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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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질적 평가
2. 내치
3. 역사적 의의
4. 삼국 통일과 중원 정복?
5. 조선 문인들의 평가
6. 근대 역사학자들의 평가
6.2.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
7. 현대 국내 정치인들의 평가
8. 매체 및 역사학자들의 평가
9. 일부 탈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평가
10. 서브컬처



1. 실질적 평가[편집]


명실상부한 한국사 최고의 정복군주로 평가받는다.

18세의 나이로 보위에 올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21년 반 동안 고구려와 이웃한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들과 끝없이 정복 전쟁을 벌여 힘 좀 있다 싶은 산골짜기 국가였던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패권국[1]으로까지 끌어올린 한국사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정복군주이다. 과장 좀 보태 일생을 정복 전쟁만 하다 다소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는데 그 중 위기라고는 신라 구원전 때 후연 모용성의 군대가 총공격을 해오자 협공으로 곤란해진[2] 정도로 그마저도 얼마 안 가 극복했다. 결점 아닌 결점이라면 현대 기준으로도 무척 오래 산 아들 장수왕에 비해 고대 기준으로도 단명했다는 것.[3]

광개토대왕은 한국사에서 독보적인 정복군주로 평가받는다. 덕분에 고려 현종[4], 조선 세종 등과 함께 지금도 명군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광개토대왕이 넓힌 땅이 알려진 것보다 좁고, 적들도 상대적 약체라며 평가 절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아무래도 세계사로 나가면 알렉산드로스 대왕, 칭기즈 칸과 같이 동북아 스케일을 뛰어넘는 희대의 정복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광개토대왕은 현대 한국에서 민족주의자긍심 고취를 목적으로 실체적 진실이 왜곡되어 부각되는 측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부분에 반감을 가지고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5]

하지만 이는 광개토대왕의 정복군주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성과를 너무 폄하하는 것으로, 그가 넓힌 땅은 영역화하지 않고 복속하는 선에서 끝난 비려, 숙신, 신라를 제외하더라도 꽤 넓은 편이다. 먼저 백제로부터 얻은 한강 이북(대강 현재의 경기도 북부 및 서울 강북 일대) + 강원도 되는 땅과 후연으로부터 얻은 요동과 영토 전체를 집어삼킨 동부여[6]를 도합해보면 대충 아무리 작아도 한반도에서 함경도를 제외한 정도의 땅은 나온다. 고구려의 북쪽으로는 비려나 동부여 같은 세력을 제외하고, 이미 고구려가 속국 북부여를 통해 장악한 송눈 평원 이북에는 긁어먹을 자원이 적기 때문에 최대한 진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고구려의 필요에 따라 북만주의 지두우실위에 간섭하기는 한다.

사실 비려, 숙신의 경우, 그 주권에 고구려가 얼마나 침투했느냐에 따라 자치주 정도까지 볼 여지도 있다. 외교권 등 주요 권한을 고구려에 위임하고, 기본적인 자치권만 행사했다면 고구려의 자치주라고 봐도 상관없다. 어쨌든 사료의 부족으로 그 지배 방식을 현재 알긴 힘들다. 비교적 사료가 풍부한 신라의 경우, 군사·정치 분야 등에도 개입했던 것 같으며, 충주 고구려비에 의하면 고구려는 신라를 자신들의 내지로 인식했던 것 같다.

또한 상대한 적들이 약체라는 것도 백제, 후연의 상황에 대한 디테일한 파악과 고구려 북방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먼저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 대보다 포스가 후달리긴 했으나 딱히 쇠퇴했던 흔적은 뚜렷하지 않고, 절대적인 국력만 놓고보면 충청, 호남 지역의 마한 계열에 대한 직접 지배 전환은 느리지만 꾸준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구려와 접한 북방 상황과 별개로 남방 일대에서의 백제 지분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었으며,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이전 진사왕은 왕권 강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고구려와의 전선에서도 결코 수세는 아니였다.[7]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진사왕의 백제에 대해 펼친 파상적인 공세로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된 것이다.

내분 또한 광개토대왕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한 진사왕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이를 틈탄 아신왕이 재기를 도모해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아신왕이 즉위하고 백제는 별다른 내분 없이 진씨와 부여씨 왕실의 유대 아래 고구려에 적극적인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진짜 내분이 터져 아신왕과 진씨가 실각하고, 친고구려적인 해씨가 집권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백제의 내분이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을 도운 적은 없고, 오히려 광개토대왕의 공세로 인해 촉발된 것이다.

후연의 경우, 확실히 395년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는 등 북위와의 전선에서 열세였고, 중원까지 상실하는 바람에 397년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차지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후연은 중원을 상실하고도 과거 전연의 출발지였던 요서를 기반으로 재기를 도모하여 북위로부터 일부 실지를 수복하는데 성공하고, 400년에는 고구려의 땅까지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후연의 중흥으로 보아 후연이 쇠퇴했다 한들 아직 고구려 정도는 상대할 힘이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요서가 중원에 비해 좁다고 해도 후연의 전신인 전연이 그 땅을 발판으로 팽창했음을 생각해보면 결코 무시할만한 입지는 아니다.

결국 아무리 막장이 된 후연이더라도 당연히 백제보다는 강했을 게 분명하고[8] 고구려가 결코 쉽게 무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실제로 후연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407년에는 후연을 정벌하기 위해 50,000명의 대군을 동원한다. 백제를 정벌할 때 최대 동원 병력이 40,000명임을 상기해보면 후연의 국력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남북조 시대가 끝난 뒤 나온 통일 제국들에 비하면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당연히 떨어지는게 맞지만, 이 당시 중원 자체가 한족은 남쪽으로 쫓겨나고, 여러 북방 유목민족들이 뒤섞여 오호십육국시대이다.[9]

비려, 숙신, 동부여의 경우, 비려는 전연북위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훗날의 거란으로 발전했고, 이 과정에서 소수림왕 시절엔 고구려 변방 북변 8개 부락을 빼앗기도 했을 정도로 강세였다. 이는 이들이 결코 비루하고 보잘 것 없는 일개 유목민 집단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숙신은 딱히 강세를 보였던 흔적이 보이진 않는다. 숙신은 실제로 광개토대왕이 직접 출병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 처리하는데 광개토대왕이 가장 손쉽게 처리한 상대였을 것이다.

동부여는 영역이 64개 성 1,400개 촌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수도에 이르자 왕이 항복하고 광개토대왕의 은혜가 동부여 전국에 퍼졌다는 식으로 별 고난없이 정복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동부여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는 단순 미사여구였을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미화하는건 역으로 그만큼 정복의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벌에 고난을 겪었던 백제나 후연에 대해서는 꽤 세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추측 역시 의문이 남는다.


2. 내치[편집]


광개토대왕 시기 기록은 대부분 정복에 치중되어 있고, 내치와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이라고는 피정복민의 수묘인 문제나 평양천도를 위한 사전 준비, 장사/사마/참군 같은 중앙관직 신설 등 매우 단편적인 기록들 밖에 없어 평가가 어렵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내치에 대한 평가는 전후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간접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정복군주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바로 군사적 점령에 비해 난이도가 훨신 높은 피점령지의 통치 문제다. 역사에서 유명한 정복군주들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영토를 확장했음에도, 대부분 통치에서 실패해서 얼마 못 가 피정복지들이 이탈한 사례는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티무르 제국, 몽골 제국 등등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대제국들의 세계적 명장 반열에 드는 군주들도 대부분 군사적 재능과 별개인 정치적 균형 감각의 부족과 통치능력 부족 혹은 과부하로 자기들이 일궈놓은 대제국이 사후 사분오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2배 가까이 늘려놓고 점령한 영토도 대부분 방어에 유리하면서 생산성이 높은 알짜배기 영토들(요동반도, 한강유역)이었고, 사후 멸망할 때 까지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영토들은 외침으로 빼앗겼을지언정 단 한 순간도 반란으로 이탈한 적이 없다. 이는 정복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 통치에서 성공적인 시스템으로 정복지들을 관리했다는 것이며, 현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정치적으로 완전한 고구려 영토로 편입하는데 성공했다는 증거이다. 선대 소수림왕의 내정개혁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훌륭한 제도를 기획한 것과 별개로 그 훌륭한 제도개혁을 활용할 수 있는 것 역시 뛰어난 능력이다. 사후 고구려가 비록 어느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정치적 권력투쟁으로 인해 흔들렸을지라도, 멸망 당시 연씨 가문들의 내전 수준의 분열로 가지 않았던 것은 광개토대왕이 선대의 제도개혁을 잘 활용하고 보완해서 훌륭한 내치를 했다는 간접 증거이기도 하다.

아마 추론컨데, 소수림왕대의 중국식 율령개혁은 과거 건국 초기 고구려의 정치 체제의 인치(人治)적인 측면을 많이 일소하고 시스템적인 통치를 가져와 효율성을 더했을 것이며, 광개토대왕은 그 시스템적 이점을 잘 활용했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의 효율성은 점령지에 대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선택 옵션을 제공했을 것이다. 하나는 피정복지의 정치적 유력자들에게 효율성이 보장된 고구려 중앙 정치로 편입할 수 있는 당근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반항하는 피정복지 세력들은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통한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짓밟을 수 있는 채찍일 것이다.

정복군주로서의 이미지로만 광개토대왕을 인식하다보면은, 정복 너머의 훨씬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점령지 통치의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광개토대왕대의 정복지가 안정적으로 멸망시기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광개토대왕의 정치적/행정적 수완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3. 역사적 의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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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대에 만주한반도의 여러 경쟁 세력들을 극복함으로써 고구려는 중원의 패자인 북위, 몽골의 패자인 유연과 함께 요동 지역의 패자로 등극했다. 이는 최초로 남만주를 하나로 통일한 정권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항상 비슷한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광개토대왕 이후로 만주에는 고구려를 제외하고, 북만주의 좁쌀만한 부족 국가들만 남게 된다.

나중에 거란이나 물길, 돌궐이 등장하여 만주의 주권을 위협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어찌저찌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일보다는 배타적 패권을 휘두르는 국가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신라는 물론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남부마저도 고구려의 통제권에 놓여 백제나 [10]가 중국에 사신을 맘대로 못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11]

한사군이 동이 지역을 통제하던 것을 고구려가 바톤 터치했다는 견해도 있다. 넓게 보면 광개토대왕 대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것과 신라에 고구려 문화를 침투시킨 것이 삼국통일의식의 기반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그 결과 백제, 고구려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가 나중에 '삼한일통'을 정당화하려 이용한 '고구려 = 마한' 드립도 고구려가 마한의 고토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것이 배경이다.

가장 중요한 정복군주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아도, 광개토대왕은 독보적이었다. 한국사 전체를 살펴볼 때 남북국 시대 이후로는 이렇다할 정복 전쟁이 없었다. 기껏해야 발해, 고려, 조선이 반항적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수준이었으며, 시대적으로 팽창할 상황도 아니었다.[12] 허나 광개토대왕은 일생을 전방위적인 정복 사업에 투신했는데, 중원이 쪼개진 이합집산의 정복 국가시대라는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그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낸 것이었다. 이게 어찌보면 기회주의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회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날려먹는게 역사에서는 다반사다. 어차피 역사적인 업적이라는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개 이런 기회를 타고난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게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은 일종의 국방 안정을 꾀하는데 도움을 줬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까진 그래도 강성한 백제와 후연이 고구려를 먹으려고 벼르고 있고, 주변 국가인 거란이나 다른 유목민족들도 고구려를 벼르고 있던 상황에서 정복 전쟁에 승리하고 이들을 밟아놓은 덕에 백제와 후연 및 다른 중원 국가들도 당분간은 고구려를 정복할 생각도 못하게 되었다. 즉, 고대사에서 정복 활동이 큰 의미인만큼 정복 활동의 업적과 동시에 국방 안정에 대한 업적도 나름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아들 장수왕도 중원보다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는데 주력할 수 있었다.


4. 삼국 통일과 중원 정복?[편집]


많은 한국인들이 고대 신라의 삼한일통에서 만주를 상실한 기억과 근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광개토대왕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삼국을 통일하거나 중국을 정복했을까?"하고 상상을 하곤 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 부근의 영토를 유지하긴 했지만, 삼국끼리 치고 박고 싸우던 고구려 시절과 달리 발해는 신라와 그렇게 투닥거리지도 않아 현 한국사와의 연결성이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고, 그나마도 거란에게 멸망하며 고려에 발해 유민들이 흡수된 뒤에 한민족은 만주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기에 광개토대왕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커지고는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전성기 장수왕-문자명왕 대에도 결국 그렇게 못했던 것을 보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13] 한반도가 그리 쉽게 다 먹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반도'라고 하면 대부분이 그 경계로 생각하는 압록강-두만강 이남 지역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적이 없다.[14] 장수왕도 백제와 신라 나제동맹 연합을 100년 가까이 수없이 공격해 한강 유역까지는 차지했지만 결국 완전 정복은 자비 마립간 등의 우주 방어에 번번히 막혔다. 외세세력으로는 한나라고조선을 멸망시켜 한사군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한4군 가운데서 임둔군은 오래지나지 않아 동예옥저로 떨어져 나갔기에 완전한 지배라고 볼 수 없었고, 그나마도 한반도 남반부는 수십여개에 달하는 국가들이 난립해있었다. 당나라도 한반도를 먹으려고 했지만 나당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나마 정복했다 볼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제대로 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20여년만에 발해로 재독립하였으며, 몽골 제국도 마찬가지로 고려를 부마국으로 복속시키기는 했지만 여몽전쟁이 오랜기간 동안 지리하게 이어진데다가 무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수십년이 걸리는 매우 지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온전히 영향권 안에 편입시킬 수 있었으며 이마저도 중앙집권제가 퇴보하고 봉건제가 부활한 원나라의 상황 탓에 고려가 사실상의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후금 시절 사르후 전투정묘호란에서 승리하고, 국호 변경 이후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나라조차 조선을 조공국으로 삼는 정도에 그쳤고, 태종 숭덕제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진짜 목적이었던 조선 병합만큼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는 순간까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일본 제국이 1910년에 대한제국을 완전병합하기는 했으나 이 역시도 수십년에 걸쳐 조선의 성장을 방해하는 등의 뒷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온데다가 무엇보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잇따라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운빨이 크게 작용했다. 만약 두 전쟁에서 하나만 패배했더라도 일본 제국은 조선을 먹을 수 없었다. 그마저도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망으로 인해 한반도의 독립이 이루어지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한반도, 특히 백제와 신라가 기반한 삼남 지역은 농업 생산력이 받쳐줘 인구 밀도가 매우 높은데 이 삼남 지역은 고려시대~조선시대 내내 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농경지대였다. 인구로는 실로 어마어마한 나라가 바로 옆에 있어서 부각이 잘 안되기는 하지만,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로는 세계적으로도 상위권이다.[15] 조선 시대 인구는 세계적인 기준으로도 상위권이었고[16] 앞으로 통일이 되면 성립될 통일 한국의 인구[17]도 세계적인 기준으로 많은 편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력의 기반은 경제력이고 경제력은 결국 인구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을 곧바로 정복하는 것은 아무리 확장 일로에 있는 전성기의 고구려라 해도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는 산악 지형 역시 많기에, 제각각의 세력들이 외적을 방어하기 쉬워 하나의 통합된 정권이 나오기 어려웠었다. 실제로 한반도 내에서 삼국은 서로가 주도권을 쥔 적은 있어도 어느 한쪽이 쉽사리 통일은 하지 못했다. 기껏 한 통일마저도 통일이라고 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특히 소백산맥이라는 자연방어선을 사용하는 영남 일대의 신라는 국력 대비 공략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상황이 이런지라 광개토대왕이라 한들 삼국을 완전하게 통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만약에 삼국이 온전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었으면 막대한 인구수와 생산력을 갖춘 막강한 강대국이 탄생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사실 고구려의 삼국통일을 거론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을 오해한 결과이다. 고구려의 세계관 및 천하 질서는 자기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나라와는 대등하게 교린하고 자기보다 하수인 나라들에게는 상국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즉, 애당초 고구려라는 나라가 정복을 중시하는 제국을 지향한 나라가 아니었다. 위에서 알아본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역시 모두 이러한 고구려의 세계관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18]

게다가 중요한 점은 정복과 통치는 별개라는 것이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방대한 영토들을 제대로 통치를 못해 순식간에 와해된 국가는 한두 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몽골 제국이나 마케도니아 왕국, 소비에트 연방, 독일 제3제국, 그란 콜롬비아 등이 있다. 지금이야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 백제는 말 그대로 남남으로 보는 성격이 강했다. 전자는 북방계 예맥, 후자는 남방계 한의 후예였으므로. 물론 그 전에 북방계 고조선과 남방계 진(辰)의 교류가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동질 의식 역시 있었다 할 수 있겠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된 건 빨라야 6세기 이후의 삼국시대 말기다. 이때부터 소위 '삼한'이라 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동질성과 타자로서의 인식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다. 이런 이질성을 극복하고 정복 이후 통치까지 순조롭게 진행했을 가능성은 낮다.

한편 6세기 이후 더욱 완전한 동질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북방 민족으로부터의 많은 외침을 받는 과정에서 일정한 민족 의식이 생긴 이후인 고려시대 말기부터였다. 당장 후삼국시대에 각 지역의 호족들이 삼국 부흥이라는 기치를 얼마나 쉽게 내걸었고, 또 거기에 지역민들이 얼마나 쉽게 호응했나를 생각해 보자. <거타지 설화> 같은 내용을 보면 심지어 9세기 중반에도 '백제' 해적이라고 가리킬 만한 대상이 등장한다. 경남에서는 가야의 부흥이라는 명분도 호응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초중기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부흥운동이 수 차례 있었다. 비록 고려 조정에게 토벌당해 실패했지만 그 구호가 삼국통일 이후 수백년이 지난 고려 중후기까지도 백성들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생전에는 한반도 남부인들은 잡아다가 묘지기로 부려먹는 존재에 불과했다. 사실상 정복보다는 그냥 두들겨 패고 말 고분고분히 듣게 만드는 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신하로 부리고, 점진적으로 잡아먹는 그랜드 플랜을 세워 둔 모양이었으나 백제 개로왕의 반발과 신라의 이탈로 실패한다. 다만 이때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한 덕에 신라에 고구려와 서역의 문화가 이식되고, 이는 후세에 한국이 고구려 계승을 주장할 근거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런저런 문제를 떠나서 정복에 드는 군사적 역량만 따진다 하더라도 삼국통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희박해보인다. 실제 역사에서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0,000명의 대군을 가야에 파견하자 후연이 쳐들어오거나 후연과 백제가 서로 눈치를 봐 가며 각자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특정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거둔다. 애초에 한 나라가 동서남북 여러 전선을 유지하는 건, 그 나라가 설령 대제국이라도 매우 힘들다. 그 거대한 당나라마저도 티베트와 신라를 저울질하느라 고생했던 점을 기억하자.

즉위 17년 후연이 사실상 멸망하고, 고구려의 종족 내지는 하국으로 전락하면서 광개토대왕은 그가 죽기까지 5년간 성을 쌓고 지방을 순행하는 등 굳히기에 힘썼고, 이는 광개토대왕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장수왕 대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이는 재위 초의 격렬한 정복활동과 상당 부분 대비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광개토대왕은 딱히 정복 전쟁 계획을 더 추진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새로운 정복 활동을 준비하다가 사망했을 공산도 있다. 실제로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먹고 신라까지 마무리하러 내려왔던 것을 볼 때 고구려 내에서도 "저거 저거 뒤통수가 간지러운데 언제고 정리해야 되겠다"라는 인식이 생겼을 개연성은 높다. 장수왕 대에 막히긴 했지만. 광개토대왕의 이른 죽음과 막강한 전투력 및 전기를 판단하는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하는 생각은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백제의 국력 회복이나 신라의 성장, 그리고 광개토대왕 못지 않았던 장수왕의 역량을 고려해보면 가능성은 그렇게 높진 않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5~6세기 고구려, 백제 사이의 한강 유역 영유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중심적인 if 시나리오에 지나치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편 중국 방면의 정복 활동은 요서, 아무리 영향권을 뻗쳐도 현 베이징까지가 끝인 것이 확실하다. 후연 정벌에서 요서까지만 진출하고 더 이상 중국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못한 것도 되고 안한 것도 된다. 당시 중원의 상황은 막장의 끝으로 치달아가고 있는 오호십육국시대인지라, 도저히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당시 중원은 명나라 말기처럼 내분으로 무주공산이 되어 무혈입성할 수 있던 게 아니라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날고 기는 유목민 북방 민족들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부족전쟁을 치루는 혼돈의 카오스 시기였기에 광개토대왕이라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기회가 아주 없던 건 아니고 북위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가 기회이긴 했으나 이때 고구려는 이미 광개토대왕 사후 1세기 이후의 일이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에 밀려서 한반도조차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중원에서 날고 기던 5호 군웅들이 전진이나 북위 때에 와서야 외부 침략자인 그들이 중원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까지 자그마치 1세기가 소요되었다. 그 사이 무수한 세력과 나라가 명멸해 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중원 진출은 단순히 땅따먹기 정복에서 국한될 사항이 아닌 것이다. 또 고구려식 천하관에서 난하 서쪽의 만리장성을 넘는다는 건 무의미했다. 고구려 스스로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언급 등을 보면 결과적으로 고조선의 고토 이상의 땅을 취하는, 무리한 확장 자체를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의 통치 방식은, 아직 기록적인 부분이 미흡하여 논란이지만, 토착민 자치를 허용하면서 군사를 주둔시키고, 어느 정도의 동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었는데, 고구려와 이질적인 중원 문명권에서는 이런 통치 방식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동화 정책, 간접 지배화, 그리고 간접 지배화 지역의 직접 지배화가 먹혔던 건 고구려의 주요 정복 지역이 고조선, 부여, 백제, 신라처럼 고구려와 어느 정도 문명이 동질적이었던 데 이유가 있다.[19]

하지만 난하 서쪽은 전혀 다른 문명권이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구를 기반으로 무력으로 정복은 한다 쳐도 정치적, 문화적인 한계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원 정복은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 되는 것이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국력의 한계는 둘째 치고, 역으로 고구려의 문명이 흡수되어서 중국에 동화될 경우의 가치 문제를 판단해 본다면 차라리 안전한 형태의 국경선과 영토 체제를 갖추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북연을 그렇게 존속시켰고, 나중에 요서 지역에 대해서도 난하와 조양 서쪽으로는 영토 확장의 의도를 보이지 않았던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카이사르조차 라인강 이북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않고, 안정적인 국경선을 구축하는 정치적 판단을 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 안정화와 문명 안정화를 꾀했던 바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오랜 시간 이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공략했다가도 결국 중원 문명에 흡수 및 동화되는 사례를 몇 백년 내내 지켜본 나라이기도 하다. 중국이 막장 시기이긴 하나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하면 오히려 별개 천하로 차치하여 경계를 제대로 긋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게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북연을 완충 지대로 기능하게끔 조치했던 점이 이를 증명한다.

수천년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화북, 혹은 그 너머 중원까지 장악한 북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중 현대까지 이어져 살아남은 나라는 몽골[20] 하나밖에 없다. 설령 고구려가 무력으로 화북이랑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도리어 고구려인(+삼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거나 행여나 한족에 동화되기라도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그리 중요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거나 심지어는 중국 일부의 주장대로 고구려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한민족중국 변방의 한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 수도 있다. 가장 최근에 그런 식으로 몰락한 북방민족이 바로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이다. 물론 만주족이란 민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지금의 중국도 한족보단 한족과 여러 소수민족이 포함된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내세우긴 하지만, 현실은 한족 중심이란 건 부인할 수가 없다.[21][22]

5. 조선 문인들의 평가[편집]



5.1. 권근[편집]


옛날 진 양공(晉襄公)이 검은 상복(墨衰) 차림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춘추에서 이를 비난하였다. 고구려 왕 이련(伊連)이 세상을 떠나자 3개월을 넘지 못하여 그 아들 담덕(談德)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쳐서 격파하였으니, 그 애통함을 잊고 꺼리지 않음이 너무 심하다.

무릇 적병이 성문 밖에 쳐들어와서 종묘와 사직의 존망이 달려있다면 부득이 전쟁을 하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백제의 군사가 고구려 변경을 침범하지도 않았는데 담덕이 바야흐로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상사(喪事)도 집어치우고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쳤으니 이것이 인자(人子)의 애통한 마음이 있는 자이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진사(辰斯)가 이련 6년에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다음 해에 또 도압성(都押城)을 쳐서 빼앗았는데 이련이 보복하지 못하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담덕이 왕위를 계승하자 몇 달도 지나기 전에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쳐서 그 수치를 씻었으니 이는 어버이를 빛나게 한 것이요, 꺼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적국과 은혜가 있든지 혹은 원한이 있든지 간에 후손에 이르기까지 두고 두고 갚는 것은 아니다. 구부(丘夫)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부왕(父王)을 죽인 원한을 갚지 못한 것은 죄가 될 수 있거니와 담덕과 진사에 있어서는 이미 2세(世)가 지난 후인데 어찌 또 보복을 한단 말인가?

당초 침류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련이 조문하여 위로하지는 않고 남의 상중(喪中)을 틈타서 갑자기 침범하였으니 이는 간악한 짓이다. 진사왕이 은인자중하여 곧 보복하지 않고 반드시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린 연후에 고구려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곧은 것이 백제에 있고, 굽은 것이 고구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사왕이 두 번을 이기고 이련은 끝내 보복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또한 그 죄를 자복(自服)한 것이다.

담덕이 이에 그 욕심을 징계하고 원한을 풀며 화친을 도모하여 선군(先君)의 허물을 뉘우치고 분쟁을 그치게 하는 아름다움을 이룩했다면 그 어버이를 빛나게 함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의리(義理)와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보복으로써 일삼았으니 전란이 어떻게 그칠 수 있겠는가?

삼국사절요



5.2. 안정복[편집]


적인이 침공해 와서 군부(君父)를 살해하면 그의 신자(臣子)된 자로서는 창을 베개삼고 아침을 기다려 피를 뿌리며 싸움에 나가서 오직 원수 갚을 것을 결심하여야 하며, 설사 자기 몸으로 하지 못했으면 아비는 이러한 마음을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은 이러한 마음을 손자에게 전해서, 비록 백대에 가서라도 기어코 복수를 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백제의 침공을 받아서 죽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이 못나서, 서로 이어 왕이 되었지만 복수할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23]

그의 손자 광개토대왕에 와서야 부왕(父王)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비록 백제 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가져다가 조부의 무덤 앞에 제사 지내지는 못하였으나, 이번의 한 일은 또한 의롭다 할 만한데, 권씨의 논평이 이러함은 무슨 까닭인가?

고국원왕이 죽은 지 겨우 22년이 지났다. 그런데 권씨의 말대로 한다면 조부의 원수를 보복해서는 아니 되며, 22년의 일을 오랜 세대가 지났다는 핑계로 잊어야 옳겠는가? 주자(朱子)는, 당시 송(宋)나라가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간 뒤이고 휘종흠종이 포로가 되어 간 지 50년 ~ 60년으로 오래 되었으며[24]

, 효종(孝宗)이 휘종과 흠종의 두 황제에게는 촌수(寸數)가 먼 처지이지만 말하기를, "국내의 정치하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며, 휘종·흠종의 원수 갚는 마음을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주자의 마음은, 군부(君父)의 원수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세대가 오래 지난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권씨가 말한 것처럼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원수만을 갚으려고 마음먹었다.'하여 비난하겠는가? 슬프다!

《동사강목》



5.3. 최보[편집]


광개토(廣開土)는 영웅의 위의로 특출한 재주가 있어, 능히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였다.

《동사강목》



6. 근대 역사학자들의 평가[편집]



6.1. 신채호[편집]


광개토대왕은 야심이 충만하고 무략(武略)이 절등한 인물이지만, 기실은 동족에 대한 사랑이 많아서 백제를 정벌함은 왜와 연결함을 미워하여 공벌함이요 그 땅을 탈취하려는 공벌이 아니니... 대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성한 선비(鮮卑)를 정벌하려는 것이니 북방의 전쟁이 비로소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것... 광개토대왕의 영토 개척이 서쪽으로 더 확대될 수도 있었는데, 북연北燕에서 고구려인의 후손인 고운(高雲)이 즉위함으로써, 동족을 사랑하는 대왕이 전쟁을 그만둔 결과...

조선상고사



6.2. 다른 나라의 역사학자들[편집]


일본의 역사학자 타케미츠 마코토는 그를 관대하고 온화해서 백제 백성들에게까지 사랑받은 왕이라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타케미츠 마코토는 광개토대왕을 다루고 있는 인문 서적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낸 사람이다.

중국의 동북 지방(만주) 역사 연구에 있어 큰 업적을 남긴 중국의 역사학자 진위푸(金毓黻)는 그의 저서 《동북통사》에서 요동 지역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며 광개토대왕이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을 고구려에 있어 큰 공로로 평가하고 있다.


7. 현대 국내 정치인들의 평가[편집]


광개토대왕에 대해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별로 없으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만원권 지폐가 만들어지기 전 초상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었다. 10만원권 떡밥에도 오르내리는 이유 중 하나.

개인으로는 신사임당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율곡 선생이 이미 5천원권 초상 인물이기 때문에 모자()에게 치우친 면이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 기상을 갖고 국운을 개척했던 광개토태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8. 매체 및 역사학자들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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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멘터리 전쟁사 임용한 출연
KBS에서 방영했던 팩츄얼 사극 한국사기에서도 교수 및 역사학자들이 평가를 했다.

지도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선언적인 자기 책무를 연호를 통해서 영원한 즐거움(영락, 永樂) 영원한 평안함을 주는 그런 존재로서, 그래서 자기가 등장하면서 영락을 표현했고 죽으면서 평안으로 완결이 됩니다. 왕의 이름으로서

생애에 대한 평가


말 그대로 내가 다스리는 동안만큼은 어찌되었건 백성들에게 평안과 영원한 복락,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주겠다는 선언적인 의미도 있고 자기의 목표적인 의미도 있고, 결국은 국가가 안정돼야,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안정이 돼야 국민들은 편안한 것이거든요.

연호 영락(永樂)에 대한 평가

2007년에 방영된 광개토대왕 시대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경우, 고구려가 거란족을 공격한 일을 두고 잔혹한 학살이라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다만 이 부분은 엄밀히 말하면 역사의 선후관계를 잘못 안 것이다. 거란족은 378년 9월 고구려 북쪽의 마을 8곳을 공격해서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잡아갈 정도로 이미 고구려에 큰 위협을 주던 적대 세력이었다. 자국을 공격한 국가를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노릇. 물론 태왕사신기 자체가 제작 과정에서 여러번 스토리를 엎었다고 할 정도로 판타지스럽게 흘러가,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진 스토리가 됐긴 하다만.

국사 강사 황현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별명 중 하나인 호태왕이라는 명칭은 광개토대왕 사후에도 요동(만주)의 패권을 가진 군주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요나라야율아보기, 금나라완안아골타, 몽골 제국칭기즈 칸, 청나라누르하치 등,[25] 다만 황현필 강사 발언 이외의 출처는 확인되진 않았다.


9. 일부 탈민족주의 지식인들의 평가[편집]


반전주의, 반 국가주의 성향이 강하거나 혹은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사들은 침략 전쟁을 벌인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을 영웅으로 칭송하는게 과연 옳은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 광개토대왕은 그의 생애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정복 활동이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시켜줬는지에 더 초점이 맞춰진 측면은 있다. 이와 관련해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는 "이웃을 침략한 적 없는 평화 민족? 좋은데 그럼 광개토대왕은 뭐냔 말이야!"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좀 뜬금없기는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벌인 정복 전쟁의 무대가 오늘날 중국이라는 점을 들어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의견도 있다.[26]

다만 탈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역사를 보는 역사가들의 경우 굳이 광개토대왕 한 명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보통은 고구려를 보는 시각 그 자체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 정복 국가라는 이미지와 함께 민족적 자부심 고취로 떡칠되기 쉬운 고구려에 대한 시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는 것. 이걸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극단화된 대표적인 사례가 환빠이다.


10. 서브컬처[편집]


형민우의 《태왕북벌기》에서는 고구려 장수가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 활동을 보며 "이분이라면 중원 정복도 불가능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1] 광개토대왕 이후로는 중국의 남북조가 만리장성 동쪽 지역은 고구려가 관할한다는 식으로 나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는 남조와 북조의 분열로 중원의 패권이 분산되었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꽤 이례적인 사례다. 광개토대왕이 인접한 모든 방향의 지역 강대국들을 대부분 복속시키거나 제압한 영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후연, 백제, 동부여, 패려 등 당시 만주한반도권에 자리잡은 거의 대부분의 주요 국가를 복속하거나 굴복시켰다.[2] 후연의 신민들이 지속적으로 고구려로 이주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 당시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와의 강화를 위반하고 가야, 일본과 연합군을 결성했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삼국동맹을 격파하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려 군대를 한반도 남부에서 신속히 철군시킬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신성과 남소성이 고스란히 후연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3] 이러한 점에서 서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교되기도 한다.[4] 뛰어난 명군임에는 틀림없으나 영양왕보다 을지문덕이 부각되었듯 현종 자신보다는 오히려 신하인 강감찬이 부각되었고, 현종의 치세가 사극화 되는 일도 천추태후에서 초반부 부분만 나오는 경우를 빼면 없었기 때문에 재조명도 최근 들어서야 있었다. 물론 현대인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고려 당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명군으로 평가되었다.[5] 다만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다른 문화권을 많이 배려하는 요즘 선진국에서도 자국의 정복 군주는 은근히 찬양하는 기류가 있다. 물론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국가가 지금도 실존하는 경우엔 상대적으로 자제하는 경향은 있다.[6] 위치는 불분명하다. 삼강평원 일대나 두만강 일대로 추측하고 있다.[7]삼국사기》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만 광개토대왕 즉위 이후 연패를 거듭하다 사냥을 나가던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유력한 배후는 바로 아신왕.[8] 일단 병력에서 백제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무리없이 동원했고,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그래도 한때나마 중원을 지배했던 국가였다. 어쨌든 후연은 천자를 공표한 중원의 왕조인지라 한반도 국가와 비교하기는 무리다.[9] 온갖 민족과 나라가 나름 흥망성쇠를 이루고 있는 데다가 위세를 떨치는 민족, 국가는 당대의 유능한 군주가 이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난세의 지역에서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 치하에서 막 재기한 고구려를 이끌고 북방의 패권자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10] 왜가 중국 황제에게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을 못보내니까 고구려 좀 쓸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표문을 보낸 적도 있다.[11] 물론 신라는 아예 서해에 영토를 한 평도 가지지 못한 신세라, 처음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도 고구려 사신에 딸려 보내서 "우리도 왔어요" 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12] 물론 고려의 북진 정책과 강동 6주 획득, 공민왕 시기 요동 원정, 조선 시기 4군 6진 개척과 같이 확장이 아예 안 이루어진건 아니나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에 비할바는 아니다.[13] 물론 장수왕 시기와 광개토대왕 시기는 좀 다르긴 하다. 장수왕때는 한창 북위가 세를 떨치던 시절이라 화북이 사실상 북위의 손에 들어가 있어서 고구려가 어찌 해 볼 상대가 아니었고, 광개토대왕때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14]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현 시대에도 냉정히 이야기 하면 남북분단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국가는 없다.[15] 대한민국의 인구밀도 순위는 세계 13위이지만, 인구 1000만을 넘는 국가들 중에서는 3위이다.[16] 일본과 비교할 경우 신라~고려시대까지는 엇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면적과 기후 여건이 훨씬 유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역전하는건 기정사실화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이미 밀린 것으로 보며, 특히 일본 센코쿠시대가 끝나고, 에도시대에 들어서며 수 배의 차이로 벌어졌다.[17] 7000만이 넘는다.[18] 단, 정말 광개토대왕 대에 삼국(+가야)을 통합할 역량이 있었어도 천하관 때문에 남부 국가들의 자치성을 허용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후방의 잠재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게 전략상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19] 여기서 신라를 단순 남방계로 보면 안 된다. 신라의 전신인 진한이 오히려 마한, 변한에 비해 고조선계 주민 비율이 대단히 높아 고고학적으로는 거의 전체가 그냥 조선계 주민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辰)은 남방계가 아니라, 고조선이 전국시대 연나라에게 정신없이 깨져나갈 때, 대거 발생한 조선계 유민 중 아예 한반도 남부까지 멀리 가는 걸 선택한 이들이 주류다. 고구려 또한 정작 부여계 주민인 지배층은 건국 초에는 소수였고, 그 대부분은 전국시대 연나라에게 밀리기 전 고조선을 구성했던 요동 동부 주민이었으니 신라와는 고조선이라는 강력한 연계가 있다.[20] 그 몽골조차도 현대에나 중국에서 독립할 수 있었을뿐더러 그마저도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이었다. 내몽골의 차하르 몽골족과 신장오이라트 몽골족은 끝내 중국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시베리아부랴트 몽골족과 유럽의 칼미크인은 러시아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21] 다만 좀 과장 섞인 주장인 것은 알아두어야 한다. 중원을 차지했던 이민족 모두 평소엔 부족 단위의 세력들이었던데 반해 고구려는 이미 확고한 국가 체계를 갖추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를 포함, 삼국 모두 정주민족국가였다. 세력이 약하던 시절엔 부족단위로 쪼개져있던 유목 민족들과 그대로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22] 그리고 그 유목민족 조차도 원래의 지배계층과 발원지역의 거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했다. 지금의 중국같은 민족구성과 정체성은 청나라 이후 공산주의 중국이 성립되면서 생긴 것이다. 그마저도 공산당의 역사왜곡을 동반한 지속적인 노력끝에 이루어진 것이다.[23] 소수림왕고국양왕이 백제에 대한 원수를 바로 갚지 않은 건 당시 고국원왕이 갑작스레 전사한 타격이 너무나 컸기에 섣불리 건드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우선 내치에 집중하였고, 소수림왕은 불교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의 중앙집권화를 꾀해 맷집을 불렸다.[24] 정강의 변 참조.[25] 이들의 조상민족 과거 고구려가 만주-요동의 패권을 차지했을 때 직간접적으로 고구려의 영향권에 존재했다는 점에서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영향이 후대의 인식 이상임을 알 수 있다.[26] 출처:《당신들의 일본》/ 유순하 지음/ 문이당(다만 이 책의 저자가 일본 출생이라 그런지 일본을 띄우면서 그와 반비례하여 중국을 폄하하는 스탠스도 보이니 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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