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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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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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75~1992).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1992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0번
김호근
(1983)

김민호
(1984~1996)


이영주
(1997~1998)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2번
박시영
(2013)

김민호
(2014~2015)


나경민
(2016.9.4.~2016)
NC 다이노스 등번호 87번
최경환
(2015~2016)

김민호
(2017~2021)


박태원
(2022)




파일:%B1%E8%B9%CEȣ_ballma.jpg

김민호
金旻浩|Kim Min-Ho

출생
1961년 4월 28일 (62세)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3cm, 85kg
학력
성서초 - 부산동성중 - 부산고 - 동국대 - 부산대학교 대학원
포지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4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84~1996)
지도자
동의대학교 야구부 감독 (1998~2003)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4)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05~2006)[1]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6)[2]
부산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8~2013)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3~2014)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15)
고양 다이노스 타격코치 (2017)
NC 다이노스 1군 타격코치 (2018)[3]
고양 다이노스 타격코치 (2018)[4]
NC 다이노스 잔류군 타격코치 (2019)
NC 다이노스 2군 타격코치 (2020~2021)
해설위원
PSB 야구 해설위원 (1997)
병역
예술체육요원[5]
종교
불교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주요 성적
5. 기록
5.1. 마해영과의 비교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1루수였다.

김용철-김민호-마해영-이대호로 이어지는 롯데 자이언츠 프랜차이즈 스타 1루수 계보의 한 축으로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윤학길과 함께 선수단의 주축 역할을 했던 선수이다.[6]

별명은 '자갈치'.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부산고에서는 조성옥과 같이 뛰었으며, 동국대학교 시절에는 4번 타자였지만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였다. 홈런보다 2, 3루타를 제조하기 좋은 밀어치기에 능한 왼손 타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100m를 12.3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도 가지고 있었다. 동국대 재학 시절 감독은 김인식, 2년 선배가 김성한, 1년 선배가 한대화, 2년 후배는 이건열이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198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김용철, 김용희로 구성된 용용포가 당시 주축이었던 터라 백업 1루수로 뛰었다. 1987년 성적 부진을 이유로 성기영 감독이 경질되고 어우홍이 신임 감독으로 거인군단의 사령탑에 들어서면서 주전 1루수와 4번 타자라는 중책을 맡기기 시작한다.

이때 방망이를 밑으로 내려 홈 플레이트를 건드리는 듯한 타격폼인 "도끼 타법"을 익혔고[7] 1988년 5경기 연속 홈런과[8] 프로 데뷔 첫 3할과 2자리수 홈런을 기록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확실한 4번 타자가 되어 남두오성의 일원으로 롯데의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는데 일조 하였고 그결과 1992년 롯데의 우승과 1995년 롯데의 준우승을 이끌었다.[9] 또한 1990년 올스타전에서는 6회초 세 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터트리는 등 맹활약을 펼쳐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1991년에는 .303의 타율과 첫 시즌 20홈런을 기록하며 신예인 김응국, 박정태 등과 함께 롯데 타선을 견인, 포스트시즌 진출에 크게 공헌했다. 1992년에는 부동의 4번 타자 1루수로 .322의 타율에 16홈런 88타점 등 최고의 해를 기록하며 롯데의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다. 그런데 정작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마지막 5차전에는 심한 감기몸살 탓에 결장한 것이 함정.[10]

그런데 우승 이듬해인 1993년에 .221의 타율과 11홈런 62타점으로 크게 부진했다. 다만 이 시즌이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탓에 롯데의 한 시즌 팀 홈런이 29개에 불과할 정도로 팀 타격 자체가 형편없었던 시즌이라 그렇게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아직 클래스가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1994년은 .296의 타율에 15홈런 78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다. 특이한 것은 이 시즌 도루도 무려 21개를 기록했는데 이전까지 한 시즌 평균 도루수가 4개밖에 되지 않는 10년차 이상의 베테랑임에도 무려 20도루 이상을 기록했다. 당시 롯데의 신임 주루코치인 조 알바레즈가 강조한 적극적인 주루플레이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

1995 시즌도 주전 1루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채 한 달이 지나기 전 신인이자 부산고 후배인 마해영에게 주전 1루수를 내주고 지명타자로 이동했다. 개막 이후 주전 3루수를 맡은 마해영이 수비부담 때문에 타격까지 부진하자 김용희 감독이 마해영을 1루수로 포지션을 변경시킨 탓. 이와 별개로 이 시즌 .215의 타율과 5홈런 39타점에 그치며 부진했다. 이 시즌 롯데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성과를 내지만 포스트시즌에서도 큰 활약을 해 주지 못했다.[11]

1996 시즌은 개막 엔트리에는 포함되었지만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며 그의 줄어든 입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가끔씩 선발 출전해 안타를 몇 개씩 몰아치며 반짝했던 적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너무 부진해 지명타자에서마저 밀려나 주로 대타로 뛰었고 그나마도 2군에 머물러 있던 적이 많았다. 시즌 성적은 44경기에 출전해 .174의 타율에 4홈런 15타점.

1996년 9월 8일 해태전에서 같은 해 은퇴를 선언한 한영준과 더불어 은퇴경기를 치렀으며 이 때 구단으로부터 순금으로 된 기념배트와 공로패를 받았다. 이 때만 해도 KBO에서 은퇴경기는 고사하고 은퇴식조차도 굉장히 드물었던 시기라[12]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2016년인 지금까지도 롯데에서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는 김민호, 한영준 둘 뿐이다. 은퇴경기 성적은 4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전하여 1이닝 수비를 맡고 타석에선 유격수 땅볼로 아웃된 후 교체되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external/media.zenfs.com/4eb25575b2554.jpg

2011년에 열린 경남고 부산고 라이벌전. 왼쪽은 경남고 감독이었던 이종운이고 오른쪽이 부산고 감독이었던 김민호이다.


파일:external/tmtj1.tvcps.com/l_2015032901001751700116931.jpg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 시절. 왼쪽은 역시 이종운.

중요한 대목마다 한방을 터뜨려주며 롯데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현역 선수 시절과 달리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은퇴 후 동의대학교[13] 모교 부산고등학교[14] 등에서 야구부 감독을 맡다가, 2013년 3월 26일부터 롯데 자이언츠의 2군 수석, 타격 코치를 맡게 되었다. 그러다 2015년부터 1군 수석코치가 되었다

2015 시즌 직후 이종운이 잘려나갔을 때 김응국, 박현승, 안상준, 이동훈 코치와 함께 성적 부진을 이유로 롯데의 코치직에서 해임됐다.

이듬해 롯데 구단이 부산지역의 야구 저변 확대와 성장기 청소년들의 체력증진 및 협동심과 인성개발을 위해 티볼 장비를 보급하게 됐는데 초등학교 티볼 교육을 담당할 순회코치로 나승현과 함께 선정됐다.

2017 시즌부터는 고양 다이노스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2018 시즌부터는 NC 다이노스 1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2018 시즌 들어 팀이 프로야구 37년 역사상 가장 저조한 타격 기록을 남기면서 5월 1일자로 이도형과 함께 2군으로 내려갔다. 다만 메인 코치가 이도형이다 보니 김민호 코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듯.

2019 시즌부터는 잔류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2020 시즌을 앞두고 잔류군과 2군이 통합하면서 2군 타격코치 자리로 이동했다.

2021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며 팀을 떠났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4
롯데
60
113
.257
29
9
0
0
9
9
0
12
.336
.328
1985
67
118
.280
33
6
1
1
10
9
0
5
.373
.309
1986
93
279
.233
65
12
2
4
29
22
3
21
.333
.286
1987
104
337
.264
89
15
2
4
50
36
9
52
.356
.358
1988
101
356
.323
(5위)
115
(4위)
17
0
14
64
(3위)
55
6
57
.489
.412
(5위)
1989
115
357
.291
104
24
(3위)
2
4
49
40
3
67
.403
.401
(5위)
1990
79
288
.313
90
19
5
8
45
44
7
38
.497
.391
1991
111
363
.303
110
23
5
20
68
66
1
52
.559
(4위)
.388
1992
118
413
.322
(4위)
133
28
(2위)
4
16
88
(4위)
69
5
74
.525
.418
1993
110
339
.221
75
17
1
11
62
(5위)
44
6
61
.375
.339
1994
117
439
.296
130
(5위)
34
(1위)
2
15
78
(4위)
58
21
47
.485
.360
1995
88
284
.215
61
15
3
5
39
29
2
20
.342
.261
1996
44
93
.172
16
2
0
4
15
7
1
12
.323
.264
KBO 통산
(13시즌)

1207
3779
.278
1050
221
27
106
606
488
64
518
.435
.362


5. 기록[편집]


팀 내에 장타율이 좋은 선수가 없어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까지 4번 타자로 활약. 홈런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최고기록이 1991년 20개)[15] 상복도 없어서, 1990년 올스타전 MVP 외엔 수상기록이 없다. 선수 시절 최고의 해를 보냈던 1991년과 1992년에도 골든글러브 수상은 실패했다.[16]

롯데 역사상 20-20에 가장 가까웠던 2명 중 한 명이었다. 1994년 15홈런 21도루를 기록했었다.[17]시즌 평균 4도루에 그쳤던 선수라 더 놀라운 기록이다. 2007년 본인 인터뷰에선 20-20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홈런은 언제든지 칠수 있으니 도루부터 채워보자고 했단다. 결국 롯데의 20-20은 2015년에 외국인 타자 짐 아두치가 처음으로 달성했다. 국내 선수로 한정하면 2016년 황재균이 처음 달성하였으며, 이듬해 손아섭이 20-20을 달성하였다.[18]

13시즌 동안 통산 타율 0.278, 홈런 106개, OPS 0.796을 기록했다.


5.1. 마해영과의 비교[편집]


젊은 팬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민호의 전성기 이후부터 야구를 본 팬들이 마해영과 비교할 때 어떠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

김민호는 20홈런 시즌이 단 한 번일 정도로 홈런을 많이 치는 타자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2루타를 많이 치며 좋은 장타력을 보였고 좋은 선구안을 바탕으로 괜찮은 출루율을 기록했던 선수다. 덤으로 도루 시도가 많진 않았지만 괜찮은 도루 성공률과 21도루를 기록한 적이 있을 정도의 주력도 갖추고 있었다.
마해영은 알다시피 많은 홈런을 생산할 수 있는 타자였고 더불어 좋은 선구안과 정확도를 갖춘 타자였다.

wRC+로 보면 마해영은 데뷔시즌부터 9년간 못해도 120언저리의 수치를 보이며 생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이후의 3시즌도 부진했다곤 하지만 110에 육박하는 생산성을 보이며 리그 평균을 웃돌았다. 99시즌엔 180의 리그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극상위권의 시즌도 보였고 삼성에서의 3시즌도 모두 150에 가까운 좋은 성적을 보였다. 그 밖에도 130 내외도 3차례 기록했다.

김민호의 경우 백업으로 보낸 첫 두 시즌과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세 번째 시즌까지 리그 평균에 못미치는 생산력을 보였지만 그 이후부턴 점차 나아지며 데뷔 5년차인 88시즌부터 94년까지 7년간 평균 140대의 wRC+를 보이며 전성기를 보낸다. 전성기 동안 네번의 150이상의 wRC+를 기록했으며 리그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활약을 했다.

누적 WAR과 임팩트는 마해영이 월등한데, 마해영이 전성기가 더 길었고 전체로 봐도 300경기를 더 뛰었으며 (물론 시즌별 환산을 해서 경기폭을 줄이더라도 마해영이 우위다.) 임팩트면에서도 데뷔 첫해부터 잘했다는게 있기도 하고 99시즌에 보여준 활약이 이승엽엔 못 미쳐도 나머지 타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2위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해영과 김민호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둘 다 리그에 손꼽히는 전성기를 보낸 훌륭한 타자였고, 마해영이 전반적인 통산 성적, 인지도 등의 측면에서 우위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이 두 프랜차이즈 스타를 각 시대에 1루수로 가졌던 구단과 팬은 매우 행복했을 거다.


6. 여담[편집]


  • 타석에서건 수비에서건 늘 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모습이 그만의 도끼 타법과 더불어 트레이드마크였다. 1루에 주자가 나가 있을 때면 중계 카메라가 1루를 비출 때마다 늘 특유의 천진한 표정으로 질겅질겅 껌을 씹어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별명은 자갈치. 자갈치시장 아지매마냥 늘 재잘재잘 시끄럽다고 선배들이 지어 줬다고 한다.

  • 연봉 협상 때마다 구단과 줄다리기를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당시 롯데가 연봉을 워낙에 짜게 군 탓도 있지만... 어느 해 구단이 부진한 성적 때문에 큰 폭의 연봉 삭감을 제시하자 너무 속이 상해 며칠간 산에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산에 갔다오니 구단이 제시하는 삭감액이 반으로 줄어있더라면서 "한번 더 산에 갔다오면 연봉 동결되겠네."라는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 워낙 입담이 좋아 스포츠서울에서 시즌 중 감독, 코치, 선수들 취재 도중 재미난 멘트나 에피소드를 모아서 소개하던 '나도한마디' 와 '프로야구 주간방담'에서 심심찮게 소개되다시피했다. 그 중 압권은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에 빠져서 타율이 .189를 찍고 있을 때였는데 이제 전 5타수 1안타만 쳐도 타율이 올라가요라는 자학개그로 빵 터트린 것.

  •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인터뷰를 하는 걸 보면 동남 방언을 잘 쓰지 않는다. 동남 방언도 섞어서 쓰기는 하지만 오히려 서남 방언 형식의 말투를 쓰는 편이다.[19]

  • 방송에 출연할 일이 있을때 보여줬던 '뱀장사'라는 개인기도 있었다.

  • 아들 김상현[20] 역시 야구선수로 부산고-동국대에서 뛰었으나 재생불량성빈혈 발병으로 인하여 투병생활을 하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야구를 그만두었다.

  • 프로 입단 후 한 때 타격이 부진해 방망이를 짧게 잡고 치자 대학 시절 은사인 김인식이 "4번타자가 타격이 잠깐 부진하다고 방망이 짧게 잡으면 되냐. 하던대로 해" 조언을 했고 자신있게 스윙을 돌렸다고 한다.

  • 특이하게도 마구마구에서는 유격수 포지션으로 된 선수카드가 있다.. 데뷔 시즌인 84김민호와 은퇴 시즌인 96김민호(이상 스페셜 등급)와 블랙 김민호[21]가 있다. 아마 두산에서 뛰었던 동명이인인 김민호와 헷갈려서 그랬던 것 같은데 굳이 블랙 카드에는 왜 유격수 듀얼 포지션을 추가시켰는지 의문이다.[22]


7. 관련 문서[편집]



[1] ~5월 21일[2] 5월 22일~[3] ~4월 30일[4] 5월 1일~[5]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기사[6] 더불어 강병철, 조성옥 등과 더불어 두번의 우승을 함께한 몇 안되는 프랜차이즈이기도 하다.[7] 김민호의 별명을 붙여 "자갈치 타법" 이라고도 불렀다. 밀어치는 습관이 남아있어 오른 손목을 꺾어 강하게 당겨치는 타격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8] 1999년 이승엽찰스 스미스가 6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할 때까지 KBO 리그 최다 경기 연속 홈런이었다. 이후 이대호가 2010년 한미일 프로야구 통산 최다 연속 경기 홈런인 9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9] 물론 1995년엔 김민호의 노쇠화가 찾아왔고 1995년에 상무에서 특급 유망주인 마해영이 제대하면서 주전 1루수는 마해영이었다.[10] 이날 결장한 김민호 대신 김응국이 4번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11] 김용희 감독이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손동일 대신에 김민호를 대타로 썼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12] 김민호와 한영준의 이날 은퇴경기는 당시 전 구단을 통틀어 3번째 사례였다. 2016년인 지금까지도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는 고작 16명에 불과할정도로 은퇴경기는 매우 희귀하다.[13] 동의대 감독 시절 제자로는 손시헌, 정보명, 최경철, 윤성환, 진종길, 신재웅 등이 있다.[14] 부산고 감독 시절 제자로는 김대유, 김창혁, 도태훈, 이민호, 송주은, 정현, 안중열 등이 있다.[15] 사실 활동 시기를 고려하면 장타력이 나쁜 편은 아니다. 홈런 top10에도 세 번 들었고.[16] 특히 1992년이 가장 아쉬웠다. 팀의 우승을 이끈 주역이었고, 그동안 최고 1루수로 군림했던 해태 김성한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여 김민호에게는 골든글러브를 타기에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하필 홈런왕 장종훈이 그해부터 1루수로 본격 활동하는 바람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대신 김기태는 이전까지 장종훈의 포지션이었던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에 무혈 입성하며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17] 다른 한명은 19홈런 16도루를 기록했던 2010년 전준우[18] 손아섭은 2018년에도 20-20을 한번 더 달성하였다.[19] 의도적으로 방송 인터뷰 상에서는 지역 방언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민호의 부산고 후배이기도 한 정의윤인데 선수들끼리 대화할 때는 동남 방언을 쓰면서도 방송에 출연할 때는 표준어를 쓴다.[20] 김준수로 개명[21] 이쪽은 본 포지션이 1루수, 듀얼 포지션이 유격수다..[22] 비슷한 케이스로 김용철 선수카드의 포지션은 2루수로 되어있다.. 대표적으로 84김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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