발데스를 아웃시킨 공을 메이저 최초 등판 기념으로 갖고 싶었으나 로드리게스가 관중석으로 던져버린 일이 있었고,[24] 또 하나는 너클볼러로 활약하기 전에 메이저 커리어 유일한 완봉승 경기였던 2003년 8월 2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 후 로드리게스가 유격수 자리에서 모든 투구 사인을 포수에게 전달해 줬다면서 자신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다음 번 경기에서는 5.1이닝 6실점으로 패배했는데 로드리게스에게 이번에도 사인 전달 해준 것을 고마워해야 하냐고 물었고, 로드리게스는 그 날 경기에서는 사인을 전달하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 본인도 절대 고의는 아니지만 마약 문제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한 적이 있는데, 지인인 목사의 집에서 치킨 캐서롤을 대접받아 그 자리에서 3그릇을 먹고 팀의 클럽 하우스에 포장해올 정도로 매우 좋아했다. 그런데 이 치킨 캐서롤이 양념으로 양귀비의 씨를 뿌렸어서 얼마 후 검사 때 마약 성분이 검출되어서 설명하는 데 진땀을 빼야 했다고 한다.[25]

  •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다.

  • 강폭이 200미터가 넘는 미주리 강을 헤엄쳐 건너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 일이 있다. 2002년부터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고, 이후 2007년 6월 9일의 일로 마이너 숙소 근처에서 시도해 400미터를 떠내려가며 익사 직전까지 갔다. 탈진 상태에서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상황까지 처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 바뀌면서 마이너 선수 생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이후 성적이 급반전하게 된다.[26]

  • 2012년에 시즌을 앞두고 다른 메이저 선수들과 킬리만자로 산을 등정해서 화제에 올랐다. 메츠 프런트에서는 계약을 취소한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디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고, 등정에 성공하고 내려오자 윌폰 구단주도 없는 살림에 디키가 후원하는 인도의 성매매 여성 지원단체에 후원금을 냈다고 한다.

  •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한 데다가 어머니는 알코올 의존증자였고, 8살 때는 여자 베이비시터와 10대 청소년한테 성적 학대를 당할 정도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성적 학대의 기억은 죄책감과 혐오감으로 디키의 평생을 괴롭혔고, 아무에게도 털어놓치 못했던 아픔으로 결혼 생활의 위기를 맞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2006년 전문 상담사 스티븐 제임스를 만나 큰 도움을 받게 되었고, 2011년이 되어서야 어린 시절 학대받았던 불행한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기도 하다. 불행했던 과거로 인해 결혼 생활에도 문제가 생기자 신앙심 깊은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라커룸에 책을 쌓아놓고 읽을 정도로 열렬한 독서가라고 한다. 디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운동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영문과 교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며, 실제로 운동선수치고 대단히 지적이며, 학창 시절에는 공부도 꽤 잘 했었다고 한다.

  • 리치 마틴의 올스타 야구 캠프에서 상대하기 쉬운 타자가 있냐는 질문에 데릭 지터랑 상대할 때 결과가 좋았다고 먼저 말한 후, 카를로스 델가도를 상대하기 쉬운 타자로 답변했다.

  • 2012년 라는 자서전을 발간해 호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엠엘비바다에서 활동하는 OrangeBlood라는 유저가 번역 및 출판을 진행하여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라는 제목으로 2013년 4월 1일 초판이 발매되었다.

  • 2007년 10월에 KBO 리그 팀의 오퍼를 받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삼성 라이온즈가 $30만 달러에 추가금액을 제시했고,[27] 한화 이글스도 관심을 가졌었지만 디키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28]

  • 자서전에서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으로 투수에서 외야수로 변신한 릭 앤키엘에 대해 애정을 가득 담은 소회를 하고 있다. 본인이 본 투수 가운데 가장 천재적이었다며 투수로서 릭 앤키엘의 능력도 높이 평가했지만, 외야수 변신에 대해 일반 투수에서 너클볼러로 전환한 본인의 경우는 앤키엘에 비하면 하찮은 변화라고 해야 할 것이라며 그의 노력을 극찬했다. 2001년 5월 트리플 A에서 릭 앤키엘이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으로 인해 역대 최다인 1이닝 5개 폭투를 하는 것을 디키가 직접 봤는데, 이후 너클볼러로 전환한 디키가 3.1이닝 6홈런을 맞은 적이 있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파일:external/pbs.twimg.com/BN2XdDmCEAEcJFq.jpg

  • 버거킹의 마스코트와 닮았다는 농담이 있다.

  • 2023년에 명예의 전당 후보로 등록됐지만 1표만 얻고 바로 탈락했다.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02 01:49:24에 나무위키 R.A. 디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때 한국 대표팀과도 맞상대한 적이 있지만 등판한 건 아니였고, 당시 미국 대표팀 선발은 세스 그레이싱어였다.[2] 왼쪽부터 크리스 벤슨, R.A. 디키, 브레이든 루퍼, 세스 그레이싱어, 빌리 코크. 당시 전원이 탑 유망주로 기대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기대치를 충족한건 뒤늦게 포텐이 터진 디키 말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기대치와 별개로 빅 리그에서 쏠쏠히 활약하며 커리어를 오래 이어간 선수들도 있다.[3] 원래대로라면 팔꿈치 인대가 없이는 피칭은 고사하고 통증이 극심해 문 손잡이도 돌릴 수 없다고 한다.[4] 이때를 회상하며 마치 복권에 당첨됐다가 잃어버린 심정이었다고 한다.[5]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다큐멘터리 영화 너클볼에서 디키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어린 친구들이 너클볼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9살 때 테네시 주 네슈빌 공터에서 배웠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6] 면담 이전에도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오렐 허사이저 코치와 너클볼과 관련해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하며, 불펜에서 너클볼만으로 공을 던지는 것을 보여준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2005년인 이 때에도 한 시합에 한두 개 던질까 말까한 너클볼이었고 정통파 투수였던 그의 구질로는 경쟁력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7] 이 피홈런 기록은 현대야구가 출범한 20세기 이후 기록으로는 한 경기 최다 피홈런 최다 기록이었다.[8] 이는 메이저 역대 타이 기록인데, 메이저 역사를 통틀어 단 4명만 있는 이 명단에는 월터 존슨필 니크로도 올라 있다.[9] 탬파베이 레이스 산하 마이너 팀이다.[10] 한편으로 시즌 말 충격적인 사실이 전해졌는데, 2012시즌 초에 복부 근육이 찢어진 채로 한해를 보냈다고 하며(...) 시즌을 마치고 수술을 받았다.[11] 결국 2015년 메츠의 9년만의 가을야구에 다노와 신더가드가 한 힘 보태면서 디키는 나가고 나서도 메츠팬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12] 이날 경기가 열린 체이스 필드는 지붕을 닫고 있었다.[13] 참고로 같은 팀에 마크 벌리가 있었는데도 받은거다.[14] 데이비드 프라이스, 마크 벌리, 마르코 에스트라다, J.A. 햅, 애런 산체스, 마커스 스트로먼 등의 활약으로 1 ~ 2선발이라고는 도저히 평가 될 수 없다.[15] 배짱이 대단하기로 유명한데, ALCS 4차전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에게 털린 후 벼랑끝의 팀을 위해 언제든지 구원 투수로 나설 수 있다고 자원했으며, 2013년 초반에 자신을 필두로 팀이 신나게 털릴 때도 너무나도 태연히 인터뷰를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부진을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등 그 훌륭한 인성은 누구나 인정한다.[16] 그것도 후반엔 교체된다.[17] 한번은 .204로 간신히 턱걸이로 1할을 면했다.[18] 사실 매년 메이저리그에 입단하는 포수 유망주를 보면 냉정하게 저 선수보다 못하는 선수가 수두룩하다. 물론 저 선수 급의 타격실력을 가진 포수들은 저 정도의 돈을 벌지 못한다.[19] 미국 웹사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마이너리그가 열렸을 시 2020년에도 60만 달러가 보장되는 계약이었으나 마이너가 열리지 않으면서 그 돈은 날아갔다. 그래도 통산 연봉은 705만 달러. 디키랑 결별한 2017-2019 3년의 계약 중에서도 보장 60만 달러 계약이 있어서 마이너에서만 뛰면서 그 돈을 챙겼다고 한다.[20] 1년 $7.5M의 클럽 옵션이 추가로 붙었다.[21] 너클볼의 평균 구속은 75~76마일로 팀 웨이크필드와 비교하면 무려 10마일이나 더 빠르다.[22] 너클볼러는 너클볼을 던지더라도 이 공을 포수가 제대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포수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다. 너클볼러와 포수의 총 합이 현제의 너클볼 투수의 성적이라고 보면 된다. 간단하게 포수가 너클볼을 제대로 못 받으면 폭투가 되기 때문에 너클볼을 받기 쉽게 가운데에 던질수 밖에 없는데 가뜩이나 공은 회전율이 적어 제대로 맞으면 홈런이 되는 공이 엄청 위험한 한가운데로 몰리게 된다. 그리고 완급 조절용으로 던지는 포심의 비율도 점점 높아지는데 문제는 디키의 포심은 메이저리그에서 구종가치가 평균보다 조금 밑이라서 볼카운트 늘리는 용으로만 쓰이는 공이며 그래서 디키는 서클 체인지업을 2번째 무기로 사용한다. 너클볼은 항상 스트라이크존의 외각에서 공이 놀아야 하고 볼넷을 주더라도 운 좋으면 삼진이란 마음으로 공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공이 점점 가운데로 모이게 되면 가뜩이나 볼넷이 많아 주자도 많은데 피안타까지 많아져 매이닝 대량 실점의 위험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너클볼 전문투수의 너클볼을 잡는건 쉬운게 아니라 너클볼 전문포수라도 흘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비하면서 공을 받는다.[23] 2001년 4월 22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11:2로 앞서고 있는 9회에 등판했다.[24] 다만 디키는 로드리게스가 경기에 몰입하고 있었고, 본인의 메이저 첫 경기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25] 오해를 막기 위해 부연설명하자면, 양귀비 씨를 식재료로 사용하는 건 서구에선 매우 오래 전부터 있던 문화이다. 양귀비 씨에는 마약 성분이 없으며 따라서 중독성도 없지만 양귀비 자체의 성질 때문에 이렇게 헤로인 검사 때 오해를 받을 수 있다.[26] 3승 4패 ERA 5.87 → 10승 2패 ERA 2.42 [27] 당시 규정상 외국인 선수의 연봉은 30만 달러로 제한되어 있었으나 명목상 30만 달러였을 뿐 모든 구단이 뒷돈을 주고 선수를 데려왔다.성과금을 미리 줬다는 식으로 말이다.[28] 디키는 당시에 33세라는 자신의 나이, 마이너 올해의 선수였지만 기대했던 9월 메이저 합류 불발로 느꼈던 구단의 홀대와 불확실한 미래, 지난 5년 동안의 수입보다 많은 돈,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을 다음 해 계약 연장으로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80% 정도 삼성으로 갈 생각을 갖고 있었고, 부인의 동의를 받은 상태였지만 괜찮은 성적으로 미네소타 트윈스, 시애틀 매리너스, 뉴욕 메츠의 오퍼를 받은 절친한 에이전트 보 맥키니스의 적극적인 만류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