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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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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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타이프
피터 벅
마이클 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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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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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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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음반)|'''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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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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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 the Su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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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apse into Now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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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em logo.jpg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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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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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알이엠
R.E.M.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마이클 스타이프, 피터 벅, 마이크 밀스, 빌 베리
입성 연도
2007년
후보자격 연도
2007년
후보선정 연도
2007년




















파일:R.E.M..jpg
▲ 왼쪽부터 피터 벅, 빌 베리, 마이클 스타이프, 마이크 밀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결성
1980년
미국 조지아주 에덴스
데뷔
1981년 7월 8일
싱글 Radio Free Europe
해체
2011년 9월 21일
멤버
마이클 스타이프 (보컬)
피터 벅 (기타)
마이크 밀스 (베이스, 키보드)
빌 베리 (드럼)[1]
장르
얼터너티브 록, 쟁글 팝, 팝 록, 포스트 펑크
활동
1980년 ~ 2011년
레이블
Hib-Tone · I.R.S · Warner Bros. · Capital · Rhino · New West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파일:X Corp 아이콘(화이트).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결성 및 내력
3. 음악
4. 음반 목록
5. 뒷이야기



1. 개요[편집]



파일:rem-86.jpg

1980년 미국 조지아 주 에덴스에서 결성된 미국얼터너티브 록 밴드. 총 8500만장의 앨범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실상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장르의 창시자중 하나이다. 얼터너티브 록 이라는 장르가 너무 넓고, 그 음악적 특징을 규정하기도 힘들어서 유일한 창시자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어찌 됐든 픽시즈, U2, 소닉 유스 등과 더불어 초기 얼터너티브에서 아주 중요한 아티스트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8,90년대 대중음악사를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며, 너바나, 라디오헤드를 비롯한 1990년대에 활동했던 수많은 밴드들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인기는 이후 등장하는 걸출한 얼터너티브 음악가들에게 밀릴지 몰라도 90년대 이후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훌륭한 아티스트로 손꼽히며, 특히 얼터너티브 록과 모던 록을 선구자적으로 이끌었다는 데에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어클레임드 뮤직을 비롯한 여러 음악 잡지에서도 쉴새없이 거론되며 점점 더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 그룹이기도 하다.

또, 미국에서 지방 인디 밴드라디오를 통해 인지도를 쌓아 주류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특이한 케이스이다.

2. 결성 및 내력[편집]


락덕이었던 기타리스트 피터 벅은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다니던 애틀란타 에모리 대학교를 중퇴하고 Wuxtry 레코드점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조지아 대학교 예술대학 신입생이었던 보컬리스트 마이클 스타이프와 친구가 된다. 피터 벅은 자신이 사고자하는 레코드 판마다 자신만이 아는 기호를 남겨서 찜해놓는 버릇이 있었는데 꼬박 꼬박 그 레코드 판을 사가 허탕치게 만드는 손님이 바로 마이클 스타이프였다고 한다. 둘은 영국 펑크 록 음악을 비롯하여, 패티 스미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뉴욕 언더그라운드 씬 뮤지션 등 음악 취향이 비슷했는데, 이는 영국 록 음악펑크 락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던 고리타분한 미국 남부 분위기에서는 매우 마이너한 취향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멤버인 마이크 밀스와 빌 베리는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서로 베이시스트드러머로 만나 친해진 사이로, 대학도 조지아 대학교으로 같이 진학하여 룸메이트로 같이 살고 있었다.[2]

이들은 빌 베리의 여자친구였던 Kathleen O'brian의 소개로 서로를 알게 되고, 단번에 밴드가 결성된다.

결성 당시 피터 벅의 기타 실력은 초보 수준인데 반해, 피아노 교사의 아들인 마이크 밀스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악기를 접했던 덕분에 이미 기타를 웬만큼 잘 칠줄 알았다. 마이크 밀스의 월등한 기타 실력 때문에, 피터 벅은 자기가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거나 키보드를 담당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마이크 밀스와 빌 베리가 학창시절부터 오랜기간 베이스와 드럼을 연주하며 서로 맞춰왔던 사이였기에 이들의 합이 너무 좋았고, 마이크 밀스 역시 본인이 계속 베이스를 하길 원했다. 새로운 기타리스트 멤버 영입도 어려워지면서 자연스럽게 피터 벅이 계속 기타를 담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생일파티 등 조지아 대학 학생들이 노는 곳에서 연주하고, 주로 블루스나 컨츄리음악이 틀어지던 작은 펍이나 바 등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연주했다. 보잘것없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던 이들의 라이브는 매번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이들의 성공을 직감한 몇몇 팬들은 각각 매니저와 변호사를 자처하며 점점 전국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시작한다.

1981년 인디 레이블 Hib-Tone을 통해 첫 싱글 Radio Free Europe을 발매했다. Hib-Tone은 곧 사라졌고, I.R.S 레이블로 옮겨서 82년에 첫 EP Chronic Town을 발매했다. 처음에 메이저 방송국에서는 R.E.M.에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팝이 지배하던 당시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조지아 주 대학 방송국에서 이들의 음악을 틀어대기 시작했다. 멤버 네 명 모두 애씬스의 조지아 대학 출신이니까. 비록 무명이었어도 이들은 조지아 대학을 대표하는 밴드였던 셈. 그리하여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결과 1983년 데뷔앨범 Murmur를 발매했다. <Radio Free Europe>을 재녹음해 수록했다. Hib-Tone에서 발매된 싱글과는 약간 다르다. 이 데뷔앨범 Murmur는 평단의 호평을 얻었고, 그 해 마이클 잭슨의 대표 음반인 Thriller 앨범을 누르고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이 되었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이 혁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앨범들을 내며 커리어를 쌓다, 1987년 The One I Love가 실린 Document 앨범이 대박을 치면서 메이저 레이블인 워너뮤직으로 이적했고, 1988년 메이저 데뷔작인 Green을 냈다. 1991년 Losing My Religion이 실린 Out of Time이 그래미 4관왕을 찍으며 절정기에 들어섰고, 1992년에 발매된 Everybody Hurts가 실린 Automatic for the People도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얼터너티브 장르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94년 발매한 Monster에서 그런지 사운드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행보를 이어나가지만, 1997년 드러머인 빌 베리가 뇌출혈로 생명의 위기를 겪은 이후로 밴드를 탈퇴하여 3인조가 된다. 빌 베리는 탈퇴 후 농장을 운영하며, 가끔 자선 공연 등에만 모습을 보인다. 빌 베리의 탈튀 뒤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부진하면서 한물 간 밴드 취급을 받았으나, 2011년 15집인 Collapse into Now를 발매하며 밴드가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1년 9월 공식 해체를 발표하며 31년의 역사를 정리했다.

3. 음악[편집]


이들은 1980년대 대학가 라디오 방송 운동을 이끈 록 밴드였다 이는 인디 시절 소속되어있던 IRS 레이블의 전략도 있었다. 미국 대학 방송은 그 수가 대단치 않았고 청중도 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R.E.M.와 IRS은 어찌보면 마이클 잭슨과 대비되는 틈새시장을 개척한 셈. 당시 대학가에 널리 퍼진 이러한 음악들을 통틀어서 '컬리지 록'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당시 팽창할 대로 팽창한 팝 음악계에 반발하는 인디 록의 선구자였다. 이러한 이유로 <Radio Free Europe>(Hib-Tone에서 발매된 싱글이다.)은 2009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선정한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영구 등재되었다.

이들의 사운드는 비틀즈버즈가 시도했던 쟁글 팝의 영향을 받았다. 쟁글 팝은 말 그대로 쟁글거리는 기타 사운드가 중심이 되는 장르로, 기타리스트 피터 벅은 여기에 독특한 아르페지오를 구사하며 밝으면서도 꽉 차 있고 역동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패티 스미스[3]텔레비전,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예술적이고 시적인 뉴욕 펑크를 기초로 컨트리나 버즈나 러빈 스푼풀 같은 포크 록, 컨트리, 빅 스타렛츠 액티브, 필리스 같은 파워 팝 흐름과 갱 오브 포라던가 와이어 같은 영국 펑크 혁신가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이런 여러 성향의 음악을 잘 접목시키면서 1980년대 주류 팝과 다른 길을 개척했다.

이러한 특성은 후에 너바나가 이어받게 된다. 실제로도 너바나는 R.E.M.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얼터너티브 록이였지만 팝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인디 씬을 대표하던 밴드였지만 메이저 밴드가 되고, 상업적으로 변한 자신들의 모습에 고뇌하였으며, 성 소수자 자신이거나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마이클 스타이프는 동성애 지지자, 커트 코베인은 양성애 지지자였다. 정작 자기 여동생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영 못마땅하게 여기긴 했지만...(...) 서로간에 어느정도 음악적 교류도 있었는데, 초창기 너바나가 R.E.M.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R.E.M.은 1994년작 <Monster>에서 너바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런지 사운드를 시도했다.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는지 <What's the Frequency, Kenneth?> 뮤직비디오에서 피터 벅은 커트 코베인이 사용하던 펜더 잭스탱을 들고 나와서 연주한다.[4]

라디오헤드 역시 이들의 팬으로, 특히 보컬인 톰 요크가 이들의 앨범 New Adventures in Hi-Fi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한다. 실제로 라디오헤드의 세 번째 앨범 OK Computer의 경우 음악적으로 New Adventures in Hi-Fi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은 모습을 보인다.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나 라디오헤드의 Paranoid Android가 그렇듯이, R.E.M.의 주요 히트곡들도 20년 넘게 지난 지금 들어도 그렇게 옛날 노래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Losing My Religion이나 Everybody Hurts,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 등은 지금도 미국 모던 록 방송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으며, 모던 록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곡들 중 제일 오래된 곡들이 R.E.M.의 곡이다.

4. 음반 목록[편집]



5. 뒷이야기[편집]


밴드명인 R.E.M.은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의 약자다. 렘 수면 할 때의 렘이 이 단어를 뜻한다. 참으로 과학적인 밴드다 마이클 스타이프가 사전에서 무작위로 고른 이름이라고 한다.

마이클 스타이프성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과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삭발한 머리와 깡마른 체형 때문에 90년대 초에는 그가 급기야 에이즈환자라는 루머도 돌았다. 스타이프는 94년에 인터뷰 중 자신은 자신을 게이, 양성애자, 이성애자로 정의하고 싶지 않으며 남녀 모두와 연애 경험이 있고 끌리는 성향이라고 밝혔으며, 95년에는 대표적인 동성애 잡지인 OUT 매거진에 본인이 퀴어라고 정식 커밍아웃하였다.

마이클 스타이프는 컬리지락 밴드 10,000 Maniacs의 보컬 나탈리 머천트와도 한때 연인사이였고 이 둘은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 같이 듀엣곡을 불렀다.

마이클 스타이프는 데뷔 초에는 풍성한 장발이었지만 탈모가 진행돼서 롭 헬포드처럼 머리를 밀었고, 대표적인 대머리 가수의 아이콘이 되었다. 역시 대머리인 모비가 사람들이 자신을 마이클 스타이프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탄한 적도 있다.

작사하는 마이클 스타이프의 영향으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가사가 많다. 초기엔 미국인들도 해석에 갑론을박을 펼칠 정도로 상당히 모호한 편이었다. 미국 평론가인 숀 오스본의 평을 인용하자면 "R.E.M.의 감상자들은 낯선 장소의 불가사의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를 본다". 그러다가 1987년의 앨범 Document 이후로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해지는 편이다. 실제로 스타이프는 U2보노처럼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해외에선 U2와 맞먹는 영향력에 비해 한국에선 엄청나게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90년대 초중반에 너바나의 선배 밴드로 소개되어 듣게 된 사람들도 많다.

영화 애프터썬에 이들의 히트곡인 Losing My Religion에 삽입되었다. 영화감독 샬롯 웰스가 인터뷰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많이 좋아했던 음악으로, 이전부터 영화를 만들면 사운드트랙으로 꼭 사용하고 싶었던 곡이라고 밝혔다.

델리스파이스 김민규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라디오헤드오아시스가 R.E.M.의 서포트 밴드였던 시절도 있었다.

심슨 가족특별 출연한 적이 있는데, 가 술집을 리모델링해서 기존의 술집이 없어지자 호머 심슨이 자신의 차고를 술집으로 개조하는데, 이 차고에서 환경 보호 캠페인을 하는 줄 알고 공연을 한다. 그러다 모가 불법 드립을 치며 차고에 난입하자 호머가 여긴 사냥 클럽이라고 말하며 부정하는데, 스타이프가 자신들한테 거짓말을 하여 속여넘긴 호머한테 열받아서 병을 깨고는 그 깨진 병으로 위협하며 화를 내지만 다른 멤버들이 R.E.M. 스타일이 아니라며 말리자 진정한 뒤, 자기가 깬 병을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어담는다.[5]

밴드 멤버들 사이가 꽤 좋다. 또 하나, 팬들은 다 알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제 5의 멤버는 바로 매니저를 맡고 있는 버티스 다운스 4세.[6] 버티스 다운즈는 R.E.M. 무명시절 로스쿨을 졸업하고 빈곤 등의 문제를 다루는 변호사로 살려는 포부를 품었지만, 취직이 안돼서 별 희망 없이 반백수처럼 살았다. 그래도 음악은 꽤 좋아해서 레코드점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그 때 레코드점에서 일하던 피터 벅으로부터 자신이 좋아하던 닐 영 레코드 구매 컨설팅(?)을 받던 인연으로 R.E.M.과 엮였다. 처음 공연을 보는 순간 "비틀즈보다 더 대단한 밴드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고... 때마침 하는 일도 별로 없겠다, 그냥 친구끼리 도와준다고 꼈다가 어느날 정신차려 보니 직업이 됐다. 알바 잘 만나 인생 풀린 케이스. R.E.M.의 두번째 앨범 Reckoning의 "Wind Out"에 백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전쟁 당시 미군이었던 인터뷰어가 주변의 동료들이 엄청 다양한 출신이었다고 하면서 언급되는데, 그 중에서 마이클 스타이프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스타이프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했다고. 마이클 스타이프 아버지가 바로 직업군인이다.

이들의 노래인 It's the End of the World as We Know It은 인디펜던스 데이치킨 리틀의 ost로 사용되었다.

커트 코베인이 자살할 때 마지막으로 들은 음악이 이들의 앨범인 Automatic for the People였다. 커트 코베인과 마이클 스타이프는 절친이어서 자살 후 마이클 스타이프도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 정도로 절친이었냐면, 마이클 스타이프가 커트 코베인 집에 놀러가면 커트니 러브가 삐진 목소리로 "난 빠져줄 테니 둘이서 재미보쇼"하고 나갈 정도였다고... 소문이다 커트 코베인은 R.E.M.이 명성을 관리하는 방법을 많이 부러워했다고 한다.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Everybody Hurts가 나온다.

MTV에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방영된 다리아에서 R.E.M의 곡 중 하나인 Everybody Hurts의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한 장면이 있었다. 해당 장면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02 01:51:11에 나무위키 R.E.M.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97년에 탈퇴.[2] 마이크 밀스가 범생이 스타일인 반면 빌 베리는 꽤나 껄렁한 스타일이라서, 음악으로 친해지기 전까진 서로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았다고 한다.[3] 밴드의 주축인 스타이프는 본디 내성적이였지만, 패티 스미스의 Horses를 듣고 고등학교 시절 밴드를 결성했고 지금도 열렬한 패티 스미스 찬미자이자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피터 벅 역시 패티 스미스의 공연을 보고 대학을 중퇴했을 정도로 대단한 팬이였다.[4] 해당 기타는 커트 코베인이 디자인하고 펜더에서 제작한 최초의 재그-스탱 모델이었다. 첫 번째로 소닉 블루 색상이 커트에게 전달되어 그가 애용했고 두 번째로 피에스타 레드 색상이 전달될 예정이었으나, 그 사이에 커트가 사망하여 사용하지 못했다. 커트 사후 부인 코트니 러브가 피터 벅에게 그가 사용하던 푸른색 재그-스탱을 전달했고, 왼손잡이용이었던 이 기타를 오른손잡이용으로 개조하여 사용한 것이다.[5] 그리고 마지막에는 호머한테, 일단 사과를 받기는 한다.[6] Bertis E. Downs, IV.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