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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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金完宣 | Kim Wan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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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9년 5월 16일 (54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반포동
(現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경주 김씨 (慶州 金氏)
신체
164cm, B형
가족
아버지 김성남, 어머니 한수자
언니 2명, 여동생 2명
학력
서울잠원초등학교 (졸업)
세화여자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하와이 대학교 (디지털아트학 / 학사)
종교
무종교[1]
소속사
KWSunflower[2]
데뷔
1986년 정규 1집
독집 제1집

(데뷔일로부터 13867일, 37주년)
별명
한국의 마돈나, 퀸완선
팬덤
삐에로[3]
서명
파일:서명_김완선.jpg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위상
3. 이력
3.1. 1983~1989년
3.2. 1990~1995년
3.3. 1996~2006년
3.4. 2011년~
5. 방송 활동
5.1. TV
5.2. 참여작품(앨범)
5.3. 출연작품(뮤지컬, 영화, 뮤직비디오)
5.4. 단독 콘서트
5.5. 광고
6. 수상 내역
6.1. 주요 수상 목록
6.2.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
7. 이모와의 관계
9. 여담



1. 개요[편집]


파일:대표_김완선.jpg

영원한 댄싱 퀸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 문구

대한민국가수.

2. 위상[편집]



파일:개요_김완선.jpg

1987년의 김완선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서 섹시 콘셉트를 본격적으로 정형화시킨 대표적인 가수.[4] 노출에 의한 노골적인 섹시 콘셉트가 아닌[5], 김완선 특유의 농염한 표정 연기로 섹시한 분위기를 어필하며 당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당대 최고의 여성 댄스 가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6] 특히 1980년대 중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장르를 넘어 한국 여성가요계를 인기로 완전히 평정한 인기 원톱 여가수였다. 댄스 실력으로는 대한민국 여가수 역사상 최고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실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건재하다.[7] 한국의 마돈나라는 말을 처음 들은 여가수이자 섹시 디바다.[8]

가창력 부분은 데뷔 당시부터 여러 안 좋은 말이 있었지만 이후 꾸준히 노력을 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안 좋은 말을 들었다 해도 당대에 인정받은 다른 여가수들과 비교해 그렇다는 것일 뿐, 지금도 가창력 부족을 지적 받고 있는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아이돌 여가수 수준인 것은 절대 아니다.[9] 그래도 1집 시절부터 종종 라이브로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립싱크 모드일 때는 화려하기 그지 없는 춤을 선보이는데 비해 라이브 때는 정적인 동작만 보여줬다. 그러다 최고 전성기인 5집에 이르면 립싱크 때만큼의 화려한 춤은 아니라도 춤과 자연스러운 라이브 노래를 동시에 선보일 정도에 이른다. 또한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매니저였던 이모가 의도적으로 높은 키로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해 힘들었다고 밝혔다.

고음이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김완선에 대해 논의할 때 의외로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은 특유의 비음이 섞인 음색. 나미김정미, 훗날의 조원선과 유사한 쿨하고 독특한 음색으로 유명했으며, 시대가 조금 늦어 본격적인 일렉트로니카 댄스 음악(EDM)의 시대에 데뷔했다면 훨씬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런 쿨한 톤은 오토튠이나 보코더 등 일렉트로니카의 보컬 이펙터와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중가수로서 누구나 목소리를 들으면 알만한 고유의 음색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받은 일이다.

김창훈이 프로듀서를 맡았던 2집 시절에도 타이틀로 내세웠던 곡들 이외의 노래들을 보면 김완선의 음색을 살리려한 노래들이 많았고, 이장희가 맡았던 3집의 경우에는 너무 음색 쪽을 살리려다 김완선의 댄스가수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손무현은 5집에서 김완선의 음색과 댄스가수로서의 능력을 합칠 수 있는 곡들을 만들어냈고 결과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댄스가수임에도 앨범은 록음악 관련 인물들과의 접점이 많다. 신중현, 박광호, 김창훈, 박청귀, 손무현 같은 인물들은 전부 록음악을 기본으로 했던 사람들. 그래서인지 앨범들을 들어보면 이런 곡을 김완선이 불렀나 싶을 정도로 록음악 성향이 강한 곡들이 곳곳에 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의 히트곡들에서도 보통 댄스곡과는 달리 내지르는 듯한 창법으로 부른 부분들이 나오는 건 저런 앨범 관련 인물들 때문이다.

한데 1~2집 시절의 록 음악 성향 곡들은 김완선의 가창력에 대한 평가를 깎아먹는 데 일조한 면도 있다. 당시 곡들이 김완선이 가진 가창력 이상의 고음을 요구한 탓에 고음을 내기 위에 목을 쥐어짜다 음이 툭툭 갈라지는 게 노래에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10] 그래도 4집 정도에 이르러선 록 성향의 곡도 적당히 소화해냈다. 이런 록 음악과의 접점을 보면 2011년의 신곡인 수퍼러브가 록 스타일인 것도 뜬금없는 건 아닌 셈이다. 월간 윤종신 2012년 3월호에 수록된 록 발라드곡 '널 사랑해 오늘따라'에서 보컬을 맡았는데 이 또한 호평을 받았다.

3. 이력[편집]



3.1. 1983~1989년[편집]




파일:데뷔_김완선.jpg

김완선 데뷔

인순이의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를 통해 1983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의 백댄서로 연예계에 발을 들인 후, 1986년 1집 '독집 제1집'을 발표하며 단번에 인기 가수로 자리 잡았으며 데뷔 당시의 나이는 겨우 만 17세였다. 이 당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렬한 눈빛이 대중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보여졌는지 데뷔 당시 이 노래 가사 중 '어둠이 무서워요'를 '니 눈이 더 무서워요~'[11]라고 패러디한 것이 더 화제가 되어 유명세를 누리기도 했다. 1집 앨범은 신인 가수에다가 당시에는 드물었던 댄스 음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화제성에 힘입어 3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당시 음반 시장이 활성화되기 이 전임을 감안하면 성공적인 출발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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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인순이와 리듬터치에서의 김완선
1986년, 첫 데뷔무대 오늘밤

그녀의 춤과 퍼포먼스, 파격적인 의상과 그 당시 연예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와 표정 연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란 말도 부족할 정도였기에 한국의 마돈나라는 수식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김완선 1집은 이미지와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음악적인 완성도도 괜찮은 편이었으며, 이는 조용필의 백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박광호가 프로듀서를 하고 산울림의 멤버인 김창훈이 전곡의 작사 작곡을 맡았기 때문이다.


파일:1987_김완선.jpg

1987년의 김완선

1년 후 낸 2집 ‘나홀로 뜰앞에서’는 김창훈이 작사 작곡만이 아니라 프로듀서까지 맡아 만들어진 앨범으로 2년차 징크스 없이 <나홀로 뜰앞에서>와 <리듬 속의 그 춤을>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2집은 일단 김창훈이 전곡을 만든 버전이 나온 후 수록곡 중 하나인 <충격>[12]이 빠지고 김완선의 커리어에 큰 획을 긋게 된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리듬 속의 그 춤을>이 들어간 다른 버전이 다시 발매되는 형태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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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쇼특급 리듬 속의 그 춤을

신중현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박정희의 요구를 거부한 대가로 방송금지를 당하다가 정권이 바뀌고 겨우 해금이 됐지만 록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 음악을 할 수 없어서 록의 대부가 나이트클럽에서도 쫓겨날 정도인 상황이었다. 이 때 한백희와 김완선이 찾아와서 곡을 달라고 부탁해서 신중현은 김완선의 무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뒤 그 느낌을 가지고 <리듬 속의 그 춤을>을 댄스 곡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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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의 대표 무대로 손 꼽히는 1987년 팩스뮤지카

당시 신중현은 컴퓨터를 직접 구입해서 스스로 독학해가며 리듬을 찍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대적인 댄스 뮤직[13] <리듬 속의 그 춤을>이란 명곡을 만들어 냈고, 김완선은 밤낮으로 무대 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완성시켰다. <리듬 속의 그 춤을>은 해외 아티스트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김완선의 현란한 댄스무빙과 고유의 카리스마에 제대로 맞물려 대히트로 이어졌다. 큰 사랑을 받은 김완선은 당시 해외 대형 가수들이 함께하던 대형 국제 무대인 팩스뮤지카의 오프닝에서 거의 신들린 수준의 파격적인 무대를 보여주는 등 대중에게 더욱 더 진화된 본인의 실력을 각인시키며 서서히 활동을 마쳤다. 시간이 흘러서 이 노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나오며 현재에도 김완선의 대표곡으로 자리잡았다.

1988년 3집은 이장희가 프로듀싱한 음반으로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웠고, 이장희의 히트곡인 '그건 너'를 댄스풍으로 리메이크해 수록하였다. 그러나 김완선의 인기는 여전했어도 앨범 자체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았다.[14] 물론 망하진 않았고 김완선이 후에 예능에 출연해서 이 노래를 언급할때 동년배 패널들은 이 노래를 다 따라 부를 정도였다.[15] 1~2집에 비해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떨어질 뿐 주요 팬층이었던 젊은 세대들한텐 알려질만큼은 다 알려졌다고 봐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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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공연_김완선.jpg
1987년 일본 ABC TV 출연 당시
일본 공연 당시 기사

1987년 당시 김완선은 일본 진출을 위해 현지 기획사와 이런 저런 미팅을 위해 자주 출국했고 이 시기 일본 TV에 출연해 '오늘 밤'의 일본어 버전을 아침 방송에서 퍼포먼스한 것이 수년 뒤에 영상으로 발굴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일본 아나운서가 쇼크를 먹은 듯한 표정과 김완선의 현란한 춤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김완선을 상당히 견제했고, 일본 기획사 측에서 저지른 악행등에 상처받아 아직은 시기가 이르다고 생각하여 향후 1~2년간 진출을 하는듯, 마는듯하다가 결국에 접어버렸다.

당시 일본 기획사에서는 김완선의 홍보를 위해 촬영한다면서 그녀가 녹음실에서 퍼포먼스하는 영상을 촬영했는데 그 비디오를 토대로 같은 나이였던 다른 여가수가 해외에서 똑같이 뮤직비디오를 찍고 공개하는 등 자국민의 스타들을 위해 김완선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그 당시의 일본 연예계 상황 자체가, 해외 스타를 영입해 CF를 찍은 다음 자국민을 그 해외 스타보다 더 많은 개런티를 주어 홍보하는 등 일명 자국민 띄어주기를 시전하던 시절이라고 한다.

당시 김완선의 일본 진출을 두고 한백희 여사의 철저한 마케팅과 섭외력으로 현지 뉴스에 10분 가량 특별 편성되기도 했고 요시모토 흥업과 손을 잡아 일본의 음악 방송에도 출연했고 공연까지 마쳤지만 정식으로 음반을 낸 것은 싱글 '람바다'가 전부이며 이 외에 녹음한 여러 곡들은 결국 정식으로 발매되진 않았다. 이후에도 몇번 일본 활동에 관한 계획이 보도되긴 했지만 계획 선에서 마무리 되었고 실제로 공식적인 활동을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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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사랑의 골목길

그리고 3집 시절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며 훗날 인터넷 상에서도 큰 화제가 된 무대가 바로 이 사랑의 골목길 라이브 영상이다. 팔과 다리에 막대기를 달고 인형들을 매달아서 춤을 추는 영상인데[16] 이 영상으로 국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실은 김완선의 독창적 퍼포먼스는 아니고 미국 쪽 방송에서 가끔 선보이던 컨셉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이용식 등이 코미디 쇼프로에서 선보인 적도 있다. 이 인형은 나중에 레인보우SUNSHINE을 발표할 때 뮤직비디오에서 지숙이 복장만 바꾼 채 똑같이 따라하게 된다. 훗날 예능 프로에 나와 김완선 본인도 저 춤을 출 당시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라는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했으며 심지어는 김완선이 히든싱어6에 원조가수로 출연했을 때에는 이 퍼포먼스를 그대로 재현한 모창능력자가 나오기까지 했다. 히든싱어 6 사랑의 골목길

이 무렵 김완선은 그냥 춤만 잘 추는 가수가 아닌 가창력 있는 가수로 변신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말을 기회가 될 때마다 했는데, 이를 위해 전인권에게 거액을 주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있다. 원래는 트레이닝뿐만 아니라 4집 앨범 자체를 전인권과 작업할 계획이었던 건데, 전인권이 보컬 트레이닝 시킨다고 온갖 기행을 시켰기 때문에 도중에 결별, 결국 보컬 트레이닝 받은 상황이 되었다. 당시 전인권은 갓 스무살이던 김완선을 작업의 이유가 아닌 다른 마음을 품고 심야에 끌어오는 등의 기행을 저질렀다고 잡지등에서 보도되었으며 전인권 측은 이 사실을 부인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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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서의 김완선

이 시기 이지연이 등장하자 그의 청순한 매력으로 남학생들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매니저인 한백희는 김완선의 식단 관리에도 열을 올린다.[17] 당시 밥을 주지 않아 김완선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고 그 이후에도 이모와 생활하면서 제대로 된 밥 한끼 먹어본 기억이 없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김완선은 반항심에 불타올라 일주일 내내 음식을 거부했고 결국에 그제서야 이모가 제발 좀 먹으라고 타일렀지만 김완선은 이마저도 거부하다가 결국 스케줄 도중에 쓰러지기도 했다.


파일:1989_김완선.jpg

1989년의 김완선

1989년 4집은 1990년대 들어가면서 스타 작곡가가 된 하광훈이 프로듀서를 맡는 한편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이름을 날린 기타 연주자 박청귀가 참여한 앨범으로, <기분 좋은 날>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끌었다. 4집 활동 시기에 김완선은 오디오 가수로 변신한다며 손무현, 윤상, 이승호, 변준민으로 구성된 실루엣이란 백밴드와 함께 방송 활동은 물론 첫 단독 콘서트까지 했고, 이 때문인지 4집의 경우 유독 다른 앨범들과 비교해 곡들에서 연주가 튀는 편이다.

한편 나이에 걸맞지 않는 성숙함과 섹시함을 앞세웠던 앞선 앨범들에서의 활동[18]에 비해 나이대에 걸맞는 발랄함을 내세우는 변화 또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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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기분 좋은 날

4집 타이틀 곡으로 내놓은 '기분 좋은 날'은 전작의 미지근 했던 반응을 만회하고 통통튀는 안무에서 나오는 귀여운 매력을 보여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인 안정환도 방송에서 선수 시절 주말마다 외출을 하기 전 "토요일 오후~"라고 콧노래를 불렀다는 여담이 있을 정도로 당시 따라부르기 쉽고 재밌는 가사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리메이크 곡 '이젠 잊기로 해요'도 잔잔한 사랑을 받아 김완선의 대표곡이 되며 성공적인 4집 활동을 마쳤다.

3.2. 1990~1995년[편집]



파일:1991_김완선.jpg

1991년의 김완선
1990년대 초반은 김완선이 그야말로 여가수로서 부동의 인기 원탑이었던 시절이다. 물론 1990년대에도 이선희, 강수지, 하수빈, 김혜림, 양수경, 이지연 등 많은 스타 여자 가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가요프로 1위를 하든 못하든간에, 김완선의 인기 원톱 자리를 빼앗지는 못했다. 물론, 김완선도 5집의 화려한 성과로 본인의 인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에 방송에 나와서 1990년대 초반을 회상할 때, 이선희는 방송에서 대놓고 "(인기) 최고는 완선씨였죠. 너무 예쁘고 섹시한 완선씨한테는 (제가) 안 됐죠"라 말한 적도 있었다.[19]

데뷔초부터 본인의 프로듀서였던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김완선을 매니지먼트하는[20] 잔혹한 굴욕을 당했던 인순이조차 "완선이를 보며 그 친구가 최고의 인기를 가질 만한 재능이 있었음을 알았기에 그 잠재력만큼은 분명 인정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차라리 남자 가수들이 그녀의 인기 라이벌이면 라이벌이었지 여자 가수들은 누구도 인기로 그녀의 라이벌이 될 수 없었다. 추후에는 댄스가수라는 핸디캡 아닌 핸디캡[21]을 가지고도 워낙 확고한 인기를 통해 변진섭, 신승훈같은 남자 발라드계의 신예 거성들과도 인기로 승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1990년대 초반 여성들의 대중가요계는 누가 뭐래도 김완선의 시대였다.

4집 때까지 김완선은 최고 인기 여가수하면 언제나 빠지지 않았으며 오빠부대들의 맹활약으로 여성 가수들의 영역이 좁아지는 와중에도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가수 개인의 인기를 노래가 따라주지 못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드디어 1990년 5집에 이르러 마침내 김완선은 모든 면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4집에서 실루엣의 멤버로 김완선과 인연이 닿은 손무현이 프로듀서와 작곡을 도맡아 만들어낸 5집은 앨범 녹음을 미국에서 해올 정도로 준비부터 기합에 차 있었으며, 김완선은 교통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MBC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여러분의 인기가요>에 얼굴에 거즈를 댄 채 출연해 라이브로 노래를 소화하는 등 열정을 보였고[22], 결국 김완선은 가수 활동 사상 처음으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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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나만의 것

김완선에게 처음으로 1위의 영광을 준 노래인 <나만의 것>은 기존의 무대와는 다른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발라드 곡이다. 이 곡에서 보여준 김완선의 세련되고 여성스러우며 우아한 안무는 듣는 발라드가 아닌 보는 발라드의 매력을 살려주었다.

1991년으로 넘어와 후속곡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활동이 이어졌고, 엄청난 인기로 김완선의 대표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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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장무도회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뒤이어 <가장무도회>까지 총 세 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김완선 5집은 1991년 내내 팔려나갔고, 덕택에 100만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 시기 김완선의 인기가 대단했던 것도 사실이고, 한 앨범에서 세장의 싱글이 1위한것도 여가수 중에서는 독보적인 일이었다.

당시 김완선은 연말 가요제 중 가장 권위높다는 평가를 받던 MBC 10대 가수에 처음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23] 10대 가수 선정 당시 지지도를 보면 남성 팬들보다도 여성 팬들 쪽의 지지도가 더 높았다는 사실은 이 시기 김완선의 폭넒은 인기를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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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그대는 바람처럼

1992년 6집 활동곡인 <애수> 역시 손무현이 프로듀서를 맡아 만들어져 5집 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SBS에서 1위 후보에도 올랐었다. 후속곡 <그대는 바람처럼>도 그 해 댄스 뮤직 중 TOP 5에 선정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으나 11월 당시 김완선 자신이 고정 패널로 출연 중이었던 MBC <특종 TV 연예>에서의 특집 방송을 끝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은퇴 보도와 동시에 "이미 중국 홍콩 진출이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도 함께 흘러 나오는 등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김완선 본인도 처음엔 은퇴는 너무 극단적이라 동의하지 않았는데 한백희가 김완선의 부모에게 빚이 있었고 이를 갚겠다는 조건에 동의해[24]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기획 은퇴를 했으나, 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던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파일:1993_김완선.jpg

1993년, 홍콩에서의 김완선

은퇴와 함께 홍콩으로 떠난 김완선은 1993년 말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25] 홍콩의 영화배우 겸 가수 알란 탐(담영린)과 함께 듀엣곡 '헤어질 수 없는 우리'도 냈고, 1994년부터는 대만에서 진위안쉬안(金元萱;김원훤)[26]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해 3장의 중국어 앨범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러 원조 한류가 존재하지만 시기적으로나 장르, 스타일적으로나 이후 한류와의 연결성 측면에서 꽤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고 공교롭게도 김완선이 한국을 떠나자 김완선 자리를 대신해 등장한 여가수가 엄정화였다.

3.3. 1996~2006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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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김완선 빅 쇼에서 탤런트체인징 파트너[27]

한국으로 컴백과 함께 1996년 11월에 발표한 7집 타이틀곡 '탤런트'가 가요톱10에서 최고 5위까지 랭크됐고 수록곡인 체인징 파트너가 전국의 클럽에서 큰 인기를 누려 30만장(비공식) 정도의 판매량을 달성했으며 전보다 매출량은 적지만 은퇴 후에도 스타적인 면에서 건재함을 보여준 앨범이다.

사실 타이틀곡인 '탤런트'에 표절 논란[28]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내릴 수 밖에 없었고 그 당시 김완선 앨범을 공동 제작했던 한백희의 제자 김광수[29]가 PD 비리 사건으로 고발되어 MBC 출연이 정지되었고 SBS에서도 출연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나마 SBS에서 방영된 이주일쇼 등에 나오긴 했다.

당시 김광수는 조성모의 뮤직 비디오 제작을 이유로, 대만에 가 있던 김완선의 차를 그녀의 의견 없이 팔아 치워버리는 악행을 저질렀다. 더 소름끼치는 건 이 사실을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다는 것이다. 김완선이 2011년 복귀했을 당시 그에게 찾아가 그때 왜 그랬냐고 말하자, 할말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완선 복귀 당시에도 자신이 제작했던 가수인냥 언플하면서 그녀의 복귀가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걸 봐서는 확실히 보통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녀의 7집 컴백을 기념해서 MBC에서 김완선 특집 방송을 방영할 예정으로 보도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해당 사건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고 방송 금지까지 당하는 바람에 KBS 빅쇼에서 치러졌고 당시 김완선의 특집 방송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MBC에서 출연 금지되었으나 문화방송 계열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정상적으로 출연했는데 부산MBC에서 방송된 특집쇼에 출연한 적 있었다. MBC 계열사는 각각 별개의 방송국이지만 MBC가 주주에 참여하고 MBC란 이름으로 쓰고 있는 케이스기 때문이었다.

그 뒤 후속곡 '운명의 장난'으로 활동 곡을 교체했지만 20위 권에 잠시 머문 정도였으며 앨범 자체도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덕에 이미지 이상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던 이전 앨범들에 비하면 평이한 수준이었다.

'김완선의 제작자 데뷔'로 홍보했던[30] 댄스 그룹인 '오룡비무방'[31] 이 참담하게 망하고 1998년, 가수로서 자신이 활동한 데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번도 정식으로 주지 않은 이모와 결국에 결별했고 이후 4년 정도 TV에서 김완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32] 이 때 한백희는 이미 김완선의 이름으로 온갖 빚을 져놓고 있었고, 그녀는 이를 갚기 위해 밤무대 출연과 온갖 행사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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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S

2002년 하반기에 당시 대형 기획사였던 팬 엔터테인먼트[33]로 이적해 내놓은 정규 8집 앨범 'S'[34], 'Shall We Dance'[35]와 리메이크 음반은 비교적 생소한 트랜스 테크노 장르였다.[36] 스타일리스트는 이미 태사자의 정장 코디로 유명세를 떨쳤던 김우리였는데 이 때의 실력이 또 한번 방송가에 입소문이 나면서 인정받게 됐다고 한다. 드라마 제작으로도 유명했던 소속사라 8집의 수록곡 중 몇 곡은 발매전 지상파 드라마 OST로 선공개 되어 사용되기도 했고 해당 소속사에서 캐시카우로 제작해 주력으로 키우던 싸이의 정규 3집 수록곡 '안돼요'에 피쳐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음반이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0위권[37] 안에 안착하고 음반 판매량도 4만장 정도 팔리면서 생각보다 이름값을 해냈지만, 빚문제는 여전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2003년 누드 사진집까지 찍었지만 누드 사진집을 찍고도 애초에 계약한 만큼의 돈을 받지도 못했고 사진집 문제로 트러블이 생긴 소속사와의 소송으로 고생만 했다.

당시 소속사는 다음 앨범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김완선은 이것이 계약 파기 사유가 된다라는 이유로 소속사와는 별도로 누드 사진집 제의에 동의를 했다. 당시는 여배우들의 누드사진집이 폭주하던 시대였고, 김완선은 빚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계약금 5억원에 러닝 개런티 포함. 이에 소속사가 반발하여 주택은 물론이고 김완선의 저축통장까지 압류했고, 누드 사진집을 낸 곳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서 누드사진집의 판매가 부진하다는 이유로 계약금 5억 중에서 2억 밖에 못 준다고 '배째라'가 되었다. 김완선은 밤무대를 뛰면서 2개의 소송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소속사와는 계약 해지 선에서 마무리되었고 사진집 기획사에게는 승소했다.

김완선 개인적 입장에서 이 8집 앨범은 애증의 앨범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나와 나름의 성공을 한 앨범이지만, 김완선 이때 소속사의 소송전은 본인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으며 이 시기의 일들을 생각하기도, 언급하기도 싫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기에 대형 기획사에서 나온 고퀄리티의 이 앨범은 안타깝게도 팬들에게만 회자 되고있는 비운의 앨범이다. 비슷한 연유로 위에 서술된 김광수 대표가 제작했던 7집 앨범 역시 금전적 문제나 표절 시비, 방송국과의 불화로 인한 매니지먼트 미흡 등으로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에 가수 본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2005년 말에 9집 앨범 'Return'을 발표했으며 자전적인 노래라 할 수 있는 발라드 'Seventeen'을 타이틀곡으로 내세우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가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김완선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너무 간격이 큰 음악이었고, 왜 갑자기 그런 내용의 가사를 노래하는지도 골수팬들 이외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아[38] 진지한 의도가 아쉽게도 잘 전달되지 못한 듯하다.

2006년 이모 한백희의 사망 후 하와이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현지 대학에서 디지털아트를 전공했다. 2007년에 여성중앙이 하와이로 가서 취재했을 때는 새 앨범 준비 중에 사기를 당했으며 음악활동의 의지를 접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왔으며, 미술 쪽 진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근황만이 간간이 보도되었다.


3.4. 2011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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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로맨틱 카우치의 Like A Virgin 티저 영상

2011년 3월 일렉트로닉 듀오 로맨틱 카우치의 Like A Virgin 티저 영상에 그녀가 출연했는데 세월의 흐름과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춤을 선보였다. 뮤비에도 출연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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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Super Love

2011년 4월, 드디어 신곡 티저가 공개되었다. 노래 제목은 슈퍼 러브(Super Love).[39] 불독맨션으로도 활동했던 이한철이 만든 곡. 4월 21일 뮤직비디오 풀 버전과 음원을 공개했다. 특이하게도 예전 특기라고 할 수 있는 댄스곡이 아닌 록 스타일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들고 나왔다. 확실히 특유의 포스와 일견 퇴폐적으로까지 보이는 분위기는 어린 아이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이 묻어나는 영역이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 건 댄스여왕답게 춤이 더 가미되었으면 하는 점 정도였다. 2017년 현재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음원사이트에서 해당 앨범의 음원을 들을 수 없으며 음원을 재녹음과 동시에, 리마스터링해 출시될 예정이라고 한다.[40]

2011년 4월 컴백 후 출연한 김승우의 승승장구 녹화 중 9집의 'Seventeen'을 부르던 도중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서 지켜보는 방청객이나 MC들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17세는 실제로 김완선이 방송에 정식으로 데뷔한 나이고, '작은 TV 속에 살면서 인형처럼 웃고 있는 너'로 시작하는 가사는 김완선의 삶 그 자체이다 보니 노래 자체에 대한 감회도, 그리고 그 노래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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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의 김완선

2011년 10월에는, 하이라이트(구 비스트)의 용준형신사동호랭이와의 작업물인 "Be Quiet"를 발매.[41] 오랜만에 뮤직뱅크, SBS 인기가요, 쇼!음악중심, 엠카운트다운, 윤도현의 MUST 등등의 주요 가요프로그램에 전부 출연했다.

2012년 3월 월간 윤종신에 참여하여 널 사랑해 오늘따라를 발표 하였다.

또한 2012년부터는 쇼, 예능 프로그램에 간간이 출연하면서 클럽, 페스티벌 등 공연 위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MC로서도 꽤 꾸준히 기용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맡은 프로그램이 오래 가지는 못하고 있다.

2014년 7월, 2년만에 Tiger JKBizzy가 피쳐링한 디지털 싱글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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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Goodbye My Love

자택 인테리어 솜씨가 호평을 받으면서 상당히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더니 급기야 2015년 9월 동대문과 청담동에 개장한 더 디자이너스 호텔을 통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도 데뷔했다. 2015년 9월 내 딸, 금사월 2회에 특별출연했으며, 10초 정도 나와 그야말로 카메오 출연 제대로 했다.

2015년 12월, 히든싱어4 변진섭 편에 출연했으며, 히든싱어5에 원조가수로 무대에 서고 싶다고 밝혔다. 시즌 5는 아니지만, 본 목차 후술 참고.

최근에는 고양이 애호가로서의 면모도 자주 소개되고 있다.

2015년부터 SBS 예능 불타는 청춘에 출연 중이며 2015년 SBS 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2016년 SBS 연예대상에서는 김광규와 함께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다.

2016년 11월 27일 ~ 12월 4일에 방송된 복면가왕복면신부 결혼했어요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세요 우리말 나들이와 같이 부른 곡은 씨스타의 '나 혼자'였으며 2라운드 상대인 역도요정 김복면과 겨룰 때 부른 곡은 태양의 '눈, 코, 입'이었다. 참가 계기는 예전 노래들을 언급하면서 왜 노래를 안 부르냐는 말을 들었고 젊은 사람들은 예능인으로 아는 사람도 있어서 지금도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나왔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17일 그녀의 공식 첫 베스트 앨범 The Original 가 발매된다. 총 3장의 구성이며 CD1~2는 1980~90년대 히트곡들로 채웠고 CD3는 2000년대 이후 발표한 곡들과 신곡 It' s You 등이 담겨져 있다. 리마스터링을 거치긴 했지만 아쉽게도 몇몇 1980년대 곡들의 음질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그래도 기존 오리지널 음반에 비하면 그런대로 들을만하다.) 연말에는 싱글 OZ ON THE MOON과 Jelly Christmas를 연이어 발표했다.

2018년, 싱글 TONIGHT과 '심장이 기억해' 를 발매했다.


[1] #[2] 김완선의 1인 기획사이다.[3] 유튜브 구독자 명칭이다.[4] 현진영 1집 타이틀곡 야한여자도 외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sexy girl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마땅한 단어가 없어 야한 여자로 작명한듯 하다.[5] 엄격한 방송 규제 등으로 노출 의상은 불가능하기도 했다.[6] 그녀 이후에 그녀에게 비교될 수준의 독보적인 원톱의 인기 위상과 대중적 커리어를 만든 여성 댄스 가수를 뽑자면 엄정화, 이효리, 보아 정도로 이 외에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외에 각자 나름 신드롬을 만들고 다양한 스타일들로 이름을 알린 여성 댄스 가수들이 다수 있지만, 장기간 독보적인 톱스타였던 김완선에게 비교할 정도가 안 된다.[7] 컴백 후 출연한 TV프로그램 승승장구에서 G.NA가 즉석에서 한 번 알려준 Black & White 안무를 거의 그대로 따라하면서 댄스의 여왕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때 지나가 허탈해하면서 말하길, "이거 하려고 1주일을 연습했는데" 라고 말했다.[8] 김완선이 1992년 은퇴를 선언한 이후 한국의 마돈나라는 명칭은 1993년에 가수로 데뷔한 동갑내기 엄정화가 이어 받았다.[9] 이건 기본적으로 김완선이 활동했던 1980년대H.O.T. 이후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데뷔한 아이돌 세대와의 가요계 분위기 차이가 근본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댄스뮤직(혹은 비디오형 가수)이란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후반 김완선, 박남정 시대부터이고 기본적인 가창력이 갖춰진 가수한테 비트가 비교적 빠른 곡에 맞춰서 댄스(율동)연습을 시키는 수준이었다. 김완선도 15살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나름 가창력이 갖춰진 상태였다. 이에 반해 2000년 이후 아이돌 세대는 비주얼과 춤이 되는 연예인 지망생을 뽑아서 노래 연습을 시키는 구조라 이전과는 정반대다.[10] 게다가 당시 한백희의 '가창'에 대한 지론은 "너무 잘 하면 자꾸 듣고 싶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어서 음을 전반적으로 높게 잡아 녹음시켰다고 하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11] 이주일이 이 말을 처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좀더 확실한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12] 이 노래는 제목처럼 그야말로 충격적인데, 아이유의 3단 고음 못지않은 고음이 등장한다.[13] 신중현이 댄스 음악을 만들지 않던 것은 아니다. 댄스 가수의 시초격인 김추자도 신중현의 곡에 춤을 춰 큰 인기를 얻었으며 신중현의 곡 중 춤을 출 수 있는 곡은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현대 기술을 이용해 만든 댄스 음악은 김완선의 곡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14] 그리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김완선의 다른 곡은 나왔어도 3집 타이틀곡은 언급되지 않았다.[15] 2013년 해피투게더 출연분 등[16] 해당 인형이 사실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괴담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인형을 잘 보면 무게감이 없는 그냥 가벼운 인형 그 자체란 것을 알 수 있다.[17] 그런데 정작 이지연 본인은 시간이 흘러서 중년이 되고 난 뒤에 "김완선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18] 당시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어려서 과도한 화장과 복장 등으로 외견 나이를 일부러 올려잡은 감이 있다. 이게 김완선의 영향으로 좀 사라진 이후에 여고생 가수로 다시 등장했던 이지연, 하수빈에 이르러서야 이런 이미지가 약해진다. 초등학생 때 발탁되어서 중학생때 데뷔한 보아때 약간 돌아온 감이 있다.[19] 이선희의 전성기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였기에 비교하기는 힘들다. 1990년대 초반에도 인기가 여전하긴 했지만 말이다.[20] 심지어 자기가 키운 가수인 인순이를 버리면서 대놓고 "너는 지는 해고, 완선이는 뜨는 해다"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남겼다고 한다.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이별 따위가 아니라 정말 잔인하게 버린 것이다. 그 말하던 시점에 인순이는 고작 29~30살의 젊은 나이로 못 나가던 시절도 아니었고, 이미 데뷔 전 김완선은 인순이의 백댄서였고 친분이 있던 사이였으니 스타였던 인순이가 당했던 수치심과 모욕감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김완선이 그녀에게 당한 착취를 생각하면 인순이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었을지도 모른다.[21] 댄스가수에 대한 멸시는 지금보다 그때가 훨씬 더 심했다.[22] 유력한 1위 후보라며 방송에서 불러서 나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 주에는 1위를 못했고 그 후에 1위를 차지한다.[23]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김완선은 이전까지는 유독 MBC 10대 가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6년 여자 신인상은 강변 가요제 대상곡이었던 <젊음의 노트>를 부른 유미리에게 돌아갔고, 10대 가수 선정이 거의 확실시됐던 1987년에는 조용필이 가요제 사퇴를 선언하면서 10대 가수 선정 없이 가요대제전 형식으로 치뤄졌다.[24] 어린 나이에 특히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가수 활동이었기에 평소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25] 이듬해 알란탐은 94년 자신의 홍콩콘서트에서 3일간 개최했는데, 12만장의 티켓이 한 시간만에 모두 매진되었다.[26] 김완선이란 이름에서 완이 끝날 完이란 말을 떠올려 부정적이라는 현지인 충고로 바꾸었다. 한국에서는 완을 원으로 변경했다는 것만 알려지면서 '김원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잘못된 뉴스가 나가기도 했다.[27] 당시 여성 가수가 보였던 안무에 비해 상당히 과격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안무로 댄스가수로서 김완선의 실력은 아직 건재하다라는 점을 보여준 무대이다.[28] 김완선의 "탤런트"와 표절시비를 불러일으킨 "댄스 오브 러브". 관련 기사[29] 티아라, 조성모 등을 제작한 그 사람 맞다.[30] 실제로는 전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31] 그룹 이름은 5마리의 용이 날아다니고 춤추는 동네라는 뜻이라고 한다.(五龍飛舞坊)[32] 2000년에 1980년대 가수들이 합동 앨범을 내고 홍보할 때 잠깐 모습을 비춘 것이 전부.[33] 이 회사는 99년 HS 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이정현, 싸이, 채정안등 개성있는 댄스 가수들을 데뷔시킨 소속사였다. 예당엔터테인먼트와는 협력사 관계로, 자사 레이블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아주 밀접한 관계인 회사는 맞다. 현재는 예당과 완전히 분리된 회사로서 가수 제작은 오래전에 접었고 드라마 제작을 위주로 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당시 김완선이 팬으로 이적하며 받은 계약금은 5천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높은 금액이긴 하나, 김완선의 인지도와 행사 페이등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 규모를 생각하면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닌것이 의외다. 실제로 2002년 'S' 앨범을 내놓고 김완선이 벌어들인 수익만 해도 4억원이었다고 한다.[34] 뜻은 섹시(Sexy)하고 도발적(Suggestive)인 색채를 가미해, 특별(Special)한 의미를 담았다는 의미라고 한다.[35] 후속곡이었던 'Shall We Dance'의 가사가 방송마다 다르게 표기 되기도 했다. 앨범 가사지나, 엠넷의 음악방송에선 'Love Love 지금 그 사랑안에 Free Free 마치 나 꿈결처럼 Heart Heart 너를 느끼고 있잖아'인데 지상파 음악방송이나 이를 토대로 받아쓴 음원사이트 등지에선 'Love Love를 Ya Ya, Heart Heart를 Huh Huh로 표기했고 노래방에서는 Heart Heart를 High High로 표기했다. 가사의 문맥 등을 봤을땐 Love Love, Heart Heart가 맞아 앨범 가사지와 딱 맞게 적용했던 케이블 채널 엠넷/KMTV가 맞고 그 외의 가사들은 받아적는 것에 대한 표기 오류로 보인다. 당시 음악방송을 보면 엉뚱한 가사 자막이 많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36] 이 리메이크 앨범 기획은 원래 96년 7집때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며 당시에도 9곡의 기존 히트곡을 새롭게 편곡해 7집 앨범에 싣을 예정(신곡 7곡+리메이크 9곡이 될 예정이었다고. #)이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무산되었고 5년뒤인 8집 앨범에 계승되었다. 1996년 7집 준비때 당초 수록하려던 리메이크 음원들을 2002년에 다시 꺼낸것인지는 불명.[37] MBC 최종 8위, SBS 10위. KBS는 순위제 미실시.[38] 결별 이후 몇몇 인터뷰를 통해 이모와 헤어진 이유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한백희가 살아있는 상태라 92년 은퇴의 실상 등 차마 완전히 털어놓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39] 2017년 4월 중순 열렸던 김완선의 첫 단독 콘서트에서 오룡비무방의 쓰디쓴 경험과 함께, 이 노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등장했다. 이미 알려진 바대로, 김완선의 패착으로 인해 타이틀곡을 잘못 선정해 오룡비무방이 1집 수록곡인 <비밥바 룰라룰라>로 활동하다가 해산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오룡비무방의 앨범에 넣으려고 녹음했던 곡이 있었는데, 끝내 빛을 못 보고 사장되는 게 아까워서 2011년에 김완선 혼자 녹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이 곡이었다는 것. GQ 2011년 5월호 잡지 인터뷰에서도, 이모인 한백희나 김완선 본인에게나 슈퍼러브가 애착이 가면서도 서로 화해하자는 메시지가 있는 곡이라고 언급했다. 1997년 당시 이 곡의 작곡가인 이한철은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직후 두 장의 앨범을 냈지만, 매니아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뮤지션이었을 뿐이었다. 참고로 오룡비무방은 2000년 안병기 감독의 영화 '가위' ost에 "'White Crow'''라는 팀으로 멤버 일부 교체된 채 음원을 냈다. 예레미멤버이기도 한 조필성 작곡가가 만들어 준 노래가 있었는데, 이게 인연이 되었는 지, 2011년 김완선의 컴백 앨범에 조필성이 참여하기도 하였다.[40] 발매 당시에 반응은 좋긴 좋은데 김완선의 목소리가 반주에 너무 묻힌다는 의견이 대다수 였다. 그래서 음원 사이트에서도 이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댓글이 많았다. 2012년 이후로는 일렉트로닉으로 리믹스한 버전으로만 부르는데, 2011년의 원곡 버전 방송분을 보면 댄서보다 밴드 보컬 같은 모습이 더 강하다.[41] 김완선의 당시 소속사였던 다온마리엔터테인먼트와 신사동호랭이의 소속사였던 AB엔터테인먼트의 합작. 스탭이 AB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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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2019

2019년, 에버랜드와의 콜라보로 제작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2019'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는데, 유튜브 조회수 250만에 육박하는 등 매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후엔 내시경 밴드의 싱글 '하와이 댄스'를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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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MLB 레트로 화보

2020년 2월, MLB가 레트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데님 브랜드의 출시를 기념해 김완선의 20대 모습을 완벽 재현한 화보를 공개했다. 30여년 전 콘텐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뉴트로 화보로 공개 후 전 연령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김완선은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여과 없이 발산해 인생 화보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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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YELLOW

2020년 4월 22일, 그간 발표된 싱글들과 신곡들로 구성된 새앨범 2020김완선을 발매했다. 2곡의 신곡중에 'YELLOW'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또한 주요 음원 사이트들을 살펴보면 이 곡을 통해 김완선의 노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젊은 세대들도 눈에 띈다.

드디어 2020년 10월 16일, 히든싱어6에 10번째 원조가수로 출연하였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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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Feeling
라디오 스타

2022년 1월6일, 디지털 싱글 Feeling을 발표했다. 레트로와 트렌드를 넘나드는 현대적인 멜로디와 강렬한 비트의 댄스뮤직이며 김완선이 직접 뮤직비디오의 연출, 감독, 편집까지 참여 했다. 활동 당시 음악 방송에서 엔딩요정이라는 문화를 처음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보통의 아이돌 처럼 마지막에 멈춰있거나 간단한 동작을 하지 않고 여러가지 현란한 동작을 보여주며 순수하고 귀여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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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사과꽃

2022년 10월 25일 발라드 곡인 사과꽃을 발매했다. 김완선이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맡은 곡으로 공일오비(015B)의 장호일이 기타 연주로 참여했다. 이 곡 역시 뮤직비디오의 촬영, 감독, 편집은 물론 앨범 표지까지 그려 '아트테이너'(아트+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2023년 5월 25일 ~ 6월 11일에 뮤지컬 “Again” - 여고동창생에 출연했다. 아니나다를까 극중에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불렀다.

4. 음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완선/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방송 활동[편집]



5.1. TV[편집]


  • KBS 유머 1번지
    • 1991년 400회 동작그만









희철에 의하면 가요계의 원조 고양이상이라고 한다.[43].자신의 머리카락이 원래 곱슬이라고 하였고, 러블리즈Ah-Choo를 준비하여 선보였다.[44] 데뷔 초 활동 당시 소방차를 라이벌로 여겼다고 한다.[45] 앞으로 무거운 연기를 도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또한 서장훈의 이야기에 의하면 90년대 초반 김완선이 홍콩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22세 이하이자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이 중국 농구 국가대표팀과 홍콩에서 경기를 하러 왔는데 홍콩까지 온 한국팀을 응원하기 위해 텅 빈 경기장에서 혼자 응원하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46][47]


5.2. 참여작품(앨범)[편집]


연 도
방송사/가수
방송명/참여앨범
노래제목
1987년

영화 '돌쇠바람' OST
태양을 향해 달리자
1992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창작동요 대상곡 모음집
이슬
1992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효孝가요제 모음집
비할 수 없는 사랑
1993년
알란탐
My Love
헤어질 수 없는 우리, My Love
1998년
라중욱
爲你自豪
突然心跳
2000년
Various Artists(대팔회)
Harmonized
No More Tragedy(합창), Hold Me Tight, Stop
2002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여우와 솜사탕 OST
Only Love
2002년
파일:KBS 로고(1984-2023).svg
겨울연가 OST
보낼 수 없는 사랑
2002년
싸이
3마리
안돼요 (Feat. 김완선)
2004년
디기리
리듬의 마법사
토요일 오후 Feat. 김완선
2012년
클래지
Infant
Can Only Feel
2012년
윤종신
2012 月刊 尹種信 March
널 사랑해 오늘따라
2015년

어게인 1988
첫눈이 온다구요(합창)
2017년

김창훈과 블랙스톤즈
나홀로 뜰앞에서
2019년

내시경 밴드
하와이 댄스(메인보컬)
2019년
불우이웃돕기
Say Yes 사랑하지만 아프지않게
앨범참여
2019년
이야기해주세요, 3번째이야기
위안부 여성들을 위한 노래
Here I Am vol.3
2021년
디디한 DIDI HAN
Wake Up
What You Love (feat. 김완선)
2022년
파일:TBS 로고.svg
그대에게 시즌2 Episode.1:LIVE 김완선
삐에로는 우릴보고 웃지 가장무도회
2023년
파일:KBS 로고(1984-2023).svg
최정훈의 밤의 공원 : Live 김완선
이젠 잊기로해요 2023 RE-WAKE
2023년
파일:tvN 로고.svg
댄스가수 유랑단
Rainbow


5.3. 출연작품(뮤지컬, 영화, 뮤직비디오)[편집]


연 도
종 류
출연작품
비 고
2012년
뮤지컬
뉴 폴리폴리
최미자역
2023년
뮤지컬
Again 여고동창생
고추자역
1991년
영화
독재공화국]]
특별출연
2012년
영화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
특별출연
2015년
영화
서울캠프 1986
특별출연
2016년
영화
킬링 디바(Killing Diva)]
주연
2018년
영화
흥부
조연
1993년
뮤직비디오
알란탐 Till We Said Goodbye
특별출연
1994년
뮤직비디오
알란탐 靑春夢
특별출연
2008년
뮤직비디오
바나나걸 미쳐미쳐미쳐
특별출연
2011년
뮤직비디오
로맨틱 카우치 Like a Virgin
특별출연
2012년
뮤직비디오
뮤지 첫눈에 반했어
특별출연
2013년
뮤직비디오
티아라 N4 전원일기 Drama Ver.
특별출연
2014년
뮤직비디오
아이유 삐에로는우릴 보고 웃지(리메이크)
특별출연
2018년
뮤직비디오
조범진 인생길
특별출연
2019년
뮤직비디오
윤종신 늦바람
특별출연


5.4. 단독 콘서트[편집]


연 도
장 소
1989년 Live Concert
서울랜드 삼천리대극장
1990년 Live Concert
88올림픽체육관
1990년 Live Concert
블루스케어 삼성카드홀
'송년 김완선 음악회' 부평아트센터
2018년 Live Concert
KBS 아레나홀 서울
KBS 부산홀
2023년 Live Concert
장충체육관


5.5. 광고[편집]


• 1983년 의류 뱅뱅
• 1987년 해태음료 써니텐(with), 해태음료 써니텐(단독)
• 1987년 해태음료 봉봉
• 1987년 해태음료 보리텐
• 1987~1989년 BYC 아미에
• 1989년 대우 자동차'르망'
• 1990년 해태제과 부라보콘
• 1991~1992년 일양약품 미에로 화이바CF 1편, 일양약품 미에로 화이바CF 2편
• 1991~1992년 의류 '쏘시에'
• 1991년 의류 다사인'쎈서스'
• 1993년 나폴레온 화이바
• 1994~1995년 의류 'GV2',광천음료'Crystal'(중국대만)
• 1995년 제과 '비스켓'(대만)
• 2005년 음료'm2m'(중국대만)
• 2012년 음료 레몬다이어트 7days
• 2013년 오리온 예감
• 2013년 게임 MMO 구미호
• 2016~2017년 금호타이어
• 2018년-현재 김완선 S BLACK다이어트
• 2019년 CH6 스칼프싹세럼
• 2019년 애버랜드
• 2020년 의류 'MLB KOREA'
• 2020년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 선거'홍보 모델
• 2020년 화장품 '뷰티영 퍼레스 갈바닉 크림'
• 2020~2021년 (주)다파라치오 '로스돔'
• 2021년 리몽도르 디퓨져
• 2022~2023년 MATAVOZA 디퓨져
• 2022년 여기어때 블랙 기프트 프로젝트


6. 수상 내역[편집]



6.1. 주요 수상 목록[편집]


연도
비고
1986년
KBS 가요대축제(가요대상) 신인 여자가수상
제1회 골든디스크어워즈 시상식 신인 여자가수상
1987년
월간 하이틴 우리들의 스타상 신인상
KBS 가요대축제(가요대상) 가수상
제2회 골든디스크어워즈 시상식 본상
1988년
KBS 가요대축제(가요대상) 가수상
1990년
KBS 가요대축제(가요대상) 가수상
제5회 골든디스크어워즈 시상식 본상
1991년
제6회 골든디스크어워즈 시상식 본상
KBS 가요대축제(가요대상) 가수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상
SBS 서울가요대상 가수상
1992년
제7회 골든디스크어워즈 시상식 본상
1995년
ABU국제가요제 최우수 인기가수상
2015년
SBS 연예대상 버라이어티 부문 여자 신인상
2016년
SBS SAF 베스트커플상
2019년
제10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표창
제11회 서울 석세스 대상 가수대상
2022년
이탈리아 영화제 여우주연상 《킬링 디바(Killing Diva)》

6.2.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편집]


연도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
1991년
나만의 것 (총 4회)
* 1월 25일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위
* 2월 17일 KBS 《가요톱텐》 1위
* 2월 24일 KBS 《가요톱텐》 1위
* 3월 10일 KBS 《가요톱텐》 1위 (통산 3주 17주 연속2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총 4회)
* 7월 5일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위
* 7월 12일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위
* 7월 24일 KBS 《가요톱텐》 1위
* 7월 26일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 1위 (통산 3주)
1992년
가장무도회 (총 1회)
* 1월 22일 KBS 《가요톱텐》 1위
애수
* 6월 30일 SBS 《SBS 인기가요》 1위 후보
* 7월 7일 SBS 《SBS 인기가요》 1위 후보


7. 이모와의 관계[편집]




파일:가족_김완선.jpg

윗 사진에서 맨 오른쪽이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 아래 사진은 이모가 운영하던 연습실이다.

"완선이는 제가 매니저이기 전에 저의 언니의 딸이기 때문에 조카이자 딸이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완선이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도 저였고 그래서 굉장히 책임감도 느끼고 완선이가 잘돼야 한다는 염원이 누구보다도 강하고..." -1994 인터뷰 중


한백희를 설명하기 이전 김완선의 외가는 유명한 민속춤의 전통 명가로 김완선 외증조부가 바로 한국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 명인이다.[48] 그리고 한성준의 손녀인 한영숙(무용가)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의 기·예능보유자였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 살풀이춤을 춰 찬사를 받았다.[49]

김완선의 막내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 또한 집안의 끼를 이어받아 미8군 클럽에서 팝과 라틴 음악을 하는 가수 생활을 했으며, 가수로 활동한 것 보단 한국 여성 최초로 가수 매니저로 활동, 매니지먼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으로도 더 유명하다. 김완선의 말로 한백희는 본인의 가수 활동보다 가수를 키우는 일에 더 재미를 느낀 것 같다고. 그에 걸맞게 한백희는 인재를 발굴하는 안목이 뛰어나 당시 자신의 백댄서였던 인순이의 집까지 찾아가 가수를 권유하였고 결국 인순이를 희자매로 데뷔시켜 성공으로 이끌어 쇼 비즈니스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50]

한백희는 스파르타식으로 김완선에게 춤과 화성학부터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다루는 작곡 수업을 가르쳤는데[51] 지금의 연습생 개념의 선구라면 선구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데뷔 준비하느라 거의 3년동안 부모 집에도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 당시 이모가 살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서 7년간 고립되어 살았는데 지금도 외진 축이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외진 곳이 도봉구 방학동이었다. 무릎팍 도사 출연 당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한백희는 길거리 댄서, 무용수들에게 연습실을 무료로 내어주는 대신 김완선을 트레이닝 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덕분에 김완선은 그 당시에 스트릿 댄스, 발레, 현대 무용 등 다양한 춤들을 하드하게 트레이닝받으며 일종의 연습생 생활을 했다. 여담이지만 마침 김완선이 데뷔 준비를 하던 시기가 이수만이 연예기획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라 이는 이수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연습생 시스템의 원조였다.

그녀와 한백희의 질긴 인연은 한백희의 작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옷도 그녀가 맞췄고 안무도 그녀가 짜주었고,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도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52]. 그리고 김완선에게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으며 2006년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무릎팍도사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완선은 데뷔 후 1998년 그녀의 이모와 결별하기까지 13년 동안 가수 활동에 대한 금전적인 대가를 한 번도 정식으로 받지 못했다.#, 당시 이모부의 사업이 잘 안 풀려 그쪽으로 돈이 들어간 것 같다고 했다. 한백희가 따로 사치를 하거나 하는 일 없이 옷 2~3벌로 사계절을 버티고 병원비가 아까워서 아파도 병원에 잘 안가고 장신구 같은 건 전혀 사지도 않는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 이에 김완선은 차라리 이모가 자신을 위해서 돈을 사용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라 말했다.

이후 한백희는 건강이 악화된 후에 응급실에 자주 갔는데 당시 비참한 상황에서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김완선밖에 없어서 돈을 빌려달라고 자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에 김완선은 할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지만 워낙 악연이었기에 왜 과거에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주지 않았냐는 말을 했고 한백희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하며 그리고 김완선은 그게 자신이 이모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KBS2TV 승승장구 (2011년 4월 26일) 에 나와서 이모 한백희에 대하여 한 얘기다.

"저의 모든 거, 좋은 거, 나쁜 거까지 다.. 저의 부모님이기도 하고 선생님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어떤 무대는 안좋게 끝날 때도 있는데 같이 속상해 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 잘돼서 성사되면 같이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 되풀이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제가 남자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 "제발 좀 빨리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길 바랐는데 이제는 많이 없어진 것 같고..." "이모 이제 원망이나 분노는 없으니까 편히 쉬세요.... 미안해 하지 말고"


승승장구에서 MC들의 "왜 남자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당시 이모의 엄청난 과보호 때문에 남자를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다고 말했다. 앞으로 결혼 계획에 대해선 지금 (2011년) 40대 나이에 결혼할 수는 없고 나중에 50~60대가 됐을 때나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팬들 중에서는 자신과 이모를 파국으로 내 몰았던 이모부 때문[53][54]이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8. 노래방 수록 목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완선/노래방 수록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여담[편집]


  • 굉장한 동안이다. 2023년 기준 나이가 54세인데도 성형만 빼고 '화장을 하나도 하지 않은' 프로필 사진만 보면 30대 후반으로 보인다. 2019년에 리메이크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뮤직 비디오에서는 화장을 하고 나온 것을 감안해도 30대처럼 보이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

  • 무대에서의 카리스마 때문에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선하고 주변 사람들 잘 챙기기로 유명하다. 젊은 시절엔 신비주의와 매니저였던 이모의 과보호로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으나, 2010년대 이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대중들이 김완선에게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지게 되었다.


  • 댄스 가수 이미지가 강하지만, 악기를 잘 다룰 정도로 다재다능하다. 피아노와 기타 연주도 잘 하고 드럼 실력도 수준급이다. 국내 방송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적도 있고, 대만에서 가수 생활을 했던 시절 어느 음악쇼 프로그램에서 힘있게 드럼을 치는 영상이 한 때 돈 적이 있었다.

  • 대고 솜씨도 수준급이다. 유튜브 에서 金元萱 으로 검색하면 당시 예능에서 활약 했던 영상들을 볼 수 있다.

  • 개그 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게 많다. 영화 총알탄 사나이 1편에서 여주인공 제인 등장씬(요염하게 나오다가 계단에서 구르고 기둥에 머릴 부딪치는 개그씬)을 그대로 베낀 MBC 개그프로그램에 나와 똑같이 계단에서 구르고 기둥에 쿵 부딪친다. 그밖에 여러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기도 하고 91년 개봉했으나 1주일만에 개봉을 끝내며 그야말로 쫄딱 망한 영화 <독재 소공화국>에 조연으로 나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721.jpg
  • 눈매가 매우 독특하다. 어떻게 보면 졸린 눈 같고 어떻게 보면 노려보는 것 같다. 프로필 사진보다 한참 이전의 활동 시기에 찍은 위 짤방을 보면, 전술한 니 눈이 더 무서워요라는 개사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미모의 여자 연예인에게 찾아보기 힘든 강렬한 눈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눈매 때문에 개그 소재로 많이 써먹었다. 90년 초반에 나온 최불암 시리즈에서까지 최불암이 김완선 눈매 가지고 노려보지 말라고 하는 게 나올 정도였다.


  • 3집 타이틀곡인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는 민망한 가사 때문에 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노래라는 말이 있다. 가끔 예능 방송 등을 통해서 밝히는 바로는, 노래가 싫다는 것이 아니라 가사 자체에 민망함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민망함을 떨쳐내기 위하여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춤을 췄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3집 활동이 끝난 이후로는 한번도 무대를 선보이지 않았으며, 김완선 본인이 셀프 프로듀싱을 하고 있는 현재까지 베스트 앨범이나 리메이크 앨범에도 전혀 수록된 적이 없다.

  • 4집의 <기분 좋은 날>은 당시 토요일이 되면 빠지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곤 했었고 지금도 토요일이면 가끔가다 흘러나오는 노래. 토요일 주말의 기분을 업할 수 있는 노래다. 그래서인지 가수 디기리는 이 노래의 가사를 인용 '토요일 오후'라는 노래를 불렀고 김완선이 피쳐링했다. 그런데 네이버에서는 19금으로 나온다.

  • 4집의 '이젠 잊기로 해요'[55]는 발매 전인 1988년 4월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가수 김광일[56]와 함께 듀엣으로 부르다가 좋은 반응을 얻자 1989년 4집에 김광일 편곡 버전으로 실렸다. 김완선 노래 중에서 잘 알려진 발라드 곡으로 2015년 영화 쎄시봉에서 한효주가 다시 불러 리메이크 되었고 2016년 응답하라 1988 OST로 여은이 다시 불러 리메이크 되었다. 그리고 2021년에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에서 미도와 파라솔이 부르기도 했다.

  • 외국의 여성 팝스타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무대 매너를 한국에서도 보여준 거의 첫 가수[57]라고 할 수 있는데 고로 게이 팬층으로부터도 뿌리깊은 지지를 받고 이 계보는 엄정화, 이효리, 화사 등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연마한 화려한 댄스 스킬을 시전하는 소녀 가수로 등장해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선 점 등에서는 보아를 위시한 현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 前 주인의 학대로 인해 다리가 불편한 고양이(이름: 슈퍼맨)를 입양한 집사이기도 하다. 방송 출연

  • 유명한 홍콩의 영화감독 왕가위를 짝사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대 초반 홍콩 측의 러브콜을 받고 홍콩에서 배우 및 가수 활동을 시도 했었는데 그때 일 관계로 자주 교류를 한 왕가위 감독의 지적인 매력에 반했다고 한다. 심지어 왕가위가 너무 보고싶어서 그의 집앞까지 찾아가 서성일 정도였다고 하니 굉장히 깊게 빠졌었던 듯. #국내 기사 안타깝게도 그 당시 왕가위는 19살때부터 사귄 여친과 10년 가까이 연애 후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 이모뻘 후배 여가수들인 보라효린과는 웨이브 인사를 주고 받는 사이이다.#

  • 거의 20년이 되도록 근거 없이 퍼져있는 루머가 있다. 1990년, 아나운서 이계진이 진행하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 출연했을 때 정답인 '닭'을 으로 쓴 이후, 분위기가 이상하자 으로 고쳐썼다는 루머인데, 이건 김완선이 아니라 동년배 가수였던 이지연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이 사건의 주인공을 김완선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데 당시 김완선이 백치미를 흘리긴 했지만, 신비주의 컨셉이라 이런 퀴즈 프로그램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본인닭띠인데 닭의 맞춤법을 틀릴 리가 없다.# 결국 당시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이계진이 직접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줌으로서 확실시 되었다.# 김완선 본인도 요즘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SNL 코리아에 호스트로 출연했을 때 닭 오답 루머를 개그 소재로 써먹었다.


  • 데뷔 초 너무 요염하다는 이유로 6개월 방송 정지를 먹은 적이 있었다. 올블랙에 노출 없는 의상으로 무대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지를 먹은 이유가 너무 어이가 없다. 이유는 당시 연출을 맡은 분의 말에 의하면 의상 노출 때문이 아니고 김완선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야해서 그렇다고 한다.

  • 외증조할아버지께서 한국 무용가인 한성준이다.

  • 동갑내기 가수 양준일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하면서, 과거 두 사람이 1991년 젊음의 행진에 출연했을 당시에 바나나라마의 'Venus'[58] 를 커버한 영상이 인기를 끌었다. 훗날 해당 영상은 김완선이 김정남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했을 때, 양준일이 문제로 출제되면서 자료화면으로 인용되기도 했으며, 김완선이 영상을 보면서 당시를 회상하기도 하였다.[59]] 젊음의 행진 비너스


  • 동갑내기인 엄정화와는 꽤 친하다. 각자 전성기에는 크게 접점이 없다가[60] 나이 든 뒤에 친해진 듯. 서로 '완선' '정화'로 이름을 부르거나 '자기야'같은 격없는 호칭으로 부르며 SNS에 종종 함께 찍은 사진이 올라오거나 댓글을 주고받기도 한다. 같은 동갑내기인 1969년생 윤종신, 구준엽과도 친분이 있다*.

  • 서울체크인에서 밝히길 전성기 시절에는 아예 식사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아이스크림 하나만 겨우 먹었다고 한다. 늘 공복이라 힘이 없어 평소에는 잘 움직이지 않고 가만이 있었다는 듯. 엄정화는 MBC 합창단원이었던 시절에 방송국 식당에 앉아만 있을 뿐 밥은 먹지 않는 김완선을 보고 같이 앉아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언급했다.*

  • 클놈의 염경환, 지상렬이 1987년(당시 한국나이로 19세) 김완선을 보기 위해 연예인 사진 촬영대회에 참가했는데 김완선을 멋있는 각도에서 찍기 위해 나무에 올라가서 사진 촬영을 하려다가 가지가 부러졌는데 염경환은 다치지 않았고, 지상렬이 머리를 다쳤다는 후문.

  • 원래 본명은 김이선이었으나 수년 전 예명이었던 김완선으로 개명했다.

  • 리모델링의 달인이다.[61]

[42] 이에 앞선 9월 28일에 언택트 녹화로 네이버 TV를 통해 온라인 생중계가 되었다.[43] 2대는 박지윤, 3대는 안소희, 4대는 슬기, 5대는 예지.[44] 오늘밤 리듬속에 그춤을 삐에로는 우릴보며 웃지도 추었는데.. 확실히 모든 춤을 잘 춘다.[45]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10대 여가수가 전무 했다. 그래서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댄스그룹인 소방차를 라이벌로 생각한 걸 수도...하지만 예능에서의 발언이니 진지해지진 말자.[46] 당시 선수들은 텅 빈 경기장에 김완선인 것 같은 사람이 혼자 응원왔다고 이상하게 여겨서 경기 끝나고 확인하러 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문경은... 경기 끝나고 대표팀과 함께 사진 찍고 헤어졌다고 한다.[47] 타향살이에 한국 사람들이 온다고 반가운 마음에 응원하러 갔다고 했다..하긴 은퇴도 본인 의지가 아니었으니... 중국 생활도 많이 외로웠던 듯.[48] 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태평무, 승무, 학무, 단가무, 검무, 한량무, 살풀이춤 등을 한국식으로 풀어냈으며 한국 무용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생일인 6월 12일이 한국 무용의 날로 제정될 정도로 한국 무용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과거 최승희가 한국춤을 배우기 위해 제자로 잠깐 있었을 정도.[49] 김완선이 5촌 조카가 되며, 한백희는 사촌 동생이 된다.[50] 김완선을 가두다시피 해서 가수로 만든 한백희는 인순이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대형 무대에 서려면 춤이 중요하다고 했다고하며 당시 생소하게 에너지 넘치는 댄스를 보여주었던 김추자의 춤과 무대를 보여주고 따라시켰으며 칼춤, 무당춤, 북춤, 장구춤, 살풀이까지 가르쳤다고 한다.[51] 이는 김완선이 후에 자신의 곡을 작곡할 때 굉장히 도움이 됐다며 이모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52] 불타는 청춘에서 간간히 언급되기로는 동시기 활동했던 가수들마저 그녀와 대화 한 번 못 해봤을 정도로 한백희가 간섭했다고 한다. 이는 한백희가 담당했던 희자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는데, 단 하루 한백희가 쉬었던 날 다른 매니저가 접근해서 인순이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을 빼갔고, 이때문에 김완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모양. 윤종신 역시 라디오 스타에 김완선이 출연했을 당시, 신인시절에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는데 항상 이모님이 곁에서 지키고 계셔서 그러질 못했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53] 고 한백희가 김완선의 수익을 가로챈 이유가 바로 상기됐던 남편의 사업빚. 김완선이 벌어오는 돈을 믿고 계속해서 일을 벌리고, 그 사업이 계속 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54] 요즘 세대의 관점에서도 아내가 남편의 사업상의 고충을 외면하기 힘들지만 8, 90년대 아니,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아내가 철저히 남편을 위주로 평생을 살아야하는게 당위성처럼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한백희 여사 역시 조카인 김완선에 대한 애정이 컸겠으나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는 암묵적 의무로 인해 남편을 위해 본의 아니게 조카 김완선까지 희생시킨 꼴이 되었을 것이다.[55] 가수 이장희 원곡. 이장희와는 3집 프로듀싱 작업을 하였다.[56] 1986년에 발표한 '길 바람 아이'로 7080 세대들에게 알려져 있는 가수.[57] 패션이나 컨셉적인 측면에서는 앞서 나미도 있었지만 카메라를 그렇게 강렬하게 쳐다보면서 춤을 그렇게 격하게 추는 건 김완선이 처음이었다.[58] 바나나라마 또한 리메이크이며, 원곡 가수는 쇼킹블루 (Shocking Blue). 실제로 양준일이 가수 복귀 이후 출연한 배철수 잼에서 이때 당시에 대해서 언급할 때, 자료화면으로 인용되면서 원곡가수가 쇼킹블루로 소개되었다.[59] 훗날 양준일 또한 배철수 잼에서 털어놓기를 당시에 사전에 약속된 안무가 있었음에도, 자신이 안무를 잘 지키지 않아 무대 앞으로 나가게 되는 바람에 김완선이 많이 힘들어 했다고 털어놓았다. [[https://tv.naver.com/v/12646732]|#][60] 서로 활동 시기가 안 겹친다. 김완선은 어린 나이인 십대 때 데뷔했고, 엄정화가 성인이 된 후 데뷔했을 때 김완선은 중화권에 넘어가서 활동 중이었다. 다만 후술하듯 이 당시 엄정화는 외로워 보이는 김완선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61] 현ㅈ 거주중인 곳이 리모델링을 직접하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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