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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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단청

1. 개요
2. 특징
2.1. 명칭
2.2. 목적
2.3. 원료
2.4. 종류
3. 역사
3.1. 삼국시대
3.2. 통일신라시대
3.3. 고려시대
3.4. 조선시대
3.5. 현대
4. 해외
4.1. 중국
4.2. 일본
4.3. 몽골
4.4. 러시아



1. 개요[편집]




단청()은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무늬를 그려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2. 특징[편집]


오행설에 근거하여 오방색인 청색,적색, 황색, 백색, 흑색을 기본으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문양을 그려 넣는다. 보통 사찰에는 금단청, 궁궐에는 모로단청, 서원에는 긋기단청을 사용하였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의 전통미술공예학과에서 전통회화 전공을 선택하면 단청도 배울 수 있다. 현재 단청을 가르치는 대학은 문화대학교, 동국대학교 정도로 매우 드물다.

단청을 그리는 단청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다.


2.1. 명칭[편집]


기원전 한나라 시기의 문서에서 '단청'이라는 단어가 발견된다. 사기의 이사열전에서 이사가 올린 상소문을 따왔는데 거기에 이미 서촉단청(西蜀丹靑)이란 글귀가 나온다. 맥락 상 개요의 뜻이 아니라 개요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재료란 뜻으로 쓰인 듯 하지만[1] 이미 단과 청으로 채색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서 단청이라는 용어는 그림이나 안료 또는 단책청사(丹冊靑史)의 줄임말로써 역사책을 뜻하거나, 단지청쇄(丹墀靑瑣)의 줄임말로써 궁궐을 뜻한다. 보통은 채화(彩畵) 또는 채회(彩繪)라고 부르는데 앞에 건축 또는 고건(古建)을 붙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따로 건물에 그리거나 채색하는 걸 뜻하는 말이 없어서 그냥 채색이라고 부른다.


2.2. 목적[편집]


원래 주목적은 색을 칠하는 건물이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궁궐, 사찰, 서원 건축 등 공적이고 권위를 살려야 하는 건축에 많이 사용되었다. 실용적인 측면에선 나무에 벌레가 먹지 않게 하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2] 또 한국에서 건축재로 흔히 쓰이는 소나무의 균열을 감추고 건축의 결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30~40년 정도마다 다시 그리곤 하였다.


2.3. 원료[편집]


단청의 원료인 안료는 원래 진채 또는 암채라 하여 광물질(무기염류) 색감을 사용하였다. 또 단청이 무광택이므로 역광을 받아도 제 빛깔을 발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단청 특유의 옥색을 내고자 양록을 사용했는데, '양록'이란 바로 파리스 그린이다. 비소를 원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독성 문제로 1990년대에 일본에서도 생산을 금지하자 현재는 다른 안료를 혼합해서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방식 단청은 원재료를 구해 도료를 만드는 과정이나 칠하는 데 드는 품이나 비용이 많이 드는 물건이다 보니 과거 민간에서는 단청을 칠하지 못해 기름을 칠하는 정도로 만족하였다. 화학안료를 많이 쓰는 현대에도 중소규모의 암자나 신당에는 불교용품점에서 파는 단청무늬 스티커(단청지)를 도배하는 경우가 있다.


2.4. 종류[편집]


  • 가칠단청: 무늬 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을 말한다. 의장성보다 목재보호라는 본연적인 목표에 충실하다. 고궁갈색과 대비되어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종묘와 남한산성 행궁 등에 쓰였다.

  • 긋기단청: 가칠단청에 검은색인 먹과 흰색인 분을 복선으로 그어 마무리한 단청을 말한다. 직선으로 인해 훨씬 곧은 느낌이 나는 의장성을 갖는다. 가칠단청과 함께 검소한 느낌을 준다. 사당이나 부속건물에 사용하였다.

  • 모로단청: 목재 끝부분에만 단청을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을 말한다. 부재끝에 들어가는 화려한 문양부분을 머리초라고 한다. 머리초는 부재의 1/3을 차지하며, 이는 즉 부재의 2/3가 양끝으로 문양이 들어가고 가운데 1/3부분은 문양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머리초와 머리초 사이 긋기로 마감되는 가운데 부분은 계풍(界風)이라고 한다. 모로단청은 방부 목적 이외에 방화 및 벽사의 상징적 의미와 함께 건물을 화려하게 해주는 장엄의 효과가 있다. 궁궐이나 관아건축에 사용되었다.

  • 금(錦)단청: 모로단청의 중간 긋기 부분인 계풍에 금문(錦紋)이나 별화(別畵)로 장식한 단청을 말한다. (金)으로 칠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3], 계풍을 비단처럼 수놓았다 하여 금(錦)단청으로 불린다. 그러나 때로 보다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금분(金粉)을 바르는 고분법(高粉法)이 쓰이기도 하였으나 이는 실전되었다. 금단청은 가장 고급스러운 단청으로 주로 사찰 불전에서 사용되었다. 조선조의 궁궐도 모로단청에 그쳤던 것을 보면, 신의 집인 금당을 가장 화려하게 꾸미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 주칠단청: 붉은색과 흰색으로 칠한다. 고대에 한중일 공통으로 쓰던 양식인데 한국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특히 많이 사용했다. 물론 조선시대에서도 사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쓰는 양식이다.


3. 역사[편집]


동아시아 단청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한나라 시기의 집 모양 토기에서도 실제 채색된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보통 고대의 단청은 오행설에 근거하여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을 기본으로 하여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문양을 그려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언제 단청이 그려지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중반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무늬가 들어간 단청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삼국 중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백제, 신라, 멀리 일본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고있다.


3.1. 삼국시대[편집]


파일:백제단청.png
백제 단청의 예상도[출처1]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백제, 신라등의 유물에서 단청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는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단청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제외하면 남은 건축이나 건물 그림도 제대로 남아있는 게 없어서 이 시기 단청은 확실히 밝히기는 어렵다.

고구려 고분 등의 벽화 등을 근거로 덩굴무늬(당초문)와 상록하단의 초기 형태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단청의 안료가 비싼 외국산 재료라는 점은 그 당시부터 지적된 사항이었는지 삼국사기에 '진골 이하는 오채로서 꾸미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단청을 제한하는 내용인 듯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에는 '단칠'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데, 단청과 옻칠이 가구와 건축을 장식하는 주요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머리,다리 목받침을 보면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 장식이, 왕비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단청을 칠한 것으로 옻칠이 더 권위 있는 장식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호류지에서 삼국시대 단청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호류지는 백제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물이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건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지금은 호류지 금당의 단청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과거에는 불교 건축물답게 단청이 있었다. 조사한 결과로는 기둥 등 나무표면은 주홍색을 사용하였고, 난간에는 녹청색, 부재의 단면은 황토색, 벽은 백색, 개판[4]은 호분색[5]을 사용하였다. 또한 실내는 벽화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는 시텐노지 등을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다만, 이것이 반드시 백제의 단청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거니와 신라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3.2. 통일신라시대[편집]


파일:8세기통일신라.jpg

파일:통일신라금단청.png
8세기 통일신라시대 단청의 예상도 [출처2]


3.3. 고려시대[편집]


파일:고려시대단청.png
고려시대 단청의 예상도

파일:원간섭기.png
원간섭기 단청의 예상도

[출처3]

고려시대의 단청색조는 외광을 강하게 받는 부재, 즉 기둥과 같은 곳에는 붉은 색을 칠하고 외광을 받지 않는 그늘진 곳, 즉 추녀나 천장부분에는 녹청색으로 칠하여 장식의 명도를 높여 이른바 상록하단의 원칙을 지켰다. 지금 남아있는 몇몇 고려시대 건축물이나 고려 불화 등지에서 이러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상류층 건물의 단청 재료는 옻칠을 활용하여 광택이 나는 붉은 주칠 등의 화려함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의 단청 문양은 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봉정사 극락전 등의 오래된 고려시대 사찰을 조사해보면 11세기 북송의 영조법식이란 책에 등장한 무늬와 유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원나라의 간섭기를 받으면서 기하학적 무늬가 많이 도입되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종 금속들로 서까래나 기둥을 장식하고, 자기로 기와를 구워 올리는 등의 사치를 부리는 모습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자기로 된 기와 등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3.4. 조선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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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 내부 단청의 모습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 때처럼 단청이 상당히 널리 쓰였고, 일반 민가에서도 돈만 있으면 단청 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단청 재료가 중국산이라 비싸고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세종 11년(1429)에 "공사옥우(公私屋宇)에는 주칠(朱漆)을 물용(勿用)케 하라"는 어명이 떨어지는 등 단청에 제한이 가해졌고, 이후로도 비슷한 명이 나와 계속 단청은 축소되었다. 검소함을 지향했던 유교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 각종 특수한 기와나 금속 장식 등 역시 조선시대에 와서 사라졌다.

이후 문종 때 모든 건물에 주칠을 금하였던 것을 완화하여 관청과 사찰, 표녀, 충신, 열녀 등의 사당[6]에 단청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예종 원년(1469)에 만든 법령집 경국대전에 보면 "사찰 이외에 진채(眞彩)[7]을 사용하는 자는 곤장 80대의 형에 처한다."라는 법이 정해지기도 했다. 다만 이전에 단청을 칠했던 민간주택 중에는 그대로 인정받은 경우도 있었는데, 대전의 쌍청당의 경우에는 민가인데도 단청이 남아있다.

즉 조선시대 대부분 기간 동안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민간 건축에서는 단청을 허용하지 않았고 위와 같이 종교 건축이나 공공 건축에만 허용됐다. 조선시대에 단청은 더 복잡한 방향으로 발달해 갖은금단청 등 양식이 등장했다. 특징은 모로단청을 쓴 왕실건축이나, 가칠단청에 그친 종묘 같은 국가의 핵심 건축물보다도 전국 각 지방의 유명 사찰들이 더 화려하고 정교한 금단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인사 대적광전의 단청은 오히려 경복궁, 창덕궁보다 더 색채가 화려하다. 비록 불교 교세가 줄어 건축의 규모는 조선 이전에 비해 줄었지만 유교적 기조에서 비교적 벗어난 불교 건축물이란 특성 덕에 오히려 왕실건축보다 더욱 화려한 것이 허용된, 세계적으로 특이한 사례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단청색조는 건물 내외의 장식에 따라 외부단청을 밝은 색 계통의 등황색을 현저하게 증가시켜 장식의 명도를 높였고, 내부단청은 광선의 명도가 외부의 단청보다 낮은 것을 고려하여 주로 녹청색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이 시기 들어와 단청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고 변화하였는데 단청의 단위 무늬의 구성과 장식구성이 매우 복잡해지고 다채로운 색조의 대비가 화려하게 된 점이다. 다시 말하면, 무늬의 구성형식이 세밀해지고 색조가 매우 표현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건물에 금속 장식등이 사라진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단청 중에서도 옻 단청이나 고분법[8] 등 사치스러운 모습은 사라졌다. 그래도 근근히 이어져서 청평사 극락전에는 한국 유일의 옻 단청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사라졌다. 일본인 고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송광사의 국보인 국사전 실내 천장이 검은 옻칠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한의 건축문화'란 책에 실었었다. 실제로 국사전 천장은 검으며, 세종 시기에 일시적으로 단청이 금지되기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는 단청이다.

사실 성종-연산대의 간신 임사홍의 자택은 단청을 그렸으며 중종대의 대신 송일 역시 새로 지은 집에 단청을 그리는 등 사치했다는 이유로 사직하려 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권신 김안로의 집에서도 단청을 그렸다는 얘기가 있다. 한마디로 부유하고 권세가 높은 집안에서는 단청을 그리기도 했다는 말. 다만 이럴경우 사치를 했다는 이유로 좀 많이 까였고 명종대 장악원 정 김규가 단청을 비롯한 사치를 부리고 뇌물 등을 받은 죄로 탄핵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가면 서원의 단청 사치가 문제였던 듯하다. 영조 14년(1738) 병조판서 박문수의 상소에서는 서원을 지을때 '크게 서원을 창건하여 단청을 찬란하게 꾸민다'며 사치스러운 서원을 비판하기도 했다.


3.5. 현대[편집]


기본적으로는 조선시대 단청을 바탕으로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시기에 따라서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인 숭례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자세한 기사

문화재가 아닌 현대에 새로 짓는 전통 건축물 중에서는 더 이상 조선시대 처럼 제도적인 제약이 없기 때문에 굳이 조선시대 스타일 단청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도 많으며 건물 전체를 개금, 그러니까 금칠(金漆)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도봉산 능원사 서울 은평구 수국사 이런 금칠 단청을 마냥 돈지랄로만 볼 수는 없다. 생각보다 실용적인 효과도 있다. 전통 방식으로 단청을 칠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 세월이 지나면 색이 바래서 다시 칠하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금은 거의 화학적으로 부식되지 않으므로 건물에 금을 덮으면 관리비용이 오히려 적게 들어서 개금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욱 돈을 아낄 수 있다. 그리고 얼핏 보면 금을 어마어마하게 쓰는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금을 아주 얇게 펴는 방식이라 '보기보다는' 금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또한 하나의 문화양식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에 새롭게 만든 건축물이 세월이 흘러 미래에 새로운 문화재로 지정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역사학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고대 건축을 복원한답시고 하기만 하면 일단 무조건 조선시대 단청을 그려놔서 조선시대 건축물로 만든다고 까인다. 고려시대 이전의 건축물에까지 조선식 단청을 입히는 복원방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전하다. 이러한 부분은 조선시대 이전 단청에 대한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색상, 염료 재작, 단청 기법 등의 상세한 복원에 난관이 많아 그나마 자료가 많은 조선시대 방식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복원이 불가능한 단청을 안 하는 선택지도 있지만 미관상 문제나 목재 건물의 방충, 내구성 문제 등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것이다.

반면 단청 전문가들도 이게 틀린 방식인 줄은 알지만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해 가장 인지도 있는 한국 단청인 조선시대 양식 단청을 칠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어 주칠단청 처럼 빨간 기둥과 하얀 벽으로 칠하고 금으로 장식하는 양식은 과거 한중일 모두 사용했던 방식이지만 잘 모르는 현대인들은 주칠단청으로 만든 한옥을 보고 왜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칠단정 인지도가 늘어나면 해결될 문제라고 기대해 봄 직하다. 참고

항상 재현 오류 논란이 따라다니는 연애사극, 퓨전사극 드라마들은 반대로 보면 새로운 양식의 시험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완벽한 재현은 아니었더라도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붉은색 주칠단청을 적용한 한옥을 보여주었다.


4. 해외[편집]



4.1. 중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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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단청. 초록색이 많이 쓰이는 조선의 단청과 달리 파랑색이 많이 쓰였다.


4.2. 일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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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사의 카미나리몬. 백제의 영향을 받아 하얀색과 빨간색의 주칠단청이 사용되었다.


4.3. 몽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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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드 칸 겨울궁전의 모습


4.4. 러시아[편집]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건축에서도 단청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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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도 단丹은 주사를 뜻하고 청靑은 주례에 따르면 남동석(Cu3(OH)2(CO3)2)을 뜻하는 것 같다.[2] 다만 새가 둥지를 트거나 새똥은 막지 못해 그물(부시)을 치거나 오지창이란 뾰족한 철심을 심기도 했다.[3] 위에서 언급했듯 정말 금(金)으로 칠한 단청도 있다. 불교에서 금은 변하지 않는 불심을 상징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의미가 크다.[출처1] 삼국시대 단청 복원 모델 백제편, 고구려도 있다.[4] 천장 등에 쓰이는 목판[5] 흰색이지만, 천연물감이라 일반적인 백색보다 덜 희다[출처2] 통일신라 단청 복원 모델[출처3] 시대별 고려단청의 변화 모델[6] 종가, 양반가 사당 중에선 단청이 남아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7] 광물질(무기염류) 색감, 매우 진하고 불투명한 채색. 조선 후기 민화가 널리 퍼지면서 진채로 그린 그림이 많아졌고 양반화가로 널리 알려진 공재 윤두서도 진채로 그린 그림이 남아있다.[8] 금단청의 기법 중 하나로, 금가루 등을 섞어 무늬를 도드라지게 하여 입체감을 주는 단청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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