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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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기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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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8

1985년 이영민 타격상
주은현
(광주제일고등학교)

김경기
(인천고등학교)


김현철
(경북고등학교)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1996 1루수 부분 골든글러브


김경기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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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37번
홍문종(1989)

김경기(1990~1992)

이재주(1993~1995)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00번
결번

김경기(1993~1995)

팀 해체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00번
팀 창단

김경기(1996~2000.7)

결번
SK 와이번스 등번호 00번
결번

김경기(2000.7~2001)(선수)

결번
결번

김경기(2007~2016)(코치)

임석진(2018~ )



파일:external/www.sksports.net/Large_2014100723011512716_6.jpg
이름
김경기(金敬起 / Kyung-Ki Kim)
생년월일
1968년 4월 5일 (56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동구[1]
학력
한양초 - 상인천중 - 인천고 - 고려대
가족관계
아버지 김진영, 사촌 김풍기
포지션
1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1차 2순위 (태평양 돌핀스)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 (1990~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0)
SK 와이번스 (2000~2001)
지도자 경력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3~2005)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6~2010)
SK 와이번스 2군 주루코치 (2010~2011)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11, 2014)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12~2013)
SK 와이번스 1군 수석코치 (2015)
SK 와이번스 루키군 타격코치 (2015)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6)
해설위원
SPOTV 야구 해설위원 (2017~)

1. 개요
2. 미스터 인천
3. 선수 경력
3.1. 아마추어 시절
4. 지도자 경력
5. 해설자 경력
6. 여담
7.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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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소속의 내야수. 現 SPOTV의 야구 해설위원.


2. 미스터 인천[편집]


인천야구의 적자 김경기
김경기, 그와 함께해 인천은 행복했네

삼미 슈퍼스타즈 2대 감독이자 '인천야구의 대부'로 불리는 김진영 감독의 아들이었기에 학창시절부터 인천야구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들보로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서 데뷔한 후 인천 연고 팀에서만 뛰며 인천야구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선수였기에 별명 또한 그 명성에 걸맞는 미스터 인천[2]이 됐다.

SK 와이번스 팬은 물론이요, 과거 현대 유니콘스 팬들 역시 굉장히 좋아하는 선수다. 과거의 현대 팬덤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넥센 팬과 현대에게 버림받은 후 응원팀을 옮긴 인천 지역 SK 팬들 사이에선 항상 삼청태를 둘러싸고 대립이나 갈등을 빚고 있지만, 김경기란 선수 하나로 공통 분모를 삼는 이들이 꽤 된다. 그만큼 그가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단순한 선수를 넘어서는 무언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태평양을 응원하던 도원전사들에게 김경기가 어떤 존재였냐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그 선동렬보다 사천 표나 더 표를 많이 얻었을 정도였다. 김경기는 인천야구의 희망이자 모든 것이었다.

21세기에 야구를 접한 야구팬들은 김경기의 통산스탯을 보고 "예상보다는 그렇게 성적이 뛰어나진 않았는데?"라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태평양 돌핀스 시절이나 그 이전부터 인천야구를 지켜본 골수팬들은 김경기의 존재감은 엄청났다고 인정한다. 애초에 태평양 돌핀스의 타선이 지독한 물방망이여서 김경기의 활약은 천금과도 같았으며, 그럼에도 누적스탯이 좋지 못한 것은 상대팀 투수들도 김경기를 집중견제하다보니 피로와 부상이 누적되며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방망이 물방망이라고만 해서 잘 이해가 안간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1992년경에서 1993년도 당시의 태평양 돌핀스 타선을 기준으로 1번부터 9번까지, 윤덕규 안타-염감독 병살-유이아빠 삼진-김경기 홈런-김동기(홈런or안타)- 뭐 그 뒤론 삼진삼진볼넷병살삼진범타삼진 그러다가 김경기 안타 이런 식 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편의 견제가 엄청났다. 사실 뭐 유이아빠염감독은 당대에도 답이 안 나올정도로 유명한 멘도사 라인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선수들은..... 그리고 주장으로서 부상 투혼을 펼쳤던 탓에 선수생명이 짧아진 탓도 있어 요즘 기준으로는 매우 짧은 12시즌만 활동한 것도 누적스탯에 영향을 주었다.[3] [4]

이 글을 보면 아니 뭐 이런 막장타선이 다 있나 하겠지만 다행히 인천연고팜이 투수력이 쩔어줬다. 고등학생 시절 류현진을 그저그런 투수로 만드는 미친 동네가 인천이다 김경기가 홈런이라도 치는 날에는 김홍집, 정명원, 정민태, 최창호, 박정현, 조웅천, 안병원 같은 수준급 투수란 투수는 총동원,[5] '우오와앙 1점이다'를 외치며 미친듯이 틀어막았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술로 1994년 한국시리즈까지 갔다.[6] 비록 신바람 야구의 LG 트윈스에게 밀리긴 했지만[7] 그래도 타자는 김경기 하나만 믿는 전술(...)이란 걸 생각해 보면 당시 태평양의 투수력이 얼마나 셌는지 알 수 있다. 진짜 태평양 바닷물처럼 상대팀에게 점수를 짜게 주는 팀이었다. 그리고 타자들은 자기네팀 점수도 짜게 냈지


3. 선수 경력[편집]



3.1. 아마추어 시절[편집]


서울 태생으로 초등학교를 제외한 중, 고교 학창시절을 모두 인천에서만 학창시절을 보냈다. 특히 인천고 재학 시절이었던 1985년에는 전국대회에서 타율 0.457, 46타수 21안타의 성적을 올려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다. 인천고 졸업 후 고려대학교로 진학했고[8], 1988 서울 올림픽 야구 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었으며 대학 4학년인 1989년에는 주전 3루수 겸 4번타자로 IBA 우승을 이끌며 베스트 9에 선정되었다.

당시 IBA 대회 우승은 82년 세계선수권 이후 첫 우승. mvp는 구대성, 베스트9에는 정민태(투수) 와 김경기(3루수)가 선정되었다. 이렇듯 고교시절때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인천에서 가장 기대받았던 유망주 가운데 한명이었다.


3.2. 태평양 돌핀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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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진영(오른쪽)과 함께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1차지명 신인으로 당시 신인타자 계약총액 최대 (8천만원)을 기록하며 입단, 1루수와 중심타자(주로 4번 타자)로 활약하였다.[9] 그의 등번호는 원래 37번이었으나[10][11], 1993년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00번 등번호를 달면서 이때부터 등번호 00번은 곧 그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당시 홈구장이던 숭의동 야구장에서 특히나 강한 모습과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 홈팬들로부터 열화를 받아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매년 0.270~0.290타율 사이에 20홈런 칠수있는 능력을 가진 그는 당시 타선이 약한 태평양 돌핀스의 중심타선의 핵심이었다. 특히 1994년에는 윤덕규-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Y2K 클린업 트리오 주축역할로 활약했는데, 여기서 4,5번 타순인 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KK포는 실로 위력적이었다.[12] 그 해 김경기는 23홈런을 기록하여 활약한다. 더불어 태평양 투수진의 분전까지 더해져 태평양은 정규리그를 2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상대로 스윕하면서 팀 최초 한국시리즈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시리즈에서 신바람 모드 절정이었던 엘지 트윈스에 의해 일방적인 스윕으로 아쉽게 준우승 고배를 마셨지만 타선의 기둥 김경기의 활약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1994년 23개의 홈런으로 25개의 홈런을 친 쌍방울의 김기태를 바짝 쫓고 있었다. 이 당시 김경기는 컨디션이 좋아서 몰아치려고 바짝 벼루었으나, 정규리그 마지막 시리즈 상대였던 쌍방울의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안던지는 등 견제를 당해 홈런을 추가하지 못하였고[13], 이때 홈런왕에 실패하면서 선수생활 무관에 그치게 된다.[14]그나마 1996년 골든글러브는 타서 100프로 무관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이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연속홈런을 치면서 울분[15]을 풀었다고 한다.[16]


3.3.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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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에서도 1996년 당시 타선이 약한 가운데에서 4번 타자로 20홈런을 기록하였고, 중심타자 1루수로 선수 생활을 활약하였다.[17] 생애 첫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커리어 내 유일한 수상). 스포츠 서울에서 수여하는 매직글러브 (수비 )에서도 1루수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나 다음해 1997년에 6개 홈런에 36타점, 0.254타율로 로우 커리어를 기록한다. [18]

1998년에는 유니콘스의 주장을 맡아 용병 쿨바 영입과 더불어 3루수로 전향 [19] 3루수1루수 포지션 전전하면서 박재홍-스캇 쿨바-김경기 이어가는 클린업 트리오 타선의 주축역할을 하여 18개 홈런에 0.274타율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보여주었고,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 창단 3년만의 첫 우승이자 역대 인천연고팀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맛보았다.

1999년에는 0.277 타율에 6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시즌 초까지는 준수했으나 여름 무렵 시즌 중반에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하였다.

2000년 이후에는 주전에서 밀렸고, 시즌이 시작하기 전부터 팀 동료 전준호와의 선수협 관련 마찰,[20] 새로운 인천 연고 팀인 SK 와이번스로의 트레이드설에 휩싸여 김재박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제기되었으며 결국 시즌 중 SK로 트레이드되었다.


3.4.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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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즌 중, 인천 팬들의 요구로 김경기 자신은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해달라고 현대 유니콘스에 자진의사를 밝혔다. 당시 인천 팬들은 현대그룹의 불도저식 강경 연고이전 추진으로 인해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실망감과 반발감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신생팀 SK 와이번스에 대해서도 아직은 곱게 봐줄 수 없었던 시절, 창단 초기의 SK에 대해 정을 못 붙이자, 인천 팬들은 "다른 건 다 좋다! 김경기라도 영입해 달라!"구단에 강하게 요구했었다. 김경기 역시 이 무렵 같은 소속팀 선수인 전준호와의 갈등도 있었고, 그 외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국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것.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당시 현대 팬들은 충격이 매우 컸었다. 김경기는 단순히 '인천 연고지역에만 인기있는'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비인천 연고지역 팬들도 역시 김경기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 씁쓸했던 마음이 컸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SK 와이번스에 현금 트레이드로 입단, 입단식을 했을 때 홈 팬들로부터 열화와 갈채를 받았다.[21] 하지만, 정작 SK 강병철 감독은 노장을 선호하지 않고 어린 선수들을 더 선호하는 등 적극적인 리빌딩을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22] 김경기 역시 강 감독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마침 기량도 하락세를 보였기에 대타 혹은 벤치를 지키는 데 그쳤다. 결국 2001년 시즌 종료 후,[23]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2002년 초 새로 개장한 문학구장 개장경기에서 은퇴식을 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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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후 SK 와이번스에서만 13년간 코치 생활을 했다. 보직이 바뀐 적은 있지만, 중간에 지도자 연수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SK를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미스터 인천.

박경완과 함께 SK팬들이 바라는 차기 감독 0순위이기도 하다.[24] 인천팀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만큼 많은 SK팬들이 김경기가 차기 SK 감독이 되길 바랄 정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근데 박경완이 감독되면 거의 포수판 김성근 될듯연고지인 인천광역시에서는 도원아재팬들에게 영원한 아이돌 같은 존재인데다 팀 내부에서도 따르는 선수들이 많다는 증언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타격코치인 만큼 팀 주축 타자들이 그를 많이 믿고 의지한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3년 시즌 종료 후 이만수 감독 경질 루머가 돌았을 당시 2014 시즌부터 이만수는 경질되고 차기 감독으로 김경기가 내정되어있다는 루머가 SK 팬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2014년 10월 23일에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2015시즌 김용희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 그러나 SK가 7위까지 떨어지는 부진에 빠지자, 구단 내·외부에선 충격요법을 써야할 때라며 김용희를 압박했고 이에 김경기는 자처해서 자신의 강등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김용희 감독이 이를 거절했지만 김경기가 이를 재차 요청한 끝에 결국 2015년 8월 15일부로 루키군 타격 코치로 내려앉았다.스스로 목을 친 남자, 김경기

2015 시즌 후에는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됐다.

2016 시즌이 끝난 뒤 SK 와이번스 2군 감독에서 해임되며 16년 만에 SK를 떠나게 되었다.


5. 해설자 경력[편집]


2017 시즌부터 SPOTV의 해설위원을 담당하고 있다.

해설을 한 지 1년이 넘어가도록 이 항목에 내용 추가가 안 되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무색무취의 해설을 하고 있다. 반대로 얘기하면 딱히 거슬리거나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무난한 해설자로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도 볼 수 있다.
SK와의 경기시에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근무했던 팀이라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한다. 파울타구를 못잡는 나주환이라던가, 고민이 많아진 최정이라던가, 김성현이라던가
해설하다 자주 나오는 말투는 ~인데요, ~하네요. 이 말투를 듣고 있으면 긴박한 상황보다는 편안한 느낌을 줘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청자도 있는 것. 야구를 읽는 눈 자체는 뛰어나지만, 말로 풀어내는 솜씨는 다소 부족한 점도 있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시청자들이 꽤나 보인다.

2018년 8월 4일 KIA와 두산간의 경기, 2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최형우의 내야안타를 두산의 김재호가 잡아 2루 태그 후 1루로 송구 하는 과정에서 1루 주자 이명기의 헬멧을 맞추었다. 공을 사이드로 던지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명기가 슬라이딩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헬멧을 맞는 과정이 생겼다고 해설하여 야구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6. 여담[편집]


  • 집안 전체가 야구집안이기도 한데, 아버지는 전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인 김진영이다. 또한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으로 활동 중인 김풍기는 그의 사촌 형이다. 프로 데뷔 당시에는 배번으로 37번을 달았으나, 1993년부터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 등번호 00번을 달아 그 이후부터 00번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 프로스포츠 사상 00번을 등번호로 달았던 선수는 김경기가 처음이다[25]. 또 태평양과 현대의 백업 내야수이자[26] 그와 고려대, 태평양-현대 시절을 함께했고 SK 와이번스 감독인 염경엽과는 매제사이라고.[27]

  • 아버지를 이어 인천을 대표하는 야구선수로 성장한 인천야구의 적자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야구를 시작할 때에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유는 김진영 감독 본인이 김경기가 야구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걱정해서라고. 결국 김경기에게 야구를 하도록 허락했지만 조건이 붙었다. 반에서 10등 밑으로 떨어지면 바로 야구를 접는 것으로. 김경기는 오로지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연습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공부에도 매진했다. 그 결과 고등학교 3학년 때 본 학력고사에서 담임이 진지하게 체육특기자가 아닌 일반전형으로 고려대 체육교육과에 지원할 것을 권할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고 한다.

  • 여담으로 현역 시절 굉장한 노력파 선수였다. 기자들도 인정하던 연습벌레였다고. 어느 기자에게는 자기는 스스로 생각해도 죽기 살기로 운동하는데 이 정도밖에 못 한다고 말한 적도 있디고 한다. 발언의 자세한 출처는 추가바람. 또한 아버지가 야구선수였으니 만큼 어릴때 김경기를 위한 조그마한 야구장을 만들어줬는데, 어린시절 밤을 새면서 야구를 연습했다고 한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것.

  • 그는 항상 안타를 칠 때나 홈런을 칠 때 십자 성호를 긋는 세레모니를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십자 성호 세레모니는 평소 그가 다니던 인천의 한 천주교 성당의 신부가 제안했다고 한다. 김경기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그의 부인이 매 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김경기의 선전을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 흑역사로는, 선수협시절에 선수협 5적을 주도했던 적이 있었다는 거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전준호와의 갈등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두산 베어스의 감독이자 과거 등번호 23번을 달던 포수와 마찬가지로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다. 2000년 시즌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창설되기 시작할 무렵 전준호가 선수협 참여를 독려하였는데, 당시 선수협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던 현대가 친구단파인 김경기를 통해 이를 저지하면서 둘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전지훈련지에서 둘은 주먹다짐까지 했다고.[28] 아무래도 김경기 쪽이 체구가 좋다 보니, 상처를 많이 입은 쪽은 전준호. 갈비뼈와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준호의 성적을 보면 2000년도 출장경기수가 유독 적다.[29] 하지만 친구단파로 선수협 5적을 주도했던 것과는 별개로 구단 및 코칭스태프와의 마찰, 무엇보다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선수협 5적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생팀 SK로 트레이드, 구단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

  • 선수 시절부터 투수 정명원과 함께 '큰형님'같은 역할을 해왔었고 카리스마가 강했다. 한 가지 일화로, 2007년 SK vs. 현대 수원구장 경기를 치렀던 때였다. 당시 양 팀 팬덤은 말 그대로 서로를 원수 보듯 했으며, 수원구장에서는 서로 언성을 높이면서 욕까지 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경기가 1루 코치로 나올 때면 1루 관중석에 있던 현대 팬들은 김경기가 SK 코치임에도 다들 '김경기! 김경기!!' 연호를 하였고 김경기는 1루수 이숭용하고 같이 기분좋게 웃어주고 농담도 건네받고, 쇼맨쉽 보여주고 파울볼이 김경기 쪽으로 날라오면 1루 팬들에게 기분 좋게 공을 던져주고 이랬을 정도. 이 정도면 그가 태평양 돌핀스 때부터 인천 팬뿐만이 아닌 비 인천지역 연고 팬들에게도 얼마나 사랑받았던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 2007년 4월 10일 문학 홈 개막전으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시작 전 스포테인먼트의 일환으로 개막전 시타를 했다. 이날 시구는 투수 출신 김성근 감독, 시포는 포수 출신인 이만수 수석코치가 했다.

  • 2007 시즌에는 강도를 잡다 중상을 당한 적이 있다. 5월 17일 잠실 경기를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여성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 강도와 격투를 벌인 끝에 주변을 지나던 택시기사와 경찰의 도움으로 강도를 붙잡는데엔 성공했으나 자신도 왼손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강도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경기장에 나왔던 김경기는 상태가 심해져 결국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 후에는 붕대를 감고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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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태평양데이 당시 조웅천과 함께[30]
  • 2008년 SK 구단이 태평양데이 행사를 했을 때 팬들에게 똑같은 유니폼을 판매했는데 이 당시 과거 태평양 시절에 뛰었던 주요 선수들의 배번과 이름을 마킹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가장 많은 마킹 유니폼이 00번 김경기였다.[31] 인천야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 태평양데이 당시 김경기는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 전 시타를 했다.

  • 2009년 9월 6일 문학 롯데전 때 CJ 인터넷 마구마구가 선정한 제4대 프로야구 레전드 스타로 선정되어, 경기 전 레전드 동영상 상영 후 시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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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10월 7일 문학 NC 다이노스와의 경기 시작 전 레전드 데이의 일환으로 동영상 상영 후 사구(死球)시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만 시타자로 나선 자신의 골수팬을 맞추고 말았다. 안티팬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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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공깽스럽게도 코치시절부터 진행되어온 탓인지 탈모가 매우 심하다.

  • 인천 출신 힙합그룹 리듬파워의 노래 중 <만루홈런 인천 remix>[32]에서는 'I'm feelin' like 김경기'로 언급된다.

  • 현역 시절 선수단 내에서 불리던 별명은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고릴라였다고 한다.

  • 생각보다 짧은 활동기간과 짝수 징크스, 말년의 저조한 성적에도 통산 OPS가 .791 로 준수하다.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태평양
120
414
.285
118
29
1
10
68
(5위)
50
7
56
.432
.366
1991
109
392
.291
114
25
(3위)
4
8
59
42
5
33
.436
.341
1992
126
465
.254
118
21
2
21
65
57
1
41
.443
.312
1993
86
318
.280
89
14
0
8
49
28
2
31
.399
.343
1994
124
433
.277
120
19
3
23
(2위)
70
68
3
63
.494
(5위)
.367
1995
96
356
.295
105
19
1
12
46
52
4
42
.455
.36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현대
115
412
.274
113
16
1
20
(4위)
64
54
6
57
.464
.360
1997
91
311
.254
79
21
0
6
51
36
6
49
.379
.352
1998
126
431
.274
118
25
0
18
59
62
5
55
.457
.354
1999
92
264
.277
73
11
1
6
37
37
1
40
.394
.36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49
142
.282
40
5
0
4
21
19
2
33
.401
.417
2001
48
82
.232
19
1
0
2
9
10
0
14
.317
.340
KBO 통산(12시즌)
1182
4020
.275
1106
206
13
138
598
515
42
514
.436
.355

[1] 미스터 인천이라는 별명 때문에 인천 출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서울 출생으로 성동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영 감독이 해병대 야구단과 중앙대학교 야구부에서 감독을 지냈기에 그의 가족도 모두 서울에 살았다. 그래서 초등학교까지만 서울에서 나오고 김진영 감독이 고향으로 돌아와 인하대학교 야구부 감독에 취임하려 할 때 김경기도 중학교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줄곧 인천에서 자랐다.[2] 마구마구에 있는 김경기의 잠재력 중 하나이기도 하며, 한때 가장 쓸모없는 잠재력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구장 랜덤으로 문학구장에서 플레이 시 파워 +3, 컨택 +6(…). 이후 도원구장이 추가되면서 쥐씨알만큼이나마 좋아졌고, 2013년 선수카드 업데이트와 동시에 팀연도 세트덱, '팀 올스타 세트덱으로 플레이 시 파워+1와 컨택트+2'로 변경되었는데, 오히려 13 김선빈의 무등메시 잠재력 부여에 정당성이 모자라니까 물타기할 목적으로(…) 상향시켜줬다는 의심을 하는 유저들만 잔뜩 생겨났다. 이사만루2018에서도 선수 고유 스킬인데 발동 조건이 넥센 팀덱 적용(...)이다.[3] 데뷔년도가 90년이다보니 80년대 야구 문화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탓도 있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프로 10년이면 은퇴할 나이로 여겻으니까... [4] 12시즌간의 활동 중 제대로 활동을 한 것은 90~92, 94년, 96년, 98년 6시즌에 불과하다.93,95,97, 99는 부상 (홀수해 징크스...) , 00~01년은 팀의 리빌딩 진행으로 후보로 분류되었으니 90년대 플레이어로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5] 흔히 투수왕국을 말하면 대부분 해태를 말하지만, 90년대부터 야구를 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태평양을 먼저 말한다. 해태의 경우 80년대에는 최강급 선발과 핵타선, 그리고 중간급의 불펜끝판왕 마무리이였고, 90년대에 들어 이강철과 조계현이 등장했으나 여전히 불팬 투수진은 필승조 1~2명과 마무리 빼면 빈약한 편이였고 타자들도 이종범 홍현우만 믿고 가는 야구를했다. 물론 둘이 사기여서 그렇지 그에 비해 태평양은 선발투수부터 중간, 마무리까지 당대 최고의 투수들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후술하듯 이 미친 전략으로 한국시리즈까지 갔다.[6] 1994년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정동진 감독은 미국에서 코치연수를 받고 돌아와서 메이저리그식 자율야구, 빅볼 성향이었지만, 당췌 선수들이 점수를 내질 못하니... 이런 투수력 위주의 지키는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부상자 관리는 철저히 하면서 최대한 혹사를 피한건 정동진 감독의 공.[7] 삼청태현 계열의 팀들이 유독 LG 트윈스에게는 약했다. 지금도 그렇다는건 안자랑[8] 인천소재 대학교에 야구부가 없어서 고려대를 간 건 아니다. 알다시피 인하대학교에도 야구부가 있고, 김경기의 아버지인 김진영 감독이 인하대 감독으로도 재직한 바 있다.고려대가 더 명문대니까 고려대 갔겠지... 애초에 저 시기에는 법학과나 경영학과 등으로 진학할 수 있었고, IMF 전이라서 능력 없어도 과 상관없이 고려대면 100% 대기업에서 모셔갔으니까[9] 당시 태평양에 거포는 포수 김동기 뿐. 입단 첫해부터 4번타자 거포로 활약했다는 것은 태평양 돌핀스에서 김경기에 대한 기대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0] 참고로 1년 먼저 태평양에 입단한 회전식 오각별 스트라이크 존, 혼이 실린 스트라이크 등으로 유명한 사촌형 김풍기의 등번호가 38번이었다. 이와 연관이 있을 듯.[11] 김경기 이후 이재주가 등번호를 물려받는다.[12] 특히 태평양 돌핀스는 타선이 매우 물방망이였기 때문에 김경기의 활약은 매우 컸다. 그만큼 견제도 많이 받았고 스탯도 손해보았다. 쌍방울 약체 시절 김기태나 꼴찌하던 한화의 김태균처럼.[13] 이때 쌍방울 감독은 유명하신 그분[14] 2018년 10월 13일 광주챔피언스필드 롯데-기아 경기 중계중 언급. 경기 중후반에 캐스터가 롯데 투수 오현택의 홀드왕 관련해서 말을 하다가 김경기 해설위원에게 선수시절 유명했는데 개인타이틀 획득한 적 있는지 물어보자 김경기 본인이 한 말.[15] 본인이 직접 언급.[16] 1차전 2회 선제솔로포, 2차전 7회 8대0으로 달아나는 추가솔로포, 3차전 연장10회초 2:1로 결승포. 영양가 보소 ㄷㄷ, 그 와중에 앞에서 설명한 태평양 공격력 그대로 죄다 솔로포. 태평양에서 홈런이 5방 나왔는데 전부 솔로포[17] 당시 3번 타자는 신인 첫 해 30-30 클럽 달성한 괴물 루키 박재홍이었다. 그 뒤를 받쳐준 선수가 바로 거포 김경기.[18] 그에게는 짝수년도에 잘하고 홀수년도에 부진한 징크스가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현대의 순위는 항상 짝수년도에 잘하고 홀수년도에 부진했다[19] 대학시절에는 국가대표 3루수였으나 프로데뷔후 8년간 1루수였다[20] 이 과정에서 김경기가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냈다는 이유로 꼬투리를 잡아 일방적으로 전준호에게 주먹질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다. 00현대가 역대 최강의 전력으로 손꼽히는데 전준호만 유독 이 시즌 출장이 적은 이유가 이때 부상을 입었기 때문. 아무튼 이 일로 김경기는 주전선수를 부상입힌 것까지 예상못한 구단에 제대로 찍혔다. 마침 더 젊은 이숭용이라는 1루 대체재도 있어 굳이 김경기에 매달릴 필요를 못느낀 구단은 빌미삼아 김경기를 팽한다.[21] 그리고 김경기의 SK 이적 후 첫 경기에서 구단은 경기장에 온 팬들에게 빵을 나눠줬다. 왜 빵이었냐면 등번호가 00(빵빵)이니까. 박재홍 은퇴식은? 참고로 김경기의 SK 이적 후 첫 경기는 개막전 때보다 더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김경기에 대한 인천 팬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하는 부분.[22] 강병철이 90년대 초 2번째로 롯데 감독을 맡았던 시절 이종운, 전준호, 박정태 등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해서 롯데 구단 역사상 두 번밖에 없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던 바 있으며 한화 감독을 맡았을때도 베테랑인 이정훈, 이강돈 등을 전력에서 제외시키고 신인급 선수들인 송지만, 이영우, 홍원기 등에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주며 기용했던 바 있다. 물론 중간에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홍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한화의 주전 선수로 발돋움했으나 당시만 해도 양아들을 기용하냐며 욕을 많이 먹었다. SK 감독 시절에도 이진영, 이호준 등 젊은 선수들을 선호해 리빌딩의 기초를 어느정도 다져서 조범현과 함께 SK 왕조의 기틀을 어느정도 다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커리어 말년에 롯데 감독을 맡았을 때도 욕을 먹어가며 강민호, 김주찬, 이인구, 정보명 등을 기용했었다. 강병철의 양아들 항목 참조. 이는 신진급 선수들보다 노장을 더 선호하고 간혹 즉전감 베테랑을 데려오기 위해 유망주를 내주는 김성근과 상당히 대척되는 부분. 투수 혹사시키는 건 공통점이잖아[23] 당시 SK는 2:6 트레이드로 통해서 1루수 베테량 김기태를 영입했고 이호준의 기량이 한창 성장하기 시작하던 때였다.[24] 실제로 이만수 감독이 물러난 직후 후임 감독을 물색한다고 했을 때 유력한 감독 후보로 꼽혔고 김용희 감독이 물러난 후에도 역시나 후임 감독감이라고 꼽혔지만 이번에도 감독으로는 선임되지 않았다. 다만 구단에서는 감독감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이 만약 감독이 되어 성적이 좋지 못할 경우 인천팀을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 감독을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25] 0번은 많았으나, 0이 두번 들어간 00번은 김경기가 최초다.[26] 백업으로 활동한 건 현대 유니콘스 시절.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주전급이었다.[27] 염경엽 감독의 아내는 김경기의 사촌동생, 김풍기 심판위원의 친동생이다.[28] 다짜고짜 먼저 주먹을 날린 쪽이 김경기다.[29] 전후 4~5년간은 꾸준히 100경기 이상을 출전했지만, 2000년대에는 87경기만 출전.[30] 1994~1995년 당시 두 사람은 나란히 선수였고 태평양데이가 진행되던 시점에는 조웅천만 현역 선수였다.[31] 실제로 이 유니폼을 입고 뛰던 시절이 김경기에게는 최고의 전성기였고 이 시절 초등학교에 다녔던 20대 후반~30대 중반의 팬들은 자연스럽게 김경기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32] 원곡은 다이나믹 듀오의 <만루홈런>. 원곡에선 'I'm feelin' like 이대호'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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