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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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계
친김영삼계 | YS계

형성
1971년
해체
1998년 ~ 1999년[1]
수장
김영삼
주요 정치인
김동영
최형우
서석재
김덕룡
서청원
박관용
김명윤
김무성
강삼재
정병국
김영춘
조원진
이성헌


1. 개요
2. 명칭의 유래
3. 활동
4. 구성
5. 동교동계와의 관계
6. 주요 인사[2]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김영삼 前 대통령의 직계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표현이며, 한국 보수정당 온건~개혁보수의 시초격 계파이자[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절 관련됐던 계파이기도 할 정도로 현재 좌우를 가리지 않고 발이 넓게 걸쳐진 정치세력이다.


2. 명칭의 유래[편집]


김영삼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거주하여 1980년대의 언론들은 김영삼의 측근들에게 상도동계라는 표현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김영삼의 라이벌이자 동지인 김대중은 아주 잠시 일산신도시에 거주한 기간을 제외하면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에 거주하여 김대중의 측근들은 언론에서 동교동계로 불렀다.

김영삼은 1950년대 정치에 입문해서 1970년대부터는 민주화를 외치는 야당의 중진의원이자 대통령 후보급으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김영삼계 혹은 김영삼의 호를 따서 거산(巨山)계라고 했지 상도동계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았다. 경쟁관계인 동교동계 역시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는 김대중계 혹은 김대중의 호를 따라서 후광계라고 했지 동교동계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았다.

상도동계 혹은 동교동계라는 표현은 1980년 신군부(하나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김영삼, 김대중과 그 직계 정치인들을 모조리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로 묶어서 제도정치권에서 추방하고 신민당마저도 없애버리면서 생겨난 신조어이다. 졸지에 둥지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재야 세력들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섰는데 독재정권의 언론통제에 묶여서 김영삼, 김대중의 이름을 언론에서 직접적으로 쓰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언론사들이 이리저리 돌려서 쓰다가[4] 각자의 서울시 내 자택 소재지에서 따온 상도동계, 동교동계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참고로 이런 거주지+계 명칭은 임시방편이고 직관적이지도 않아서였는지, 신군부 퇴진 이후 등장한 정치세력들은 친노, 친문, 친이, 친박, 친홍, 친유, 친무, 친황, 친윤 등과 같이 +중심적 인물의 성씨나 이름의 특정 글자를 붙여 언론에서 짓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5] 계파를 일컫는 '계'라는 용어도 여전히 사용되나 신군부 이전처럼 손학규계, 이재명계 등 중심 인물의 성명+계의 형태로 회귀했다.


3. 활동[편집]


이들은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 일치단결해서 김영삼의 집권과 민주화를 위해 뛰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집권당으로 변신한 이후에도 이들은 변함없이 김영삼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해서, 민주자유당 내에서 소수파의 한계를 딛고[6]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다.

다만 김영삼 대통령이 임기 막판 외환위기로 한국갤럽 기준 5%라는 지지율[7]로 퇴임할만큼 인기가 떨어지자 단일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상도동계는 와해되고, 이후 구성원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흩어져 상도동계는 이때부터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다.

그래서 상도동계의 후신들은 개인의 판단에 따라 여러 선택지를 가지게 되는데, 원로들은 나이도 찬만큼 정계에서 은퇴했고 남은 사람들 중 다수는 이후 친이계에 흡수되었지만, 일부는 민주당계 정당쪽으로 당적을 옮기기도 했고[8][9] 극히 일부는 친박으로 이동하기도 했다.[10] 덕분에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도 김영삼 대통령 및 상도동계 출신들이 한나라당의 막후에서 끼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상당했으나, 세월이 지나 김영삼과 매우 껄끄러운 관계인 박근혜의 계파 친박이 2012년부터 보수계 정당을 장악하기 시작해 2017년 탄핵 때까지 이질감이 강해지기도 했었다.

역으로 민주당계 정당은 김대중 시대까지는 상도동계와 물과 기름처럼 거리가 있었지만, 2010년대 들어 민주당 주류가 된 친노, 친문과 상도동계는 노무현이 김영삼에 의해 발탁됐다는 점이나 PK 연고 계파라는 공통점이 있고 동교동계도 상도동계와 화해해서 이젠 그냥저냥 지내고 있다. 애초에 세월이 많이 흘러서 상도동계라는 정치 세력은 사실상 이미 해체된 상태기도 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수준.


4. 구성[편집]


상도동계의 수장은 김영삼이고 '좌동영 우형우'로 불린 김동영(1936년생, 1991년 사망)과 최형우(1935년생)가 서열 2위였다. 그 다음으로 서석재(1935년생, 2009년 사망), 신상우(1937년생, 2012년 사망), 정재문(1936년생), 김정수(1937년생), 박관용(1938년생), 김덕룡(1941년생), 문정수(1939년생), 강삼재(1952년생),[11], 김명윤(1924년생, 2016년 사망) 등이 중진 취급이었다. 안경률(1948년생), 김무성(1951년생), 이진복(1957년생), 정병국(1958년생), 박재호(1959년생)의 경우 상도동계에서 연령이 낮은 세대에 속하고 막내는 김영춘(1962년생), 김태호(1962년생)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상도동계의 대다수는 전라북도 출신 김덕룡, 경상북도 출신 유성환, 강원도 출신 김명윤, 경기도 출신 최기선 등 일부를 제외하면 김영삼과 같은 경상남도 출신들이 많았다. 상도동계의 중진으로 언급되는 이들을 보면 김동영거창군, 최형우울산광역시, 서석재강삼재창원시로 군사정권 시기부터 경상남도를 본거지로 활발히 활동하고, 제5공화국 시기에 가면 상도동계가 야당에서 부산광역시경상남도를 사실상 독점하게 된다. 반대로 전라북도전라남도동교동계가 독점한다. 문제는 3당 합당으로 상도동계가 보수 세력에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경상남도는 민주계 세력이 사실상 사라지는 상황이 초래된다.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은 애초에 상도동계가 아니다. 이기택은 1960년대부터 야당에서 활동한 중진급으로 김영삼의 수하는 아니었고(수평적 관계), 노무현은 김영삼의 추천과 상도동계의 조직력으로 국회의원이 되긴 했지만 상도동계보다는 YS가 데려온 재야 진보세력에 가까웠다. 김정길도 야당 시절부터 상도동계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12] 전라북도에서 태어나서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김덕룡전라남도에서 태어난 이성헌만 호남 출신이다.

상도동계는 3당합당 이후 거의 대부분이 민주자유당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김영삼과 친분이 생겨 14대 대선의 민자당 경선 때 김영삼을 지지한 일부 민정계, 공화계 정치인들과 신한국당 잔류파 민정계, 공화계 정치인들을 상도동계의 별칭인 민주계에서 따와 신민주계라고 하기도 한다. 신박과 비슷한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정원식, 김형오, 강재섭, 이상득[13], 최병렬, 박희태, 박창달, 김기춘, 김윤환 등이 속했다. 상도동계의 첫 단독 정당이 통일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김영삼 대선 경선 승리의 '킹메이커' 역할을 한 셈.[14]

이름을 올리는 민정/공화계 출신 신민주계 의원으로는 문민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황인성, 양정규, 변정일, 현경대, 하순봉, 김영일, 문민정부에서 정무제1장관을 역임한 김영구, 신경식, 박우병, 김기배, 문민정부에서 재정경제원장관을 역임한 나웅배, 이자헌, 박명환, 박주천, 유흥수, 김진재, 남평우, 이한동, 김종호,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이해구, 서정화, 이세기, 이웅희, 정동성, 김인영, 오세응, 이만섭, 김영광, 문민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한 서상목, 이성호, 전용원, 곽정출, 이승윤, 이상희, 정창화, 박세직, 권익현, 이춘구, 서정화, 김중위, 이민섭, 김일윤, 문민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과 재정경제원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한승수, 문민정부에서 관선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함종한, 김종하, 나오연, 김태호, 이강두, 강용식,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용태, 문민정부에서 재정경제원장관을 역임한 강경식, 정재철, 이택석, 전석홍, 최재구, 장영철, 박명근, 박범진, 정영훈, 문민정부에서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정시채, 조영장, 양창식,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장관을 역임한 김한규, 남재두, 이영문,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차관을 역임한 윤한도, 이상배, 김명섭, 이재환, 이상재, 박경석, 김효영, 지연태, 이응선, 최돈웅, 최각규, 강성재, 권정달, 김길홍, 조진형, 성무용, 이환의, 문민정부에서 환경부장관을 역임한 강현욱, 고명승, 박시균, 유용태, 김식, 조남조, 민태구, 김용호, 이진삼, 손주환, 김영진, 박성범, 이윤성, 윤원중,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장관을 지낸 최창윤, 황윤기, 이국헌, 이상현, 박승웅, 김허남, 김사성, 구본태, 이사철 등이 있다.[15][16]

한편 상도동 직계로 분류되진 않지만 15대 총선을 기해 김영삼이 정계로 끌어들이며 그의 밑으로 들어와 정치인으로 입문한 사람들은 YS키즈 라고 불린다. 손학규, 이재오, 김문수, 차명진, 이우재, 이인제, 이회창, 이명박,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 이방호, 정의화, 정태윤, 강인섭, 현승일, 심재철, 박형준, 이성권, 전 인천시장 안상수, 이병석, 임인배, 박진, 권철현, 맹형규, 김혁규, 김선동, 김영선 등이 대표적이다.[17] 이들은 김영삼의 당에 그대로 남았던 사람이 대부분이라 대다수는 신한국당~한나라당 당적을 가졌다.

노무현과 그의 보좌관 출신인 안희정, 이광재는 엄밀히 따지면 YS키즈이긴 하나 친노라는 독자 세력화 되어서 그런지 YS키즈라고 잘 부르진 않는 편인데, 이들은 민주자유당 합류 거부 후, 꼬마민주당을 거쳐 김대중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재인의 경우는 김영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그가 친노의 직계로 분류되고 특히 김영삼과 동향인 거제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연관성이 없다고도 할 수는 없다. 홍사덕 역시 통일민주당 시절 범 상도동계에 속하긴 했지만 13대 대선 후보 단일화가 되지 않자 탈당하였기에 YS키즈라 불리기엔 다소 애매한 면이 있다.

원외로 확대하면 방송계에서는 이명박 정부 방송통신위원장이었던 최시중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되며 이득렬 전 MBC 사장, 홍두표 전 KBS 사장도 한 때 범신민주계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국갤럽 창업주인 박무익도 범민주계로 볼 수 있고, 현재 리얼미터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는 이택수도 신한국당에 몸을 담고 있었으므로 범민주계라고 볼 수 있다. 한샘학원 설립자인 서한샘 전 의원도 범상도동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이헌 전 의원도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재계에서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현대백화점의 정장현 전 의원이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정형근 전 의원도 범신민주계로 분류되며, 그 외 원내의 노승우 전 의원, 허재홍 전 의원, 백남치 전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김봉조 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김동욱 전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정재문 전 의원, 김찬우 전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홍재형 전 국회부의장, 김철 전 의원, 조웅규 전 의원, 송두호 전 의원, 조홍래 전 정무수석, 김남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문준식 전 의원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윤석민 전 의원, 김찬진 전 의원, 이종률 전 국회사무총장, 이동호 전 내무부장관, 이호정 전 의원, 염홍철 전 대전광역시장 역시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

문민정부 시대 국무위원 중에서는 이영덕 전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병태 전 국방부장관, 이경식 전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 정재석 전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 유종하 전 외무부장관, 권오기 전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후에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지내는 김인호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박재윤 전 통상산업부 장관, 김두희 전 법무부장관, 안우만 전 법무부장관, 김종구 전 법무부장관, 최상엽 전 법무부장관, 김동진 전 국방부장관, 조해녕 전 내무부장관이 범 신민주계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 강운태 전 내무부장관, 최동규 전 한국수자원공사 이사장, 권영해, 김덕 등 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포함된다. 박상범 전 국가보훈처장 역시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 그 외에는 오명 KAIST 이사장,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 박일용[18] 전 경찰청장과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강만수 전 재정경제원차관이 있으며, 특이사항으로 배우 출신의 강신성일 전 의원도 김영삼에게 영입되었다. 김광석대통령경호실장박세일사회수석비서관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전병민 전 청와대 정책수석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책사이므로 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윤석열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에 재임하고 있는 국민의힘 박진 의원도 김영삼 정부 시절에 대통령비서실 비서관을 지냈으므로 범민주계로 볼 수 있다.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조만후 전 정무제1차관, 이경재 전 공보처 차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금융정책실장 역시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그 외에도 김길환 전 의원, 신우재 전 청와대 공보수석, 김충남 전 공보2비서관, 현재 국민의힘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는 김희곤 전 청와대 행정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정책실장을 역임하고 한나라당 -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지내는 윤진식 전 대통령비서실 조세금융비서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위원장을 역임하는 김석동 전 재정경제원 금융실명제대책반장,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박재완대통령비서실 서기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하는 박태호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실 파견,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과 윤석열 정부에서 국민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하는 정용화 전 대통령 자문 21세기 위원회 상근 연구원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검찰 쪽에서는 후에 신한국당 -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내는 김도언 전 검찰총장[19]이 대표적인 케이스고, 후에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박종철 전 검찰총장, 김기수 전 검찰총장, 정경식[20] 전 헌법재판관, 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내는 최병국 전 대검찰청 중수부장, 안강민 전 대검찰청 형사부장, 최환 전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정진규 전 법무연수원장, 김재기 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이 범신민주계, 범상도동계로 분류되고 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될 당시에 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이명박 정부 초대 민정수석 이종찬송찬엽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도 범민주계로 볼 수 있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파견되어 근무를 한 이승구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배재욱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도 범상도동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최재경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김영삼 정부 말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파견되어 근무했으므로 범민주계로 분류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에 법무부에서 근무한 남기춘 전 서울서부지방검찰청 검사장과 신경식 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정동기 전 대검찰청 차장 겸 이명박 정부 민정수석비서관, 권영세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이자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겸 윤석열 정부 통일부장관, 권성동 전 인천지방검찰청 특수부장 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범민주계로 볼 수 있다.


5. 동교동계와의 관계[편집]


군사독재 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이후까지 정말 오랜 기간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던 동교동계와는 그야말로 애증(愛憎)의 관계였다. 두 세력은 독재정권 시기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으나,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양김씨가 야권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이후로는 십수여년간 서로 철천지 원수마냥 싸우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양쪽 다 서로 모시던 보스가 각자 대통령도 한 번씩 한 다음에 세상을 떠났고, 애초에 권력 다툼의 성격상 싸운거지 사상적 동질감은 이전부터 제법 있던 계파였기에 이제는 다들 정계 은퇴할만큼 나이도 먹었겠다 그냥저냥 모여서 잡담친목회도 하는 등 무난하게 지내고 있다. 젊은 시절 목숨 걸고 투쟁한 역사가 있는만큼 죽기 전까지 서로 추억거리나 할 말도 많을듯.


6. 주요 인사[21][편집]


  • 김동영: 김영삼의 왼팔로 아래의 최형우와 함께 좌동영, 우형우로 불렸다. 1991년 간암으로 작고. 정무제1장관을 노태우 정부 시기에 지냈다. 김동영 장관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서 장관직은 최형우 의원이 승계.
  • 최형우: 상도동계의 좌장. 김영삼의 오른팔. 정무제1장관을 노태우 정부 시기에 지냈다. 김동영 장관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서 장관직은 최형우 의원이 승계. 이후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97년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이후 정계를 떠났다.
  • 서석재: 前 총무처 장관. YS가 통일민주당 총재를 지내던 시절에는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고, 문민정부 시기에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전직 대통령 4000억 비자금설을 언론에 흘렸고, 민정계의 반발 끝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 김재광
  • 김명윤
  • 김수한: 제 15대 국회 전반기 의장. 현재 국민의힘 상임고문 중 신영균과 함께 최연장자이며, 상임고문단 단장을 맡고 있다. 아들인 김성동 前 의원도 국민의힘 소속이다.
  • 김덕룡: 문민정부 시기 정무제1장관을 두 번 역임. 2004년 이래로 민추협 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와 문재인 정부가 생기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 서청원: 상도동계 출신 친박 맏형[22]이란 특이한 경력을 지내고 있는 인물. 문민정부 시절에 김덕룡의 후임 정무제1장관이었고, 이후 2002년에 한나라당 대표, 2008~2012년에 친박연대 대표를 지냈다. 20대 국회 기준 최다선(8선) 의원. 허나 친박으로의 이적 때문에 현재는 상도동계 후배들인 정병국, 김무성, 김영춘, 박재호 등의 인물들이 모두 서청원을 상도동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사실상 상도동계에서 제명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김영삼 대통령 서거 2주기 때 현역 상도동계 인물들은 행사 내내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서청원은 행사 30분 전에 미리 가서 짤막하게 인사하고 바로 갔다.
  • 강삼재: 상도동계 중에서는 김무성과 비슷한 연령대로 연령대는 젊은 편이었지만 정치 경력이 길어서인지 의외로 상도동계에서 중간 정도의 서열에 위치한 편이었다. 문민정부 시절에 민주자유당신한국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문재인의 대학시절 친구로, 김영춘과 더불어 몇몇 상도동계 정치인들이 문재인을 지지하게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 이원종
  • 김정수
  • 황낙주: 제 14대 국회 후반기 의장.
  • 박관용: 제 16대 국회 후반기 의장. 문민정부 시절에는 대통령비서실장과 정치특보를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발의될 당시 국회의장이었다.
  • 박종웅: 3선 국회의원으로, 16대 국회 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역임. 김영삼 대통령 퇴임 이후에는 YS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 문정수: 前 부산광역시장
  • 김무성: 2010년대 중반 새누리당 당대표이자 옥새런 사건을 일으킨 그 김무성 맞다. 상도동계 막내급일 당시에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정치인 비슷한 이미지였고 김영삼을 꽤나 가까이서 보좌했다. 다만 2000년대에는 서청원과 더불어 상도동계에서 친박으로 넘어간 드문 케이스라 이쪽에선 욕도 많이 먹었는데[23], 김무성이 친박으로 간 것은 자의반 타의반(?)이었고, 결과적으론 몇년 있다 사이가 틀어져 범친이로 분류되다 2010년대엔 비박계 대표 인사 중 한명이 되어 박근혜 탄핵 당시에도 반대편에서 활동했기에 끝까지 친박으로 남은 서청원만큼 비토를 받진 않았다.
  • 최기선: 前 인천광역시장. 김영춘, 박재호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당 탈당 이후 잠시 자유민주연합(...)에서 머물다가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이 직후에는 민주당계 정당에 계속 잔류했으며, 이후 2018년 2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 안경률
  • 이성헌
  • 이종혁
  • 이진복: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문민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동래구청장, 3선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는 윤석열 정부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하고 있다.
  • 정병국: 원조 소장파인 남원정의 일원이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 이명박을 지지해 친이계가 되었다.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으며, 2011년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친이계 중진이며, 유승민과 같이 바른정당 - 바른미래당 - 새로운보수당을 같이 이끈 친유계 중진에 속한다. 바른정당 초대 대표를 지냈으며, 바른미래당을 창당할 때는 동교동계 소속인 박주선, 이동섭과 협력하기도 했다. 같은 상도동계 출신인 손학규가 바른미래당 대표를 하는 시절 손학규 대표의 실책에 대해서도 일단 기다려보자고 했으나, 손학규 대표의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자, 직접적으로 손학규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사실상 친유계와 친안계의 편을 들었다.[24] 바른미래당바른정당 출신들이 탈당하여 만든 새로운보수당자유한국당과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는 국민의힘 청년정치학교의 교장이다.
  • 김영춘: 지속적으로 상도동계의 막내로 언급되었고, 김영삼도 실제로 상당히 김영춘을 총애하고 아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당시의 상도동계 직계로써는 드물게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동참했다. 당시 김영삼이 직접 불러서 뭐하러 힘들게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하냐고 묻자 "이 당민주정의당처럼 변하는데 제가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계속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2017년 6월 문재인 정부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 김태호: 상도동계의 막내로, 상단에서 언급된 김동영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경남지사를 역임했고 현재 국민의힘 소속 3선 국회의원이다.
  • 박재호: 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 소속이었다가 새정치국민회의로 이적했고, 현재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 노병구
  • 조원진
  • 심완구
  • 이원복
  • 이재근
  • 정재문
  • 홍인길
  • 황병태


7. 관련 문서[편집]


  • 김영삼
  • 동교동계 - 87년 갈라선 이후 90년대 정계를 좌지우지하던 라이벌로 유명했으나 양쪽이 모두 정계에서 은퇴한 지금은 서로 화해한 상태로 알려져있다. 일부는 더불어민주당 혹은 바른미래당으로 들어가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
  • 청구동계 - 사실 김종필이 대통령이 못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상도동계, 동교동계만큼의 영향력을 가지진 못했다. 그래도 나름 한가닥하는 계파였지만, 김영삼과 김종필의 악연으로 90년대 보수정당을 장악한 상도동계에 밀려 당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 친이 - 김영삼이 이명박을 정치인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며, 이명박을 밀어준 사람이기도 한데다 김덕룡[25], 안경률, 정병국, 김현철 등 이명박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김영삼 세력이기도 했으며, 17대 대선 당시에는 대부분의 상도동계 직계들이[26] 이명박을 지지했다.[27] 김영삼도 직접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을 정도로 상당히 연관이 깊은 사이다.[28]
  • 친무 - 상도동계 소장파 김무성을 따르던 계파로, 박관용의 비서였던 또 다른 상도동계 소장파 이진복 또한 친무로 분류되었다.
  • 친윤 - 워낙 시간 간격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직접적인 접점은 덜하지만, 윤석열도 YS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도 2022년 대선에선 윤석열 지지 선언을 했으며, 김현철의 아들이자 김영삼의 손자인 김인규 또한 친윤 중진 권영세 통일부장관의 국회의원실 비서로 일했다.[29] 또 상도동계 소장파, 막내인 이진복김태호도 친윤 중진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특히 이진복은 윤석열 정부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 친노 - 김영삼이 노무현을 처음 정계에 픽업한 장본인이라, 노무현의 정치행적은 동교동계와도 관련이 깊으면서 오히려 뿌리는 상도동계와도 연관이 있는 복합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다. 퓨전 실제로 고향 또한 김영삼, 노무현, 더 나아가 문재인까지 모두 PK 출신이며[30] 안희정의 경우에도 정계 입문은 김영삼 밑에서 했다. 덕분에 친노에서 이어지는 친문을 지지하는 상도동계 인사들도 일부 있었다.
  • 친박 - 김영삼이 박근혜와 박정희를 직접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인지 서로 사이가 좋다고 볼 순 없다. 다만 서청원처럼 친박에 편입된 케이스도 소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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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년 외환위기로 문민정부가 휘청이면서 구심점이 사라진 상도동계는 와해되기 시작하고, 이후 이회창계, 친이계, 이인제계, 손학규계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내용 참고.[2] YS키즈를 제외한 상도동계 직계.[3] 상도동계에서 2000년대 YS키즈 이명박의 친이가 이어졌고, 친이가 쇠락해 비박계가 된 2010년대에는, 한동안 친박 루트를 탔지만 사이가 틀어지다 비박의 한 축이 된 김무성이 이끄는 친무와도 연합해, 둘 다 주요 인물들이 상도동계에 속하거나 이어진 인물들에 해당된다. 또 이때 소장파들 다수가 친윤으로 이어져 2020년대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친박으로 대표되는 강성파들이 몰락한 모양새. 그래서인지 이젠 계파상으론 온건파들끼리도 열심히 싸우고 있다.[4] YS, DJ, JP처럼 이름의 이니셜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당시 이들의 이름이 언론에 언급되는 것조차 기피하던 대머리 각하의 심기를 헤아려 이니셜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5] 다만 이에 대해 외국처럼 연속성이 있는 이름이나 이념, 사상 등을 나타내는 계파명도 아니고, 단순히 한 인물과의 친함 정도를 따져 계파명을 따진다는 것부터가 한국 언론들의 수준 낮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6] 당시 민자당은 군부 세력 중심의 민정계가 최대 계파였고, 김영삼이 이끄는 민주계는 2번째였다. 이런 와중에 김영삼은 차기대권주자로서의 기대감과 본인의 역량을 활용해 이른바 신민주계 인사들을 대거 양성해 기어코 당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7] 훗날인 2016년 박근혜가 4%를 찍고 탄핵되기 전까진 역대 최악의 지지율이었다.[8] 계파적으로는 아무래도 동교동계보단 친노계에 분포하는 비율이 높았다.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박재호, 김영춘 등이 대표적.[9] 참고로 동교동계 역시 2000년대 들어 일부는(DJ와 노무현은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았다) 열린우리당 분당, 노무현 탄핵사건 등으로 친노계와 갈등을 겪다 민주 진영에서 주도권을 점차 상실하였고, 2010년대 들어선 연령상 다수는 정계를 은퇴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자유한국당 등으로 분산되기에 이른다.[10] 서청원, 김무성이 대표적인 예. 다만 김무성은 이후 친박과 사이가 틀어져 비박이 된다.[11] 강삼재는 나이에 비해서 상도동계에서 서열은 높았다. 1981년에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12] 1990년 3당 합당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부산, 경남 지역에서 민주당계 정당 후보들의 득표력은 잘해야 10%대 초중반이었다.(참고로 부산 인구의 대략 10% 정도가 호남 출신으로 추정되며, 김대중의 1987년 대선 부산 지역 득표율이 15%였다.) 2000년대 이후 30~40%대까지 올라온 것은 바로 부산지역 486들과 시민운동가들이 친노 간판을 쓴 것과 민주노총과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노동운동 덕분에 진보정당/민주당계 정당으로 노동자 계급표가 결집하면서부터다. 그리고 민주당계 정당이 영남 공략을 위해서 나름 공을 들인 점과 한나라당이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점도 있었다.[13] 이명박의 둘째 형 이상득이 맞다.[14] 반면 김종필, 김복동, 박철언, 박태준 등은 김영삼을 직접 밀지 않거나 심지어 비토하다가 자유민주연합으로 행한다. 다만 김종필은 초반에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김영삼과 사이가 틀어진 경우에 속한다. 김복동의 경우 김영삼은 그를 나쁘지 않게 봤으나 본인이 YS를 꺼려 통일국민당과 신민당을 거쳐 자민련으로 향했다. 반면 박철언과 박태준은 김영삼과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새한국당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로 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경우도 있다.[15] 여기서 경남 거제 출신의 김기춘을 제외하면 핵심은 대부분 TK 출신들이다. 김기춘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들은 92년 대선 기간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우리가 남이가"식의 영남 지역주의, 패권주의 의식을 대놓고 보여주었다. 물론 하순봉, 김영일, 신경식, 유흥수, 김진재, 이상희, 권익현, 강경식, 이강두, 나오연, 곽정출 같이 PK 출신도 제법 있었다.[16] 하나회 숙청으로 유명한 김영삼이지만 살아남은 이들도 있다. 권익현, 이춘구, 박세직, 고명승은 하나회 멤버였으며, 아예 고명승은 12.12 가담자였음에도 면죄받았다. 이상재는 언론통폐합과 K공작을 주도했던 보안사 출신의 민정계 실세였으며, 권정달 또한 신군부에 속했다. 강용식, 박성범은 땡전뉴스를 제작했다. 이사철도 군사정권 시절의 공안검사 출신이었다. 육군 제2작전사령관 출신인 박세환 전 재향군인회장도 범 신민주계로 분류될 수가 있다.[17] 다만, 이회창은 YS가 차기로 키우려고 했는지 국무총리까지 시켰으나, YS 정권 말 IMF가 터지자 YS 뒤통수를 치고 YS 인형 화형식(...)까지 저지르는 등 사이가 극악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YS 사후 이회창이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도 했다.[18] 초원복집 사건 당시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참석[19] 역대 검찰총장 중 검찰총장에서 퇴임한 후 특정 정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까지 된 경우는 김도언이 유일하다. 대통령까지 된 경우도 있다[20] 초원복집 사건 당시 부산지검장으로 참석[21] YS키즈를 제외한 상도동계 직계.[22] 박근혜 정부 당시 친박 좌장은 최경환이었다. 물론 서청원도 맏형격으로 좌장급 위상을 자랑하긴 했다.[23] 특히 YS의 차남 김현철은 대놓고 여러 차례 깔 정도였다. 다만 YS 서거 이후 장례식장에선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24] 이게 사실 당내에서 파란이 안 클 수가 없는 것이, 정병국 의원은 바른미래당 내에서 최다선 의원이다. 심지어 당의 두 축 중 하나인 유승민 전 대표도 정병국 의원보다 의원 선수가 적다는 뜻.[25] 특히 김덕룡의 경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 최시중과 더불어 친이 6인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26] 예외적으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다.[27] 상도동계의 수장인 김영삼이 처음부터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던 만큼 이 영향도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 일부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동한 인사들을 빼고는 대부분의 상도동계들이 이명박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28] 물론 친박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김덕룡과 김현철 등은 18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하기도 했다.[29] 이전엔 정병국, 문희상 의원 밑에서도 일했다.[30] 문재인 역시 노무현처럼 3당 합당 이전에 김영삼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땐 거절한 바 있다.